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유기백과 중문판과 바이두에서 내려 받은 자료를 번역한 것이다.
말갈 7부(靺鞨七部)
말갈 7부(靺鞨七部)는 수당(隋唐) 시대에 중국 동북 지구에 말갈인 여러 많은 부락 중에 주요한 7개 부락이다.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에 기록에 당시 말갈(靺鞨)에 수십 개 부락은 그 가운데에 주요한 부락에 7개가 있었다. 각각 백돌부(伯咄部), 안거골부(安車骨部), 불열부(拂涅部), 호실부(號室部), 백산부(白山部), 흑수부(黑水部), 속말부(粟末部)이다.
참고문헌
《수서(隋書)》 81권 말갈전(靺鞨傳)에 「말갈은 고려(高麗) 북쪽에 있다. 읍락에는 모두 추장(酋長)을 두고 있으나, 서로를 모두어 하나로 만들지는 않는다. 모두 일곱 붙이가 있다. 그 하나는 호율(속)말부(號栗(粟)末部)라 부르니 고구려와 서로 영역이 닿아 있고 뛰어난 병사 수천이다. 대부분 날래고 용감하여 고려 땅 안에서 늘 도적질을 하였다. 그 둘 백돌부(伯咄部)이니 율(속)말의 북쪽에 있고 뛰어난 군사 7천이다. 그 셋은 안거골부(安車骨部)라고 부르니 백돌(伯咄) 동북에 있다. 그 넷은 불열부(拂涅部)라 부르니 백돌(伯咄) 동쪽에 있다. 그 다섯은 호실부(號室部)라 부르니 불열(拂涅) 동쪽에 있다. 그 여섯은 흑수부(黑水部)라고 부르니 안거골(安車骨) 서북에 있다. 그 일곱은 백수(산)부(白水(山)部)라고 부르니 율(속)말(栗(粟)末) 동남에 있으니 뛰어난 군사가 부락마다 싹다 묶어도 3천을 넘지 못한다. 흑수부(黑水部)는 더욱 힘세고 굳세다. 불열(拂涅)에서 동쪽에 화살이 모두 돌촉(石鏃)이니 바로 옛날에 숙신씨(肅慎氏)이다.」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권219 흑수말갈전(黑水靺鞨傳)에 :「말갈 겨레에서 가장 두르러진 부(部)는 속말부(粟末部)라 부르니 가장 남쪽에 자리하며 태백산(太白山)까지 이르니 이 산은 역시 도태산(徒太山)이라 부른다. 고려(高麗)와 닿아있다. 속말수(粟末水)에 기대어서 살고 있으니 그 물에 발원은 산 서북에 있고 타루하(它漏河)로 흘러 들어간다. 조금 동북쪽에는 골돌부(汩咄部)라 부른다. 또 다음은 안거골부(安車骨部)라 부른다. 더 동쪽에는 불열부(拂涅部)라 부른다. 골골(骨)의 서북쪽에 사는 부를 흑수부(黑水部)라 부른다. 속말(粟末)의 동쪽에 백산부(白山部)라 부른다. 부(部) 사이 거리가 멀 경우에는 3, 4백 리이고 가까운 것은 2백 리(里)이다. 백산(白山)은 본디 고려에 신하노릇을 하였다. 당나라 왕에 군대(王師)가 평양(平壤)을 취하자 그 무리가 대부분 당(唐)으로 들어갔다. 골돌(汩咄), 안거골(安居骨) 들은 모두 달아나 흩어져 점차 희미해지고 들려오는 소식이 없다. 남은 사람들은 발해로 들어갔다. 오직 흑수(黑水)만이 그 강역을 보존하여 16부(部)로 나누더니 남북(南北)으로써 일컫게 되었다. 대체로 그 터는 가장 북방 땅이다.」
靺鞨七部
靺鞨七部指隋唐時代中國東北地區靺鞨人諸多部落中主要的七個部落。
據《隋書》、《新唐書》、《舊唐書》記載,當時靺鞨有數十個部落,其中主要的部落有七個,分別是:伯咄部、安車骨部、拂涅部、號室部、白山部、黑水部、粟末部。
參考文獻
《隋書》卷八十一《靺鞨傳》:「靺鞨在高麗之北,邑落俱有酋長,不相總一。凡有七種。其一號栗(粟)末部,與高句麗相接,勝兵數千,多驍武,每寇高麗中。其二曰伯咄部,在栗(粟)末之北,勝兵七千。其三曰安車骨部,在伯咄東北。其四曰拂涅部,在伯咄東。其五曰號室部,在拂涅東。其六曰黑水部,在安車骨西北。其七曰白水(山)部,在栗(粟)末東南,勝兵並不過三千。而黑水部尤為勁健。自拂涅以東,矢皆石鏃,即古之肅慎氏也。」
《新唐書》卷二一九《黑水靺鞨傳》:「其著者曰粟末部,居最南,抵太白山,亦曰徒太山,與高麗接。依粟末水以居,水源於山西北,注它漏河。稍東北曰汩咄部,又次曰安車骨部,益東曰拂涅部,居骨之西北曰黑水部。粟末之東曰白山部。部間遠者三四百里,近者二百里,白山本臣高麗。王師取平壤,其眾多入唐。汩咄、安居骨等皆奔散,寢微無聞焉。遺人進入渤海。唯黑水完疆,分十六部,以南北稱,蓋其居最北方者也。」
⇀ 속말수(粟末水) 〈위서(魏書) 물길국(勿吉國) : 낙양과 거리가 5천 리이다. 화룡(和龍)에서 북쪽으로 2백여 리에 선옥산(善玉山)이 있으니 산 북쪽으로 13일을 가면 기려산(祁黎山)에 이르고 다시 북쪽으로 7일을 가면 낙괴수(洛瓌水)에 이르며 다시 북쪽으로 15일을 가면 태로수(太魯水)에 이른다. 다시 동북쪽으로 18일을 가면 그 나라에 이르면 속말수(粟末水)가 있다.
살펴보면 화룡(和龍)은 지금 토묵특 우익(土黙特右翼) 땅에 태로하(太嚕河)이다. 북사(北史)에는 태악로수(太岳魯水)라 쓰여 있는데 마땅히 지금에 탁라하(托囉河)가 되며 역시 도이토시(淘爾洮兕)라 쓰기도 하고 또한 도이(滔爾)라고도 쓰니 모두 소리가 굴러다니며 바뀐 것이다. 신당서(新唐書)의 타루(它漏), 요금(遼金) 시대에 타로달로하(他魯撻魯河), 아울러 성종(聖宗)이 고친바, 달로하(撻魯河)를 장춘하(長春河)라 한 것은 모두 이 물일 따름이다. 수원은 과이심(科爾沁) 서북에서 나와 흥안산(興安山) 동남으로 흐르다 계륵이하(桂勒爾河)로 합치고 다시 동북으로 꺾여 과이심 우익후기(科爾沁右翼後旗) 남쪽 경계를 거치고 다시 동쪽으로 찰로특(扎嚕特) 남쪽 경계를 거쳐 모여 납라살라지(納喇薩喇池)를 이룬다. 이 역시 일월지(日月池)라 이름하는데 눈강(嫩江)과 모여서 송화강(松花江)으로 들어간다. 송화강이 곧 속말수(粟末水)이다. 신당서(新唐書)에서 속말(栗末)이 서북으로 타루하(它漏河)에 유입되었다고 말한 것은 대체로 타루하(它漏河)가 동남으로 눈강(嫩江)으로 들어가서 송화(松花)에 이르는 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송화(松花)가 눈강(嫩江)을 밟아서 타루(它漏)로 들어간다고 하니 이는, 지도 그림(圖)에 근거하여 추측한 데에 따른 잘못이다. 낙괴(洛瓌)는 마땅히 바로 노합(老哈)이 바뀐 소리이고 몽고(蒙古)에서는 노하(老河)를 가리켜 노합(老哈)이라 하니 수원은 객라심 우익(喀喇沁右翼)에서 나와 동북으로 흐르다 옛 대녕성(故大寧城) 동쪽을 거치고 다시 북쪽으로 오한(敖漢), 옹우특 좌익(翁牛特左翼) 남쪽을 거치고 다시 동북으로 나만(奈曼)과 객이객 좌익(喀爾喀左翼)을 거치고 북쪽으로 흘러 5백 리쯤 황하(黄河)와 합친다. 이를 위서(魏書)에 기록된 사신(使臣)이 다닌 지리를 검증해 보면 음역(音譯)이 다시 부합한다. 그 동북 쪽 길을 따라 거치지 못한 것은 대체로 중간에 거란(契丹)에 막혔기 때문일 뿐이다. 또 찰로특 우익(扎嚕特右翼) 서북 1백 90리에 역시 타로하(他魯河)가 있으니 수원은 대청양산(大青羊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다가 아리아하(阿哩雅河)로 들어간다. 사서에 실려있기를 화룡(和龍)에서 물길(勿吉)까지 북쪽을 밟아서 동쪽으로 가는데 험한 지세를 돌아(反岐) 서북에 이르렀다고 함과 맞장구치지 못하니, 그렇다면 태로(太魯)는 이 하천이 아니다. 또 살펴보면 송와강(宋瓦江)은 바로 송화강(松花江)이니 명일통지(明一統志)에서 송와(宋瓦)라고 잘못 쓴 것이다.〉
欽定盛京通志 (四庫全書本)/卷028 粟末水〈魏書勿吉國去洛五千里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山北行十三日至祁黎山又北行七日至洛瓌水又北行十五日至太魯水又東北行十八日到其國有粟末水 按和龍為今土黙特右翼地太嚕河北史作太岳魯水當為今托囉河亦作淘爾洮兕又作滔爾皆音之轉也新唐書之它漏遼金之他魯撻魯河并聖宗所改撻魯河為長春河者皆是水耳源出科爾沁西北興安山東南流合桂勒爾河又東北折經科爾沁右翼後旗南界又東經扎嚕特南界滙為納喇薩喇池亦名日月池㑹嫩江以入于松花江松花江即粟末水新唐書言栗末西北注它漏河者葢不知它漏河東南入嫩江以達松花而反謂松花由嫩江以注它漏是據圖臆揣之誤也洛瓌當即老哈之轉音𫎇古稱老河為老哈源出喀喇沁右翼東北流經故大寧城東又北經敖漢翁牛特左翼南又東北經奈曼及喀爾喀左翼北流五百里許與黄河合證之魏書使臣所行地理音譯更相符合其不能經由東北行者葢中間為契丹所隔故耳又扎嚕特右翼西北一百九十里亦有他魯河源出大青羊山南流数十里入阿哩雅河史載自和龍至勿吉由北而東不應反岐至西北則太魯非此河也 又按宋瓦江即松花江明一統志誤為宋瓦〉
⇀도아하(洮兒河) : 도아하(洮兒河)는 눈강(嫩江) 오른쪽 기슭에 한 갈래 지류이다. 그 그럭저럭 큰 지류에는 귀류하(歸流河)와 교류하(蛟流河), 이룡도하(二龍濤河)가 있다. 도아하(洮兒河)의 옛 이름은 「태로수(太魯水)」, 「태락하(太濼河)」이고 수(隋)나라 때는 「태이하(太爾河)」라 불렀고 ,당대(唐代)에는 「노월하(峱越河)」(상류), 「타루하(它漏河)」(하류)라 불렀으며 요금(遼金) 시대에는 「달로하(撻魯河)」라 일컬었고 원(元) 시대에는 「탁오아하(托吾兒河)」라 하였으며 명(明) 시대에는 「탑아하(塔兒河)」라 불렀다가 청조(清朝)에 이르러서는 「타라하(陀羅河)」, 「타라하(陀剌河)」, 「도아하(陶兒河)」, 「도아하(滔兒河)」 들들에 이름이 있었다. 역사상 도아하(洮兒河) 유역은 북방유목 민족의 주요 방목지였다.
