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성씨(姓氏)는 곧 완안(完顔), 지가(持嘉), 납라(納喇), 비마(費摩), 악통(鄂通), 혁사리(赫舍哩), 도극탄(圖克坦), 파연(巴延), 도문(圖們), 온특혁(温特赫), 니마합(尼瑪哈), 주가(珠嘉), 아극점(阿克占), 박도리(博都哩), 부주리(富珠哩), 홍과(洪果), 통길(通吉), 아달(阿達), 오릉아(烏凌阿), 부찰(富察), 오혈(烏頁), 도극탄(圖克坦), 포살(布薩), 온둔(溫屯), 몽고(䝉古)를 말한다. 〈당나라 말에 부락이 번성하여 모두 30명의 수령(추장)이 있었는데 수령마다 하나의 성(姓)을 점유하되 겨레붙이로 통하는 것에는 30개의 성(姓)이 있다.〉
其姓氏 則曰完顔 持嘉 納喇 費摩 鄂通 赫舍哩 圖克坦 巴延 圖們 温特赫 尼瑪哈 珠嘉 阿克占 博都哩 富珠哩 洪果 通吉 阿達 烏凌阿 富察 烏頁 圖克坦 布薩 溫屯 䝉古 〈唐末 部落繁盛 共有三十首領 每首領有一姓 通有三十姓〉
○곁드린 자료 성씨(姓氏) 1(아래 자료들 대부분을 청나라 때의 것임)
1.완안씨(完顔氏)
1)완안씨(完顔氏) : 대체로 38파(派)가 있다.
하나는 완안(完顔 송화강 하류)에서 나왔다. 하나는 락도(諾圖)에서 나왔다. 하나는 랍합(拉哈 : 삼대를 엮어놓은 담장에 흙을 바른다는 뜻)에서 나왔다. 하나는 옹과이화(翁果爾和)에서 나왔다. 하나는 조가성(兆佳城 : 지금의 遼寧 新賓下營子趙家村)에서 나왔다. 하나는 첨하(沾河 흑룡강 하류인 손하(遜河)의 지류, 손극현 서쪽)에서 나왔다. 하나는 호보찰(瑚普察)에서 나왔다. 하나는 마찰(馬察 : 길림성 혼강시(渾江市) 서남)에서 나왔다. 하나는 영액성(英額城 : 지금 遼寧清原縣)에서 나왔다. 하나는 악이혼(鄂爾渾)에서 나왔다. 하나는 다라수촌(多羅樹村)에서 나왔다. 하나는 소완(蘇完 : 지금 吉林省 雙陽縣)에서 나왔다. 하나는 가목호(嘉木湖 : 지금 遼寧省 新賓縣)에서 나왔다. 하나는 길안(吉顔)에서 나왔다. 하나는 흥경(興京 : 지금 遼寧省 撫順市)에서 나왔다. 하나는 괘이찰(卦爾察 : 송화강 지류 눈강(嫩江) 부근인 扶餘縣)에서 나왔다. 하나는 우산(牛山)에서 나왔다. 하나는 불아랍(佛阿拉 : 지금 遼寧省 新賓縣)에서 나왔다. 하나는 합달(哈達 : 지금 遼寧省 開原市)에서 나왔다. 하나는 객랍심(喀拉沁)에서 나왔다. 하나는 모란촌(牡丹村)에서 나왔다. 하나는 주사리(朱舍理 : 장백산 근방)에서 나왔다. 하나는 심양(瀋陽)에서 나왔다. 하나는 비유성(蜚悠城)에서 나왔다. 하나는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왔다. 하나는 흑산(黒山 : 요녕성)에서 나왔다. 하나는 막이돈(漠爾敦)에서 나왔다. 하나는 안도(安圖 : 지금 안도현. 연변)에서 나왔다. 