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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金)나라의 고급 핵심관원 합의제 「국론발극렬제도(國論勃極烈制度)」

쥐눈이 2024. 11. 21. 06:00

유기백과(위키백과) 중문판에 나온 발극렬(勃極烈)을 소개한다

*  (金) 태조(太祖)인 완안(完顏) 아골타(阿骨打)의 초상

 

발극렬(勃極烈, 여진어(女眞語)...IPA/bə(g)i lə/제도중국대백과전서(中國大百科全書) 3판 웹 버전에는 국론발극렬제도(國論勃極烈制度)라고 써있다.

이는 금() 태조(太祖)인 완안(完顏) 아골타(阿骨打)가 세운 군국대사참의제도(軍國大事參議制度)이다. 1115723수국(收國) 원년 7월 초하루, 수국은 금 태조의 첫 번째 연호, 사용 기간 11151116, () 태조 완안 아골타(完顏阿骨打)가 암반(諳班), 국론(國論), 아매(阿買), 호발극렬(昊勃極烈)을 설치하고 나서 다시 같은 해 1016927에 국론 발극렬(國論勃極烈)을 고쳐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을 만들고 을실발극렬(乙室勃極烈)을 두었으니 이로부터 금조(金朝)에 구체적으로 일을 나눈 발극렬 제도가 형성되었다. 발극렬(勃極烈) 회의는 금조(金朝)의 정치, 경제, 외교, 사법, 군사 등 사무적인 방침과 정책을 제정하는 책임을 졌고 아울러 각 발극렬(勃極烈)이 각각 일을 집행하고 처리하였으니 결정기관, 집행기관과 군사기관의 기능을 함께 갖추었다. () 희종(熙宗)인 완안 단(完顏亶)이 임금의 지위를 계승한 뒤에 한화(漢化)한 관제를 제정하였다. 뒤이어 1136417천회(天會) 14315, 태보 완안 종한(太保完顏宗翰), 태사 완안 종반(太師完顏宗磐), 태부 완안 종간(太傅完顏宗幹)이 아울러 삼성(三省, 상서성 문하성 중서성) 일을 이끌었으니 이로부터 발극렬(勃極烈) 제도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연혁

설치와 기능

금사(金史) 기록에 근거하자면, 1115723수국(收國) 원년 7월 초하루, () 태조 완안 아골타(完顏阿骨打)가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 국론발극렬(國論勃極烈), 아매발극렬(阿買勃極烈), 호발극렬(昊勃極烈)을 설치하고 나서 다시 같은 해 1016927, 국론발극렬(國論勃極烈)를 고쳐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로 만들고 을실발극렬을 설치하였다. 금조(金朝)가 세워진 초기에 모두 아래 다섯 개의 발극렬이 있었다.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 또는 諳版勃極烈로도 씀)황제의 저군(儲君, 곧 계승자)이자 여러 발극렬(勃極烈)의 우두머리이니 군정(軍政)의 대권을 장악하고 황제가 정벌을 나갔을 때 나라를 살폈다.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 또는 胡魯勃極烈로도 씀)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 아랫자리를 차지하고 여러 발극렬(勃極烈)과 함께 참여하여 군국(軍國)의 큰일을 결정하였다. 안팎 여러 군(諸軍)의 도통(都統)이 되었다.

아사발극렬(阿舍勃極烈, () 소조(昭祖)의 손자 완안 사부실(完顏辭不失)이 이 직을 맡았을 때 아매발극렬(阿買勃極烈)이라 불렀다)여러 발극렬(勃極烈)에서 제 3위를 차지하여 군국(軍國)의 큰 일에 참여하며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의 받침대 노릇을 하였다.

