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에 딸린 글자들, 말하자면 北海나 北地들들에 대한 고대 중원의 자료를 번역해 보았다. 어정병자류편은 하나의 옛 백과 사전이다. 청나라 때 장정옥(張廷玉)이 엮은 책이다.
*어정병자류편(御定駢字類編)
북진(北鎮)
구당서(舊唐書) 예의지(禮儀志) : 정주(定州)에 북악(北嶽) 항산(恒山)에 제사를 지내고 영주(營州)에 북진(北鎮)인 의무려(醫巫閭) 산에 제사를 지냈다.
금사(金史) 예지(禮志) : 입동(立冬)에 정주(定州)의 북악(北嶽) 항산(恒山)에 제사를 지냈고 광녕부(廣寧府)에 북진(北鎮)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제사를 지냈다.
원사(元史) 제사지(祭祀志) : 서악(西嶽) 아래에 북진(北鎮)의 내용이 보인다. 또 성종(成宗) 대덕(大徳) 2년(1298년), 북진(北鎮)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정덕광녕왕(貞徳廣寧王)을 더해 주어 봉하였다.
명일통지(明一統志) : 북진묘(北鎮廟)는 요동도(遼東都) 의무려산(醫巫閭山) 아래에 있다. 북진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었는데, 원(元) 말에 묘(廟)가 망가졌다. 홍무(洪武) 안에 그 묘를 다시 닦았다.
채규(蔡珪) 의무려시(醫無閭詩) : 유주(幽州) 북진(北鎮)은 높고도 웅장하구나. 하늘에 기댄 채 끝 모를 자태는 동쪽 하늘에 울타리로다. (幽州北鎮髙且雄 倚天萬仞蟠天東)
북사(北史) 서전(序傳 :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의 관료인 이언(李彦)의 字) : 서전이 벼슬살이에 나가서 무군장군(撫軍將軍) 진주자사(秦州刺史)가 되었다. 이때 북진(北鎮)에서 육한(六韓), 발릉(拔陵)들의 반란을 깨부셨다. 하(夏 : 東夏州와 西夏州), 빈(豳 : 豳州), 양(凉 : 凉州)의 곳곳에서 백성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지만, 언(彦)은 형벌과 정치(刑政)를 너무 엄하게 하였다.
북해(北海)
예기(禮記) 제의(祭義) : 서해(西海) 아래에 북해 내용이 보인다.
좌전(左傳) : 남해(南海) 아래에 보인다.
맹자(孟子) : 백이(伯夷)가 주(紂) 임금을 피하여 북해(北海) 가에 살았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 북해군(北海郡) : 경제(景帝) 2년(기원전 155년)에 설치하고 청주(青州 : 산동)에 소속시켰다.
종군전(終軍傳) : 다시 언(偃)에게 따져 말하기를 “교동(膠東)은 남쪽으로는 낭야(瑯邪)에 가깝고 북쪽으로는 북해(北海)에 닿아있다. 노국(魯國)은 서쪽으로 태산(泰山)을 베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해(東海)가 있어 그 소금과 철(鹽鐵)을 거두고 있다. 언(偃)은, 네 군(四郡)에 사람 수와 논밭을 헤아리고, 그 쓸 기물과 먹을 소금을 셈을 해보면 두 군(郡)에게도 아울러 지급하기에 넉넉하지 못하다고 보는가? 오히려 실정을 보면 마땅히 남아 돌게 되어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관리들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하였다.
소무전(蘇武傳) : 흉노(匈奴)가 소무를 신(神)이라 여기고 마침내 소무를 북해(北海)에 사람이 없는 곳으로 옮기고 숫양(羝)을 치게 하였는데 숫양(羝)에게서 젖이 나자 드디어 고향 한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흉노전(匈奴傳) : 선우(單于)가 크게 노하여 곧장 알현한 주객(主客 : 九卿 중에 하나. 외교 업무를 맡은 관리) 목을 베고 곽길(郭吉)을 억류하고서 돌려보지 않고서, 이를 치욕스럽게 북해(北海)로 보냈지만, 선우(單于)는 그예 한(漢) 변경 지역 치는(寇) 일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한(漢) 변경 지역 치는(寇) ... : 번역을 하다보면 어떤 글자 풀이에 대해 고민할 때가 많다. ‘寇’가 특히 그러하다. 흔히 이 글자를 ‘도적질’ 정도로 가볍게 풀이하게 되는데, 나라들 사이에 벌어지는 영토 전쟁에서 ‘寇’를 ‘도적질’로 풀이하게는 많은 걸림이 있다. 그래서 ‘~을 치다’로 풀이하였다. 그 근거는, 좌전 문왕 7년에 “군대가 나라 안에서 일어나면 ‘난(亂)’이라 하고, 나라 밖에서 쳐들어오면 ‘구(寇)’라 한다. (《左傳·文七年》兵作於內爲亂,於外爲寇。)”이다.]
후한서(後漢書) 공융전(孔融傳) : 때에 황건(黄巾)이 여러 주(州)를 도적질하였는데 북해(北海)는 가장 적들에 요충지가 되니, 동탁(董卓)이 드디어 삼부(三府)에게 슬쩍 따져 물어서 함께 융(融)을 천거하여 북해상(北海相)으로 삼았다. 또 당시에 황건(黄巾)이 다시 와서 침입하여 포악을 떠니 융(融)이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나와 도창(都昌 : 북해군 아래에 한 縣)에 주둔하였는데 황건적에 한 우두머리 관해(管亥)에 포위되었다. 융(融)이 위급이 다가오자 마침내 동래태수(東萊太史) 자(慈)를 평원상(平原相) 유비(劉備)에게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비(備)가 놀라며 말하기를 “공북해(孔北海)가 그예 천하에 유비(劉備)가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구나!”하고는 어서 군사 3천 명을 보내어 융을 구원하게 하니 적은 흩어져 달아났다.