하나는 정가보(鄭家堡)에서 나왔다. 하나는 찰고목(扎庫木 : 지금의 무순(撫順))에서 나왔다. 하나는 장당(章當)에서 나왔다. 하나는 납음(納音)에서 나왔다. 하나는 휘발(輝發 길림시 남쪽)에서 나왔다. 하나는 길림오라(吉林烏喇 역사적으로는 영고탑 지역)에서 나왔다. 하나는 무순(撫順)에서 나왔다. 하나는 채정(蔡亭)에서 나왔다. 하나는 산탑보(山塔堡)에서 나왔다. 하나는 니마찰(尼馬察 : 지금 흑룡강 목릉하(穆稜河) 흥개호(興凱湖)와 러시아 우수리스크 일대)에서 나왔다. (흠정팔기통지 55권)
2) 완안씨(完顔氏) : 금나라의 성(姓)은 부락 이름으로써 씨(氏)를 삼았다. 금 4대 임금 해릉(海陵 1162년 즉위) 이후에 완안중원(完顔仲元), 완안아림(完顔阿林(鄰))은 본래 성(姓)이 곽씨(郭氏)였고 완안정(完顔霆), 완안요주(完顔耀珠)는 본래 성(姓)이 이씨(李氏)였고 완안좌(完顔佐)는 본래 성이 양씨(梁氏)였는데 한꺼번에 완안씨(完顔氏) 성(姓)을 내렸다. 난주(蘭州) 왕삼랑(汪三郎)이 금나라로 붙어왔기에 완안씨 성(姓)을 내렸다. 이라종가노(伊喇鍾嘉努), 장진(張進), 장보(張甫), 왕과륵(王果勒), 정탁(程琢), 몽고(䝉古), 국용안(國用安) 모두 완안씨 성(姓)을 내렸다. (흠정속통지 84권)
2)-1 이라종가노(伊喇鍾嘉努)
*이라(伊喇) 〈이랄(移剌)이라도고 하고 을랄(乙剌)이라고도 한다. 청나라 팔기 성씨 통보(八旗姓氏通譜)에 나와있다. (원문을 “지금 팔기 성씨 통보에 따라 다 고쳐 바로잡았다.”라고 해석해야 하지만, 본 글은 필요한 내용만 부분적으로 모아서 해석을 하는 바람에 문맥이 어색하여 편의상 해석을 조금 틀었다. 다른 예도 마찬가지이다. )〉 伊喇〈卷十六作移剌 卷七十八作乙剌 今並從八旗姓氏通譜改正〉
*이라(伊喇) 〈만주어이다. ‘기장(黍)’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을랄(乙辣)이라 쓰여있다.〉 伊喇〈滿洲語 黍也 原作乙辣 今改正〉
*이라(伊喇)〈만주어이다. 기장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예랄(拽剌)이라고 쓰여있다. 청나라 팔기 성씨 통보(八旗姓氏通譜)에 나와있다.〉 伊喇〈滿洲語 黍也 原作拽剌 今從八旗姓氏通譜改正〉
*중가노(重嘉努) 〈중가노(眾家奴)라고도 쓴다. 이름의 뜻풀이가 없다.〉 重嘉努〈卷十六作眾家奴 因無解義 但改字面〉
*중가노(仲嘉努) 〈중가노(眾家奴)라고도 쓴다.〉 仲嘉努 〈卷一百十九作眾家奴因無解義但改字面〉
*이라중협노(伊喇仲夾努) 〈이라(伊喇)는 옛날에 이라(移剌)로 썼다. 중협노(仲夾努)는 옛날에 중가노(眾家奴)라고 썼으니 발음을 따랐다.〉 伊喇仲夾努 〈伊喇舊作移剌,從八旗姓譜改正。仲夾努舊作眾家奴,譯音〉
2. 납라씨(納喇氏)
1)납라씨(納喇氏) : 대체로 서른아홉 파(派)가 있다.
