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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北) 3

by 쥐눈이 2026. 4. 18.

* ""에 딸린 글자들, 말하자면 北海北地들들에 대한 고대 중원의 자료를 번역해 보았다. 어정병자류편은 하나의 옛 백과 사전이다. 청나라 때 장정옥(張廷玉)이 엮은 책이다. 이 마당에서는 " 4 8월, 북맥(北貉)과 연인(燕人)이 와서 날랜 기마(梟騎)를 전해주어 한(漢)을 도왔다. "라는 내용이 흥미롭다.

 

북계(北戒)

당서(唐書) 천문지(天文志) : 북계(北戒)는 삼위(三危), 적석(積石)부터 종남(終南) 지맥의 음(: 산의 북쪽과 강의 남쪽을 이라 한다)을 등지고서 동쪽으로 태화(太華)에 미치며 하()를 넘어 뇌수(雷首), 저주(底柱), 왕악(王屋), 태항(太行)을 아우르고서 북쪽으로 상산(常山) 오른쪽에 다다라, 그예 동쪽으로 새원(塞垣 ?)을 따라서 예맥(濊貊), 조선(朝鮮)에 이르니 이를 북기(北紀)라 한다. 이것으로 융적(戎狄)과 경계를 짓는다.

운급칠첨(雲笈七籖) : 직녀수관(織女水官)은 신지(神芝)를 가져다줄 수 있으니 이를 먹으면, 수명이 하늘땅과 더불어 끝이 없다. 전사수관성(傳舍水官星)은 천부(天符 : 하늘의 명령을 담은 부절)를 주관하니 남계성(南戒星)은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북계수관성(北戒水官星)은 아침에 말이 되고 낮에는 사슴(鹿)이 되며 저녁에는 노루()가 된다.

[태화산 : 華山을 말하며 중원(中原)에서 서악(西岳)에 해당한다. 산시성(陝西省) 화음시(華陰市)에 있다.]

 

북변(北邊)

사기(史記) : ()이 흥기한 뒤, 제후 연표(諸侯年表)에서 남변(南邊) 밑에 보인다. 

평준서(平凖書) : 흉노(匈奴)가 자주 북변(北邊)을 침범해 도적질하자 주둔하며 수자리 서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니, 변방에 곡식이 배급할 양이나 먹을 양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식량을 헌납하고 변방까지 식량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백성들을 모아 벼슬()에 제수하였는데 벼슬()이 대서장(大庶長)까지 이를 수 있었다.

몽염전(蒙恬傳) () : 태사공(太史公)내가 북변(北邊)에 갔었을 적에 지름길(直道)을 밟아 돌아왔는데, 그 길에서 몽염(蒙恬)이 진()을 위해 지은 장성(長城)의 정장(亭障 : 참호 역할)을 살펴보았다. 산을 긁어내 골을 메워(壍山堙谷) 지름길(直道)를 통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백성의 노동력을 가볍게 여긴 것이다.” 하였다. 

흉노전(匈奴傳) :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夏后氏)의 자손(苗裔)이니 순유(淳維)”라고 불린다. 풀이() : 장안(張晏)순유(淳維)가 은()나라 때 북변(北邊)으로 달아났다.” 하였다.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 : 왕회(王恢)가 흉노를 마읍(馬邑)으로 유인해 섬멸하려 꾀하는 동안에, 흉노(匈奴)는 한나라와의 화친 관계를 끊고 북변(北邊)을 침입하여 소란을 피우니 군사 동원이 이어지며 전투가 그치지 않았다.

복식전(卜式傳) : ()이 제왕(齊王)의 태부(太傅)로 제수되고 몇몇 벼슬을 거쳐 상()이 되었다. 때마침 려가(吕嘉 : 南越)가 반기를 들자 식()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이 듣기에 군주()가 모욕을 당하면 신하()는 그 보복을 위해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고 합니다. 뭇 신하들은 마땅히 죽도록 절개를 지켜야 하고 재질이 떨어지거나 재능이 밑도는 사람은 마땅히 재물이라도 내어서 군대를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센 나라가 외세에게 침범 당하지 않는 길입니다. ()은 원컨대, 아들(子男)과 더불어 임치(臨菑) 땅 쇠뇌꾼(習弩)이며 박창(博昌) 땅 뱃꾼(習船)과 함께 가서 죽기로 싸워서 신의 절개를 다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 이를 현명하다 여기고 조서()를 내려 ()이 듣기에 덕()은 덕()으로써 갚고 원한은 정직()으로써 갚으라 하였다. 지금 불행히도 천하에 전쟁이 벌어졌는데도 군현(郡縣)의 제후(諸侯)들이 아직 곧은 도(直道)를 따라서 떨쳐 일어난 자가 없었다. ()의 상()이 평소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목축 짐승들이 불어나면 그 부()를 번번이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고서는 다시 자신의 업에 매진하니, 이익에 현혹되지 않았다. 얼마 전, 북변(北邊)에 전투가 있었을 때 복식이 글을 올리고 자기 재물을 덜어 관()을 도와주었다. 지난해에는 서하(西河)에 흉년이 들었는데 제()나라 사람들을 이끌고서 와서 곡식을 헌납하였다. 이제 다시 으뜸으로 떨쳐 일어나 군대를 따르고자 하니 아직 전쟁을 치르기도 전이지만, 품고 있던 의리가 겉으로 드러났다고 할만하다.” 하였다.

