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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肅愼)

속진국(𠐍侲國)은 숙신(肅愼)이다. 3

by 쥐눈이 2024. 5. 16.

*엄채(奄蔡)는 숙신(肅愼)으로 추정되는데 엄채나라는 강거국(康居國)과 풍속이 같다고 하니 강거(康居)에 대한 자료를 소개한다.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방여휘편(方輿彙編) 변예전(邊裔典) 47권 강거부 휘고(康居部彙考) 강거(康民자설(者舌) 실만근(悉萬斤)  살말건(薩末鞬삽말건(颯秣建)

()나라 때 기록

성왕(成王)  해에 성주(成周, 西周의 수도)에서 제후들이 크게 모였는데 강민(康民)이 공물을 들였다. 급총주서(汲冢周書) 왕회해(王會解)를 살펴보면 강민(康民)의 부이(桴苡, 芣苡, 질경이과)는 그 열매가 외얏()과 닮았고 먹으면 아들(자식)을 낳기에 알맞다고 하였다.

()()은 역시 서융(西戎)의 별명이다. 부이를 먹으면 바로 몸에 태기가 있다.

 

()나라 때 자료

무제(武帝)  해에 비로소 강거(康居)에 사신을 교류하였다.

한서 무제본기(漢書武帝本紀)를 살펴보면 이 내용이 실려 있지 않지만, 서역전(西域傳)을 살펴보면 강거국왕(康居國王)은 겨울에 악월닉(樂越匿, 카자흐스탄 지역) 땅을 다스려서 비전성(卑闐城, 강가고성(康卡古城), 타슈켄트)에 이른다. 장안(長安)과 거리가 123백 리이고 한나라의 도호(都護)에는 소속되지 않았다. 월닉(越匿) 땅의 경우 말을 타고 7일을 가야 한다. 왕이 여름에 지내는 번내(蕃內)의 경우 914()이다. ()12만이고 인구는 60만이며 뛰어난 병사들이 12만이다. 동쪽으로 한나라 도호(都護)의 치소(治所)5550()에 있다. 대월씨(大月氏)와 풍속이 같다. ()쪽에는 흉노(匈奴)가 있어 이들에 예속되어 섬긴다.” 하였다.

원제(元帝) 건소(建昭) 3(기원전 36) 가을, 서역(西域)을 지키는 기도위(騎都尉) 감연수(甘延壽)와 부교위(副校尉) 진탕(陳湯)이 군대를 발동하여 강거(康居)에서 질지(郅支) 선우(單于)를 공격하여 베어 죽였다.

한서(漢書) 원제본기(元帝本紀)에 언급되어 있고 서역열전(西域列傳)을 살펴보면 선제(宣帝) 때 흉노(匈奴)가 이치에 어그러져 어지러워져 다섯 선우(單于)가 한꺼번에 자리를 다투었는데 한()나라가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를 옹립하자 질지(郅支) 선우(單于)가 원망하고서 한()의 사신을 살해하고 서쪽으로 강거(康居)를 의거하였다. 그 뒤 도호(都護) 감연수(甘延壽), 부교위(副校尉) 진탕(陳湯)이 무기교위(戊己校尉, 屯田 사무 관리자)를 움직여 서역 여러 나라의 군사를 강거(康居)에 이르게 하고 질지(郅支) 선우(單于)를 죽여 없앴다.” 하였다.

성제(成帝) 때 해에 강거(康居)가 아들을 보내서 황제를 모시게 하고 공물을 바쳤다.

