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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만주원류고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10

by 쥐눈이 2025. 2. 6.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2

  부족(部族) 〈이(二)

읍루(挹婁) 또는 +邑樓〉 1

 

  한()

후한서(後漢書) : 읍루(挹婁)는 옛 숙신국(肅慎國)이니 부여(夫餘) 이 조목은 상세하게 앞에 보였다동북(東北)에 있다. 마을들은 각각 대인(大人)을 두었고 산림 사이에 처하였다. ()나라가 흥성하고 나서부터 부여(夫餘)에 신하 나라로써 소속되었다.

 

책부원귀(册府元龜) : 읍루(挹婁) 땅은 험한 산들이 많고 사람들 꼴이 부여(夫餘)와 닮았다. 배 이용(乗船)을 잘하여 북옥저(北沃沮)가 이들을 두려워하여서 여름마다 바위굴(巖穴) 품에서 지내다가 겨울에 뱃길이 막히게 될 때면 내려와 마을에서 지냈다.

읍루 사람들이 잘 이용했다는

태평어람(太平御覽)

석명(釋名)배 선()은 물을 따라 다닌다.” 하였다. 배 주()는 두루 흘러 다님(周流)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광아(廣雅)()은 큰 배(大船)이다. (), ()은 배()이다.” 하였다.

() 때 쓰여진 풍토기(風土記)작은놈을 ()’라 부르고 큰놈을 ()’이라 부른다.” 하였다.

太平御覽 釋名循水而行又曰言周流也。《廣雅大船也船也。《風土記小曰舟大曰船

격치경원(格致鏡原) : 유희(劉熙, 후한(後漢) 말기 때 사람)가 지은 석명(釋名)배 선()도는 것이다. 물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하고 다시 배 주()는 두루 흘러 다님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아(爾雅)천자(天子)는 배들을 나란히 붙이고(造舟), 제후들은 배들을 묶고(維舟), 대부(大夫)들은 두 배를 나란히(方舟) 붙이고, ()들은 배 하나()만을 쓴다.” 하니 그 풀이에 네 척의 배()를 연달아 붙이는 것을 ()’라 하고 두 척의 배()를 나란히 붙이는 것을 ()’이라 하며 홑 배를 ()’이라 한다. ‘조배(造舟)’란 배()들을 나란히 붙여서 다리로 삼는 것이니 곧 지금에 구름 다리(浮橋)이다.

格致鏡原 (四庫全書本)/028 劉熙釋名船循也循水而行也又曰舟言周流也 爾雅天子造舟諸侯維舟大夫方舟士特舟注連四船曰維併両船曰方單船曰特造舟者比船為橋即今浮橋

 

  삼국(三國)

삼국지(三國志) : 읍루(挹婁)는 부여(夫餘) 동북 천여 리()에 있다. 사람들이 대부분 용맹스럽고 힘세다. 땅 기운 차갑기가 부여(夫餘)는 저리가라이다. 옛 숙신씨 나라(肅慎氏國)이다. ()나라 때부터 쭉 부여(夫餘)에 신하 나라로써 소속되었다. 부여(夫餘)는 조세()와 부()를 무겁게 지우니 황초(黄初, 22012~ 226) 때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夫餘)가 여러 번 이들을 쳤다. 그러나 읍루 사람들 무리는 적지만 사는 곳이 산이 험하여 이웃 나라 사람들(부여의 연맹국인지 아니면 부여가 여러 작은 나라들의 연맹국인지 모르겠다)이 그들의 활과 화살 솜씨를 두려워함에 결국 복종시킬 수 없던 것이다.

 

통고(通考) : 읍루(挹婁)는 곧 옛 숙신나라(肅慎國)이다. 그 나라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다. ()나라 상도향공(常道鄉公) 경원(景元, 2606~ 2645) 말에 와서 호시(楛矢)와 돌촉(石砮), 활과 갑옷, 담비 가죽 따위들을 공물로 드렸다.

