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삼성여지도설(東三省輿地圖說) 작자 : 청(淸) 조정걸(曹廷杰 : 1850-1926년)
▶태조(太祖) 13년에 이르러서 〈송(宋) 정화(政和) 4년이자 요(遼) 천경(天慶) 4년(1114년), 이 당시에 금(金)이라는 호칭을 아직 일컫지 않았고 다음 해에서야 이름을 세우고 나라를 길렀다.〉 비로소 군대를 일으켜 요(遼)를 공격하였는데 먼저 요회성(寥晦城)에 주둔하여 여러 지역의 군사들을 모두 랍림수(拉林水)에 모이게 하였다. 〈곧 득승타(得勝陀)이다. 태조(太祖)가 진격에 앞서 군사들과 맹세 의식을 치루었으니 이때에 해당한다.〉
至太祖十三年 〈宋政和四年 遼天慶四年 是時 金未稱號 明年 始建號牧國〉 始起兵攻遼先次寥晦城諸路兵皆會於拉林水 〈 即得勝陀 太祖誓師 當在此時〉
▶태조가 영강주(寧江州)로 진격하여〈지금 오랍성(烏拉城)이다〉 요(遼)의 소오납(蕭烏納)과 고선주(高仙壽)를 싸워서 물리쳐 10월 초하루에 그 성(城)을 뽑아냈다. 철리부(鐵驪部)가 태조에게 와서 태조가 그들을 정이 담긴 마음으로 마중하였다. 요(遼)가 다시 소사선(蕭嗣先)을 보내어 주혁점(珠赫店)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주혁점(珠赫店)은 출하점(出河店 : 흑룡강 지구 서남부)이라고도 하니 곧 지금의 손찰보점(遜札堡站) 동북쪽 10여 리(里)에 주혁성(珠赫城)이니 민간에서는 주가성자(珠家城子)라 부르는데 금(金)나라 때의 조주(肇州)이다.〉 백강(白江)을 내려다 보며 〈 곧 혼동강(混同江)〉 금(金)의 군사들과 성루(壘)를 마주하고 있었다.
進軍寧江州 〈 即今烏拉城〉 遼蕭烏納高仙壽戰敗 十月朔 克其城鐵驪部來 送款 遼再遣蕭嗣先 屯兵珠赫店 〈 一名出河店 即今遜札堡站東北 十餘里 珠赫城 俗呼珠家城子 金之肇州也〉 臨白江 〈 即混同江〉 與金兵對壘
▶태조(太祖)가 요(遼)의 군대가 빙판길(凌道)을 깨고 있는 틈을 타 몰래 혼동강(混同江)을 건너 요나라 군대를 갑자기 치니 사선(嗣先)의 병사들이 무너졌다. 드디어 태조가 무리를 이끌고 전진하여 강기슭을 올라갔다. 〈 천회(天會) 8년(1130년) 태조(太祖)가 비로소 왕조의 발자취에 대한 기반을 이곳에서 다지니 주(州)를 세워 만들고서 조주(肇州 : 肇는 ‘비롯하다, 창시’를 뜻함)라 하였다.〉
太祖乘遼兵方壞凌道 潛渡混同江 掩擊之 嗣先兵潰 遂率眾進登岸 〈 天會八年 以太祖肇基王迹於此 建為州曰肇州〉
▶이때 태조가 포호(布呼) 등에게 명하여 빈주(賓州)를 공격해 뽑아내게 하였다. 〈살펴보면 원일통지(元一統志)에서 “회령부(會寧府)의 서쪽을 ‘빈주(賓州)’라 하고, 더 서쪽을 ‘황룡부(黃龍府)’라.” 하였다.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 “회령부(會寧府) 서쪽으로부터 2백5십오 리(里)를 가면 빈주(賓州)의 경계에 이른다.” 하였다. 