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夫餘) 〈부여(扶餘)〉 2
한(漢)
후한서(後漢書) : 부여국(夫餘國)은 원토(元菟, 곧 현토) 북쪽 1천 리에 있다. 그 땅은 크기가 사방 2천 리(里)로 가장 펀펀하며 시원하게 펼쳐져 둥글게 울타리를 쳐서 성(城)으로 삼았고 궁실(宫室)과 곳집을 두었다. 여섯 가축 이름을 따서 관직 이름에 붙였으니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가 있다. 그 마을(邑落)들은 모두 여러 가(諸加)을 주인으로 섬기며 붙어서 산다.
책부원귀(册府元龜) : 부여국(夫餘國)은 본디 예(濊)의 땅이었다. 한(漢) 무제(武帝) 원삭(元朔) 원년(元年, 기원전 128년)에 그 땅을 창해군(滄海郡)으로 삼았고 몇 년 있다가 바로 없앴다. 원봉(元封, 역시 한 무제 연호) 3년(기원전 108년), 조선을 멸하고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토(元莵), 진번(真畨)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년), 임둔(臨屯), 진번(真畨)을 없애고서 낙랑(樂浪)과 현토(元菟)에 아울러 합쳐 버렸다. 그러다 현토(元莵)는 다시 옮겨 구려(句麗) 땅에 두었다. 단단대령(單單大嶺) 〈후한서(後漢書)에는 단대령(單大嶺)이라 적고 있고 위지(魏志), 통고(通考)는 여기 기록과 같다.〉에서 동쪽 땅을 다 낙랑(樂浪)에 붙였다. 뒤에 영토가 넓고 멀다는 이유로 다시 영(嶺) 동쪽을 7현(縣)으로 나누고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
후한서(後漢書) : 건무(建武, 동한 광무제 연호) 25년(49년), 부여왕(夫餘王)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올렸다. 광무(光武)가 이들에게 두텁게 보답을 하였다. 이에 명을 받은 사신이 해마다 보냈다. 영원(永寧, 동한 안제의 연호) 원년(元年, 120년), 후계자(嗣子)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궐에 나아왔다. 순제(順帝) 영화(永和) 원년(元年, 136년), 그 왕이 와서 순제를 뵈었다. 순제가 황문고취(黄門鼓吹, 후한 때 4가지 악곡의 하나)를 연주하게 하고 권투, 기예 겨룸, 활쏘기, 말달리기 놀이를 벌여 즐기게 하고서 이들을 보냈다. 환제(桓帝) 연희(延熹) 4년(161년) 사신을 보내 환제를 뵙고 축하하며 선물(공물)을 올렸다. 영제(靈帝) 희평(熹平, 172년 - 178년) 때, 다시 글(章)과 공물을 올렸다.
책부원귀(册府元龜) : 한(漢) 안제(安帝) 연광(延光) 원년(元年, 122년), 부여왕(夫餘王)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올렸다. 다시 헌제(獻帝) 연강(延康) 원년(元年, 220년), 사신을 보내 공물을 올렸다.
통고(通考) : 한(漢)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111년), 부여왕(夫餘王)이 처음으로 보기(歩騎) 칠팔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에 들어갔다. 환제(桓帝) 영강(永康) 원년(元年, 168년), 왕 부태(夫台)가 이만 명을 거느리고 현토(元莵)를 침입하였다.
삼국지(三國志) : 부여(夫餘)는 장성(長城) 북쪽에 있다. 현토(𤣥菟)와 거리가 천 리이며 그 나라에 군왕(君王)이 있는데 모두 여섯 가축 이름을 따서 관직에 이름을 붙였으니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견사(犬使), 견사자(犬使者), 사자(使者)를 두었다. 마을에는 세도를 부리는 백성(豪民)들이 있으니 일반 백성(民)과 하호(下户)는 모두 그의 노복 노릇을 한다. 제가(諸加)는 따로 사출도(四出道)의 주인 노릇을 하는데 큰 곳은 수천 집에 주인이 되고 작은 곳은 수백 집에 주인이 된다. 적이 침입하게 되면 제가(諸加)는 스스로 전투에 나서고 하호(下户)는 함께 먹거리를 맡아 그들을 먹인다. 한(漢)나라 말, 공손도(公孫度)이 해동(海東)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자 부여왕(夫餘王) 위구태(尉仇台)는 다시 요동(遼東)에 예속되었다. 당시 구려(句麗)와 선비(鮮卑)가 강성하였는데 공손도(度)이 부여(夫餘)가 그 사이에 끼었다는 이유로 종실의 여인(宗女)을 처로 삼았다. 〈적경(郝經)의 속후한서(續後漢書)를 살펴보면 이 내용과 같아 여기에 다시 싣지 않기로 한다.〉
欽定滿洲源流考卷一
夫餘〈一作扶餘〉
漢
後漢書夫餘國在元菟北千里地方二千里㝡為平敞以員柵為城有宫室倉庫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狗加其邑落皆主屬諸加
册府元龜夫餘國本濊地也漢武帝元朔元年以其地為滄海郡數年乃罷至元封三年滅朝鮮分置樂浪臨屯元莵真畨四郡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真畨以并樂浪元菟元莵復徙居句麗自單單大嶺〈後漢書作單大嶺魏志通考與此同〉已東悉屬樂浪後以境土廣逺復分嶺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