[공북해집(孔北海集) : 도창현(都昌縣)은 북해군(北海郡)에 속하니 옛 성(故城)이 지금 청주(青州) 임구현(臨昫縣) 동북에 있다. 孔北海集 〈都昌縣屬北海郡故城在今青州臨昫縣東北〉 (공북해집은 후한 말기 문장가인 공융(孔融, 자는 문거)의 시문집이다.) ]
[삼부(三府) : 後漢 때 최고위 관직인 삼공(三公) 즉 태위(太尉), 사도(司徒), 사공(司空) 이 세 기관 또는 관청을 말한다. 태위(太尉)는 주로 군사 부문을 담당하는 최고위 무관직 또는 명예직으로, 후한 초기에는 대사마(大司馬)라고 이름하기도 했다. 사도(司徒)는 행정, 특히 민정(民政), 전토(田土) 관리, 교육 등을 총괄하는 최고위 문관직이었다. 후대 왕조의 호부상서와 엇비슷한 역할을 했다. 사공(司空)은 토목 공사, 건축, 수리 시설 관리 등을 담당하는 최고위 관직. 후대 왕조의 공부상서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이들 삼공은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최고위직이었으며, 각기 독립된 행정 기관인 '부(府)'를 거느렸기 때문에 '삼부'라고 불렸다. 하지만 후한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한 시대의 승상 등에 비해 실권이 다소 약화되어 명예직의 성격도 가졌다고 한다.]
조기전(趙岐傳) : 이보다 앞서 중상시(中常侍) 당형(唐衡)의 형인 현(玹)이 경조호아도위(京兆虎牙都尉)가 되자 군(郡)에 사람들이 현(玹)이 벼슬살이로 나아감에 갖추어야할 덕(徳)을 밟지 않았다고 여기어, 모두 이를 하잘것없이 보아 업신여겼다. 기(岐)와 사촌형(從兄) 습(襲)도 자주 현(玹)을 폄하하는 논의를 하자 현(玹)이 뼈속 깊이 독기와 한이 서렸다. 연희(延熹) 원년(元年 : 158년), 현(玹)이 경조윤(京兆尹)이 되자 기(岐)가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끝내 사촌(從子) 전(戩)과 함께 현(玹)을 피해 달아났다. 현(玹)이 과연 기(岐)의 가속(家屬)과 종친(宗親)을 잡아 가두고서 무거운 법으로 엮어 죄다 죽였다. 기(岐)는 그예 난리를 피하여 사방으로 도망 다녔는데, 강(江), 회(淮), 해대(海岱) 등 발길을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스스로를 이름을 숨기고서 병을 팔았다. (공북해집(孔北海集) 시(市) 중에서)
[중상시(中常侍) : 고대 중국, 특히 후한(東漢) 시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환관(宦官) 관직. 환관 서열에서는 대장추(大長秋) 바로 다음가는 고위직이었다. 원래 중상시는 환관이 아닌 일반 남성도 임명될 수 있는 문관(文官)이었다가 후한(後漢) 영원(永元) 4년(92년) 이후부터는 오직 환관만이 중상시로 임명되면서 환관 세력의 핵심 보직이 되었다. 그러나 후한 영원(永元) 4년(92년) 이후부터는 오직 환관만이 중상시로 임명되면서 환관 세력의 핵심 보직이 되었다. 후한 말기에는 중상시들이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남용하여 국정을 농단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특히 영제(靈帝) 시기에 권력을 장악했던 10여 명의 중상시를 묶어 ‘십상시(十常侍)’라고 불렀으며, 이들의 횡포는 후한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경조호아도위(京兆虎牙都尉) : 군(郡)에 속하는 무관직. 수도 장안 서쪽 지역의 군사 방위를 책임지고 황실의 능원을 보호하는 중요한 군사령관 직책이었다. 후한(後漢) 안제 영초 4년(110년)에 서강(西羌)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 장안(長安)에 주둔했으며, 이들이 이끄는 병력은 ‘호아영(虎牙營)’이라고도 불렸다. 황실 능원(陵園) 및 수도 인근 지역인 삼보(三輔, 경조윤, 좌풍익, 우부풍) 지역을 방어하고 호위하였다. 특히 양주(涼州)와 가까워 자주 침범하던 강족(羌族)의 침략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해대(海岱) : 옛날에는 청주(青州), 서주(徐州) 땅을 말하였으니 지금에 산동성 발해(渤海)와 황해(黄海)에서 태산(泰山)에 이르는 사이에 땅을 가리킨다. 해대란 이름은 상서(尚书) 우공(禹贡)에서 따온 것으로 청주(青州)의 지리에 대한 기록에서 나왔다. 선진(先秦) 때에는 “해대(海岱)”라 함은 이 구역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오지(呉志) 태사자전(太史慈傳) : 북해상(北海相) 공융(孔融)이 이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기이하다고 여기어,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그 어머니에게 안부를 여쭙고 아울러 음식을 전해주게 하였다. 때에 융(融)이 황건적의 도적질과 광포함에 군사를 이끌고 나가 도창(都昌)에 주둔하였는데 적 관해(管亥)에게 포위되었고, 한편 자(慈)는 요동(遼東)으로부터 돌아왔다. 그 어머니가 자(慈)에게 말하기를 “너는 공북해(孔北海)와 일찌감치 서로 만나본 적도 없었는데 너가 집을 떠난 뒤에 넉넉한 도움과 은근한 정이 네 오랜 벗들보다 더하였다. 그런 사람이 지금 적들에 포위되었으니 너는 마땅히 그에게 달려가야 한다. 적들이 병력이 이른다는 소리를 듣자 포위를 풀고 흩어져 달아났다. 융(融)이 제(濟) 땅을 평정하고서 자(慈)를 더욱 기특하고 귀하게 여겼더니, 자(慈)가 “경(卿)은 내 어린 벗입니다.” 하였다. 일이 끝나자 자(慈)가 돌아가 그 어머니에게 그동안 일을 알리니 그 어머니 말씀이 “나는 네가 공북해(孔北海)에게 은혜를 갚음에 기쁘다.” 하였다.