한서 성제본기(漢書成帝本紀)를 살펴보면 실려 있지 않지만, 서역전(西域傳)을 살펴보면 성제(成帝) 때에 강거(康居)에서 아들을 보내어 (인질로서) () 조정을 받들게 하고 공물을 들였다. 본래 아주 먼 곳에 있기에 유독 교만하여 다른 여러 나라와 함께 서로 이어가며 한()나라 섬기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도호(都護) 곽순(郭舜)이 자주 말씀을 올려 본래 흉노(匈奴)가 흥성하였을 때 이 흥성이 오손(烏孫)과 강거(康居)를 병합한 원인이 아니었고 흉노가 우리 한나라의 신첩(臣妾, 곧 신하로서 복종)이라 일컬었을 때 미쳐서 그 복종이 두 나라를 잃어버려서도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비록 함께 그 인질로 온 아들들을 받았지만, 흉노와 오손, 강거 이 세 나라는 안으로 서로 물자를 나르며 교류를 갖는 것은 예전과 같으며 역시 서로 살펴 정찰하다가 이익이 눈에 보이면 상대에게 도발하여 서로 모인다 해도 상대를 가까이 믿지 못하고 갈라선다 해도 상대를 신하로서 부리지 못합니다. 지금에 상황으로써 말을 하자면 오손(烏孫)과 혼인 관계를 맺었지만 결국 어떤 보탬도 있지 않았고 도리어 나라 안(中國)에서 문제만 생겼습니다. 그러나 오손(烏孫)은 이미 예전에 혼인으로 관계 맺어졌고 지금 흉노(匈奴)와 함께 모두 한()나라의 신하라고 스스로 일컫고 있으니 의리상 거리를 둘 수가 없습니다만, 강거(康居)는 교만하고 약삭빨라 이제껏 (황제의 명을 대신하는) 사신에게 절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으니 도호리(都護吏)가 그 나라에 이르면 한나라 사신들을 오손(烏孫)의 여러 사신 아래에 자리를 앉히고 그 왕과 귀족들이 자기 먼저 먹고 마시고서 나서야 도호리(都護吏)를 먹게 합니다. 그래서 한나라에 대해 반성함이 없이 이런 짓을 이웃 나라들에 자랑하며 으스댑니다. 이로써 헤아리자면 무슨 까닭에 아들을 인질로 보내 한나라 조정에 들여 황제를 모시게 하였겠습니까? 아마도 장마당에서 행상을 하고자 하여 듣기 좋은 말로 속임수를 쓰는 것입니다. 흉노(匈奴)는 백만(百蠻) 가운데에서 큰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 한나라를 섬기는 예가 매우 잘 갖추고 있는데 이들이 강거(康居)가 황제를 대신하는 사신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 선우(單于)로 하여 스스로 비하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그 인질로 보내온 시자(侍子)를 돌려보내고 다시는 사신을 교류하지 말아서 한()나라 황실이 무례한 나라와 교류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어야 합니다. 돈황(燉煌) 및 주천(酒泉)에 작은 군()과 남도(南道)에 여덟 나라는 사신이 왕래할 때 사람, 말과 당나귀, 낙타, 먹거리를 제공해야 하니 모두들 이를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괜스레 지나는 곳마다 피로하고 재물을 소비하게 하면서 교만하고 약삭빠른 저 먼 나라 사람을 보내고 맞이하는 것은, 그리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다. ()나라가 교류를 새롭게 하여 먼데 사람을 거듭 이르게 하였고 끝내 구슬리고 견제하여 관계를 끊게 한 적이 없었다.” 하였다.

강거(康居)는 소왕(小王) 다섯이 있으니 하나는 소해왕(蘇䪥王)이니 소해성(蘇䪥城)을 다스렸다. 도호(都護)와 거리는 5776()이다. 양관(陽關)과 거리는 825리이다. 둘째는 부묵왕(附墨王)이다. 부묵성(附墨城)을 다스린다. 도호(都護)와 거리가 5767리이다. 양관(陽關)과 거리는 825리이다. 셋째는 유닉왕(窳匿王)이다. 유닉성(窳匿城)을 다스린다. 도호(都護)와 거리가 5266리이다. 양관(陽關)과 거리는 7525리이다. 넷째는 계왕(罽王)이다. 계성(罽城)을 다스린다. 도호(都護)와 거리는 6296리이다. 양관(陽關)과 거리는 8555리이다. 다섯째는 오건왕(奧鞬王)이다. 오건성(奧鞬城)을 다스린다. 도호(都護)와 거리가 696리이다. 양관(陽關)과 거리는 8355리이다. 무릇 이 다섯 왕은 강거(康居)에 예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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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때 기록

무제(武帝) 태시(泰始) 3(267) 강거(康居)가 사신을 보내 훌륭한 말을 바쳤다.

진서(晉書) 무제본기(武帝本紀)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사이전(四夷傳)을 살펴보면 강거국(康居國)은 대완(大宛) 서북쪽에 있으니 2천 리쯤이다. 속익(粟弋), 이열(伊列)과 이웃 사이이다. 그 왕이 소해성(蘇薤城)에서 산다. 풍속과 사람 꼴, 옷차림은 대완(大宛)과 그럭저럭 같다. 땅은 부드럽고 따뜻하여 오동나무, 버드나무, 포도가 넉넉하고 소와 양이 많으며 좋은 말이 난다. 태시(泰始) 때 그 왕 나비(𨚗鼻)가 사신을 보내어 밀봉한 글(封事)을 올리고 아울러 훌륭한 말을 바쳤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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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北魏) 때 기록