後漢書建武二十五年夫餘王遣使奉貢光武厚答報之于是使命嵗通永寧元年遣嗣子尉仇台詣闕順帝永和元年其王來朝帝作黄門㰻吹角抵戲以遣之桓帝延熹四年遣使朝賀貢獻靈帝熹平中復奉章貢
册府元龜漢安帝延光元年夫餘王遣使貢獻又獻帝延康元年遣使貢獻
通考漢安帝永初五年夫餘王始将歩騎七八千人入樂浪桓帝永康元年王夫台将二萬人侵元莵
三國志夫餘在長城之北去𤣥菟千里國有君王皆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猪加狗加犬使犬使者使者邑落有豪民民下户皆為奴僕諸加别主四出道大者主數千家小者數百家有敵諸加自戰下户俱擔糧飲食之漢末公孫度雄長海東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强度以夫餘介其間妻以宗女〈按郝經續後漢書與此同不複載〉
▶ 사기(史記)에 “賈滅朝鮮”라는 글귀, 즉 오팽가(彭吳賈)가 조선을 멸하고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다는 주장에 대한 이론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 제18 한기(漢紀) 10
동이(東夷) 예(薉)의 임금 남려(南閭) 들, 모두 이십팔만 사람들이 항복하자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더니 사람들을 꾸리는 비용이 남이(南夷)로 통하는 길을 뚫는 데 드는 비용과 맞먹으니 연(燕)과 제(齊)나라 땅 사이에 사람들이 휩쓸려 술렁거렸다. 〈복건(服虔 : 동한(東漢) 때 사람)이 “예맥(薉貊)은 진한(辰韓)의 북쪽과 고려(高麗), 옥저(沃沮)의 남쪽에 있으니 동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있다.” 하였다. 사고(師古)가 “남려(南閭)는 예(薉)의 임금 이름이다.” 하였다. 식화지(食貨志)에서는 “팽오(彭吳)가 길을 열어 예맥(薉貊), 조선(朝鮮)과 관계를 텄고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다” 하였다. 진수(陳壽)가 쓴 부여전(夫餘傳)에서는 “위(魏)나라 때 부여고(夫餘庫)에 옥벽(玉璧)과 규찬(珪瓚)이 있었는데 대대로 이어지며 이 물건들을 보물로 여겼다. 늙은 어른들이 선대께서 내려준 것에 대해 말하기를 “그 도장에 새긴 글에 「예왕의 도장(濊王之印)」이라 하였다. 나라에 옛 성(故城)이 있는데 이름이 예성(濊城)있다.” 하였으니 대체로 본디 예맥(濊貊)의 땅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한 예전(濊傳)에서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하고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였으니 단단대령(單單大嶺)에서 서쪽을 낙랑(樂浪)에 붙이고 그 영(嶺)에서 동쪽에 있던 7현(縣)을 도위(都尉)가 주재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모두 예(濊)를 백성으로 삼았으니 지금 불내예(不耐濊)가 모두 그 씨들이다.” 하였다. 반고의 한서 지리지에 “낙랑 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가 치소를 불내현(不耐縣)에 두고서 다스렸다. 예(薉)의 소리는 예(濊)이다. 항(降)은 호(戶)와 강(江)의 반절씩이다.” 하였다. 고이(考異)에서 “사기 평준서(史記 平準書)에서 말하기를 팽오가(彭吳賈)가 조선을 멸하고 창해군(蒼海之郡)을 설치하였다고 하니, 톺아보면 조선을 멸하고 창해(蒼海)를 설치한 것은 이 두 가지 일이니 이 두 가지 일 중에서 어느 것이 가(賈)의 모략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였다.〉
資治通鑑(胡三省音注)卷第十八 漢紀十
東夷薉君南閭等共〈【章:乙十一行本「共」作「□」;孔本同,熊校同。】〉二十八萬人降,爲蒼海郡;〈服虔曰:薉貊在辰韓之北,高麗、沃沮之南,東窮大海。師古曰:南閭,薉君名。《食貨志》:彭吳開道通薉貊、朝鮮,置滄海郡。陳壽《夫餘傳》:魏時,夫餘庫有玉璧、珪瓚,傳世以爲寶。耆老言先代所賜,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又《濊傳》云:武帝滅朝鮮,置樂浪郡,自單單大嶺以西屬樂浪,自嶺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爲民,今不耐濊,皆其種也。班《志》,樂浪東部都尉治不耐縣。薉,音濊。降,戶江翻。《考異》曰:《史記‧平準書》曰:彭吳賈滅朝鮮,置蒼海之郡。按:滅朝鮮,置蒼海,兩事也,不知何者出賈之謀。〉人徒之費,擬於南夷,燕、齊之間,靡然騷動。