상도향공(常道鄉公) : ()나라 마지막 황제인, 무제 조조(曹操)의 손자이자 연왕(燕王) 조우의 아들 조환(曹奐, 원래 이름은 조황(曹璜)’)258년 상도향공에 제수되었다. 260627일에 황제로 등극하여 26624일까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상도향공은 지금에 하북성(河北省) 낭방시(廊坊市) 서쪽이다.

 

진서(晉書) : 숙신(肅慎)은 일명 읍루(挹婁)이니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다. 그 나라 동북에 산이 있어 돌이 나오니 그 날카로움은 철()을 뚫는다. 이 돌을 깨 가져오려면 반드시 먼지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무제(武帝) 원강(元康) 초에 와서 공물을 드렸다. 원제(元帝, 재위 기간 31746~ 32313)가 동진(東晉)을 중흥(中興)하였을 때, 다시 강좌(江左)에 나아와 그 돌촉(石砮)을 공물로 드렸고 무제(武帝) 때 이르러 석계룡(石季龍)에게 공물을 드리러 4년에 바야흐로 이르렀다.

진서(晉書) 97 : 그 나라 동북에 산이 있어 돌이 나는데 그 날카로움이 철()을 뚫고 들어간다. 이 돌을 캐려 할 때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 무왕(武王) 때 그 호시(楛矢)와 돌촉(石砮)을 공물로 드렸고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했을 때 다시 사신을 보내 축하를 보냈다. 그 후 천여 년이 지나 비록 진()과 한()나라의 흥성이 있었어도 숙신 사신은 이르지 않았었다. 그러다 문제(文帝, 西晉을 세운 사마염의 아버지로, 그에 대한 추존 이름)가 위()나라 상국(相國, 재상)이었던 경원(景元, ()의 마지막 황제 원제(元帝) 조환(曹奐)의 연호. 2606~ 2645) 말기에 와서 호시(楛矢), 돌촉(石砮), , 갑옷, 담비 가죽 따위들을 공물로 드렸다. () ()가 이 물건들을 상부(相府, 곧 재상이 근무하는 곳)로 보내라는 조서를 내렸고 숙신 임금 녹계(傉雞)에게는 최고급 비단()과 견직물(), 비단(緜帛)들을 내려주었다. 무제(武帝, 사마염) 원강(元康) 초기에 이르러 다시 와서 공물을 올렸다. 서진(西晉)이 멸망한 뒤에 원제(元帝)가 다시 동진(東晉)으로 중흥을 시키자 다시 강좌(江左)에 나아와 돌촉(石砮)을 공물로 드렸다. 성제(成帝, 동진 3대 황제 사마연(司馬衍). 재위기간 : 325~ 342) 때에 미쳐 석계룡(石季龍)에게 공물을 드렸더니 계룡(季龍)이 이들이 공물을 드린 까닭을 물었는데 절기마다 소()와 말()이 서남쪽을 향해 잠들기를 3년 동안 하였습니다. 이에 대국(大國)이 존재함을 알고서 왔습니다....”고 답하였다.

晉書/097 其國東北有山出石其利入鐵將取之必先祈神周武王時獻其楛矢石砮逮于周公輔成王復遣使入賀爾後千餘年雖秦漢之盛莫之致也及文帝作相魏景元末來貢楛矢石砮弓甲貂皮之屬魏帝詔歸于相府賜其王傉雞錦罽緜帛至武帝元康初復來貢獻元帝中興又詣江左貢其石砮至成帝時通貢於石季龍問之答曰每候牛馬向西南眠者三年矣是知有大國所在故來云

강좌(江左) : 옛 지리지에서 좌()는 동쪽을 가리킨다. 강좌(江左)란 강동(江東)이다. 장강 하류 남쪽 기슭 지구를 가리키거나 동진(東晉), (), (), (), ()등 각 왕조가 통치한 전 지구를 가리킨다고 한다.

