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선비(鮮卑) (출처 :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 동한(東漢) 순제(順帝 재위기간 : 125년 - 144년) 때 선비(鮮卑)가 다시 변방 요새(塞)로 들어와 대군(代郡) 태수(太守)를 죽였다. 한(漢)이 여양(黎陽)의 영병(營兵)을 보내 중산(中山)에 주둔하게 하고 변경 둘레 군(郡)의 병사들을 요새 아래에 주둔시키고 오영(五營)의 쇠뇌 사수(弩帥)들을 훈련 시키고, 그들에게 전투에서 쇠뇌를 쏘는 법을 다른 병사들에게 가르치도록 명하였다. 남선우(南單于)가 보병과 기병 만여 사람을 이끌고 한(漢)나라 군대를 도와 이들을 쳐 물러나게 하였다. 뒤에 오환교위(烏丸校尉) 경엽(耿曄)이 솔중왕(率衆王)을 이끌고서 변방 요새(塞)를 나가 선비(鮮卑)를 치고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사람이 많았다. 이에 선비(鮮卑) 3만여 가구(落)가 요동(遼東)에 나아와 항복하였다. 흉노(匈奴)와 북선우(北單于)가 피해 달아난 뒤에 남은 겨레붙이 십여만 가구(落)가 요동(遼東)에 나아와 다른 겨레들과 섞여 살며 모두 스스로 선비 군사(鮮卑兵)라 이름 붙였다.
▶順帝時,復入塞,殺代郡太守。漢遣黎陽營兵屯中山,緣邊郡兵屯塞下,調五營弩帥令教戰射,南單于將步騎萬餘人助漢擊却之。後烏丸校尉耿曄將率衆王出塞擊鮮卑,多斬首虜,於是鮮卑三萬餘落詣遼東降。匈奴及北單于遁逃後,餘種十餘萬落詣遼東雜處,皆自號鮮卑兵。
▶투록후(投鹿侯)가 흉노군(匈奴軍)을 따라 외지에서 지낸 지 3년 되었는데 그 아내가 집에 있으면서 아들을 낳았다. 투록후(投鹿侯)가 집에 돌아와 보니 괴이하게 여겨 아이를 죽이려 하였다. 아내가 하는 말이 ‘어느 날 낮에 길을 가는데 우레가 진동하는 소리를 듣고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는데 우박이 내 입으로 들어옵디다. 이를 삼켰더니 마침내 몸에 아이가 들어서 열 달이 되자 몸을 풀었습니다. 이 아들은 반드시 기특하고 남다름이 있으리니 장차 이 아이를 기릅시다!’ 하였다. 그러나 투록후(投鹿侯)가 그 말을 단단히 믿지 않았다. 아내가 결국 가까운 일가에 말을 하여 그 아들을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아이를 단석괴(檀石槐)라 불렀는데 키가 크고 용맹하고 굳세며 슬기로움과 꾀가 무리에서 뛰어났다. 나이 열네댓 살 때 다른 부(部) 어르신 복분읍(卜賁邑)이 그 외가의 소와 양을 훔쳐 가져가니 단석괴(檀石槐)가 말을 채찍질하며 쫓아가며 공격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상대할 사람이 없어 잃어버린 짐승들을 다 도로 찾았다. 이로 말미암아 부락 사람들은 경외하여 복종하는지라 단석괴가 금법(禁法)을 베풀고 잘잘못을 공평히 가름하여도 감히 도전하는 자가 없었고 마침내 그를 추대하여 어르신으로 삼았다.
▶投鹿侯從匈奴軍三年,其妻在家,有子。投鹿侯歸,怪欲殺之。妻言:「嘗晝行聞雷震,仰天視而雹入其口,因吞之,遂姙身,十月而產,此子必有奇異,且長之。」投鹿侯固不信。妻乃語家,令收養焉,號檀石槐,長大勇健,智畧絕衆。年十四五,異部大人卜賁邑鈔取其外家牛羊,檀石槐策騎追擊,所向無前,悉還得所亡。由是部落畏服,施法禁,平曲直,莫敢犯者,遂推以爲大人。
▶ 단석괴(檀石槐)가 우두머리로 서고 드디어 고류(高柳) 북쪽 3백여 리에 탄한산(彈汗山) 철구수(啜仇水) 가에 부족 연맹체의 정(庭, 조정(朝庭))을 만드니 동부(東部)와 서부(西部) 어르신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이에 병마(兵馬)가 매우 어마해져 남쪽으로는 한(漢)나라 변경을 노략질하고 북쪽으로 정령(丁令)을 막았으며 동쪽으로는 부여(夫餘)를 물리쳤고(물러나게 하고)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을 쳐 흉노(匈奴)의 옛 땅을 다 차지하니 동서(東西)로 만이천여 리(里)요 남북(南北)으로 칠천여 리(里)로 그 그물에 걸린 산천과 수택(水澤)과 염지(鹽池)가 대단히 넓었다. 한(漢)이 이를 근심하여 환제(桓帝 재위기간 : 146년 8월 1일 – 168년 1월 26일) 때에 흉노(匈奴) 중랑장(中郎將張) 환(奐)을 시켜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자 다시 사신(使者)에게 도장(印綬)을 싸서 보내어 곧 단석괴(檀石槐)를 제수하여 왕(王)으로 삼고 그와 더불어 화해하고 가깝게 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단석괴(檀石槐)는 그 제안을 거부하고 들어주지 않고 노략질이 더 심하여졌다.
단석괴가 드디어 그 땅을 나누어 중(中), 동(東), 서(西) 세 부(部)로 만들었다. 우북평(右北平) 동쪽을 따라서 요동(遼東)에 부여(夫餘)와 예맥(濊貊)이 닿아있는 곳까지를 동부(東部)로 하였으니 20여 마을이 되고 그 어르신들은 미가(彌加), 궐기(闕機), 소리(素利), 괴두(槐頭)였다. 우북평 서쪽을 따라 상곡(上谷)까지를 중부(中部)로 하였으니 10여 마을이 되고 그 어르신들은 가최(柯最), 궐거(闕居), 모용(慕容)들로 큰 장수(大帥) 들이였다. 상곡(上谷) 서쪽부터 둔황(燉煌) 서쪽에 오손(烏孫) 땅과 닿아있는 곳까지 서부(西部)로 하였으니 20여 마을이 되고 그 어르신들은 치건락라(置鞬落羅), 왈률추연(曰律推演), 연려류(宴荔游) 들로 모두 어김없는 큰 장수들이었지만 일에 대한 결단은 단석괴(檀石槐)에 속해있었다. 영제(靈帝 재위기간 : 168년 - 189년) 때에 이르러서 유(幽)와 병(并) 두 주(州)를 크게 약탈하니 한나라 변경 가에 여러 군(郡)이 그 해독을 입지 않은 해가 없었다.