행정록(行程錄)에서는 “황룡부(黃龍府) 동쪽을 밟아서 6십 리(里)를 가면 탁색패륵채(托色貝勒寨)에 이르고 다시 90리(里)를 가면 만제륵갈패륵채(曼濟勒噶貝勒寨)에 이르는데 길 곁에 거란(契丹)의 옛 익주(益州)와 빈주(賓州)의 빈 성이 있어서 땅에서 바라보아도 보인다. 만제륵갈패륵채(曼濟勒噶貝勒寨)는 지금 이이문하(伊爾門河)가 이통하(伊通河 : 길림 서북)가 만나는 곳의 고산둔(靠山屯) 서쪽에 있다. 만금탑(萬金塔 : 길림 농안현) 동쪽으로부터 찬찬히 살펴 20여 리(里)를 가면 길옆에 옛 성터 두 곳이 있는데 서로 거리가 서너 리(里) 정도로 ‘서소성자(西小城子)’라 하고 ‘동소성자(東小城子)’라 한다. 이곳이 바로 익주(益州)와 빈주(賓州)의 황량한 성(城)으로 알려졌다. 다시 동쪽으로 60리(里)를 가면 고산둔(靠山屯)의 서쪽에 이르고 다시 60리(里)를 가면 홍석아(紅石砑) 고루(高樓) 윗지방에 이르러 혼동강(混同江)을 앞에 둔다.” 하니 여러 책과 더불어 변방의 거리가 똑같이 합치된다.〉
是時 太祖命布呼等 攻拔賓州 〈 按元一統志 會寧府之西曰賓州 又西曰黃龍府 松漠紀聞 自會寧府西 行二百五十五里 至賓州界 行程錄 由黃龍府東 行六十里 至托色貝勒寨 又九十里 至曼濟勒噶貝勒寨 道旁有契丹舊益州賓州空城 以地望診之 曼濟勒噶貝勒寨應在今伊爾門河會伊通河處之靠山屯西 查自萬金塔東 行二十餘里 道旁有古城基二 相距數里 曰西小城子東小城子 知即益州賓州空城 又東六十里 至靠山屯西 又六十里 至紅石砑高樓上地方 臨混同江 與諸書方隅里到均合〉
▶요(遼)의 장수 철격이(徹格爾)가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오사(烏舍)와 초고이소(楚古爾蘇)가 와서 항복하였다. 철리왕(鐵驪王) 또한 거느리던 부족을 데리고 항복하였다. 오달포(烏達布)가 다시 철격이(徹格爾)와 소이소(蕭伊蘇)를 상주(祥州) 동쪽에서 물리쳤다. 〈원일통지(元一統志)에 폐지된 상주(祥州)는 빈주(賓州) 서남쪽에 있다 하는데 요(遼) 나라 때는 상주(祥州)는 서상군(瑞聖軍)으로 회덕현(懷德縣)을 거느리며 황룡부(黃龍府)에 속하였다.〉
*철격이(徹格爾) : 몽고어이니 ‘맑고 깨끗하다(潔淨)’를 뜻한다. 옛날에 적구아(赤狗兒)라고도 썼다. 徹格爾〈䝉古語 潔淨也 舊作赤狗兒 今改正〉
*초고이소(楚古爾蘇) : 몽고어이니 ‘삼나무(杉木)’를 뜻한다. 옛날에 추골실(雛鶻室)이라고도 썼다. 楚古爾蘇〈䝉古語杉木也舊作雛鶻室今改正〉
*오사(烏舎) : “가죽 오리(皮條)’를 뜻한다. 오야(烏惹), 올야(兀惹)라고도 쓰니 부족 이름이다. 烏舎 〈皮條也卷一作烏惹卷二作兀惹併改部名〉
遼將徹格爾戰敗 烏舍楚古爾蘇來降 鐵驪王亦以所部降 烏達布復敗徹格爾蕭伊蘇於祥州東 〈 元一統志 廢祥州在賓州西南 遼祥州瑞聖軍 統懷德縣 屬黃龍府〉
▶간혼(斡渾) 등의 두 지역이 항복하였다. 다음 해에 나라를 수습하였다. 원년(元年) 정월 태조(太祖)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몸소 황룡부(黃龍府)를 치고 위(威)와 상(祥) 두 주(州)를 취하였다. 〈상주(祥州)는 앞에서 다루었다. 원일통지(元一統志)에 ‘폐지된 위주(威州)는 빈주(賓州) 남쪽에 있는데 요(遼)나라 때에 설치하였는데 또한 무녕군(武寧軍)이라 하고 황룡부(黃龍府)에 속한다.’ 