호발극렬(昊勃極烈, 또는 昃勃極烈)무관(武官)으로 군대의 정벌 전쟁, 반란 평정, 치안 유지를 하였으며 동시에 여러 발극렬(勃極烈)과 함께 군국(軍國)의 큰일에 참여하여 의논하였다.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 () 경조(景祖)의 아들 완안 아리합만(完顏阿離合懣)이 이 직을 맡았을 때는 을실발극렬(乙室勃極烈)이라 불렀다)외교 사무를 처리하고 군국의 큰 일에 참여하여 의론하였으며 군대를 통솔하였다.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과 본래 國論이라는 앞 가지를 가진 국론발극렬(國論勃極烈,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의 별명임을 제외하면 위에 발극렬(勃極烈) 직은 실제로 똑같이 國論이라는 앞 가지를 붙였다.예컨대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의 온전한 이름은 국론홀로발극렬(國論忽魯勃極烈)이 된다

국론(國論)이라는 말은, 이 직함에서는 존귀(尊貴)의 뜻이 있다.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을 제외하면 여러 발극렬(勃極烈)의 직은 금() 태조인 완안 아골타(完顏阿骨打)와 금 태종인 완안 오걸매(完顏吳乞買)가 재위에 있는 동안 늘 변화가 있었다.

위에 발극렬(勃極烈)을 제외하고 따로 질발극렬(迭勃極烈)을 마련하여서 여러 발극렬(勃極烈)을 돕게 하였지만, 그 관직 이름에 국론(國論)이라는 앞가지를 씌우지 않았고 나아가 모두 발극렬(勃極烈) 회의(會議)의 일원은 아니어서 그 지위가 여러 발극렬(勃極烈)보다는 낮았다.

 

1123927천보(天輔) 79월 초엿새, () 태종(太宗) 완안 오걸매(完顏吳乞買)가 황제 지위를 이었고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은 그가 재위에 있는 동안 그 직능에 있어서 내외(內外)의 제군도통(諸軍都統)에서 탈바꿈하여 각종 정치, 예의제도 수립을 주재하였다.

1125113천회(天會) 310월 초이레, 금조(金朝)는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 완안 사야(完顏斜也) [() 태종(太宗)이 즉위하고 나서 금사(金史) 대종기(太宗紀)에는 그를 ()라고 일컬었는데 여기에서는 글의 흐름상 그대로 사야(斜也)라고 쓴다.]에게 겸하여 도원수(都元帥)를 거느리게 하고,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 완안 종한(完顏宗翰)엑 좌부원수(左副元帥)를 겸하게 하여 송()나라를 정벌하는 데에 선봉에 세웠다. 중국대백과전서中國大百科全書) 3판 웹버전에서는 금조(金朝)의 최고 군사 기구인 도원수부(都元帥府)가 이 시기에 세워져서 금조(金朝)의 군대를 통솔하였고 발극렬(勃極烈) 회의 역시 점차 금조(金朝)의 최고 정치 군사 정책 결정 및 심의 기관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1132426천회(天會) 104월 초아흐레, () 태종(太宗) 완안 오걸매(完顏吳乞買)가 아사(阿舍), (),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을 고쳐 좌(), 우발극렬(右勃極烈)을 두었다.똑같이 앞자리에 국론(國論)이라는 이름을 씌운다그 가운데에 좌발극렬(左勃極烈)은 바로 원래 아사발극렬(阿舍勃極烈)이었고 우발극렬(右勃極烈)은 바로 원래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이었다.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에 실린 조자지(趙子砥)의 연운록(燕雲錄)에는 금() 태조(太祖) 완안 아골타(完顏阿骨打)께서 금나라를 만들 적에 뭇 신하와 함께 국고(國庫) 재물은 오직 군대를 출정시킬 때만 쓰기로 하는 서약을 세웠다. 지위를 잇고 나서 금() 태종(太宗) 완안 오걸매(完顏吳乞買)는 한 번 그 형이 세운 서약을 위반한 적이 있었는데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 완안 사야(完顏斜也)에게 발각이 되었고 뒤이어 사야(斜也)는 이 사실을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 완안 종한(完顏宗翰)에게 알렸으니, 종한(宗翰)이 마침내 여러 발극렬(諸勃極烈)과 함께 오걸매(吳乞買)가 서약을 위반한 죄를 추궁하였다. 이에 여러 발극렬(諸勃極烈)이 오걸매(吳乞買)를 잡아서 어전(御殿) 아래로 끌어내려 곤장 벌칙 20대를 받들었다. 곤장 벌칙(杖責)이 다 끝나고 나자 여러 발극렬(諸勃極烈)은 다시 오걸매(吳乞買)를 부축하여 어전(御殿)에 올리고 사야(斜也)와 종한(宗翰)을 우두머리로 한 여러 발극렬(諸勃極烈)이 다시 오걸매(吳乞買)에게 사죄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발극렬 제도의 폐기