① 고류(高柳)... : 흠정열하지(欽定熱河志)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고류(髙栁)는 한(漢)나라 때 현(縣)이니 지금(청나라) 양고현(陽髙縣,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 지역에 있었다. ... 통고(通考)에 ‘단석괴정(檀石槐庭)’에 대해 ‘마읍군(馬邑郡)의 둘레’라고 풀이(注)하였는데 이는 단석괴(檀石槐)가 정(庭)을 세웠던 곳으로 지금 대동(大同)과 삭평(朔平) 두 부(府)의 북쪽 지경 밖에 있어 동쪽으로는 영금하(英金河)에 이르니 좌우 모두 선비(鮮卑)의 강역이 미쳤던 곳으로, 지금 승덕부(承徳府)에 속한 북쪽 영역이 모두 선비(鮮卑)의 땅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호삼성(胡三省)이 통감(通鑑) 주(注)에서 송백(宋白)의 이론을 인용하였는데, 그렇다면 건안(建安 196년 - 220년) 때에 선비(鮮卑)의 부락연맹체 조정(朝庭)은 우북평군(右北平郡) 둘레에 있었으니 대체로 선비(鮮卑)가 강성해지면서 점차 옮겨 남쪽으로 갔을 때 벌써 지금(청나라) 승덕부(承徳府)에 소속된 남쪽 지경에까지 동시에 미쳐 나갔고, 때문에 위무(魏武, 곧 조조(曹操))가 노룡 어귀(盧龍口, 지금 천서현(遷西縣)과 관성현(寬城縣) 사이에 있다 함) 동쪽으로 나가서 오환(烏桓)을 쳤을 때 반드시 먼저 선비정(鮮卑庭)을 건너야 했던 것이다.”
欽定熱河志卷五十七 : 髙栁為漢縣 在今陽髙縣境... 通考於檀石槐庭 注馬邑郡界 是檀石槐建庭之處在今大同朔平二府北境外 而東至英金河左右皆鮮卑疆域所及 可知今承徳府屬之北境皆鮮卑地也 胡三省通鑑注引宋白之說 則謂建安時 鮮卑庭在右北平郡界 盖鮮卑强盛漸徙而南 已兼及今承徳府屬之南境 故魏武出盧龍口東伐烏桓 必先涉鮮卑庭也
② 탄한산(彈汗山 ) : 통감(通鑑)에는 ‘彈汙山’으로 되어있다. (謂「汗」通鑑作「汙」。) 한편으로는 탄한산(彈汗山)은 지금 내몽고 대청산(内蒙古大青山)이라 하고, 한편으로는 탄한산(彈汗山)은 ‘탄오산(彈汙山)’으로 한나라 때 흉노 지역의 산 이름이며 지금 내몽고 흥화현 (內蒙古興和縣) 동북쪽과 하북 상의현(河北尚義縣) 동남쪽에 있다라고 하니, 옛날 지역에 대한 고찰은 복잡다단하며 왠지 미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으면서 이에 대한 사실적 접근과 연구가 필요하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③ 철구수(啜仇水, 歠仇水) : 한나라 때 선비(鮮卑) 겨레 땅에 있던 물 이름. 지금 흥화현(興和縣)과 하북성(河北省) 회안현(懷安縣) 땅에 있는 동양하(東洋河)라고 한다.
④ 승덕부(承徳府):청나라 때인 1700년대 초중반 승덕부(承德府)는 란평현(灤平縣,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서쪽 부분), 풍녕현(豐寧縣, 豐寧滿族自治縣), 평천주(平泉州, 하북(河北) 평천시구(平泉市區)), 적봉현(赤峰縣), 건창현(建昌縣), 조양현(朝陽縣)이라 한다.
⑤ 영금하(英金河) : 요하(遼河) 상류에 서요하(西遼河) 상류의 노합하(老哈河, 노합은 거란어이고 뜻을 철(鐵)) 지류이다. 옛날 이름은 영격하(英格河)인데 ‘英金’은 몽고어 ‘英格’과 소리가 같고 뜻은 다르다. 영격(英格)은 어미 낙타를 뜻한다 한다.
⑥ 우북평군(右北平郡) : 전국시대 때 연(燕)나라에서 설치되었던 행정구역. 군(郡)의 소재지는 평강현(平剛縣) 평강성(平剛城)에 있었으니 지금 내몽고(内蒙古) 영성현(寧城縣)이라 한다.
⑦ 부여(夫餘) : 삼국지(三國志) 위지(魏書) 부여에 관한 내용을 조금 소개한다.
“부여(夫餘)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고 현토(玄菟)와 거리가 천 리(里)이니 남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와 닿아있고 동쪽으로는 읍루(挹婁)와 잇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해있고 북쪽으로는 약수(弱水)가 있으니 땅 크기가 2천 리(里)는 족히 된다.”
三國志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 : 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
⑧ 상곡(上谷) : 상곡군(上谷郡)은 기원전 283년, 전국시대 연(燕)나라 소왕(昭王) 때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행정구역. 군(郡) 소재지는 지금에 하북성(河北省) 장가구시(張家口市) 회래현(懷來縣) 안에 있었다. 상곡군은 연나라가 쌓은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곳이다. 부여(夫餘)가 ‘장성(長城) 북쪽’에 있었다면 이곳과의 관계도 알아보아야 하리라.
▶檀石槐旣立,乃爲庭於高柳北三百餘里彈汗山啜仇水上,東西部大人皆歸焉。兵馬甚盛,南鈔漢邊,北拒丁令,東却夫餘,西擊烏孫,盡據匈奴故地,東西萬二千餘里,南北七千餘里,罔羅山川、水澤、鹽池甚廣。漢患之,桓帝時使匈奴中郎將張奐征之,不克。乃更遣使者齎印綬,即封檀石槐爲王,欲與和親。檀石槐拒不肯受,寇鈔滋甚。乃分其地爲中東西三部。從右北平以東至遼,東接夫餘、濊貊爲東部,二十餘邑,其大人曰彌加、闕機、素利、槐頭。從右北平以西至上谷爲中部,十餘邑,其大人曰柯最、闕居、慕容等,爲大帥。從上谷以西至燉煌,西接烏孫爲西部,二十餘邑,其大人曰置鞬落羅、曰律推演、宴荔游等,皆爲大帥,而制屬檀石槐。至靈帝時,大鈔畧幽、并二州。緣邊諸郡無歲不被其毒。
▶ 동한(東漢) 희평(熹平) 6년(177년) 때에 임금 영제 유굉(靈帝 劉宏)이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 하육(夏育)을 보내어 선비 중랑장(鮮卑中郎將) 전안(田晏)을 깨뜨렸고 흉노 중랑장(匈奴中郎將) 장민(臧旻)이 남선우(南單于)와 함께 안문새(鴈門塞)를 나와 세 갈래 길로 한꺼번에 진군하여 이천여 리를 지나며 행군하였다.
