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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女真) 말갈(靺鞨)

여진(女真)〈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㑹編) 3권〉 16

by 쥐눈이 2023. 12. 14.

(9)흉노의 영역

진서(晉書)에 흉노(匈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흉노(匈奴)의 붙이들을 모두 묶어 말하기를 북적(北狄)이라 한다. 흉노 땅은 남쪽으로 연()과 조()나라에 닿아있고 북쪽으로는 사막(沙漠)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구이(九夷)와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육융(六戎)에까지 다다렀다.

晉書卷九十七匈奴之類總謂之北狄匈奴地南接燕趙北暨沙漠東連九夷西距六戎

 

(10)흉노와 주변 겨레들

()나라 하안(何晏)의 논어집해의소(論語集解義疏)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방(四方), 동쪽으로는 구이(九夷)가 있으니 하나는 현토(𤣥菟)요 둘은 낙랑(樂浪)이요 셋은 고려(高麗)요 넷은 만식(滿飾)이요 다섯은 부경(鳬更)이요 여섯은 색가(索家)요 일곱은 동도(東屠)요 여덟은 왜인(倭人)이요 아홉은 천비(天鄙)이다. 현토(𤣥菟)와 낙랑(樂浪)을 지역이 아닌 민족의 갈래로 분류 한 점은 내게 매우 특이하게 다가온다.

남쪽에는 팔만(八蠻)이 있으니 하나는 천축(天竺)이요 둘은 해수(咳首)요 셋은 초요(僬僥)요 넷은 기종(跂踵)이요 다섯은 천흉(穿胸)이요 여섯은 담이(儋耳)요 일곱은 구지(狗軹)요 여덟은 방척(旁脊)이다.

서쪽에 육융(六戎)이 있으니 하나는 요이(僥夷)요 둘은 의맥(依貊)이요 셋은 직피(織皮)요 넷은 기강(耆羗)이요 다섯은 비식(鼻息)이요 여섯은 천강(天剛)이다.

북쪽에는 오적(五狄)이 있으니 하나는 월지(月支)요 둘은 예맥(𣿄貊)이요 셋은 흉노(匈奴)요 넷은 선우(單于)요 다섯은 백악(白屋)이다.” 예맥(𣿄貊)을 북부 민족의 갈래로 분류한 것도 꽤 흥미롭다.

論語集解義疏 魏-何晏四方東有九夷 一𤣥菟 二樂浪 三高麗 四滿飾 五鳬更 六索家 七東屠 八倭人 九天鄙 南有八蠻 一天竺 二咳首 三僬僥 四跂踵 五穿胸 六儋耳 七狗軹 八旁脊 西有六戎 一僥夷 二依貊 三織皮 四耆羗 五鼻息 六天剛 北有五狄 一月支 二𣿄貊 三匈奴 四單于 五白屋也 

*후한서 동이전(東夷傳)에는 구이에 대해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라 하였다.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 )

*풍속통(風俗通)은 서쪽 육융(六戎)에 대해 하나는 요이(僥夷)라 하고 둘은 융앙(戎央, 또는 융이(戎夷))라 하고 셋은 노백(老白)이라 하고 넷은 기강(耆羌)이라 하고 다섯은 비식(鼻息)이라 하고 여섯은 천강(天剛)”이라 하였다. (一曰僥夷,二曰戎央(一作戎夷),三曰老白,四曰耆羌,五曰鼻息,六曰天剛)

 

(11)진서(晉書)에 기록된 흉노(匈奴) 1

...전한(前漢) 말기(곧 서한(西漢) 말기로 기원전 48기원후 9년 초)에 흉노(匈奴)가 크게 어지러웠으니 다섯 선우(單于)가 최고 자리를 두고서 다투다가 호한사선우(呼韓邪單于 ?-기원전 31, 련제씨(挛鞮氏), 이름은 계후산(稽侯㹪))이 자신의 나라를 잃고 부락을 껴 이끌고서 한()나라에 백성으로 들어갔다. 한나라가 그 마음을 가상히 여기어 병주(并州, 얼추 지금에 내몽고 하투(河套), 산서 태원(太原)과 대동(大同), 하북 보정(保定) 일대) 북쪽 경계를 떼어서 이들을 안주하게 하였다. 이에 흉노 5천여 마을이 삭방(朔方) 여러 군()에 들어가 살며 한() 사람들과 섞여서 지냈다.

*선우(單于)는 흉노 부락 연맹의 우두머리를 이르는 말이다. 선우(單于)는 두만선우(頭曼單于, ?- 기원전 209)가 만든 이름이며 이 이름은 흉노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동한(東漢 기원후 25-220)과 삼국(三國 기원후 220-280) 때에는 오환(烏桓)과 선비(鮮卑) 부락들이 선우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서진(西晋 265-316)과 동진(東晉 317-420), 십육국(十六国 304-439) 때에 이르러 모두 대선우(大單于)란 이름으로 바꾸었지만, 지위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한다.