☞ 왕인지(王引之)의 아버지이자 언어학자이기도 한 청나라 왕염손(王念孫)이 지은 독서잡지(讀書雜志)에 “가(賈)가 조선(朝鮮)을 멸하였다.(賈滅朝鮮)”에 대한 논평이 나온다. “賈滅朝鮮”라는 글귀에서 ‘賈’는 ‘穿’이, 그리고 ‘滅’은 ‘濊’가 잘못된 글자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곧 “예(濊), 조선(朝鮮)과의 길을 뚫었다. (穿濊朝鮮)”는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기 본문에 「팽오(彭吳) 가(賈)가 조선(朝鮮)을 멸하고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다.」 하니 색은(索隱)이 「팽오(彭吳)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조선(朝鮮)을 멸하였다 함은 팽오(彭吳)가 처음으로 그 길을 열고 조선을 멸한 것이다. 」 하였다. 사기고이(史記考異)에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를 살펴보면, 원삭(元朔, 한 무제가 썼던 연호) 원년(元年, 기원전 128년) 가을에 동이(東夷) 엄 임금(弇君, ‘엄’은 곧 예(穢貊)의 다른 이름인 듯) 남려(南閭) 들, 인구 이십 팔만(萬) 사람이 항복하자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 3년 봄, 창해군(蒼海郡)을 없앴다.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년) 조선(朝鮮)을 멸하니 앞에 원삭(元朔) 원년과 20년이라는 세월의 거리가 있으니 한 번에 벌어진 한 가지 일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조선을 멸한 사람들은 순체(荀彘)와 양부(楊仆)들이지 역시 팽오(彭吳) 가(賈)라는 사람은 그 일에 등장하는 일이 없다.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서는 그저 “팽오(彭吳)가 예맥(穢貃)과 조선(朝鮮)으로 통하는 길을 뚫고서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다.”라고 언급하였을 뿐이다. 이 내용을 사기(史記)와 비교해 보면 확실하게 된다. 나는 또한 멸(滅) 자가 마땅히 예(濊) 자의 와전이라고 의심한다. 예(濊)는 ‘薉’, ‘穢’와 같은 글자이다. 고(賈)는 상고(商賈)의 고(賈)로 읽으니 팽오(彭吳)가 예(濊), 조선(朝鮮)과 더불어 장사를 하며 무역을 하였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 장사를 인연으로 길을 열고 군(郡)을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사마(小司馬)는 ‘팽오(彭吳)가 처음으로 그 길을 열고서 조선을 멸하였다.’ 함은 옳지 아니하다고 일렀다. 」 하였다.
나 염손(念孫)이 톺아보니 전(錢, 곧 사기고이를 지은 청나라 학자 전대흔(錢大昕))이 “멸(滅)은 예(濊)의 와전이다고 한 말이 이것이다. ‘고(賈)’ 자는 그대로 한서(漢書)를 따라 천(穿)자로 적어야 한다. 안사고(顏師古)가 「예맥, 조선의 땅은 본디 모두 중원 땅에 정권을 세운 왕조가 버려두고 막혀 통하지 않았었는데(荒梗) 비로소 그들과의 길을 열어 텄고, 그러므로 뚫을 천(穿)자로 말을 하였다.」 하니 옳은 말이다. 위에서 당몽(唐蒙, 한 무제 때 서남 실크로드 또는 남방 실크로드를 개척한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서남이(西南夷)에 대한 길을 열어 산을 뚫고서 길을 텄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팽오(彭吳)가 동이(東夷)에 대한 길을 텄고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음을 말하는 것이지 예(濊), 조선(朝鮮)과 더불어 장사하며 무역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서(隸書)로 ‘천(穿)’자는 더러 쓴 글자꼴이 고(賈)에 가까워 이로 인해 고(賈)자로 잘못 쓴다. 한(漢)나라의 장씨(張氏) 천중기(穿中記)에 내용에 ‘본디 이 뚫은, 곧 무덤(穿)에 나아간 사람은(本造此穿者)’에서 ‘천(穿)’자는 썼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讀書雜志/史記 作者:王念孫 清朝 賈滅朝鮮
「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索隱》曰:「彭吳,人姓名。滅朝鮮,彭吳始開其道而滅之也。」《史記考異》曰:「案《漢書·武帝紀》,元朔元年,秋,東夷弇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為蒼海郡。三年春,罷蒼海郡。至元封三年滅朝鮮,相距二十年,不得並為一事。且滅朝鮮者,為荀彘、楊仆,亦無彭吳賈其人也。《漢書·食貨志》但云彭吳穿穢貃朝鮮,置滄海郡。較之《史記》為確。予又疑滅字當為濊字之訛。濊,與薉穢同。賈,讀為商賈之賈,謂彭吳與濊朝鮮賈易,因得通道置郡也。小司馬謂彭吳始開其道而滅之,非是。」念孫案:錢以滅為濊之訛,是也。賈仍當依《漢書》作穿。顏師古曰:「本皆荒梗,始開通之,故言穿。」是也。上言唐蒙司馬相如開路西南夷,鑿山通道,此亦言彭吳通道東夷,置滄海郡,非謂與濊朝鮮賈易也。隸書穿字或作,形與賈相近,因誤為賈。漢張氏《穿中記》本造此穿者,穿字作,是其證也。
☞ 예석(隸釋) 권13에 나타난 예서(隸書) ‘천(穿)’자. 다른 예서 글씨 꼴이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간단히 아래 두 글꼴을 소개한다.
