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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女真) 말갈(靺鞨)

여진(女真)〈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㑹編) 3권〉 17

by 쥐눈이 2023. 12. 22.

*평양(平陽)

평양(平陽)은 우리 고대사와 닿아있는 복희와 요순임금 시대를 대변하는 중요한 곳이라 그 자료를 소개한다.

: 평양(平陽)에 대한 지역 고찰은 여러 가지인데 크게 지금에 산동성 하택시(荷澤市) 일대와 산서(山西) 림분시(臨汾市) 일대가 이야기 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평양후국(平陽侯國)좌전(左傳) :성공(成公) 7년에 제후(諸侯)들이 마릉(馬陵)에서 맹약을 하였다. 두예(杜預)()의 땅이다. 평양(平陽) 동남쪽에 땅 이름이 마릉이다.” 하고 다시 마릉은 위군(魏郡) 원성(元城, 지금 하북성 대명현(大名縣))에 있다라고 설명하였다.()가 나니 요()임금이 이곳에 도읍하였다.” 하였다. 진 지도기(晉地道記) “요성(堯城)이 있다.” 하였다.

後漢書 卷029平陽侯國左傳曰成七年諸侯盟馬陵杜預曰衞地也平陽東南地名馬陵又説在魏郡元城有鐵堯都此晉地道記曰有堯城

 

역대제왕댁경기(厯代帝王宅京記)에 나오는 평양(平陽)

()임금이 평양(平陽)에 도읍하였다. 지금 산서(山西) 평양부(平陽府) 림분현(臨汾縣)이다.

후한(後漢) 군국지(郡國志) “하동군(河東郡) 평양후국(平陽侯, 한나라 개국 공신 조참(趙參))이니 쇠()가 난다. ()가 이곳에 도읍하였다.” 하였다. 응소(應劭) “평하(平河)의 북쪽에 있다.” 하였다.

厯代帝王宅京記堯都平陽今山西平陽府臨汾縣後漢郡國志曰 河東郡平陽侯國有鐵 堯都此應劭曰在平河之陽

()임금이 포판(蒲坂)에 도읍하였다. 지금 산서(山西) 평양부(平陽府) 포주(蒲州)이다. 황보밀(皇甫謐)()이 도읍한 곳은, 더러는 포판(蒲坂)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평양(平陽)이라고도 하며 더러는 반()이라고도 하니 반()은 지금 상곡(上谷, 북경 서북 장가구시(將家口市)) 규주성(嬀州城)이 이곳이다.” 하였다.

舜都蒲坂今山西平陽府蒲州 皇甫謐曰舜所都 或言蒲坂 或言平陽 或言潘 潘今上谷嬀州城是也

()임금이 안읍(安邑)에 도읍하였다. 지금 산서(山西) 평양부(平陽府) 해주(解州) 안읍현(安邑縣, 운성시(運城市) 하현(夏縣))이다. 군국지(郡國志)에 하현(夏縣) 동북 15리에 안읍고성(安邑故城)은 우()가 도읍한 곳이다. 황보밀(皇甫謐)우임금이 평양(平陽)에 도읍하였다. 더러는 도읍이 안읍(安邑)에 있었다 하고 더러는 진양(晉陽, 곧 태원(太原))에 있었다 한다.” 하였다.

禹都安邑今山西平陽府解州安邑縣 郡國志 夏縣東北十五里 安邑故城 禹所都也 皇甫謐曰 都平陽 或在安邑 或在晉陽

조을(祖乙, ()나라 제13대 임금)이 상(, 지금 하남성 내황현(内黄县)) 땅이 하수(河水)에 결딴나고서 경(, 지금 산서성 하진시(河津市), 림분시(臨汾市), 곧 옛 평양 땅 서남쪽) 땅으로 갔다. 서전(書傳)() 땅에서 하수(河水)로 결딴나고 경() 땅으로 옮겼다. 하수(河水)에 무너진 것을 ()’라 한다.” 하였다. 수경주(水經注)분수(汾水)가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 경향성(耿鄉城) 북쪽을 거치니 옛 은()나라 수도이다. 제 조을(帝祖乙)이 상() 땅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으니 하수(河水)에 의해 무너지게 되어서이다. 그래서 서() 서문에 조을(祖乙)이 상() 땅이 무너지는 바람에 경() 땅으로 갔다.” 하였다. 후한(後漢) 군국지(郡國志)하동군(河東郡, 림분시(臨汾市) 일대) 피씨(皮氏)현에 경향(耿鄉)이라는 곳이 있다.” 하였다. 사기 정의(史記正義)괄지지(括地志)에서 봉주(綘州) 용문현(龍門縣) 동남 12리 경성(耿城)이니 옛 경국(耿國)이다. 지금 산서(山西) 평양부(平陽府) 포주(蒲州) 하진현(河津縣)이다.” 하였다. 사기(史記)에 경()을 경(, 땅이름 경/나라이름 형)이라 썼는데 색은(索隱)()은 소리가 경()이다. 소리가 가까우면 본 글자 대신하니 또한 경()으로도 쓴다.

영공(寧公)이 평양(平陽)으로 옮겨 가 살았다. 서광(徐廣)()의 평양정(平陽亭)이다.” 하였다. 사기(史記) 정의(正義)에서 괄지지(括地志)에서 옛 성(故城)이 기주(岐州) 기산현(岐山縣, 섬서성(陕西省) 보계시(寶雞市)) 서쪽 46리에 있다. () 영공(寧公)이 옮겨 가 도읍한 곳이다.” 하였다.

