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국부(五國部)
1)오국부(五國部) 지역
오국부(五國部)는 요나라 때 부아리(剖阿里), 분노리(盆奴里), 오리미(奥里米), 월리독(越里篤), 월리길(越里吉) 등 다섯 부족이 살았던 곳을 통칭한 이름으로 이 다섯 곳에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여(1037년 무렵) 현지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오국부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요나라 때에는 생여진(生女眞)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부아리(剖阿里)는 박길리(博吉里), 파리(頗里), 婆里(파리)라고도 불리는데 만주어로 ‘완두콩(豌豆)’이라는 뜻이다. 이 부족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 정기리강(精奇里江)과 흑룡강이 만나는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 흑하시(黑河市) 애혼(璦琿) 동남쪽 박화리악모(博和里鄂模) 지방이다.
분노리(盆奴里)는 포노리(蒲奴里), 분눌(噴訥), 포섭부(蒲聶部), 박약(博諾), 부주리(富珠哩), 부노리(富奴里), 분노(盆奴)라고도 한다. 만주어이니 ‘우박(雹)’이라는 뜻이다. 흑룡강성 탕왕하(湯旺河) 하류, 향란향(香蘭鄉) 쌍하고성(雙河古城 : 목눌고성(木訥古城) 또한 탁온성(托溫城), 공목눌(公木訥)이라고도 함)과 의란현(依蘭縣), 동강현(同江縣), 돌사극성(突斯克城) 등지에서 살았다고 한다.
오리미(奥里米)는 오리미(奥里米) 성터로 민간에서 서고성(西古城)이라 불린다고 한다. 학강시 수빈현(鶴崗市 綏濱縣) 서쪽에 있고 남쪽으로 송화강이 있다. (부족 이름과 살았던 부락 이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월리독(越里篤)은 흑룡강 화천현(樺川縣) 동북쪽에 있다. 완돌(玩突), 월리도(越離睹)라고도 쓴다. 원나라 때는 탈간린 군민만호부(脫斡憐 軍民萬戶府), 명나라 때는 아릉참(阿陵站), 청나라 때는 완리성(完里城), 와리화둔(瓦里和屯)이라 하였다고 한다.
월리길(越里吉)는 월극(越棘), 월리노(越里奴), 이랄제(伊哷齊), 이륵희(伊勒希), 이륵제(伊勒齊), 이륵기(伊勒奇)라고도 한다. 흑룡강 동북, 모란강(牡丹江)과 송화강이 만나는 곳(흑룡강성 의란성(依蘭城) 부근)에서 살았다고 한다.
2)사료(史料)에 나타난 오국부(五國部)
▶요사(遼史)에 오국부(五國部)는 박화리국(博和哩國) 〈만주어이니 완두콩(豌豆)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부하리(剖阿里)라고도 썼다.〉과 박약국(博諾國)〈만주어이니 우박(雹)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분노(盆奴)이라고도 썼다.〉과 악라목국(鄂羅木國)〈몽고어이니 나루터(渡口)라는 뜻이다. 옛날에 오리미(奥里米)라고도 썼다. 살펴보면 영고탑(寜古塔) 동북쪽에 악라목갈산(鄂羅木噶珊)이 있다.〉과 이랄도국(伊埒圖國)〈만주어이니 ‘밝고 두드러지다(明顯)’라는 뜻이다. 옛날 월리독(越里篤)이라고도 썼다.〉과 이륵희국(伊勒希國)〈만주어이니 ‘돕다 또는 버금(副)’라는 뜻이다. 옛날에 월리길(越里吉)이라고도 썼다.〉이니 이 부족들은 요나라 성종(聖宗 재위 기간 982—1031년) 때 요나라에 와 붙었다. 이들은 본 땅의 진(鎮) 동북쪽에서 살고 있어 중희(重熈) 6년(1037년)에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여 이곳을 거느리게 하였다.
欽定滿洲源流考卷十一 : 五國部 : 遼史 五國部博和哩〈滿洲語 豌豆也 舊作剖阿里 今改〉國 博諾〈滿洲語 雹也 舊作盆奴 今改〉國 鄂羅木〈蒙古語 渡口也 舊作奥里米 今改 按寜古塔東北有鄂羅木噶珊〉國 伊埒圖〈滿洲語 明顯也 舊作越里篤 今改〉國 伊勒希〈滿洲語 副也 舊作越里吉 今改〉國 聖宗時 來附 居本土以鎮東北 重熈六年 設節度使領之
▶ 대금국지(大金國志)에 “북송(北宋)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때, 한주(韓州 : 지금 산서성 양원현)에서 오국성(五國城)으로 이주하였는데 오국성(五國城)은 서루(西樓 : 지금 내몽고 파림좌기(巴林左旗) 남파라성(南波羅城)) 동북 쪽 천 리(里)에 있다.” 하였다.