() 태종(太宗) 완안 오걸매(完顏吳乞買)가 재위에 있던 끝무렵에 금조(金朝)는 이미 부분적으로 한화(漢化)로 바꾸기를 구상하고 그렇게 하고 있었다. () 희종(熙宗) 완안 단(完顏亶)이 황제 지위를 이었을 때 여전히 나이가 어려서, 항복한 요()나라 관리, 한인(漢人)인 한방(韓昉)과 북송(北宋) 유생(儒生)을 스승으로 삼아 한()의 문화와 한인(漢人)의 치국(治國) 경험을 배웠다. 그 뒤에 다시 대규모의 제도 개혁을 전개하였으니 역사에서는 천권개제(天眷改制)라고 부른다.

그 운영 원칙과 세부 규범은 당() ()의 것을 모방하였다. 주요 내용은 관원의 관리제도를 다듬어서 단일한 관리 채용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밖에 중앙 정부의 틀을 싹 조정하여 한화 관제(漢化官制)를 제정하였으니 재상(宰相)의 권력을 더 강화시키고 원래 있던 발극렬 제도(勃極烈制度)를 대체하여 귀족이 정부 일에 대한 간섭과 참여를 제한하였다. 1136417천회(天會) 14315, () 희종(熙宗) 완안 단(完顏亶)은 태보 완안 종한(太保完顏宗翰), 태사 완안 종반(太師完顏宗磐), 태부 완안 종간(太傅完顏宗幹) 모두 삼성(三省)의 정무를 다스리게 하였으니 이로부터 발극렬제도(勃極烈制度)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勃極烈女真語:,IPA/bə(g)i lə/制度(《中國大百科全書第三版網絡版作國論勃極烈制度[1]),是金太祖完顏阿骨打建立的軍國大事參議制度1115723收國元年七月初一日),金太祖完顏阿骨打置諳班國論阿買昊勃極烈[2]後又於同年1016九月二十七日改國論勃極烈為忽魯勃極烈置乙室勃極烈自此形成金朝有具體分工的勃極烈制度勃極烈會議負責制訂金朝的政治經濟外交司法軍事等事務的方針政策並由各勃極烈分別執行處理兼具決策機關執行機關與軍事機關的機能[1]金熙宗完顏亶繼位後制訂漢化官制隨後於1136417天會十四年三月十五日以太保完顏宗翰太師完顏宗磐太傅完顏宗幹並領三省事自此勃極烈制度被完全廢除

 

沿革

設置及職能

金史記載1115723收國元年七月初一日),金太祖完顏阿骨打置諳班國論阿買昊勃極烈後又於同年1016九月二十七日改國論勃極烈為忽魯勃極烈置乙室勃極烈金朝建立初期共有以下五個勃極烈

 

諳班勃極烈皇帝的儲君諸勃極烈之首掌軍政大權在皇帝出征時監國

忽魯勃極烈居諳班勃極烈之下與諸勃極烈共同參與決定軍國大事為內外諸軍都統

阿舍勃極烈居諸勃極烈第三位參議軍國大事諳班勃極烈的副手

昊勃極烈武官統率軍隊征戰平叛維持治安同時與諸勃極烈共同參議軍國大事

移賚勃極烈處理外交事務參議軍國大事統領軍隊

除諳班勃極烈與本即有國論前綴的國論勃極烈忽魯勃極烈的別名以上勃極烈職稱實際上均冠國論前綴如忽魯勃極烈的全名為國論忽魯勃極烈」)[1];「國論一詞在此有尊貴的意思除諳班勃極烈外諸勃極烈的職稱在金太祖完顏阿骨打與金太宗完顏吳乞買在位期間經常發生變化除以上勃極烈外另設迭勃極烈以輔佐諸勃極烈但不冠國論前綴且並非勃極烈會議的一員地位低於諸勃極烈勃極烈會議負責制訂金朝的政治經濟外交司法軍事等事務的方針政策並由各勃極烈分別執行處理兼具決策機關執行機關與軍事機關的機能