진본기(秦本紀)무공(武公, 춘추 때 제5대 진() 임금, 재위 : 기원전 697-기원전 678) 원년(元年)에 평양(平陽) 봉궁(封宫)에서 살았다.” 하였다. 정의(正義)궁은 기주(岐州) 평양성(平陽城) 안에 있었다.” 하였다.

祖乙圯于耿書傳曰圯于相 遷于耿 河水所毁曰圯 水經注曰 汾水又西 逕耿鄉城北 故殷都也 帝祖乙 自相徙此 為河所毁故 書序曰 祖乙圯于耿 後漢郡國志曰 河東郡皮氏有耿鄉 史記正義曰 括地志云 綘州龍門縣東南十二里耿城 故耿國也 今山西平陽府蒲州河津縣 史記作邢 索隱曰 邢音耿 近代本亦作耿

寧公徙居平陽徐廣曰 郿之平陽亭 正義曰 括地志云 故城在岐州岐山縣西四十六里 秦寧公徙都之處

本紀曰 武公元年 居平陽封宫正義曰 宫在岐州平陽城内

 

삼가주 사기 진시황 본기(三家註史記·秦始皇本紀)

평양고성(平陽故城)은 상주(相州) 임장현(臨漳縣) (지금 하북성 한단시(邯鄲市) 일대) 서쪽 25리에 있다. 평양(平陽)은 전국(戰國)시대 때에 한()의 땅에 속하였다가 뒤에 조() 땅으로 들어갔다.

平陽故城在相州臨漳縣西二十五里平陽戰國時屬韓後屬趙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 나오는 평양(平陽) 

. 제요(帝堯)의 도읍지와 평양(平陽) 

세기에 제() ()는 처음으로 당() 땅에 봉해졌으니 당()은 지금 중산(中山)에 당현(唐縣, 지금 북경 서남쪽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서남)이 이곳이다. 요산(堯山)이 이곳에 있다. 군현지(郡縣志)정주(定州) 당현(唐縣)은 옛 당후국(古唐侯國)이고 요()가 처음에 이곳에 봉해졌다. 지금 정주(定州, 북경 서남쪽) 북쪽에 옛 당성(故唐城)이 있다.’ 하였다.

通鑑地理通釋帝堯都 世紀帝堯始封於唐今中山唐縣是也堯山在焉郡縣志定州唐縣古唐侯國堯初封於此今定州北有故唐城

당수(唐水)가 서북쪽에 있는데 당하(唐河)로 들어간다. 남쪽에는 망도현(望都縣)에 산이 있는데 곧 요()의 어머니 경도(慶都)가 살았던 곳이다. (당수와) 거리가 오십 리이다. 도산(都山)은 일명 긍산(亘山)이라 하는데 북쪽으로 요산(堯山)에 오르면 남쪽으로 도산(都山)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현() 이름을 망도(望都)라 하였다. 지리지(地理志)요산(堯山)은 당현(唐縣) 남쪽에 있다.’ 라 하고 장안(張晏)요산(堯山)이 당() 동북, 망도(望都) 북쪽에 있다.’ 하였다. 사기(史記)()가 유궁(游宮)을 성양(成陽)에 지었다.’ 라 하니 정의(正義)복주(濮州, 산동성 하택시(荷澤市)) 뇌택현(雷澤縣)이 이것이다.’ 하였다.

唐水在西北 入唐河 南有望都縣山 即堯母慶都之所居也 相去五十里 都山一名亘山 北登堯山南望都山 故名縣曰望都 地理志 堯山在唐縣南 張晏 以堯山在唐東北望都北 史記 堯作游成陽 正義 濮州雷澤縣是

요임금은 뒤에 다시 도읍지를 진양(晉陽)으로 옮겼으니 지금에 태원현(太原縣)이다. ()나라 때에는 병주(并州)의 영역이다. 통지(通志)에 지금 평정군(平定軍, 산서(山西) 평정현)에 옛 진양성(古晉陽城)이 있으니 이곳이 그 땅이다 라 하였다.

後又徙晉陽今太原縣也 於周在并州之域通志今平定軍有古晉陽城是其地

요임금이 천자(天子)가 되었을 때 평양(平陽)에 도읍하였다. 시경(詩經)에 수록된 풍조(詩風)로는 당국(唐國)이니 주 무왕(武王 생존, 기원전 1046년 즈음)이 아들 숙우(叔虞)를 당(, 평양)에 봉하였었는데 후대에 계찰(季札, 춘추시대 사람)이 당()의 노래를 듣고서 사모함이 깊구나. 그 노래()를 지은 사람은 아마도 어떤 도당씨(陶唐氏, 요임금)의 유민(遺民)이리라!”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지금 진주(晉州)가 다스린 곳(또는 소재지가 있는 곳)은 평양 옛성(平陽故城)이 이것이다. 숙우(叔虞)는 당숙우(唐叔虞)이다. 기주(歧周, 섬서 기산(岐山)) 사람이다. 서주(西周) 때 진국(晉國)의 창시자로, 훗날 전국시대 때 삼진(三晉)이라고도 일컬어진 한(), (), () 세 나라로 나뉜다.