개관요전(蓋寛饒傳) : 신분은 사예(司隸 : 수도의 감찰관에 해당)라는 벼슬아치가 되었는데 그대는 늘 걸어 다니며 몸소 북변(北邊)을 지킨다.

공우전(貢禹傳) : 십만 명이 넘는 여러 관청의 노비들은 판판히 놀며 해야 할 일을 뭉개고 있는데 양민(良民)들에게는 세금을 부과하여 이것으로 그들에게 월급을 주고 있습니다. 그 비용이 해마다 5, 6 거만(鉅萬)이 듭니다. 마땅히 이들을 면천하여 서민(庶人)으로 만들어 먹거리를 지급하고서 관동(闗東)의 수졸(戍卒)을 대체하게 하여 북변(北邊) 정새(亭塞)에서 정찰하고 망(候望)을 보게 해야 합니다.

흉노전(匈奴傳) : 거기장군(車騎將軍)을 시켜 입말로 선우(單于)를 구슬리기를 선우(單于)는 글을 올려 북변(北邊)에 주둔하며 수자리(屯戍) 서고 있는 관리와 군사들을 파하고 자손 대대로 변방 새()를 지키기를 바랬다. 선우(單于)는 예의(禮義)를 사모하여서 백성을 위해 계책한 바가 매우 두터운데 이는 장구(長久)한 꾀()이다. 짐은 매우 갸륵하게 여기고 있다.” 하였다.  

서전(叙傳) : 우리 가문은 북변(北邊)에서 뿌리하니 뜻()이 드높고 절개()가 바르며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마음이 북받쳐 오른다(慷慨). 

후한서(後漢書) 주부전(朱浮傳) : 광무(光武)가 오한(呉漢)을 파견하여 경시(更始 : 劉玄, ?~25)가 임명한 유주목(幽州牧) 묘증(苗曽)을 주살하게 하고 곧 부()를 대장군(大將軍) 겸 유주목(幽州牧)으로 삼아 계성(薊城 : 지금 북경 근처)을 지키게 하니, 그예 북변(北邊)을 토벌하여 안정시켰다. 

황보규전(皇甫規傳) : 황보규(동한 때에 명장)가 업무를 본 지 수년, 북변(北邊)이 그 위엄에 복종하였다. 

북사(北史) () 대무제기(大武帝紀) : 여러 종족에 이러저러한 사람들 5천여 가문을 북변(北邊)으로 옮겨 살게 하였는데 이 사람들을 시켜 북쪽으로 옮겨 가며 방목하여 광한(廣漢)에 이르게 하여서 유유(蠕蠕) 겨레에 침입할 미끼를 던졌다. 

 

북새(北塞)

수서(隋書) 양제기(焬帝紀) : 대업(大業) 118월 을축(乙丑), 북새(北塞)로 순수하셨다.  

구당서(舊唐書) 왕종사전(王宗嗣傳) : 하동절도(河東節度)와 채방사(採訪使 : 당나라 때 지방 감찰 관직)을 겸하고 삭방(朔方)부터 운중(雲中)까지, 변경 수천 리를 따라가며 요해처마다에다 옛 성(舊城)을 개척하고, 더러는 스스로 만들어 내면서 땅을 개척한 것이 수백 리()였다. 명장군 장인천(張仁亶) 40여 년부터 충사(忠嗣)가 이를 잇자 북새(北塞)의 사람들은 다시 전쟁을 그치게 되었다.

역림(易林) : 사막(沙漠) 북새(北塞)는 말 그대로 물이나 풀이 없다.

수경주(水經注) : 포구수(鮑丘水)는 어이(禦夷) 북새(北塞) 안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구류장령(九流莊嶺) 동쪽을 거치니 민간에서는 대유하(大榆河)라고 이른다.

이교(李嶠)가 읊은 ()’이라는 시 : 장군(將軍)이 북새(北塞)를 내려다보니 천자(天子)가 서진(西秦)으로 들어가네 

살펴보면 새()는 선()과 대()의 반절씩이니 아래의 책과는 다르다.

 

북연(北燕)

춘추(春秋) : 소공(昭公) 3(539), 북연(北燕) 백관(伯欵)이 제()나라로 달아났다. 

좌전(左傳) : 위인(衛人)이 연()의 군대로써 정()을 벌하였다. 그 풀이()에서 남연(南燕) 아래에 북연의 말이 보인다. 