... 서역열전(西域列傳)을 살펴보면 강국(康國)이란 강거(康居)의 후예이다. 옮겨 다니며 사는 것이 일정함이 없으나 한()나라 이후로 서로 전통을 이어받아 교류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 왕은 본 성()이 온()이니 월씨인(月氏人)이다. 옛날에 기련산(祁連山) 북쪽 소무성(昭武城)에 살았는데 흉노에게 깨진 탓에 서쪽을 총령(蔥嶺)을 넘어 마침내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되었다. 적장자 외에 가지 친 형제(枝庶)들이 각각 왕 자리를 나누어 받는다. 따라서 강국(康國) 좌우에 여러 나라는 아울러 소무(昭武)를 성()으로 삼으니 뿌리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다. 왕 자세부필(字世夫畢)이 사람됨이 넉넉하고 도타워 대중의 마음을 매우 얻었다. 그 처는 돌궐(突厥)의 도/탁달 하칸(度達 可汗, hakan)의 따님이다. 살보수(薩寶水) 둘레에 아록적성(阿祿迪城)에 도읍하였으니 사는 사람이 많았고 대신(大臣) 세 사람이 함께 국사(國事)를 관장하였다. 그 왕은 머리를 꼬아서 칠보금화(七寶金花)로 꾸민 관을 썼고 능라(綾羅), 금수(錦繡, 곱고 아름답게 짠 명주)와 백첩(白疊, 무명실로 짠 옷감)으로 옷을 해 입었다. 그 처는 쪽()을 찌고서 검은 수건을 덮어쓴다. 사나이는 머리를 깎고 비단 두루마기를 입는다. 강국(彊國)으로 이름 불리니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가 대부분 이 나라에 의지한다. 미국(米國), 사국(史國), 조국(曹國), 하국(何國), 안국(安國), 소안국(小安國), 나색파국(那色波國), 오나갈국(烏那曷國), 목국(穆國) 모두가 강국에 붙어 따랐다. 호율(胡律)을 만들어 천사(祆祠,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 사원 또는 서방에서 온 종교의 통칭)에 두고서 장차 죄를 결정하게 되면 죄인을 데려와 이곳에서 단죄하는데 죄가 엄중한 자는 족형(族刑)을 내리고 그 다음으로 죄가 무거운 죄인은 죽인다. 도적질한 자는 그 다리를 끊는다. 사람들 모두 눈이 깊고 코가 높으며 구렛나루가 많이 난다. 상업, 행상에 뛰어나 여러 이()의 교역이 그 나라에 많이 모여든다. 크고 작은 북(), 비파(琶琵), 오현(五絃), 공후(箜篌)가 있다. 혼인과 상제(喪制)는 돌궐과 같다. 나라에서 조묘(祖廟)를 세워 6월에 이곳에서 제를 지내는데 여러 나라가 모두 제사를 돕는다. 부처를 신봉하여 호서(胡書 : 胡人의 문자)를 사용하였다. 기후가 따뜻하여 오곡을 기르기에 마땅하며 채소(園蔬) 가꾸기에 알뜰하고 수목(樹木)이 몹시 무성하다. , 낙타, 당나귀, 들소(), , 황금, 강사(碙沙), 감향(𧵊香), 아설나향(阿薛那香), 슬슬(瑟瑟, 청록색 보석)노루가죽(獐皮), 구유(氍毹 : 모직 천이나 융단), 비단(), 무명()이 난다. 포도주가 많이 나서 부잣집은 더러 천() ()에 이르러 해를 이어 손해 보지 않는다. 태연(太延) 사이(435 440)에 비로소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가 뒤에 결국 교류를 끊었다.

태연(太延) 3년 자설국(者舌國)이 사신을 보내 알현하고 한혈마(汗血馬)을 바쳤다.

... 서역전(西域傳)을 살펴보면 태연(太延) 사이에 위()나라 덕이 더하여져서 먼 곳까지 소문이 나니 서역(西域)의 구자(龜茲), 소륵(疏勒), 오손(烏孫), 열반(悅般), 갈반타(渴槃陁), 선선(鄯善), 언기(焉耆), 거사(車師), 속특(粟特) 여러 나라 왕이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와서 공물을 들였다. 세조(世祖)는 서역이 한()나라 때 교류를 텄더라고 해도 그들이 구하는 것이 있으면 중원 땅으로 오고 바람이 없으면 왕명에 교만하니 이는 그들 스스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중원에서 큰 병력이 이르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만약 그들이 사신을 보내어 왕래한다 해도 끝내 보탬이 되는 바가 없어 사신을 보내지 않기를 바랬다. 관계자가 말씀을 아뢰기를 아홉 나라는 멀고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먼 길을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마땅히 그들이 나아옴을 인정해야 하지 어찌 그들이 앞날에 오는 것까지 미리 억제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세조가 마침내 이를 따랐다.

이에 비로소 외교관 왕은생(王恩生), 허강(許綱)들을 서사(西使)로 보냈다. 그러나 은생(恩生)이 유사(流沙)를 나왔을 때 유유(蠕蠕) 겨레에 잡히게 되어 결국 강국에 이르지 못하였다. 다시 산기시랑(散騎侍郎) 동완(董琬), 고명(高明)들에게 많은 비단을 싸서 보냈는데 선선(鄯善)으로 나와 아홉 나라를 초대하여 다독이고 선물을 두터이 내렸다.

처음에 완()들이 천자의 조서를 받고 바로 그 나라로 길을 떠났는데 길이 가서 이르기에 괜찮았다. ()은 아홉 나라를 지나 북쪽으로 가서 오손국(烏孫國)에 이르렀다. 그 나라 왕이 위나라 조정에서 하사한 선물을 받을 때 절하면서 받았는데 매우 기뻐하였다. ()에게 말하기를 전해 들은 말이 파낙나(破洛那, 한나라 때 大宛으로 중앙아시아 페르가나 지구), 자설(者舌) 나라들이 모두 위()나라의 덕을 사모하여 신하가 되어 공물을 들이고자 하였지만, 그 길을 말미암을 방법이 없어 근심할 따름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대들이 여기에 오게 되어 저 두 나라로 갈 수가 있으니 그들의 사모하고 우러르는 정성에 응답하십시오!” 하였다. ()이 이에 자신은 파락나(破洛那)를 향하였고 명()을 자설(者舌)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오손왕(烏孫王)이 그들을 위해 안내자와 통역자를 파견하여 두 나라에 이르게 하였다. ()들이 천자의 조서를 읽어주며 위로를 하였다.