송서(宋書) 주군지(州郡志) : 명제(明帝)가 회북(淮北) 땅을 잃어버리고 울주(鬱州)에다 청주(青州)를 임시로 세우고 제(齊), 북해(北海), 서해군(西海郡)을 세웠다.
부서지(符瑞志) : 태시(泰始) 3년(267년) 5월 기묘(己卯)에 흰노루(白麞 : 상서로움을 상징)가 북해(北海) 도창(都昌)에 나타났다.
북사(北史) 제(齊) 고조기(髙祖紀) : 천평(天平) 2년(535년) 3월 신무(神武)가 그 딸을 려승(蠡升) 태자에 아내로 삼게 하여 그들의 허점을 엿보고자 하였다. 신유(辛酉)에 몰래 군대를 보내 이들을 공격하고 그 북부왕(北部王)이 려승(蠡升) 목을 베어 보냈다. 그 무리가 다시 그 아들 남해왕(南海王)을 세우니 신무(神武)가 진격하여 이를 치고 다시 남해왕(南海王)과 아우 서해왕(西海王), 북해왕(北海王), 황후(皇后), 공경(公卿) 이하 4백여 사람들을 잡았다.
돌궐전(突厥傳) : 헌원(軒轅) 이래로 훈육(獯粥)이 변방에서 크게 골치거리였다. 이제 멀리 북해(北海) 끝까지 모두 신하(臣妾)가 되니 이런 성대한 일은 오랜 옛날부터 들은 적이 없었다.
오락후국전(烏洛侯國傳) : 그 나라 서북에 완수(完水)가 있어 동북으로 흐르다 난수(難水)와 하나가 된다. 그 작은 물줄기(小水)들은 모두 난(難)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또 서북으로 20일을 가다 보면 우이니(于已尼) 대수(大水)가 있으니 이른바, 북해(北海)이다. 당서(唐書) 이옹전(李邕傳) : 옹(邕)이 공덕비들에 쓴 글이 뛰어난 바이라, 사람들이 돈이며 비단을 바쳐 그 글을 요구하니 그들로부터 이래저래 받은 돈이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다. 옹(邕)은 비록 꺾여 부침이 있었지만 글로 천하에 이름을 알려 당시 세상에서는 이북해(李北海)라고 일컬었다.
금사(金史) 예지(禮志) : 북악(北嶽) 아래에 북해(北海)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원사지리지(元史地理志) : 유주(濰州 : 지금 산동성 濰坊市 일대) : 당(唐) 초기, 유주(濰州)로 하였다가 뒤에 폐하였다. 송(宋) 때에 북해군(北海軍)으로 하였다가 다시 유주(濰州)로 급을 올려 회복하였다.
원사(元史) 제사지(祭祀志) : 지원(至元) 28년(1291년), 북해광택영우왕(北海廣澤靈祐王)으로 작위를 더하여 봉하였다.
열자(列子) : 우(禹) 임금이 물과 흙(水土)을 다스릴 때 예정된 길을 헤매다 잘못 들어 어떤 한 나라로 불쑥 들어갔다. 북해(北海)의 북쪽 가에 있어 제주(齊州)와 거리가 몇천만 리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 나라 이름은 종북(終北)으로, 그 땅의 끝이 간 곳을 알지 못하니 바람이나 비, 서리나 이슬이 없고 날짐승이나 들짐승, 벌레나 물고기, 풀이나 나무가 없다. 사방이 다 펀펀하니 높은 산들로 겹겹이 둘러 쌓여있다.
장자(莊子) : 남해(南海) 아래에 북해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또 동면(東面) 아래에도 보인다.
또 추수(秋水)에서도 “바람(風), 그대는 북해(北海)에서 휭 일어나 쌩 남해(南海)로 들어가, 있는 듯 없으니 어째서인가?” 하였다.
순자(荀子) : 북해(北海)는 달리는 말과 짖는 개가 있고, 중원(中國)은 이들을 얻어 길러 부릴 수 있다.
역림(易林) : 세 사람이 여행을 나섰는데 모두 북해로 발길을 모았다. 문에 들어가 상당(上堂)으로 올라가 왕모(王母)을 배알 하였는데 왕모께서 나를 위로하며 술을 내리셨다.
십주기(十洲記) : 원주(元洲)는 북해(北海) 안에 있으니 위로 오지(五芝)의 오묘한 개울(元澗)이 있으니 개울물은 마치 꿀물(蜜漿) 같아 이를 마시면 오래 산다. 오지(五芝)를 먹어도 오래 산다.