사기(史記) () 소공(召公) 세가(世家) : () 무왕(武王)이 주()를 멸하고 소공(召公)을 북연(北燕)에 봉하였다. 

진서(晉書) 제왕 경전(齊王冋傳) : 손혜(孫惠)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 굴원(屈原)은 임금의 미움을 사 유배지로 쫓겨났지만, 속마음은 임금이 계신 수도 남영(南郢)에 남아 있었고 악의(樂毅)는 조() 땅으로 내쳐졌지만, 그 뜻()은 북연(北燕)을 그리워하였다. 

북사(北史) () 명원제기(明元帝紀) : 풍발(馮跋)이 그 임금 고운(高雲 : 고구려계)을 시해하고(409) 천왕(天王)이라 참칭하며 나라 이름을 북연(北燕)이라 하였다.  

당서(唐書) 천문지(天文志) : 북하(北河)의 하류부터 남쪽의 태산(岱山)에 이르기까지가 삼제(三齊)가 되는데 오른쪽으로 갈석(碣石)을 끼고는 북연(北燕)이 된다. 

[三齊는 전국시대 때 나라의 옛 땅이었는데 교동(膠東, 당시 도읍은 즉묵(卽墨))과 제(, 당시 도읍은 임치(臨淄))와 제북(濟北, 당시 도읍은 박양(博陽))으로 나누어져서 삼제라 이름 붙였다. 한나라 때 한신이 이 땅을 정복하고서 스스로 삼제왕(三齊王)’이라 일컬었고 그 뒤에 이 삼제는 제나라 땅 전부를 일컫는 관용구가 되었다고 한다.]

재상(宰相) 세계표(世系表) : 손경인(孫敬仁)은 자()가 사화(士和)이니 북연(北燕) 사예공조(司𨽻功曹)이다.

조식(曹植) 칠계(七啟) : 군자(君子)는 장렬한 짓에 드러난 절조(奮節)를 기꺼이 하여서 의()를 밝히고 열사(烈士)는 몸이 위태로워짐을 달가워하여서 인()을 이룬다. 이 때문에 준걸이라는 사람들은 한동아리()와 사귀며 또래()와 벗을 맺고 의기(義氣)를 무겁게 여기며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상대의 베풂에 감동하여 자신까지도 버린다. 그리하여 전광(田光)은 북연(北燕)에서 칼에 기대었고 공숙(公叔)은 서진(西秦)에서 목숨을 마쳤으니 과감하며 굳세어 날래게 결단함이 범이 봄바람(谷風) 속을 걷듯, 그 위엄이 천자(萬乗)도 떨게 하니 중원(華夏)에서는 웅()이라 일컫는다. 

육기(陸機)의 한고조 공신송(漢髙祖功臣頌) : 두 주()의 어지러운 꼴을 바로잡고(肅清) 온 할거 세력(四邦)이 모두 귀의하더니 끝내 북연(北燕)이 동해(東海) 가를 차지하였다. 

하서(何胥)의 피사출관시(被使出闗詩) : 강수(絳水)는 서진(西晉)으로 통하고 기교(機橋)는 북연(北燕)임을 가리키네. 

진후주(陳後主 : 진의 마지막 임금)의 유소사(有所思) : 아름다운 사람이 북연(北燕)에 있으니 위교(渭橋) 가에서 그대를 그리네.(佳人在北燕, 相望渭橋邊)

양형(楊炯)의 유소사(有所思) : 천첩(賤妾)은 남초(南楚)에 붙박혀 있는데 전쟁터 간 님(征夫)은 북연(北燕)으로 떠나는구나.

 

북평(北平)

서경() 우공(禹貢) : 오른쪽으로 갈석을 낀다.(夾右碣石) 풀이() : 갈석산(碣石山)은 북평(北平) 여성현(驪城縣) 서남쪽에 있으니, 갈석은 해반산(海畔山 : 바닷가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 됨이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 중산국(中山國) () 북평(北平).

율력지(律歴志) : ()이 흥기하고 한창 기강이 크게 터를 잡으며 뭇 일이 처음으로 시작되자 진()의 정삭(正朔)을 이어 썼으니, 북평후(北平侯) 장창(張蒼)이 말한 전욱력(顓頊歴)은 육력(六歴 : 여섯 가지의 고대 이니 황제(黄帝), 전욱(颛顼), (), (), (), ()이 그것이다)에서 따지자면 정밀하지 못한 가운데에 그나마 가장 미세하게 가깝다고 하였음이라. 그러나 새해 시작(正朔)과 우리 왕조의 상징색(服色)이 아직 그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여 초하루와 그믐(朔晦)에 달이 보이거나 상현 하현 보름(弦望)에 달이 차거나 이지러지는 등 대부분 천문과 맞지 않았다. (服色은 한 왕조의 상징 색깔을 따르는데 黄帝土德으로 을 숭상하였고 木德으로 을 숭상하였으며 金德으로 을 숭상하였고 火德으로 을 숭상하였다. 水德으로 을 숭상하였다. 은 복색이 여러번 바뀌어 한고조는 을 숭상하였다가 으로 바뀌었고 한문제는 土德을 위하기로 하여 을 숭상하였으나 아직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으며 한무제 때 土德을 위하며 黃色을 숭상하기로 확정하였다. 東漢 明帝 永平 2년에 복식 제도를 제정하였다.)

