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국부(五國部) (출처 : 성경통지 102권)
▶오국부(五國部)는 영고탑성(寧古塔城) 동북쪽에 있으니 또한 오국두성(五國頭城)이라고 한다. 요사 영위부족지(遼史營衛部族志)에 오국부(五國部)는 박화리국(博和哩國), 박락국(博諾國), 악라목국(鄂羅穆國), 이랄도국(伊埒圖國), 이륵희국(伊勒希國)이다. 요나라 성종(聖宗) 때 와서 요나라에 붙으니 성종이 그들의 본토에 살면서 동북 경계를 지키도록 명하고 황룡부 도부서사(黄龍府都部署司)에 소속시켰다. 중희(重熙) 6년(1037년)에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여 이곳을 거느리게 하였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 여진(女真) 동북쪽에 오국(五國)과 이웃하고 있다. 오국(五國)의 동쪽은 큰 바다를 접하고 있으며 이름난 새매가 나오는데, 동해에서 난 것을 해동청(海東青)이라고 한다. 요(遼)나라 사람이 이를 몹시도 사랑하여 해마다 이를 찾았던 터라 여진(女真)이 오국(五國)에 이르러 오국 부족과 전투를 벌인 다음에라야 해동청을 얻으니 그 성가심은 이루 다 말하지 못하였다.
*도부서사(都部署司) : 도부(都部)는 군사들을 통솔한다는 뜻이다. 도부서사(都部署司)는 관서 이름이다. 군사 민간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다.
欽定盛京通志 卷一百二 五國部〈在寧古塔城東北 亦曰五國頭城 遼史營衛部族志 五國部 博和哩國博諾國鄂羅穆國伊埒圖國伊勒希國 聖宗時來附 命居本土以鎮東北境 屬黄龍府都部署司 重熙六年 設節度使以領之 契丹國志 女真東北 與五國為鄰 五國之東接大海 出名鷹 自東海來者 謂之海東青 遼人酷愛 嵗嵗求之 女真至五國 戰鬬而後得 不勝其擾
▶대금국지(大金國志)에 “송나라 두 임금이 한주(韓州)에서 오국성(五國城)으로 옮겨졌다. 오국성(五國城)이란 서루(西樓) 동북쪽 천 리(里)에 있다.” 하였다.
大金國志 宋二帝 自韓州徙五國城 五國城者在西樓東北千里
북맹회편(北盟㑹編)에 “오국(五國) 동쪽이 큰 바다에 닿아있다. 이곳에서 새매 해동청(海東青)이 나는데 여진(女真)이 매번 갑옷을 입힌 말 탄 기사 천여 명을 보내어 오국(五國) 국경에 들어가 동해(東海)에 해동청 보금자리로 접근하여 이 새매를 취할 때마다 오국(五國)과 전투를 치르고 나서야만 해동청을 얻었다.
北盟㑹編 五國之東接大海 出海東青 女真毎發甲馬千餘人 入五國境 接東海巢穴取之 與五國戰鬬而後得
▶금사본기(金史本紀) ”경조(景祖) 때에 오국(五國)의 락부(諾절도사(部節度使)가 요(遼)에 반란을 일으켜 응로(鷹路)가 막히니 경조(景祖)가 습격하여 이를 사로잡았다.” 하고, 또 함옹(咸雍) 8년(1072년)에 오국 목연부(五國穆延部) 사음패륵(舍音貝勒)이 요(遼)에 반란하여 응로(鷹路)가 막히니 경조(景祖)가 이를 정벌하였다.” 하였다.
金史本紀 景祖時 五國之諾部節度使叛遼 鷹路不通 景祖襲擒之 又遼咸雍八年 五國穆延部舍音貝勒叛遼 鷹路不通 景祖伐之 舍音敗走
▶원일통지(元一統志)에 “개원로(開元路)는 삼경(三京)의 옛땅이자 오국(五國)의 옛성(舊城)이니 동북에 한 큰 도시이다. 또한 혼동강(混同江)이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 발해(渤海)의 건주(建州)를 거쳐 서쪽으로 흘러 50 리(里)를 가다가 여러 강물과 만나 동북쪽 상경(上京) 아래로 흐르다 오국두성(五國頭城) 북쪽에 도달한다. 다시 동북쪽으로 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개원로(開元路) : 개원로는 원나라 때 행정 구역이다. 개원로는 옛 숙신의 땅으로 수나라와 당나라 때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이라 하였다. 개원로는 고려 윤관의 동북9성과도 관련이 깊은 행정 구역이다.