석계룡(石季龍) : 이름이 석호(石虎)이다. 계룡은 자()이다.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상당군(上黨君) 무향현(武鄕縣, 지금에 산서성 진중시(晋中市) 유사현(榆社縣)) 사람으로, 갈족(羯族)이며 후조(後趙)3대 임금이다. 재위 기간은 334~ 349년이다.

 만주원류고 본문에 진서(晉書)’에 나온 읍루 기사에서 무제(武帝) 원강(元康)”에 대한 헷갈림 : ()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위() 원제(元帝)를 을러대서 황제직을 넘기게 하여 266년에 서진(西晉)을 개국하고 태강(太康)이라는 연호를 썼다. 그 기간은 280 4월에서 289 12월까지이다. 원강(元康)은 서진(西晉) 혜제 사마충(惠帝司馬衷)이 썼던 연호로 그 기간은 291년에서 299년까지이다.

한 무제(武帝)는 원광(元光)이라는 연호를 썼다. 이 연호의 사용 기간은 기원전 134년에서 기원전 129년까지이다. 원강(元康)은 한 선제(宣帝)가 썼던 연호로 기원전 65년에서 기원전 61년까지이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지도 (출처 바이두)

 

 

 

  ()

신당서(新唐書) : 발해(渤海)다른 조목으로 뒤에서 상세히 말하겠다.는 본디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니 성()은 대씨(大氏)로 고려(髙麗)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지켰다. 땅은 영주(營州) 동쪽 이천여 리()에 놓여있다.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대씨(大氏)가 처음으로 읍루(挹婁) 동모산(東牟山)을 지켰다. 만세통천(萬歲通天, 6964~ 6979) 때 거란(契丹)의 진충(盡忠)에게 핍박받던 걸걸중상(乞乞仲象)이란 사람이 요수(遼水)를 건너와 스스로 안전을 확보(自固)하자 무후(武后, 武則天, 측천무후)가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하였었는데 뒤에 대조영 자신도 스스로 진왕(震王)이라 일컬었다.

 

오대사(五代史) : 무후(武后) 때 걸걸중상(乞乞仲象)의 아들 조영(祚榮)이 임금 자리에 섰고, 이를 인연으로 걸사비우(乞四比羽)의 무리 사십만()을 아울러 차지하고서 읍루(挹婁)에 웅거하였다. [대조영이 걸걸중상의 그냥 후계자라는 주장도 있다.]

당나라 때 영주(榮州)와 하북도(河北道) 북부 지도 (출처 바이두)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二

  部族

  挹婁一作

  

  後漢書挹婁古肅慎之國也在夫餘條詳見前東北其邑落各有大人處于山林之間自漢興以後臣屬夫餘

  册府元龜挹婁地多山險人形似夫餘善乗船北沃沮畏之毎夏藏于巖穴至冬船道不通乃下居邑落

  三國

  三國志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人多勇力土氣寒劇于夫餘古之肅慎氏國也自漢以來臣屬夫餘夫餘責其租賦重以黄初中叛之夫餘數伐之其人衆雖少所在山險隣國人畏其弓矢卒不能服也

  通考挹婁即古肅慎之國也其國在不咸山北魏常道鄉公景元末來貢楛矢石砮弓甲貂皮之屬

  

  晉書肅慎一名挹婁在不咸山北其國東北有山出石其利入鐡将取必先祈神武帝元康初來貢元帝中興又詣江左貢其石砮至武帝時通貢于石季龍四年方達

  

  新唐書渤海另條詳後本粟末靺鞨姓大氏髙麗滅率衆保挹婁之東牟山地直營州東二千餘里遼史地理志大氏始保挹婁之東牟山有乞乞仲象者渡遼水自固武后封為震國公後自稱震王

  五代史武后時乞乞仲象子祚榮立因並有乞四比羽之衆四十萬人據挹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