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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肅愼)

동북쪽 숙신(肅慎) 지리 자료 1

by 쥐눈이 2024. 5. 30.

1.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 17: 대황(大荒) 안에 산이 있으니 이름이 불함(不咸)이다. 나 임신(任臣)이 살피건대 두우(杜佑)의 동전(通典)에서 읍루(挹婁)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다.’ 하고 정초(鄭樵)의 도읍략(都邑畧)에서 옛 숙신국(肅慎國)은 불함산(不咸山)에 도읍하였으니 부여(夫餘) 동북쪽 천여 리에 있다.” 하였다.여기에 숙신씨(肅慎氏)의 나라가 있다. 곽이 말하기를 지금 숙신국(肅慎國)은 양평(襄平)과 거리가 3천여 리이니 움집()을 파서 살고 옷이 없고 돼지가죽으로 옷을 해서 입는다. 겨울이면 돼지기름을 몸에 발라 몇 푼 두께로 하여서 바람과 추위를 물리치는 데에 쓴다. 그 사람들은 모두 활을 쏘는 데에 뛰어나다. 활 길이는 4자로 짱짱하고 옹골차며 화살은 호()나무로 만드는데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로 청석(青石)으로 화살촉을 만든다. 이는 춘추(春秋) 시대에 물수리()가 진후(陳侯)의 조정에 모여들었을 때 얻었던 화살이다. () 대흥(大興) 3(320)에 평주(平州, 요동에 소재) 자사(刺史) 최비(崔毖)가 주()의 총리격인 별가(别駕) 고회(髙㑹)를 보내 숙신씨(肅慎氏)의 활과 화살, 화살촉을 바치게 하였다. 마치 동골(銅骨)로 만든 것 같아서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해내(海内)의 나라들과 물건을 싣고 다니다 보니 통해서 얻어  이 화살촉을 쓰고 있다.하였다. 지금 이름이 읍루국(挹婁國)이라고 하는 곳은 좋은 담비와 붉은옥(赤玊)을 내는데 아마도 해외(海外)를 따라다니다 이곳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후한서(後漢書)에서 이른바 읍루(挹婁)’라는 것이, 이것이다. 나 임신(任臣)이 살펴보건대 사기(史記)에서 식신(息慎)’이라 쓰고 죽서(竹書) ()임금 25년에 식신씨(息慎氏)가 손님으로 찾아왔다라고 실려있으며 급총주서(汲冢周書)에서는 성왕(成王) 때에 식신(息慎)이 와서 축하해 주니 왕이 식신(息慎)에게 선물을 내리는 명이라는 글을 쓰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왕회해(王㑹解)에서는 이들을 직신(稷慎)’이라고 쓰고 있고 더러는 숙신(肅眘/의 옛 글자)이라고 썼다. () 무제(武帝)가 해외의 숙신(肅眘)에게 조서를 내렸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서릉(徐陵)의 글에 숙신에 광활한 땅 그 부는 바람에 서 있던 소가 남쪽으로 눕는다.(肅眘茫茫風牛南偃)’ 하였다. 유회맹(劉㑹孟)이 말하기를 숙신(肅慎) ()나라 때는 읍루(挹婁)’라고 말하였고 위()나라 때에는 물길(勿吉)’이라 하였으며 당()나라 때에는 말갈(靺鞨)’이라고 하였다.” 말하였다. 귀곡자(鬼谷子)숙신씨(肅慎氏)가 흰 꿩을 문왕(文王)에게 보냈다.” 하였다.

위지(魏志)에서 당우(唐虞) 및 주()나라 때부터 숙신(肅慎)이 들인 물품은 모두 몇 세대를 건너뛰다가 청룡(青龍, () 명제(明帝) 조예(曹叡)의 연호) 4(236)에 숙신씨(肅慎氏)가 고시(楛矢)를 공물로 들였다.” 하였다. ()에서 조위(曹魏) 경원(景元) 3(262), 함영(咸寕) 5, 동진(東晉) 대흥(大興) 2(319) 때 숙신(肅慎)이 모두 고시(楛矢)와 돌촉(石砮)을 보내왔다고 기록하였으니 바로 이 나라이다. 좌전(左傳)숙신(肅慎)과 연()과 박()은 우리 북쪽 땅이다.” 하니 두예 주()에서 숙신(肅慎)은 현토(𤣥菟) 북쪽 3천여 리에 있다. 강엄(江淹)의 수고편(遂古篇)에서 옥저(沃沮)와 숙신(肅慎)은 동북의 변방이다.” 하였다.

山海經廣注 (四庫全書本)/17 : 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任臣案杜佑通典挹婁在不咸山北鄭樵都邑畧云古肅慎國都不咸山在夫餘東北千餘里有肅慎氏之國郭曰今肅慎國去襄平三千餘里穴居無衣衣猪皮冬以膏塗體厚數分用却風寒其人皆工射弓長四尺勁彊箭以楛為之長尺五寸青石為鏑此春秋時隼集陳侯之庭所得矢也晉大興三年平州刺史崔毖遣别駕髙㑹使来献肅慎氏之弓矢箭鏃有似銅骨作者問云轉與海内國通得用此今名之為挹婁國出好貂赤玊豈従海外轉而至此乎後漢書所謂挹婁者是也 任臣案史記作息慎竹書舜二十五載息慎氏来賔汲冢周書云成王之時息慎来賀作賄息慎之命王㑹解謂之稷慎或作肅眘漢武帝詔海外肅眘徐陵文肅眘茫茫風牛南偃劉㑹孟云肅慎在漢曰挹婁魏曰勿吉唐曰靺鞨鬼谷子云肅慎氏饋白雉于文王魏志云自唐暨周肅慎之物皆曠世而至青龍四年肅慎氏致楛矢晉紀景元三年咸寕五年大興二年肅慎皆来饋楛矢石砮即此國也左傳肅慎燕毫吾北土也杜注云肅慎在𤣥菟北三千餘里江淹遂古篇沃沮肅慎東北邉兮

 

2. 어정연감류함(御定淵鑑𩔖函) 231 : 숙신(肅慎) 1 : 진서(晉書)에서 숙신씨(肅慎氏)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니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으니 부여(夫餘)와 거리는 60일 걸음이 될 만하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가로 두고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칸국(寇漫汗國)과 닿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약수(弱水)에 막다르고 있다. 그 땅의 경계가 동서남북(廣袤)으로 수천 리이다. 사람들은 깊은 산과 구석진 골짜기에서 살아 그 길은 험하고 막혀 있어 수레나 말(또는 말수레)이 드나들지 못한다. 여름이면 간촐하게 만든 집()에서 지내고 겨울을 지낼 때면 움집에서 산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군장(君長)이 되고 문자나 묵()이 없어 입말로써 약속한다. 돌촉(石砮),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 3() 다섯 치()의 단궁(檀弓)과 길이 한 자 남짓한 호시(楛矢)가 있다.” 하였다.