여지광기(輿地廣記)진주(晉州) 임분현(臨汾縣)은 본래 평양(平陽)였는데, ()나라 때 (다시) 평양(平陽)으로 고쳤다. 하수(河水)는 일명 진수(晉水)라고도 한다.’ 하였다. 위소(韋昭)()와 당()은 모두 나라 이름이다. 더러는 ()가 먼저 도()에서 살았고 훗날 당()에서 살았다. ()는 지금 광제군(廣濟軍, 산동 하택시(荷澤市)) 정도현(定陶縣)이고 당()은 지금 중산부(中山府, 정주시(定州市)) 당현(唐縣)이다. 여전히 당성(唐城)이 있어 이곳에 보존되고 있다.’ 하고 더러는 당성(唐城)은 항주(絳州) 익성(翼城,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서쪽 2리에 있다.’ 하였다.” 말한다. 괄지지(括地志)정주(定州) 당현(唐縣)은 요()의 후예들이 봉해진 곳이다.” 하였다. 한서음의(漢書音義)()은 지금 하동(河東) 영안(永安)이니 진()과 거리가 4백 리로 곧 치()이다.” 하였다. 시보(詩譜)()은 제요(帝堯)의 옛 도읍지이다. 지금 태원(太原) 진양(晉陽)이라 하니 요()가 처음으로 이곳에서 살았고 훗날 하동(河東) 평양(平陽)으로 옮겼다.” 하였다.〉 〔전한 지리지(前漢 地理志) : 하동군(河東郡) 치현(彘縣)은 순제(順帝)가 고쳐서 영안(永安)이라 하였다. 前漢·地理志河東郡彘縣順帝改曰永安。〕

及為天子都平陽 於詩風 為唐國武王子叔虞封焉 季札聞唐之歌曰 思深哉 其有陶唐氏之遺民乎 括地志 今晉州所治 平陽故城是也 輿地廣記 晉州臨汾縣本平陽 隋改平陽 河水一名晉水 韋昭云 陶唐皆國名 或曰堯先居陶 後居唐 陶 今廣濟軍定陶縣 唐 今中山府唐縣 猶有唐城存焉 或曰唐城在絳州翼城西二里 括地志 定州唐縣 堯後所封 漢書音義 唐今河東永安 去晉四百里 即彘也 詩譜曰 唐帝堯舊都之地 今曰太原晉陽 堯始居此 後遷河東平陽

서경(書經)오직 저 제요(帝堯) 도당(陶唐)만이 이 기주(冀州)로써 사방을 통일하였다. 서경(書經) 오자의 노래(五子之歌) 편에서 채침(蔡沉)()가 순()에게 나라를 넘겼고 순()이 우()에게 나라를 넘겼는데 모두들 기주(冀州)에 도읍하였다. 그런데 기방(冀方)이라고 말한 것은, 가운데를 들어서 그 바깥 지역을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五子之歌》:有此冀方蔡沉集傳堯授舜舜授禹皆都冀州言冀方者舉中以包外也공자가어(孔子家語)서경(書經) 하서(夏書)편에 저 제요(帝堯) 도당(陶唐)만이 저 하늘의 떳떳함을 따르니 사방(九州)을 거느린 이 기주(冀州)가 그에게 있었다.’ 하였다.” 하니 왕숙(王肅)나라 안(中國)을 기()라 한다.” 풀이하였다. 孔子家語·正論解》:夏書維彼陶唐率彼天常在此冀方’”王肅注中國爲冀

사기(史記) 정의(正義)()가 평양(平陽)에 도읍하였고 순()이 포판(蒲坂, 산서성 운성(運城), 영제(永濟))에 도읍하였고 우()가 안읍(安邑, 산서성 운성시(運城市) 하현(夏縣))에 도읍하였는데 서로 거리가 2백 리가 못 되니 모두 기주(冀州)에 있다.” 하였다.

통지(通志)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모두 하남(河南)에 도읍을 세웠는데 비록 황제(黄帝)의 도읍과 요(), (), ()의 도읍들이 지금에는 모두 하북(河北)있다 하더라도 옛날에는 모두 하남(河南)에 있었으니 대하(大河, 곧 황하(黃河))의 옛길이 갈석(碣石)에서 바다로 들어갔었다. (황하의 물길이 세월을 거쳐 변화하였다는 말인 듯) 갈석(碣石)은 지금 평주(平州, 하북 로룡현(盧龍縣))이다. 그래서 유주(幽州) 및 계주(薊州)(지금에 북경과 천진 북쪽 일대) 지방과 기주(冀州) 및 병주(幷州) (태원시(太原市) 근방) 땅이 모두 하남(河南) 땅이었다. () 정왕(定王 재위: 기원전 606-기원전 586) 5년 이후에 황하 물길이 가로막혀 점차 남쪽으로 옮겨 흐르다 한() 원광(元光, 7대 임금 류철(劉徹)의 두 번째 연호, 기원전 134- 기원전 129) 3년에(기원전 136) 이르러 물길이 옮겨지더니 돈구(頓丘 또는 敦丘, 지금 하남 준현(浚縣))를 따라 발해(渤海)로 들어갔다. 발해(渤海)는 지금 빈(, 산동성 濱州市), (, 하북 창주시(滄州市)) 사이이다.” 하였다.

이씨(李氏)()와 순()이 기() 땅에 도읍을 하였을 때 영토가 가장 넓었다. 지금의 변경이 각각 그 영역 안에 있었다.” 하였다. (이씨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書 惟彼陶唐有此冀方 正義 堯都平陽 舜都蒲坂 禹都安邑 相去不盈二百 皆在冀州 通志曰 自開闢以來 皆河南建都 雖黄帝之都堯舜禹之都於今皆為河北 在昔皆為河南大河故道自碣石入海 碣石今平州也 所以幽薊之邦冀幷之壤皆為河南地 周定王五年以後 河道堙塞 漸移南流 至漢元光三年 徙從頓丘 入渤海 渤海今濵滄間也 李氏曰 堯舜都冀 地壤最濶 今之邊境 各在其内

 

. 제순(帝舜)의 도읍지와 평양(平陽) 

사기(史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 역산(厯山)에서 농사를 지었다.