 

1123927天輔七年九月初六日),金太宗完顏吳乞買繼位[11]而忽魯勃極烈在其在位期間的職能由內外諸軍都統轉變為主持建立各種政治禮儀制度[1]1125113天會三年十月初七日),金朝以諳班勃極烈完顏斜也[金太宗即位後金史·太宗紀稱其為」,此處為行文一致性之故而仍作斜也」。] 兼領都元帥移賚勃極烈完顏宗翰兼左副元帥先鋒伐宋,《中國大百科全書第三版網絡版稱作為金朝最高軍事機構的都元帥府於此時建立以統領金朝軍隊而勃極烈會議亦逐漸成為金朝最高政治軍事的決策審議機關1132426天會十年四月初九日),金太宗完顏吳乞買改置阿舍移賚勃極烈為左右勃極烈均冠國論前綴),其中左勃極烈即原阿舍勃極烈而右勃極烈即原移賚勃極烈

 

三朝北盟會編載趙子砥燕雲錄稱金太祖完顏阿骨打建國時與羣臣立下國庫財物惟發兵時方可動用的誓約繼位後的金太宗完顏吳乞買曾一度違反其兄立下的誓約並被諳班勃極烈完顏斜也發現斜也隨後告知移賚勃極烈完顏宗翰此事宗翰遂與諸勃極烈追究吳乞買違背誓約之罪諸勃極烈於是扶吳乞買下殿並將其杖責二十杖責完畢後諸勃極烈復扶吳乞買上殿以斜也與宗翰為首的諸勃極烈再向吳乞買謝罪

 

廢除

金太宗完顏吳乞買在位末年時金朝已構思並開展部分漢化改革金熙宗完顏亶繼位時尚年少故而以遼降官漢人韓昉與北宋儒生為師學習漢文化與漢人的治國經驗[16]隨後更開展大規模的制度改革史稱天眷改制」,其操作原則與細部規範仿襲唐宋主要內容除整編官員管理制度為單一的授官系統外亦包括調整中央政府架構制訂漢化官制加強宰相權力取代原有的勃極烈制度以限制貴族對政事的干預1136417天會十四年三月十五日),金熙宗完顏亶以太保完顏宗翰太師完顏宗磐太傅完顏宗幹並領三省事自此勃極烈制度被完全廢除

 

바이두에 나온 발극렬(勃極烈)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처음 시작될 때의 대략적 상황

발극렬(勃極烈) 제도는 작은 수의 고급 핵심관원 합의제(合議制)의 형식으로 국가의 큰 정치적인 방침을 결정하였으니 이는 일종에 황제를 돕는 정치제도였다. 그러나 황제의 권력이 각 고급 핵심관원에게 견제를 받아, 집단이 이끌고 지도하는 체제와 닮았다. 첫 번째 발극렬(勃極烈) 성원에는 5명이 있는데 지위의 높낮이에 따라 순서를 놓아보면 다음과 같다.

완안 민(完顏旻, 완안 아골타(完顏阿骨打), 곧 금() 세조(世祖) 완안 핵리발(完顏劾里缽)의 둘째 아들)이 도 발열극(都勃極烈)이 되었다. 곧 황제이다.

그 아우 완안 성(完顏晟, 안오걸매(顏吳乞買)이니 세조 핵리발(劾里缽)의 넷째 아들이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이 되었다. 이는 황저(皇儲)로 곧 황제가 돌아간 뒤에 그 자리를 계승하는 사람이다.

그 사촌 형(堂兄)인 완안 살개(完顏撒改, 금 경조(景祖)인 완안 오골내(完顏烏骨乃)의 손자이자 세조(世祖) 핵리발의 조카가 국론발극렬(國論勃極烈)이 되니 이 지위는 국상(國相)에 맘먹는다.