*삼경고국(三京故國) : ①발해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 지금 영안현(寧安縣) 발해진(渤海鎮)), ②금나라 때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 : 지금 하얼빈시(哈爾濱市) 아성구(阿城區) 백성(白城)), ③동하(東夏 : 발해 뒤에 있었던 나라, 1215~1233년에 존재) 때에 남경(南京 : 연길시 성자선(城子山))
*오국(五國) : 부아리(剖阿里)는 지금 러시아 합파라부사극(哈巴羅夫斯克 하바로브스키) 반노리(盆奴里)는 지금 탕원현(湯原縣) 영역 안, 쌍하촌(雙河村) 남고성(南古城)이고 오리미(奧里米 )는 지금 타빈현(綏濱縣) 영역 내, 송화강 북쪽 기슭에 오래하(敖來河) 반고성(畔古城)이며 월리독(越里篤)은 지금 화천현(樺川縣) 동북 만리하촌(萬里河村)이고 월리길(越里吉)은 지금 의란현성(依蘭縣城) 북쪽 송화강 남쪽 기슭이라 한다.
元一統志 開元路 三京故國 五國舊城 東北一都㑹也 又云混同江發源在長白山 北流經渤海建州西五十里 㑹諸水 東北流上京下 達五國頭城北 又東北注于海
▶명일통지(明一統志) : 오국두성(五國頭城)은 만리위(萬里衛) 북쪽 천 리(里)에 있다. 이로부터동쪽에서 오국(五國)으로 나뉜다. 옛날 전해 온 말이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이곳에 묻혔다’ 하고 고사기호종록(髙士竒扈從録)에 ‘영고탑(寧古塔) 동쪽에서 6백 리(里)를 가면 장도리갈선(章圖哩噶善)이라 부르는데 송화와 흑룡 두 강이 이곳에서 모여 흘러가고 이곳에 큰 토성有(土城)이 있는데 어떤 이는 이곳을 오국성(五國城)이라고 한다.
明一統志 五國頭城在萬里衛北一千里 自此而東分為五國 舊傳 宋徽宗𦵏于此 髙士竒扈從録 自寧古塔東 行六百里 曰章圖哩噶善 松花黒龍二江合流于此 有大土城 或云五國城
▶살펴보면 오국성(五國城)에 대한 주장들은 한결같지 않아서 어떤 이는 ‘영고탑(寧古塔) 동쪽 송화(松花)와 흑룡(黒龍) 두 강이 하나의 강이 되는 곳에 토성(土城)이 있다.’ 하고 어떤 이는 ‘조선(朝鮮) 북쪽 경계, 영고탑(寧古塔) 가까이에 옛성(故城)이 산 위에 있다.’하며 어떤 이는或연경(燕京 : 북경)과 거리가 3천 8백 리(里) 서쪽이고 황룡부(黄龍府) 2천 1백 리(里)에 이른다.’ 하였고 어떤 이는 ‘영고탑(寧古塔)과 가까운 창두가(搶頭街)에 옛 성터 다섯이 있으니 아마도 바로 이곳이다.’ 하였다. 금 태종 본기(金太宗本紀)에서 언급한 ‘천회(天㑹) 6년(1128년) 徙혼덕공(昏徳公 : 송나라 휘종)과 중혼후(重昏侯 : 송나라 흠종)을 한주(韓州)에 옮겨 살게 하고 8년에 다시 호이합로(瑚爾哈路)에 옮겼다’ 함을 근거로 한다면 사실 영고탑(寧古塔) 땅에 있다. 송사(宋史)에서 한주오국성(韓州五國城)라고 일컬었는데 한주(韓州)와 오국성(五國城)을 잘못 합하여 한 지역을 만들었고 다만 여러 책은 모두 대략적 말일 뿐 사실에 따른 근거는 아직껏 없었다.
按五國城之説不一 或謂寧古塔東 松花黒龍二江 合江之處有土城焉 或以為在朝鮮北境 近寧古塔有故城在山上 或以為去燕京三千八百里 西至黄龍府二千一百里 或謂寧古塔相近搶頭街有舊城址五 疑即是也 據金太宗本紀云 天㑹六年 徙昏徳公重昏侯于韓州 八年再徙瑚爾哈路 則實在寧古塔地 宋史 稱韓州五國城 誤合為一地 第諸書 皆約略之辭 未有實據
▶지금 삼성(三姓) 지방에 오국성(五國城) 유적이 있다.