서경(書經)()가 처음 역산(厯山)에서 밭으로 가..” 하였다.

군국지(郡國志)하동(河東) 포판(蒲坂)에 뇌수산(雷首山)이 있다.” 하니 주()() 남쪽 20리에 역산(厯山)이 있으니 순()이 농사지었던 곳이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포주(蒲州) 하중부(河中府) 하동현(河東縣)에 뇌수산(雷首山) 역시 역산(厯山)이라 하는데 남쪽에 순우물(舜井)이 있다. 한편 월주(越州) 여요현(餘姚縣)에도 역산(厯山) 및 순우물(舜井)이 있고 복주(濮州) 뇌택현(雷澤縣, 산동 하택시(菏澤市) 일대)에도 역산(厯山) 및 순우물(舜井)이 있으며 또한 요허(姚墟, 전설에 순임금이 태어난 곳으로 이야기되는 곳)도 있으니 ()을 낳은 곳이다.’라 말하고 있다. 규주(媯州, 하북성 탁록현 일대) 바깥성() 안에 순우물(舜井)이 있고 성() 북쪽에 역산(厯山)이 있어 모두 순()이 농사지었던 곳이라고들 하는데 자세하지는 않다.

帝舜都 史記舜耕厯山 書 帝初于厯山 往于田 郡國志 河東蒲坂有雷首山 注縣南二十里有厯山 舜所耕處 括地志 蒲州河中府河東縣 雷首山亦名厯山 南有舜井 又越州餘姚縣有厯山舜井 濮州雷澤縣有厯山舜井 又有姚墟 云生舜處也 媯州外城中有舜井 城北有厯山 皆云舜所耕處 未詳也

남풍(南豐, 송나라 때 건창군(建昌軍) 남풍현(南豐縣)) 증씨(曽氏,증조(曾肇), 1047-1107)가 말하기를 정강성(鄭康成, 동한 때 학자 정현(鄭玄))역산(厯山)은 하동(河東)에 있다고 풀이한 뒤에 세상에 일삼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규수(媯水)가 뇌수(雷首)에서 흘러나온다는 이유로 줏대 없이 그 말만 따르고 덧붙여 역산(厯山)은 뇌수(雷首)의 다른 이름이다라 하니 그 사실을 고찰하지 않은 결과이다. 맹자(孟子)()은 동이(東夷)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제음(濟陰, 제수 남쪽, 한나라 때는 지금에 하택시 정도구(定陶區) 일대)에서 옹기를 빚고 물고기를 잡았으며 노() 땅 동문(東門)에서 집기를 만들었고 위() 땅에서 때를 엿보았으며 제() 땅에서는 역산에서 농사를 지었으니 모두 동방의 땅이라 맹자의 말과 맞아떨어진다.” 하였다.

 南豐曽氏曰 鄭康成釋 厯山在河東 世之好事者 因媯水出於雷首 遷就附益謂 厯山為雷首之别號 不攷其實矣 孟子謂舜東夷之人 則陶漁在濟陰 作什器在魯東門 就時在衛 耕厯山在齊 皆東方之地 合於孟子

도기(圖記, 일종의 지도책)에서 ()나라 남산(南山)이 역산(厯山)이 되니 순()이 농사지었던 곳이다. 그러므로 그 성()을 역성(厯城)이라 이름하니 지금 제남부(濟南府, 산동성 서북부)이다.” 하였다.〉 〔전국책에 “3리에 걸쳐 성() 쌓고 7리에 걸쳐 곽()을 쌓는다.” 하였다. 관자(管子)안에는 임금을 위해 성()을 쌓고 성() 밖에는 성()에 사는 사람을 위해 곽()을 만든다. () 밖에는 성()과 곽()을 위해 흙벽돌(진흙과 모래를 섞어 만든) 해자를 짓는다.” 오월춘추(吳越春秋)우임금 아버지 곤()이 성()을 쌓아 임금을 보위하고 곽()을 지어 백성들을 지켰으니 이것이 성곽(城廓)의 시작이다.” 하였다. 戰國策三里之城七里之廓管子·度地篇》:內爲之城,城外爲之郭,郭外爲之土閬。《吳越春秋: “鯀築城以衛君造廓以守民,此城廓之始也。〕

圖記謂 齊之南山為厯山 舜所耕處 故其城名厯城 今濟南府

순임금이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괄지지(括地志)뇌하택(雷夏澤, 곧 뇌택)은 복주(濮州) 뇌택현(雷澤縣) 성곽() 바깥 서북에 있다.” 하고 정강성(鄭康成)제음(濟陰)에 있다.” 하며 지리지(地理志)우공(禹貢)에 뇌택(雷澤)은 제음(濟陰) 성양현(成陽縣, 지금 하택시(荷澤市) 일대) 서북에 있다하였다. 묵자(墨子)()이 호택(濩澤)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하고 통전(通典)에서 택주(澤州) 양성현(陽城縣)에 호택수(濩澤水)가 있다.” 하였다.

漁雷澤括地志 雷夏澤在濮州雷澤縣郭外西北 鄭康成云 在濟陰 地理志 禹貢雷澤在濟陰成陽縣西北 墨子曰 舜漁於濩澤 通典 澤州陽城縣有濩澤水

하빈(河濵)에서 옹기를 구웠다.

