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진국(𠐍侲國)은 서역의 한 나라인 속독(粟牘)이고 속독(粟牘)은 숙특국(肅特國)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숙특국은 바로 엄채국(奄蔡國)이자 아란(료)국(阿蘭(聊)國)이다. 불현듯이 삼국유사의 ‘아란불’이 떠오른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어정강희자전(御定康熙字典) 2권 : 속(𠐍)은 정자통(正字通)에 소(蘇)와 곡(谷)의 반절이니 음이 속(速)이다. 속진(𠐍侲)은 나라 이름이니 바로 숙신(肅慎)이다.
御定康熙字典卷二 𠐍正字通蘇谷切音速𠐍侲國名即肅慎也
후한서(後漢書) : 동한(東漢) 두독(杜篤)의 논도부(論都賦)에 ‘노속진(虜𠐍侲 : 속진사람을 사로잡았다)’ 〈사투리이니 진(侲)은 말을 기르는 사람이다. 자서(字書)에 진(侲)은 음이 진(眞)인데 자서(字書)에 속(𠐍)이라는 글자가 없다. 여러 전문가들은 모두 “속진(𠐍侲)은 속독(粟牘)이니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이다.” 하였다. 전(傳)에서 읽는 것이 이와 같은데 그 나온 곳을 알지 못한다. 지금 숙특국(肅特國)이 있으니 아마도 이것이리라.〉
後漢書 (四庫全書本)/卷110上 虜𠐍侲〈方言侲養馬人也字書侲音眞字書無𠐍字諸家並曰𠐍侲為粟牘西域國名也傳讀如此不知所出今有肅特國恐是也〉
어정병자류편(御定駢字類編) 176권 : 속독(粟牘) 〈후한서(後漢書) 두독전(杜篤傳) : 속진(𠐍侲) 사람을 사로잡고 버새(騾驢)를 몰고 간다. 주(注) : 자서(字書)에 진(侲)은 소리가 진(眞)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자서(字書)에 ‘속(𠐍)’ 자는 나오는 글자가 없다. 여러 전문가는 모두 “속진(𠐍侲)은 속독(粟牘)이다.” 하니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이다. 지금 숙특국(肅特國)이 있으니 아마도 이것이다.〉
御定駢字類編 (四庫全書本)/卷176 粟牘〈後漢書杜篤傳虜𠐍侲驅騾驢注字書侲音眞字書無𠐍字諸家並曰𠐍侲爲丨丨西域國名也今有肅特國恐是也〉
별아(别雅) 5권 : 속진(𠐍侲)은 숙신(肅慎)이다. :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읍루(挹婁)는 옛 숙신(古肅慎)의 나라이다.” 하였고 공융전(孔融傳)에 “숙신(肅慎)은 고시(楛矢)를 공물로 들였다.” 하고 두독(杜篤)의 논도부(論都賦)에 “곤미(昆彌)를 잡고 속진(𠐍侲)을 사로잡았다.” 하니 주(註)에서 “자수(字書)에 ‘진(侲)은 소리가 진(真)이다.’” 하였으나 자서(字書)에 속(𠐍)자가 없다. 여러 학자는 모두들 “속진(𠐍侲)을 속독(粟牘)이다.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이다.” 하였다. 전(傳)에서는 이처럼 읽지만, 그 출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숙특국(肅特國)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리라. 두 한서(漢書)를 살펴보면 숙특국(肅特國)은 나와 있는 것이 없고 그저 숙신국(肅慎國)이 있을 따름이니 아마도 특(特)이 바로 신(慎)의 와전된 글자이고 속진(𠐍侲)은 곧 숙신(肅慎)이다. 속(𠐍)자는 비록 자서(字書)에 보이지 않지만 ‘數’는 ‘촉(促)’이라는 소리가 있고 ‘숙(肅)’과 더불어 서로 가깝다. 진(侲)과 신(慎) 역시 똑같은 음으로 서로 돌려가며 쓴다.
别雅 (四庫全書本)/卷5 𠐍侲肅慎也 後漢書東夷傳挹婁古肅慎之國孔融傳肅慎貢楛矢杜篤論都賦獲昆彌虜𠐍侲註云字書侲音真字書無𠐍字諸家並曰𠐍侲為粟牘西域國名也傳讀如此不知所出今有肅特國恐是也按兩漢書無肅特國惟有肅慎國疑特乃慎之訛𠐍侲即肅慎也𠐍字雖不見字書然數有促音與肅相近侲慎亦一音相轉也
주서(周書) 50권 고증(考證) : 속특국(粟特國)은 총령(葱嶺)의 서쪽에 있으니 대개 옛날의 엄채(庵蔡)이니 일명 온나사(温那沙)이고 대택(大澤)에서 다스렸으니 강거(康居) 서북(西北)에 있다. 북주(北周) 보정(保定) 4년(564년)에 그 왕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周書卷五十考證 : 粟特國在葱嶺之西盖古之庵蔡一名温那沙治於大
澤在康居西北保定四年其王遣使獻方物
어정강희자전(御定康熙字典) 23권 : 또 아란료(阿蘭聊)는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이다. 후한(後漢) 서역전(西域傳)에 엄채국(奄蔡國)을 아란료국(阿蘭聊國)으로 이름을 고쳤다.
御定康熙字典 (四庫全書本)/卷23 又阿蘭聊西域國名後漢西域傳奄蔡國改名阿蘭聊國
송서(宋書) 5권 : 남북조 송 문제(宋文帝) 18년(441년) 12월 진영(晉寧) 태수(太守) 찬송자(𠆡松子)가 반란을 일으키자 영주(寧州) 자사(刺史) 서순(徐循)이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이 해에 숙특국(肅特國)과 고려국(高麗國)과 소미려국(蘇靡黎國)과 임읍국(林邑國) 싹 다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 남사(南史) : 이 해에 하남(河南)과 숙특(肅特)과 고려(高麗)와 소미려(蘇摩黎)와 임읍(林邑) 등 나라가 다 사신을 보내어 뵙고 공물을 들였다.]