얼마 있다가 완()과 명()이 동쪽으로 돌아왔고 오손(烏孫)과 파락나(破洛那) 따위들이 사신을 보내 완()과 함께 위나라에 와서 공물을 들인 나라들이 열여섯이었다. 이로부터 쭉 끊임없이 위나라 조정을 방문하여 어느 해라도 사이가 뜨지 않았다. 위나라의 사신(國使) 역시 수십의 무리였다.

또 서역전(西域傳)을 살펴보면 자설국(者舌國)은 옛 강거국(康居國)이다. 파락나(破洛那) 서북쪽에 있으며 대() 땅과 거리가 15450리이다. 태연(太延) 3(437)에 사신을 보내 알현하고 공물을 들였고 이때부터 끊이지 않았다. 살펴보면 강국(康國)에 대한 기사가 앞서 보였는데 여기에서 다시 자설(者舌)이 옛 강거국(康居國)’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는 바로 강거(康居)의 옛 땅이 둘로 나누어진 것이라고 한다.

효문제(孝文帝) 연흥(延興) 3(473) 10월 실만근국(悉萬斤國)에서 사신을 보내 알현하고 공물을 들였다.

... 서역전(西域傳)을 살펴보면 실만근국(悉萬斤國) 도성(都城)은 실밀(悉密) 서쪽에 있다. ()와 거리가 12720리이다. 그 나라는 남쪽에 산이 있는데 이름이 가색나산(伽色那山)으로 사자(獅子)가 나는데 해마다 사신을 보내 알현하고 공물로 바쳤다.” 하였다. 위서(魏書)를 살펴보면 강국(康國)은 이미 본래 그 나라 내용을 담은 전()이 있는데 다시 자설(者舌)이 그 옛 땅이라고 운운하니 당서(唐書)를 근거하자면 강()이란 바로 현위(元魏 : 북위) 때의 실만근(悉萬斤)이다. 어떤 이는 하나였던 강거(康居)를 나누어 셋을 만든 것이라 하니 일단 그 주장들을 이곳에 다 붙여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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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때 자료

... 강국전(康國傳)을 살펴보면 강()이란 어떤 경우 살말건(薩末鞬)”이라 하고 역시 삽말건(颯秣建)이라고도 한다. 원위(元魏)에서 말한바 실만근(悉萬斤)’이란 것이다. 남쪽으로 사()와 거리가 150리이고 서북쪽으로 서조(西曹)와 거리가 1백여 리이며 동남쪽으로 미() 땅을 관할에 둔 것이 1백 리()이고 북쪽으로 중조(中曹, 서조(西曹) 동쪽)50()이니 나밀수(那密水) 남쪽에 있다. 큰 성()30이고 작은 보()3백이다. 임금()의 성()은 온()이니 본디 월씨인(月氏人)이다. 처음에 기련(祁連) 북쪽에 소무성(昭武城)을 차지하고 살았었는데 돌궐(突厥)에게 깨지고서 조금씩 남쪽으로 와 총령(蔥嶺, 파미르 고원)을 의지하고 살았으니 바로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적장자 외의 아들 형제들은 왕의 자리를 나누어 받는데 안()이라 하고 조()라 하고 석()이라 하고 미()라 하고 하()라 하고 화심(火尋)이라 하고 무지(戊地)라 하고 사()라 한다. 세상에서 9()이라 하는데 모두 씨()는 소무(昭武)이다. 흙이 비옥하여 벼농사에 알맞고 좋은 말이 난다. 여러 나라에서 군대가 강하다. 술을 좋아하고 길에서 가무(歌舞)를 즐긴다. 왕은 모직물을 모자로 쓰고 금과 보석을 섞어 장식한다. 여자들은 쪽을 틀고 검은 수건으로 덮고 금으로 만든 꽃을 단다. 아이를 낳으면 석청(石蜜)을 먹이고 손바닥에 아교를 두니, 장수를 바래어 달콤하게 말하기를 보석을 지니는 것이 찰지듯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라 한다. 방행서(旁行書 : 당나라 때 가로로 쓴 외국 글자를 지칭)를 익힌다. 상업, 행상에 뛰어나고 이문 내기를 좋아한다. 사나이는 나이 스물이면 이웃 나라로 가니 장사로 이익이 남는 곳은 어디든지 간다. 12월을 해의 첫머리로 삼는다. 부도법(浮圖法 : 부처님 법)을 숭상하고 천신(祆神 : 불을 숭상하는)을 사당에 모시고 제를 지낸다. 사용하는 기계()가 뛰어나고 기술()이 솜씨 있다. 11월에 악기를 두드리고 춤을 추며 겨울의 추위에 비는 연희(乞寒)를 펼치는데 물을 서로에게 뿌리며 즐거운 놀이를 한다. ()나라 때 강거국의 왕 굴목지(屈木支)가 서돌궐(西突厥)의 여인에게 장가를 들더니 마침내 돌궐의 신하가 되었다. 무덕(武德) 10(당 고조 617)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들였다.