그 당숙(堂叔) 완안 습불실(完顏習不失, 완안 사불실(完顏辭不失)이니 금 소조(昭祖)인 완안 석로(完顏石魯)의 손자이자 경조(景祖) 오골내(烏骨乃)의 조카가 아매 발극렬(阿買勃極烈, 아사발극렬(阿舍勃極烈) 또는 차실합발극렬(劄失哈勃極烈)라고도 함이 되니 이 지위는 국상(國相)의 첫 번째 받침대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매(阿買)액목(厄木)”으로도 받아들이고 있으니 여진(女真) 말로 그 뜻은 첫째(第一이다)

그 아우 완안 고(完顏杲, 완안 사야(完顏斜也)이니 세조 핵리발의 다섯째 아들이다가 호발렬극(昊勃極烈)이 되니 이 지위는 국상(國相)의 두 번째 받침대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여진(女真) 액목(厄木)”은 첫 번째(第一)를 뜻하며 ()”()”자의 잘못 필사글자로, 또한 문헌 안에서는 늘 ()”로 잘못 적었다. 뜻은 두 번째(第二)’이다

 

구성원의 변화

11159, 완안 아골타(完顏阿骨打)가 그 사촌 형(堂兄) 국론발극렬(國論勃極烈) 완안 살개(完顏撒改)를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 또는 胡魯勃極烈로 삼았고 그 숙부(叔父) 완안 아리합만(完顏阿離合懣, 경조(景祖) 오골내(烏骨乃)의 여덟째 아들을 을실발극렬(乙室勃極烈, 또는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 여진 말로 이뢰(移賚)”는 세 번째를 뜻하고 이 지위는 국상(國相)의 세 번째 뒷받침이 되는 사람에 해당한다에 더 집어넣었다.

1119,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인 완안아리합만(完顏阿離合懣)이 죽었다. 1121,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인 완안살개(完顏撒改)가 죽자원래 호발극렬(昊勃極烈)이었던 완안 고(完顏杲)를 올려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로 만들었다. 호발극렬(昊勃極烈)은 완안 아골타(完顏阿骨打)의 사촌형제 완안욱(完顏昱, 완안 포가노(完顏蒲家奴)이 담당하였다.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은 완안 종한(完顏宗翰, 송나라 사람들은 점한(粘罕)”이라고도 불렀으니 완안 살개(完顏撒改)의 큰 아들이다이 담당하였다.

11238, 완안 아골타(完顏阿骨打)가 죽고 황저암반발극렬(皇儲諳班勃極烈)인 완안 성(完顏晟)이 황제의 지위를 계승하여 금() 태종(太宗)이 되었다. 완안 고(完顏杲)가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로 올랐다. 완안 종간(完顏宗幹, 완안 아골타의 서출 가운데 큰아들이다이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을 맡았다. 아골타(阿骨打)보다 1개월 일찍 죽은, 원래 아사발극렬(阿舍勃極烈)이었던 완안 습불실야(完顏習不失也)가 죽었다. 1124, 아사발극렬(阿舍勃極烈)은 완안만도가(完顏謾都訶, 경조(景祖) 오골내(烏骨乃)의 아들, 태종(太宗) 오걸매(吳乞買)의 숙부가 담당하였다.

1130년 황저암반발극렬(皇儲諳班勃極烈) 완안 고(完顏杲)가 죽자 금() 태종(太宗) 완안 성(完顏晟)이 그 지위를 두 해 동안 다른 사람으로 채우지 않고 그냥 두었다. 1132년에서야 다른 발극렬(勃極烈)의 강렬한 요구가 있어 태조 아골타의 적손(嫡孫) 완안 단(完顏亶, 또는 완안합랄(完顏合剌)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어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을 맡게 하였다. 동시에 금() 태종은 일차로 자기에게 유리한 조정을 하여 자기 큰아들 완안 종반(完顏宗磐)에게 넘겨 국상(國相)에 해당하는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을 맡게 하고, 원래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인 완안 종간(完顏宗幹)을 강등시켜 좌발극렬(左勃極烈, 좌상(左相)에 해당로 만들었으며 원래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인 완안 종간(完顏宗翰)을 우발극렬(右勃極烈, 우상(右相)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발극렬 제도(勃極烈制度)의 핵심 성원 5인조가 만들어졌으니 바로 태종(太宗) 완안 성(完顏晟), 그 형제의 손자(侄孫)인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인 완안 단(完顏亶), 그의 큰아들 홀로발극렬(忽魯勃極烈) 완안 종반(完顏宗磐), 그 서질(庶侄) 좌발극렬(左勃極烈) 완안 종간(完顏宗幹)과 그 사촌 조카(堂侄) 우발극렬(右勃極烈) 완안 종한(完顏宗翰)이다. 다만 핵심 구성원에 결원이 생겨야만 거듭 새로 조정하여 보충하였고 그 나머지 각 발극렬이 죽거나 승급하여 옮긴 뒤에는 다시 교체하거나 보충하지 않았다. 예컨대 아사발극렬(阿舍勃極烈) 완안 만도가(完顏謾都訶)가 죽고 나서 보충한 적이 없었고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은 완안 종한(完顏宗翰)에 옮겨 우발극렬(右勃極烈)이 된 뒤에도 보충한 적이 없었다.