宋書 (四庫全書本)/卷005 文帝 十八年 十二月晉寧太守𠆡松子反叛寧州刺史徐循討平之是嵗肅特國高麗國蘇靡黎國林邑國竝遣使獻方物 [南史 : 是歲河南肅特高麗蘇摩黎林邑等國並遣使來朝貢]
자치통감(資治通鑑) 20권 : 한기(漢紀) 십이(十二) 세종효무황제(世宗孝武皇帝) 중(中) 하(下)
한무제(漢武帝) 원수 원년(元狩元年, 기원전 122년 – 기원전117년) 한나라 군대가 막북(幕北)에서 흉노를 쳐 쫓았다. 염택(鹽澤) 동쪽부터 흉노(匈奴)가 땅을 비워 없었으니 서역(西域)의 길이 통할 수가 있었다. 이에 장건(張騫)이 꾀를 세워 말하기를 “오손왕(烏孫王) 곤막(昆莫)은 본디 흉노(匈奴)의 신하였습니다. 뒤에 병력이 조금씩 강성해지자 흉노 조정을 찾아 배알하며 섬기려 하지 않자 흉노(匈奴)가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니 이들을 (신통하게 여기어) 멀리하였습니다. 지금 선우(單于)가 새롭게 한(漢)나라에게 곤란을 겪고 있어서 옛 혼야(故渾邪)가 땅이 무인지경이고, 만이(蠻夷)의 속성상 옛 땅을 그리워합니다. 게다가 한나라 재물을 탐하니 이제 참으로 이 시점에서 예물을 두터이 장만하여 오손(烏孫)에게 하사하고 더 동쪽으로 불러 들여서 옛 혼야(故渾邪) 땅에 살게 하고 〈장건전(張騫傳) : 곤막(昆莫)의 아버지 난두미(難兠靡)는 본래 대월씨와 같이 돈황(敦煌)과 기련(祁連) 땅 사이에서 있었던 작은 나라였다. 그런데 대월씨(大月氏)가 난두미(難兠靡)를 공격해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았지만, 대월씨 또한 흉노(匈奴)에게 깨지고 나서 서쪽으로 색왕(塞王)을 공격해 그 나라를 빼앗았다. 곤막(昆莫)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서쪽으로 대월씨국(大月氏國)을 공격해 깨뜨리고 내쳐 그곳에 머물며 살다 오손국(烏孫國)을 만들었다. 건(騫)이 이들을 꼬셔서 다시 옛 땅으로 돌아가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 우리 한나라와 더불어 형제 관계를 맺는다면 그 형세 상 마땅히 우리 말을 들을 것이고 듣는다면 이는 흉노의 오른쪽 어깨를 끊어내는 것입니다. 오손(烏孫)과 연합하고 나서 그 서쪽 대하(大夏, 흉노 혁연발발(赫連勃勃)이 세운 나라. 407년 – 431년까지 존속)의 무리부터 모두 불러와 외신(外臣, 변방 즉 울타리 격인 신하)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천자(天子)가 그 꾀를 옳게 여기고 건(騫)을 중랑장(中郎将)에 제수하고 3백 사람을 이끌되 말은 각각 두 필(匹)이었고 소와 양은 만(萬)으로써 헤아려졌으며 금과 비단 예물 꾸러미가 수천억만의 값어치였다. 사람 중에 지절부사(持節副使)가 많았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건(騫)의 도우미가 되기 위해 각자 부절(節)을 지니도록 명한 것이다.” 하였다.〉
가는 길은 사신들을 다른 옆 나라들에 보내기에 나름 편리하였다. 〈쭉 이어진 길은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낼 만하게 편리함이 있었던 바, 곧 사신을 보낸 것이다.〉 건(騫)이 오손(烏孫)에 이르렀을 때 곤막(昆莫)이 건(騫)을 보고 차린 예절이 매우 건방졌다.
건(騫)이 유시하여 알리기를 〈사고(師古)는 “천자(天子)의 뜻을 가리켜 밝게 알리는 것이다.” 하였다.〉 “오손(烏孫)은 능히 동쪽으로 옛 땅에서 살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한(漢)은 공주(公主)를 보내어 부인(夫人)으로 삼게 하여 형제(兄弟)의 관계를 맺으면 함께 흉노(匈奴)를 막아서 흉노는 우리를 깨뜨리지 못할 것이다. 오손(烏孫)은 스스로 한(漢)나라에서 멀리 있는 까닭에 그 크고 작음을 알지 못하여 늘 흉노에 복속한 지 오래되었다. 게다가 또 흉노와 가까이 있어서 그 대신(大臣)들이 모두 흉노를 두려워하여 살고 있던 곳을 옮기려 하지 않았다. 건(騫)이 오래 머물러 있었지만, 그들을 설득할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부사(副使)들을 나누어 보내어 대완(大宛)과 강거(康居)와 대월씨(大月氏)와 대하(大夏)와 안식(安息)과 신독(身毒)과 우전(于闐) 및 여러 주변 나라들에 사신을 보내었다.
오손(烏孫)이 통역사를 파견하고 길을 인도하며 견(騫)을 한나라로 돌려 보냈다. 〈씨(氏)는 음이 지(支)이다. 신독(身毒)은 음(音)이 연독(捐篤)이다. 사고(師古)는 “도(道)는 이끌 도(導)로 읽는다.” 하였다.〉 수십 사람과 말 수십 필을 견(騫)에게 딸려보내고 응답하여 사례하였다. 報謝이로 인하여 한나라의 큰 규모를 엿보았다. 이 해에 건(騫)이 돌아와 대행(大行, 외교관)에 제수되었다. 뒤에, 한 해 남짓, 건(騫)이 파견한 사신 중에 대하의 무리와 통하였던 사람이 모두 자못 그 겨레 사람들과 함께 왔다. 이에 서역(西域)이 비로소 한나라와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다.
서역(西域)은 모두 36국(國)이니 남북에 큰 산이 있고 가운데에 하(河)가 있다. 〈서역이 비로소 한(漢)나라와 교류를 시작하였는데 모두 36국(國)이 있었고 그 뒤에 나누어 50여 국(國)을 두었다. 야강(婼𦍑), 선선(鄯善), 차말(且末), 소완(小宛), 정절(精絶), 융로(戎盧), 한미(扞彌), 거륵(渠勒), 피산(皮山), 오타(烏秅), 서야(西夜), 포리(蒲犂), 자함(子合), 의내(依耐), 무뢰(無雷), 난두(難兠), 계빈(罽賓), 오익산리(烏弋山離), 리건(犂鞬), 조지(條支), 안식(安息), 대월씨/지(大月氏), 대하(大夏), 강거(康居), 엄채(奄蔡), 대완(大宛), 도괴(桃槐), 휴순(休循), 연독(捐篤), 사거(莎車), 소륵(疏勒), 위두(尉頭), 오손(烏孫), 고묵(姑墨), 온숙(温宿), 구자(龜兹), 오루(烏壘) 渠리(渠犂), 위리(尉犂), 위수(危須), 언기(焉耆), 오탐자리(烏貪訾離), 비육(卑陸), 비육후국(卑陸後國), 욱립사(郁立師), 단환(單桓), 포류(蒲類), 포류후국(蒲類後國), 서차미(西且彌), 동차미( 東且彌), 겁국(刼國), 산국(山國), 호호(狐胡), 거사전후왕(車師前後王, 거사전국과 거사후국)이 이것이다.