단석괴(檀石槐)는 부(部)의 무리를 이끌고 적들을 맞아 치는데 민(旻) 들이 깨지고 도망하여 돌아온 병마(兵馬)는 열에 하나에 그칠 뿐이었다. 선비(鮮卑) 무리가 날로 많아져 농사와 목축과 수렵을 하였는데도 먹거리를 대기에 부족하였다. 뒤에 단석괴(檀石槐)가 마침내 오후진수(烏侯秦水)를 순시하는데 그 강물의 길이가 까마득히 수백 리여서 물이 머무른 채 흐르지 못할 정도였고 강물 안에 물고기가 있어도 잡지 못하였다. 한인(汗人, 또는 왜인(倭人))들이 물고기를 잘 잡는다는 소문을 듣고서 이에 단석괴(檀石槐)가 동쪽으로 가서 한국(汗國, 또는 칸국, 후한서 등에는 왜국(倭國)이라 하였다)을 치고 천여 집을 손에 넣고서 이들을 오후진수(烏侯秦水, 또는 오집진수(烏集秦水)) 가에 옮겨 두고 물고기를 잡게 시키고서 이 물고기들로 식량에 보탰다. 지금까지도 오후진수(烏侯秦水) 가에서 한인(汗人) 수백 호가 살고 있다.
단석괴(檀石槐)가 나이 45살에 죽고 아들 화련(和連)이 이어 우두머리 자리에 섰다. 화련(和連)은 재능이나 힘이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였고 탐욕스럽고 무절제하여 법을 결단하는 데 공평하지 못하여 배반한 무리가 태반이었다. 영제(靈帝) 말년에 선비 겨레가 자주 노략질하여 북쪽 땅을 공격하였으니 북쪽 땅에 평범한 사람 중에 쇠뇌를 잘 쏘는 사람이 화련을 쏴 맞추어서 화련(和連)이 바로 죽었다. 그의 아들 건만(騫曼)이 어려 화련의 형에 아들 괴두(魁頭)가 이어서 자리에 섰다. 괴두(魁頭)가 이미 서고 나서 건만(騫曼)이 장성하고서 괴두(魁頭)와 나라를 갖고 다투니 그 무리가 마침내 헤어져 흩어졌다. 괴두(魁頭)가 죽고 그 아우 보도근(步度根)이 이어 우두머리 자리에 섰다. 단석괴(檀石槐)가 죽은 뒤에 여러 어르신(大人)이 마침내 ‘어르신 자리’를 추천이 아닌 (자식들에게) 세습시킨 것이다.”
▶熹平六年,遣護烏丸校尉夏育,破鮮卑中郎將田晏,匈奴中郎將臧旻與南單于出鴈門塞,三道並進,徑二千餘里征之。檀石槐帥部衆逆擊,旻等敗走,兵馬還者什一而己。鮮卑衆日多,田畜射獵,不足給食。後檀石槐乃案行烏侯秦水,廣袤數百里,停不流,中有魚而不能得。聞汗人善捕魚,於是檀石槐東擊汗國,得千餘家,徙置烏侯秦水上,使捕魚以助糧。至于今,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檀石槐年四十五死,子和連代立。和連材力不及父,而貪淫,斷法不平,衆叛者半。靈帝末年數爲寇鈔,攻北地,北地庶人善弩射者射中和連,和連即死。其子騫曼小,兄子魁頭代立。魁頭旣立後,騫曼長大,與魁頭爭國,衆遂離散。魁頭死,弟步度根代立。自檀石槐死後,諸大人遂世相襲也。
① 내몽고 로합하(老哈河 곧 오후진수(烏侯秦水)) 동쪽에 있었던 왜인국(倭人國)에 대한 기록
후한서(後漢書)에 왜인국(倭人國) 기록 : “단석괴(檀石槐)가 결국 스스로 주변을 돌게 되고 오후진수(烏侯秦水)가 까마득히 수백 리로 펼쳐져 물이 멈춰 흐르지 못하여 그 안에 물고기가 있어도 이것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단석괴가 왜인(倭人)이 그물망을 쳐 물고기를 잘 잡는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동쪽으로 가서 왜인국(倭人國)을 쳐서 천여 집을 손에 넣고 진수(秦水) 가에 옮겨 두고 왜인들을 시켜 물고기를 잡게 하여서 식량에 보태었다.”
後漢書/卷90 檀石槐乃自徇行,見烏侯秦水廣從數百里,水停不流,其中有魚,不能得之。聞倭人善網捕,於是東擊倭人國,得千餘家,徙置秦水上,令捕魚以助糧食。
御定子史精華 (四庫全書本)/卷079 倭人捕魚〈後漢書鮮卑傳種衆日多田畜射獵不足給食檀石槐乃自徇行見烏集秦水廣從數百里水停不流其中有魚不能得之聞倭人善網捕于是東擊丨丨國得千餘家徙至秦水上令丨丨以助糧食〉
② 오후진수(烏侯秦水) : 진한(秦漢) 때에는 오후진수(烏侯秦水)라 하였고 수(隋) 때에는 탁흘신수(讬紇臣水), 당(唐) 때에는 토호진수(土護真水), 요금(遼金) 때에는 토하(土河)라고 하였다. 지금에 서요하 상류, 내몽고자치구에 로합하(老哈河)라고 한다.
가)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 땅에 강물 둘이 있으니 북먀리몰리(北乜里沒里)라 하였다가 다시 도외사몰리(陶猥思沒里)라 이름 붙인 것이 바로 그 하나이다. 〔도외사(陶猥思)는 거란말이니 ‘티끌(尘土)’을 뜻하고 몰리(沒里)은 무렌(mören)의 음역으로 ‘강물(河)’을 뜻하는 거란말이라는 한 연구가 있다〕이 강의 원류는 요(遼)나라 중경(中京) 서쪽 마우산(馬盂山)에서 나와 동북으로 흐르니 중화(華)의 말로 이른바 토하(土河)라는 것이 이것이다.
뇨라개몰리(裊羅箇沒里)라 하였다가 다시 여고몰리(女古沒里)라 이름 붙인 것이 그 나머지 하나이다. 원류는 요주(饒州) 서남쪽 평지에 펼쳐진 소나무숲(松林)에서 나오고 곧장 동쪽으로 흐르니 중화(華) 말로 이른바 황하(潢河)가 이것이다.”
契丹國志 : 地有二水。曰北乜里沒里,復名陶猥思沒里者,是其一也,其源流出自中京西馬盂山,東北流,華言所謂土河是也。曰裊羅箇沒里,復名女古沒里者,又其一也,源出饒州西南平地松林,直東流,華言所謂潢河是也。
나) 수서(隋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거란겨레가 부락이 점차 많아져 마침내 북쪽으로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녔다. 요서(遼西) 바로 북쪽 2백 리에 당도하여 탁흘신수(托紇臣水)에 의지하며 살았다.”
《隋書·契丹傳》:“部落漸眾,遂北徙逐水草。當遼西正北二百裏,依托紇臣水而居。”
다) 흠정열하지(欽定熱河志)에 나온 내용이다.