大金國志 宋二帝 自韓州徙五國城 五國城者在西樓東北千里
북맹회편(北盟㑹編)에 “오국(五國)은 동쪽으로 큰 바다가 접해있고 해동청(海東青)이 생산되어 여진이 매번 말에 갑옷을 입힌 기마 군사 천여 사람을 보내었고, 곧 오국(五國)의 땅에 들어가면 동해(東海)의 해동청(海東青) 보금자리로 나아가 이 매를 취하는데 오국(五國)과 전투를 벌이고서야만 행동청을 얻는다.” 하였다.
北盟㑹編 五國之東接大海 出海東青 女真每發甲馬千餘人 入五國界 即東海巢穴取之與五國戰鬬而後得
▶ 금사(金史)에 “경조(景祖) 때 오국(五國)의 박야부 절도사(博諾部節度使)가 요나라에 반란을 하여 응로(鷹路)가 막히니 경조(景祖)가 습격하여 이 절도사를 사로잡았다. 〈박야(博諾)는 옛날에 포섭(蒲聶)이라고 썼으니 곧 분노(盆奴)이다.〉” 하였다.
金史 景祖時 五國博諾〈舊作蒲聶即盆奴也今併改〉部節度使叛遼 鷹路不通 景祖襲而擒之
▶금사(金史)에 “요(遼) 함옹(咸雍) 8년(1072년)에 오국(五國)에 목연부(穆延部) 사음패륵(舍音貝勒)이 요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응로(鷹路)가 막혔었다. 경조(景祖)가 이들을 치니 사음(舍音)이 패주하였다.” 하였다. 〈목연(穆延)은 옛날 몰년(没撚)이라고 썼다. 팔기성씨통보(八旗姓氏通譜)에 따라 고쳤다.〉 〈사음(舍音)은 만주어이니 ‘흰색(白色)’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사야(謝野)라고도 썼다.〉
金史 遼咸雍八年 五國穆延〈舊作没撚今從八旗姓氏通譜改〉部 舍音〈滿洲語白色也舊作謝野今改〉貝勒叛遼 鷹路不通 景祖伐之 舍音敗走
▶ 원일통지(元一統志)에 “개원로(開元路)에는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와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와 남경(南京)이라는 세 수도를 두었던 발해와 금나라와 동하(東夏 : 1215~1233년까지 존립)라는 옛 나라들의 자취와 오국(五國)의 옛 성들이 있었던 곳이니, 동북의 한 도회지이다.” 하였다. 〈살펴보면 원나라의 개원로(開元路)는 그 통솔하는 바가 지극히 넓었다. 원일통지(元一統志)에 실린 내용을 근거로 보자면 장백산(長白山) 역시 이 영역 내에 있었고 동쪽으로는 사견로(使犬路)에 이르니 비단 지금처럼 일개 한 현(縣)의 땅만이 아니었다.〉
* 개원로(開元路) 남쪽에는 장백산, 북쪽으로는 경천해(鯨川海 : 지금 러시아 오호츠크해(鄂霍次克海))가 있다.