북사(北史)에서 물길국(勿吉國)은 고구려(髙句麗) 북쪽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갈(靺鞨)’이라고 하는데 읍락마다 따로 우두머리()가 있고 서로 하나로 묶어내지는 않는다. 그 사람들은 굳세고 날래며 가장 강성하여 늘 두막루(豆莫婁) 등 나라들을 우습게 여기어 여러 나라가 이들을 걱정하였다. 낙양(洛陽)에서 5천 리()이고 화룡(和龍)에서 북쪽으로 2백여 리에 선옥산(善玉山)이 있는데 산 북쪽으로 13일을 가면 기려산(祁黎山)에 이른다. 다시 북쪽으로 7일을 가면 낙괴수(洛瓌水)에 이르는데 물 너비가 1() 남짓하고 다시 북쪽으로 15일을 가면 태악로수(太岳魯水)에 이르고 다시 동북쪽으로 18일을 가면 그 나라에 당도한다. 나라에 큰 물(大水)이 있으니 3리 남짓으로 탁 트였는데 속말수(速末水)라고 이름한다. 그 부락에 겨레들은 모두 일곱 갈래()가 있고 그 하나는 속말부(粟末部)라 하고 그 둘은 백돌부(伯咄部)라 하고 그 셋은 안거골부(安車骨部)라 하고 그 넷은 불열부(拂涅部)라 하고 그 다섯은 호실부(號室部)라고 하고 그 여섯은 흑수부(黒水部)라고 하고 그 일곱은 백산부(白山部)라고 한다.

흑수부(黒水部)는 더욱 굳세며 불열(拂涅)에서 동쪽은 화살 재료로 모두 돌촉(石鏃)을 쓰니 바로 옛 숙신씨(古肅慎氏)이다. 북위(北魏) 연흥(延興) 중에(472) 을력지(乙力支)를 보내 알현하고 공물을 들였고 정광(正光, 520525) 때까지 공물과 사신을 교류하여서 제(, 북제 550- 577) 시기까지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다. ()나라 개황(開皇) 초기에 따르며 사신과 공물을 드렸는데 문제(文帝)가 그 사신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이 듣기에 저 물길 땅 사람들은 용맹하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참으로 짐이 마음에 품은 뜻에 부응하니 그대들을 보기가 자식과 같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짐()을 공경하기를 아버지처럼 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사신이 답하기를 신들은 한 지방의 외진 곳에서 살고 있지만, 내국(内國, 수나라)에 성인(聖人)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기에 와서 황제를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나라는 서북쪽으로 거란(契丹)과 닿아있어 매번 서로 으르고 약탈하였으니 뒤에 물길 사신이 수나라에 온 김에 문제(文帝)가 이를 꾸짖어 서로 공격하지 말게 하였다. 사신(使者)이 사죄하였고 문제(文帝)가 이들을 위로하여 황제 앞에서 잔치를 열어 대접하게 하였다. 사신이 그 무리와 더불어 모두 일어나 춤을 추는데 그 곡절(曲折)이 전투적인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그 나라는 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속말(粟末)과 백산(白山)만이 가까이에 있었다.

양제(煬帝) 초에 거수(渠帥, 우두머리) 돌지계(突地稽)가 그 부락 사람들을 이끌고 항복하여 우광록대부(右光禄大夫)에 제수하고 이들을 유성(栁城)에 살게 하여 변방 사람들과 더불어 왕래하게 하니 중원(中國)의 풍속에 기뻐하며 관과 띠를 쓰기를 청하였고 제()가 이 뜻을 가상히 여기어 아름다운 비단을 내려 이들을 포상하여 아꼈다. 요동(遼東)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돌지계(突地稽)가 그 무리를 이끌고서 수나라 군대를 따랐으니 매번 전투에서 공이 있을 때마다 상을 내림이 매우 두터웠다.” 하였다. 

금사(金史)에서 말갈(靺鞨)은 본래 물길(勿吉)이라 부르니 물길(勿吉)이란 옛 숙신(古肅慎)의 땅이다. 원위(元魏) 때 물길(勿吉)7()가 있었는데 수()나라에서 이르기를 말갈 7(靺鞨七部)라 하였다. 아울러 속말말갈(粟末靺鞨)과 똑같이 동모산(東牟山)을 지켰고 뒤에 발해(渤海)를 만들어 왕()이라 일컫고 십여 세대가 전해지고서 문자(文字)와 예악(禮樂)과 관부(官府)와 제도를 만들었다. 5() 15() 62()를 두었다. 흑수 말갈(黒水靺鞨)은 숙신(肅慎) 땅에서 살았는데 동쪽으로 바다를 가에 두고 남쪽으로 고려와 닿았으니 일찍이 병사 15만 무리로써 고려(髙麗)를 도와 당() 태종(太宗)을 막고 안시(安市)에서 깨뜨렸다.

당 현종(玄宗) 개원(開元, 713- 741) 중에 와서 현종을 알현하였는데 이때 흑수부(黒水府)를 두었고 부장(部長)으로서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를 삼았으며 장사(長史)를 두어 이들을 감시하게 하였다. 도독(都督)에게 성() 이씨(李氏)를 내렸고 이름은 헌성(獻誠)이라 하였으며 흑수경략사(黒水經略使)를 거느리게 하였다.