① 아래 자료는 향항중문대학도서관(香港中文圖書館)에서 내려 받았다.
② 아래 자료는 Wikimedia Commons에서 내려받았다.
☞ 기원전 109년에 수레를 잘 모는 좌장(左將) 순체(荀彘)와 수군(水軍) 장령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부(楊仆)가 물길과 뭍길 두 길로 조선을 쳤고 그 다음 해에 조선을 멸하고 나서, 순체는 전쟁의 공로로 돌아온 떡고물이 적자 조선을 치는 과정에서 양부(楊仆)가 전투 시기를 놓친 잘못을 들어서 마음대로 양부를 체포하였다. 그 결과 순체는 한 무제에게 살해 당하였고 양부는 서인(庶人)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 한서 식화지(漢書 食貨志)
앞 시대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절용정책으로 쌓아두었던 부(富)를 발판으로 하여 무제(武帝)는 호국(胡國)과 월국(粵國, 越國)의 전쟁에 따른 피해에 발끈하며 즉위한 지 두어 해 만에 엄조(嚴助)와 주매(朱買) 등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동구(東甌, 지금에 절강성 남부)로 오게 하여 동구 땅을 침략한 양월(兩粤, 남월(南粤)와 민월(閩粤)라는 작은 나라, 지금에 광동, 광서, 복건성에 있었다함)를 치게 하자 강(江)과 회수(淮水) 사이가 시끌시끌 번거롭게 재용이 소모되었다. 당몽(唐蒙)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비로소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을 열었는데 산을 뚫고 길을 트기를 천여 리(里), 이로써 파(巴), 촉(蜀)으로 영역을 넓혔으나, 이 과정에서 파촉(巴蜀)의 백성들이 피로에 절게 되었다. 팽오(彭吳)가 예맥(穢貊), 조선으로 통하는 길을 뚫어 창해군(滄海郡)을 두었는데 그렇게 되니 연(燕)과 제(齊) 사이가 휩쓸려 소동을 일으키었다. 왕회(王恢, 연나라 사람)가 흉노를 마읍(馬邑)으로 유인하여 소탕하는 일에 미쳐 흉노가 화친 관계를 끊고 북쪽 변두리를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자 군대를 연이어 보내고 사태가 풀어지지 않으니 세상이 그 피로를 함께 겪었다.
⇒ 마읍(馬邑)의 계략이란 기원전 133년에 왕회(王恢)가 한 무제에게 건의한 것으로, 흉노를 마읍으로 진격하게끔 유인하여 마읍에서 벌어진 흉노 소탕 전투이다. 마읍은 지금에 산서성 삭주시(朔州市) 삭성구(朔城区)이다.
漢書 食貨志
武帝因文、景之蓄,忿胡、粵之害,即位數年,嚴助、朱買臣等招徠東甌,事兩粵,江、淮之間蕭然煩費矣。唐蒙、司馬相如始開西南夷,鑿山通道千餘里,以廣巴、蜀,巴、蜀之民罷焉。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及王恢謀馬邑,匈奴絕和親,侵擾北邊,兵連而不解,天下共其勞。
▶ 창해군(滄海郡)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창해군(蒼海郡)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위씨조선(衛氏朝鮮)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꾀하여오던 중, 서기전 128년에 예맥(穢貊)의 군장 남려(南閭) 등이 28만 인의 호적을 가지고 요동군(遼東郡)에 투항하여오자, 이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위씨조선에 대한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하여서는 함경남도 영흥으로 보는 설이 있으나, 뒷날 현도군(玄菟郡)이 설치된 압록강 중류의 통구(通溝)지방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무제는 창해군 지배를 실질화 하기 위하여 팽오(彭吳)로 하여금 요동군에서 이곳에 이르는 교통로를 개척하게 하였는데, 공사가 예상 밖으로 곤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2년 뒤인 서기전 126년에 공손홍(公孫弘)의 중지건의를 받아들여 군을 폐지하였다.
이 때 무제가 창해군 설치를 포기한 것에는 이밖에도 교통로 개척공사가 진척됨에 따라 연(燕)·제(齊)지방의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데에도 한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강감이지록(綱鑑易知録)
강(綱) : 을묘(乙卯) 3년(기원전 126년) 겨울, 공손홍(公孫弘)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봄에 창해군(蒼海郡)을 없앴다.
목(目) : 이때 서남이(西南夷)와 관계를 텄고 동쪽으로 창해(蒼海)를 설치하였다. 〈창해는 지금, 곧 청나라 때 요동도사(遼東都司)이다. 〉 북쪽으로 삭방군(朔方之郡)을 축성하였다.