황정군갑연신경(黄庭遁甲緣身經) : 동해(東海) 신 이름은 아명(阿明)이요 서해(西海) 신 이름은 축량(祝良)이요 남해(南海) 신 이름은 거승(巨乗)이요 북해(北海) 신 이름은 우강(禺强)이다.
명일통지(明一統志) : 북해(北海)는 청주부(青州府) 군(郡) 이름이다.
또 북해(北海)라는 없어진 현(廢縣)이 봉래부(萊州府) 유현성(濰縣城) 안에 있다.
또 북해(北海) 묘(廟)는 회경부(懐慶府) 제원현(濟源縣)에 있으니 서북(西北)을 다스리며 북해(北海)의 신에 제사를 올렸다. 이야기꾼들은 “제독(濟瀆 : 濟水)의 지하 샘물 맥은 북해(北海)로 통하니, 그래서 여기에 묘(廟)를 세웠다.” 말한다.
위(魏) 문제(文帝)가 지은 전론(典論) 논문(論文) : 지금 문인(文人)인 노국(魯國) 출신인 공융(孔融) 문거(文舉 : 공융의 字), 광릉(廣陵) 출신인 진림(陳琳) 공장(孔璋 : 진림의 字), 산양(山陽) 출신인 왕찬(王粲) 중선(仲宣 : 왕찬의 字), 북해(北海) 출신인 서간(徐幹) 위장(偉長 : 서간의 字), 진류(陳留) 출신인 완우(阮瑀) 원유(元瑜 : 완우의 字), 여남(汝南) 출신인 응창(應㻛) 덕련(徳璉 : 응창의 字), 동평(東平) 출신인 유정(劉楨) 공간(公幹), 이 일곱 사람은 학문에 있어서 어디 버릴만한 것이 없으며 문학 작품에 있어서도 어디 빌려올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라서, 모두 스스로들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驥) 녹이(騄)처럼 치달아 우러러 발을 나란히 하며 아울러 달리니, 이 때문에 서로에게 허리를 숙이고 복종하기에는 참으로 어렵다. 〉
북강(北江)
서(書) 우공(禹貢) : 삼강(三江) 중에 동쪽에서 중강(中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전(傳) : 북(北 : 북강)이 있으니 중(中 : 중강)과 남(南 : 남강)이 있음을 알만하다.
소(疏) : 정의(正義) : 지리지(地理志)에서 “남강(南江)은 회계(㑹稽)에 오현(呉縣) 남동쪽을 따라 바다로 들어가고 중강(中江)은 단양(丹陽)에 무호현(蕪湖縣) 서동쪽을 따라 회계(㑹稽) 양자현(陽羡縣) 동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북강(北江)은 회계(㑹稽) 비릉현(毘陵縣) 북동을 따라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원사(元史) 안남군현(安南郡縣) 부록(附録) : 북강로(北江路)는 나성(羅城) 동쪽 언덕배기에 있으니 여강(瀘江) 물이 갈라져 북강(北江)으로 들어가는데, 북강에 다리 여섯이 있다.
명일통지(明一統志) : 북강(北江)은 광주부(廣州府) 남해현(南海縣)에 있는데, 정(湞)과 무(武) 두 물줄기가 하나가 되니 이중 정수(湞水)는 매령(梅嶺)에서 발원하여 남쪽 웅소주(雄韶州)를 거치고, 무수(武水)는 임무(臨武)에서 발원하여 와서 정수와 하나가 되어 이리저리 구비 돌다 내려가서는 북강과 하나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북지(北地)
전국책(戰國䇿) : 소대(蘇代 : 전국시대 소진의 동생)가 제(齊) 나라에 있으면서 연왕(燕王)에게 글을 올렸으니, “제(齊)나라가 연(燕)나라를 믿는 것이, 북지(北地)를 비워 두고 그 병력을 움직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요즘 임금께서 전벌(田伐)과 참(參)과 거질(去疾)의 말을 믿어 장차 제(齊)를 공격하여 제(齊)의 신민들(臣民 : 犬馬)로 하여 연(燕)나라에 입도 못 떼게 하려 하십니다. 지금 임금께서 또 경(慶)을 보내 신(臣)에게 명하시기를 ‘나는 제나라와 우호를 잘 이끄는 길을 가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왕께서 진실로 이러한 길을 가고자 하신다면 신(臣)은 임금을 위해 이 길을 힘써 섬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臣)에게 오롯이 맡긴, 제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위한 임무에서 이 소대(蘇代)를 풀어내고자 하신다면, 신(臣)은 이 일을 내려놓도록 하겠습니다. 신은 참으로 임금을 뵙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또 장의(張儀)가 초왕(楚王)을 달래며 설득하기를 “진(秦)나라가 으뜸 군대를 들어 무관(武闗)으로 진격하여 남쪽으로 공격을 하게 되면 초나라 북쪽 땅(漢中, 南陽들)은 그들에 의해 끊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다시 응후(應侯)에게 말하기를 “지금 조(趙)를 공격하면, 그 북쪽 땅(北地)은 연(燕)으로 들어가고 동쪽 땅(東地)은 제(齊)로 들어가며 남쪽 땅(南地)은 초(楚)와 위(魏)로 들어가니, 그렇다면 진(秦)이 얻을 땅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여, 이참에 조(趙) 땅을 베어 화약을 맺는 데에 써서(전쟁 소모를 피하면서도 진나라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도록) 무안군(武安君)의 공으로 삼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하였다.
사기(史記) 진시황기(秦始皇紀) : 27년에 시황(始皇)이 농서(隴西), 북지(北地)를 순수(巡狩)하심에, 계두산(雞頭山)을 나와 회중(囘中)을 지나갔다.