황보밀(皇甫謐, 215-282, 감숙성 사람)제음(濟陰) 정도(定陶) 서남쪽에 도구정(陶丘亭)이 이곳이다. 지금 광제군(廣濟軍)이다. 괄지지(括地志)도성(陶城)은 포주(蒲州) 하동현(河東縣) 북쪽 30리에 있으니 곧 순()이 도읍했던 곳이다. 남쪽으로 역산(厯山)과 거리가 멀지 않으니 굳이 정도(定陶)라야만 하겠는가?” 하였다.

陶河濵皇甫謐曰 濟陰定陶西南陶丘亭是也 今廣濟軍 括地志 陶城在蒲州河東縣北三十里 即舜所都也 南去厯山不逺 何必定陶

집기를 수구(夀丘)에서 만들었다.

수구(夀丘)는 노() 땅 동문(東門) 북쪽에 있으니 지금 연주(兖州) 곡부현(曲阜縣, 지금 산동성) 동북 60리에 있다. 황제의 어머니인 부보(附寳)가 수구(夀丘)에서 황제(黄帝)를 낳았다.

作什器於夀丘 夀丘在魯東門之北 今在兖州曲阜縣東北六里 附寳生黄帝於夀丘

부하(負夏)에서 때를 엿보았다.

맹자(孟子)에서 부하(負夏)로 옮겼다.” 하니 정강성(鄭康成)()의 땅이다. (() 땅은 황하 이북에 하남 학벽(鶴壁), 안양, 복양, 한단, 형태(邢台) 일대와 산동 료성(聊城) 서부 일대)” 하였다.

就時於負夏孟子云 遷於負夏 鄭康成云衛地

서경(書經) 요전(堯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요임금이 두 딸을 다스려서 순임금이 있는 규예(媯汭)로 시집보내어 ()는 물 이름이니 지금 하중부(河中府) 하동현(河東縣)에 있다. 역산(厯山)에서 나와 황하()로 들어간다. 이아(爾雅)물 북쪽을 예()라 한다.” 하고 괄지지(括地志)규주(媯州)에 규수(媯水)가 있는데 수원은 성() 안에서 나온다.” 하였다. 기구전(耆舊傳)이곳이 곧 순()이 살던 규예(媯汭)이다.” 하였다. 수경주(水經注)세본(世本)()이 요내(饒内)에서 살았으니 이곳은 한중(漢中, 섬서성 한중시(漢中市)) 서성(西城)에 있다. 더러는 규허(媯墟)가 그 서북에 있으니 순이 살았던 곳이다.’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통전(通典)금주(金州, 섬서(陝西) 안강(安康) 한빈구(漢濱區)) 서성현(西城縣, 안강시(安康市) 한강(漢江) 북쪽 기슭)에 규허(媯墟)가 있다.” 하였는데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이곳을 일러 요허(姚墟)’라 하였다. 세본(世本)요예(饒汭)’라 하고 고문상서(古文尚書)()나라 말에 영내(嬴内)는 그 소리가 규내(媯汭)이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다시 말하기를 요허(姚墟)는 복주(濮州, 산동성 하택시) 뇌택현(雷澤縣) 동쪽 13리에 있다.” 하고 회계구기(㑹稽舊記)상우(上虞, 지금 절강성 안) 30리에 요구(姚丘)가 있으니 곧 순()이 태어난 곳이다.” 하였다.

堯典 釐降二女于媯汭 媯水名 在今河中府河東縣 出厯山入河 爾雅 水北曰汭 括地志 媯州有媯水 源出城中 耆舊傳曰 即舜媯汭 水經注 世本曰 舜居饒内 在漢中西城 或言媯墟在西北 舜所居也 通典 金州西城縣有媯墟 帝王世紀謂之姚墟 世本曰饒汭 古文尚書 周語嬴内音媯汭 括地志 又云姚墟在濮州雷澤縣東十三里 㑹稽舊記云 上虞三十里有姚丘 即舜所生也

요임금이 두 딸을 순임금의 아내 우씨(虞氏) 부인이 되게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옛날 우성(故虞城)은 섬주(陜州) 하북현(河北縣) 동북 50리 우산(虞山) 위에 있다.” 하였다. 지금 평륙현(平陸縣)이다. 황보밀(皇甫謐)()가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고 이를 우() 땅에 봉하였다. 지금 하동(河東, 산서성 안) 태양(太陽) 산 서쪽 우성(虞城)이 이것이다.” 하였으니 순()이 우() 땅에 살아서 우()를 씨()로 삼았다. 군국지(郡國志)태양(太陽)에 오산(吳山)이 있으니 위에 우성(虞城)이 있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송주(宋州, 하남성(河南省) 상구시(商丘市)) 오성현(虞城縣)은 순()의 후손이 봉해진 곳이다.” 하였다. 외기(外紀)본래 우()의 규예(媯汭)에 살아서 순임금을 유우씨(有虞氏)라 호칭하였다.” 하였다.

嬪于虞 括地志 故虞城在陜州河北縣東北五十里虞山之上 今平陸縣 皇甫謐曰 堯以二女妻舜封之於虞 今河東太陽山西虞城是也 舜居虞地 以虞為氏 郡國志 太陽有吳山 上有虞城 括地志 宋州虞城縣 舜後所封 外紀 本處虞之媯汭 號曰有虞氏

세기(世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지은 도읍은 더러 포판(蒲坂)이라 하니 곧 하동현(河東縣)이다. 지금 하중부(河中府) 남쪽 2리 하동현(河東縣) 경계에 포판 옛성(蒲坂故城)이 이것이다. 더러는 평양(平陽)이라 하니 지금 진주성(晉州城)이 이것이다. 더러는 파()라고도 하니 지금 상곡(上谷) 규주성(媯州城)이 이것이다. 외기(外紀)포판(蒲坂)에 도읍하였다.” 하였다.