남북에 큰 산이 있는바, 남산(南山, 곤륜산)은 우전(于窴)의 남쪽에 있어 동쪽으로 가면 금성(金城, 감숙 영정현(永靖縣))이 나오는데 한남산(漢南山)과 더불어 이 산을 접하고 있고 북산(北山, 천산(天山))은 거사(車師)의 북쪽에 있으니 바로 당지(唐志)에서 말한바 ‘서주(西州)의 교하현(交河縣) 북쪽 유곡(栁谷) 금사령(金沙嶺) 등 산’이 이것이다.
중앙에 하(河)가 있는바, 하(河)는 두 수원이 있으니 하나는 총령(葱嶺, 파미르 고원)에서 나오고 하나는 우전(于窴, 신강 화전(和田))에서 나온다. 남산(南山)의 하(河)는 북쪽으로 흐르다 총령(葱嶺)의 하(河)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포창해(蒲昌海, 신장 약강현의 백룡퇴아단(白龙堆雅丹))로 유입되고 우전(于窴)에서 서쪽 물줄기들은 모두 서쪽으로 흐르다 휴순(休循, 파미르 고원 서쪽, 장안과 거리가 10210리), 계빈(罽賓, 파키스탄과 아프칸 국경에 있는 카이베르(Khyber)산 들머리에 살았던 겨레), 대월씨/지(大月氏), 안식(安息, 이란고원에 있었던 옛 나라) 나라들을 거쳐 서해(西海) 포창(蒲昌)의 물로 들어가 땅속에 숨어 흐르다 남쪽으로 가서 적석(積石)으로 나와 중원(中國)의 하(河)가 된다. 서해(西海)의 물은 동남으로 흐르다 교주(交州, 광동 광서 월남의 북중부)에 창해(漲海)와 만난다.〉
동서(東西) 육천여 리(里), 남북(南北) 천여 리(里)로 동쪽은 한(漢)의 옥문(玉門), 양관(陽闗)과 닿아있다. 〈반고의 한서지리지에 “돈황군(敦煌郡) 용륵현(龍勒縣)에 옥문관(玉門闗)과 양관(陽關)이 있고 주천군(酒泉郡)에 옥문현(玉門縣)이 있다.” 하였다. 감인(闞駰)은 “한(漢)나라가 옥문관둔(玉門闗屯)을 파하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이곳에 두었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사주(沙州) 용륵산(龍勒山)은 현의 남쪽 165리에 있고 옥문관(玉門闗)은 현(縣) 서남쪽 118리에 있다.” 하였다.〉
서쪽에서는 총령(葱嶺)을 한계로 하였다. 〈서하(西河) 구사(舊事)에 총령(葱嶺)은 그 산이 높고 큰데도 그 위에 파(葱)가 다 자라고 있어서 이름으로 삼았다.〉
하(河)에 두 수원이 있으니 하나는 총령(葱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우전(于窴)에서 나오는데 하나가 되어 흐르다 동쪽으로 가서 염택(鹽澤, 라포박(羅布泊)신장 위구르자치구 소재)으로 들어간다. 염택(鹽澤)은 옥문(玉門), 양관(陽闗)과 거리가 3백여 리이고 옥문(玉門), 양관(陽闗)에서부터 서역(西域)으로 나가면 두 길이 있다. 선선(鄯善) 곁 남산 북쪽으로부터 하(河)의 서쪽을 따라 가면 사거(莎車)에 이르니 남도(南道)가 된다. 〈선선(鄯善) 역시 누란국(樓蘭國)이라 하니 간니성(杆泥城, 신강 약강(若羌) 부근)을 다스렸다. 양관(陽闗)과 거리가 16백 리(里)이다. 사거(莎車)는 사거성(莎車城)을 다스렸다. 장안(長安)과 거리가 9천9백50리이다.〉
남도(南道)는 서쪽으로 총령(葱嶺)을 넘으면 대원씨/지(大月氏)와 안식(安息)이 나오는데 自거사전왕(車師前王)의 뜨락부터 북산(北山)을 따라 하(河) 서쪽을 따라가면 소륵(䟽勒)에 이르니 북도(北道)이다. 〈거사전왕((車師前王)은 교하성(交河城, 신장 위구르 자치구 토로번현성 부근)장안(長安)과 거리가 8천 1백5십 리(里)이다. 당나라 때 서주(西州) 교하현(交河縣)이 이것이다. 소륵(疏勒)은 소륵성(䟽勒城)을 다스렸다. 장안(長安)과 거리가 9천3백5십 리(里)이다. 서쪽으로는 대월씨/지(大月氏), 대완(大宛), 강거(康居)의 길을 마주하고 있다.〉
북도(北道)는 서쪽으로 총령(葱嶺)을 넘으면 대완(大宛), 강거(康居), 엄채(奄蔡)가 나온다. 〈두우(杜佑)가 “엄채는 뒤에 숙특국(肅特國)으로 된다.” 하였다.〉 따라서 모두 흉노에 붙어서 부림을 당하였다. 흉노(匈奴) 서쪽 가에는 일축왕(日逐王)이 동복도위(僮僕都尉)를 두었다. 〈흉노(匈奴)는 대개 동복(僮僕, 일종의 심부름꾼)으로써 서역의 여러 나라를 살피게 하였기 때문에 관직 이름으로 썼다.〉
그를 보내 서역(西域)이 언기(焉耆), 위수(危須), 위려(尉黎) 사이에 늘 머물게 시켰다. 〈언기(焉耆)는 원거성(員渠城)을 다스렸으니 장안(長安)과 거리가 7천3백 리이다. 위수(危須)는 우수성(危須城)을 다스렸으니 언기(焉耆) 동쪽 1백 리에 있다. 장안(長安)과 거리가 7천2백9십 리이다. 위리(尉犂)는 위리(尉犂城)을 다스렸으니 장안(長安)과 거리가 6천7백5십 리이다. 남쪽으로 선선(鄯善), 차말(且末) 두 나라와 이웃하고 있다.〉
여러 나라에 대한 부세(賦税)를 걷어서 부유와 넉넉함을 가져왔다.