[전욱력(顓頊曆) : 전욱력(顓頊曆)은 진조(秦朝)의 역법(曆法)으로 이는 중원의 옛 육력(古六曆)에 하나이다. 전해지기로는 전욱력(顓頊曆)”은 주조(周朝) 말기에 벌써 제정되었고 진() 헌공(獻公) 19(기원전 366)에 완성되어 진시황이 육국(六國)을 통일한 뒤에 전국에 반포해 돌렸다. 해당 역()이 채용한 것은 197윤법(十九年七閏法 : 19년 동안 7번의 윤달을 두는)으로 한 번 회귀한 해()365에다 1/4(따라서 이는 일종에 사분력(四分曆))이 되며 일삯망월(一朔望月 : 한 번 달이 차고 기움)29에다 499/940( 29 + (499 ÷ 940) = 대략 29.53085일이라 함)이니 시월(十月)을 한 해의 시작(歲首)으로 삼아 윤월(閏月)은 구월(九月) 뒤로 두어 후구월(後九月)’이라고 일컬었다. 시월(十月)은 마찬가지로 시월(十月)이라 일컫고 일월(一月)이라든지 정월(正月)이라고 고쳐 부르지 않았다. 단월(端月 : 곧 일월(一月))은 원래 입춘(立春)의 달이고 이십사절기의 시작점이다. 말에 따르면, 진시황의 이름을 피하여 단월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진시황의 본명은 영정(嬴政)으로 은 소리가 같아 正月端月로 바꾸었다는 말) 전욱력(顓頊曆)은 진시황 26년부터 한무제(漢武帝) 태초(太初) 원년(元年 : 기원전 104)까지 모두 117년 동안 유행하였다.

전욱력(顓頊曆)은 기원전 366년부터 기원전 104년까지 모두 262년 동안 사용되었다. 서한(西漢)이 세워진 뒤에도 그대로 이 역()이 쭉 사용되었다. 다만 일백 년 넘게 사용한 뒤에 오차가 조금씩 커져 삯일(朔日)에 달이 보이거나 한 해의 시작(歲首)과 사계절의 순서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따위에 문제가 농업 생산에 불편을 초래하게 되었다. 한무제 원봉(元封) 7, 사마천 들 몇몇이 역()을 고치자고 건의하고 최종적으로 등평(鄧平)들이 만든 팔십일분율력(八十一分律曆)을 선정하고 연호를 고쳐 태초(太初) 원년(元年)이라 하였으니 새로운 역()을 태초력(太初曆)이라 일컬었다. 태초력(太初曆)은 정월(正月)을 고쳐 세수(歲首)라 하였고 아울러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를 역법(曆法)에 포함 시켰다. 顓頊曆 : 顓頊曆秦朝曆法是中國古六曆之一相傳顓頊曆在周朝末期已經制定完成於秦獻公十九年公元前366),秦始皇統一六國後頒行全國該曆采用的是十九年七閏法一回歸年爲3651/4所以是一種四分曆),一朔望月爲29499/940日以十月爲歲首閏月放在九月之後稱後九月十月同樣稱爲十月不改稱一月或正月端月即一月原是立春之月二十四節氣起點據說因秦始皇避諱而改稱端月顓頊曆自秦始皇二十六年至漢武帝太初元年公元前104共行117

顓頊曆從公元前366年到公元前104年共行用262西漢建立後仍沿用此曆但使用一百多年後誤差逐漸增大朔日見月歲首與四季順序不符等問題給農業生產帶來不便漢武帝元封七年在司馬遷等人建議下改曆最終選定鄧平等所造八十一分律曆改年號爲太初元年新曆稱太初曆》。《太初曆改以正月爲歲首並將二十四節氣納入曆法 (출처 바이두)]

 

한안국전(韓安國傳) : 안국(安國)은 재관장군(材官將軍)이 되어 어양(漁陽)에 주둔하며 흉노 포로(生口)를 잡았는데 이들이 흉노(匈奴)가 멀리 갔다.” 말을 하니 바로 말씀을 올리기를 한창 농사철이라 우선 병사들의 주둔을 멈추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군대 주둔을 멈춘 지 한 달 남짓, 흉노가 상곡(上谷)과 어양(漁陽)에 대거 들어오니 안국(安國)이 진지를 지키다가 끝내 7백여 사람을 데리고 나가 흉노와 싸웠다가 안국이 상처만 입고 진지로 들어왔다. 이때 흉노가 얼추 천여 사람과 가축들을 사로 잡아갔다. ()이 노하여 사신을 보내 안국을 질책하며 꾸짖고서 안국을 더 동쪽으로 옮겨 우북평(右北平)에 주둔하게 하였다. 