世紀 舜所營都 或言蒲坂 即河東縣 今河中府南二里河東縣界蒲坂故城是也 或言平陽 今晉州城是也 或言潘 今上谷媯州城是也 外紀都蒲坂

. ()나라 도읍지와 평양(平陽)   

황왕대기(皇王大紀, 남송 호굉(胡宏))()가 안읍(安邑)에 도읍하였다.” 하고 세기(世紀)()이 숭백국(崇伯國)에 봉해졌으니 진()과 진() 사이에 있다.” 하였다. (진국(晉國)은 지금 감숙성(甘肅省) 천수시(天水市) 일대, 진국(晉國)은 산서성 림분시(臨汾市) 및 운성시(雲城市) 등 일대) 좌씨전(左氏傳)조천(趙穿, ?-기원전 607, 춘추 중기 때 진국(晉國) 대부(大夫))이 숭() 땅을 침입하였다.” 함이 이것이다.

夏都   皇王大紀 禹都于安邑 世紀 鯀封崇伯國 在秦晉之間左氏傳趙穿侵崇是也

()가 봉토를 받아 하백(夏伯)이 되었는데 유공(禹貢)에 실려있는 예주(豫州) 바깥 지역 남쪽에 있다. ()과 한()나라 때 영천(潁川)에 속했었지만, 본래 한() 땅으로 지금 하남(河南) 양적(陽翟, 낙양 남동쪽, 하남(河南) 우주(禹州))이 이것이다. 지리지(地理志)양적(陽翟)은 하우나라(夏禹國)이다. 지금 영창부(潁昌府) 양적현(陽翟縣)에 우산(禹山)이 있다.” 하였다. 여지지(輿地志)숙주(宿州) 홍현(虹縣)은 본래 하구현(夏丘縣)이었는데 요()가 우()를 봉하여 하백(夏伯)으로 삼자 이곳을 읍()으로 하였다.” 하였다.

禹受封為夏伯 在禹貢豫州外方南 於秦漢屬潁川 本韓地 今河南陽翟是也 地理志 陽翟夏禹國 今潁昌府陽翟縣有禹山 輿地志 宿州虹縣本夏丘縣 堯封禹為夏伯 邑於此

()가 순임금의 자리 물림을 받고 평양(平陽)에 도읍하였다. 더러는 도읍이 안읍(安邑)에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 섬주(陜州) 하현(夏縣)이니 본래 하우(夏禹)의 도읍지였다. ()나라 때에는 안읍(安邑)로 하여 하동(河東)에 소속시켰다. 뒤에 위()가 고쳐 하현(夏縣)으로 하였다. 군현지(郡縣志)하현(夏縣) 동북 15리에 안읍 옛성(安邑故城)은 우()가 도읍한 곳이다.” 하였다.

受禪都平陽 或在安邑今陜州夏縣本夏禹之都 漢為安邑屬河東 後魏改為夏縣 郡縣志 夏縣東北十五里安邑故城禹所都也

더러는 도읍지가 진양(晉陽)에 있다고 한다. 좌전(左傳) ()하허(夏虛)는 대하(大夏)이니 지금 태원(太原) 진양(晉陽)이다.” 하였다.

或在晉陽左傳注 夏虛大夏 今太原晉陽

세본(世本)하후(夏后)가 양성(陽城)에 살았다.”에 말하였으니 본래 대량(大梁)의 남쪽으로 지금 진류(陳留) 준의(浚儀, 하남성 개봉시(開封市))가 이것이다. 류희(劉熈)영천(潁川) 양성(陽城)은 지금 하남(河南)에 속한다. 살펴보면 경전(經傳)에 하()와 요순(堯舜)은 똑같이 하북(河北) 기주(冀州)의 영역에 있었지 하남(河南)에 있지 않았다.” 하였다. 양성(陽城)에 살았었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가 자신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려던 순임금의 삼년상을 마치자마자 순임금 아들 상균(商均)을 피하여 살았던 때이지 도읍하였던 곳은 아니다. 외기(外紀)()가 안읍(安邑)에 도읍하였다. 더러는 평양(平陽)이라고 하고 또한 진양(晉陽, 산서성 태원시(太原市))과 한(, 하남(河南) 양적(陽翟), 지금에 하남 우주(禹州))라고도 하였다. () 임금 계()가 대릉(大陵) 위쪽에서 점을 치고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균대(鈞臺)의 향()이라고 한다. (균대의 향은 기존 왕위 전수방법인 덕 있는 자에게 넘겼던 체제를 없애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식에게 넘기게 된세습의 기점이 되는 사건이라 함) 또한 전()의 터에서 점을 치고 물 북쪽에 선대(璿臺, 하나라 때 옥으로 지은 천자의 대)를 지었다.” 하였다. 환우기(寰宇記)()가 안읍(安邑)에서부터 와서 진양(晉陽)에 도읍하였고 걸()은 안읍(安邑)으로 이사하였다.” 하였다.