오손왕(烏孫王)이 이미 동쪽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으니 한(漢)나라가 마침내 혼야왕(渾邪王)의 옛 땅에다 주천군(酒泉郡)을 설치하고 〈응소(應劭)가 “그 땅의 물이 마치 술과 같아서 주천(酒泉)이라 하였다.” 하였다. 안사고(顏師古)가 “성(城) 아래에 금천(金泉)이 있는데 천(泉)의 맛이 술맛과 같다. 당(唐) 때에는 숙주(肅州)가 된다.” 하였다. 송백이 “동남(東南)으로 장안(長安)에 2천9백 리에 이른다.〉
조금씩 백성들을 징발하여 옮겨 살게 하여서 이 지역에 채워 넣었다. 뒤에 다시 무위군(武威郡)으로 나누어 두어서 〈본래 흉노(匈奴)의 휴도왕(休屠王)이 살던 곳으로 땅이 크다. 처음 4년 무위군(武威郡)을 나누어 두었는데 당(唐)의 양주(凉州)가 바로 그 땅이다. 송백(宋白)이 “동남(東南)으로 장안(長安)까지 2천 8백 리에 이른다.” 하였다.〉 흉노(匈奴)가 강(𦍑)과 통하였던 길을 끊었다. 천자(天子)가 완(宛, 大宛)의 한혈마(汗血馬)를 얻어 이를 애지중지하였으니 이름이 천마(天馬)였다. 이 말을 구하느라 사신들이 길에 서로 이어질 정도였다. 여러 사신이 외국에 갈 때 이루던 한 무리가 크게는 수백 사람이었고 작게는 백여 사람이었다. 이 사람들이 싸 들고 간 재물은 박망후(博望侯, 곧 장건) 때와 크게 맞먹는다. 〈재(齎)는 재물 자(資)이다. 조(操)는 지닐 지(持)이다. 방(放)은 기댈 의(依)이다. 言사신을 보낼 때 지니는 부절과 예물이 대체로 박망후(博望侯)를 보냈을 때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방(放)은 모방할 방(倣)으로 읽는다.〉
그 뒤에 방문이 더욱 익숙해져서 갖춘 예물이 전보다 별로였고 적어졌다. 〈사고(師古는 “그 잦은 교류에 따른 익숙함 때문에 사람들을 많이 파견하지 않았다.” 하였다.〉 한(漢)나라는 평균적으로 한 해에 보낸 사신이 많게는 십여 무리였고 적게는 대여섯 무리였다. 멀리 가는 경우는 8, 9년이요 가까운 곳에 가는 경우는 수 년이 되어서 돌아왔다.
資治通鑑卷二十 宋 司馬光 撰 胡三省 音註
漢紀十二〈起昭陽大淵獻盡重光協洽凡九年〉 世宗孝武皇帝中之下
渾邪王既降漢〈見上卷元狩元年〉漢兵擊逐匈奴於幕北〈見元狩元年〉自鹽澤以東空無匈奴西域道可通于是張騫建言烏孫王昆莫本為匈奴臣後兵稍彊不肻復朝事匈奴匈奴攻不勝而逺之〈朝直遥翻逺于願翻〉今單于新困於漢而故渾邪地空無人蠻夷俗戀故地又貪漢財物今誠以此時厚幣賂烏孫招以益東居故渾邪之地〈張騫傳昆莫父難兠靡本與大月氏同在敦煌祁連間小國也大月氏攻殺難兠靡奪其地而大月氏又為匈奴所破西擊塞王而奪其國昆莫報父怨西攻破大月氏國因留居為烏孫國騫欲誘之復歸故地〉與漢結昆弟其埶宜聽聽則是斷匈奴右臂也〈斷丁管翻〉既連烏孫自其西大夏之屬皆可招來而為外臣天子以為然拜騫為中郎将将三百人馬各二匹牛羊以萬數齎金幣帛直數千巨萬多持節副使〈師古曰為騫之副而各令持節也〉道可便遣之它旁國〈㳂道有便可通使他國者即遣之〉騫既至烏孫昆莫見騫禮節甚倨騫諭指曰〈師古曰以天子意指曉吿之〉烏孫能東居故地則漢遣公主為夫人結為兄弟共距匈奴匈奴不足破也烏孫自以逺漢未知其大小素服屬匈奴日久且又近之〈近其靳翻〉其大臣皆畏匈奴不欲移徙騫留久之不能得其要領〈要讀曰腰〉因分遣副使使大宛康居大月氏大夏安息身毒于闐及諸旁國烏孫發譯道送騫還〈宛於元翻氏音支身毒音捐篤闐從賢翻師古曰道讀曰導〉使數十人馬數十匹隨騫報謝因令窺漢大小是嵗騫還到拜為大行後嵗餘騫所遣使通大夏之屬者皆頗與其人俱來〈晉灼曰其國人〉於是西域始通於漢矣西域凡三十六國南北有大山中央有河〈西域始通於漢凡三十六國其後分置五十餘國婼𦍑鄯善且末小宛精絶戎盧扞彌渠勒皮山烏秅西夜蒲犂子合依耐無雷難兠罽賓烏弋山離犂鞬條支安息大月氏大夏康居奄蔡大宛桃槐休循捐篤莎車疏勒尉頭烏孫姑墨温宿龜兹烏壘渠犂尉犂危須焉耆烏貪訾離卑陸卑陸後國郁立師單桓蒲類蒲類後國西且彌東且彌刼國山國狐胡車師前後王是也南北有大山者南山在于窴之南東出金城與漢南山接北山在車師之北即唐志所謂西州交河縣北栁谷金沙嶺等山是也中央有河者河有兩源一出葱嶺一出于窴南山其河北流與葱嶺河合注蒲昌海自于窴以西水皆西流逕休循罽賓大月氏安息等國而入于西海蒲昌之水潜行地下南出積石為中國河西海之水東南合于交州漲海〉東西六千餘里南北千餘里東則接漢玉門陽闗〈班志敦煌郡龍勒縣有玉門闗陽關酒泉郡有玉門縣闞駰曰漢罷玉門闗屯置其人於此括地志沙州龍勒山在縣南百六十五里玉門闗在縣西北百一十八里〉西則限以葱嶺〈西河舊事葱嶺其山髙大上悉生葱故以名焉〉河有兩源一出葱嶺一出于窴合流東注鹽澤鹽澤去玉門陽闗三百餘里自玉門陽闗出西域有兩道從鄯善傍南山北循河西行至莎車為南道〈鄯善亦曰樓蘭國治杆泥城去陽闗千六百里鄯上扇翻傍歩浪翻莎車治莎車城去長安九千九百五十里莎素河翻〉南道西踰葱嶺則出大月氏安息自車師前王廷隨北山循河西行至䟽勒為北道〈車師前王治交河城去長安八千一百五十里唐西州交河縣是也疏勒治䟽勒城去長安九千三百五十里西當大月氏大宛康居之道〉北道西踰葱嶺則出大宛康居奄蔡焉〈杜佑曰奄蔡後為肅特國〉故皆役屬匈奴匈奴西邊日逐王置僮僕都尉〈匈奴盖以僮僕視西域諸國故以名官〉使領西域常居焉耆危須尉黎間〈焉耆治員渠城去長安七千三百里危須治危須城在焉耆東百里去長安七千二百九十里尉犂治尉犂城去長安六千七百五十里南接鄯善且末二國〉賦税諸國取冨給焉烏孫王既不肻東還漢乃於渾邪王故地置酒泉郡〈應劭曰其水如酒故曰酒泉師古曰城下有金泉泉味如酒唐為肅州宋白曰東南至長安二千九百里〉稍發徙民以充實之後又分置武威郡〈本匈奴休屠王所居地大初四年分置武威郡唐之凉州即其地宋白曰東南至長安二千八百里〉以絶匈奴與𦍑通之道天子得宛汗血馬愛之名曰天馬使者相望於道以求之諸使外國一輩大者數百少者百餘人人所齎操大放博望侯時〈齎資也操持也放依也言遣使所将節幣大槩依遣博望侯時也放讀倣〉其後益習而衰少焉〈師古曰以其串習故不多發人少詩沼翻〉漢率一嵗中使多者十餘少者五六輩逺者八九嵗近者數嵗而反