*사견로(使犬路) : 사견부(使犬部)라고도 산다. 부락 이름이다. 또한 어피부(魚皮部)라고도 한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혁철(赫哲)이나 비아객(費雅喀), 고혈도(庫頁島) 등의 사견부락(使犬部落)에 대해 두루 썼던 이름이라고 한다. 송화강 하류에 흩어져 살며 서쪽으로는 삼성(三姓 : 흑룡강 依蘭지역) 동북에서 시작하여 흑룡강 들머리와 고혈도(庫頁島)에까지 살며 물고기와 짐승잡이를 주로 살았으며 겨울이면 개들이 끄는 썰매를 타서 사견부(使犬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삼성(三姓) : 삼성은 의란합랍(依蘭哈拉)이라고도 한다. 청나라 왕조의 발상지이니 지금의 흑룡강 의란현(依蘭縣)이다. 만주어로 의란(依蘭)은 숫자 ‘3’을 뜻하고 합랍(哈拉또는 객라(喀喇))은 ‘성(姓)’을 뜻한다. 노섭갈(努葉葛) 사람, 의극륵(依克勒) 사람, 호서리 삼성혁철(湖西哩三姓赫哲) 사람이 의란현에 살았던 이유로 의란합랍(依蘭哈拉), 곧 삼성(三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혁철족(赫哲族)은 흑근(黑斤), 혁근(赫斤), 흑진(黑真), 혁진(赫真) 기릉(奇楞)이라고도 한다.〉
元一統志 開元路 三京故國五國舊城 東北一都㑹也〈案元之開元路所統 至廣 據元一統志所載 長白山亦在境内 東極於使犬路 非止今一縣地也〉
▶ 원일통지(元一統志)에 “혼동강(混同江)은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발해(渤海)의 건주(建州)를 거쳐 서쪽으로 50리에서 여러 강물을 만나 동북으로 흐르다 상경(上京) 아래를 거쳐 오국두성(五國頭城 곧 오국성)의 북쪽에 도달하고 다시 동북쪽으로 흐르다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元一統志 混同江發源長白山 北流經渤海建州 西五十里㑹諸水 東北流經上京下 達五國頭城北 又東北注於海
▶ 명일통지(明一統志)에 “오국두성(五國頭城)은 삼만위(三萬衛) 북쪽 천 리(里)에 있으니 이로부터 동쪽에서 오국(五國)으로 나뉜다. 오랫동안 전해오는 말이 ‘송나라 휘종(徽宗)이 이곳에 묻혔다.’라고 한다.” 하였다. 〈살펴보면 오국성(五國城)에 대한 이론들은 일정하지가 않다. 더러는 ‘영고탑(寜古塔) 동쪽에 송화(松花)와 흑룡(黒龍) 두 강이 만나는 곳, 이곳에 토성(土城)이 있다.’ 하고 더러는 ‘조선(朝鮮) 북쪽 경계, 영고탑(寜古塔) 가까이에 있는 산 위에 고성(古城)이 있다.’ 하고 더러는 연경(燕京 곧 북경)과의 거리가 3천(千) 8백 리(里)이니 서쪽으로 황룡부(黄龍府 지금 길림 장춘시 농안현) 2천 1백 리(里)에 이른다.’ 하고 더러는 ‘영고탑(寜古塔)과 가까운 창두가(槍頭街)에 옛 성터 다섯이 있으니 아마도 이곳이다.’ 한다. 금(金) 태종본기(太宗本紀)에서 말한 것을 근거로 보자면 천회(天㑹) 6년(1128년)에 혼덕공(昏德公: 곧 송나라 휘종(徽宗))과 중혼후(重昏侯 : 송나라 흠종(欽宗))를 한주(韓州)로 이주시키고 8년에 다시 호이합로(呼爾哈路)로 이주시켰다고 하니 그렇다면 오국성은 실제 영고탑(寜古塔)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송사(宋史)에는 ‘한주오국성(韓州五國城)’이라고 일컬었으니 잘못 합하여 한 지역으로 만들어 버렸고 다만 여러 책은 모두 간략한 말뿐이니 아직 그 실제적인 근거가 있지 않다. 지금 삼성(三姓) 지방에 이어져 내려오는 말에 ‘오국(五國城)의 유적이 있다’고 한다.〉
明一統志 五國頭城在三萬衛北一千里 自此而東分為五國 舊傳宋徽宗𦵏於此 〈按五國城之説不一 或謂寜古塔東 松花黒龍二江合流之處 有土城焉 或以為在朝鮮北境近寜古塔 有古城在山上或以為去燕京三千八百里 西至黄龍府二千一百里 或謂寜古塔相近槍頭街有舊城址五 疑即是也 據金太宗本紀云 天㑹六年 徙昏德公重昏侯於韓州 八年再徙呼爾哈路 則實在寜古塔也 宋史稱韓州五國城 誤合為一地 第諸書皆約畧之辭 未有實據 今三姓地方 相傳有五國城遺址〉
▶ 조심스레 살피자면 요(遼)나라의 동북 경계는 완안부(完顔部)와 더불어 이웃하여 백산(白山)과 흑수(黒水)는 국경 바깥에 떨어져 있더라도 국토가 서로 뒤섞여 강역이 나누어지거나 합쳐지고 있어서 역사책에서도 오히려 그 가장 사실에 가까운 증거를 헤아리는 것은 상경(上京)의 장춘주(長春州)와 동경(東京)의 영강주(寧江州)가 모두 혼동강(混同江)의 땅이라는 것이다. 장춘주는, 요나라 때에 임금의 봄 사냥(春蒐) 파납(巴納: 곧 지방이라는 뜻)이 그곳에서 있었다. 영강(寜江)은 금나라 태조가 군대를 일으키고서 제일 먼저 큰 공훈을 이곳에서 이루고 그 백성들을 어루만졌다.