“로하(老河) : 또한 토하(土河)라고 이름한다. 몽고(蒙古)는 로합목릉(老哈穆楞)이라고 이름하는데 원류는 평천주(平泉州, 곧 팔구청(八溝㕔))에서 나온다. 객라심우익(喀喇沁右翼, 지금 내몽고) 남쪽 1백90 리에 영안산(永安山, 한나라 때 마우산(馬盂山))에 속하여 평천주(平泉州)의 소재지 서북 둘레에서 여러 작은 물줄기를 만나 동북(東北)쪽으로 흐르다 대령고성(大寧故城)의 서남쪽에서부터 대령(大寧) 동북에 고성(故城)을 거쳐 다시 북쪽으로 흐르다 적봉현(赤峯縣, 곧 오란합달청(烏蘭哈達㕔)) 경내로 들어가면 옹우특좌익(翁牛特左翼) 남쪽 영역을 거쳐 건창현(建昌縣, 곧 탑자구청(塔子溝㕔))으로 들어가니 이때 오한(敖漢) 서북 땅에 속하면서 영금하(英金河)를 만나고 다시 동북쪽으로 흐르다 조양현(朝陽縣, 바로 삼좌탑청(三座塔㕔))으로 들어가 나만(奈曼) 북쪽 땅에 속하여 객이객좌익(喀爾喀左翼) 서북 둘레에 이른다. 이곳에서 조양현(朝陽縣) 경내를 나와 황하(潢河)와 더불어 함께 오백여 리를 가다가 내려오는 물을 만나 요하(遼河)가 되니 바로 옛 탁흘신수(託紇臣水)로 또한 토호진수(土䕶真水)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수서 거란전(隋書契丹傳)에 ‘요서(遼西) 바로 북쪽 2백 리에 당도하여 탁흘신수(託紇臣水)에 기대어 살았다.’ 하였다.
당서지리지(唐書地理志)에 ‘장성(長城) 어귀 북쪽 8백 리에 토호진하(土䕶真河)가 있으니 해왕(奚王)의 수도(牙帳)였다.’ 하고 그 해전(奚傳)에 ‘해족(奚族)이 토호진하(土䕶真河)에 의지하였다.’ 하였다.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에 ‘성종(聖宗)이 칠금산(七金山) 토하(土河) 가를 지났는데 (남쪽에 구름의 움직임을 바라보니 성곽, 누각, 궁궐의 모습이 있었다. 南望雲氣有郛郭樓闕之狀) 이를 인연으로 이곳에 도읍을 건설할 의론을 하였다.’ 하고 또한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에 토하(土河)가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금사 지리지(金史地理志)에 ‘대정부(大定府) 대정현(大定縣)에 토하(土河)가 있고 장흥현(長興縣)과 삼한현(三韓縣)에 도하(塗河)가 있다.’ 하였다.
원일통지(元一統志)에 ‘도하(塗河)는 원류가 혜주(惠州) 서북쪽에서 나와 주(州) 경계 80리에서 동북쪽을 지나서 흐르다 대령현(大寧縣) 남쪽 영역으로 들어가 대령현(大寧縣) 동북 땅 2백20 리에 이르러 고주(髙州) 땅으로 들어간다. 다시 동북으로 흐르다 행영(行營, 임금이 순시하러 나갈 때 잠시 머물던 곳) 초지(草地)에 이른다.’ 함이 이것이다.
섭융례(葉隆禮)의 거란국지(契丹國志)에 ‘거란(契丹)에 강물이 있으니 ‘북먀리몰리(北乜里没里)’라 하는데 다시 도외사몰리(陶猥思没里)라 이름 붙였다. 원류는 중경(中京) 마우산(馬盂山)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흐른다. 중화(華) 말로 이른바 ‘토하(土河)’라는 것이다.
고조우(顧祖禹)의 방여기요(方輿紀要)에 ‘토하(土河)는 마우산(馬盂山)에서 발원하여 대령위(大寧衛) 남쪽을 지나다 다시 동북으로 흐르다 타안위(朶顔衞) 땅 목엽산(木葉山)에 이르러서 황수(潢水)로 모아진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미만춘(米萬春)의 계문고(薊門考)에 ‘대령성(大寧城) 북쪽에 로화모림(老花母林, 바로 로합목릉(老哈穆楞))이 있으니 번역해서 말하면 “대하(大河)”이다. 청산(青山)에서부터 흘러와 대령성(大寧城) 남쪽을 에둘러 지나가 동북쪽으로 가서 사라모림(捨喇母林, 바로 석라목릉(錫喇穆楞)이 요수(遼水)의 서쪽 원류가 되는 것이다)과 하나가 되어 함께 요동(遼東) 삼차하(三岔河)로 들어간다.’ 하였다. 〔“살펴보면 로화(老花)는 곧 로합(老哈)이고 모림(母林)은 곧 목륜(木倫)이다.”라 하니, 로합하(老哈河)는 바로 대하(大河)이고 더러는 로하(老河)의 뜻이라 한다. 《嘉慶重修一統志》:“按老花,即老哈;母林,即木倫。”〕
로하(老河)가 토하(土河)로 됨에 이제 두 이름이 서로 짝하여 불려진 내력을 톺아보면, 수서(隋書)에서는 탁흘신수(託紇臣水)라 일컫는데 당서(唐書)에서는 토호진수(土䕶真水)라 일컫는다. 토호진수(土䕶真水)가 바로 탁흘신(託紇臣)이고, 번역한 말의 음이 바뀐 것이다. 요(遼)와 금(金) 두 역사책에서 이를 일러서 “토하(土河)는 호진하(䕶真河)의 줄인 글자”라 하였다. 금사(金史)와 원일통지(元一統志)에서는 또한 도하(塗河)라 하니 그렇다면 응당 음이 바뀐 글자에 속할 뿐이다. 수서(隋書)에 ‘거란(契丹)이 탁걸신수(託紇臣水)에 의지하였다.’ 일컫고 당서(唐書)에 다시 ‘해(奚)가 토호진수(土䕶真水)에 의지하였다.’라고 일컬은 것은, 대개 토하(土河)가 오백여 리를 이리저리 거치며 흐르는데 발원은 지금 평천주(平泉州, 곧 팔구청(八溝㕔)) 땅이고, 흘러가다 지금 건창현(建昌縣, 곧 탑자구청(塔子溝㕔))과 조양현(朝陽縣, 곧 삼좌탑청(三座塔㕔)) 땅으로 들어가니 당초에 발원하였을 때는 해왕(奚王)의 아장(牙帳)이 있는 곳이었다가 동북으로 흘러 황하(潢河)에 이를 때에는 거란(契丹) 땅에 속하니 바로 수(隋)나라 때 요서군(遼西郡) 정북(正北)에 해당하는 것이다. 일통지(一統志) 원본(原本)은 ‘옛 탁흘신수(古託紇臣水)와 토호진수(土䕶真水)가 다 지금에 황하(潢河)의 별명이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구당서(舊唐書) 안록산전(安禄山傳)에 ‘거란(契丹)을 징벌할 때 토호진하(土䕶真河)에 이르렀으니 바로 북황(北黄, 황(潢)으로도 쓴다)하(河)이다’라는 문장을 근거하고 구당서(舊唐書)에서 말한 ‘거란(契丹)은 황수(黄水) 남쪽에 있다’와 ‘토호진하(土䕶真河)가 바로, 황하(潢河)이다’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미 토호진하(土䕶真河)에 이르렀을 때는 바로 거란(契丹)의 아장(牙帳)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아래 문장에서는 ‘또한 하루에 이틀 길을 밟아서 삼백 리 거리를 가니 문득 거란(契丹)의 아장(牙帳)에 이르렀다’ 하였는가? 〈신당서(新唐書)에 역시 ‘토호진수하(土䕶真河)에 이르렀는데 밤낮으로 3백 (里)를 갔다.’라 하였다.〉 이른바 ‘곧 북황하(北黄河)’라 했던 것은, 결국 ‘북(北)쪽은 곧(即) 황하(黄河)이다’라는 문장의 오류임을 알게 된다.(知所謂即北黄河者 乃北即黄河之誤)