[材官將軍 : 임시직 장군으로서 전쟁이 나면 군국의 용맹한 재관들을 거느리고 출정했다가 군대가 돌아오면 그 직을 줄였으니 애초에 군사 사무를 맡았다. 재관장군직의 설치는 가관(加官, 본직 외에 추가로 받는 관직)의 성격과 국가 토목 공사를 담당하는 기구의 직이라는 두 가지 흐름으로 발전해 나갔다고 한다]

이광전(李廣傳) : 장군은 장차 군사를 이끌고 수레를 동쪽으로 향해 가서 백단(白檀 : 우북평에 속한 )에서 조금은 편안한 모습(彌節)으로 우북평(右北平)에 무르익을 가을(盛秋 : 말이 살찔 계절이라 흉노가 변방을 침입함을 하니 이광이 이를 막아내야 함을 말한다)을 마주하라. 

흉노전(匈奴傳) : () 역시 장성(長城)을 쌓았고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어서 호()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원사(元史) 세조기(世祖紀) : 무오(戊午)에 북평왕(北平王) 낙목환(諾木歡)에게 군마(軍馬) 12991, 61531과 제왕(諸王 : 원나라 귀족 봉호) 탑제이(塔齊爾) 군대의 폐백(幣帛)을 하사하였다. 

지리지(地理志) : 완주(完州) : () 때에는 북평현(北平縣)이 되어 정주(定州)에 예속되었다가 송() 때 북평군(北平軍)으로 승격되었다. () 때 영평현(永平縣)으로 고쳤고 다시 완주(完州)로 바뀌었다. ()나라 지원(至元) 2년 영평현(永平縣)으로 고친 뒤에 완주(完州)로 회복되었다. 

명일통지(明一統志) : 북평(北平)은 영평부(永平府)의 군() 이름이다. 

북평산(北平山 : 지금 사천성 미산시에 있다) : 미주(眉州) 팽산현(彭山縣) 서북 30리에 있다. 산 위에 천주봉(天柱峰)이 있어 밤에 오색(五色)의 신등(神燈)이 보이는데 그 숫자를 알지 못한다. ()나라의 장도릉(張道陵 : 道敎의 실질적 창시자)이 이곳에서 도를 터득하였다.

북평관(北平觀) : 북평산(北平山)에 있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장도릉(張道陵)이 촉() 땅에 명산이 많다는 말을 듣고서 가족을 이끌고 와서 유람하다가 북평(北平)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나라 초기에 관()을 짓고 영락(永樂) 초반에 중수하였다. 

북평성(北平城) : 순천부(順天府) 계주(薊州)에 있다. 전해지기를 한()의 장수 이광(李廣)이 사냥을 나갔다가 해거름에 바위()을 마주하였는데 이를 엎드려 있던 범(伏虎)이라고 여겨 활로 쏘았고, 화살이 바위로 들어가 살 끝 깃털이 보이지 않았다(没羽) 함이 이것이다.

 

북가(北假)

사기(史記) 진시황기(秦始皇紀) : 몽염(蒙恬)을 시켜 하()를 건너가 고궐도산을 취하게 하였다. 풀이() 정의(正義) : 역원(酈元)이 수경(水經)을 풀이하여 말하기를 황하(黄河)가 하()가 지나는 목현(目縣)의 옛 현(故縣) 서쪽을 거치는데 이 현()은 북가(北假) 안에 있다. 북가(北假)는 땅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진작(晉灼)왕분전(王莾傳)에 오원(五原) 땅에 북가(北假)는 흙이 걸어서 곡식을 심는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색은(索隠)북가(北假)는 땅 이름이니 오원(五原) 가까이에 있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 : 뒤에 진()이 육국(六國)을 멸하고 시황제(始皇帝)가 몽염(蒙恬)을 시켜 수십만의 군인을 이끌고 북쪽으로 호()를 쳐서 하남(河南) 땅을 다 거두어들여 하()를 요새()로 삼아서 44(縣城)을 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짓고서는 죄를 짓고 변방에 수자리 살게(適戍) 된 사람들을 옮겨서 현성(縣城)들을 채우게 하였다. 지름길(直道)을 통하게 하였으니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까지, 변방 산들은 험한 진지나 산골짜기 중에 손 볼만한 것은 지세를 따라서 손을 보았다.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까지 만여 리()였다. 다시 하()를 건너 양산(陽山) 북가(北假) 안 땅을 틀어쥐었다.

  

북상(北商)

송서(宋書) 주군지(州郡志) : 북상락(北上洛) : () 효무(孝武)가 세웠다. 상락(上洛), 북상(北商), 풍양(酆陽), 양정(陽亭), 북거양(北拒陽) 다섯 현()을 거느린다.