오대(五代) 때에는 거란(契丹)이 발해(渤海) 땅을 죄다 취하고 흑수말갈(黒水靺鞨) 그 남쪽에 있었던 것을 숙여진(熟女真)이라 하고 그 북쪽에 있었던 것을 생여진(生女真)이라 하였다. 금나라 태조(太祖)에 이르러 요()나라 군대를 국경 근처에서 물리치고 발해인(渤海人)을 불러 말하기를 여진(女真)과 발해(渤海)는 본래 한 집안이나 같다.” 하였으니 아마도 그 처음에는 모두 물길(勿吉)7()였던 것이다. ...마기령(馬紀嶺) 압자하(鴨子河) 금사(金史) : 회령현(㑹寜縣)에 마기령(馬紀嶺)이 있고 선춘(宣春)은 압자하(鴨子河)에 있다.〉 

御定淵鑑𩔖函 卷二百三十一 : 肅慎一 : 晉書曰肅慎氏一名挹婁在不咸山北去夫餘可六十日行東濱大海西接寇漫汗國北極弱水其土界廣袤數千里居深山窮谷其路險阻車馬不通夏則巢居冬則穴處父子世為君長無文墨以言語為約有石砮皮骨之甲檀弓三尺五寸楛矢長尺有咫 北史曰勿吉國在髙句麗北一曰靺鞨邑落各自有長不相總一其人勁悍最强常輕豆莫婁等國諸國患之去洛陽五千里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山北行十三日至祁黎山又北行七日至洛瓌水水廣里餘又北行十五日至太岳魯水又東北行十八日到其國國有大水闊三里餘名速末水其部落凡七種其一號粟末部其二伯咄部其三安車骨部其四拂涅部其五號室部其六黒水部其七白山部黒水部尤勁自拂涅以東矢皆石鏃即古肅慎氏也延興中遣乙力支朝獻迄於正光貢使相尋以至於齊朝貢不絕隋開皇初相率遣使貢獻文帝詔其使曰朕聞彼土人勇今來實副朕懐視爾等如子爾宜敬朕如父對曰臣等僻處一方聞内國有聖人故來朝拜其國西北與契丹接每相劫掠後因其使來文帝誡之使勿相攻撃使者謝文帝勞之令宴飲於前使者與其徒皆起舞曲折多戰鬬容然其國與隋懸隔唯粟末白山為近煬帝初渠帥突地稽率其部降拜右光禄大夫居之栁城與邊人來往恱中國風俗請被冠帶帝嘉之賜以錦綺而褒寵之及遼東之役突地稽率其徒以從每有戰功賞賜甚厚 金史曰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隋稱靺鞨七部並同粟末靺鞨保東牟山後為渤海稱王𫝊十餘世有文字禮樂官府制度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黒水靺鞨居肅慎地東濱海南接髙麗嘗以兵十五萬衆助髙麗拒唐太宗敗於安市開元中來朝置黒水府以部長為都督刺史置長史監之賜都督姓李氏名獻誠領黒水經略使五代時契丹盡取渤海地而黒水靺鞨其在南者號熟女真其在北者號生女真及太祖敗遼兵於境上招諭渤海人曰女真渤海本同一家盖其初皆勿吉之七部也....馬紀嶺鴨子河金史㑹寜縣有馬紀嶺宣春有鴨子河〉 

 

3. 서채전방통(書蔡傳旁通) 6 하권 : 숙신(肅慎) : 후한(後漢) 동이전(東夷傳)읍루(挹婁) 옛 숙신(肅慎) 나라는 부여(夫餘) 동북 천여 리()에 있으니 동쪽으로 큰 바다를 가에 두고 있고 남쪽으로는 북옥저(北沃沮)와 닿아있는데 그 땅이 다한 곳을 알지 못한다. 오대(五代) 사이부록(四夷附録)에서 흑수말갈(黑水靺羯)은 본래 물길(勿吉)이라 일컬었고 후위(後魏) 시대를 맞아 중원(中國)의 기록에서 보인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고려(髙麗)와 경계를 닿아 있고 사방으로 돌궐(突厥)에 맞닿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실위(室韋)를 이웃하고 있으니 대개 숙신씨(肅慎氏)의 땅이었다.” 하였다.

書蔡傳旁通 (四庫全書本)/6下 肅慎   後漢東夷傳挹婁古肅慎之國在夫餘東北千餘里東濵大海南與北沃沮接不知其所極五代四夷附録云黑水靺羯本號勿吉當後魏時見中國其國東至海南界髙麗四接突厥北鄰室韋蓋肅慎氏之地也

 

4. 한원(翰苑) : ○숙신(肅慎) : 활을 당겨 독을 푼 살촉을 마음껏 쏘고 큰 골이 띠처럼 둘러서 그곳에서 위험을 피하여 안정을 바랬으며 추위를 막으려 기름을 바르고 그윽한 바위굴에서 살며 스스로 느긋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서 읍루(挹婁)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夫餘) 동쪽 천여 리에 있으니 동쪽으로 큰 바다(大海)를 가에 두고 있다. 그 겨레 무리는 비록 적지만 용기와 역량(勇力)이 많다. 험한 산에 살면서 또한 화살 쏘는 솜씨가 훌륭하여 쏘면 능히 사람의 눈을 맞추었다. 활 길이는 4()이니 그 힘이 마치 쇠뇌와 같고 화살로는 호()를 쓰니 길이가 1(, *을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8()이다. 청석(青石)으로 살촉을 만드는데 살촉은 모두 독을 발라 사람이 맞으면 바로 죽는다. 배 타는 것에 익숙하고 알겨먹고 훔치는 것을 좋아하여 이웃 나라들이 두려워하고 근심하였지만, 끝내 복종시킬 수 없었다.

동이(東夷)에 부여(夫餘)는 먹고 마시는 유가 모두 조두(俎豆)를 쓰는데 읍루(挹婁)만은 유독 내려오는 예절이나 습성(法俗)이 없어 가장 기강이 없다. 사람들 꼴은 부여(夫餘)와 닮았으나 입말은 각각 다르다. 오곡(五穀)과 마() ()가 있고 붉은 옥(赤玉)과 좋은 담비 가죽이 난다. 군장(君長)은 없고 그 마을마다 각각 대인(大人)이 있다. 산림(山林) 사이에서 산다. 땅의 기운이 매우 차서 성곽(城郭)이 없이 산림에 의지하며 굴에서 산다. 돼지()를 잘 기르며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겨울 달에는 그 기름을 몸에 발라서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웃통을 벗고 1() 되는 베()로 몸의 앞뒤를 가린다. 굴은 그 깊이로써 귀한 대가집을 기준으로 삼아서 구제(九梯)의 깊이에 이르기까지 한다. 북쪽으로는 약수(弱水)가 막다르게 있고 남쪽으로는 옥저(沃沮)를 경계로 한다.

위략(魏略)에서 숙신씨(肅慎氏)는 그 땅이 부여국(夫餘國) 북쪽으로 십 일을 걸어가면 나온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가에 두고 있고 서쪽으로 관만행국(冠漫行國)과 닿아있으며 북쪽으로 약수(弱水)가 막다르게 있다. 그 땅의 경계는 동서남북(廣袤)으로 수천 리이다. 깊은 산속과 외진 골짜기에서 살며 여름이면 간촐하게 만든 보금자리()에서 지내고, 겨울이면 굴(움집)에서 보낸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군장(君長)이 된다. 글자 틀(文理)이 없어서 입말로 약속을 한다. 담비 털을 이어서 베()를 만든다. 발로 고기를 끼고서 뜯어 먹는다. 언 고기를 얻으면 그 위에 앉아서 따뜻하게 만든다. 땅 흙이 염분과 철()이 없어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고 여기에 물을 부어 즙을 낸 다음에 먹는다.

