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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동북 9성(城)5

윤관(尹瓘)의 삶 4 (고려사 근거) 윤관이 바친 것이 포로가 3백 4십 6명, 말이 9십 6필, 소가 3백여 마리였고 의주(宜州), 통태(通泰)와 평융(平戎) 두 진(鎭),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길주(吉州), 복주(福州),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아 북계(北界) 9성(城)을 만들고서 모든 성에 남쪽 경계의 백성들을 옮겨 와서 채웠다. 왕이 윤관을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에 제수하고 연총(延寵)을 협모동덕치원공신(協謀同德致遠功臣)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제수하고서 내시낭중(內侍郞中) 한교여(韓皦如)를 보내되 조서(詔書)와 고신(告身 임명장), 고귀한 자줏빛 실로 수놓은 안장을 갖춘 왕실 마구간의 말 두 필을 가.. 2023. 8. 4.
윤관의 삶3 윤관이 그 아들 언순(彦純)을 보내어 임금께 표(表)를 올리고 축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성인의 덕은 진실로 하늘땅, 즉 건곤(乾坤)에 맞아떨어지고 인(仁)과 의(義)라는 기치를 내건 군대는 이미 저 이적(夷狄)을 평정하였으니 장수와 병사들은 기쁨에 떨며 함성을 질렀습니다. 삼가 생각해보면 동여진(東女眞)은 으슥한 곳에 슬며시 숨어 살았는데 이 번성하고 추한 족속은 먼 옛날 그들의 조상 때부터 우리 조정의 은혜를 입었었습니다. 그런데 이리처럼 탐욕을 부려 점점 그 배반의 마음을 기르고 개처럼 짖으며 문밖에서 시끄럽게 으르렁거리고 변방을 침범하여 우리 사람들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제어의 너그러움에 허물이 없게 되면 이를 일러 ‘건방지게 함부로 한다’라고 하며 분수에 넘치는 뜻을 마음대로.. 2023. 8. 2.
윤관(尹瓘)의 삶 2 윤관은 또한 여러 장군을 나누어 보내어 국경선을 그어 정하였으니 동쪽으로 화곶령(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 궁한이령(弓漢伊嶺)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렀다. 한편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를 보내 땅을 살피게 하여 몽라골령 아래에 성랑(城廊) 9백50칸을 쌓고서 영주(英州)라 이름하고 화곶령(火串嶺) 아래에 9백9십2칸의 성랑을 쌓고서 웅주(雄州)라 하였으며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백7십4칸을 쌓고서 복주(福州)라 하고 궁한이촌(弓漢伊村)에 6백 70칸을 쌓고서 길주(吉州)라 하였다. 나아가 영주성(英州城) 안에 호국인왕(護國仁王)과 진동보제(鎭東普濟) 두 절을 지었다. 다음 해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이 정예군사 8천을 이끌고 가한촌(加漢村)의 병목처럼 작은 길을 나오고 있었는.. 2023. 7. 31.
윤관(尹瓘)의 삶1 〈언이(彦頤), 인첨(鱗瞻), 세유(世儒), 상계(商季)〉 윤관(尹瓘)은 자가 동현(同玄)이고 파평현(坡平縣) 사람이다. 그의 고조인 신달(莘達)이 태조(太祖) 왕건을 도와 서 삼한 공신(三韓功臣)이 되었고 아버지 집형(執衡)이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이 되었다. 윤관은 문종조(文宗朝 재위 1046∼1083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습견(拾遣), 보궐(補闕)을 거쳐 숙종(肅宗 재위 1095~1105년) 때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와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로 벼슬자리를 여러 번 옮겼다. 여진(女眞)은 본래 말갈의 남겨진 종족으로 수(隋)와 당(唐) 시대에 구고려(勾高麗 곧 고구려)에 병합되었었는데 뒤에 마을을 이루며 산과 연못에 흩어져 지냈지만 한 번도 통일을 이룬 적이 없었다. 그들 중에 정주(定州)와 삭주(朔州)의.. 2023. 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