洮兒河 : 洮兒河是嫩江右岸的一條支流。較大支流有歸流河、蛟流河、二龍濤河。洮兒河古名「太魯水」、「太濼河」,隋代稱「太爾河」,唐代稱「峱越河」(上游)、「它漏河」(下游),遼金時作「撻魯河」,元稱「托吾兒河」,明稱「塔兒河」,到清朝有「陀羅河」、「陀剌河」、「陶兒河」、「滔兒河」等名稱[2][3]。歷史上洮兒河流域是北方游牧民族的主要牧地。(출처 유기백과 중문판)
* 눈강 지도 : 지도에서는 도하(洮河)를 도아하(洮兒河)로 적고 있다. (출처 유기백과. 1936年《袖珍中华全图》)

☞ 흑수말갈(黑水靺鞨)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당대(唐代)에 동북 부족 이름이다. 以말갈흑수부(靺鞨黑水部)를 알맹이로 해서 발전하여 꾸려졌다. 아래에는 16부(部)로 나뉘니 벌써 흑수(黑水), 사모(思慕), 군리(郡利), 굴열/설(窟說), 막예개(莫曳皆), 불열(拂涅), 우루(虞婁), 무희(越喜), 철리(鐵利), 올아(兀兒), 호독록(胡獨鹿) 들 11부(部)는 이미 알려졌고 나머지는 고증할 바가 없다. 그 땅은 동쪽에서 동해(東海 : 사할린섬(庫頁島) 곧 홋카이도 포함)까지 이르고 서쪽은 지금 눈강(嫩江)과 아라사(俄羅斯) 결아하(結雅河) 부근과 실위(室韋)가 서로 이웃해 있었고 북쪽으로 외흥안령(外興安嶺)과 악곽차극해(鄂霍次克海 : 오호츠크 해)에 이른다.
[ 오호츠크(Okhotsk)는 오호타 강(Okhota River : 곧 오호츠크 해협)을 따서 붙였는데 이 이름은 예벤키(Evenk) 겨레 말 “오카트(okat)” 곧 강(river)을 뜻하는 말이 와전된 것이다. It was named after the Okhota River, whose name is a corrupted Evenk word okat, "river".]
당(唐) 개원(開元) 10년(722년), 그 수령 예속리계(倪屬利稽)가 당(唐)에 방문하여 임명을 받아 발리주자사(勃利州刺史)가 되었다. 13년(725년), 안동도호(安東都護) 설태(薛泰)가 주청한 것에 응답하여 그 땅에 흑수군(黑水軍)을 두었다. 다음 해, 그 가장 큰 마을에다 흑수주도독부(置黑水州都督府)를 만들고 그 수령에 명하여 도독(都督)으로 삼고 여러 자잘한 부(部) 수령(首領)을 자사(刺史)로 만들고서 당(唐)이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그 땅을 감독하여 거느리는 데에 이르렀다. 발해(渤海)가 일어나고서 철리(鐵利), 월희(越喜), 불열(拂涅), 우루(虞婁) 4부(部)는 오래지 않아서 겸병 되었고 발해(渤海)가 천하 삼분(三分 : 鼎)에 하나를 차지한 성대한 시기에 흑수말갈 남부에 일부 부락도 발해에 예속되었다.
그 사회경제 발전이 속말말갈(粟末靺鞨) 보다 떨어져 수렵으로 삶을 유지하였다. 신당서(新唐書)에 말갈전(靺鞨傳)이 없는 까닭에, 그 내용을 《흑수말갈전(黑水靺鞨傳) 안에다 실었고 원조(元朝)에 사신을 보낸 뒤, 사가(史家)들이 흑수말갈을 말갈(靺鞨)로 대신 일컫는 일이 적지 않았다.
당(唐) 말기, 거란(契丹) 겨레가 우뚝 일어서고 아보기(阿保機)가 발해 나라를 멸망시킨 앞뒤 시기에 그 부(部)는 거란(契丹)으로 돌아 붙었으니 거란 사람이 이들을 여진(女真)이라 불렀다. 여진(女真)이라는 이름은 드디어 본 이름을 대체하여서 그 겨레 이름이 삼아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 위치 : 흑룡강(黑龍江) 중 하류에 두었다.
- 시대 : 당대(唐代)
여러 부(部)의 위치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여러 부(部)의 분포는 아래와 같다. :
흑수부(黑水部):송화강(松花江)이 흑룡강으로 흘러 들어 내려가 기집호(奇集湖) 일대에 흑룡강 남북 양 기슭에 이른 데에 있다.
사모부(思慕部):“흑수(黑水) 서북”에 있으니 아라사(俄羅斯) 포열아하(布列亞河)와 아모공하(阿姆貢河) 상류 사이에 놓여있다.
군리부(郡利部):흑룡강 하류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굴설부(窟說部):사할린(庫頁島) 북단에 살았다.
막예개부(莫曳皆部):사할린 동남부에 있었다.
불열부(拂涅部):목단강(牡丹江) 하류 동쪽에서 흥개호(興凱湖) 일대에 이르는 곳에 있었으니 발해나라가 동평부(東平府)를 설치하였다.
우루부(虞婁部):대략 흥개호 동쪽에서 동해 가에 이르는 곳에 살았고 발해나라가 정리부(定理府)와 안변부(安邊府)를 설치하였다.
월희부(越喜部):오소리강(烏蘇里江) 동쪽에 비금하(比金河) 유역에서 살았다.
철리부(鐵利部):지금 흑룡강 파언(巴彥), 순화(綏化), 경안(慶安), 철력(鐵力) 일대에서 살았다.
올아부(兀兒部)와 호독록부(胡獨鹿部)가 살았던 곳은 살필 수 없다.
사회 풍속
거란(契丹), 고려, 실위(室韋)는 모두 변발(辮發)했던 민족에 속하지 않는다. 해겨레(奚族)의 머리카락 꾸밈은 문헌 기록에 보이지 않으므로 우선 자세히 말할 수 없다. 다만 말갈(靺鞨)에 “풍속은 모두 변발(辮發)을 한다.” 하여서 겨우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머리 모양을 살펴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신당서(新唐書) · 북적전(北狄傳)》:“흑수말갈 …… 풍속에 머리카락을 따고 멧돼지의 이빨로 매달아 놓고 꿩 꼬리털을 꽂아 관 꾸미개로 삼아서 그로부터 여러 부(部)를 가름한다.” 하니 머리카락을 땋는다고 함은 바로 변발(辮發)이다. 다만 흑수말갈의 변발은 어떤 양식이었는지 알 수가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여진(女真)은 흑수말갈에서 왔고 만족(滿族)도 여진에서 나왔기에 문헌 안에 여진의 머리 모양에 관한 기록이 있다면 이는 비교적 분명한 것이리라. 《대금국지(大金國志)》 39권:“금(金)나라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땋아 어깨로 늘어뜨리고 머리 뒤에 머리카락을 남겨놓은 뒤에 색실로 얽어맨다. ”
《북풍양사록(北風揚沙錄)》에서 “여진(女真) 사람이 모두 변발을 하니 거란과 다르다. 머리 뒤에 머리카락을 남겨서 색실로 이를 얽어매니 부자들은 진주와 옥(珠玉)을 장식하였다.”라고 일컬었다.