()을 꼽고서 상호 혼인의 뜻을 알리고 이에 남자의 집으로 간다. 

숙신국기(肅慎國記)숙신(肅慎) 민간에 혼례 법도는 남자는 털과 깃으로써 여자의 머리에 꽂아 주는데 여자가 화답을 하면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간다. 그런 뒤에 예식을 치른다. 지조가 있는 여인은 결혼을 하게 되고 음란한 여인은 미혼으로 남는다. 장성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늙은 사람을 가볍게 여긴다. 과부가 되면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는다. 성질이 흉악하고 사나워서 누군가의 아픔이나 죽음에 대해 근심하거나 슬퍼함이 없다.” 하였다.

관 덧널을 묶은 노끈에 술을 붓다가 노끈이 썩으면 이 의식을 그칠 줄 아니 죽은 이를 보내는 예을 펴는 것이다.   

숙신기(肅慎記)숙신(肅慎)은 민간에서는 부모가 죽으면 남자는 곡()을 하며 울음을 울지 않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사람은 기상이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다. 죽으면 바로 그날 편의대로 들에서 장례를 치른다. 이때 노끈으로 덧널()을 묶고 관 위쪽을 흙 밖으로 내놓고서 술을 붓는데 노끈이 썩으면 바로 이 일을 그만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철에 제사를 지내는 일은 없다.” 하였다.   

()의 업적이 융성해지고 희씨(姬氏)가 칭송되니 숙신이 주나라 조정에 들어와 축하하였고 이 일을 새기게 하였다.   

숙신기(肅慎記)옛날 무왕(武主)이 상()나라를 이기고 구이(九夷)와 백만(百蠻)과 외교의 길을 트니 이들이 각각 그 선물을 가지고서 와 공물을 들였으니 이들로 하여 그 맡은 업을 잊지 말게 하였다. 이에 숙신(肅慎)의 호시(楛矢)와 돌촉(石砮)을 공물로 들였고 그 길이는 한 자() 여덟치였다. 선왕(先王)이 그 덕()스러운 정치의 훈풍에 맞게 먼 데 겨레들을 이르게 한 일을 밝혀서 후대 사람들에게 보여 길이 거울이 되게끔 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그 호()화살에 글을 새기기를 숙신씨(肅慎氏)가 공물로 바친 화살이라 하였는데 왕이 또한 이 화살을 진 호공(陳胡公)에게 하사하였다. 성왕(成王) 때 숙신이 다시 입조하여 왕을 축하하니 성왕이 영백(榮伯)을 시켜 숙신(肅慎)에게 선물을 내리는 명()을 짓게 한 것고 성왕(成王)의 명성을 읊조리게 한 것이다.” 하였다.   

()나라의 덕스러운 기풍이 오히려 막혀 그 임금 류()씨의 명성이 거두어졌으니 숙신과 통하지 못한 교류를 탄식하였다.   

숙신기(肅慎記)에서 한 무제(漢武帝) 때에 소신(())이 이르지 않자 질책하는 조서가 분에 차 있었으니 숙신을 한나라 조정에 이르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무제(武帝)의 명성이 거두어졌다.” 하였다.   

말 머리가 돌아갈 곳을 아나니 알현해야 할 큰 나라가 있음을 밝혔다.   

육귀(陸劌)의 업중기(鄴中記)숙신(肅慎)은 업() 땅 동북쪽에 있으니 업()과의 거리가 5만 리()이다. 사신을 보낸 지 4년에 마침내 도착하여 석호(石楛)와 노시(砮矢)를 바쳤다. 사신에게 무엇을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를 물으니 답하기를 소와 말이 서남쪽으로 향하여 잠을 잔 지 3년이 되다 보니, 그래서 어떤 큰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왔을 뿐이다하였다. 이후로 늘 이것으로써 큰 나라가 들어섰다는 징조로 삼았던 것이다.” 하였다.   

낙상(雒常)의 거죽을 들여서 옷을 지어 입으니 성스러운 도(聖道)의 더한 융숭함을 증험하였다.

산해경(山海經)에서 불함산(不咸山)에 숙신국(肅慎國)이 있다. 숙신국은 백민(白民) 북쪽에 있으니 그 나라에 나무가 있는데 낙상(雒常)이라 이름한다. 선인(先人)이 제왕의 자리를 이으면 이에 이 나무 거죽을 가져다 옷을 해 입는다.” 하였다. 곽박(郭璞)그 민간은 옷가지가 없는데 중원 땅(中國)에 성제(聖帝)가 제왕의 자리를 이어 서면 이 나무가 거죽이 없다가 거죽을 만들어 내니 옷을 해 입을 수 있는 것이다.

翰苑  ○肅慎 : 彎弧縱毒帶巨壑以偷安禦冷塗膏穴幽巖而自逸   後漢書曰挹婁古肅慎之國也在夫餘東千餘里東濱大海種眾雖少而多勇力處山險又善射發能入人目弓長四尺力如弩矢用楛長一尺八寸青石為鏃鏃皆施毒中人即死便乘船好寇盜鄰國畏患而卒不能服東夷夫餘飲食類皆用俎豆唯挹婁獨無法俗最無綱紀人形似夫餘而言語各異有五穀麻布出赤玉好貂無君長其邑落各有大人處於山林之間土氣極寒無城郭依山林穴居好養豕食其肉衣其皮冬月以膏塗身以捍風寒夏則裸袒以尺布蔽其前後穴以深為貴大家至接九梯之也   北窮弱水南界沃沮   魏略曰肅慎氏其地在夫餘國北十日行東濱大海西接冠漫行國北極弱水其土界廣袤數千里居深山窮谷夏則巢居冬則穴處父子代為君長無文理以言語為約束續貂毛以為布以足挾肉噉之得凍肉坐其上令臑地土無鹽鐵燒木作灰灌之取汁而食   插羽申交婚姻之旨爰適   肅慎國記曰肅慎俗嫁娶之法男以毛羽插女頭女和則持歸然後置禮聘婦貞而女淫貴壯而賤老寡居終身不嫁性凶悍以無憂哀相向也   灌繩知止送終之禮攸陳   肅慎記曰肅慎俗父母死男子不哭泣有泣者謂之不壯死即日便葬於野以繩繫於椁頭出土以酒灌繩腐即止無四時祭祀之也   周業斯隆姬誦銘其入賀   肅慎記曰昔武主克商通道九夷百蠻各以其賄來貢使無忘職業於是肅慎貢楛矢石砮其長尺有咫先王欲昭其合德之致遠也以示後人使永監焉故銘其楛曰肅慎氏之貢矢王又以賜陳胡公成王時復入賀王使榮伯作賄肅慎之命也誦成王名也   漢風尚阻劉徹嗟其未通   肅慎記曰漢武帝時蕭 慎不至策詔慷慨不能致之也徹武帝名   馬首知歸明大邦之可謁   陸劌鄴中記曰肅慎在鄴之東北去鄴五萬里遣使四年乃達獻石楛 [ 在第二十八字砮下] 砮矢問使者緣何來此答云牛馬西南向眠三年則知有大國所在故來耳恆以此為候也   雒常入用驗聖道之逾隆   山海經曰在不咸山有肅慎國肅慎國在白民北有樹名曰雒常先人代帝於此取衣郭璞曰其俗無衣服中國有聖帝代立則此木生皮可衣也