송사(宋史) 식화지(食貨志) : 함평(咸平) 5(五年), 거란(契丹)이 관청()을 다시 설치하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송나라 조정에서 의논 끝에 거란이 번복을 잘한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는데 지웅주(知雄州 : 는 맡을 ) 하승구(何承矩)가 계속 청하여 마침내 웅주(雄州)에 관청을 설치해주기로 하였다. 6년에 문을 닫았다가 경덕(景徳) 초기에 다시 우호 관계를 회복하고 거란(요나라)이 장사 거래를 요청하니, 곧 송나라 정부는 변경 지역인 신성(新城)에 무역을 하게 하되 조서를 내려 북상(北商 : 송나라가 요나라를 北朝라 불렀으니, 곧 북조의 상인을 말한다 함)이 물화(物貨)를 싸서 변경에 이르면 무역을 허락한다.’ 하였다. 2년 웅주(雄州), 패주(霸州), 안숙군(安肅軍) 세 군데 확장(𣙜場 : , , , 시대 때 국경에 설치한 공식 무역 장소)을 설치하였고 북상(北商) 중에 다른 길을 따르는 경우(비공식, 말하자면 밀매를 말한다 함) 이 확장에 참여하여 매매를 못 하게 하였다.

 

북풍(北豐)

송서(宋書) 고구려전(髙句驪傳) : ()이 죽자 아들 홍(𢎞 : 북연(北燕)의 마지막 왕 풍홍(馮弘))이 섰는데 여러 번 색로(索虜 : 남북조 시대 때 南朝北朝, 곧 북위에 대해 일렀던 멸칭. 북방 겨레들이 대부분 머리를 땋아서 뒤로 늘어뜨렸던 데에서 나온 말. 宋書들에서 이 말을 즐겨 썼다 함)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홍을 항복시킬 수 없었다. 원가(元嘉) 15(438. 원가는 남조 유송(劉宋)3대 황제인 문제(文帝)의 연호), 다시 색로(索虜)에게 공격 당하자 홍(𢎞)은 패주하여 고려(髙驪) 북풍성(北豐城)으로 달아나더니 유송(劉宋)의 문제(文帝)에게 표()를 올려 자신을 맞이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태조(太祖 : 文帝의 묘호)가 왕백구(王白駒), 조차흥(趙次興)을 사신으로 보내 이를 맞이하게 하였다. 

북사(北史) 풍발전(馮跋傳) : (𢎞)이 요동(遼東)에 이르자 고구려(髙驪)가 사신을 보내 이를 위로하며 용성왕(龍城王) 풍군(馮君)께서 이렇게 우리 땅에서 머물게 되었으니 군사와 말들이 수고롭습니다!” 하니 홍(𢎞)이 부끄럼과 노기에 제도(: 천자의 명령. 곧 자신이 천자임을 말한 것이라 함)에 맞추어 답하여 이를 꾸짖었다. 고려(髙驪)가 그예 홍을 평곽(平郭)에 살게 하다가 얼마 뒤 북풍(北豐)으로 옮겼다.

 

북맥(北貉)

한서(漢書) 고조기(髙祖紀) : 48, 북맥(北貉)과 연인(燕人)이 와서 날랜 기마(梟騎)를 전해주어 한()을 도왔다. 풀이() :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북맥(北貉)은 나라이다.” 하였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은 동북방(東北方) 삼한(三韓)의 무리이니 모두 맥()의 유()이다.

 

북도(北都)

북사(北史) 송변전(宋弁傳) : 효문(孝文)이 북도(北都)에서 인재를 선발할 때, 이충(李冲)이 크게 이에 참여하였는데 송씨(宋氏)를 억누르니 변()이 충()에게 한을 품었다. 변이 이표(李彪)와 교유를 맺었으니 평소 서로 지극히 소중하게 여겼다. ()가 충()과 맞서게 되었을 때, ()이 표()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개()와 같을 따름이다. 남에 꼬드김이나 당한다.” 하였다. ()이 표()를 탄핵하기에 이르렀지만, 큰 죄를 피하게 되었음에는 변()의 힘이었다.

한기린전(韓麒麟傳) : 오늘날 벌이고 있는 요역(徭役)은 마땅히 일찍 그쳐야 하며 낙경(洛京)은 마땅히 어서 완성해야 합니다. 비용을 줄이면 요역은 간결해질 것이며 공사를 하나로 모아(并功) 하면, 낙경(洛京)은 쉽게 완성될 것입니다. 원컨대 빨리 북경(北京 : 平城, 지금에 山西 大同)으로 돌아가서 여러 주()의 각종 비용(供帳)을 줄인다면 남주(南州 : 낙양 주변의 )는 새로 건설되는 수도 탓에 생기는 이런저런 동원(雜徭)의 번거로움을 면할 것이고, 북도(北都)는 수도를 옮기는 탓에 사람들이 강제 이주로 고향을 등지고 가족들이 서로 갈라진다는 탄식을 그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낙경(洛京 : 낙양)은 제때 완성되어, 옮겨가는 사람들도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듯할 것입니다.