연세가(燕世家) : 제(齊) 선왕(宣王)이 장자(章子)에게 명하여 오도(五都)의 군대를 이끌고서 북지(北地)의 대중을 엮어서 연(燕)을 치게 하였다.
조세가(趙世家) : 연(燕)이 제(齊)의 북지(北地)를 다 차지하니 사구(沙丘), 거록(鉅鹿)과 거리가 삼백 리(里)로 줄어들었다. 주(注) 정의(正義)에 “사구(沙丘)는 형주(邢州 : 지금에 하북성 邢臺市 일대)이다. 거록(鉅鹿)은 기주(冀州 : 지금에 하북성 衡水市 冀州区)이다. 제(齊)의 북계(北界)는 패주(貝州 : 지금에 하북성 남부 부분 지구)이다. 렴(歛)은 덜 감(減)이다. 제(齊)를 깨부수고 한(韓)을 멸한 뒤에 연(燕)의 남쪽 경계와 진(秦)의 동쪽 경계가 서로 거리가 삼백 리(里) 줄었다는 말이다. 조(趙)나라는 중간에 있었다.” 하였다.
한서(漢書) 고후기(髙后紀) : 5년 9월에 하동(河東) 상당(上黨)의 기병을 발동하여 북지(北地)에 주둔시켰다.
매승전(枚乗傳) : 장한(張韓)이 북지(北地)의 명 궁수를 좌우에 거느리니 병사들이 성벽을 내려오지 못하였고 군대가 느긋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이광전(李廣傳) : 뒤에 농서(隴西)와 북지(北地)와 운중(雲中)으로 옮겨 태수(太守)가 되었다.
한안국전(韓安國傳) : 옛날 진(秦) 목공(繆公)이 옹(雍 : 지금에 섬서성 寶雞市 鳳翔區 일대)에 도읍하였으니 땅이 사방 삼백 리였다. 목공이 당시 시대의 변화를 읽고서 서융(西戎)을 공격해 그 땅을 손에 넣었으니, 연 땅이 천 리에, 아우른 나라가 열넷이었다. 농서(隴西), 북지(北地)가 이것이다.
위청전(衛青傳) : 한 무제(武帝) 때에 장수 위청(衛青)이 건의하여 백양왕(白羊王 : 백양은 하타오, 곧 하투(河套) 지역과 Ordos 고원에 근거했던 나라. 이 지역은 한 무제가 점거한 뒤에 朔方郡이라 함)과 누번왕(樓煩王 : 누번 역시 하투 지역에 있던 나라)를 달아나게 하고 드디어 하남(河南) 땅을 손에 넣고 삭방군(朔方郡)으로 하였다. 주(注)에 사고(師古)가 “마땅히 북지군(北地郡)의 북쪽은 황하(黄河)의 남쪽이다.” 하였다.
*하투 삭방군 지도 : Ordos와 Baotou


곽거병전(霍去病傳) : 한 무제 원수 3년(기원전 121년) 여름에 거병(去病)이 합기후(合騎侯) 오(敖)와 북지(北地)에서 길을 달리하여 출격하였고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과 낭중령(郎中令) 이광(李廣)이 우북평(右北平)에서 길을 달리하여 출격하였다.
아관전(兒寛傳) : 이때 장탕(張湯)이 정위(廷尉)가 되었다. 정위부(廷尉府 : 한나라 최고 사법기구로 중대 사건을 심리함)가 문서와 역사(文史), 법률에 능숙한 관리를 싹 등용하여 관(寛 : 兒寬)은 유생(儒生)으로서 그 안에 있었다. 경전에 익숙했던 유생이기에 이 일에 익숙하지 못하게 보여 정식 관원으로 임명되지 못하고 종사(從史 : 상급 기구나 관리에 예속된 하급 관원)에 제수되어 북지(北地)로 가서 가축 돌보기를 몇 년 하다가 부(府)로 돌아와 가축 대장(畜簿)을 올렸다. 마침 정위(廷尉)에 당시 판결이 어려운 사건을 아뢴 상주문이 올라와 있었는데 두 번 살펴보고 기각하였다. 그러자 연리(掾史)가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는데 관(寛)이 그 기각된 뜻을 말하자 이참에 연리(掾史)가 관(寛)을 시켜 상주문(奏)을 짓게 하였다. 상주문이 만들어지고 이를 읽으니 모두들 감복하였다. 연리들이 이 상주문을 연위(廷尉) 탕(湯)에게 아뢰니 탕(湯)이 크게 놀라 관(寛)을 불러서 그와 말을 나누어 보니 관의 재주가 기특하여 그를 하급관리(掾)로 삼고 관(寛)이 지은 상주문을 황제에게 올리니 곧바로 재가를 얻었다.
부개자전(傅介子傳) : 부개자(傅介子)는 북지(北地) 사람이다. 주(注)에 사고(師古)가 “조충국전(趙充國傳) 찬(贊)에 ‘의거(義渠) 공손하(公孫賀)와 부개자(傅介子)’라 하니 그렇다면 개자(介子)는 북지(北地) 의거(義渠) 사람이다.” 하였다.
흉노전(匈奴傳) : 진(秦) 소왕(昭王) 때 의거(義渠) 융왕(戎王)이 선태후(宣太后)와 바람을 피워(亂) 아들 둘을 두었다. 선태후(宣太后)가 속임수를 써서 의거(義渠) 융왕(戎王)을 감천(甘泉)에서 죽이고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의거(義渠) 땅을 쳐서 멸하였다. 이에 진(秦)은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가졌다.