《삼조북맹회맹(三朝北盟會編)》 권3에서는 “여진(女真) 남자들은 변발하여 뒤로 늘어뜨리고 귀에 금고리를 꾸미며 머리 뒤로 머리카락을 남겨 색실로 이를 얽으니 부자들은 진주와 옥으로 꾸민다.” 하였다.
이런 기록들은 이미 “변발(辮發)”을 가리킨다. 또한 “머리 뒤로 머리카락을 남긴다(留顱後發)”함을 힘주어 말하였다. 만족(滿族) 남자들에 머리 꾸밈을 비추어보면 이는 일종에 머리를 밀고 나서 땋기도(辮) 한 머리 모양이 분명하니 바로 이마 앞에 머리카락을 밀고서 이마 쪽 앞 머리카락을 밀고 머리 뒤쪽에 머리카락은 남겨두어 머리카락을 땋아 늘어뜨려 색실로 이를 얽어매는 것이다.
송(宋)과 금(金) 시기에 이런 머리 꾸밈에 대해 아직 명확한 명칭을 없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름을 “편발(編發)”이라 하고 어떤 때는 다시 “곤발(髡發)”이라 하고 더러는 “삭발(削發)”, “각발(剝發)”이라 하여 만족(滿族)에 이르러야 이런 머리 모양을 “체발(剃發)”이라 불렀다. 이에 따라 추측할 수 있으니 흑수말갈도 꽤나 이런 식으로 앞머리는 밀고 뒷머리 땋는 머리 모양일 가능성이 있고 조양(朝陽)에서 출토된 석상(石俑)의 머리모양과 서로 같지 않은 점이 있다.
속말말갈(粟末靺鞨)이 변발(辮發)한 양식에 대해 명확한 문헌 기록은 없다. 그러나 한가지 긍정할 수 있는 점이 있으니 말갈(靺鞨) 각 부(部)는 똑같이 하나의 겨레 이름이자 민간에서는 모두 변발을 한다손 치더라도 변발의 양식은 반드시 같지만은 않았다. 당시 말갈은 그저 일개 종족(種族) 공동체였기 때문에 문화와 습속이 다 완전히 서로 같지 않았다. 신당서(新唐書) 북적전(北狄傳)에서 흑수말갈을 실어 이야기할 때 또한 명확히 “그로부터 여러 부를 가름한다(自別於諸部)”라고 지적해 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속말말갈과 흑수말갈에 변발 양식은 서로 같지 않을 수 있다.
정소락(程溯洛) 선생이 중국 역사상 변발 구별을 두 가지로 하였는데 “그 하나는 단순히 땋은 머리 종류이니 곧 이마 쪽에서 자란 머리카락에서 쭉 머리 뒤쪽까지를 따서 늘어뜨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머리 앞에 머리카락을 밀어내고 뒷머리 머리카락을 따는 것이다. 흑수말갈, 여진, 만족(滿族)은 곧 뒤쪽 변발 모양에 속한다. 속말말갈이 변발했던 바에야 이것이 다른 점이 있어서 앞쪽 모양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민족 관계
722년(개원(開元) 10년)에 흑수(黑水) “추장 예속리계(倪屬利稽)가 현종(玄宗)은 발리주자사(勃利州刺史)로 제수하였다.” 이는 흑수말갈이 7세기 후반 몇 년 동안 당 왕조와 군사 충돌을 만들다가 왕래를 그친 뒤 30년 뒤에 거듭 새로 당(唐)의 신하로 소속됨을 표명한 것이다. 이런 거동 배경에는 어떤 면에서 돌궐(突厥)에서 원인이 있었다. 묵철가칸(默啜可汗)이 716년에 피살되고 즉위한 비가가칸(毗伽可汗)이 힘을 다해 치세를 도모하며 아울러 다시금 돌궐(突厥)을 강성해지게 만들기 전에 돌궐이 잠시 쇠퇴해졌었는데, 이때 흑수(黑水)로 하여 당(唐)에 대한 정책을 다시금 조정하여 거듭 새로 당(唐)과 가까워지게 압박하였다. 다른 한 원인은 대무예(大武藝)가 이때 북진정책을 열어 추진하자 흑수(黑水)는 전에 없던 위협을 느꼈고 적극적으로 당(唐)과 가까이 하면서 정치적 보호를 찾도록 만들었다.
동광(同光 : 後唐) 2년(924년), 흑수(黑水) 올아(兀兒)가 사신으로 보내져 왔다. 그 뒤에 늘 와서 조공하였으니 등주(登州)에서 바다에 배를 띄워 청주(青州)로 나왔다. 흑수(黑水) 호독록(胡獨鹿) 역시 사신으로 보내져 왔다. 올아(兀兒), 호독록(胡獨鹿)은 두 부(部)의 추장과 같은데 각각 사신으로서 왔다. 그 부족(部族)과 세차(世次), 추장이 즉위하고 작고함을(立卒), 역사에서는 모두 그 기록을 잃어버렸다. 장흥(長興) 3년(925년), 호독록(胡獨鹿)이 세상을 뜨고 아들 도리화(桃李花)가 즉위하여 일찍이 중국에 명(命)을 청하였었는데 뒤에 마침내 더는 기록에 보이지 않았다 하였다.
발해(渤海) 대무예(大武藝) 시대가 일어나고부터 흑수말갈과 대치를 하였다. 8세기 중기에 이후, 발해국가(渤海國家)가 점차 강대해지자 흑수말갈은 한때 발해에 부림을 받았다. 9세기 초기 이후, 일찍이 여러 사서에서 보였던 일부 말갈부(靺鞨部)는 발해에 병합되었다. 흑수말갈(黑水靺鞨)과 발해 관계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대로 발해에게 신하로 복속되는 상태로 남았었음을 배제하지 못한다. 다만 절대로 발해에 병합되어 그 나라의 호적에 편입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9세 말기에 항복하였고 발해가 아주 성대해졌다가 쇠락하자 흑수말갈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거듭 독립을 획득할 수 있었다.
주요 수령(首領)
흑수말갈(黑水靺鞨 : 616년-937년) 수령(首領) 12사람
이름(호칭) 재위기간/재위에 오른 해
- 아고랑(阿固郎) 616년-628년
- (지위가 빠진 시기) 628년-722년
- 예속리계(倪屬利稽) 722년
- 악작개(屋作個) 741년
- 오랑자(五郎子) 766년
- 오소가몽(烏素可蒙) 780년
- 낙개몽(諾個蒙) 799년
- 낙직흘몽(落職訖蒙) 819년
- 아포사리(阿布思利) 843년
- 아포리계(阿布利稽) 877년
- 올아(兀兒) 912년
- 호독록(胡獨鹿) 925년
- 도리화(桃李花) 933年
黑水靺鞨(출처 바이두)
黑水靺鞨,唐代東北部族名。以靺鞨黑水部爲核心發展形成。下分16部,已知有黑水、思慕、郡利、窟說、莫曳皆、拂涅、虞婁、越喜、鐵利、兀兒、胡獨鹿等11部,餘無考。其地東至日本海(包括庫頁島),西以今嫩江和俄羅斯結雅河附近與室韋相鄰,北至外興安嶺和鄂霍次克海。
唐開元十年(722年),其首領倪屬利稽朝唐,被任命爲勃利州刺史。十三年(725年),應安東都護薛泰奏請,於其地置黑水軍。次年,於其最大部落置黑水州都督府,命其首領爲都督,諸小部首領爲刺史,唐派“長史”至其地監領之。渤海興起後,鐵利、越喜、拂涅、虞婁4部不久被兼並,至渤海鼎盛時,其南部另一些部落也役屬於渤海。
發展落後於粟末靺鞨。以狩獵爲生。由於《新唐書》無《靺鞨傳》,將其內容寫在《黑水靺鞨傳》內,致使元朝以後,不少史家誤以黑水靺鞨代稱靺鞨。唐末,契丹族崛興,在阿保機亡渤海國前後,其部轉附契丹,契丹人稱之爲女真,女真之名遂代以爲族稱著於世。
位 置 黑龍江中下遊
時 期 唐代
諸部位置
黑水靺鞨諸部的分布如下:
黑水部:在松花江注入黑龍江下至奇集湖一帶的黑龍江南北兩岸;
思慕部:在“黑水西北”,處俄羅斯布列亞河與阿姆貢河上遊之間;
郡利部:位於黑龍江下遊入海口處;
窟說部:居庫頁島北段;
莫曳皆部:在庫頁島東南部;
拂涅部:居牡丹江下遊以東至興凱湖一帶,渤海國設東平府;
虞婁部:約在興凱湖以東至日本海濱,渤海國設定理府、安邊府;
越喜部:位於烏蘇裏江以東的比金河流域;
鐵利部:在今黑龍江巴彥、綏化、慶安、鐵力一帶。