두씨(杜氏)의 통전(通典)을 살펴보면 강거국(康居國)은 한()나라 때 교류를 텄다. 이 나라를 대완(大宛) 서북 쪽에 있으니 2천 리()쯤 되니 속익(粟弋), (: 이열(伊列), 신강 이리(伊犁) 초원 일대)와 이웃으로 닿아있다. 왕이 악월닉(樂越匿) 땅 비전성(卑闐城)을 다스리며 또한 소해성(蘇薤城)에서도 지내니 장안(長安)과 거리가 123백 리이다. 도호(都護)에 소속되지 않았다. ()수는 12만이다. 동으로 도호(都護)의 치소(理所)까지 55백 리이다. 대월씨(大月氏)와 풍속이 같다. 흉노를 섬긴다.” 하였다.

위절(韋節)의 서번기(西蕃記)에서 강국인(康國人)은 아울러 행상 장사에 뛰어나 남자는 나이 5세에 이르면 장부()에 관련된 일에 참여하게 하고 조금 알아먹게 되면 보내어 장사를 배우게 하니 이익을 많이 얻는 것을 훌륭하게 여긴다. 그 사람들이 음악 소리를 좋아하여 61일을 한 해의 첫머리로 삼는다. 이 날이 이르면 왕과 사람들은 아울러 새 옷을 입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고 나라의 성() 동쪽 숲 아래에서 7일 동안에 말을 타고 화살을 쏜다. 그 마지막 날에 이르러서 금전(金錢) 한 닢을 장부() 위에 두고 살을 쏴 맞추는 사람은 하루 동안 왕 노릇을 할 수 있다. 민간에서는 천신(天神)을 섬기는데 드높이고 공경함이 그리도 무겁다. ‘신의 아이(神兒)7월에 죽어 해골(骸骨)을 잃어버렸다. 신을 섬기는 사람은 매번 그 달()이 이르면 모두가 검은 무명옷을 입고 맨발로 제 가슴을 어루만지며 통곡을 하여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라 한다. 사나이와 부녀(婦女) 삼백에서 오백 사람이 초원 들에서 흩어져 하늘님 아이(天兒)의 해골을 찾고 7일이 되면 곧 찾기를 그만둔다.

나라 성() 밖에 따로 이백여 호()가 있는데 오로지 초상 치르는 일(喪事)만 맡아 한다. 따로 원() 하나를 쌓았는데 그 원() 안에 개를 길러 사람이 죽은 일이 있을 때면 바로 가서 시신을 가져오고 이 원() 안에 두고 개로 하여 시신을 먹게 한다. 이로 말미암아 살은 다하고 해골만 거두어서 매장하는데 관곽(棺槨)은 없다.” 하였다.

... 정관(貞觀) 5년 강국(康國)이 당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다.

... 강국전(康國傳)을 살펴보면 정관(貞觀) 5(631) 마침내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다.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은 헛된 명성을 취하려 백성들을 해치는 짓을 미워한다. 게다가 강()나라가 내 신하가 된다면 사태가 느긋하든 급하든 그들의 근심을 마땅히 같이 해야 하니 만약 그들이 위급하게 되면 군대를 만 리 먼 곳까지 행군하게 해야 함이 어찌 짐의 뜻이겠는가?’ 하고 그 청을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사자를 바치니 제()가 그 먼 곳에서 온 것을 보배롭게 여기어 비서감(祕書監) 우세남(虞世南)에게 명하여 부()를 짓게 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공물을 들였으니 금도(金桃), 은도(銀桃)를 바쳤을 때 조서로 명을 내려 화원 안에 이를 심게 하였다.

보충 : 통전(通典) : 대당(大唐) 정관(貞觀) 21년 그 나라가 황도(黃桃)를 바쳤으니 크기가 거위 알(鵝卵)만 하고 그 색깔은 금()빛과 같다. 역시 금도(金桃)라고도 부른다. 두환(杜環)의 경행기(經行記)에서 강국(康國)은 미국(米國) 서남 3백여 리에 있다. 일명 살말건(薩末建)’이라 하니 흙이 비옥하고 사람이 많으며 나라는 작다. 신사(神祠)가 있으니 발()이라 이름한다. 여러 나라가 섬기는 것은 뿌리가 이 나라에서 나와서이다.” 하였다.      通典/193 大唐貞觀二十一年其國獻黃桃大如鵝卵其色如金亦呼為金桃杜環經行記云:「康國在米國西南三百餘里一名薩末建土沃人富國小, 有神祠名拔諸國事者本出於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살펴보면 삽말건국(颯秣建國)()나라는 강국(康國)이라 한다둘레가 16, 7백 리이고 동서로 길쭉하며 남북으로 좁다. 나라의 큰 도성은 둘레가 20여 리이다. 도성은 매우 험하고 견고하며 사는 사람이 많다. 다른 지역의 보화(寶貨)가 이 나라에 많이 모여 있다. 토지는 비옥한 땅이고 농사 짓고 거둠에 곡물들이 착실하게 심어져 있고, 수풀이 빼곡이 우거져 있으며 화과(花菓)가 아주 넉넉하다. 좋은 말()이 많이 나고 영특한 기계장치(機巧)의 기술은 특히 여러 나라에서 뛰어나다. 기후는 화창하다. 풍속(風俗)은 용맹하고 가열차다. 무릇 여러 호국(胡國)에 이 나라는 그 중심이 되니 행동에 위엄스런 모습이 있고 가깝거나 먼 사람들을 대해서 법도를 취한다. 그 왕은 호방하고 용맹스러우며 이웃 나라가 명을 받든다. 병마(兵馬)가 강성하고 대부분은 전사(戰士)인 자갈(赭羯)이다. 자갈(赭羯)의 사람들은 그 성질이 용감하고도 가열차서 죽음 보기를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처럼 여기어 전투할 때 앞에서 대적하는 적이 없다.” 하였다.