世本言 夏后居陽城 本在大梁之南 今陳留浚儀是也 劉熈云 潁川陽城今屬河南 按經傳 夏與堯舜同在河北冀州之域 不在河南 居陽城者 自謂禹避商均時 非都也 外紀 禹都安邑 或云平陽 亦云晉陽及韓 啓筮享神於大陵之上 是為鈞臺之享 又筮於晉之墟 作璿臺於水之陽 寰宇記 禹自安邑都晉陽 桀徙安邑

 

삼가주(三家註)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평양고성(平陽故城)은 상주(相州, 지금 한단시 남쪽) 임장현(臨漳縣) 서쪽 25리에 있다. 평양(平陽)은 전국(戰國)시대 때 한() 땅에 속하였다가 뒤에 조() 땅에 속하게 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三家註史記·秦始皇本紀平陽故城在相州臨漳縣西二十五里平陽戰國時屬韓後屬趙

 

평양(平陽)은 성양(成陽)이다

우공(禹貢)에 뇌하택(雷夏澤, 또는 뇌택) 동남 쪽 기슭을 상고시대에는 성()이라 불렀고 오제(五帝) 시대에는 평양(平陽)이라 불렀다 한다. 제요(帝堯)가 이곳에 도읍하였다. 서주(西周) 때 문왕의 일곱째 아들 숙무(叔武)를 이곳에 봉하여 성국(成國)을 만들고 성양(成陽)이라 일컬었다. 춘추(春秋)시대에 성국(成國)이 망하고 다시 평양(平陽)이라 일컬었고 위국(魏國) 동쪽 지역에 중요한 진()이었다. (뇌택은 지금 하남성(河南省) 복양시(濮陽市) 범현(範縣)과 산동현(山東省) 하택시(荷澤市) 견성현(鄄城縣) 일대라 한다.)

()나라 때는 성양현(成陽縣)을 만들어 동군(東郡)에 배치하였다 하고 서한(西漢) 고조(高祖) 12(기원전 195)에 성양후국(成陽侯國)을 만들었으니 지금 산동성 하택시(菏澤市) 무단구(牡丹區)와 견성(鄄城) 일대라고 한다. 서한(西漢) 류철(劉徹) 임금 때(기원전 140) ()으로 만들고 연주(兗州) 제음군(濟陰郡)에 소속시켰다.

평양(平陽), 곧 성양(성양)이었던 지금에 산동성 하택시(荷澤市)는 복희씨(伏羲氏)의 고향, 또는 그 부모의 나라이고 요()와 순()임금의 고향이다. 평양은 뇌택(雷澤), 조주(曹州)라고도 불리니 춘추시대에 조국(曹國)의 서울이었다. 별명은 요도(堯都)라고 한다. 사기(史記)옛날 요임금이 성양(成陽)에서 나라를 일으켰고 순임금은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았으며 탕임금은 박() 땅에서 머물렀다. 그 풍속에 여전히 돌아가신 임금들이 남긴 아름다운 가르침이 남아 있어 사람들이 점잖아 진국이어서 대부분 군자(君子)이었으며 농사일을 잘하였다. 비록 산과 냇물이 주는 풍요로움은 없다 하더라도 먹고 입는 것을 조촐히 하여 그 나머지는 모아 거두어 두기에 이르렀다.” 하였다. 史記卷一百二十九昔堯作於成陽,舜漁雷澤,湯止於亳其俗猶有先王遺風,重厚多君子,好稼穡,雖無山川之饒,能惡衣食,致其蓄藏

우임금 아들인 하()나라 제2대 임금 계()가 아버지에게서 임금 자리를 세습 받고(이전 임금들은 세습이 아닌 선양(禪讓), 곧 덕이 있는 사람을 임금으로 삼음) 서쪽에 복양(濮陽)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사학자들은 성양(成陽)이 바로 요임금이 도읍한 곳이고 늙어서 덕이 높은 순임금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었을 때 순임금 또한 이곳에 도읍하였으며 공덕이 높아 순임금에게 자리를 물려받은 우()임금도 그 뒤를 이어 이곳 성양(成陽)에 도읍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다. 근래에 성양(成陽) 지하에 붉디 누른 모래(紅黃沙)에 오화항토(五花夯土)로 지어진 도성 담장을 발견하였으니 이곳이 요, , 우임금 시기에 도성이라 파악하고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임금을 곡림(穀林)에서 장례 치렀다.” 하니 한()나라 학자 고수(高誘)가 풀이하여 말하기를 요임금을 성양(成陽)에서 장례 치렀으니 이곳은 곡림(穀林)을 말한다. 성양 산 아래에 곡림(穀林)이 있다.” 하였다. 한서(漢書)에 제음군(濟陰郡) 성양현(成陽縣) (지금 산동 하택시(菏澤市) 정도구(定陶區))에 요임금의 무덤과 영대(靈台)가 있으며 우공(禹貢, 상서(尙書)에 한 편명)에 뇌택(雷澤)이 그 서북쪽에 있다.” 하였다. 북위(北魏) 때에 수경주(水經注) 책에 ()의 능()은 성양성(成陽城) 서쪽 2리에 있고 요()임금 어머니의 능과 영대(靈臺)가 요의 능() 남쪽 1리에 있다.” 하였다. 성양(成陽)에 요()의 능()은 문헌에서 가장 일찍 나온 것으로 서한과 동한 때 임금들이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던 그 능이라 한다. 죽서기년(竹書紀年)요임금이 순()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고서(禪讓) 도구(陶丘)에서 지냈다.’ 라는 내용이 나오고 다시 고본(古本竹書紀年)옛날에 요()의 덕이 쇠퇴하자 순()임금이 요()를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라 하였다. 당나라 때 책 사통(史通)()이 요()를 평양(平陽)에 가두었다.” 하고 한나라 유학자 정현(鄭玄)()가 늙어 도() 땅에서 돌아와 성양(成陽)에 머물렀고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 하였다.