兀兒部與胡獨鹿部所在無考。
社會風俗
契丹、高麗、室韋皆不屬辮發民族;奚族的發式因不見於文獻記載,暫時不詳;只有靺鞨“俗皆辮發”,但僅黑水靺鞨的發式可以考知。
《新唐書·北狄傳》記載:“黑水靺鞨……俗編發,綴野豕牙,插雉尾爲冠飾,自別於諸部。”編發,即辮發,但黑水靺鞨的辮發是何種樣式已不得知。不過,女真來源於黑水靺鞨,滿族又出自女真,文獻中有關於女真發式的記載則是比較清楚的。《大金國志》卷三九記載:“金辮發垂肩,留顱後發系以色絲。”
《北風揚沙錄》稱“(女真)人皆辮發,與契丹異,留顱後發以色絲系之,富人用珠玉爲飾。”
《三朝北盟會編》卷三則雲“(女真)男子辮發垂後,耳飾金環,後顱留發以色絲系之,富者以珠玉爲飾。”這些記載既稱“辮發”又強調“留顱後發”,對照滿族男子的發式,可以明確這是一種既髡又辮的發式,即剃去額前發,留顱後發,編辮垂後,系以色絲。宋金時期,對這種發式似乎還沒有一個明確的名稱,所以文獻中有時稱作“編發”,有時又稱作“髡發”或“削發”、“剝發”,直到滿族才開始稱這種發式爲“剃發”。由此可以推測,黑水靺鞨很可能也是這種前髡後辮的發式,與朝陽出土的石俑的發式應有不同。
粟末靺鞨辮發的樣式沒有明確的文獻記載。但有一點可以肯定,靺鞨各部雖然同一族名且“俗皆辮發”,但辮發的樣式未必相同。因爲當時靺鞨只是一個種族共同體,文化和習俗並不完全相同。《新唐書·北狄傳》載講黑水靺鞨時,也明確指出“自別於諸部”,也就是說粟末靺鞨與黑水靺鞨辮發的樣式可能是不相同的。程溯洛先生將中國曆史上的辮發區別爲兩類:“一類屬於單純辮發,即將前額蓄發直至腦後,編垂而下;另一類則剃去前腦頭發,而後腦編發。” 黑水靺鞨、女真、滿族即屬於後一類的辮發。粟末靺鞨既然屬於辮發又與有別,就很可能屬於前一類。
民族關系
722年(開元十年),黑水“酋倪屬利稽,玄宗即拜勃利州刺史。”這是黑水靺鞨在7世紀最後幾年中與唐王朝發生軍事沖突、中止來往30年後,重新表明對唐的臣屬。在這一舉動的背景中,一方面因素來自突厥:在默啜可汗716年被殺,即位的毗伽可汗勵精圖治並再次使突厥走向強盛之前,突厥曾一度衰微,這使黑水被迫再次調整對唐政策,重新與唐接近。另一種因素就是大武藝在此時開始推行北進政策,黑水感到前所未有的威脅,被迫主動與唐接近以求政治庇護。
同光二年,黑水兀兒遣使者來,其後常來朝貢,自登州泛海出青州。黑水胡獨鹿亦遣使來。兀兒、胡獨鹿若其兩部酋長,各以使來。而其部族、世次、立卒,史皆失其紀。至長興三年,胡獨鹿卒,子桃李花立,嘗請命中國,後遂不複見雲。
渤海自大武藝時代起與黑水靺鞨形成對峙。八世紀中期以後,渤海國家漸強大,黑水靺鞨可能一度役屬渤海。九世紀初期以後,曾經見諸於史籍的一些靺鞨部被渤海吞並;黑水靺鞨與渤海關系不詳,不排除仍然對渤海存在臣屬性質,但絕對不曾被渤海吞並,成爲其編戶。九世紀末期以降,渤海盛極而衰,黑水靺鞨利用此機會重新獲得獨立。
主要首領
黑水靺鞨(616年-937年),首領12人
姓名/稱謂
阿固郎(缺位時期) 倪屬利稽 屋作個 五郎子 烏素可蒙 諾個蒙 落職訖蒙 阿布思利 阿布利稽 兀兒 胡獨鹿 桃李花
*말갈석상 : 조양 황하로(黃河路) 당묘(唐墓)에서 출토한 변발 말갈인. (출처 바이두)






*출렵도(出獵圖) 안에서의 거란(契丹) 사람 (출처 위키백과)

*1874년 호북성 거리에서 이발사에게 머리를 깍고 있는 장면 (출처 위키백과. Library of Congress )

☞ 흑수말갈(黑水靺鞨) (출처 유기백과 중문판. 아래도 같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말갈의 한 부(部)이다. 또 흑수부(黑水部)라고도 부르니 이들은 요금(遼金) 시대에 여진(女真) 겨레의 몸통이 된 전신이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가장 처음 중국에 동북부 가장 북쪽에 「흑수(黑水)」(흑룡강(黑龍江) 연안에 자리하여서 「흑수말갈(黑水靺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금사(金史) 안에서 당조(唐朝) 시기를 기록한 내용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옛 숙신(肅慎) 땅에 사니 그 땅 산에 백산(白山)이 있어 아마도 백두산(長白山)으로 금(金)나라가 그곳에서 일어났다.』 하였다. 668년, 당조(唐朝) 신라에 짝짝꿍 군대로 고구려를 멸망한 뒤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송하강(松花江)과 무단강(牡丹江) 남쪽을 따라 내려와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아울러 691년 끝자락에 당조(唐朝, 무주(武周) 때)와 군사 충돌을 일으켰고 무주(武周)를 위해 일했던 말갈 출신 장령(將領) 이다조(李多祚)에 격파되었다.
발해국 때,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발해국을 세운 속말말갈(粟末靺鞨)과 함께 말갈에 소속되었지만, 때로 충돌이 생겼다. 흑수부(黑水部) 안에 사모(思慕)는, 악온극인(鄂溫克人)이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사모부(思慕部)와 군리부(郡利部)로 나뉘고 – 흑룡강 하구(河口)에 굴설부(窟説部) - 사할린(庫頁島) 북부에는 막예개부(莫曳皆部) - 화태동(樺太東) 남부에 불열부(拂涅部) - 무단강(牡丹江) 하류에서 동쪽(현재 밀산시(密山市) 주변)에 우루부(虞婁部 : 읍루(挹婁)), 월희부(越喜部), 철리부(鉄利部)이다. 발해국(渤海國)이 세워진 뒤, 그 나머지 말갈(靺鞨) 민족들은 흑수부(黑水部)의 영도 아래에 있었고 당조(唐朝)에서 세운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 통제 체계를 따랐고 다 모두어서 흑수말갈(黑水靺鞨)이라 일컬었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아울러 하나에 흑수부(黑水部) 한 부(部)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요(遼)가 발해국을 멸망한 뒤, 하나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은 거란(契丹)에 통치를 받아 숙여진(熟女真 : 요나라에 국민으로서 그 호적에 편입된)이 되었다.
사회풍속
일상생활 쪽에서 보자면 흑수말갈(黑水靺鞨) 사람들은 머리를 땋고 綴멧돼지(野豬) 이빨을 꿰어 달고 꿩꼬리로 관 꾸밈을 하였다. 집은 반지하(半地)에 움집으로 꾸민 방 안에서 살았다.「거마(車馬)가 있어 짝을 이루어 쟁기질을 하여서 논밭을 갈았으며 수레는 걸으며 밀었다. 조와 보리를 키웠다.」
흑수말갈(黑水靺鞨) 사람들은 활을 쏘며 수렵을 하였고 화살은 돌촉(石鏃)을 쓴다. 두루 돼지를 키워서 돼지를 기르는 부잣집이 수백 집에 이르렀다.
흑수부(黑水部) 각 부(部)에 사회 발전 단계는 불균형하였고 그 가운데에 비교적 선진적인 부락은 벌써 빈부의 갈림이 나타나서 계급사회의 파도를 넘기 시작하였다.
외교
622년(당(唐) 무덕(武德) 5년) 흑수부(黑水部) 대추장(大酋長, 곧 거장(渠長)) 아고랑(阿固郎)이 장안(長安)에 가서 당(唐)과 우호를 통하였고 이는 기록으로 흑수부(黑水部)가 제1 차로 사신을 보내 중원(中原)에 가게 하였음이 보인다.