효문(孝文) 14년, 흉노(匈奴) 선우(單于)가 이끈 14만 기마가 조나(朝那) 땅 소관(蕭闗 : 寧夏와 甘肅 접경 지역에 있었던 고대 관문)에 들어와 북지도위(北地都尉) 앙(卬)을 죽이고 인민(人民)과 가축을 사로잡기를 매우 많이 하고는 드디어 팽양(彭陽)에 이르러 기병을 시켜 들어가 중궁(中宫)을 불 지르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중 정찰 기병이 옹(雍 : 지금에 섬서성 鳳翔)과 감천(甘泉 : 지금에 섬서성 淳化縣)에 이르니, 이에 문제(文帝)가 중위(中尉 : 수도 방위 담당) 주사(周舍)와 낭중령(郎中令 : 궁중 호위 담당) 장무(張武)를 장군으로 삼고 수레 천승(千乗), 십만 기병을 징발하여 장안(長安) 둘레에 주둔시키고서 호(胡)의 침입에 대비하고 창후(昌侯) 노경(盧卿)을 상군장군(上郡將軍)으로 삼고 영후(𡩋侯) 위속(魏遫)을 북지장군(北地將軍)으로 삼았으며 융려후(隆慮侯) 주조(周竈)를 농서장군(隴西將軍)으로 삼고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를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으며 성후(成侯) 동적(董赤)을 장군(將軍)으로 삼아 수레와 기병(車騎)을 허천나게 징발하여 가서 호(胡)를 치게 하였다. 선우(單于)가 요새(塞) 안에 머무른 지 한 달 남짓, 한(漢)의 군대가 선우를 요새에서 축출하고 돌아왔다.
후한서(後漢書) 곽단전(郭丹傳) : 왕분(王莾)이 그를 징벌하자 드디어 제생(諸生)과 함께 북지(北地)로 도망쳤다.
양통전(梁統傳) : 통(統)의 고조부 자도(子都)가 하동(河東)에서 북지(北地)로 옮겨가 살았다. 자도(子都)의 아들 교(橋)가 재물 천만(千萬)을 가지고서 무릉(茂陵)으로 옮겨갔다가 애제(哀帝, 평제(平帝) 말(얼추 기원후 1세기)에 안정(安定)으로 돌아갔다.
진서(晉書) 노심전(盧諶傳) : 심(諶)은 이름이 가자(家子)이다. 일찍 명성이 있었으니 재주가 뛰어나고 하는 짓이 깨끗하여, 한 시대 사람들에게 추앙받았다. 그러나 중원(中原)에 벌어진 상란(喪亂 : 西晉 말기에 중원 땅이 전란에 휩싸였고 石氏가 건립한 정권인 後趙가 세워지던 때)을 만나 청하(清河)에 최열(崔悦), 영천(頴川)에 순작(荀綽), 하동(河東)에 배헌(裴憲), 북지(北地)에 부창(傅暢)과 더불어 깡그리 옳지 않은 정권(석씨 정권인 後趙)에 벼슬아치 노릇을 하는 비운에 빠졌으니, 비록 모두 석씨(石氏) 정권에서 두드러진 능력을 보였으나 늘 이를 치욕스럽게 여겼다.
송서(宋書) 예지(禮志) : 유선(劉禪)은 항복을 하며 두 손을 뒷짐결박한 채 위왕(魏王)에 얼굴을 들어 보이니 북지왕(北地王) 심(諶 : 유선의 아들)은 조열(照烈 : 유비)의 묘에서 곡을 하였다.
부서지(符瑞志) : 태강(太康) 4년(283년) 11월 계미(癸未)에 흰 토끼가 북지(北地) 부평(富平)에 나타났다.
남사(南史) 부소전(傅昭傳) : 소(昭)는 자(字)가 무원(茂逺)으로 북지(北地) 영주(靈州 : 지금 영하 吴忠) 사람이다. 진(晉)나라 때 사예교위(司𨽻校尉 : 수도 및 그 주변 지역의 감찰 및 군사 행정을 총괄하는 고위 관직)를 지낸 함(咸)의 7세손이다.
원사(元史) 세조기(世祖紀) : 민간에 도박을 금하고 이를 어긴 자는 북지(北地)로 유배를 보냈다.
수경(水經) : 하수(河水)는 북쪽으로 북지(北地) 부평현(富平縣) 서쪽을 지난다. 주(注)에 “진(秦)에서 북지도위(北地都尉)를 설치하고 현성(縣城)에 소재지를 두고 다스렸다.” 하였다.
환우기(寰宇記) : 평량부(平凉府)의 강물과 산천이 이 하서(河西) 땅에 섞여 있다 보니 인가의 연기가 북지(北地)에 닿아있다.
명일통지(明一統志) : 북지(北地) 경양부(慶陽府)는 군(郡) 이름이다.