綱鑑易知録 卷十二 吳乘權(淸)等 綱) 乙卯三年冬以公孫弘為御史大夫春罷蒼海郡
目) 時通西南夷東置蒼海 〈今遼東都司〉 北築朔方〈見上〉之郡
⇒ 강감이지록(綱鑑易知録)에 나온 원문 보기
⇒ 요동도사(遼東都司) 지도 (출처 바이두)
☞ 어비역대통감집람(御批歴代通鑑輯覽) 권 15
예(薉)의 임금이 항복하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다. 예(薉)의 임금, 이름이 남려(南閭) 들이 사람 이십팔만을 이끌고 요동(遼東)에 나아와 〈한(漢)의 군(郡)이라는 행정구역이 양평(襄平)의 옛성(故城)을 치소로 다스렸으니 지금 봉천부(奉天府) 요양주(遼陽州, 지금 요양시 노성구(老城区) 북쪽에 있다.〉 안으로 붙었다. 한나라 임금이 조서를 내려 그 땅에다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는데 이 많은 사람을 꾸리는 비용이 남이(南夷)를 정벌하는 비용에 비교되니 몇 년 있다가 드디어 행정구역을 파기하였다. 〈곧 예맥(濊貊)이니 지금 봉천부(奉天府) 봉황성(鳯凰城) 동쪽과 조선국(朝鮮國)의 강원도(江原道)가 모두 그 지역(道)이다.〉 (위에 요동도사 지도에 나오는 ‘수암(岫岩)’ 지역에 ‘봉황성’이 있다.)
御批歴代通鑑輯覽 (四庫全書本)/卷015
薉〈即濊貊今奉天府鳯凰城東及朝鮮國之江原道皆其道也〉君降置蒼海郡薉君南閭〈薉君名〉等率口二十八萬詣遼東〈漢郡治襄平故城在今奉天府遼陽州北〉内屬詔以其地置蒼海郡人徒之費擬于南夷數年乃罷
⇒ 양평(襄平) : 전국시대 때 연(燕)나라가 설치한 행정구역으로 지금에 요녕성 요양시(遼陽市)이다.
☞ 관성석기(管城碩記)에 기록된 낙랑군 예야두국(薉邪頭國)의 특산물
톺아보면 이아 석어(爾雅 釋魚)에 하(鰕, 도롱뇽)는 모두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대호(大鰝)라 부르는 대하(大鰕)이다. 곽박(郭璞)의 풀이에 “하(鰕) 중에 큰 놈은 바다에서 나 길이가 삼장(三丈)에 수염 길이가 두어 자(尺)이다. 지금 청주(青州)에서 ‘하어(鰕魚)’라 불리니 호(鰝)이다.”라고 하였다. 광주기(廣州記)에서 노순(盧循, ? ~ 411년, 동진 말기 군웅 중에 한 사람)이 자사(刺史)가 되었을 때, 순향(循鄉, 지금에 순주(循州) 어디쯤인 듯) 사람들이 동해(東海)에 이르러서 하(鰕)을 잡았는데 그 수염 길이가 넉 자(四尺)나 되어 순(循)에게 보내서 보여주었다고 함이 이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鯢)이니 큰 놈은 하(鰕)라고 부른다. 형병(邢昺)은 “예(鯢)는 자경(雌鯨, 암컷고래라는 해석이 있는데 문맥상 도롱뇽의 하나일 듯하다)이다. 큰놈은 길이가 8,9자(尺)로 별명이 ‘하(鰕)’이다.”라 하니 이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분하(魵鰕)’라 부르니 곽(郭)이 풀이하기를 “예야두국(薉邪頭國)에서 난다. 여씨자림(呂氏字林)에 보인다.” 하였다. 한지(漢志)에 낙랑군(樂浪郡)에 야두예현(邪頭薉縣)이 있다고 하니 예(薉)는 바로 예아두국(穢邪頭國)이니 대체로 예(穢) 민족이다. 한(漢)나라에서 이를 현(縣)으로 삼았다. 분어(魵魚)는 일명 하(鰕)이니 곧 야두예현(縣)에서 난다는 것이 이것이다. 시(詩) 노송(魯頌)에 “검은 털에 흰 털이 섞인 ‘오총이(駰)’가 있고 붉은빛과 흰빛의 털이 섞인 ‘적부루마(騢)’가 있다.” 노래하였는데 육씨(陸氏)가 설문(說文)을 톺아보니 적부루마(騢)는 붉은빛과 흰빛의 털이 섞인 무늬가 하어(鰕魚)를 닮았다고 하니 이는 분하(魵鰕)라는 물고기 이름으로 예국(薉國)에서 나오는 것으로, ‘강이든 바다이든 물이 있는 곳에 모두 이것이 있다는 하(鰕)’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초씨 역림(焦氏易林)에 ‘잉어(鯉), 붕어(鮒), 참다랑어(鮪), 도롱뇽(鰕)들, 복을 쌓으니 물고기가 많다 ’하였다. 장융(張融)의 해부(海賦)에 ‘잠긴 비늘에 ‘알록달록 물든 물결 (伏鱗漬綵), 톡톡 튀는 분(魵)에 함초롬한 물결무늬(升魵洗文)’라는 말에서 역시 모두 반하(魵鰕)가 물고기 이름으로 되어 있다. 산해경(山海經)에 ‘용어(龍魚)가 언덕에서 사는데 그 모습이 잉어(鯉)와 닮았다’고 하였다. 나머지 하나는 하(鰕)라고 한다. 풀이에서 하(鰕)는 소리가 ‘하(遐)’이다. 양(梁)나라의 우려(虞荔)가 지은 정록(鼎録)에 ‘송(宋) 문제(文帝)가 도롱뇽(鰕魚)을 얻더니 드디어 정(鼎)을 만들고 ‘하어사족(鰕魚四足)’이라고 불렀다. 도롱뇽(鰕)을 물고기라 이름한 경우는 참말로 많다. 어찌 설문(說文)에 도롱뇽(魵鰕)이 물고기 이름이라 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장전(長箋)에 ‘분(魵)’자를 풀이하였으나, 더욱 초점을 흐려 정확하지 못한 데에 빠졌다. (설문장전(說文長箋)에는 ‘魵’을 ‘새우 하(蝦)’와 같다고 하였다.)