黑水靺鞨
黑水靺鞨,靺鞨的一部,又稱黑水部,是女真族主體的前身。[1]黑水靺鞨最初位於中國東北部最北的「黑水」(黑龍江)沿岸,而得名「黑水靺鞨」。金史中記載唐朝時期『黑水靺鞨居古肅慎地,有山曰白山,蓋長白山,金國之所起焉。』668年,唐朝和新羅的聯軍滅亡高句麗後,黑水靺鞨開始沿松花江、牡丹江南下、西進,並於691年末與唐朝(武周)發生軍事衝突,被武周靺鞨籍將領李多祚擊敗。
渤海國時期,黑水靺鞨與建立渤海國的粟末靺鞨同屬於靺鞨但時有衝突。黑水部中的思慕是鄂溫克人。
黑水靺鞨分為思慕部 、郡利部 - 黒龍江河口:窟説部 - 庫頁島北部:莫曳皆部 - 樺太東南部:拂涅部 - 牡丹江下流以東(現在密山市周邊):虞婁部(挹婁)、越喜部、 鉄利部。渤海國建立後,其他靺鞨民族在黑水部的領導下,由唐朝設立黑水都督府管理,統稱黑水靺鞨。黑水靺鞨並不是單指黑水部一部。
當遼滅亡渤海國後,一些黑水靺鞨被契丹統治成為熟女真。
社會風俗
日常方面,黑水靺鞨人編髮,綴野豬牙,以雉尾為冠式,住在半地穴式的房屋中。「有車馬,田耦以耕,車則步推,有粟麥。」
黑水靺鞨人善於射獵,用石鏃,普遍養豬,富有人家養豬可達數百口。
黑水部各部社會的發展是不平衡的,其中較先進的部落已出現貧富分化,開始向階級社會過渡。
外交
公元622年(唐武德五年),黑水部大酋長(渠長)阿固郎前往長安,與唐通好,這是見於記載的黑水部第一次派使前往中原。(출처 유기백과 중문판)
☞ 백산말갈(白山靺鞨)
백산말갈(白山靺鞨)은 백산부 말갈(白山部 靺鞨)이다. 동북아 역사에서 말갈의 한 부(部)이다. 말갈은 중국 중원(中原)의 남북조 때, 「말갈(靺鞨) 7부(部)」에 백산부(白山部)는 바로 그 가운데에 한 부(部)이다. 백산부락(白山部落)은 둘레에 속말부(粟末部)와 흑수부(黑水部)에 달리 백산(白山)이 줄곧 고구려에 신하로서 복종하는 상태에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된 뒤에 다시 고구려 유민과 협조하여서 그 땅에 속말말갈(粟末靺鞨)과 함께 발해국을 세웠다. 백산부(白山部)의 지리는 속말부(粟末部) 동남에 자리하고 흑수부(黑水部)의 정남(正南)에 있으니 태백산(太白山 : 지금 백두산(長白山))에 잇닿아 있어 그 이름을 얻었다. 그 활동 구역은 얼추 지금에 중국 길림성 백산시(白山市)와 조선 함경남북도에 해당된다. 백산부(白山部)는 말갈 7부(靺鞨七部) 가운데에 지역이 가장 남쪽에 자리했던 한 부(部)이다. 이 땅은 본디 예맥족(濊貊族) 계에 동옥저(東沃沮) 사람들에 활동 지역이었다. 백산 말갈(白山靺鞨)의 뿌리 실마리는 숙신(肅慎)에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숙신이 발전해 나가며 말갈을 이루었다. 3세기 초기에 말갈 겨레 사람들은 무단강(牡丹江) 유역을 따라서 옮겨 송화강(松花江) 중하류와 흑룡강 중하류 지구로 갔다. 중국 중원(中原)에 전통 역사서에 「물길(勿吉)」로 고쳐 불렀으니 실제는 한 겨레이다. 말갈 겨레가 본 동옥저(東沃沮) 지구로 들어갔다. 백두산(長白山)을 중심으로한 지역에서 살았기에 「백산부(白山部)」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고 나서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두 부(部)는 비 고구려에 정복당했지만, 그저 한결같이 고구려에 섞여 들어간 채 그대로 부락의 독립을 유지하였었다. 중국 전통 역사서에서 그들에 대한 기록은 「주택(屋宇 : 집 한 채뿐 아니라 전통 가옥 구조에서 대문, 본채, 사랑채 등 각 기능을 맡은 주택 개념을 포함) ……아울러 산과 물에 기대어 땅을 파고 움집을 만들어 살았다. …… 서로 모여서 산다.」 《북사(北史)》 가운데에 기록에 백산부(白山部)는 말갈 7개 부락 안에 중요한 한 구성원이고 「뛰어난 군사 3천(千)」을 쥐고 있었다. 고구려에 정복되고 나서 점차 고구려 왕조가 전쟁에 따라 넓혀진 조직에서 하나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5, 6세기에 동북아 지구에 한 가닥 중요한 군사적 역량이었다. 482년 백산말갈(白山靺鞨) 고구려와 같이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침범하였다. 668년 당(唐)과 신라가 짝짝궁이 되어 고구려를 멸하자 사서에서는 「그 백산부(白山部) …… 부(部)에 무리가 중원 땅 안(中國)으로 들어갔다.」 하였으니 중원(中原)으로 옮겨 간 것이다.
白山靺鞨
白山靺鞨即白山部靺鞨,東北亞歷史上靺鞨的一部。靺鞨在中國中原的南北朝時期形成「靺鞨七部」,白山部便是其中一部[註1]。白山部落與周邊的粟末部和黑水部的不同在於白山一向臣服於高句麗。高句麗滅亡後又協助高句麗遺民以及當地的粟末靺鞨共同創建渤海國。白山部的地理位置在粟末部的東南,黑水部的正南,因毗鄰太白山(今長白山)而得名。活動區域大概相當於今中國吉林省白山市和朝鮮咸鏡南、北二道。白山部是靺鞨七部中地域最南的一部。此地原為濊貊族系東沃沮人的活動地域。白山靺鞨的源頭可追溯到肅慎。肅慎發展成靺鞨。3世紀初期,靺鞨族人從牡丹江流域遷徙到了松花江中下游以及黑龍江中下游地區。在中國中原的傳統史書中改稱「勿吉」,實為一族。靺鞨族人進入原東沃沮地區。因居住在以長白山為中心的地域故而得名「白山部」。而後白山、粟末二部雖然被高句麗所征服,但一直沒有融入高句麗,仍舊保持部落的獨立。中國傳統史書記載他們「無屋宇……並依山水掘地為穴……相居而居」。《北史》中記載白山部是靺鞨七個部落中重要的一員,擁有「勝兵三千」。被高句麗征服後逐漸成為高句麗王朝擴張戰爭機器的一個重要的部分,是5、6世紀東北亞地區一支重要的軍事力量。482年白山靺鞨隨同高句麗南下侵犯百濟。668年,唐與新羅共同滅高句麗。史書載「其白山部……部眾多入中國」,遷入中原。
☞ 속말말갈(粟末靺鞨)
속말말갈(粟末靺鞨)은 가장 남단에 살았던 말갈로 속말수(粟末水 : 지금에 송화강(松花江))로 그 이름을 얻었다. 속말말갈(粟末靺鞨)은 원래 고구려에 부속되었다. 688년, 당(唐)과 신라에 짝짝궁이 군대로 고구려를 멸한 뒤, 속말말갈은 발해국을 세웠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부여(扶餘) 땅에서 나왔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구려와 적대하였다고 주장한다. 속말말갈(粟末靺鞨) 땅은 부여(扶餘) 옛 땅이라는 까닭에 부여 사람과 물길(勿吉)은 여러 차례 고구려 사람과 전투를 벌였다). 그들은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으니 부투말갈(浮渝靺鞨)이라 일컫는다. 이는 그들이 부여 옛땅으로 들어간 말갈인 까닭이라서인 것이고, 또 길림시 일대에서 늘 고구려 사람들과 큰 전투를 거쳤기 때문이다.
역사서에서의 속말부(粟末部)
숙신(肅慎 : 곧 읍루(挹婁)) 사람들은 일찍이 고구려와 충돌을 일으켜서 고구려가 숙신(肅慎)이 6백여 집안을 부여(夫余) 남쪽 오천(烏川)으로 옮겨 보냈다. 《진서(晉書) 숙신전(肅慎傳)》에서 「숙신(肅慎)은 일명 읍루(挹婁)라 하니 불함산(不咸山 : 지금에 백두산(長白山))북쪽에 살았다.」 진(晉)나라 때, 읍루(挹婁) 사람이 벌써 지금에 연변 지구에 도달하였다. 또 고고학계에서 제공한 자료를 근거해 살펴보면, 고구려는 동진(東晉) 때에 연변(延邊) 지구 동남부에다 읍루(挹婁) 사람들이 남쪽으로 침입할 거세 대한 방비로 「변장(邊牆)」과 「장성(長城)」을 닦고 쌓았으니 그 가운데에 한 곳은 훈춘(琿春) 평원(平原) 북부에 산구(山丘) 위에 있다. 이 담은 동쪽은 합달문(哈達門) 향태평촌(鄉太平村) 서산(西山)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뻗어 훈춘 북부 산간 지대를 걸터 질러가 곧장 영안향(英安鄉) 관문 저자서산(咀子西山)에 이르니 총 길이가 25킬로미터이다. 다른 한 곳은 화룡(和龍)과 연길시(延吉市) 북부 산간 지대로 서쪽에 화룡(和龍) 팔가자진(八家子鎮) 풍산(豐產)에서 시작하여 동쪽에 용정(龍井) 장안진(長安鎮) 계림(雞林) 북쪽에 이르니 총 길이가 100여 킬로미터이다. 읍루(挹婁) 사람들은 진(晉)나라 때, 벌써 연길과 훈춘 이북에 지구를 제압하였었다.
읍루(挹婁)의 발전 단계는 남북조(南北朝) 때에 물길(勿吉) 시기에 이르렀다. 《위서(魏書) 물길전(勿吉傳)》에 실리기를 475년(북위 연흥(延興) 5년이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63년 때), 물길(勿吉)은 바로 「고구려 열 군데 마을(落)을 빼앗았다.」 하고 아울러 백제와 남몰래 도모하여 「물길(水道)을 따라 여러 힘을 아울러서 고구려를 취하자.」 하였다. 「고구려 열 군데 마을(落)」은 지금 훈춘과 연길시 지구이다. 물길(勿吉) 사람들은 이미 고구려에 있었던 도문강 유역에 통치구역에 대해 진공을 벌였다. 물길(勿吉)과 백제가 남몰래 모의하여 물길(勿吉)은 도문강(圖們江) 또는 동해를 따라 조선 반도에 옥저(沃沮) 땅을 공격하였고 백제는 반도에 서해안을 따라 고구려 지구를 공격하였다. 뒤에 와서 물길 사람들은 지금에 연변 동부와 조선반도 동북부 지구를 취하였다. 이 한 지구는 물길(勿吉)과 훗날에 말갈속말부(靺鞨粟末部), 백산말부(白山部)가 제압하는 구역이 되었다. 백산말갈(白山靺鞨)의 분포 구역은 지금에 조선 동북부이고 속말부(粟末部)로서는 가장 처음에 중심 지구는 지금에 돈화(敦化) 일대로, 뒤에 길림시 일대로 옮겨갔다.