하나는 섭혁(葉赫)에서 나왔다. 하나는 오라(烏喇)에서 나왔다. 하나는 합달(哈達)에서 나왔다. 하나는 휘발(輝發)에서 나왔다. 하나는 이파란(伊巴丹)에서 나왔다. 하나는 장(張)에서 나왔다. 하나는 비덕리(費徳里)에서 나왔다. 하나는 니마찰(尼馬察)에서 나왔다. 하나는 노새자(老寨子)에서 나왔다. 하나는 길림오라(吉林烏喇)에서 나왔다. 하나는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왔다. 하나는 요양(遼陽)에서 나왔다. 하나는 이주(易州)에서 나왔다. 하나는 섭혁륵(葉赫勒)에서 나왔다. 하나는 과이심(科爾沁)에서 나왔다. 하나는 이란불이탑합(伊蘭費爾塔哈)에서 나왔다. 하나는 가목호(嘉木湖)에서 나왔다. 하나는 살이호(撒爾湖 : 지금 遼寧省 撫順市)에서 나왔다. 하나는 송산(松山)에서 나왔다. 하나는 아고리니만(阿庫里尼滿)에서 나왔다. 하나는 갈합리(噶哈里)에서 나왔다. 하나는 나목도로(那木都魯)에서 나왔다. 하나는 찰고목(扎庫木)에서 나왔다. 하나는 청하(清河)에서 나왔다. 하나는 포이합도성(布爾哈圖城)에서 나왔다. 하나는 포이합도(布爾哈圖)에서 나왔다. 하나는 동악(董鄂)에서 나왔다. 하나는 미산(米山)에서 나왔다. 하나는 사리(舍里)에서 나왔다. 하나는 불아랍(佛阿拉)에서 나왔다. 하나는 소완(蘇完)에서 나왔다. 하나는 덕고(德庫)에서 나왔다. 하나는 심양(瀋陽)에서 나왔다. 하나는 제제합이(齊齊哈爾)에서 나왔다. 하나는 렴도파(鐮刀把)에서 나왔다. 하나는 흑산(黒山)에서 나왔다. 하나는 액이민(額爾敏)에서 나왔다. 하나는 아이호(雅爾湖)에서 나왔다. 하나는 화색(和索)에서 나왔다.
2)납라(納喇) 〈열랄(涅剌)이라고도 쓰고 니랄(尼剌)이라고도 쓴다. 청나라 팔기 성씨 통보(八旗姓氏通譜)에 나와 있다. 納喇 〈卷四作涅剌 卷六十九又作尼剌 今従八旗姓氏通譜改正〉
3)납라씨(納喇氏) 〈금사(金史) 세기(世紀)에 “안국군절도사(安國軍節度使) 납라방렬(納喇邦烈), 승안(承安) 2년에 (1197년) 진사(進士)에 일등으로 급제한 납나호라륵(納喇呼喇勒)”이 나와 있다.〉 納喇氏 〈欽定續通志 : 納喇氏〈世紀 安國軍節度使納喇邦烈 承安二年 進士第一 納喇呼喇勒〉
4) 납라(納喇) 〈옛날에 납란(納蘭)이라고 썼다.〉 納喇〈舊作納蘭〉
5) 납라(納喇) 〈라라(拏懶)라고도 쓰고 납란(納蘭)이라고도 쓴다. 청나라 팔기성씨통보(八旗姓氏通譜)에 나와 있다.〉 納喇 〈卷一作拏懶 又作納蘭 併從八旗姓氏通譜 改正〉
3 지가씨(持嘉氏)
1)지가씨(持嘉氏) 〈지가휘(持嘉暉 또한 적잔휘(赤盞暉)) 전기에 그 선조가 장황보(張皇堡)에서 살았는데 일찍이 장(張)으로 씨(氏)를 삼았었다. (지가씨로 바꾸었다) 또한 당 선종(宣宗) 때에 적주자사(啇州刺史) 지가객제객(持嘉喀齊喀), 참지정사(參知政事) 지가오신(持嘉烏紳)이 있다.〉(속통지 84권) 欽定續通志 (四庫全書本)/卷084 持嘉氏〈持嘉暉傳其先居張皇堡 嘗以張為氏 又宣宗時 啇州刺史持嘉喀齊喀 參知政事持嘉烏紳〉
2)지가(持嘉) 〈성(姓)이다. 원래 적잔(赤盞)이라 쓰여있다.〉 持嘉〈姓也 原作赤盞 從八旗姓譜改正〉
4. 비마씨(費摩氏)