... 강국본전(康國本傳)을 살펴보면 만세통천(萬歲通天) (696697)에 대수령(大首領) 독사발제(篤娑缽提)가 왕이 되었다. 이 왕이 죽자 아들 니열사사(泥涅師師)가 왕의 자리에 섰다. 이이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돌혼(突昏)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하였다.

... 강국전(康國傳)을 살펴보면 개원(開元, 713741) 초 쇄자개(鎖子鎧 : 금속 갑옷), 수정잔(水精桮), 마노병(瑪瑙瓶), 타조알(駝鳥卵)과 월락(越諾: 명품 직물), 주유(侏儒 : 키가 작은 이), 호선(胡旋 : 빙글빙글 돌며 추는 胡舞를 말하는 듯)(를 추는) 여자를 공물로 들였다. 그 왕 오륵가(烏勒伽)가 대식(大食)과 더불어 자주 전쟁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와서 당나라 군대를 빌려주기를 간청하였지만, 천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오래 지나서 그 아들 돌갈(咄曷)을 봉하여 조()나라 왕으로 삼아주고 묵철(默啜)을 미()나라 왕으로 삼아주기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오륵가(烏勒伽)가 죽자 사신을 보내니 돌갈(咄曷)을 왕으로 세우게 하고 흠화왕(欽化王)으로 봉하였으며 그 어머니 가돈(可敦)을 군부인(郡夫人)으로 삼았다. 개원(開元) 5(717) 3월 강국왕(康國王)이 사신을 보내 모금(毛錦), 청대(青黛 : 푸른색 물감, 눈썹 그리는 먹이나 외약용으로 쓰인다 함)를 공물로 들였다.” 하였다.

... 개원(開元) 2810월 강국(康國)이 사신을 보내 보향로(寶香爐)와 백옥환(白玉環), 마노(瑪瑙), 수정 안약병(水精眼藥瓶子)을 공물로 들였다.

... 천보(天寶) 7(748) 정월(正月) 강국왕(康國王) 돌갈(咄曷)이 대수령(大首領) 말야문(末野門)을 보내 말 10필과 토산물을 공물로 바쳤다. ...

欽定古今圖書集成/方輿彙編/邊裔典/047卷 康居部彙考康民 者舌 悉萬斤 薩末鞬 颯秣建

成王 年大會諸侯於成周康民入貢

:《汲冢周書王會解康民以桴苡者其實如李食之 宜子。」

康亦西戎之別名也食桴苡即有身

武帝   年始通使於康居

漢書武帝本紀》,不載。 西域傳》:「康居國王冬治 樂越匿地到卑闐城去長安萬二千三百里不屬都護至越匿地馬行七日至王夏所居蕃內九千一百四里戶十二萬口六十萬勝兵十二萬人東至都護治所五千五百五十里與大月氏同俗東羈事匈奴。」

元帝建昭三年秋護西域騎都尉甘延壽副校尉陳湯發兵攻郅支單于於康居斬之

漢書·元帝本紀云云。 西域列傳》:「宣帝時匈奴乖亂五單于並爭,漢擁立呼韓邪單于而郅支單于怨望殺漢使者西阻康居其後都護甘延壽副校尉陳湯發戊己校尉西域諸國兵至康居誅滅郅支單于。」