御定駢字類編卷一百二十
北鎮〈舊唐書禮儀志祭北嶽恒山於定州丨丨醫巫閭於營州 金史禮志立冬祭北嶽恒山於定州丨丨醫巫閭山於廣寜府 元史祭祀志見西嶽下 又成宗大徳二年加封丨丨醫巫閭山為貞徳廣寧王明一統志丨丨廟在遼東都醫巫閭山下祀丨丨醫巫閭山之神元季廟毁洪武中重修 蔡珪醫無閭詩幽州丨丨髙且雄倚天萬仞蟠天東 又北史序傳出為撫軍將軍秦州刺史時破六韓拔陵等反於丨丨夏豳凉所在蜂起而彦刑政甚嚴〉
北海〈禮記祭義見西海下 左傳見南海下 孟子伯夷辟紂居丨丨之濵 漢書地理志丨丨郡景帝中二年置屬青州 又終軍傳又詰偃膠東南近瑯邪北接丨丨魯國西枕泰山東有東海受其鹽鐵偃度四郡口數田地率其用噐食鹽不足㠯并給二郡邪將勢宜有餘而吏不能也 又蘇武傳匈奴㠯為神乃徙武丨丨上無人處使牧羝羝乳乃得歸 又匈奴傳單于大怒立斬主客見者而留郭吉不歸遷辱之丨丨上而單于終不肯為宼於漢邊 後漢書孔融傳時黄巾宼數州而丨丨最為賊衝卓乃諷三府同舉融為丨丨相又時黄巾復來侵暴融乃出屯都昌為賊管亥所圍融逼急乃遣東萊太史慈求救於平原相劉備備驚曰〉
〈孔北海乃復知天下有劉備邪即遣兵三千救之賊乃散走 又趙岐傳先是中常侍唐衡兄玹為京兆虎牙都尉郡人以玹進不由徳皆輕侮之岐及從兄襲又數為貶議玹深毒恨延熹元年玹為京兆尹岐懼禍及乃與從子戩逃避玹玹果收岐家屬宗親䧟以重法盡殺之岐遂逃難四方江淮海岱靡所不歴自匿姓名賣餅丨丨市中 呉志太史慈傳丨丨相孔融聞而竒之數遣人訊問其母并致餉遺時融以黄巾宼暴出屯都昌為賊管亥所圍慈從遼東還母謂慈曰汝與孔丨丨未嘗相見至汝行後贍䘏殷勤過於故舊今為賊所圍汝宜赴之賊聞兵至解圍散走融既得濟益竒貴慈曰卿吾之少友也事畢還啟其母母曰吾喜汝有以報孔丨丨也 宋書州郡志明帝失淮北於鬱州僑立青州立齊丨丨西海郡 又符瑞志泰始三年五月己卯白麞見丨丨都昌 北史齊髙祖紀天平二年三月神武欲以女妻蠡升太子𠉀其不設備辛酉潛師襲之其北部王斬蠡升首以送其衆復立其子南海王神武進擊之又獲南海王及其弟西海王丨丨王皇后公卿以下四百餘人 又突厥傳自軒轅以來獯粥多為邊患今遠窮丨丨皆為臣妾此之盛事振古未聞 又烏洛侯國傳其國西北有完水東北流合於難水其小水皆注於難東入海又西北二十日行有于已尼大水所謂丨丨也 唐書李邕傳邕之文於碑頌是所長人奉金帛請其文前後所受鉅萬計邕雖詘不進而文名天下時稱李丨丨 金史禮志見北嶽下 元史地理志濰州唐初為濰州後廢宋為丨丨軍復升濰州 又祭祀志至元二十八年加封丨丨廣澤靈祐王 列子禹之治水土也迷而失塗謬之一國濵丨丨之北不知距齊州幾千萬里其國名曰終北不知際畔之所齊限無風雨霜露不生鳥獸蟲魚草木之類四方悉平周以喬陟 莊子見南海下 又見東面下 又今子蓬蓬然起於丨丨蓬蓬然入於南海而似無有何也 荀子丨丨則有走馬吠犬焉然而中國得而畜使之 易林三人為旅俱歸丨丨入門上堂拜謁王母勞賜我酒 十洲記元洲在丨丨中上有五芝元澗澗水如蜜漿飲之長生服五芝亦得長生 黄庭遁甲緣身經東海神名阿明西海神名祝良南海神名巨乗丨丨神名禺强 明一統志丨丨青州府郡名 又丨丨廢縣在萊州府濰縣城内 又丨丨廟在懐慶府濟源縣治西北祀丨丨之神説者謂濟瀆泉脉通丨丨故於此建廟 魏文帝典論論文今之文人魯國孔融文舉廣陵陳琳孔璋山陽王粲仲宣丨丨徐幹偉長陳留阮瑀元瑜汝南應㻛徳璉東平劉楨公幹斯七子者於學無所遺於辭無所假咸以自騁驥騄於千里仰齊足而並馳以此相服亦良難矣 庾肩吾謝東宫示古跡啟見西河下 張華情詩君居丨丨陽妾在江南隂 江淹情思詩倐忽南江隂照曜丨丨陽 又擬潘岳述哀詩我慚丨丨術爾無帝女靈 周興嗣答呉均詩驚鳬起丨丨儀鳯飛上林范雲贈王中書詩逸翮凌丨丨搏飛出南皮 王勃採蓮曲見西津下 陳子昻詶李㕘軍詩青雲儻可致丨丨憶孫賔 蕭頴士山莊月夜詩未奏東山妓先傾丨丨尊 李白題江夏修静寺詩見南江下 張南史奉寄中書李舍人詩丨丨樽留客西江水救魚 李羣玉詩惟應孔丨丨為立鄭公鄉 又哭郴州王使君詩東山妓逐飛花散丨丨尊隨逝水空 陸龜䝉自遣詩思量丨丨徐劉軰枉向人間號酒龍 羅隠秋日泊平望寄太常裴郎中詩見東陽下 趙抃郡齋偶成詩丨丨樓前千里静南山天末四時青 蘇軾地黄詩投以東阿清和以丨丨醇 又章質夫送酒六壺書至而酒不達詩見南海下 又送曽仲錫通判如京師詩僕夫為我催歸來要與丨丨春水爭先囘 陸游初夏詩聊置尊罍師丨丨盡除屏障學東平 又石帆山下詩尚嫌名挂東林下那問塵生丨丨樽 文天祥送人往湖南詩見西川下 李俊民籌堂壽日詩此生但覺醉鄉寛誰謂螭猶丨丨蟠 趙秉文秋雨詩秋風未得乗槎便擬控扶揺丨丨鵾 耶律楚材過閭居河詩乍逺南州如夢蝶暫遊丨丨若飛鵬 虞集寄子山尚書詩丨丨春尊側西山夕閣隂 張養浩山中拜除自和詩尚友誰能追丨丨尋真吾欲候東萊 戴表元次韻焦治中雲洞紀遊詩見南樓下 呉萊寄栁博士詩丨丨誰求隠東都或對賔〉