*백산(白山)과 흑수(黒水) : 장백산과 흑룡강을 말하고 보통 동북 지구를 가리킨다고 한다.
謹案遼東北之境與完顔部為隣 白山黒水雖隔封外 而壤地相錯 經界分合之 故史乘尚有可稽其最近者 上京之長春州 東京之寧江州 皆混同江之地 長春州 遼時 春蒐巴納在焉 寜江則金太祖起兵首集大勲於此 按之
▶ 황여전도(皇輿全圖)에 장춘(長春)은 백도눌(白都訥) 영강(寜江)에 가까이 향해 있지만, 실제 랍림하(拉林河), 금 태조가 잠시 주둔했던 곳에 가깝다. 예컨대 황룡부(黄龍府 : 요나라 때 동경도 소속)에 빈주(賔州)나 함주(咸州) 등은 모두 큰 도시에다 요충지로 요(遼)와 금(金)나라 사이에 모든 싸움이 벌어진 구역이고, 역시 혼동강(混同江)과 서로 가까우며 여정과 거리의 길이가 여전히 모두 남아있다. 그 나머지 요주(遼州 : 압록강 북쪽, 요나라 때 동경도 소속)와 심주(瀋州 : 압록강 북쪽, 동경도 소속) 등 다양한 주(州)들은 동경(東京)이라는 지역 안배에 관계된 바 하나를 들어 걸었으나 만 가지를 빠트리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리가 지극히 멀거나, 지극히 가까운 데에 있어서 이 역시 자료들을 빌려서 살펴 알 수 있다. 요나라 때 중경(中京) 지역 같은 경우는 거리가 조금 멀어 더는 갖추어 나열하지 않았지만, 요(遼)와 금(金)나라의 옛 경계(舊界)에 대해서는 여러 책에서 여전히 그 대략을 톺아 볼 수가 있다.
*괘루(罣漏) : 괘루(挂漏). ‘挂一漏萬’의 줄임말로 ‘들어 걸은 것은 적은 반면에 빠뜨리는 것은 많다’는 뜻이다.
皇輿全圖 長春當近白都訥寜江 實傍拉林河次 若黄龍府賔咸等州 並都㑹衝要 遼金百戰之區 亦與混同江相近 行程里數具存 其餘遼瀋諸州 東京規畫所闗 不容罣漏 且里至逺近 亦藉以考見 若中京則相去稍逺 不復贅列焉 至遼金舊界 諸書尚約畧可考
▶ 요사영위지(遼史營衛志)에 실린바 아연(阿延)과 이덕(伊德) 두 부족은 대개 여진(女真)이 요(遼)나라 호적에 올린 사람들인데 오국성(五國城)에 대한 이론들은 어지러워 하나로 줄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요사(遼史)에 이들은 각각 나라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대략 영고탑(寜古塔) 동쪽에 있어 동쪽으로 큰 바다를 접하였다면 오국성(五國城)이 곧 오국((五國)이다. 지극히 먼 곳에 사람들이 모인 곳은 대체로 오국부절도사(五國部節度使)가 다스린 성이니 ‘이곳으로부터 동쪽에서 오국(五國)으로 나뉜다’ 말한 것이 사실에 가깝고 또한 영고탑(寜古塔) 영역 안을 벗어나지 않으니 애초에 굳이 옛 성터 다섯이 있고 나서야 오국성이 맞다고 여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주원류고 11권)
遼史營衛志 所載阿延伊德二部 葢女真之係遼籍者 五國城之説紛然不一 遼史 各有國名 大約在寜古塔以東 東接大海而五國城則為五國 至遼總集之所 蓋五國部節度使所治之城 所云自此而東分為五國者近之 亦不越寜古塔境内 初不必有舊城址五而後 為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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