今三姓地方有五國城遺址
▶오국(五國)에 하나인 박화리(博和哩)는 국어해(國語解)에 길림산천권(吉林山川卷)에 보인다. 원래는 부아리(剖阿里)라고 써 있다. 국어(國語: 곧 만주어, 여진어) 박약(博諾)은 ‘우박(雹)’이라는 뜻이니 원래는 분노리(盆奴里)라고 써 있고, 또한 포섭(蒲聶)라고도 한다. 몽고어 악라목(鄂羅穆)은 ‘나루터(渡口)’라는 뜻이고 원래 오리미(奥里米)라고 써 있다. 이랄도(伊埒圖)는 몽고어이니 국어해 명환권(名宦卷) 3에 보인다. 원래는 월리독(越里篤)이라 써 있다. 오국 다섯 째 이륵희(伊勒希)는 국어해(國語解) 인물권(人物卷) 2에 보인다. 원래 월리길(越里吉)이라고 쓴다.
목연(穆延)은 팔기성(八旗姓 : 목연은 만주족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으로 원래는 문연(文撚)이라고 써 있다. 사음(舍音)은 국어해(國語解) 인물권(人物卷) 3에 보인다. 원래 사야(謝野)라고 써 있다. 장도갈선(章圖噶善)은 원래 강도리갈상(𦍑突里噶尚)이라고 써 있는데 지금 모두 가려 고쳤다.
博和哩 國語解見吉林山川卷 原作剖阿里 國語 博諾 雹也 原作盆奴里 亦作蒲聶 䝉古語 鄂羅穆 渡口也 原作奥里米 伊埒圖 䝉古語 解見名宦卷三 原作越里篤 伊勒希 國語解見人物卷二 原作越里吉 穆延八旗姓 原作文撚 舍音 國語解見人物卷三 原作謝野 章圖噶善原作𦍑突里噶尚 今俱譯改
2. 호이합하(瑚爾哈河) (출처 : 대청일통지 45권)
▶영고탑성(寕古塔城) 동남쪽에 있다. 상류는 륵부선하(勒富善河)에서 북쪽으로 흐르다 동쪽으로 꺾여 여러 물줄기와 만나 하나가 된다. 다시 동북으로 꺾여 흐르다 이등호수(爾騰湖)를 만나고 다시 이 호수의 법고(法庫) 동쪽에서 흘러 옛 회령성(㑹寕城) 북쪽을 거쳐서 90여 리(里)를 흘러 영고탑성(寕古塔城) 남쪽을 휘감다가 다시금 꺾여서 북쪽으로 흘러 70여 리(里)에 가서 혼동강(混同江)에 들어간다.
欽定大清一統志 (四庫全書本)/卷045 瑚爾哈河〈在寕古塔城東南 上流自勒富善河 北流折東 㑹諸水為一 又折東北 㑹爾騰湖 又自湖之法庫東流 經故㑹寕城北 又九十餘里 繞寕古塔城南 復折而北流 七百餘里入混同江
▶당(唐)나라 때, 이 하천을 호이한하(呼爾罕河 : 영고탑 지역 하천이니 옛날에 호리개(胡里改)라고도 함)라 하고 발해(渤海) 때에는 임금 대씨(大氏)가 호이한주(呼爾罕州)를 설치하였는데 이 물 이름을 가지고서 이름을 지었다. 신당서(新唐志)에 ‘발해의 왕성(王城)이 이한해(爾罕海)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金)나라 때 금수(金水)라고도 하였는데 민간에서 말하기를 금(金)은 만주어(여진어)로 ‘애신(愛新)’이니 이곳에 물이 근원하기 때문에 이 하천을 금원(金源)이라고 하고 이로 인해 금나라가 나라를 세운 이름을 금(金)이라고 하였다 한다.
명(明)나라 때 다시 이를 호이해하(呼爾海河)라고 하였다. 명통지(明統志) 호이해하(呼爾海河) 개원성(開原城) 동북쪽 1천 리(里)에 있다. 수원은 담주성(潭州城) 동쪽 여러 산에서 나온다. 북쪽으로 흐르다가 송화강(松花江)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통지(通志)를 살펴보면 이 하천을 화라갈강(和囉噶江)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금사(金史)를 살펴본다면 상경(上京)은 애신수(愛新水)의 옆에 있다. 지금, 이 하천은 옛 회령성(古㑹寕城) 가까이에서 감돌고 있어 정사(亭榭) 유적 터가 여전히 하천 곁에 남아있다.