구당서(舊唐書) 거란전(契丹傳)에 이 일이 실려 있는데 ‘구황수(舊黄水) 남쪽 거란아(契丹衙)에서 그들과 전투를 벌였다.’ 말하고 신당서(新唐書) 거란전(契丹傳)에 ‘황수(潢水) 남쪽에서 큰 전투를 벌였다.’ 말하니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수서(隋書)에서 ‘탁흘신수(託紇臣水)는 요서(遼西) 정북(正北) 2백 리에 있다.’ 말하고 〈수(隋)나라 때 요서군(遼西郡)은 바로 영주(營州, 요녕성 일대)이니 지금 건창(建昌) 조양현(朝陽縣) 구탑자구(舊塔子溝) 삼좌탑청(三座塔㕔) 땅이다.〉 〈이는 역시 토하(土河)가 오한(敖漢,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일대) 날만(奈曼, 내몽고자치구 통료시(通辽市) 일대) 영역에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서(唐書)에 ‘황수(潢水)는 영주(營州) 북쪽 4백 리에 있다.’ 일컬으니 그렇다면 탁흘신수(託紇臣水)는 오히려 황수(潢河)의 남쪽에 있으니 서로 거리가 2백 리라 억지로 합하여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요사(遼史) 지리지(地理志)에 ‘통화(統和) 24년(1006년) 오장원(五帳院)이 옛날 해왕(奚王)의 아장(牙帳) 땅에 나아갔다. 25년 이곳에 성을 쌓고 중경(中京)이라고 부르고 부(府)를 대정(大定)이라 하였다.’ 함에 해왕(奚王)의 아장(牙帳)이 중경(中京)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으니 바로 지금에 로하(老河)가 흘러 지나는 땅이다. 만약 황하(潢河)를 토호진하(土䕶真河)라 한다면 이는 멀리 4백여 리 밖을 나가서 중경(中京)과 더불어 접점이 없다. 당서(唐書) 지리지(地理志) 어양군(漁陽郡) 아래에 ‘옛 노룡(古盧龍)은 해왕(奚王) 아장(牙帳)까지 6백 리이다. 다시 동북쪽으로 토호진하(吐䕶真河) 곁을 따라서 가다가 보면 오백여 리에 거란(契丹)의 아장(牙帳)에 이른다.’ 하였다. 바로 지금 로하(老河)가 황하(潢河)까지 지나는 길거리의 방향과 딱 맞아 떨어지니, 토하진하(土䕶真河)는 바로 지금 로하(老河)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방여요기(方輿紀要)에 또한 ‘토하(土河) 역시 온유하(温榆河)라 이름한다.’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요사(遼史) 지리지(地理志)를 톺아보면 ‘해부(奚部)가 아(牙)를 세웠으니 응당 요락하(饒樂河) 물의 남쪽, 온유하(温榆河) 물의 북쪽이다.’라고 일컫고 아랫글에서 다시 ‘성종(聖宗)이 토하(土河) 물가에서의 인연으로 그곳에 도읍을 건설할 의논을 하였다.’ 일컬었다. 이 토하(土河)가 지나는 곳은 온유하(温榆河)와 똑같은 강물이 아님이 분명하다. 방여기요(方輿紀要)에서 일컬은 바는 근거로 삼기에 대체로 부족하다.
한편 일통지(一統志) 원본(原本)을 톺아보면 ‘토하(土河)의 이름은 요(遼) 나라 때 처음 나타났고 그전에는 고증할만한 자료가 없으니 아마도 바로 수경주(水經注)에서 백랑수(白狼水)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수경주(水經注)에 ‘대요수(大遼水)가 모이는 곳이, 백랑수(白狼水)이다’라는 내용을 가지고 살펴보면 이를 지금 로하수(老河水) 물길과 억지로 합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수경주(水經注)에 요수(遼水)는 변방요새(塞) 밖에서 동쪽으로 흐르다 곧장 요동(遼東)의 망평현(望平縣) 서쪽에서 굽이쳐 서남으로 흘러 양평현(襄平縣) 고성(故城) 서쪽을 거친다. 〈망평현(望平縣)은 지금 금주부(錦州府) 광평현(廣平縣) 동북 땅에 있다.〉 〈양평현(襄平縣)은 지금 봉천부(奉天府) 요양주(遼陽州) 서북 땅에 있다.〉 다시 동쪽으로 요대현(遼隊縣)의 고성(故城) 서쪽을 지나고 〈요대현(遼隊縣)은 지금 봉천부(奉天府) 해성현(海城縣) 서쪽 당에 있다.〉 다시 남쪽에서 소요수(小遼水)가 이곳(대요수, 요하)에 유입된다. 〈곧 지금 혼하(渾河)가 해성현(海城縣) 서북에 있는데 요하(遼河)에 모인다.〉 다시 오른쪽으로 백랑수(白狼水)와 만나고 안시(安市)〈(안시성은) 지금 봉천부(奉天府)에 있으니 대개 평현(平縣) 동북 땅이다.〉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백랑수(白狼水)의 흐름에 대해서는 ‘다시 동남으로 흐르다 방현(房縣)〈지금 광령현(廣寧縣) 동남 땅에 있다.〉에 이르러 요(遼)에 유입된다.’ 하였다. 이 요하(遼河)로 들어가는 백랑수(白狼水)는 대요수(大遼水)의 지점에 있다. 이미 소요수를 만났고 이미 소요수(小遼水)를 만난 뒤에 막 바다로 들어가기 전이다. 지금에 로하(老河)가 황하(潢河, 곧 대요수(大遼水)의 상원(上源))를 만났을 때는 객이객(喀爾喀) 좌익(左翼) 땅이고 그 옛 방현(古房縣)과의 거리는 매우 멀다. 게다가 백랑수(白狼水)는 분명히 옛 백랑산(古白狼山)과 더불어 서로 가깝게 있다.
수경주(水經注)에서 ‘석성천(石城川)이 백록산(白鹿山) 서쪽을 지나면 바로 백랑산(白狼山)이다. 다시 동북으로 흘러 백랑수(白狼水)로 유입된다.’라고 일컫는다. 살펴보면 백랑산(白狼山)은 건창현(建昌縣, 곧 탑자구청(塔子溝㕔)) 객라심(喀喇沁) 좌익(左翼) 동쪽 30리에 있다. 그 로하(老河)와 거리 또한 매우 멀다. 다시 수경주(水經注)에서 ‘백랑수(白狼水)가 황룡성(黄龍城) 동쪽을 지난다. 용성(龍城)의 옛터는 지금 조양현(朝陽縣) 동쪽 삼좌탑(三座塔) 경내에 있다.’ 하니 이 역시 로하(老河)가 지나는 물길이 아니니 거듭해서 이에 대해 찾아보았지만 하나라도 사실과 통하는 것이 없었다.