그들은 뒤에 발해국 사람이 되었다.
참고문헌
《발해국지 장편(渤海國志長編)》 16권 《족속고(族俗考)》
「발해부족은 본디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니 그 선조는 태백산(太白山) 북쪽에서 살며 속말수(粟末水)에 기대어 살았다. 수(隋) 개황(開皇) 때, 그 추수(酋帥) 돌지계(突地稽)가 고려(高麗)와 전투를 벌여 이기지 못하자 8부(部)의 뛰어난 군사 1천여 사람을 이끌고 부여성(扶餘城) 서북을 따라서 부(部)들을 일으켜서 수나라에 붙었다. 때에 양제(煬帝)는 벌써 즉위하여 돌지계(突地稽)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제수하였고 영주(營州)에 두었다. 요동의 전쟁(遼東之役)에 돌지계(突地稽)가 부(部)를 이끌고서 따랐고 전투마다 전공을 세우니 제(帝)가 선물을 넉넉히 주었다. 당(唐) 무덕(武德) 초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唐)나라는 그 부락에 연주(燕州)를 설치하고서 그대로 돌지계(突地稽)를 총관(總管)으로 삼았다. 유흑달(劉黑闥)의 반란에 돌지계(突地稽)가 거느린 부(部)를 거느리고 정주(定州)에 이르렀고 한편 사신을 보내어 태종(太宗)에 나아가 절도(節度)에 제수되기를 요청하니 전공이 있었던 터라 시국공(蓍國公)에 봉해졌다. 다시 그 부락을 유주(幽州) 창평성(昌平城)으로 옮겼고 마침 고개도(高開道 : 수나라 때 농민봉기군)가 돌궐을 이끌고 와서 유주(幽州)를 공격하여 돌지계(突地稽)가 이들을 공격해 오는 적을 기다리고 있다가(邀擊) 이들을 크게 깨뜨렸다. 정관(貞觀) 초, 우위장군(右衛將軍)에 제수하고 이씨(李氏) 성을 내렸다. 얼마있다 세상을 뜨고 그 아들 근행(謹行)이 용맹과 힘이 다른 사람이 넘보지 못하였다. 인덕(麟德) 중에 여러 벼슬자리를 거쳐 영주도독(營州都督)으로 옮겨갔다. 그 부락에 노복들 수천 사람이 재력으로 변방에서 으뜸이라 이인(夷人)이 꺼리는 상대가 되었다. 그는 뒤에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누차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 행우위대장군(行右衛大將軍)을 지내다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졌다. 영순(永淳) 원년에 세상을 떠나니 유주도독(幽州都督)을 내렸다.」
粟末靺鞨
粟末靺鞨是居住在最南端的靺鞨,以粟末水(今松花江)得名。粟末靺鞨原為高句麗的附屬。688年,唐和新羅的聯軍滅了高句麗後,粟末靺鞨建立起渤海國。 (有人說[誰?]他們來自扶餘地,始終與高句麗敵對。由於粟末靺鞨地是扶餘故地,而扶餘人與勿吉屢與高句麗人戰)。他們有另一名稱浮渝靺鞨,是因為他們是進入夫余故地的靺鞨,也在吉林市一帶經常與高句麗人大戰。
史書中的粟末部
肅慎(挹婁)人曾與高句麗發生衝突而高句麗將肅慎六百餘家遷往夫余南烏川。《晉書·肅慎傳》說:「肅慎一名挹婁,在不咸山(今長白山)北。」晉朝時挹婁人已到達今延邊地區。又據考古界提供的資料看,高句麗於東晉時期在今延邊地區的東南部修築了為防備挹婁人南侵的「邊牆」、「長城」,其中一段位於琿春平原北部山丘上,東自哈達門鄉太平村西山始,向西延伸橫跨琿春北部山區,直到英安鄉關門咀子西山,總長約25公里;另一段位於和龍和延吉市北部山區,西自和龍八家子鎮豐產始,東至龍井長安鎮雞林北,總長100餘公里。挹婁人晉朝時已經控制今延吉、琿春以北地區。
挹婁發展到南北朝的勿吉時期。據《魏書·勿吉傳》載,在公元475年(北魏延興五年、高句麗長壽王六十三年)勿吉就已奪取了「高句麗十落」,並密謀與百濟「從水道併力取高句麗」。「高句麗十落」今琿春和延吉市地區。勿吉人已對高句麗在圖們江流域的統治區發起了進攻。勿吉與百濟密謀:勿吉從圖們江或日本海攻打朝鮮半島的沃沮地,而百濟從半島的西海岸攻擊高句麗地區。後來勿吉人取得了今延邊東部及朝鮮半島東北部地區,而這一地區則成為勿吉及後來靺鞨粟末部、白山部的控制區。白山靺鞨的分布區是今朝鮮東北部,粟末部最初的中心地區是今敦化一帶,後來移至吉林市一帶。他們後來成為渤海國人。
參考文獻
《渤海國志長編》卷十六《族俗考》
「渤海部族本為粟末靺鞨,其先居於太白山之北,依粟末水以居,隋開皇中,其酋帥突地稽與高麗戰,不勝,乃率八部勝兵千餘人,自扶餘城西北,舉部內附,時煬帝已即位,授突地稽金紫光祿大夫,遼西太守,處於營州。遼東之役,突地稽率部以從,每有戰功,帝優賚之。唐武德初間,譴使朝貢,唐祖以其部落置燕州,仍以突地稽為總管。劉黑闥之叛也,突地稽率所部赴定州,譴使詣太宗,請受節度,以戰功封蓍國公,又徙其部落於幽州昌平城,會高開道引突厥來攻幽州,突地稽邀擊大破之,貞觀初,拜右衛將軍賜姓李氏,尋卒,子謹行,武力絕人,麟德中,歷遷營州都督,其部落家僮數千人,以財力雄邊,為夷人所憚,其後屢有戰功,累官鎮軍大將軍,行右衛大將軍,封燕國公,永淳元年卒,贈幽州都督。」
來源 孫進己:《東北民族源流》
☞ 백돌말갈(伯咄靺鞨)
백돌말갈(伯咄靺鞨)은 백돌부(伯咄部)이니 신당서(新唐書)에서는 「골돌부(汩咄部)」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북위(北魏) 때, 물길(勿吉) 7부(部)의 하나로, 수당(隋唐) 때에 말갈 7부(部)에 하나이다. 부락은 속말부(粟末部) 북쪽에 자리하고 군사 7천이 있다.
속말부(粟末部)가 크게는 지금 길림성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송화강 중류에 너른 지구에 퍼져 사는 까닭에 말갈 각 부(部)는 서로 거리가 2, 3백 리(里)이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백돌부(伯咄部)가 크게 납림하(拉林河) 유역에서 퍼져 살았다고 추측하고 있다. 곧 지금에 길림성(吉林省) 서란시(舒蘭市), 부여시(扶餘市) 동부, 유수현(榆樹縣)과 흑룡강성 오상(五常) 일대이다. 수(隋)나라 때 백돌부(伯咄部)가 강성하여 벌써 부락군사연맹(部落軍事聯盟)을 이루고 뛰어난 군사 7천을 쥐고 있으며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업은 이미 일정 발전을 이루었고 다만 그대로 반지하(半地)에 움집에 집에서 살았다. 수(隋) 말과 당(唐) 초에 고구려에게 깨지고 신하로서 고구려에 소속되어 당조(唐朝)가 고구려와 전쟁 중에 고구려를 도왔다. 총장(總章) 원년(668년), 당(唐)이 고구려를 평정한 뒤, 백돌부(伯咄部) 무리가 이리저리 도망하여 흩어져 그 유민들이 싹 다 발해국으로 들어가 발해(渤海) 호적 편성(編戶)에 한 부분을 이루었다.