우공추지(禹貢錐指) 11권
엄채(奄蔡)는 강거(康居) 서북쪽 2천 리쯤에 있으니 가 없는 대택(大澤)을 마주하고 있으니 대개 북해(北海)라고들 말하고 있다.
禹貢錐指/卷11 : 奄蔡在康居西北可二千里,臨大澤無厓,蓋乃北海云。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183권 : 엄채국(奄蔡國) : 엄채국(奄蔡國)은 한(漢)나라 때 이곳과 교류를 하였다. 서쪽으로 대진(大秦)과 거리가 동남쪽 2천 리이고 강국(康國)과 이웃하며 양관(陽關)과 거리가 8천여 리이다. 능숙한 궁수가 십여만이다. 민간 풍속에 옷차림은 강거(康居)와 같고 땅의 기질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가없는 대택(大澤)을 마주하고 있다. 강 언덕 역시 정송(楨松, 楨의 기본 뜻은 ‘단단함’이다), 백초(白草, 볏과, 여러 해 살이 풀)과 담비(貂)가 많고 목축을 하여서 물과 풀을 따라 지낸다. 대체로 북해(北海) 근방이다. 후한(後漢) 때에 이르러 이름을 고쳐서 아란나국(阿蘭那國)이라 하였고 위(魏)나라 때 속특국(粟特國)이라 하였으니 일명 온나사(温那沙)라 한다. 〈주(註)〉 후한사(後漢史)에서 “초기에 흉노(匈奴)가 그 왕을 살해하고서 그 나라를 점유하였다. 문성제(文成帝, 북위 5대 황제, 재위 기간 452년 – 465년) 초기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 왕 홀시(忽視, 또는 홀예(忽倪))에 이르러 이미 삼 대가 되었다. 주(周) 무제(武帝) 때 역시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들였다.
太平寰宇記 (四庫全書本)/卷183 奄蔡國 奄蔡國漢時通焉西去大秦東南二千里與康國接去陽關八千餘里〈闕/控絃〉十餘萬民俗衣服與康居同而土氣温和臨大澤無涯岸亦多楨松白草及貂畜牧逐水草葢近北海至後漢改名阿蘭那國魏時曰粟特國一名温那沙〈註〉後漢史云初匈奴殺其王而有其國至文成帝初遣使朝貢其王忽視已三世矣 周武帝時亦遣使貢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186권 : 속익국(粟弋國) : 속익국(粟弋國)은 후위(後魏) 때 교류를 하였다. 총령(葱嶺, 파미르 고원) 서쪽에 있으니 일명 속특(粟特)이고 일명 특구몽(特拘夢)이다. 좋은 말(馬)과 소, 양, 포도를 내는데 여러가지 포도주가 여러 나라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맛이 좋으니 아마도 물맛이 아름다운 까닭이리라. 큰 벼(大禾)를 내는데 높이가 한 장(丈) 남짓하고 낟알은 호두만하다. 안서(安西) 북쪽 5천 리에 있으니 이 큰 나라에 붙어 의지해 사는 작은 나라가 4백여 성(城)이다. 태무제(太武帝, 북위 3대 황제, 재위 기간 423년 - 452년) 때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위서(魏書) 서역전(西域傳)에 “속특(粟特)은 일명 온나사(温那沙)이니 옛날의 엄채국(奄蔡國)이다.” 하였다. 살펴보면 익(弋)은 하나의 나라이다.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엄채(奄菜)와 속특(粟特)은 각각 우두머리가 있는 다른 나라였는데 위(魏)나라가 이들을 거두어서 하나의 나라로 만들었으니 잘못이다.” 하였다.
太平寰宇記 (四庫全書本)/卷186 粟弋國 粟弋國後魏通焉在葱嶺之西一名粟特一名特拘夢出好馬牛羊葡萄諸般葡萄酒極美於諸國盖水味美故也出大禾髙丈餘子如胡豆在安西北五千里附庸小國四百餘城太武帝時遣使朝貢魏書西域傳曰粟特一名温那沙古之奄蔡國按弋一國也十三州志云奄菜粟特各有長而魏収以為一國謬也
책부원귀(册府元龜) 958권 : 엄채(奄蔡)는 강거(康居) 서북에 있으니 2천 리쯤이다. 활을 쏘는 자들이 십여만이고 가 없는 대택(大澤)을 마주하고 있으니 대체로 곧 북해(北海)를 말한다. 뒤에 속특국(粟特國)이라 이름한다. 총령(葱嶺) 서쪽에 대택(大澤)에서 살았다. 대(代) 땅과 거리가 1만 6천 리이다. 엄국(嚴國)은 엄채(奄蔡) 북쪽에 있는데 강거(康居)에 예속되어 있다. 속익국(栗弋國)도 강거(康居)에 예속되어 있다.