管城碩記 (四庫全書本)/卷22
按爾雅釋魚鰕凡有三一曰鰝大鰕郭注鰕大者出海中長二三丈鬚長數尺今青州呼鰕魚為鰝廣州記曰盧循為刺史循鄉人至東海取鰕鬚長四尺送示循是也一曰鯢大者謂之鰕邢昺曰鯢雌鯨也大者長八九尺别名鰕是也一曰魵鰕郭注出薉邪頭國見呂氏字林漢志樂浪郡有邪頭薉縣薉即穢邪頭國葢穢種也漢以為縣魵魚一名鰕即縣所出者是也詩魯頌有駰有騢陸氏按說文騢赤白雜色文似鰕魚則是魵鰕為魚名出薉國者非謂所在皆有之鰕也焦氏易林鯉鮒鮪鰕積福多魚張融海賦伏鱗漬綵升魵洗文亦皆以魵鰕為魚名也山海經龍魚陵居狀如鯉一曰鰕注曰鰕音遐梁虞荔鼎録宋文帝得鰕魚遂作鼎曰鰕魚四足鰕之名魚者正多何乃以說文魵鰕魚名為誤長箋解魵字尤屬支離
☞ 나무위키에서 설명사는 창해군
1. 개요
기원전 128년 가을(음력 7~9월)에 고조선 영향력 아래에 있던[2] 예군(穢君 / 濊君) 남려가 한나라에 투항하여 전한 무제에 의해 설치되었다가 2년만인 기원전 126년 봄(음력 1~3월)에 폐지한 군현이다.
워낙 단명한 군이기 때문에 아예 실체가 없이 설립 구상만 되었다는 견해와 실제로 운영되었다는 견해가 갈린다. 다만 어느쪽이든 정상적인 운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창해군을 설립할 당시 한나라는 흉노, 고조선 등과 대립 상태였고, 동북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세 때문에 한군현의 확립과 운영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고대사에서 위만조선 멸망 후 설치된 한사군보다 20년 앞서 설치 된 중국의 첫 군현이라는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속기간이 워낙 짧기 때문에 문헌자료나 유물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고 문헌들도 사료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학계에서도 창해군에 관한 논의는 얼마 안되는 근거들을 바탕으로 추론에 의지하고 있고 따라서 창해군의 성격, 위치 등을 두고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2. 연혁
예족의 지도자인 예군 남려(南黎)가 우거를 배신하고 28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이끌고 요동군에 귀속하였고, 이에 팽오(彭吳)가 예(濊)와 고조선을 조율한 뒤 한이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당시 한나라는 지금의 청천강으로 비정되는 패수(浿水)를 고조선과의 경계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요동의 만번한(滿番汗)부터 마자수(압록강)를 건너 패수에 이르기까지의 공간에는 그곳에 살던 고조선 친화적인 중국계 망명인들로 인하여 한의 실질적인 지배력이 닿지 못하고 있었고, 무제는 이곳을 영토화하고 패수까지 진출하고자 창해군을 설치했던 것이라고 보는 주장이 있다.
이후 군현의 운영과 유지를 위한 물자 및 인력 징발로 인해 인접한 연(燕)과 제(齊) 지방[5]이 피폐해져 봉기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무제는 요동군에서 창해군에 이르는 길까지 교통로를 정비할 것을 명하였지만, 당시 어사대부였던 공손홍(公孫弘)의 건의로 무산되고 창해군은 폐지된다. 인력과 비용이 너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고조선의 일부를 영토화하려 했던 무제의 시도는 불과 2년도 안 되어 무산되었다. 그러나 창해군이 폐지됐다고 그 땅을 한이 모조리 상실한 것은 아니고, 압록강 위쪽의 만주 땅에는 무차(武次)현, 서안평(西安平)현, 번한(番汗)현이 살아남아 요동군 동부도위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약 20년 뒤, 동부도위 섭하가 고조선의 기습을 받아 살해당하고, 이후 고조선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창해군이 있던 자리에는 한사군 중 하나인 임둔군이 설치된다.