하였다. 이제 찬찬히 보자면, 동소성자(東小城子) 서남쪽 40리(里)에 옛성(古城)의 터가 있으니 맹가성자(孟家城子)라고 한다. 응당 바로 상주(祥州)의 옛 주춧돌이 있던 곳이고 동소성자(東小城子) 바로 남쪽 20여 리(里)에 옛 성터가 있어 소성자(小城子)라 하는데 응당 곧 위주(威州)의 옛날 주춧돌이 있는 터이다. 대체로 동소성자(東小城子)는 옛 빈주성(賓州城)이다.〉
*간혼(斡渾)과 급색(急塞) 두 지역이다. 간혼(斡琿)은 ‘냄새(𦤀)’를 뜻한다. 간홀(斡忽)이라고도 하니 지역 이름이다. 간혼(斡琿)은 간환(斡歡)이라고도 하는데 하천 이름이다. 급색(急塞)은 집책(集賽)이라고도 하니 몽고어이다. ‘순번(班次)’을 뜻한다. 급새(急賽), 홀새(忽賽)라고도 한다. 斡琿 〈𦤀也卷二作斡忽路名〉 斡琿 〈滿洲語臭也卷一百二十八作斡歡河名〉 集賽 〈䝉古語班次也卷二作急賽卷七十一作忽賽併改路名〉
*간혼하(斡琿河), 또는 간환하(斡歡河)는 간아한하(斡兒寒河)이다. 지금 몽고국 악이혼하(鄂爾渾河(Orkhon강))로 원사(元史)에 “지원(至元) 14년(1277) 탈탈목(脫脫木)의 반란을 토벌하였는데 탈탈목(탁극탁목이(托克托穆爾)라고도 함) 등을 추격하여 독올랄하(禿兀剌河)에 이르러 3일을 보내고 나서 돌아왔다. 얼마 있다가 다시 이들을 알환하(斡歡河, 斡琿河)에서 무찔렀다.”는 내용이 나온다. 《元史·土土哈傳》: 至元十四年 ,討脫脫木叛亂,追脫脫木等至禿兀剌河,三宿而後返。尋復敗之於斡歡河。
*간혼하(斡琿河)는 간아한하(斡兒寒河)라고도 한다. 간이한(斡耳罕), 간아한(斡兒罕), 간아원(斡兒洹), 간로환(斡魯歡)이라는 글자들과도 같이 쓰인다. 몽고가 제국을 이루기 전에 멸아걸부(蔑兒乞部)가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었는데 뒤에 몽고부(蒙古部) 철목진(鐵木真 곧 성길사칸(成吉思汗))에게 멸망 당하였다 한다.
*멸아걸부(蔑兒乞部) : 달단(韃靼) 15부(部)의 하나이다. 올도역(兀都亦), 매격림(梅格林)이라고도 한다. 대대로 악륵곤하(鄂勒昆河), 색릉격하(色楞格河) 사이의 가축을 방목하는 곳에서 살았다 한다.
*멸아걸석부(蔑兒乞惕部)는 10-13세기에 몽고의 고원 지역에서 살았다 한다. 가축을 방목하며 떠돌아 살면서 사슴을 길렀고 사냥을 하였다. 악이혼하(鄂爾渾河)와 색릉격하(色楞格河) 사이에서 살았다 하는데 북쪽으로는 길리길사(吉利吉斯), 독마척(秃馬惕) 등의 부족(부락)을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극렬부(克烈部), 동쪽으로는 몽고부(蒙古部)와 연달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내만부(乃蠻部 : 요사에서는 점팔갈(粘八葛), 금사에서는 점발은(粘拔恩)이라 함)가 있다. 올도역올척(兀都亦兀惕)이라고도 하고 옛날에는 멸리걸(蔑里乞), 멸리길(滅里吉), 말겁자(襪劫子)라고도 하였고 요(遼) 나라에서는 매리급(梅里急), 밀아기(密兒紀)라 불렀다.