 

5. 사기 삼가주(史記三家註) 2: 하본기(夏本紀) : 조이(鳥夷)가 짐승 가족으로 옷을 해 입었다. 집해(集解) : 정현(鄭玄)조이(鳥夷)는 동()방의 사람으로 새와 들짐승을 죽여서 먹는 자들이다.” 하였다. 공안국(孔安國)그 가죽을 입었으니 수해(水害)가 사라졌음이 분명하다.” 하였다. 정의(正義) : 괄지지(括地志)에서 말갈국(靺鞨國)은 옛 숙신(肅慎)이니 동() 동북쪽 만 리() 아래에 있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각각 큰 바다에 이른다. 그 나라는 남쪽으로 백산(白山)이 있으니 새와 들짐승, 풀 나무가 모두 하얗다. 그 사람들은 산림(山林) 사이에서 사는데 땅의 기운이 매우 차서 늘 굴(움집)에서 살고 그 집의 깊이로써 귀하게 여기니 구제(九梯)에 이르기도 한다. 돼지를 기르고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겨울이면 돼지기름으로 몸에 바르니 그 두께가 두어 푼()으로써 바람과 한기를 막았다. 더러운 냄새와 불결함을 귀하에 여기어 변소를 가운데에 짓고 이를 둘러서 산다. 용기와 역량이 많고 활을 잘 쏜다. 활 길이는 4()이니 쇠뇌()만하다. 화살에는 호()를 쓰는데 길이가 한 자() 여덟 치()이며 청석(青石)을 화살촉으로 만든다. 장례는 나무를 엇걸어서 덧널()을 만들고 돼지를 죽여 덧널 위에 쌓아놓는다. 부자는 수백에 이르고 가난한 자는 수십에 이르니 이 돼지로써 죽은 사람의 식량으로 여긴다. 흙으로 그 위를 덮고서 덧널을 노끈으로 매는데 덧널 머리가 흙 위로 나오게 하여서 술을 부어 그 혼이 내려오게 하는 의식을 치르고 노끈이 썩으면 이 의식을 그만둔다. 사계절의 제사는 없다.

史記三家註/002 夏本紀第二 鳥夷皮服。〈【集解鄭玄曰:「鳥夷)〔之民)〔食鳥獸者。」孔安國曰:「服其皮明水害除。」【正義括地志云:「靺鞨國古肅慎也在京東北萬里已下東及北各抵大海其國南有白山鳥獸草木皆白其人處山林閒土氣極寒常爲穴居以深爲貴至接九梯養豕食肉衣其皮冬以豬膏塗身厚數分以禦風寒貴臭穢不絜作廁於中圜之而居多勇力善射弓長四尺如弩矢用楛長一尺八寸青石爲鏃葬則交木作椁殺豬積椁上富者至數百貧者數十以爲死人之糧以土上覆之以繩繫於椁頭出土上以酒灌酹繩腐而止無四時祭祀也。」〉

 

6. 어제시(御製詩) 449: 백산(白山) 흑수(黒水)는 본디 신령한 곳(靈區)이요 물길(勿吉) 7()는 원래 풍속이 같다. ()의 선조가 말갈부(靺鞨部)에서 나왔는데 말갈(靺鞨)은 본래 호칭이 물길(勿吉)이다. 물길(勿吉)은 옛 숙신(肅慎) 땅이다. 물길(勿吉)7()가 있으니 서목이(舒穆爾)라 하고, 백소(伯蘇)라 하고, 왜철고(倭徹庫)라 하고, 오날(烏捏)이라 하고, 혁서(赫舒)라 하고, 흑수(黒水)라 하고, 백산(白山)이라 한다. 흑수부(黒水部)는 거란부에 따라 붙는 바람 남과 북으로 나뉘었는데 그 북쪽에 있던 겨레는 거란의 호적에 붙지 않아 생여직(生女直)’이라 불리었다가 뒤에 여진(女真)이라고 고쳐 불리었다. 땅은 혼동강(混同江)과 장백산(長白山)이었는데 혼동강(混同江) 역시 흑룡강(黒龍江)이라 불리니 이른바 백산흑수(白山黒水)가 이것이다.

동방의 운기(雲氣)는 기이한 사람을 배출한다. 단정하며 의젓하고 활을 잘 쏘고 불꽃같은 지혜는 이치를 훤히 꿰뚫으시니 이 때문에 여러 부족은 점차 와서 붙었고 흰옷에 붉은 옷깃을 차려입은 제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라의 시조는 완안부(完顔部)에서 살았는데 여덟 세대가 전해져 태조(太祖)에 이르렀고 요() 도종(道宗) 때를 맞아 오색의 운기(雲氣)가 여러 번 동방에서 나오니 크기가 2천 석()을 쟁여둔 둥근 쌀 곳집만 하였다. 사천(司天, 天象 관찰 담당) 공치화(孔致和)가 넌지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 구름 아래에 응당 기이한 사람이 나와 비상한 사업을 세울 것이다. 하늘은 상징으로써 알려준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태조(大祖)가 나셨다. 어려서 몸가짐이 단정하고 의젓하였으며 소년 때(成童 : 8세 이상이나 15세 이상)에는 활을 잘 쏘았으며 장성하여서는 꾀하는 일에 허투루하는 계책이 없었다. 사람을 잘 파악하여 일을 잘 맡기다 보니 사람들이 그를 위해 쓰임이 되기를 기꺼워하였다.