北江〈書禹貢東為中江入於海傳有北有中南可知疏正義曰地理志云南江從㑹稽呉縣南東入海中江從丹陽蕪湖縣西東至㑹稽陽羡縣東入海丨丨從㑹稽毘陵縣北東入海 元史安南郡縣附録丨丨路在羅城東岸瀘江水分入丨丨江有六橋 明一統志丨丨在廣州府南海縣湞武二水合此湞水源自梅嶺經南雄韶州武水自臨武發源來合邐迤而下與江西合入於海 何遜道中贈桓司馬季珪詩見南浦下賈島鄭尚書新開涪江詩不侵南畆務已拔丨丨流蘇軾三月廿九日詩見南嶺下 楊萬里神堂舖前桃花詩丨丨二月正春寒初見桃花喜未殘〉
北地〈戰國䇿蘇代自齊獻書于燕王曰齊之信燕也至於虚丨丨行其兵今王信田伐與參去疾之言且攻齊使齊犬馬而不言燕今王又使慶令臣曰吾欲用所善王苟欲用之則臣請為王事之王欲醳臣專任所善則臣請歸醳事臣苟得見則盈願 又張儀說楚王曰秦舉甲出之武闗南面而攻則丨丨絶 又謂應侯曰今攻趙丨丨入燕東地入齊南地入楚魏則秦所得不能幾何故不如因而割之以為武安功 史記秦始皇紀二十七年始皇廵隴西丨丨出雞頭山過囘中焉又天官書狼丨丨有大星曰南極老人注晉灼曰丨丨近地也 又燕世家齊宣王令章子將五都之兵以因丨丨之衆以伐燕 又趙世家燕盡齊之丨丨去沙丘鉅鹿歛三百里注正義曰沙丘邢州也鉅鹿冀州也齊北界貝州也歛減也言破齊滅韓之後燕之南界秦之東界相去減三百里趙國在中間也 漢書髙后紀五年九月發河東上黨騎屯丨丨 又枚乗傳張韓將丨丨弓髙宿左右兵不得下壁軍不得大息 又李廣傳後徙為隴西丨丨雲中太守 又韓安國傳昔秦繆公都雍地方三百里知時宜之變攻取西戎辟地千里并國十四隴西丨丨是也 又東方朔傳見南獵下又衛青傳走白羊樓煩王遂取河南地為朔方郡注師古曰當丨丨郡之北黄河之南也 又霍去病傳其夏去病與合騎侯敖俱出丨丨異道博望侯張騫郎中令李廣俱出右北平異道 又兒寛傳時張湯為廷尉廷尉府盡用文史法律之吏而寛㠯儒生在其間見為不習事不署曹除為從史之丨丨視畜數年還至府上畜簿㑹廷尉時有疑奏已再見却矣掾史莫知所為寛為言其意掾史因使寛為奏奏成讀之皆服㠯白廷尉湯湯大驚召寛與語竒其材㠯為掾上寛所作奏即時得可 又傅介子傳傅介子丨丨人也注師古曰趙充國傳贊云羲渠公孫賀傳介子然則介子丨丨義渠人也又匈奴傳秦昭王時義渠戎王與宣太后亂有二子宣太后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遂起兵伐滅義渠於是秦有隴西丨丨上郡 又孝文十四年匈奴單于十四萬騎入朝那蕭闗殺丨丨都尉卬虜人民畜産甚多遂至彭陽使騎兵入燒囘中宫侯騎至雍甘泉於是文帝㠯中尉周舍郎中令張武為將軍發車千乗十萬騎軍長安旁㠯備胡寇而拜昌侯盧卿為上郡將軍𡩋侯魏遫為丨丨將軍隆慮侯周竈為隴西將軍東陽侯張相如為大將軍成侯董赤為將軍大發車騎徃擊胡單于留塞内月餘漢逐出塞即還 後漢書郭丹傳王莾徴之遂與諸生逃於丨丨 又梁統傳統髙祖父子都自河東遷居丨丨子都子橋以貲千萬徙茂陵至哀平之末歸安定 晉書盧諶傳諶名家子早有聲譽才髙行潔為一時所推值中原喪亂與清河崔悦頴川荀綽河東裴憲丨丨傅暢並淪䧟非所雖俱顯於石氏恒以為辱 宋書禮志劉禪面縛丨丨王諶哭於照烈之廟又符瑞志太康四年十一月癸未白兎見丨丨富平南史傅昭傳昭字茂逺丨丨靈州人晉司𨽻校尉咸七世孫也 元史世祖紀禁民間賭博犯者流之丨丨水經河水又北過丨丨富平縣西注秦置丨丨都尉治縣城 寰宇記平凉府水土雜於河西人烟接於丨丨 明一統志丨丨慶陽府郡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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