斡渾等兩路降 明年收國 元年正月 太祖自將親攻黃龍府 取威祥二州 〈 祥州見上元一統志廢威州在賓州南 遼置亦曰武寧軍 屬黃龍府 查今東小城子西南 四十里有古城基 曰孟家城子 應即祥州舊阯 東小城子正南 二十餘里有古城基 曰小城子 應即威州舊阯 蓋東小城子 古賓州城也〉
▶태조가 익주(益州)로 진격하여 가까워지니 〈 위에 보이는 서소성자(西小城)는 곧 옛익주성(古益州城)이다.〉
進薄益州 〈 見上西小城子即古益州城〉
▶그 주(州) 사람들이 황룡(黃龍)으로 달려가 지켰다. 그 나머지 백성들을 라색(羅索)에게 딸려 붙여 잡아두게 하였다. 〈명장 라색(羅索)은 원래 루실(婁室)이라고 쓰는데 길림성(吉林城) 서북쪽 2백여 리(里) 박둔산(博屯山) 위에 매장하였다. 비석(碑)에는 제주(濟州 : 길림성 장춘시에 소재)의 동남 쪽 외진 곳으로 돌아가 묻혔다는 말이 있다.〉
*라색(羅索) : 완안루실(完颜婁室 : 1078-1131년 1월 9일 또는 1177-1130년)이다. 완안부 사람으로 금나라의 명장이자 개국공신이다. 그 조상들이 대대로 아주호수(阿注滸水 : 지금의 흑룡강 합이빈(哈爾濱) 동남쪽 아습하(阿什河))의 발원지에서 살았다고 한다. 21살 때 아버지 백답(白荅)에 이어 아달뢰(雅撻瀨) 등 칠수(七水)의 여러 부장(部長)이 되었다. 금 태조 아골타를 따라 군대를 일으키고 늘 요나라 군대를 이겼다. 마침내 천조제(天祚帝)를 여도곡(余睹谷 : 지금의 산서성 응현(應縣) 남산(南山)에 철갑령(鐵甲嶺))에서 사로잡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제주(濟州)의 오길리(奥吉里 : 지금 길림성 장춘시 삼도진(三道鎮) 석비령(石碑嶺))에 묻혔다는 말이 있다.
*백답(白荅 :白答 ) : 만주어이니 ‘밥(飯)’을 뜻한다. 백답은 포달(布達), 배답(背答), 백달(白逹), 박달(駁逹)이라고도 한다. 布逹 〈滿洲語 飯也 卷二 作背答 卷三 作白答 卷六十五 作白逹 卷九十四 作駁逹 並改〉
*라색(羅索) : 만주어이니 ‘너무 눅눅해서 밭갈이가 어려운 땅(極濕難耕地)’을 뜻한다. 락사(落思)라고도 하니 성(城) 이름이다. 루실(婁室), 또는 루숙(婁宿)이라고도 쓴다. 또 금 세종(世宗)의 아들 이름이기도 하다. 羅索 〈滿洲語 極濕難耕地也 卷一 作落思 城名〉 羅索〈滿洲語 極濕難耕地也 原作婁室 又作婁宿 今並改正〉 羅索 〈極濕難耕地也卷五十九作婁室世宗子〉
州人走保黃龍 取其餘民 以歸留羅索 〈 原作婁室 葬吉林城西北二百餘里 博屯山上 碑有歸葬濟州之東南隩一語〉
▶니마혁(尼楚赫)이 황룡(黃龍)을 지키는 동안, 태조는 병사들을 이끌고 달로갈성(達嚕噶城)으로 달려갔다.