오대사(五代史) : 동광(同光) 원년(元年 : 923) 11월 을사(乙巳), 북도(北都)를 회복하여 진주(鎮州)고 삼고, 태원(太原)을 북도(北都)로 삼았다.

 

 

御定駢字類編卷一百二十

  北戒唐書天文志丨丨自三危積石負終南地絡之隂東及太華逾河並雷首底柱王屋太行北抵常山之右乃東循塞垣至濊貊朝鮮是謂北紀所以限戎狄也 雲笈七籖織女水官能致神芝食之壽與天地無極傳舍水官星主天符南戒星同丨丨水官星旦為馬晝為鹿暮為麞

 

  北邊史記漢興以來諸侯年表見南邊下 又平凖書匈奴數侵盜丨丨屯戍者多邊粟不足給食當食者於是募民能輸及轉粟於邊者拜爵爵得至大庶長又𫎇恬傳贊太史公曰吾適丨丨自直道歸行觀𫎇恬所為秦築長城亭障壍山堙谷通直道固輕百姓力矣 又匈奴傳匈奴其先祖夏后氏之苖裔也曰淳維注張晏曰淳維以殷時奔丨丨 漢書食貨志及王恢謀馬邑匈奴絶和親侵擾丨丨兵連而不解 又卜式傳拜為齊王太傅轉為相㑹吕嘉反式上書曰臣聞主媿臣死羣臣宜盡死節其駑下者宜出財㠯佐軍如是則强國不犯之道也臣願與子男及臨菑習弩博昌習船者請行死之㠯盡臣節上賢之下詔曰朕聞報徳㠯徳報怨㠯直今天下不幸有事郡縣諸侯未有奮繇直道者也齊相雅行躬耕隨牧蓄番輙分昆弟更造不為利惑日者丨丨有興上書助官往年西河嵗惡率齊人入粟今又首奮雖未戰可謂義形於内矣 又蓋寛饒傳身為司隸子常步行自戍丨丨 又貢禹傳諸官奴婢十萬餘人戲遊亡事稅良民㠯給之嵗費五六鉅萬宜免為庶人稟食令代闗東戍卒乗丨丨亭塞候望又匈奴傳使車騎將軍口諭單于曰單于上書願罷丨丨吏士屯戍子孫世世保塞單于鄉慕禮義所㠯為民計者甚厚此長久之策也朕甚嘉之 又叙傳家本丨丨志節慷慨 後漢書朱浮傳光武遣呉漢誅更始幽州牧苖曽乃拜浮為大將軍幽州牧守薊城遂討定丨丨 又皇甫規傳在事數嵗丨丨威服 齊書垣崇祖傳見南向下 北史魏大武帝紀徙諸種雜人五千餘家於丨丨令人北徙畜牧至廣漢以餌蠕蠕 又宋史河渠志見南并下

  北塞隋書焬帝紀大業十一年八月乙丑廵丨丨 舊唐書王宗嗣傳兼河東節度採訪使自朔方至雲中縁邊數千里當要害地開拓舊城或自創制斥地各數百里自張仁亶之後四十餘年忠嗣繼之丨丨之人復罷戰矣 易林沙漠丨丨純無水草 水經注鮑丘水出禦夷丨丨中南流逕九流莊嶺東俗謂之大榆河李嶠詠星詩將軍臨丨丨天子入西秦 按塞先代切與下冊異

 北燕春秋昭公三年丨丨伯欵出奔齊 左傳衛人以燕師伐鄭疏見南燕下 史記燕召公世家周武王之滅紂封召公於丨丨 晉書齊王冋傳孫惠上書曰屈原放斥心存南郢樂毅適趙志戀丨丨 北史魏明元帝紀馮跋弑其主髙雲僭號天王國號丨丨 唐書天文志自北河下流南距岱山為三齊夾右碣石為丨丨 又宰相世系表孫敬仁字士和丨丨司𨽻功曹曹植七啟君子樂奮節以顯義烈士甘危軀以成仁是以雄俊之徒交黨結倫重氣輕命感分遺身故田光仗劒於丨丨公叔畢命於西秦果毅輕斷虎步谷風威慴萬乗華夏稱雄 陸機漢髙祖功臣頌二州肅清四邦咸舉乃眷丨丨遂表東海 何胥被使出闗詩絳水通西晉機橋指丨丨 陳後主有所思詩佳人在丨丨相望渭橋邊 楊炯有所思詩賤妾當南楚征夫向丨丨 李嶠奉和天樞成宴夷夏羣僚應制詩見西𡹮下李白贈宣城宇文太守詩懐恩欲報主投佩向丨丨北平書禹貢夾右碣石疏碣石山在丨丨驪城縣西南是碣石為海畔山也 漢書地理志中山國縣丨丨 又律歴志漢興方紀綱大基庶事草創襲秦正朔㠯丨丨侯張蒼言用顓頊歴比於六歴疏闊中最為微近然正朔服色未覩其真而朔晦月見弦望滿虧多非是 又韓安國傳安國為材官將軍屯漁陽捕生口虜言匈奴逺去即上言方佃作時請且罷屯罷屯月餘匈奴大入上谷漁陽安國壁廼有七百餘人出與戰安國傷入壁匈奴虜略千餘人及畜産去上怒使使責讓安國徙益東屯右丨丨 又李廣傳將軍其率師東轅彌節白檀㠯臨右丨丨盛秋 又匈奴傳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丨丨遼西遼東郡㠯備胡元史世祖紀戊午賜丨丨王諾木歡軍馬一萬二千九百九十一羊六萬一千五百三十一及諸王塔齊爾