구지(舊志)에 마침내 ‘로하(老河)가 옛 황룡(古黄龍) 북쪽을 지난다.’라고 하니 수경주(水經注)에서의 ‘백랑수(白狼水)’와 합치되는 듯하다. 그러나 수경주(水經注) 원문(原文)은 본래 ‘백랑수(白狼水)가 황룡성(黄龍城)을 동쪽을 지난다.’라고 하였는데 억지로 고쳐 ‘북쪽’이라 하였으니 옳겠는가?
수서(隋書) 거란전(契丹傳)에 이르러서는 탁흘신수(託紇臣水)가 그 기록에 있고 지리지(地理志)에 다시 백랑수(白狼水)가 있다. 당서(唐書) 지리지(地理志)에 토호진하(吐䕶真河)가 있는데 그 해전(奚傳)에 토호진수(土䕶真水)가 있고 다시 백랑하(白狼河)가 있다. 두 하천이 나누어져 나타나니 분명히 한 강물이 아니다. 로하(老河)가 바로 백랑수(白狼水)가 아님을 인식하게 된다. 〈백랑수(白狼水)는 지금에 대릉하(大凌河)가 되니 자세한 것은 뒤에 내용을 보라.〉 즉 수경주(水經注) ‘백랑수(白狼水)’ 조목 아래 서술된 백랑수가 지나는 백랑(白狼)과 석성(石城)과 광성(廣城) 여러 현(縣) 땅은 이것들이 지금 로하(老河) 주변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굳이 따지지 않아도 토하와 백랑수가 상관이 없음이 분명하다.”
欽定熱河志 (四庫全書本)/卷070 老河 : 亦名土河 蒙古名老哈穆楞 源出平泉州〈即八溝㕔〉 属喀喇沁右翼南一百九十里之永安山 在州治西北境 㑹諸小水東北流 自大寧故城之西南逕大寧之東北故城 又北流入赤峯縣〈即烏蘭哈達㕔〉境 逕翁牛特左翼南境 入建昌縣〈即塔子溝㕔〉 属敖漢西北境 㑹英金河 又東北流入朝陽縣〈即三座塔㕔〉 属奈曼北境 至喀爾喀左翼西北界 出朝陽縣境 共行五百餘里 與潢河㑹下流為遼河 即古託紇臣水 亦名土䕶真水也
隋書契丹傳 當遼西正北二百里 依託紇臣水而居
唐書地理志 長城口北八百里有土䕶真河 奚王牙帳也 奚傳 依土䕶真河
遼史地理志 聖宗過七金山土河之濵 因議建都 又中京大定府有土河
金史地理志 大定府大定縣有土河 長興縣三韓縣有塗河
元一統志 塗河源出惠州西北 經州界八十里東北 流入大寧縣南境 至大寧縣東北境二百二十里 入髙州境 又東北流 至行營草地 即此
葉隆禮 契丹國志 契丹有水曰北乜里没里 復名陶猥思没里 源出中京馬盂山東北流西 華言所謂土河也
顧祖禹 方輿紀要 土河自馬盂山發源 經大寧衛南 又東北流 至朶顔衞境之木葉山 合于潢水者 是也
米萬春 薊門考 大寧城北有老花母林〈即老哈穆楞〉 番云大河也 自青山流來遶過大寧城南往東北 與捨喇母林〈即錫喇穆楞為遼水之西源〉合共入遼東三岔河 按老河之為土河至今兩名互稱 隋書 稱託紇臣水 唐書 稱土䕶真水 土䕶真水即託紇臣譯語之轉音 遼金二史 謂之土河為䕶真河之省文 金史及元一統志 又稱塗河 則當属轉音耳 隋書 稱契丹依託紇臣水 唐書 又稱奚依土䕶真水者 盖土河經流五百餘里 𤼵源今平泉州〈即八溝㕔〉境 流入今建昌縣〈即塔子溝㕔〉朝陽縣〈即三座塔㕔〉境 當初發源時 為奚王牙帳所在 及東北流至潢河南 則属契丹之地 正當隋遼西郡正北也 一統志 原本以古託紇臣水 土䕶真水 並為今潢河〈潢河詳見後〉之别名 並㨿舊唐書安禄山傳討契丹至土䕶真河即北黄〈亦作潢〉河之文 考舊唐書言契丹在黄水南 若土䕶真河即潢河 則既至土䕶真河 即為契丹牙帳矣 何以下文 云又倍程三百里 奄至契丹牙帳〈新唐書 亦謂至土䕶真河晝夜行三里〉 知所謂即北黄河者 乃北即黄河之誤 舊唐書契丹傳載此事 云舊黄水南契丹衙與之戰 新唐書契丹傳 云大戰潢水南 可為明証 隋書 稱託紇臣水在遼西〈隋遼西郡即營州今建昌朝陽縣舊塔子溝三座塔㕔地〉正北二百里〈此亦指土河之在敖漢奈曼境者言〉 唐書 稱潢水在營州北四百里 則託紇臣水尚在潢河之南 相距二百里 不得強合為一 明矣 又遼史地理志 統和二十四年 五帳院進故奚王牙帳地 二十五年 城之 號曰中京 府曰大定 可見奚王牙帳在中京 正今老河流經之地 若以潢河為土䕶真河 是逺出四百餘里之外 與中京無涉 唐書地理志 漁陽郡下 言古盧龍至奚王牙帳六百里 又東北行傍吐䕶真河五百餘里 至契丹牙帳 正與今老河至潢河所厯道里方向相合 而土䕶真河之即今老河 無可疑矣 方輿紀要 又謂土河亦名温榆河 考遼史地理志 稱奚部建牙當饒樂河水之南温榆河水之北 下文 又稱聖宗土河之濱 因議建都 是土河過與温榆河明非一水 方輿紀要所稱 盖未盡可㨿也 又按一統志原本 謂土河之名始於遼時 其前無可考證 疑即水經注之白狼水 今以水經注大遼水所㑹白狼水考之 與今老河水道有難以强合者 水經注 遼水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望平縣在今錦州府廣平縣東北境〉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襄平縣在今奉天府遼陽州西北境〉 又東逕遼隊縣故城西〈遼隊縣在今奉天府海城縣西境〉 又南小遼水〈即今渾河在海城縣西北合遼河〉注之 又右㑹白狼水 至安市〈在今奉天府盖平縣東北境〉 入於海 而於白狼水 下復云東南流至房縣〈在今廣寧縣東南境〉注於遼 是白狼水之入遼河在大遼水 既㑹小 既㑹小遼水之後 将入海之前 今老河之會潢河〈即大遼水之上源〉在喀爾喀左翼境 其去古房縣甚逺 且白狼水必當與古白狼山相近 水經注稱石城川逕白鹿山西 即白狼山也 又東北注白狼水 考白狼山在建昌縣〈即塔子溝㕔〉喀喇沁左翼東三十里 其距老河亦甚逺 又水經注 稱白狼水逕黄龍城東 龍城故址在今朝陽縣東北之三座塔境 亦非老河所行之道 反覆求之無一可通者 舊志 乃謂老河經古黄龍之北 與水經注白狼水合然 水經注原文本謂白狼水逕黄龍城東 而強改為北可乎 至隋書契丹傳 有託紇臣水 而地理志又有白狼水 唐書地理志 有吐䕶真河 奚傳 有土䕶真水 而又有白狼河 兩河分見必非一水 知老河之非即白狼水〈白狼水為今大凌河詳見後〉 則水經注 白狼水條下 所逕白狼石城廣城諸縣地 其不在今老河左右 又不待辨矣
③아장(牙帳)
가) 선비, 흉노, 유연, 강(羌), 철륵(鐵勒) 등 북방 유목민족들의 수도를 일컫는다.