〈달로갈성(達嚕噶城)은 달로하(撻魯河) 가까이에 있으니 곧 지금의 타라하(陀喇河 : 길림과 내몽고 구역 안에 도아하(洮儿河)) 타호성(他虎城)으로 곽이라사 전기(郭爾羅斯 前旗: 청나라 때 내몽고 기명(旗名)) 서북 경계 안에 있다. 요(遼)나라 성종(聖宗) 태평(太平) 4년(1024년) 봄 정월에 성종이 압자하(鴨子河)로 갔고 2월 기미(己未)에 달로하(撻魯河)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성종이 조서를 내려 압자하(鴨子河)를 혼동강(混同江)이라 부르게 하고 달로하(撻魯河)를 장춘하(長春河)라 부르게 하였으니 이곳이다.〉
尼楚赫守黃龍 上自率兵 趨達嚕噶城 〈 城近撻魯河 即今陀喇河之他虎城 在郭爾羅斯前旗西北界內 遼聖宗 太平四年春正月 如鴨子河 二月己未 獵撻魯河 詔改鴨子河 曰混同江 撻魯河曰長春河 是也〉
▶8월에 태조가 혼동강(混同江)에서 주둔하였는데, 배(舟)가 없었다. 태조(太祖)가 기병 한 사람을 앞에서 길라잡이를 하게 하고 붉디 흰 말(赭白馬)을 타고서 강을 바로 질러 건너며 “내 채찍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서 행군하라!” 하니 군대들이 이를 따라서 강을 건넜다.
〈입으로 이어져 온 말이 이곳이 지금에 손찰보점(遜札堡站)이니 송화강(松花江)을 건너는 곳이다. 그곳은 서남쪽으로 농안성(農安城)까지 1백 60리(里)이고 동북쪽을 아실하(阿實河)까지 3백 70리(里)이다.〉
*농안성(農安城) : 지금 농안현성(農安縣城)
*아실하(阿實河) : 아실(阿實)은 옛날에 아실(阿失)로 와전되었었다. 아실하(阿實河)는 백도눌(白都訥 : 길림 송원(松原) 북쪽) 동북쪽 4백 리에 있다.〈舊訛阿失 今譯改 案阿實河在白都訥東北 四百里〉
八月 次混同江 無舟 太祖使一騎前導 乘赭白馬 徑涉曰 視吾鞭所指而行 諸軍隨之以濟 〈 相傳即今遜札堡站 渡松花江處 其處 西南至農安城 一百六十里 東北至阿實河 三百七十里〉
▶마침내 황룡부(黃龍府)에서 이겼다.
〈 살펴보면 황룡부(黃龍府)는 옛 부여국(古扶餘國)으로 당나라 때 발해의 대씨(大氏)가 부여부(扶餘府)라고 고쳤다. 요(遼) 태조(太祖)가 발해를 평정하고 부여성(扶餘城)에 주둔하였는데 이 성(城) 위에서 황룡(黃龍)이 보인 일이 있었다. 그래서 황룡부(黃龍府)로 이름을 바꾸었다.〉
遂克黃龍府 〈 按黃龍府為古扶餘國 唐 渤海大氏改為扶餘府 遼 太祖平渤海 次扶餘城 有黃龍見於城上更名黃龍府〉
▶천권(天眷 금 희종의 첫 번째 연호) 3년(1140년) 요(遼)의 황룡부(黃龍府)를 고쳐 제주(濟州) 이섭군(利涉軍)으로 하였으니 금 태조(太祖)가 이곳에서 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대정(大定 : 세종 연호) 29년(1189년)에 융주(隆州) 이섭군(利涉軍)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정우(貞祐 : 선종(宣宗)의 연호 1213-1217년) 초에 융안부(隆安府 )로 승격시켰다.