册府元龜卷九百五十八 奄蔡在康居西北可二千里控弦者十餘萬臨大澤無崖盖乃北海云後名粟特國在葱嶺西居於大澤去代一萬六千里嚴國在奄蔡北屬康居栗弋國屬康居
도서편(圖書編) 51권 : 속익(粟弋) : 대국(大國)이다. 총령(葱嶺)에 있다. 붙어 의지해 사는 작은 나라들이 4백여 성(城)이다.
圖書編 (四庫全書本)/卷051 粟弋 大國在葱嶺附庸小國四百餘城
어정강희자전보유(御定康熈字典補遺) : 郍는 음이 나(那)이다. 후주서(後周書)에 “숙특국(粟特國)은 총령(葱嶺)의 서쪽에 있으니 대체로 옛날의 엄채(庵蔡)이고 일명 온나사(温郍沙)이다.”라 하였다.
御定康熈字典補遺 : 邑部 : 音那後周書粟特國在葱嶺之西蓋古之庵蔡一名温郍沙
송서(宋書) 95권 : 속특국(粟特國)이 있으니 남조 송(宋) 태조(太祖) 때에 모두 표(表)를 올리고 예물을 바쳤다. 속특(粟特)은 대명(大明, 世祖의 연호, 457년 – 464년) 중에 사신을 보내어 산 사자, 화완포(火浣布, 석면으로 만들어 불에 타지 않는 섬유. 불에서 때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함), 준마인 한혈마(汗血馬)를 바치는데 오는 길에 도적을 만나 잃어버렸다.
宋書卷九十五有粟特國太祖世竝奉表貢獻粟特大明中遣使獻生獅子火浣布汗血馬道中遇寇失之
제민요술(齊民要術) 10권 : 큰 벼(大禾)는 높이가 한 장(丈, 얼추 3.3미터) 남짓한데 낟알은 소두(小豆)만하다. 속특국(粟特國)에서 이 큰 벼를 낸다.
齊民要術卷第十 大禾高丈餘子如小豆出粟特國
통지(通志) 41권 : 엄채(奄蔡)는 양관(陽關)과 거리가 8천여 리이고 서쪽으로 대진(大秦)과 더불어 있고 동남(東南) 쪽으로 2천 리에 강거(康居)와 닿아있다. 〈후위(後魏) 때 所為속특국(粟特國)에 대한 것을 나라 사람은 “그 나라는 총령(葱嶺) 서쪽에 보인다.” 하였다. 따라서 엄채(奄蔡) 땅인 것이다. 일명 온나사(温那沙)이고 대택(大澤)에서 살았으니 강거(康居) 서북쪽에 있고 대(代)와 거리가 1만6천 리이다. 북으로 안식(安息)과 오천 리 떨어져 있다.〉
단인(短人) : 단인(短人)은 위(魏)나라 때 그 존재를 알렸다. 강거(康居) 서북쪽에 있으니 남녀 모두 키가 세 척(尺)이고 인구가 매우 많다. 엄채(奄蔡) 및 여러 나라와 거리가 매우 멀다. 강거(康居)는 장노(長老)들이 전해 듣기를 ‘일찍이 행상인들이 북방(北方)을 장사를 떠났다가 아리까리한 사이에 길을 잃어서 이 나라에 이르렀는데 나라 안에 진주(真珠)와 야광 명월주(夜光明月珠)가 매우 많았다. 이 나라를 본 사람들은 국호를 알지 못하였고 어림짐작으로 이 나라가 강거(康居)와 거리가 만여 리쯤이라고 헤아렸다’ 한다. 〈돌궐(突厥) 본말기(本末記)에 “돌궐굴(突厥窟)은 북으로 말을 타고 하루를 가면 단인국(短人國)이 있는데 키가 큰 사람이 3척(尺)을 넘지 않고 2척(尺)인 사람도 있는데 머리가 작고 머리 터럭이 마치 양(羊) 배의 모양같았다. 돌궐(突厥)이 양포두국(羊胞頭國)이라 부른다. 그 옆에 다른 갈래의 겨레는 없고 같은 겨레들이 서로 침입한다. 민간에서는 알겨먹고 도둑질함이 없고 다만 높이가 7, 8척(尺)되는 큰 새가 있어 늘 단인(短人)들을 감시하며 쪼아 먹는다. 단인(短人)은 모두 활과 화살을 지니고서 이 새에 대비한다. 살펴보면 이 역시 서북쪽에 있으니 바로 위략(魏畧)에서 말하는 ‘단인국(短人國)’이 이것이다.〉
通志 (四庫全書本)/卷041 奄蔡去陽關八千餘里西與大秦東南二千里與康居接〈後魏時所為粟特國國人云其國見在葱嶺之西故奄蔡地也一名温那沙居於大澤在康居西北去代一萬六千里北距安息五千里〉
短人 短人魏時聞焉在康居西北男女皆長三尺人衆甚多去奄蔡諸國甚逺康居長老傳聞嘗有商旅行北方迷惑失道而到斯國國中甚多真珠夜光明月珠見者不知名此國號言以意商度此國去康居可萬餘里〈突厥本末記云突厥窟北馬行一日有短人國長者不踰三尺亦有二尺者頭少毛髪若羊胞之狀突厥呼為羊胞頭國其傍無他種種類相侵俗無宼盗但有大鳥髙七八尺常伺短人啄而食之短人皆持弓矢以為之備案此亦在西北即魏畧云短人國是也〉