成帝   年康居遣子入侍貢獻

漢書成帝本紀》,不載西域傳》:「成帝時康居遣子侍漢貢獻自以絕遠獨驕慢不肯與諸國相望都護郭舜數上言本匈奴盛時非以兼有烏孫康居故也及其稱臣妾非以失二國也漢雖皆受其質子然三國內相輸遺交通如故亦相候伺見便則發合不能相親信離不能相臣役以今言之結配烏孫竟未有益反為中國生事然烏孫既結在前今與匈奴俱稱臣義不可距而康居驕黠訖不肯拜使者都護吏至其國坐之烏孫諸使下王及貴人先飲食已乃飲啗都護吏故為無所省以夸旁國以此度之何故遣子入侍其欲賈市為好辭之詐也匈奴百蠻大國今事漢甚備聞康居不拜且使單于有自下之意宜歸其侍子絕勿復使以章漢家不通無禮之國燉煌酒泉小郡及南道八國給使者往來人馬驢橐駝食皆苦之空罷耗所過送迎驕黠絕遠之國非至計也。」漢為其新通重致遠人終羈縻而未絕康居有小王五一曰蘇䪥王治蘇䪥城去都護五千七百七十六里去陽關八千二十五里二曰附墨治附墨城去都護五千七百六十七里去陽關八千二十五里三曰窳匿王治窳匿城去都護五千二百六十六里去陽關七千五百二十五里四曰罽王治罽城去都護六千二百九十六里去陽關八千五百五十五里五曰奧鞬王治奧鞬城去都護六千九百六里去陽關八 千三百五十五里凡五王屬康居

少帝咸熙二年九月閏月康居獻名馬歸於相國府以顯懷萬國致遠之勳

:《魏志陳留王奐本紀云云

武帝泰始三年康居遣使獻善馬

晉書武帝本紀》,不載四夷傳》:「康居國在大宛 西北可二千里與粟弋伊列鄰接其王居蘇薤城風俗及人貌衣服略同大宛地和暖饒桐柳葡萄多牛 羊出好馬泰始中其王𨚗鼻遣使上封事并獻善馬。」

太康八年康居國遣使來獻

:《晉書武帝本紀云云

北魏

太武帝太延 年康國始遣使入貢

魏書太武帝本紀》,不載 西域列傳》:「康國者康居之後也遷徙無常自漢以來相承不絕其王本姓溫月氏人也舊居祁連山北昭武城因被匈奴所破西踰蔥嶺遂有其國枝庶各分王故康國左右諸國並以昭武為姓示不忘本也王字世夫畢為人寬厚甚得眾心其妻突厥度達可汗女也都於薩寶水上阿祿迪城多人居大臣三人共掌國事其王索髮冠七寶金花衣綾羅錦繡白疊其妻有髻幪以皂巾丈夫剪髮錦袍名為彊國」,西域諸國多歸之米國史國曹國何國安國小安國那色波國烏那曷國穆國皆歸附之胡律》,置於祆祠將決罰則取而斷之重者族次罪者死賊盜截其足人皆深目高鼻多髯善商賈諸夷交易多湊其國有大小鼓五絃箜篌婚姻喪制與突厥同國立祖廟以六月祭之諸國皆助祭奉佛為胡書氣候溫宜五穀勤脩園蔬樹木滋茂出馬黃金碙沙𧵊香, 阿薛那香瑟瑟麞皮, 氍毹多葡萄酒富家或致千石連年不敗太延中始遣使貢方物後遂絕焉

太延三年者舌國遣使朝獻奉汗血馬

魏書太武帝本紀云云西域傳》,太延中魏德益以遠聞西域龜茲疏勒烏孫悅般渴槃陁鄯善焉耆車師粟特諸國王始遣使來獻世祖以西域漢世雖通有求則卑辭而來無欲則驕慢王命此其自知絕遠大兵不可至故也若報使往來終無所益欲不遣使有司奏九國不憚遐嶮遠貢方物當與其進安可豫抑後來!」乃從之於是始遣行人王恩生許綱等西使恩生出流沙為蠕蠕所執竟不果達又遣散騎 侍郎董琬高明等多齎錦帛出鄯善招撫九國厚賜之琬等受詔便道之國可往赴之琬過九國北行至烏孫國其王得朝廷所賜拜受甚悅謂琬曰:「傳聞破洛那者舌皆思魏德欲稱臣致貢但患其路無由耳今使君等既到此可往二國副其慕仰之誠。」琬於是自向破洛那遣明使者舌烏孫王為發導譯達二國琬等宣詔慰賜之已而琬明東還烏孫破洛那之屬遣使與琬俱來貢獻者十有六國自後相繼而來不間於歲國使亦數十軰矣又按西域傳》,者舌國故康居國在破洛那西北去代一萬五千四百五十里太延三年遣使朝貢自是不絕。〈按康國已見前此又言者舌故康居國或此乃康居故地分為二也

孝文帝延興三年十月悉萬斤國遣使朝獻

魏書孝文帝本紀云云西域傳》。「悉萬斤國都城在悉密西去代一萬二千七百二十里其國南有山,名伽色那山出獅子每使朝貢。」〈按魏書康國已自有傳又云者舌居其故地據唐書康者即元魏悉萬斤或一康居分而為三也姑並附之