마침 요()나라 정치가 점점 기강이 무너질 때를 만나 혼동(混同)에서 요 군대를 맞아 싸우는데 마치 신()이 알려준 듯하였다. 여진(女真)은 만() 명의 군사를 꽉 채워 적이 대적할 수 없었다. 이에 이르러 그 말의 증험은 점친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요주(遼主)가 음란하고 술에 빠져 살며 정치에 태만하며 해마다 세금을 징발하고 재물을 강탈함에 준칙이 없어 여진(女真)은 치를 떨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태조(太祖)께서 드디어 성()과 보루를 쌓고 무기를 수선하여서 앞일에 대비하였고 나아가 붙이들을 불러들여 말하기를 ()나라 사람이 내가 장차 군대를 일으킬 것을 알고서 여러 지방의 군대를 집결시켜 우리 군대에 대비하고 있으니 우리가 반드시 먼저 군대를 먼저 보내어 이들을 제압해야 한다.” 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부족을 징발하여 군사를 25백 사람을 확보하고 요()의 죄를 하늘 땅에다 죄다 알리고 죄인을 두드려 패는 몽둥이()를 너도나도 뽑아 들고서 출정의 맹세를 하였다. ()나라 경계에 이르러 요()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요주(遼主)가 동북로 도통(東北路都統) 소사선(蕭嗣先)들에게 가서 적병을 치게 하였다. 금나라 태조(太祖)가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막았다. 마침 태조가 밤에 막 잠이 들었는데 마치 그의 머리를 붙잡는 듯한 기운이 있어 잠결에서 세 번을 깨어났다. 태조가 말하기를 천지신명께서 나를 일깨우시는 것이다.” 하고는 바로 북을 치고 횃불을 들고서 진군하였다. 동이 틀 무렵 혼동강(混同江)에 이르니 요() 사람들이 한창 빙판길(凌道)를 깨뜨리고 있었다. 태조가 힘 꽤나 쓰는 열 사람을 뽑아 이들을 쳐 달아나게 하였다. 인하여 무리를 이끌고 계속 전진하며 언덕에 올랐는데 요나라 군대를 만났다. 이때 큰바람이 불더니 티끌과 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태조(太祖)가 이는 바람을 타고 요나라 군사들을 힘껏 치니 요 졸병들은 무너졌고 장사(將士)들은 대부분 죽었다. 그 죽음을 면한 자를 잡은 것이 열에 일곱이었다. () 사람들이 일찍이 말하기를 여진(女真)의 군사들이 만 명을 채우게 되면 대적할 수가 없다.”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여진 군사들이 비로소 만 명을 채웠다는 말이다.나라를 세우고 제()라 하였으며 드디어 금()이라 이름하였다. ()의 달로(達嚕)를 물리쳤다. 달로(達嚕)는 바로 달로극급(達嚕克急)이니 이를 읽으면 달로(達嚕)가 된다.

御製詩 四集巻四十九 白山黒水本靈區勿吉七部原同俗金之先出靺鞨部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勿吉有七部曰舒穆爾曰伯蘇曰倭徹庫曰烏捏曰赫舒曰黒水曰白山黒水部附屬於契丹部分南北其在北者不在契丹籍曰生女直後改稱女真地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黒龍江所謂白山黒水是也東方雲氣生異人端重善射炳智燭以此諸部漸歸附素衣朱襮從于沃金之始祖居完顔部八傳而至太祖當遼道宗時有五色雲氣屢出東方大如二千石囷司天孔致和竊謂人曰其下當生異人建非常之事天以象告己而大祖生㓜時舉止端重成童即善射及長算無遺䇿知人善任人樂為用適值遼政漸不綱混同迎戰似神告女真滿萬不可敵至是其言驗如卜遼主淫酗怠於政事毎歲徵索無藝女真厭苦之太祖乃建城堡修戎器以備且召所屬曰遼人知我將舉兵集諸路軍備我我必先發制之因徴諸部兵得二千五百人以遼之罪申告天地傳挺而誓至遼界與遼兵戰大勝而還遼主遣都統蕭嗣先等往擊太祖率兵禦之㑹夜方就枕若有扶其首者三寤而起曰神明警我也即鳴鼔舉燧而行黎明至混同江遼人方壞凌道太祖選壯士十人擊走之因率衆繼進登岸與遼兵遇㑹大風起塵埃蔽天太祖乗風奮擊遼兵潰將士多死其獲免者十有七人遼人嘗言女真兵滿萬則不可敵至是始滿萬云建國稱帝遂號金敗遼達嚕達嚕即達嚕克急讀之則為達嚕

 

7. 흠정속통지(欽定續通志) 82: 씨족략(氏族畧) 2 : ()나라 왕족의 성씨(國姓) : 완안씨(完顔氏) ()의 선조는 원위(元魏, 북위) 때에 물길씨(勿吉氏)가 되었다. 7()가 있으니 수()나라에 이르러 말갈씨(靺鞨氏)라 일컬었다. () 초기에 흑수(黑水)와 속말(粟末) 두 부()가 있었는데 나머지 5()는 알려진 바가 없다. 속말 말갈(粟末靺鞨)은 뒤에 발해(渤海)에서 살며 왕()이라 일컬었으니 성()은 대씨(大氏)이다. 흑수 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肅慎) 땅에 살면서 동쪽으로 바다를 쳐다보고 있다. 오대(五代) 때에는 거란(契丹)이 발해 땅을 취하였었는데 흑수부(黒水部)가 마침내 이들에게 붙어 속하였다. 남쪽에 있던 사람들은 거란(契丹)에 적을 두었고 북쪽에 있던 사람들은 거란에 적을 두지 않고 따로 한 부()를 만들었다.

말갈씨(靺鞨氏)에 함보(函普)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髙麗)에서 와서 완안부(完顔部)에 살면서 부()의 사람이 되었다. 이 이는 완안부에 약속과 맹세를 만들어 세워 원한을 풀어냈다. 완안부에 어진 여인이 있어 나이가 60이 되도록 아직 결혼하지 않아서 함보(函普)가 장가들었고 두 아들을 낳았다. 인하여 완안부(完顔部) 사람이 되었으니 바로 금()나라의 시조 경원(景元) 황제이시다. ()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완안(完顔)12()였는데 뒤에 모두 이를 씨()로 삼았고 또한 종실표(宗室表)에 종실(宗室)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있었고 완안(完顔)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완안(完顔)이라 일컫는 사람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에 동성(同姓) 완안(完顔)으로 이들은 대개 먼 친척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異姓) 완안(完顔)으로 대체로 부()의 사람이다.