伯咄靺鞨
伯咄靺鞨,即伯咄部,新唐書譯作「汩咄部」,是北魏勿吉七部之一、隋唐時期靺鞨七部之一,部落位置在粟末部北,有兵七千。[1]
因為粟末部大體分布在以今吉林省吉林市為中心的松花江中游廣大地區,靺鞨各部相距二三百里,因此學界推測伯咄部大體分布在拉林河流域,即今吉林省舒蘭市、扶餘市東部、榆樹縣和黑龍江省五常一帶。[1]隋朝時期,伯咄部強盛,已形成部落軍事聯盟,擁有勝兵七千,從事農業、漁業。農業已有一定發展,但仍住半地穴式的房屋。隋末唐初為高句麗所破,臣屬高句麗,在唐朝與高句麗戰爭中,幫助高句麗。總章元年(668年)唐平高句麗後,伯咄部眾紛紛逃散,其遺民併入渤海國,成為渤海編戶。
☞ 안거골말갈(安車骨靺鞨 : 鐵利部)
안거골말갈(安車骨靺鞨 : 곧 철리부(鐵利部))
안거골말갈(安車骨靺鞨)은 안거골부(安車骨部)이니 또 안거골(安居骨)이라고도 쓴다. 이는 북위(北魏) 시대에 물길(勿吉) 7부(部)의 하나로, 수당(隋唐) 때 말갈(靺鞨) 7부(部)의 하나이다. 안거골(安車骨)은 백돌부(伯咄部) 동북방에 있으니 지금에 흑룡강성 의란현(依蘭縣) 동남과 그 동쪽 지구와 영안시(寧安市) 및 무단강시(牡丹江市)를 중심으로 한 무단강(牡丹江) 유역이다. 일설에 하얼빈시(哈爾濱市), 아성구(阿城區), 오상시(五常市) 땅에 아습하(阿什河) 유역에 있으니, 아륵초객(阿勒楚喀) 즉 안거골(安車骨)의 소리가 굴러 바뀐 것이다. 「안거골(安車骨)」은 만어(滿語)로 뜻은 「금(金)」이다. 수(隋) 말과 당(唐) 초, 농업이 벌써 일정 발전을 이루었고 다만 반지하 움집에서 산다. 이미 부락군사연맹을 형성하였으나, 세력이 비교적 약하여 뛰어난 군사가 3천을 넘지 못하였다. 이 부(部)는 고구려에 공격을 받아 깨졌고 신하로서 고구려에 붙었다. 당조(唐朝)가 고구려를 멸하자 그 부(部)에 무리가 달아나 흩어졌다. 남은 백성들은 싹 다 발해국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거듭한 뒤에 차츰 발전하고서 여진완안부(女真完顏部)가 되었다.
安車骨靺鞨(鐵利部)
安車骨靺鞨,即安車骨部,又作安居骨。是北魏勿吉七部之一、隋唐時期靺鞨七部之一。
安車骨位於伯咄部東北方,相當於今黑龍江省依蘭縣東南和以東地區,寧安市、牡丹江市為中心的牡丹江流域;一說在哈爾濱市、阿城區、五常市境阿什河流域、阿勒楚喀即安車骨之轉音。「安車骨」,滿語意為「金」[來源請求]。隋末唐初,農業已有一定發展,但仍住半地穴式房屋。已形成部落軍事聯盟,勢力較弱,勝兵不過三千。該部被高句麗攻破,臣附高句麗。唐朝滅高句麗,其部眾奔散。遺民併入渤海國。一再後逐漸發展,成為女真完顏部。
⇀ 철리말갈(鐵利靺鞨)
철리말갈(鐵利靺鞨)은 곧 철리부(鐵利部)이니 이는 당조(唐朝) 때에 時期 흑수말갈(黑水靺鞨) 16부의 하나였다.
당조(唐朝) 시기에 철리말갈(鐵利靺鞨)은 발해국과 흑수부(黑水部) 사이에 위치하였으니 지금 흑룡강 호란하(呼蘭河) 유역에서 살았는데 의란현(依蘭縣) 서남쪽 마대둔(馬大屯), 쌍압산(雙鴨山) 일대에 터 잡아 살았다. 일설에는 백력(伯力 : 하바롭스크) 부근에 있었고 하고 유태자치주(猶太自治州) 땅에 있다고도 하며 사할린(庫頁島)와 거리가 멀지 않다고도 하며 또한 흑룡강성 요력하(撓力河) 그 동쪽, 비금하(比金河)와 대오소이가하(大烏蘇爾卡河) 두 하천 유역과 그 동쪽에 바다 지역까지로 점찍고 있고 오랫토록 《요사(遼史)》를 근거하여 청나라 승덕현(承德縣, 지금 요녕성 심양시)부근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철리부(鐵利部)는 당조(唐朝)와 연계가 한껏 긴밀하여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때 사신을 자주 보내 조공하였었다. 개원(開元) 4년(716년), 당나라 조정은 이 부(部)의 수령을 중랑장(中郎將)에 제수하였고 개원(開元) 6년(718년)에 그 대수령(大首領)을 수중랑장(守中郎將)에 앉혔다가 뒤에 다시 중랑장(中郎將)에 제수하였다. 개원(開元) 12년(724년) 장군(將軍)으로 올려 앉혔다. 그 하수령(下首領) 역시 절충(折衝), 과의(果毅)들에 관직에 제수되었다. 개원(開元) 14년(726年), 철리부를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에 소속시켰다. 발해(渤海)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 때, 발해가 정복하자마자 그 땅에 철리부(鐵利府)를 두었다. 철리부(鐵利府)는 발해 15부(府)의 하나였으니, 광(廣), 분(汾), 포(蒲), 해(海), 의(義), 귀(歸)라는 6주(六州)를 거느리고 광주(廣州)를 소재지로 다스렸다. 요(遼)나라 때는 이 부(部)를 「철려(鐵驪)」라 일컫고 조금 남쪽으로 옮겨 여진(女真)의 서쪽에 자리하게 하였다. 훗날 여진(女真)에 융합되었다. 금나라 때, 이들을 모두어서 「여진(女真)」이라 불렀다.
鐵利靺鞨
鐵利靺鞨,即鐵利部,是唐朝時期黑水靺鞨十六部之一。
唐朝時鐵利靺鞨位於渤海國與黑水部之間,居住在今黑龍江省呼蘭河流域,依蘭縣以西南馬大屯、雙鴨山一帶。一說在伯力附近,一說在猶太自治州境,一說距庫頁島不遠,也有比定在今黑龍江省撓力河以東、比金河與大烏蘇爾卡河兩河流域及其以東至海地,舊有依《遼史》指在清朝承德縣(今遼寧省瀋陽市)附近。
鐵利部與唐朝聯繫十分密切,唐玄宗開元年間,曾多次遣使朝貢。開元四年(716年)唐朝授該部首領為中郎將,開元六年(718年)授其大首領為守中郎將,後復授中郎將,開元十二年(724年)升授將軍。其下首領亦被授為折衝、果毅等官。開元十四年(726年)屬黑水都督府。渤海文王大欽茂時,即被渤海征服,以其地置鐵利府。鐵利府為渤海十五府之一,領廣、汾、蒲、海、義、歸六州,治廣州。遼朝稱該部為「鐵驪」,稍南遷,位於女真之西。後為女真融合。金朝時統稱為「女真」。
☞ 불열부(拂涅部)
불열말갈(拂涅靺鞨)은 곧 불열부(拂涅部)이니 역시 「대불열(大拂涅)」이라 일컫는다. 이는 북위(北魏) 때 물길(勿吉) 7부(七部)의 하나로 수당(隋唐) 때에 말갈7부(靺鞨七部)에 하나였다.
불열(拂涅)이라는 옛땅은 물길족(勿吉族)의 불열부(拂涅部)가 살던 땅이다. 뒤에 흑수말갈(黑水靺鞨) 16부(部) 가운데에 한 부(部)이다. 《수서(隋書)》에서는 그들이 백돌말갈(伯咄靺鞨)에 동쪽에 퍼져 살았다고 일컫고 있으니 지금 무단강(牡丹江) 하류에 동쪽에서 흥개호 서쪽에 위치하니 지금 밀산현(密山縣) 일대이다. 남북조(南北朝) 때 지금 흑룡강성 장광재령(張廣才嶺) 동쪽에 영안시(寧安市)를 중심으로한 무단강(牡丹江) 유역에서 살았다. 오래된 설에는 심양시 서북에 요녕성 신민시(新民市) 일대에서 살았다 하고 더러는 지금에 요녕성 북진시(北鎮市) 땅에 살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에 하얼빈시(哈爾濱市) 남쪽에 납림하(拉林河) 지구에 살았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모두들 「불열(拂涅)」은 곧 「물길(勿吉)」이라는 소리가 굴러 바뀐 것으로, 만어(滿語)로 「삼림(森林)」이라는 뜻이라 말한다. 불열부는 부락군사연맹을 이루었지만, 세력이 비교적 약하여 뛰어난 군사가 3천을 넘지 못하였다. 말갈(靺鞨) 때 당조(唐朝)와 끈끈한 연계가 있어 당이 고구려를 멸한 뒤에 당조(唐朝)는 불열주(拂涅州)를 설치하고 하북도(河北道)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예속시켰다. 발해국이 나라를 세운 뒤 조금 서쪽에다 옮겨 두고서 그대로 독립하여 살게 하였다.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때, 8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한 적이 있었는데 당조(唐朝)에게 고래 눈알(鯨睛), 담비(貂鼠), 흰토끼(白兔) 가죽들을 올렸다. 개원(開元) 6년(718년), 대수령이 당(唐)이 수중랑장(守中郎將)에 제수하였고 그 수령들에 낭장(郎將), 중랑장(中郎將), 좌무위절충(左武衛折衝) 들 관직에 제수하였다. 얼추 발해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때에 이 부는 발해에게 병합되었고 발해는 동평부(東平府)를 설치하였다. 요조(遼朝), 금조(金朝) 때에 ‘올야(兀惹)’라고 고쳐 불렀다.