1) 비마씨(費摩氏) 〈금사 후비전(后妃傳)에 태조(太祖)의 광의황후(光懿皇后), 희종(熈宗)의 도평황후(悼平皇后) 모두 비마씨(費摩氏)이다. 또한 바마화선(費摩華善)은 대대로 요해(遼海) 지방에 살았는데 천보(天輔 금 태조의 두 번째 연호 1117-1123년) 때에 동쪽 수항성(受降城)으로 옮겨 주둔하여서 하인(夏人)을 막았고 뒤에 임황(臨潢 내몽고 시라무룬하)으로 이사하였다. 그 손자 비마형(費摩亨)이 대정(大定 금 세조 연호 1161-1189년) 때 벼슬에 나아가 감찰어사(監察御史), 동지대명부사(同知大名府事)로 정치에 공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흠정속통지 82권) 欽定續通志卷八十二 費摩氏〈后妃傳 太祖光懿皇后 熈宗悼平皇后皆費摩氏 又費摩華善世居遼海 天輔閒 移屯東受降城 以禦夏人 後徙居臨潢 其孫費摩亨 大定 進士 以監察御史 同知大名府事屢有政績〉
2) 비마씨(費摩氏) : 성(姓)이다. 원래는 배만씨(裴滿氏)라고 쓰여 있다. 청나라 팔기성보(八旗姓譜)에 나와있다.(금국지) 費摩氏〈姓也 原作裴滿氏 今從八旗姓譜改正〉 (金國志)
5. 악통씨(鄂通氏)
1) 악통씨(鄂通氏) 〈악통(鄂通) 지방에서 나왔다.〉 鄂通氏〈系出鄂通〉
2) 악통(鄂通) 〈오둔(奧屯)이라고도 쓴다. 청나라 팔기성씨통보(八旗姓氏通譜)에 나와 있다.〉 鄂通 〈卷一作奧屯 今從八旗姓氏通譜改正〉
3) 악둔(鄂屯) 〈’나무동이(木槽盆)를 손보다’라는 뜻이다. 오둔(奧屯)이라고도 하고 올둔(兀屯)이라고도 한다.〉 鄂屯 〈整木槽盆也 卷十作奧屯 卷十三作兀屯 並改〉
○곁드린 자료 원문 성씨1
1.完顔氏
1) 欽定八旗通志卷五十五 : 完顔氏〈凡三十八派 一出完顔 一出諾圖 一出拉哈 一出翁果爾和 一出兆佳城 一出沾河 一出瑚普察 一出馬察 一出英額城 一出鄂爾渾 一出多羅樹村 一出蘇完 一出嘉木湖 一出吉顔 一出興京 一出卦爾察 一出牛山 一出佛阿拉 一出哈達 一出喀拉沁 一出牡丹村 一出朱舍理 一出瀋陽 一出蜚悠城 一出長白山 一出黒山 一出漠爾敦 一出安圖 一出鄭家堡 一出扎庫木 一出章當 一出納音 一出輝發 一出吉林烏喇 一出撫順 一出蔡亭 一出山塔堡 一出尼馬察
2) 欽定續通志 (四庫全書本)/卷084 完顔氏〈金國姓以部為氏 海陵以後 完顔仲元 完顔阿林(鄰)本姓郭氏 完顔霆 完顔耀珠本姓李氏 完顔佐本姓梁氏 並賜姓完顔氏 蘭州 汪三郎内附 賜姓完顔氏 伊喇鍾嘉努 張進 張甫 王果勒 程琢 䝉古 國用安 皆賜姓完顔氏〉
2. 納喇氏
1) 納喇氏 〈凡三十九派 一出葉赫 一出烏喇 一出哈達 一出輝發 一出伊巴丹 一出張 一出費徳里 一出尼馬察 一出老寨子 一出吉林烏喇 一出長白山 一出遼陽 一出易州 一出葉赫勒 一出科爾沁 一出伊蘭費爾塔哈 一出嘉木湖 一出撒爾湖 一出松山 一出阿庫里尼滿 一出噶哈里 一出那木都魯 一出扎庫木 一出清河 一出布爾哈圖城 一出布爾哈圖 一出董鄂 一出米山 一出舍里 一出佛阿拉 一出蘇完 一出德庫 一出瀋陽 一出齊齊哈爾 一出鐮刀把 一出黒山 一出額爾敏 一出雅爾湖 一出和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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