〈 전요지(全遼志)에 “용안성(龍安城)은 일독하(一禿河) 서쪽, 금산(金山) 동쪽에 있다.” 하니 용안(龍安)은 곧 융안(隆安)의 잘못된 말이다. 일독하(一禿河)는 지금에 이통하(伊通河)이다. 성(城)은 일독하(一禿河) 서쪽 2리(里)에 있다.〉
天眷三年 改遼黃龍府 為濟州利涉軍 以太祖涉濟故也 大定二十九年 更為隆州利涉軍 貞祐初 陞為隆安府 〈 全遼志 龍安城在一禿河西 金山東 龍安即隆安之訛 一禿河今稱伊通河 城在河西二里〉
▶성(城) 둘레는 7리(里)이고 문(門)이 넷이다. 지금도 그 터는 남아있어 농안(農安)이라 이름하고 성(城) 곁에는 탑(塔)이 있는데 이 역시 농안(農安)이라고 이름한다.
〈 농안(農安)은 옛날에 농안(龍安)이라고 썼다. 명일통지(明一統志)에 “농안(龍安) 일독하(一禿河)는 삼만위(三萬衞) 서북쪽, 금산(金山) 바깥에 있다. 원나라 말에 장수 납합출(納哈出)이 군대를 나누어 삼영(三營)을 만드니 하나는 유정심처(榆井深處)라 하고 하나는 양아장(養鵝莊)이라고 하고 하나는 용안 일독하(龍安 一禿河)라고 하였다. 명나라 개국공신인 대장군(大將軍) 풍승(馮勝)이 납합(納哈) 할 때 군대를 출정시켜 금산(金山)에 주둔하고 부장(副將)을 이곳에 보내어 그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였다. 우리 조정 천명(天命 : 청나라 태조 연호) 9년(1624년)에 포목파(布木巴)가 붙이들을 이끌고 와서 스스로 따랐다. 때마침 찰합이(察哈爾) 부족의 임단한(林丹汗)이 고이심 패륵(科爾沁貝勒)을 노략질하니 아파태(阿巴泰)가 군사들을 이끌고 곽이라사(郭爾羅斯) 땅을 지나갔다. 구원병이 용안탑(龍安塔)에 이르자 임단칸(林丹汗)이 부리나케 밤에 도망을 쳤고 더는 과이심(科爾沁)을 집적대지 못하였다. 곽이라사(郭爾羅斯)의 여러 부락이 곧 이곳이다.〉
*일독하(一禿河)는 이둔하(伊屯河), 이둔하(易屯河), 역둔하(亦屯河)라고도 하고 또 일통(一統)이라고 잘못되어 용안일통하(龍安一統河)라고 쓰기도 하였다. 용안 이돈하(龍安伊敦河)라고도 한다. 동북쪽으로 흘러 송화강(松花江)으로 들어간다.
*찰합이(察哈爾)는 가장 이름이 드러난 막남몽고(漠南蒙古), 곧 내몽고의 부락 이름이다.
*과이심(科爾沁)은 지금 내몽고 자치구 통료시(通辽市)이다. 장춘시와 적봉시 사이에 있다.
*삼만위(三萬衞 ) : 옛날 부여(扶餘)의 수도(國都)인 농안현(農安縣)이다. 삼만위는 명나라에서 설치하였고 청나라 초기에는 곽이라사 전기(郭爾羅斯前旗) 땅이었다. 동쪽에는 송화강이 흐르고 남쪽에는 이통하(伊通河)가 흐르다 서북쪽으로 곽이라사 전기(郭爾羅斯前旗)로 들어간다.