欽定續通志卷八十二  氏族畧〉  金 國姓  完顔氏金之先在元魏時為勿吉氏有七部至隋稱靺鞨氏唐初有黑水粟末二部其五部無聞粟末靺鞨後居渤海稱王姓大氏黑水靺鞨居古肅慎地東顔海五代時契丹取渤海地黒水部遂附屬焉在南者係籍契丹在北者不籍契丹自為一部靺鞨氏有名函普者自髙麗往居完顔部為部人立約誓解怨部有賢女年六十末嫁函普娶之生二子因為完顔部人即金之始祖景元皇帝也金初起時完顔十二部後皆以為氏又宗室表有稱宗室者有稱完顔者其稱完顔有二有同姓完顔葢疎族有異姓完顔葢部人

 

8. 동삼성여지도설(東三省輿地圖說) 숙신국고(肅慎國攷) : 산해경(山海經)과 진서(晉書)를 근거로 하자면 숙신국(肅慎國)은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다. 가탐(賈耽)발해왕성(渤海王城)이 호이한해(呼爾罕海)를 마주하고 있으니 그 서남쪽 30리에 옛 숙신성(肅慎城)이 있다.” 하였다. 지금에 동경성(東京城) 서남쪽 30()에 옛성(古城)이 있는데 그 기틀은 응당 옛 숙신국(肅慎國)이다. 당우(唐虞) 때에는 식신(息慎)’이라 하였고 주() 때에는 숙신(肅慎)’이라 하였다. 이 땅은 양한(兩漢) 때에는 읍루(挹婁)에 붙여졌고 남북조 때에는 물길(勿吉)에 속하였으며 수당(隋唐) 때에는 말갈(靺鞨)에 들어갔다. 뒤에 발해(渤海)에 속하였고 요()나라 때는 여진(女真)에 딸렸다. 땅은 사방 수천 리()이다.

東三省輿地圖說 肅慎國攷  據山海經及晉書肅慎國在不咸山北賈耽謂渤海王城臨呼爾罕海其西南三十里有古肅慎城今東京城西南三十里有古城基當即肅慎國也唐虞曰息慎周曰肅慎兩漢時屬挹婁南北朝屬勿吉隋唐屬靺鞨後歸渤海遼屬女真地方數千里

 

9. 어정패문운부(御定佩文韻府) 71권의 2 : 숙신(肅愼) .... 세설(世説)에서 ()이 아름답고 밝으면 숙신이 그 호시(楛矢)를 공물로 들이고 만약 시대가 그렇지 못하면 비록 벽에 기대어 있는 물건이라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상림부(上林賦)지금 제()가 중원의 동쪽 울타리로 벌려 있는데 밖으로는 사적으로 숙신과 교류하고 있다.” 하였다. 조식(曹植)은 글에서 숙신이 공물을 들였으니 ... 양사도(楊師道)의 망해시(望海詩)고개를 돌려 멀리 노룡새(盧龍塞, 연산산맥 동쪽, 하북성 승덕시와 당산시가 만나는 곳)를 바라보고 슬쩍 기울여 숙신향(肅愼鄕)을 우러러 본다.” 하였다. ...

御定佩文韻府 (四庫全書本)/0712 肅愼.... 世説徳之休明丨丨貢其楛矢如其不爾雖壁間物亦不可得也上林賦今齊列為東藩而外私丨丨.... 楊師道望海詩廻瞰盧龍塞斜瞻丨丨鄉...

 

10. 정양(正楊) 4 : 말갈(靺鞨) 말갈(靺鞨)은 나라 이름이니 옛숙신(古肅慎) 땅이다. 그 땅에서 나는 보석(寶石)은 크기가 큰 밤()만 하다. 중원(中國)에서는 이를 말갈(靺鞨)이라 하였다. 문여가(文與可, 文同)는 주영가(朱櫻歌)에서 금빛 옷에 진귀한 새가 깊은 나무 그늘에서 노닌다. 임금의 정원(禁籞)에 붉은 기둥은 아롱져 비단을 늘어뜨린 듯하다. ()이 이궁(離宫)에 납시어 천신(薦新)을 재촉하고 등바구니(藤籃)며 보롱(寶籠)이 환관(貂璫) 손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엉긴 노을이 구슬이 되니 진주는 외려 부드럽고 기름진 이슬이 진액이 되니 밀랍은 애초에 벨 만하다. 군왕(君王)은 한낮에 앉아 의란(猗蘭) 곡을 치니 비취(翡翠)는 홍말갈(紅靺鞨)과 한 쟁반에서 구른다.” 하였다. 갈로경(葛魯卿)의 서강월(西江月) 가사에서 말갈(靺鞨)이 붉은 빛을 띤 버드나무에 굽어 있고 유리(琉璃)가 녹평교(緑平橋)에 그득하다. ...”하였다. 이 두 공()의 시귀는 모두 말갈(靺鞨)이란 것을 이용하였으나 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그래서 그 내용을 자세히 통하게 하였다.

() 대종(代宗) 때 초주(楚州)의 니진여(尼真如) 이씨(李氏)라는 사람이 천보(天寶)을 얻고서 말하기를 홍말갈(紅靺鞨)은 크기가 큰 밤알만 한데 붉게 빛나는 것이 마치 초주(楚州) 자사(刺史) 정로기(鄭輅記)에서 읽은 붉은 기둥(朱櫻)과 같다.” 하였다.

당서(唐書) 외국전(外國傳)말갈(靺鞨)은 물길국(勿吉國) 아래에 붙어 있다.”고 하였지만, 이 역시 이 땅에서 보물이 나온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영애승람(瀛涯勝覽)에서 말갈국(靺鞨國)에 서과(西𤓰) 한 매()에 두 사람을 써서 이를 든다. 지금에 홍자서과(紅子西𤓰)가 가히 말갈의 그것이라고 말할 만하지 않은가?