3. 위치 논란
대체로 창해군이 예족 사회를 기반으로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압록강 중류 및 동가강 유역의 고구려 예맥 지역 또는 강릉을 중심으로한 함경도-강원도의 동해안 일대, 즉 동예 지역이 논의되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익, 정약용, 유득공 등은 창해군의 위치를 동해안 일대로 보았다. 근거로는 창해라는 명칭이 동해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았고, 한서의 기록 중 주석 부분이다. 다만 이 주석 부분은 창해군이 설치된 한무제 당시가 아니라 후한 대에 추가 된 것으로 기원전 2세기에 언급된 예군 남려의 예맥집단과 동예를 혼동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현실적으로도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라면 모를까 요동과 강원도 사이에 아직 건재한 시점에서 동해안 강원도 지역에 한나라가 교통로를 직접 뚫고 군을 개설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훗날 부여, 고구려의 발흥지가 되는 압록강 중류 및 동가강 유역의 예맥집단의 거주지역에 창해군이 설치되었을거라는 해석이 제기되었다. 강원도보다는 한나라의 요동군과 지리적으로 훨씬 인접해있다는 점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압록강 중류 유역설은 다시 창해군 지역에는 고조선 멸망 이후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이 들어섰다는 견해로 이어진다. 즉 설에 따르면 창해군은 고구려의 기원과 형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고조선과 한나라 및 요동군 사이에 있던 이 지역은 연맹체제인 고조선과 한 양측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고조선에서 이탈하며 한의 군현이 일시적으로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는 정치적 격동을 겪은 것이 된다. 이 같은 혼란을 겪으면서 고조선과 한 양측간의 힘의 공백 상태가 발생하면서 이 지역이 독자적인 세력, 즉 훗날 고구려의 전신이 되는 집단으로 발전하고 성장할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설명이다.
창해라는 지명을 동해가 아닌 발해(바다)로 보아 요동 남단 해안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남려가 이끄는 예맥인 집단이 요동과 인접한 지역에 위치해있다면 한에 귀순하여 일시적이나마 군이 설치되었다고 보면 개연성이 높다. 다만 중국 사서에서 발해를 본격적으로 창해라고 지칭하는 것은 삼국지 및 수나라, 당나라 때서부터 확인 가능한 부분이라 창해군이 설치될 당시와는 시대적 차이가 있다는 약점이 있다.
4. 인구
남려가 이끌고 귀순한 28만이라는 수치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남려가 이끌었던 집단은 족장사회단계나 잘해야 종전에 고조선 통제 아래의 소국으로 짐작되는데 그러기에는 제시된 28만이라는 수치는 지나치게 규모가 커서 합리적이지 못하다.
비교해보자면 한서 지리지 및 후한서에 따르면 낙랑군의 인구가 약 6만호 25만~40만 정도로 추산된다. 3세기 경의 초기 고구려가 3만호, 동옥저는 5천호 정도의 인구가 있었다. 남려가 귀속한 요동군의 경우에는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인구가 272,539명이라고 제시되어 있다. 귀순한 유민들이 요동군 전체인구보다 많다.
물론 다른 지역에 대한 인구 기록도 문자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적절하다. 하지만 남려의 투항 이후 설립된 창해군은 고작 2년만에 단명한 반면 낙랑은 거의 4세기 가까이 유지되었고 그 기간 동안 인구 센서스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한서나 후한서 외에도 1990년에는 북한 평양에서 낙랑군의 각 현별 호구수 및 증감 여부까지 수치를 제시한 낙랑군 호구부가 발굴되기도 했다. 남려에 대한 기록보다는 훨씬 신뢰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해당 기사를 문자대로 수용하면 귀순 당시 남려는 한반도의 웬만한 고대국가나 한나라의 일개 현도 아니고 군을 능가하는 규모의 집단의 지도자라는 말이 된다. 결국 남려가 직접 이끌었던 집단 외에도 당시 이들과 이해를 같이하여 투항에 동참한 다른 예족사회까지 포함되고, 28만이라는 인구가 한꺼번에 투항했다기보다는 창해군 설치 예정지에 살던 예족 계 인구수 전체를 추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 바이두에서 설명하는 창해군(滄海郡) :
① 창해군(滄海郡)은 옛날 군(郡) 이름이니 한(漢) 무제(武帝) 원삭(元朔) 원년(元年, 기원전 128년)에서 3년이 지난 기원전 126년까지 중원 땅 동북 요동(遼東) 반도에 설치되었던 군(郡)으로 지금 요녕성(遼寧省) 대련시(大連市) 보란점구(普蘭店區) 경내에 위치하였다고 보고 있다.