나) 장수가 지내는 군영 막사이다. 앞에 아기(牙旗)를 세워 놓아서 붙은 이름이다. 아기는 깃대 위쪽을 상아(象牙)로 장식해 놓은 것이다. 옛날에는 관공서를 ‘아(牙)’라 하였고 사는 성(城)을 ‘아성(牙城)’, 지내는 집을 아택(牙宅), 사령관을 알현하는 것을 아참(牙參), 호위대를 아대(牙隊), 친위병을 아병(牙兵)이라 하였다 한다.
④ 초계어은총화(苕溪漁隱叢話)에 새를 이용한 물고기잡이에 대한 한 이야기 중에 지금 일본 땅 왜인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와 있어 소개한다.
초계어은(苕溪漁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집집마다 오귀(烏鬼)를 기른다는 글귀는 내가 여러 공(公)의 시화집에서 보았는데 그 말에는 대체로 네 가지가 있다. 만수시화(漫叟詩話)에는 돼지(豬)를 오귀(烏鬼)라 하고 채관부시화(蔡寬夫詩話)에는 오야신(烏野神)을 오귀(烏鬼)라 하였다. 냉재야화(冷齋夜話)에는 오만귀(烏蠻鬼)를 오귀(烏鬼)라고 하였다. 심존중필담(沈存中筆談) 및 상소잡기(緗素雜記)에는 로자(鸕鶿)를 오귀(烏鬼)라고 하였으니 지금 모두 그 이야기들을 실어 놓는다.
만수시화(漫叟詩話)에서 “집집마다 오귀(烏鬼)를 기르니 넉넉하게 황어(黃魚)를 먹는다. 대대로 오귀(烏鬼)를 로자(鸕鶿)라 하는데 천인(川人, 또는 물가에 사는 사람)이 이 로자(鸕鶿)를 키워서 물고기를 가져오게 한다. 내가 숭령(崇甯) 때(1102-1106년)에 흥국군(興國軍, 지금 호북성 양신현(陽新縣))에 갔었는데 자(字)가 한걸(漢傑)인 태수(太守) 양정신(楊鼎臣)이 하루는 그 마을 토속음식을 먹자고 약속하더니 돼지머리 고기를 찌도록 다른 사람에게 시켰다. 그러면서 내게 말하기를 ‘천인(川人)이 이 고기를 즐겨 먹어서 집집마다 돼지(豬)를 기릅니다. 두시(杜詩)에 이른바 집집마다 오귀(烏鬼)를 기른다는 것이 이것이지요. 돼지(豬)를 부를 때마다 사람들이 오귀(烏鬼) 소리를 내기 때문에 돼지(豬)를 오귀(烏鬼)라고 부릅니다.” 하였다.
채관부시화(蔡寬夫詩話)에 말하기를 “어떤 이가 ‘두보 시에서 집집마다 오귀(烏鬼)를 기르니 넉넉하게 황어(黃魚)를 먹는다고 하였는데 오귀(烏鬼)는 바로 로자(鸕鶿)이니 이를 길러서 물고기를 잡게 한다고 하더라.’ 하였다. 내가 젊었을 적 파(巴) 땅에 갔었는데 비록 로자(鸕鶿)로 물고기를 잡는 일을 보기는 했어도 이를 오귀(烏鬼)라고 부르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기주도경(夔州圖經)을 지은 사람이 어떻게 이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원미지(元微之)의 강릉시(江陵詩)에서 ‘병 들면 오(烏) 귀신을 부르며 푸닥거리를 하고 무당은 거북 대신에 기왓장으로 점을 친다.’ 하니 그 주(注)에서 ‘남쪽 사람들은 몸이 깨끗하지 못하여 병이 나면 오귀(烏鬼)에 굿을 한다. 즉 오귀(烏鬼)라는 이름을 처음 여기에서 보았다. 파(巴) 땅과 초(楚) 땅에서 예전에 사람을 죽여 그 넋(鬼)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체포한 일이 있었는데 그의 신명(神明)을 물어보니 “오야칠두신(烏野七頭神)이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오귀(烏鬼)는 바로 섬기는 신의 이름일 따름이다. 〔설문(說文)에 “귀(鬼)는 사람이 죽어 돌아가 귀(鬼)가 된다.” 하였다. 鬼, 人所歸爲鬼〕 어떤 이는 ‘오귀를 기른다(養)’라는 ‘양(養)’자가 곧 푸닥거리할 ‘새(賽)’자의 와전이다.’라고 하니 이치상 이말 역시 그럴듯하다. 대개 사람을 죽여서 그 넋에 제사를 지내는 짓을 하였기 때문에 두보가 시 첫머리에서 ‘특이한 풍속은 신에 호소함이 꽤나 기괴하니 이런 사람은 어울려 살기 쉽지 않네’ 하였다. 만약 로자(鸕鶿)를 길러서 물고기를 잡게 하고 그것을 먹는다면 어찌 호소함이 기괴하여 어울려 살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로자(鸕鶿)는 결코 오귀(烏鬼)가 아니니 이치상 원(元)의 주(注)를 따름이 타당한 것이다.” 하였다.
냉재야화(冷齋夜話)에 “천협로(川峽路, 사천분지(四川盆地) 일대)에 백성들이 대부분 오만귀(烏蠻鬼)를 섬기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데 강(江, 장강 상류)을 마주하고 있어서 넉넉하게 황어(黃魚)를 먹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되는대로 가축으로 기른다는 글자로 풀이하니 마침내 심존중(沈存中)이 오귀(烏鬼)를 로자(鸕鶿)라고 하며 다르게 설명하게 하였다.” 하였다.