*당나라에서 홀한수(忽汗水)라고 적고 금나라에서는 활라해천(活羅海川), 원나라에서는 호리개강(胡里改江), 명나라에서는 홀이해하(忽爾海河)라고 적었다 한다. 지금 흑룡강성 동남쪽 송화강 지류인 무단강(牡丹江)이다. 또한 홀한수(忽汗水)가 음이 바뀌어서 호이합하(虎爾哈河), 호이합(湖爾哈), 부이한(富爾翰), 화아합(火兒哈)이라는 이름도 있다. 옛날에 경박호 위쪽을 무단강(牡丹江)을 무단(牡丹)이라 불렀고 그 아래쪽을 호이합(虎爾哈)이라 불렀다 한다.
唐時 謂之呼爾罕河 渤海大氏置呼爾罕州 以此水為名 新唐志 渤海王城臨呼爾罕海 是也 金時 又名金水 俗謂金為愛新 以水源於此 謂之金源 因建國號曰金 明時 又謂之呼爾海河 明統志 呼爾海河在開原城東北一千里 源出潭州城東諸山 北流入松花江 即此 按通志 以此河為和囉噶江 今考金史 上京在愛新水之旁 今此河近繞古㑹寕城 亭榭遺址猶存水側
▶당 시대 때, 발해(渤海)의 상경(上京)은 호이한하(呼爾罕河) 동쪽에 있어서 거리를 따져보면 지금 영고탑(寧古塔) 지역에 있다. 나아가 호이한(呼爾罕)과 호이합(瑚爾哈)과 음이 서로 가까워 이 하천은 곧 당(唐) 시대에 호이한하(呼爾罕河)이고 금(金)나라 때는 애신수(愛新水)임은 의심이 없다. 아마도 화라갈강(和囉噶江)은 바로 지금에 오소리강(烏蘇哩江)이지 이 호이합하(瑚爾哈河) 물이 아니다.
唐時 渤海上京在呼爾罕河東 以道里計之亦在今寧古塔 且呼爾罕與瑚爾哈音相近 此河 即唐時呼爾罕河 金時愛新水 無疑 其和囉噶江 乃今之烏蘇哩江 非此水也
▶명통지(明統志)에 호이해하(呼爾海河) 외에 다시 호이한하(呼爾罕河)와 금수하(金水河) 실려있는데 이 역시 잘 못 되었다.
*명통지(明統志)는 명일통지(明一統志)라고도 하는데,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명일통지에서 호이해하(呼爾海河)나 호이한하(呼爾罕河)를 찾지 못하였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도 있는데 두 책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明統志 於呼爾海河外 又載呼爾罕河與金水河 亦誤
▶방여기요(方輿紀要)에 또한 금수하(金水河)가 서북쪽으로 흘러 래류수(來流水)와 만나 하나가 된다. 래류수(來流水)는 수원이 삼위(三衛) 마우산(馬盂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황룡부(黄龍府) 동쪽에 이르고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다 여진(女眞) 영역으로 들어가 금수하(金水河)에서 만나 동북쪽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간다. 이제 살펴보면 마우산(馬盂山)은 대령위(大寕衞)에 있어 영고탑(寕古塔)과 거리가 매우 멀다. 그 물이 무슨 연고로 합쳐 흐르겠는가? 대체로 요사(遼史)와 금사(金史) 속 두 나라의 지리지 모두 래류하(來流河)가 있지만 이에 대해 헤아려 볼 설명이 없어 가름할 수가 없다. 호이한(呼爾罕)은 옛날에 홀한(忽汗)이라 적었고 애신(愛新)은 옛날에 안출호(按出虎)라고 적었는데 지금 고친다.
方輿紀要 又謂金水河西北流 與來流水合 來流水源出三衛馬盂山 東流 至黄龍府東 又東南流 入女真境 㑹金水河 東北入混同江 今考馬盂山在大寕衞 去寕古塔甚逺 其水何緣合流 蓋以遼金二志皆有來流河為此 無稽之說 不足辨也 呼爾罕舊作忽汗 愛新舊作按出虎 今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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