〔어비역대통감집람(御批歴代通鑑輯覽) 43권 : 돌궐(突厥)은 본디 서방(西方, 서쪽 변방)의 작은 나라였다. 성(姓)은 아사나씨(阿史那氏)이다. 대대로 금산(金山) 남쪽에서 살며 유연(柔然)의 대장장이 노릇을 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 : 돌궐(突厥)은 흉노(匈奴)의 별종이다. 그 선조는 서해(西海)의 오른쪽에서 살았었다. 이웃 나라에게 멸망을 당하였을 때 어떤 아이 하나가 남겨졌는데 열 살을 앞두고서 발은 베이고 팔은 끊어진 채 대택(大澤) 안에 버려졌다. 이때 북쪽의 이리가 고기를 머금고 이 아이를 먹여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장성하였을 때 마침내 이리(狼)와 사랑을 나누고 아들 열 명을 낳았다. 이 아들들이 뒤에 각각 한 성(姓)이 되니 아사나(阿史那)가 그 하나이다.〉 〈금산은 곧 지금 아이태산(阿爾㤗山, 알타이산)이니 파리곤(巴里坤) 서북로에 있다. 몽고(䝉古)는 금(金)을 ‘아이탄(阿爾垣)이라 하니 태(㤗)는 곧 단(垣)이라는 음의 굴절이다.〉 아사나(阿史那)는 ‘고귀한 이리(狼)’, 또는 ‘쪽빛(藍色)’이라는 뜻. 아사눌(阿史呐), 아사납(阿斯納)이라고도 한다 御批歴代通鑑輯覽 (四庫全書本)/卷043 突厥本西方小國姓阿史那氏〈文獻通考突厥匈奴别種其先居西海之右為鄰國所滅遺一兒且十歳刖足斷臂棄大澤中有北狼啣肉食之得不死及長遂與狼交生十男其後各為一姓阿史那其一也〉世居金山〈即今阿爾㤗山在巴里坤西北路䝉古謂金為阿爾垣㤗即垣音之轉也〉之陽為柔然鐵工〕
〔통지(通志) 29권 : 아사나씨(阿史那氏) 〈하씨(夏氏, 우임금)의 후예이다. 두모산(兠牟山) 북쪽에 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들을 ‘돌궐굴(突厥窟)’이라고 불렀다. 위진(魏晉) 시대를 거치며 십 대를 거쳐 군장(君長)을 세웠지만, 뒤에 유유(蠕蠕)에 예속되었다. 아사나(阿史那)가 최고 수령(首領)이다. 후주(後周) 말에 마침내 유유(蠕蠕)를 멸망시키고 북녘 땅에서 강력한 패자가 되었다. 대체로 백여 년이 있다가 처라(處羅), 소니실(蘓尼失) 들이 중원 땅으로 귀화하였는데 아사나(阿史那)라 불렸다. 당(唐) 개원(開元) 때 ‘사씨(史氏)’로 고쳤다. 모두 이미 사관씨(史官氏)로 알려졌다. .... 또한 아사나충(阿史那忠)은 곧 소니실(蘇尼失)의 아들이다. ... 擢右驍衛大將軍宿衛四十八年無纎毫過失人比金日磾〉 通志 (四庫全書本)/卷029 阿史那氏〈夏氏之裔居兠牟山北人呼為突厥窟歴魏晉十代為君長後屬蠕蠕阿史那最為首領後周末遂滅蠕蠕霸強北土盖百餘年至處羅蘓尼失等歸化號阿史那唐開元更為史氏並已見史官氏....又有阿史那忠乃蘇尼失之子也...〉〕
〔수경주석(水經注釋) 27권 : 두모산(兠牟山)은 한중군(漢中郡)과 남양군(南陽郡)에 분계(分界)이다. 兠牟山漢中郡與南陽郡分界 * 한중군과 남양군은 대파산맥(大巴山脉)이 경계로 삼고 있다 한다.〕
통지(通志) 196권 엄채(奄蔡) : 엄채(奄蔡)는 한나라 때 교류를 텄다. 일명 속익(栗弋)이다. 서쪽에 대진(大秦)과 있고 동남쪽 2천 리에 강거(康居)와 더불어 닿아있다. 양관(陽關)과 거리는 8천여 리이다. 활을 다루는 사람이 십여 만이니 강거(康居)와 풍속이 같고 강거에 예속되어 있다. 이름난 말, 소, 양, 포도, 뭇 열매들은 내니 그 땅과 물이 아름다워서이다. 포도주는 특히나 유명하다. 또한 엄채(奄蔡) 북쪽에 엄국(嚴國)이 있는데 강거(康居)에 예속되었다. 쥐 가죽(䑕皮)을 내서 엄채(奄蔡)에 수출한다. 엄채는 후한(後漢) 때 이르러 아란료(阿蘭聊)로 이름을 고쳤다. 땅에 쌓은 성(地城, 또는 ‘지성’이라는 지명이 있는지는 모르겠다)에서 산다. 흙의 기질이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정송(楨松)과 백초(白草)가 많다. 후위(後魏) 때에 이 나라를 ‘속특국(粟特國)’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나라는 총령(葱嶺) 서쪽에 사는 것을 보았다.’ 하니 옛 엄채(奄蔡) 땅이다. 일명 온나사(温那沙)이고 대택(大澤)에서 사는데 강거(康居) 서북쪽이다. 대(代) 땅과 거리가 1만6천 리(里)이고 북쪽으로 안식(安息)과 거리가 5천 리이다. 붙어 의지해 사는 작은 나라가 4백여 성(城)이다. 땅에서 큰 벼(大禾)가 나는데 높이가 한 장(丈, 3.3미터) 남짓하고 그 낟알은 호두(胡豆)알만하다. 이보다 먼저 흉노(匈奴)가 그 왕을 살해하고서 그 땅을 점유하였다. 이제 왕 홀예(忽倪)에 이르러 이미 삼 대가 되었을 때 속특국(粟特國)의 상인(商人)이 앞서 고장(姑臧, 감숙성 무위시 양주구)에 많이들 나아가 재화를 판매하였었고 태무(太武)가 양평(涼州)을 평정할 때에 미쳐 이들도 다 노략질을 당하였다. 문성(文成) 초, 홀예(忽倪)가 사신을 보내어 잡혀있는 상인들을 속바치를 내고 풀어주기를 청하니 이를 들어준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로부터 매번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주(周) 보정(保定) 4년 다시 사신을 통해 그 토산물을 보냈다.