  〈軍幣帛 又地理志完州唐為丨丨縣𨽻定州宋升丨丨軍金更為永平縣又改完州元至元二年改永平縣後復為完州 明一統志丨丨永平府郡名 又丨丨山在眉州彭山縣西北三十里上有天柱峰夜見五色神燈莫知其數漢張道陵得道於此 又丨丨觀在丨丨山太平廣記張道陵聞蜀多名山因攜家來游即丨丨居焉唐初為觀永樂初重修 又丨丨城在順天府薊州相傳漢將李廣出獵昏暮遇石謂是伏虎射之没羽即此 杜審言送崔融詩坐覺煙塵掃秋風古丨丨呉萊詠龔巖叟小兒髙馬圖詩丨丨猿臂久不侯伏波矍鑠空持矛

 

  北假史記秦始皇紀使𫎇恬渡河取髙闕陶山丨丨中注正義曰酈元注水經云黄河逕河目縣故縣西縣在丨丨中丨丨地名晉灼曰王莾傳云五原丨丨膏壤殖穀索隠曰丨丨地名近五原 漢書匈奴傳後秦滅六國而始皇帝使𫎇恬將數十萬之衆北擊胡悉收河南地因河為塞築四十四縣城臨河徙謫戍㠯充之而通直道自九原至雲陽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繕之臨洮至遼東萬餘里又度河據陽山丨丨中北藺史記六國表魏武侯十五年衛聲公元年敗趙丨丨

  北商宋書州郡志北上洛晉孝武立領上洛丨丨酆陽陽亭北拒陽五縣 又宋史食貨志咸平五年契丹求復置署朝議以其翻覆不許知雄州何承矩繼請乃聼置於雄州六年罷景徳初復通好請商賈即新城貿易詔丨丨齎物貨至境上則許之二年令雄霸州安肅軍置三𣙜場丨丨趨他路者勿與為市北鄉後漢書閻皇后紀太后欲久專國政貪立幼年與顯等定䇿禁中迎濟北惠王子丨丨侯懿立為皇帝 又漢書地理志齊郡縣丨丨

  

  北豐宋書髙句驪傳跋死子𢎞立屢為索虜所攻不能下元嘉十五年復為索虜所攻𢎞敗走奔髙驪丨丨城表求迎接太祖遣使王白駒趙次興迎之 北史馮跋傳𢎞至遼東髙驪遣使勞之曰龍城王馮君爰適野次士馬勞乎𢎞慚怒稱制答讓之髙驪乃處之平郭尋徙丨丨

  北勝元史世祖紀己亥雲南行省言金沙江西通安等五城宜依舊𨽻察罕章宣撫司金沙江東永寜等處五城宜廢以丨丨施州為丨丨府從之 又地理志丨丨府在麗江之東唐南詔時鐵橋西北有施蠻者貞元中為異牟尋所破遷其種居之號劒羌名其地曰成偈睒又改名善巨郡𫎇氏終叚氏時髙智昇使其孫髙大惠鎮此郡後𨽻大理元憲宗三年其酋髙俊内附至元十五年立為施州十七年改為丨丨州二十年升為府

 

  北貉漢書髙祖紀四年八月丨丨燕人來致梟騎助漢注應劭曰丨丨國也師古曰貉在東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

 

  北都北史魏思皇帝紀見南都下 又宋弁傳孝文丨丨之選李冲多為參預頗抑宋氏弁恨冲而與李彪交結雅相至重及彪之抗冲冲謂彪曰爾如狗耳為人所嗾及冲劾彪不至大罪弁之力也 又韓麒麟傳當今徭役宜早息洛京宜速成省費則徭役可簡并功則洛京易就願早還北京以省諸州供帳之費則南州免雜徭之煩丨丨息分析之歎洛京可以時就遷者僉爾如歸 五代史唐莊宗紀見西京下 又同光元年十一月乙巳復丨丨為鎮州太原為丨丨 謝莊舞馬賦見西坂下 白居易寄太原李相公詩聞道丨丨今一變政和軍樂萬人安 馬祖常駕發詩紫繡鸞旗不受風丨丨駕發日瞳矓 台哈布哈西湖詩見西郭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