正楊 (四庫全書本)/4  靺鞨 靺鞨國名古肅慎地也其地産寶石大如巨栗中國謂之靺鞨文與可朱櫻歌云金衣珍禽弄深樾禁籞朱櫻班若纈上幸離宫促薦新藤籃寶籠貂璫發凝霞作丸珠尚軟油露成津蜜初割君王午坐鼔猗蘭翡翠一盤紅靺鞨葛魯卿西江月詞云靺鞨斜紅帶栁琉璃漲緑平橋人間花月見新妖不數江南蘇小恨寄飛花𫂙𫂙情隨緑水迢迢鯉魚風送木蘭橈迴棹荒鷄報曉二公詩詞皆用靺鞨事人罕知者故詳疏之  唐代宗時楚州尼真如李氏者得天寶曰紅靺鞨大如巨栗赤爛若朱櫻見楚州刺史鄭輅記  唐書外國傳靺鞨附勿吉國下亦不云出寶也瀛涯勝覽云靺鞨國西𤓰一枚用二人舉之今紅子西𤓰可云靺鞨乎

 

11. 통아(通雅) 48: 옛 숙신인 말갈(靺鞨)에 목란(木難), 아골(鴉鶻, 파란빛), 묘정(貓精, 묘정석(猫睛石))들은 모두 보석이다. 산해경(山海經)귀산(騩山)은 서해에 둑()이 되는데 그 안에는 알록달록한 빛깔의 돌이 많다.” 하였다. 목천자전(穆天子傳)?(重𢀄氏, 가운데 글자는 미상)의 흑수(黑水) 이곳에 돌을 캐는 산(采石山)이 있으니 이 돌들이 바로 다섯 빛깔의 보석(寳石)이다.” 하였다. 승암(升菴)은 의문을 제기하기를 이 산이 바로 지금 말하는 보산(寳山), 보정(寳井)이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지금 보석(寳石)이 서번(西番) 회흘(囘鶻)의 여러 갱도와 광정(礦井) 안에서 나온다. 운남(雲南)과 요동(遼東) 역시 이것을 가지고 있다. 붉은 것은 자자(刺子)라 이름하고 초록(, 푸른빛을 띤 초록색)빛인 것은 전자(靛子)라 이름하며 취(, 푸른빛이거나 초록빛이거나 이 두 가지 빛을 같이 띤)빛인 것은 마가주(馬價珠)라고 하고 누런빛인 것은 목란(木難)이라고 이름하고 자주빛()인 것은 납자(臘子)라고 이름한다. 또한 아골석(鴉鶻石), 묘정석(猫精石), 유자(榴子, 석류 씨), 홍편두(紅扁豆), 금성석(金星石)이 있는데 금성석 중에 푸른() 것을 당나라 사람은 슬슬(瑟瑟)’이라 하였고 붉은 것()을 송나라 사람들은 말갈(靺鞨)’이라 하였다. 원지(元志)에서 묘정록(猫精琭)’을 찾아내고서는 조모록(祖母綠)’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정대창(程大昌)목란(木難)은 시오(翅烏) 들머리 안에서 나오는데 물거품()이 만든 것으로 푸른빛()의 진주(구슬 )이다.” 하였다. 살펴보면 목란(木難)은 바로 누른 빛으로 최표(崔豹)막란(莫難)’이라고 적었다. 승엄(升菴)은 주저없이 목란(木難)을 조모록(祖母綠)’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볼 때 목란(木難)의 빛깔이 누런 것이 바로 지금의 뇨자(硇子)이다. 역시 묘정(猫精)과 비슷하나, 먼저 요동치는 줄 하나가 있는 것이다.

...묵장만록(墨莊漫錄)에 실려있기를 선화(宣和, 11191125)에 녹묘정(綠猫精)을 공물로 들였는데 능히 불()을 그치게 할 수가 있으니 타는 숯(然炭)이 한창 불기운이 셀 때 이 녹묘정을 던지면 바로 불이 꺼진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능히 벌레의 독을 푸는 약이 될 수가 있어 이 돌이 귀하게 여겨진다고 하였다.’라고 한다. 승엄(升菴)말갈(靺鞨)은 곧 숙신(肅慎) 땅에서 나는 보석(寳石)이다.” 말하니 정양(正楊)에서 이를 나무랐다.

내가 생각하기에 말갈(靺鞨)은 붉은 가죽색(紅韋色)인데 구르고 구르다 말갈(靺鞨)로 되어서 그 소리로써 그 나라에 이름이 되었다라고 본다. 보석 중에 홍말갈(紅靺鞨)은 그 색깔을 말한 것일 뿐이니 북적(北敵) 역시나 붉은빛() 장식을 좋아한다. 당 태종 중기(太中) 12가지 옥을 공물로 바쳤는데 홍말갈(紅靺鞨)이 있었고 합밀(哈密, 신강 지방 서주회흘(西州回鹘))이 속래만석(速來蠻石), 파찰석(把咱石), 마노문석(瑪瑙文石)을 공물로 들였다.

通雅 (四庫全書本)/48 靺鞨木難鴉鶻貓精皆寳石也 山海經驄/騩山是錞于西海其中多采石穆天子傳重缶+/𢀄氏之黑水爰有采石之山即寳石五采也升菴疑即今所謂寳山寳井智按今寳石出西番囘鶻諸坑井内雲南遼東亦有之紅者名刺子碧者名靛子翠者名馬價珠黄者名木難紫者名臘子又有鴉鶻石猫精石榴子紅扁豆金星石碧者唐人謂之瑟瑟紅者宋人謂之靺鞨元志求猫精琭謂祖母綠也程大昌謂木難出翅烏口中沫所成碧色珠也按木難乃黄色崔豹作莫難升菴直以木難為祖母綠智以木難色黄是今之硇子亦似猫精有一線先搖動者...墨莊漫錄載宣和貢綠猫精能息火然炭方熾投之即滅又云能解蟲毒之藥此為貴云升菴謂靺鞨即肅慎地産寳石而正楊譏之智謂靺鞨乃紅韋色轉為靺鞨以其聲名其國寳石之紅靺鞨言其色耳北敵亦好裝紅唐太中時貢十二玉有紅靺鞨哈密貢速來蠻石把咱石瑪瑙文石也

 

12. 흠정성경통지(欽定盛京通志) 106권 보석(寳石) 구통지(舊通志) : 말갈(靺鞨) 보석은 색이 새빨갛고(赤紅) 크기는 밤알만하다. 지금 흑룡강(黑龍江), 눈강(嫩江) 등 여러 강 기슭에서 다섯 빛깔의 돌이 나온다. 아주 빛이 나는 것은 마노(瑪瑙) 중에 붉고 둥근 것과 같고 모양이 복숭아를 머금은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가져다 염주(念珠)로 꾸민다. 또한 흑룡강(黒龍江) 석이합석(錫爾哈石)은 가히 불()을 쳐죽일 수 있다. 이 돌 중에 아름다운 것은 옥처럼 맑고 밝으며 햇발이 다가올 때(陜日?) 더러는 빛깔이 모양(形彩)을 이루기도 한다.

欽定盛京通志 (四庫全書本)/106 寳石舊通志靺鞨寳石色赤紅大如栗今黑龍江嫩江諸江岸出五色石通明如瑪瑙紅圓者象含桃或取以飾念珠又黒龍江錫爾哈石可敲火佳者晶瑩如玉陜日或成形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