通志 (四庫全書本)/卷196 奄蔡 奄蔡漢時通焉一名栗弋西與大秦東南二千里與康居接去陽關八千餘里控弦十餘萬與康居同俗而屬康居出名馬牛羊蒲萄衆果其土水美故蒲萄酒特有名焉又有嚴國在奄蔡北屬康居出䑕皮以輸之奄蔡其國至後漢時改名阿蘭聊居於地城土氣温和多楨松白草後魏時稱為粟特國國人云其國見居葱嶺之西故奄蔡地也一名温那沙居於大澤在康居西北去代一萬六千里北距安息五千里附庸小國四百餘城土出大禾髙丈餘子如胡豆先是匈奴殺其王而有其地至今王忽倪已三世矣粟特國商人先多詣姑臧販貿及太武平涼州并見鹵掠文成初忽倪遣使請贖所獲商人詔聼焉自後每使朝貢周保定四年復遣使致其方物
속후한서(續後漢書) 80권 하 : 또한 엄채국(奄蔡國)이 있으니 일명 아란(阿蘭)이니 모두 강거(康居)와 더불어 풍속이 같다. 서쪽으로 대진(大秦)과 더불어 하고 동남쪽으로 강거(康居)와 닿아있다. 그 나라에 이름난 담비가 많고 목축을 하여서 물과 풀을 따라 다닌다. 대택(大澤)을 마주하고 있다. 옛날에 강거(康居)에 속박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續後漢書卷八十下 又有奄蔡國一名阿蘭皆與康居同俗西與大秦東南與康居接其國多名貂畜牧逐水草臨大澤故時羈屬康居今不屬也
통전(通典) : 속익(栗弋)은 후위(後魏) 때 이 나라와 교류하였다. 총령(蔥嶺) 서쪽에 있다. 큰 나라이니 일명 속특(栗特)이고 일명 구몽(拘夢)이다. 이름난 말(馬)과 소, 양, 진귀한 열매, 포도를 내니 그 땅에 흙과 물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큰 벼(大禾)가 나는데 높이가 한 장(丈) 남짓하고 그 낟알을 호두만하다. 안식(安息) 북쪽 5천 리에 있다. 따라 의지하는 작은 나라가 4백여 성(城)이다. 북위 태무제(太武帝, 423년 -452년) 때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通典》:栗弋,後魏通焉。在蔥嶺西,大國,一名栗特,一名拘夢,出名馬、牛、羊、珍果、葡萄,其土地水美故也。有大禾,高丈餘,子如胡豆。在安息北五千里,附庸小國四百餘城。太武帝時,遣使朝貢。
책부원귀(册府元龜) 961권 : 아란료국(阿蘭聊國) 〈전한(前漢) 때 엄채국(奄蔡國)이다.〉 땅은 강거(康居)에 속해 있고 땅의 기질이 따뜻하고 부드러워 정송(楨松)과 백초(白草)가 많이 난다. 민간의 풍습과 옷차림은 강거(康居)와 같다.
册府元龜卷九百六十一 阿蘭聊國〈前漢奄蔡國也〉地屬康居土氣温和多楨松白草民俗衣服與康居同
후한서(後漢書) 118권 : 엄채국(奄蔡國)은 아란료국(阿蘭聊國)으로 이름을 고쳤다. 땅에 지은 성(地城)에 살고 강거(康居)에 예속되어 있다. 땅의 기질이 따뜻하고 부드러워 정송(楨松)과 백초(白草)가 많다. 〈전서(前書) 음의(音義)에서 말하기를 “백초(白草)는 풀이 하얀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수(莠, 강아지풀)와 비슷하나 가늘고 풀이 익었을 때 바로 흰 소과 말(또는 흰 말?)의 먹이가 된다.〉 민간의 풍속과 옷차림이 강거(康居)와 같다.
後漢書卷一百十八 奄蔡國改名阿蘭聊國居地城屬康居土氣温和多楨松白草〈前書音義曰白草草之白者又云似莠而細熟時正白牛馬所食焉〉民俗衣服與康居同
어정연감류함(御定淵鑑𩔖函) 238권 : 엄채(奄蔡) 증통전(増通典)에서 말하기를 “엄채(奄蔡)는 한나라 때 교류를 통하였고 서쪽으로 대진(大秦)과 닿아있고 동남쪽 2천 리에 강거(康居)와 접하여 있으며 양관(陽關)과 거리가 8천여 리(里)이다. 활을 쏘는 사람들이 십여 만이다. 땅의 기질은 따뜻하고 부드럽다(温和). 가 없는 대택(大澤)을 마주하고 있다. 강기슭에는 정송(楨松), 백초(白草)와 표범(豹)이 많다. 목축을 하여서 물과 풀을 따라 다닌다. 대체로 북해(北海) 근처이다. 후한(後漢) 때 이르러 아란료국(阿蘭聊國)으로 이름을 고쳤다. 후위(後魏) 때 ‘속특(粟特)’은 일명 온나사(溫那沙)라 하였다. 주(周) 보정(保定) 4년에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하였다.
속익(粟弋) : 증통전(増通典)에서 말하기를 “속익(粟弋)은 후위(後魏)와 교류를 통하였다. 총령(蔥嶺) 서쪽에 있으니 일명 속특(粟特)이라 하고 일명 특구몽(特拘夢)이라 한다. 이름난 말과 소와 양과 진귀한 열매, 포도주를 내는데 그 땅의 흙과 물이 아름다운 때문이다. 큰 벼(大禾)는 높이가 한 장(丈) 남짓하고 낟알을 호두만하다. 붙어 의지하는 작은 나라들이 4백여 성(城)이다. 위(魏) 태무제(太武帝) 때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御定淵鑑𩔖函卷二百三十八 奄蔡 増通典曰奄蔡漢時通焉西接大秦東南二千里與康居接去陽關八千餘里控弦十餘萬土氣温和臨大澤無涯岸多楨松白草及豹畜牧逐水草蓋近北海至後漢改名阿蘭聊國後魏時曰粟特一曰溫那沙周保定四年來貢方物
粟弋 増通典曰粟弋後魏通焉在蔥嶺之西一名粟特一名特拘夢出名馬牛羊珍果蒲萄酒其土地水美故也大禾髙丈餘子如胡豆附庸小國四百餘城魏太武帝時遣使朝貢
'숙신(肅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진국(𠐍侲國)은 숙신(肅愼)이다. 3 (1) | 2024.05.16 |
---|---|
속진국(𠐍侲國)은 숙신(肅愼)이다. 2 (0) | 2024.05.09 |
숙신(肅慎)으로 가는 길 4 (0) | 2024.04.25 |
숙신으로 가는 길 3 (2) | 2024.04.18 |
숙신으로 가는 길 2 (0) | 2024.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