城周七里 門四 今其址尚存 名農安 城旁有塔 亦名農安 〈 農安舊作龍安 明一統志 龍安一禿河在三萬衞西北 金山外 元將納哈出分兵 為三營 一曰榆井深處 一曰養鵝莊 一曰龍安一禿河 及大將軍馮勝征納哈 出兵 駐金山 遣副將於此 受其降 我朝 天命九年 布木巴率屬來歸 會察哈爾林丹汗掠科爾沁貝勒 阿巴泰率師 由郭爾羅斯境往 援至龍安塔 林丹汗倉皇夜遁 不敢復犯科爾沁 郭爾羅斯諸部即此處也〉
▶분방농안조마(分防農安照磨) 한 사람을 두고 장춘청 무민통판(長春廳 撫民通判)에 예속시켰다. 그렇다고 한다면 농안성(農安城)이 곧 옛 황룡부(黃龍府)임을 무엇보다 뚜렷하게 근거할 수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역사를 논하는 학자들로부터 해서 아직껏 그 땅을 실제로 제시하지 못하고, 나아가 어떤 이는 개원현(開原縣)에 있다(통지(通志)의 저술자) 하고, 어떤 이는 석두하(石頭河)와 쌍양하(雙陽河) 사이에 있다(양빈유변기략(楊賓柳邊紀略)의 저술자) 한다.
*분방조마(分防照磨)는 관직 이름이다. 조마(照磨)는 조쇄(照刷 : 문권 등을 꼼꼼하게 살핀다), 마감(磨勘 : 이 또한 살핀다는 뜻이 있다)을 줄여 말한 것이다. 이 분방조마는 현(縣)이 설치되지 않은 곳에 청(廳)이나 부(府)에서 내보낸 파출 관리 기구라고 한다. 주 업무는 무장 강도 떼를 체포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다.
*무민통판(撫民通判) : 관직 이름이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이어 실행한 제도로 통판(通判)은 대부분 주부(州府)의 장관을 가리키는 말로 양식운반, 농사일, 관개 수리, 송사 등을 관장하였고 관찰 업무도 있었다. 청나라 때는 관할지가 청(廳)이었고 지방에 세워진 경부(京府)나 부(府)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設分防農安照磨一員 隸長春廳撫民通判 然則農安城之即古黃龍府 蓋卓卓可據 何自來史論家未能實指其地 又或謂在開原縣境 〈 通志〉 或謂在石頭河雙陽河之間 〈 楊賓柳邊紀略〉
어떤 이는 버들가지로 울을 친 변방(柳條邊) 밖, 창도청(昌圖廳) 서북쪽에 혁이소하(赫爾蘇河 : 지금 길림성과 요녕성 사이에 동요하(東遼河)) 북쪽 강기슭에 있다(몽고유목기를 쓴 장목(張穆)) 하는데, 그러나 결국 이름난 이론의 테두리에 각각 한마디 말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이 득승타(得勝陀) 비문을 발판으로 그 내용을 끌어다 펼쳐 부디 역사를 읽어내는 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유조변(柳條邊) : 우리말로는 ‘버들가지 가, 울타리’이다. 이는 17세기 후반에 청나라 정부가 동북에 만든 둑과 참호이다. 흙을 돋워 3척(尺)가량, 곧 1미터 정도의 너비와 높이를 다독여 그 위에 버들가지를 꽂아두는데 매 5척(尺) 안에 버들가지 셋을 꽂았다고 한다. 이를 또한 ‘조자변(條子邊)’, 지금 심양인 청나라 때의 ‘성경’ 이름을 따서 ‘성경변장(盛京邊墻)’이라고도 하였다. 이 버들가지 울타리는 동쪽, 서쪽, 북쪽 세 구간이 있다.
*창도청(昌圖廳) : 지금 요녕성 철령시(鐵嶺市) 창도현(昌圖縣)이니 본래 과이심(科爾沁) 부락이 관할하였던 돌액륵극(突額勒克) 땅으로 청나라 가경(嘉慶) 12년(1807년)에 창도청을 설치하고서 봉천부(奉天府)에 예속시켰다 한다.
*득승타(得勝陀) : 지금 길림성 부여시(夫餘市) 석비외자촌둔(石碑崴子村屯) 근방에 있다.
或謂在今柳條邊外昌圖廳西北赫爾蘇河之北岸 〈 張穆蒙古游牧記〉 竟於著名之區 各執一詞耶 今因此碑引而伸之 庶幾讀史之一助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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