 

初始概况

勃极烈制度以少数高级核心官员合议制的形式决定国家的大政方针是一种辅佐皇帝的政治制度但皇帝的权力受到各个高级核心官员的牵制类似集体领导第一个勃极烈成员有5按地位高低顺序排列为

完颜旻完颜阿骨打金世祖完颜劾里钵次子为都勃极烈即皇帝

其弟完颜晟完颜吴乞买世祖劾里钵第四子为谙班勃极烈谙版勃极烈),此为皇储即皇帝死后的继承人

其堂兄完颜撒改金景祖完颜乌骨乃之孙世祖劾里钵之侄为国论勃极烈此位相当于国相

其堂叔完颜习不失完颜辞不失金昭祖完颜石鲁之孙景祖乌骨乃之侄为阿买勃极烈阿舍勃极烈札失哈勃极烈),此位相当于国相的第一助手有人认为阿买就是厄木女真语意为第一);

其弟完颜杲完颜斜也世祖劾里钵第五子为昊勃极烈此位相当于国相的第二助手女真语厄木意为第一字笔误又经常在文献中误作意为第二)。

 

成员的变化

11159完颜阿骨打改其堂兄国论勃极烈完颜撒改为忽鲁勃极烈胡鲁勃极烈),加入其叔父完颜阿离合懑景祖乌骨乃第八子为乙室勃极烈移赉勃极烈女真语移赉意为第三此位相当于国相的第三助手)。

1119移赉勃极烈完颜阿离合懑死1121忽鲁勃极烈完颜撒改死原昊勃极烈完颜杲升为忽鲁勃极烈昊勃极烈则由完颜阿骨打的堂兄弟完颜昱完颜蒲家奴担任移赉勃极烈由完颜宗翰宋人又称之为粘罕完颜撒改长子担任

11238完颜阿骨打死皇储谙班勃极烈完颜晟继位为金太宗完颜杲升为谙班勃极烈由完颜宗干完颜阿骨打庶出的长子担任忽鲁勃极烈早于阿骨打一个月原阿舍勃极烈完颜习不失也死1124阿舍勃极烈由完颜谩都诃景祖乌骨乃之子太宗吴乞买之叔父担任

1130皇储谙班勃极烈完颜杲死金太宗完颜晟将其位闲置两年直到1132年才在其他勃极烈的强烈要求下让太祖阿骨打的嫡孙完颜亶完颜合剌担任谙班勃极烈同时金太宗作了一次有利于自己的调整让自己的长子完颜宗磐担任相当于国相的忽鲁勃极烈降原忽鲁勃极烈完颜宗干为左勃极烈左相),由原移赉勃极烈完颜宗翰为右勃极烈右相)。 这样一来勃极烈制度的核心成员为5人组成即太宗完颜晟其侄孙谙班勃极烈完颜亶其长子忽鲁勃极烈完颜宗磐其庶侄左勃极烈完颜宗干和其堂侄右勃极烈完颜宗翰只有核心成员有了空缺才重新调整和补充其余各勃极烈死或升迁后不再递补如阿舍勃极烈完颜谩都诃死后未补移赉勃极烈在完颜宗翰迁为右勃极烈后也未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