呂氏春秋》:堯葬穀林高誘注云堯葬成陽,此雲穀林,成陽山下有穀林也

漢書·地理志》:濟陰郡成陽縣有堯塚靈臺,《禹貢雷澤在濟陰成陽縣西北

皇覽》:堯陵在濟陰郡成陽縣北魏水經注》:堯陵在成陽城西二裏堯母陵臺在堯陵南一裏

竹書紀年》:堯禪舜後居陶丘又云昔堯德衰爲舜所囚也

史通》:舜囚堯於平陽漢儒鄭玄曰堯晚年自陶回遊成陽死而葬焉

 

*오화항토(五花夯土)는 푸석하고 공기를 잘 받아들이는 생흙과 질감이 고우면서 기름져서 썩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흰점토(백고니(白膏泥), 또는 청고니(青膏泥))에 더러는 숯을 섞어 한 번에 여러 색이 나타나는 인공 숙토(熟土)로 사람이 이 흙을 다져 매우 단단한 성곽이나 무덤을 지었다 한다.

 

*상당(上黨) : 지금 산서성(山西省) 장치시(長治市) 상당구(上黨區)이다. ()나라 때는 로()라 하였고 기주(冀州)에 속하였었다. ()나라 때에는 려국(黎國, 또는 고려국(古黎國), 상나라의 제후국으로 주()에 토벌되고서 주()의 제후국이 됨)에 속하였고 서주(西周) 때에는 려후국(黎侯國)에 귀속되었으며 춘추(春秋) 때에는 로자영아국(潞子嬰兒國, 로자영아는 춘추시대에 적적(赤狄) 겨레 사람으로 로국(潞國) 임금)에 귀속되었다. () 정왕(定王) 13(기원전 594)에 로자국(潞子國)을 멸망시키고 진()에 귀속시켰다. 전국(戰國)시대 때인 주() 정정왕(貞定王) 16(기원전 453)에 한()과 조()와 위() 세 가문이 진() 땅을 나누어 가졌는데 이때 상당(上黨)이 한()에 소속되었다. 장평대전(長平大戰, 기원전 259) 뒤에 진()에 소속되었다. 진시황 때에 상당군(上黨郡)에 소속시켰다.

상당(上黨)은 염제(炎帝) 신농씨가 온갖 풀들을 맛보았고 오곡(五穀)을 식별하였으며 농사를 가르쳤던 곳, 즉 농경문화를 처음 열었던 곳이며 상()나라 때에는 옛 려국(古黎國)이 이곳에다 도읍을 건설하였었다 한다.

 

*적적(赤狄), 또는 적적(赤翟) : 춘추시대 때 적인(狄人)의 한 갈래이니 북적(北狄)은 적적(赤狄)과 장적(長狄), 백적(白狄)으로 나뉜다. 적적(赤狄)은 풍속에 붉은빛 옷을 숭상하여 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주로 열다섯의 씨족으로 이루어졌다 하는데 로씨(潞氏), 고락씨(皋落氏, 또는 고랑씨(皋狼氏)), 갑씨(甲氏), 류우(留吁), 탁진(铎辰), 장구여(廧咎如), 유적씨(有狄氏), 원흘씨(袁纥氏), 곡률씨(斛律氏), 해비씨(解批氏), 호골씨(護骨氏), 이기근씨(異奇斤氏) 들이다. 적적(赤狄), 진 동남(晋東南), 곧 산서성 동남쪽(山西省東南)에 살았었고 장적(長狄)은 그 살았던 곳이 자세하지 않다 하며, 백적(白狄)은 지금에 섬서성 일대라 한다

 

*당나라 때 문헌인 원화성찬(元和姓纂)()는 주()나라 때에 제후국의 하나였다. 풍속통(風俗通)구려(九黎)의 후손이다.’ 하고 상서(尚書)() 문왕(文王, 곧 서패(西伯))이 려()를 쳐서 이겼다.’ 하였다. 역시 모시(毛詩)와 좌전(左傳)에도 ()나라 대부(大夫) 려미(黎彌)’가 보이며 어떤 때에는 려() 자를 리()로 쓰기도 한다. 송성(宋城, 지금 하남성 상구(商丘) 회양구(睢陽區) : 송성은 지역 향토지를 말하는지 아니면 책 이름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우습유(右拾遺) 리흔(犂昕)과 낙양위(洛陽尉) 려회(黎廻)는 애주(愛州) 사람이다. (애주는 지금에 월남(越南) 청화(清化)) (습유(拾遺)란 뜻은 임금의 잘못된 정책을 꼬집는 것이고, 실제 업무는 정책 등을 의론하여 건의하는 것이라 한다.) 경조윤(京兆尹) 려간(黎幹)이 요(), (), (), (), (), ()을 낳았다. ()는 식()을 낳았으니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이다. (우산기상시의 업무는 주로 과실에 대한 바른말과 어떤 사안에 대한 황제의 질문에 갖추어 대답하며 황제가 궁 밖을 나갈 때면 말을 타고 따르는 것이다.)” 하였다. 하남(河南) : 관씨지(官氏志)업려씨(業黎氏)가 성씨를 고쳐 려씨(黎氏)로 하였다.” 하였다.

元和姓纂: 黎 周時侯國。《風俗通:九黎之後,尚書西伯戡黎,亦見毛詩》《左傳齊大夫黎彌,且字亦作犂。 【宋城:唐右拾遺犂昕洛陽尉黎廻愛州人,京兆尹黎幹生烑,煟生植,右常侍(右散騎常侍)。【河南】《官氏志業黎氏改為黎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