承明元年九月悉萬斤國遣使朝獻

太和三年十二月悉萬斤國遣使朝貢

太和四年七月悉萬斤國遣使朝貢

太和十一年八月悉萬斤國遣使朝貢

太和十五年三月悉萬斤等國遣使朝貢

以上魏書孝文帝本紀云云

宣武帝景明三年悉萬斤國遣使朝貢

正始四年四月悉萬斤國遣使朝獻十月悉萬斤國遣使朝獻

永平二年正月悉萬斤國遣使朝貢

以上魏書宣武帝本紀云云

煬帝大業年康國遣使入獻 按隋書煬帝本紀不載康國本傳》:「大業中始遣 使貢方物後遂絕焉。」

高祖武德七年七月康國遣使朝貢

唐書高祖本紀不載冊府元龜云云

武德十年,《康國遣使入貢

唐書高祖本紀不載康國傳》,「康者一曰薩末鞬亦曰颯秣建元魏所謂悉萬斤者南距史百五十里西北距西曹百餘里東南屬米百里北中曹五十里在那密水南大城三十小堡三百。」君姓溫本月氏人始居祁連北昭武城為突厥所破稍南依蔥嶺即有其地枝庶分王曰安曰曹曰石曰米曰何曰火尋曰戊地曰史世謂九姓皆氏昭武土沃宜禾出善馬兵彊諸國人嗜酒好歌舞於道王帽氈飾金雜寶女子盤髻幪黑巾綴金蘤生兒以石蜜啖之置膠於掌欲長而甘言持珤若黏云習旁行書善商賈好利丈夫年二十去傍國利所在無不至以十二月為歲首尚浮圖法祠祆神出機巧技十一月鼓舞乞寒以水 交潑為樂隋時其王屈木支娶西突厥女遂臣突厥武德十年始遣使來獻

按杜氏通典》,「康居國漢時通焉在大宛西北可二千 里與粟弋伊鄰接王理樂越匿地卑闐城亦居蘇薤城去長安萬二千三百里不屬都護戶十二萬東至 都護理所五千五百里與大月氏同俗事匈奴。」韋節 西蕃記:「康國人並善賈男年至五歲則令與書少解則遣學賈以得利多為善其人好音聲以六月一日為歲首至此日王及人庶並服新衣剪髮須,在國城東林下七日馬射至欲罷日置一金錢於帖上射中者則得一日為王俗事天神崇敬甚重神兒七月死失骸骨。」事神之人每至其月俱著黑疊衣徒跣撫胸號哭涕淚交流丈夫婦女三五百人散在草野求天兒骸骨七日便止國城外別有二百餘戶專知喪事別築一院其院內養狗每有人死者即往取尸置此院內令狗食之由是盡收骸骨埋殯無棺槨

太宗貞觀元年五月康國遣使朝貢

唐書太宗本紀不載冊府元龜云云

貞觀五年康國請臣

唐書太宗本紀》,不載康國傳》:貞觀五年遂請臣太宗曰:「朕惡取虛名害百姓,且康臣我緩急當同其憂師行萬里寧朕志邪?」卻不受俄又遣使獻師子獸帝珍其遠命祕書監虞世南作賦自是歲入貢致金桃銀桃詔令植苑中

大唐西域記: 颯秣建國 唐言康國周千六七百里東西長南北狹國大都城周二十餘里極險固多居人異方寶貨多聚此國土地沃壤稼穡備植林樹蓊鬱花菓滋茂多出善馬機巧之技特工諸國氣序和暢風俗猛烈凡諸胡國此為其中進止威儀近遠取則其王豪勇鄰國承命兵馬彊盛多是赭羯赭羯之人其性勇烈視死如歸戰無前敵

貞觀九年康國獻獅子

貞觀十一年十二月康國獻金桃銀桃詔令植之於苑囿

貞觀十三年二月康國遣使朝貢

貞觀十六年春正月康國遣使獻方物

貞觀十七年正月康國遣使獻方物

貞觀十八年正月康國遣使獻方物

按以上唐書太宗本紀不載冊府元龜云云貞觀二十一年康國入貢

唐書太宗本紀不載 杜氏通典》,「貞觀二十一 年康國獻黃桃大鵝卵其色如金亦呼為金桃。」

高宗永徽年以康居地為都督府

唐書高宗本紀不載康國本傳》,「永徽時以其 地為康居都督府即授其王拂呼縵為都督。」

咸亨二年五月康國遣使來朝貢其方物

調露元年十月康國遣使朝貢

以上唐書本紀》、列傳不載冊府元龜云云

中宗嗣聖十三年即太后萬歲通天元年以康國大首領篤娑缽提為其國王

唐書武后本紀不載康國本傳》:「萬歲通天中以大首領篤娑缽提為王子泥涅師師立死國人立突昏為王。」

元宗開元元年康居遣人入貢

:《唐書元宗本紀》,不載康國傳》:「開元初貢鎖子鎧水精桮瑪瑙瓶駝鳥卵及越諾侏儒胡旋女子其王烏勒伽與大食亟戰不勝來乞師天子不許久之請封其子咄曷為曹王默啜為米王詔許烏勒伽死遣使立咄曷封欽化王以其母可敦為郡夫人開元五年三月康國王遣使獻毛錦青黛。」

開元十二年四月康國王烏勒遣使獻侏儒一人馬狗各二

開元十四年十一月康國王遣使獻豹及方物開元十五年五月康國獻胡旋女子及豹

開元二十八年十月康國遣使獻寶香爐及白玉環瑪瑙水精眼藥瓶子

天寶三載七月 康國遣使獻馬及寶

天寶九載正月 康國王咄曷遣大首領末野門, 獻馬十匹及方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