拂涅部
拂涅靺鞨,即拂涅部,亦稱「大拂涅」。是北魏勿吉七部之一、隋唐時期靺鞨七部之一。
拂涅故地勿吉族拂涅部所居之地。後為黑水靺鞨十六部中的一部。《隋書》稱其分布在伯咄靺鞨以東,居今牡丹江下游以東、興凱湖以西,今密山縣一帶,南北朝時在今黑龍江省張廣才嶺以東以寧安市為中心的牡丹江流域。舊說在今瀋陽市西北之遼寧省新民市一帶,或說在今遼寧省北鎮市境,有人說在今哈爾濱市南的拉林河地區,並說「拂涅」即「勿吉」轉音,滿語為 「森林」之意。已形成部落軍事聯盟,勢力較弱,勝兵不過三千。靺鞨時期與唐朝有密切聯繫,唐滅高句麗後,唐朝設置拂涅州隸河北道安東都護府。渤海國建國後,稍向北徙,仍獨立存在。唐玄宗開元、天寶年間,曾八次遣使朝貢,給唐朝進貢鯨睛、貂鼠、白兔皮等。開元六年(718年),大首領被唐授為守中郎將,其首領被授為郎將、中郎將、左武衛折衝等官職。大約在渤海宣王大仁秀時期為渤海所並,置東平府。遼朝金朝時改稱兀惹。
☞ 호실부(號室部, 곧 월희부(越喜部))
호실말갈(號室靺鞨)은 곧 호실부(號室部)이니 이는 북위(北魏) 때 물길(勿吉) 7부(七部)에 하나로 수당(隋唐) 때에 말갈 7부(靺鞨七部)의 하나이다.
숙신인(肅慎人)의 옛터에서 살았는데 점차 발전하여 흑룡강과 무단강(牡丹江) 유역에 이르렀다. 삼국(三國) 때 이 부(部)를 「호실(號室)」이라 일컬었으며 남북조(南北朝) 때 수조(隋朝) 때에 이미 불열부(拂涅部) 동쪽(지금 오소리강 유역, 흥개호(興凱湖) 서쪽 기슭에 동쪽인 아라사 빈해변강구(濱海邊疆區) 일대)에서 살았다. 그 활동 지역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흑룡강성 영안현(寧安縣)을 중심한 무단강(牡丹江) 유역에 살았다 하고 아울러 호실(號室)은 곧 숙신(肅慎)이 바뀐 소리라고 생각하고 더러는 옥저(沃沮)와 더불어 「소리가 같은 말을 빌려왔다」 한다. 일설에는 지금에 흥개호(興凱湖) 부근과 수분하(綏芬河) 상중류 지구에서 퍼져 살았다 한다. 호실부(號室部)는 벌써 부락군사연맹을 이루었지만, 세력은 비교적 약하여 뛰어난 군사가 3천을 넘지 못하였다. 수(隋) 말과 당(唐) 초, 신하로서 고구려에 붙었다. 당조(唐朝)가 고구려에 대해 전쟁을 걸었던 중에 고구려를 도와서 당나라에 항거하였다. 당(唐)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년), 당이 고구려를 멸하자 호실부(號室部)는 달아나 흩어지고서 들리는 소식이 없다. 발해국이 세워진 뒤에 그 남은 국민들은 발해 호적 편성에 한 부분을 이루었다.
號室部(越喜部)
號室靺鞨,即號室部,是北魏勿吉七部之一、隋唐時期靺鞨七部之一。
居住在古肅慎人的故址,逐漸發展到黑龍江和牡丹江流域。三國時期該部稱「號室」,南北朝到隋朝時已經位於拂涅部以東(今烏蘇里江流域,興凱湖西岸以東俄羅斯濱海邊疆區一帶)。其活動地域有兩說,一說在黑龍江省寧安縣為中心的牡丹江流域,並認為號室乃肅慎轉音,或與沃沮「為同音相假」;一說為分布在今興凱湖附近及綏芬河上中游地區。號室部已形成部落軍事聯盟,勢力較弱,勝兵不過三千。隋末唐初臣附高句麗。在唐朝對高句麗戰爭中,助高句麗抗唐。唐高宗總章元年(668年)唐滅高句麗,號室部奔散無聞。渤海國建國後,其遺民成為渤海編戶。
⇀ 월희말갈(越喜靺鞨)
월희말갈(越喜靺鞨)은 곧 월희부(越喜部)로 이는 당조(唐朝) 때 흑수말갈(黑水靺鞨) 16부(部)의 하나이다.
월희말갈(越喜靺鞨)은 발해와 흑수부(黑水部) 사이에 있었으니 그 거주지는 요녕 서북부와 길림 서부지구에 있었다. 뒤에 와서 지금 흑룡강성 동강시(同江市), 요하현(饒河縣)에서 아라사 경내에 대오소이가하(大烏蘇爾卡河) 유역 일대까지로 옮겨가 살았다. 일설에 지금 우수리강(烏蘇里江) 동쪽에서 동해 지구, 흥개호(興凱湖) 부근까지 있었다 한다. 일설에는 흑룡강성 부금현(富錦縣)에서 하바롭스크(哈巴羅夫斯克)와 그 이하 지방, 오소리강(烏蘇里江) 양 기슭까지 포괄한다. 오랫동안 《책부원귀(冊府元龜)》 959권과 《요사(遼史) 지리지》 들에 기록에 근거해 보면 지금 길림성 회덕현(懷德縣)에서 요녕성 철령시(鐵嶺市), 창무현(彰武縣) 일대까지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대(唐代) 월희부(越喜部)는 당 조정과 연계가 끈끈하여 개원(開元) 2년(714년)에서 정원(貞元) 18년(802년)까지 자주 당나라에 조공하였었다. 당이 고구려를 멸한 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아래에 바로 월희도독부(越喜都督府)를 설치하였다. 개원(開元) 때 잇달아 일곱 차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개원(開元) 11년(723년), 당 조정에서 그 부(部)의 수령을 중랑장(中郎將)에 봉하였다. 발해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 때에 발해에 정복 당하자 싹 다 발해국에 들어갔으니 발해 정권 그 부(部)에 안원부(安遠府)와 회원부(懷遠府)를 설치하였다.
越喜靺鞨
越喜靺鞨,即越喜部,是唐朝時期黑水靺鞨十六部之一。
越喜靺鞨位於渤海與黑水部之間,其居住地在遼寧西北部和吉林西部地區。後來遷居在今黑龍江省同江市、饒河縣至俄羅斯境內大烏蘇爾卡河流域一帶。一說在今烏蘇里江以東至日本海地區,興凱湖附近;一說包括今黑龍江省富錦縣至哈巴羅夫斯克及其以下地方、烏蘇里江兩岸。舊依《冊府元龜》卷959及《遼史·地理志》等記,認為在今吉林省懷德縣至遼寧省鐵嶺市、彰武縣一帶。
唐代越喜部與朝廷聯繫密切,開元二年(714年)至貞元十八年(802年)曾多次向唐朝貢。唐滅高句麗後,在安東都護府下即設有越喜都督府。開元年間,曾先後七次遣使朝貢。開元十一年(723年)朝廷授封該部首領為中郎將。渤海康王大嵩璘時,被渤海征服,併入渤海國,渤海政權在該部設安遠府和懷遠府。
☞ 우루말갈(虞婁靺鞨)
우루말갈(虞婁靺鞨)은 곧 우루부(虞婁部)이니 일설에는 「우루(虞婁)」는 바로 「읍루(挹婁)」가 굴러 바뀐 소리라고 한다. 이는 당조(唐朝) 때, 흑수말갈(黑水靺鞨) 16부(部) 안에 한 부(部)이다.
그 겨레는 근원이 멀고도 머니, 동한(東漢)에서 양 진(晉) 시대에 읍루(挹婁)에서 흘러나온다. 이 부락은 발해국과 흑수부 사이에 있었으니, 지금 흑룡강성 의란현(依蘭縣)에서 부금현(富錦縣) 어느 곳에 송화강 유역이다. 일설에는 오소리강(烏蘇里江) 주변에 있었으니 크게는 지금 흥개호(興凱湖) 동쪽에서 동해 땅에 있었고, 지금 아라사 빈해변강구(濱海邊疆區) 동북 첩이내이(捷爾內伊)에서 오이가(奧耳加) 일대에 있었다. 우루부(虞婁部) 수령은 당조(唐朝)와 더불어 오가는 관계를 맺었다.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때, 두 차례 당 조정에 입공하였다. 개원(開元) 14년(726년),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에 소속시켰다. 당(唐) 덕종(德宗) 정원(貞元) 18년(802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발해왕 대무예(大武藝) 때, 발해에 예속되어 부림을 받았고 발해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때, 크게 영역을 열어서 우루부(虞婁部)는 발해국에 정복 되고서 아울러 그 땅이 정리부(定理府)와 안변부(安邊府)를 설치하였다. 그 백성들은 대조영(大祚榮)에 의해 안쪽에 땅으로 옮겨졌다. 요조(遼朝)는 이들을 「오국부(五國部)」에 하나라고 일컬었다.
虞婁靺鞨
虞婁靺鞨,即虞婁部,一說「虞婁」即「挹婁」轉音。是唐朝時期黑水靺鞨十六部中的一部。
其族源悠遠,源於東漢到兩晉時之挹婁,該部落位於渤海國與黑水部之間,在今黑龍江省依蘭縣至富錦縣一段的松花江流域。一說在烏蘇里江左右,大體在今興凱湖以東至日本海之地,在今俄羅斯濱海邊疆區東北捷爾內伊至奧耳加一帶。虞婁部首領與唐朝有往來關係。唐太宗貞觀年間曾兩次向唐朝入貢,開元十四年(726年)屬黑水都督府。唐德宗貞元十八年(802年)曾遣使朝貢。渤海王大武藝時,役屬渤海,渤海宣王大仁秀時,開大境宇,虞婁部被渤海國征服,並以其地置定理府和安邊府。其民被大祚榮內遷。遼朝為「五國部」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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