심존중(沈存中) 필담(筆談)에서 “지식인(士人) 유극(劉克)이 기이한 책을 널리 읽었는데 두보 시에 나온 ‘집집마다 오귀(烏鬼)를 길러(家家養烏鬼) 넉넉하니 황어(黃魚)를 먹는다(頓頓食黃魚)’라는 싯귀를 가지고서 세상에 이야기꾼들은 ‘모두 기(夔)와 협(峽) 땅(지금 중경시(重慶市) 봉절현(奉節縣)) 사이에 지금까지도 귀호(鬼戶)가 있으니 이는 곧 이인(夷人)이다. 그 주인을 일러 귀(鬼)라고 부르지만, 오귀(烏鬼)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또한 귀호(鬼戶)란 이인(夷人)에 의해 일컬어지는 말이니 더더욱 인가(人家)에서 기르는 짐승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유극(劉克)이 결국 기주도경(夔州圖經)을 살펴보았는데 그 책에서 ‘협(峽) 땅 안 사람들이 로자(鸕鶿)를 그 목에 줄을 매달고 물고기를 잡게 하였는데 로자가 물고기를 잡게 되면 이를 거꾸로 들어 올려 물고기를 나오게 한다. 오늘날까지도 이와 같다.’라고 일컬었다. 내가 촉(蜀) 땅에 있었을 때 인가(人家)에서 로자(鸕鶿)를 키워 물고기를 잡게 하는 일을 보았으니 믿을만하지만, 이를 오귀(烏鬼)라고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상소잡기(緗素雜記)에서 말하기를 “필담(筆談)에서 일찍이 두보의 시 ‘家家養烏鬼,頓頓食黃魚’에 대해 논의하였는바, 협(峽) 땅 사람들이 로자(鸕鶿)를 오귀(烏鬼)라고 하였는데 이를 길러서 물고기를 잡아 오게 한 것이다.” 하였다.
또 동재기사(東齋記事)를 살펴보면 “촉(蜀) 땅에 어가(魚家)들은 로자(鸕鶿) 수십 마리를 길러서 하루에 얻는 물고기가 수십 근(斤)이 된다. 줄로 로자의 목을 묶어놓아 작은 물고기나 겨우 목구멍 안으로 들어갈 정도이고 큰 물고기는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주인은 때가 되면 로자를 불러 잡아둔 물고기를 내놓게 하고서 그제서야 다시 강물로 보내진다. 잘 길들여져서 사람에 익숙하여 지휘하면 사람의 뜻처럼 움직인다. 물고기를 잡고도 돌아가지 않는 로자가 있으면 그 새 무리의 우두머리가 쪼아서 돌아가게 한다. 이를 비유하자면 해동청이나 새매를 풀어놓은 것이라 사람이 죽어라 달리는 노력이 없어도 이익을 얻음이 더욱 남다르게 두텁다.” 하였다.
오귀(烏鬼)에 대해 실린 내용들이 이 정도에 그친다. 그렇다면 범촉공(范蜀公, 範鎮) 역시 ‘로자(鸕鶿)가 바로 두보 시에서 말한 오환(烏鬼)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맥전(夷貊傳)을 살펴보면 “왜국(倭國)은 물이 많고 육지가 적어서 작은 고리로써 로자(鸕鶿)의 목에 걸어두고 이 새로 하여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게 하니 날마다 백여 마리를 얻는다.” 하였다. 그렇다면 이 일을 믿을만하다. 내가 일찍이 사설(四說)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로자(鸕鶿)는 오귀(烏鬼)이다.’ 함이 이것이다. 그 돼지(豬)를 오야신(烏野神), 오만귀(烏蠻鬼)와 함께 오귀(烏鬼)라고 말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내가 건안(建安)에서 벼슬살이하였을 때, 일 때문에 북원배다(北苑焙茶, 복건성 건구시(建甌市))에 갔다가 작은 배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중도에 몇몇 고기잡이배가 보였는데 각각 배들이 로자(鸕鶿) 대여섯 마리를 부리고 있었다. 줄로 그 다리를 묶고서 강물 바닥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잡게 줄을 놓아두었다가 천천히 당겨 꺼내더니 물고기를 가졌다. 눈으로 그 일을 직접 보니 더욱 증험할 수가 있게 되었다.
苕溪漁隱叢話/前集12 : 苕溪漁隱曰:「『家家養烏鬼』之句,余觀諸公詩話,其說蓋有四焉。《漫叟詩話》以豬為烏鬼,蔡寬夫《詩話》以烏野神為烏鬼,《冷齋夜話》以烏蠻鬼為烏鬼,沈存中《筆談》、《緗素雜記》以鸕鶿為烏鬼,今具載其說焉。《漫叟詩話》云:『家家養烏鬼,頓頓食黃魚。世以烏鬼為鸕鶿,言川人養此取魚。予崇甯間往興國軍,太守楊鼎臣字漢傑,一日約飯鄉味,作蒸豬頭肉,因謂予曰:川人嗜此肉,家家養豬,杜詩所謂家家養烏鬼是也。每呼豬則作烏鬼聲,故號豬為烏鬼。』蔡寬夫《詩話》云:『或言老杜詩家家養烏鬼,頓頓食黃魚。烏鬼乃鸕鶿,謂養之以捕魚。予少時至巴中,雖見有以鸕鶿捕魚者,不聞以為烏鬼也,不知《夔州圖經》何以得之。然元微之《江陵詩》云:病賽烏稱鬼,巫占瓦代龜。注云:南人染病則賽烏鬼。則烏鬼之名,自見於此。巴楚間嘗有捕得殺人祭鬼者,問其神明,曰烏野七頭神。則烏鬼乃所事神名爾。或云養字乃賽字之訛,理亦當然。蓋為其殺人而祭之,故詩首言異俗籲可怪,斯人難並居。若養鸕鶿捕魚而食,有何籲怪不可並居之理。則鸕鶿決非烏鬼,宜當從元注也。』《冷齋夜話》云:『川峽路民多供事烏蠻鬼,以臨江,故頓頓食黃魚耳。俗人不解,便作養畜字讀,遂使沈存中白差烏鬼為鸕鶿也。』沈存中《筆談》云:『士人劉克博觀異書,杜詩有家家養烏鬼,頓頓食黃魚,世之說者,皆謂夔、峽間至今有鬼戶,乃夷人也,其主謂之鬼。然不聞有烏鬼之說。又鬼戶者,夷人所稱,又非人家所養。克乃按《夔州圖經》,稱峽中人以鸕鶿繩繫其頸,使之捕魚,得魚則倒提出之,至今如此。予在蜀中見人家養鸕鶿,使捕魚,信然。但不知謂之烏鬼耳。』《緗素雜記》云:『《筆談》嘗論杜詩家家養烏鬼,頓頓食黃魚,峽中人謂鸕鶿為烏鬼,養之以取魚也。』又按《東齋記事》云:『蜀之魚家養鸕鶿十數者,日得魚可數十斤,以繩約其吭,才通小魚,大魚則不可食,時呼而取出之,乃復遣去。甚馴狎,指顧如人意,有得魚而不以歸者,則押群者啄而使歸。比之放鷹鶻,無馳走之勞,得利又差厚。』所載止此而已。然范蜀公亦不知鸕鶿乃杜詩所謂烏鬼也。按《夷貊傳》云:『倭國水多陸少,以小環掛鸕鶿項,令入水捕魚,日得百餘頭。』則此事信然。余嘗細考四說,謂鸕鶿為烏鬼是也,其謂豬與烏野神、烏蠻鬼為烏鬼者,非也。余官建安,因事至北苑焙茶,扁舟而歸,中途見數漁舟,每舟用鸕鶿五六,以繩繫其足,放入水底捕魚,徐引出,取其魚。目睹其事,益可驗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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