창해군 위치에 대해 남겨진 의문
창해군(滄海郡)의 위치에 대해 학계에서는 줄곧 의문을 남기고는 하였다. 창해군(滄海郡)의 땅은 동이 예인(東夷濊人)에 속하였었다. 한(漢) 무제(武帝) 원삭(元朔) 원년(元年, 기원전 128년) 가을에 “동이 예(東夷薉)의 임금 남려(南閭) 들, 인구 이십팔만(萬) 사람들이 항복하여 창해군(滄海郡)을 만들었다.” 원삭(元朔) 3년(기원전 126년) “봄에 창해군(滄海郡)을 없앴다.” 안사고(顏師古) 풀이에 “남려(南閭)는 예(薉)의 임금 이름이다.” 하고 복건(服虔)이 풀이하기를 “예맥(穢貊)은 진한(辰韓)의 북쪽, 고구려와 옥저(沃沮)의 남쪽에 있으니 동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있다.”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학계는 일찍이 창해군(滄海郡)이 관할하는 땅에는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에 설치한 임둔군(臨屯郡)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보고 있다.(임군군은 지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갈라 다스리고 있는 강원도 지구이다) 당시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한 목적은 조선국(朝鮮國)과 흉노의 연계를 막기 위함이었다. 이 의견 외에 또한 어떤 학자들은 창해군의 지리 위치가 송화강(松花江) 유역에서 압록강 유역의 범위 내라고 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책에 기록이 간결한 탓에 그 행정구획 제도의 상황은 자세히 고증하기 어렵다.
滄海郡 : 滄海郡,古郡名,認爲是漢武帝元朔元年(前128年)至三年(前126年)在中國東北遼東半島設立的一郡,位於今遼寧省大連市普蘭店區境內。
位置存疑
對於滄海郡的位置,學界一直存疑。滄海郡之地原屬東夷濊人。漢武帝元朔元年(前128年)秋,“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爲滄海郡”。元朔三年(前126年)“春,罷滄海郡”。顏師古注:“南閭者,薉君之名。”服虔注:“穢貊在辰韓之北,高句麗、沃沮之南,東窮於大海。”據此,學界曾認爲滄海郡轄地應包括武帝元封三年所置的臨屯郡(今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與韓國分治的江原道地區)。設立滄海郡的目的是阻隔朝鮮國與匈奴的聯系。此外,亦有學者認爲其地理位置在松花江流域到鴨綠江流域的範圍內。由於史籍記載簡略,其建制情形已難以詳考。
② 창해군(蒼海郡)은 한(漢) 무제 때 동북아(東北亞)에 설치하였던 일개 변방의 군(郡)이다. 이 군(郡)의 관할 구역은 마땅히 동예(東濊), 옥저(沃沮, 동옥저와 북옥저)가 있던 영역을 포함해야 하니 곧 지금에 중국의 연변(延邊) 지구, 목단강(牡丹江) 지구 동부와 조선(朝鮮, 즉 북한) 강원도(江原道)와 함경도(咸鏡道), 그리고 러시아(俄國) 연해 지구이다.
무제(武帝)가 이 창해군을 설치하였는데 첫째는 한(漢)나라 정부가 동북아 지구와 통로를 터서 동방 실크로드 길을 열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위씨 조선(衛氏朝鮮)이 동북아에 있어서의 영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으며 세 번째는 흉노(匈奴)가 위씨 조선(衛氏朝鮮)과의 연계를 막아내서 흉노가 위씨조선과 연맹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 창해군의 설치로 도문강(圖們江) 유역을 처음으로 중원(中原) 왕조의 행정 관할 구역에 정식 편입시키게 되니, 조선반도에 왕래하는 상업 길을 한층 더 개척하여 동북아 지구에 일부 오래된 부족과 오래된 나라들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 논리는 일본놈들이 우리나라에 침략해서 우리 산하와 백성들의 등골을 쪽쪽 빼먹는 과정에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경제와 정치의 개발을, “일제가 우리나라에 ‘근대화’를 이루어 주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蒼海郡 : 蒼海郡是漢武帝在東北亞設置的一個邊郡。該郡的轄區應包括東濊、沃沮(東沃沮和北沃沮)所在領域,即今我國延邊地區、牡丹江地區東部、朝鮮江原道和咸鏡道以及俄國濱海地區。
武帝設置此郡,一是爲了打通漢朝同東北亞地區的通道.開辟東方絲綢之路;二是爲削弱衛氏朝鮮在東北亞的影響;三是爲了隔斷匈奴同衛氏朝鮮的聯系,以防匈奴同衛氏朝鮮結爲聯盟。該郡之設置,使我國圖們江流域首次正式納入中原王朝的行政轄區,進一步開拓了通往朝鮮半島的商路,促進了東北亞地區一些古族古國的發展。
武帝設置此郡,一是爲了打通漢朝同東北亞地區的通道.開辟東方絲綢之路;二是爲削弱衛氏朝鮮在東北亞的影響;三是爲了隔斷匈奴同衛氏朝鮮的聯系,以防匈奴同衛氏朝鮮結爲聯盟。該郡之設置,使我國圖們江流域首次正式納入中原王朝的行政轄區,進一步開拓了通往朝鮮半島的商路,促進了東北亞地區一些古族古國的發展。
⇒ 송화강 위치 (출처 위키백과)
⇒ 무단강(牡丹江) 위치 (출처 위키백과)
⇒ 송화강의 수역도 (출처 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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