▶《晉書 卷九十七 四夷傳 北狄匈奴...前漢末匈奴大亂五單于爭立而呼韓邪單于失其國攜率部落入臣於漢漢嘉其意割并州北界以安之於是匈奴五千餘落入居朔方諸郡,與漢人雜處

 

...건안(建安, 동한 말기 헌제(獻帝) 연호, 1961- 2203) 때에 조조(曹操) 위무제(魏武帝, 조조 사망 뒤 뒤미처 높인 시호)가 처음으로 그 무리를 나누어 다섯 부(五部)로 만들었는데 부()마다 그 안에 귀족인 사람을 세워 (, 우두머리)’라 하고 한인(漢人)을 골라 사마(司馬)에 앉혀 흉노 겨레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조조가 세운 위()나라 말기에 다시 ()’를 고쳐 도위(都尉)’라 하였다. 그 좌부도위(左部都尉)가 거느린 것은, 어림 만여 마을이며 태원(太原)에 옛 자씨현(故茲氏縣)에서 살았다. 우부도위(右部都尉)가 거느린 것은 어림 육천여 마을이며 기현(祁縣, 산서성(山西省))에서 살았다. 남부도위(南部都尉)가 거느린 것은 어림 삼천여 마을이며 포자현(蒲子縣, 지금 산서 습현(隰縣))에 살았다. 북부도위(北部都尉)가 거느린 것은, 어림 사천여 마을이며 신흥현(新興縣, 지금 산서 흔주시(忻州市))에서 살았다. 중부도위(中部都尉)가 거느린 것은, 어림 육천여 마을로 대릉현(大陵縣, 산서 교성현(交城縣))에서 살았다.

*자씨현(茲氏縣) : ()나라 때는 태원군(太原郡) 자씨(兹氏, 지금 산서(山西) 분양시(汾陽市))였고 서한(西漢) 때 자씨현(茲氏縣)을 설치하였다. 동한 말기에는 흉노 좌부(左部)가 이곳에서 살았다.

...建安中魏武帝始分其衆爲五部部立其中貴者爲帥選漢人爲司馬以監督之魏末復改帥爲都尉其左部都尉所統可萬餘落居於太原故茲氏縣右部都尉可六千餘落居祁縣南部都尉可三千餘落居蒲子縣北部都尉可四千餘落居新興縣中部都尉可六千餘落居大陵縣

서진(西晋) 무제(武帝, 곧 사마염(司馬炎) 재위 265-290)가 임금 자리에 오른 뒤 (266 - 270년 무렵에) 변방 요새 밖 흉노 땅에 큰물이 져서 색니(塞泥)와 흑란(黑難)들 이만여 부락이 귀화하니 무제가 다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하서(河西) 옛 의양성(宜陽城, 지금 낙양시 서쪽 의양현) 아래에 살게 하였다. 뒤에 다시 진()나라 사람들과 섞여 살게 하고 이로 말미암아서 평양(平陽), 서하(西河), 태원(太原), 신흥(新興), 상당(上党), 낙평(樂平)들 여러 군()에 흉노 민족을 두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태시(泰始, 서진 무제 연호, 26512- 274) 7년에 선우(單于) ()이 반란하여 공아성(孔邪城, 위치는 불분명)에 주둔하였다.

*(?- 272) : 유맹(劉猛)이다. 서진(西晉) 때 흉노 중부(中部)의 수(), 우현왕(右賢王) 거비(去卑) 아들. 맹이 반란을 하자 진()나라 정부에서 감군(監軍)을 시켜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가 결국 감군(監軍) 하정(何楨)이 유맹의 무리가 사납고 용맹하여 적은 수의 군대로는 잡을 수 없음을 알고서 유맹의 부하인 좌부수(左部帥) 이각(李恪)을 몰래 꾀어 유맹을 죽이고 자기에게 투항하게 하니 이 뒤로 흉노가 놀라서 항복하였다 한다.

武帝踐阼後塞外匈奴大水塞泥黑難等二萬餘落歸化帝復納之使居河西故宜陽城下後復與晉人雜居由是平陽西河太原新興上党樂平諸郡靡不有焉泰始七年單于猛叛屯孔邪城

 

오랫동안 감히 더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였지만, 그 뒤에 다만 분노와 한으로 장사(長史, 지금에 비서들 우두머리)를 죽이고 해쳐 점점 변방에 근심거리가 되었다. 시어사(侍御史)인 서하(西河) 사람 곽흠(郭欽)이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시어사(侍御史) : 기원전 221, 즉 진()나라 이전 시기에 천자(天子), 제후(諸侯), 대부(大夫), 읍재(邑宰)들은 밑에 ()’를 두었으니 이들의 업무는 기록이니 사관(史官)이나 비서관(祕書官)이었다. 어사(御史)는 본래 사관(史官)이었다가 그 업무 영역이 확대되었다 한다. 시어사(侍御史)는 간략히 어사(御史)’시어(侍御)’라고도 한다. ()나라가 시작되고 어사(御史)는 전적으로 감찰 업무를 맡는 관직이 되었으니 조정의 관원들을 감찰하는 것이었다. 이 관직은 진나라에서 마련되고서 청나라 때까지 존속되었다.

()나라나 한()나라 때 시어사(侍御史)의 운용을 보자면, 시어사(侍御史)는 어사대부(御史大夫) 밑에 있다. 조정에 고급관원들의 범법이 발생했을 경우 그 내용은 일반적으로 시어사를 통해 어사중승(御史中丞, 곧 어사대부의 차관)에게 보고하고 나서 위로 임금에게 알린다. 하급관원은 시어사(侍御史)가 직접 탄핵할 수가 있었고 집단으로 탄핵할 수도 있었다 한다. 이외에 명을 받고 주군(州郡)에 가서 풍속을 살피고 군대를 감찰하였다.

삼국(三國)과 양진(兩晉), 남북조(南北朝) 때에 어사(御使)는 곧 시어사(侍御史), 치서시어사(治書侍禦史, ()때 설치하고 명나라 태조 때 폐지. 지도와 호적대장, 문서 관리), 독군량시어사(督軍糧侍禦史, 삼국(三國) () 때 설치. 군대가 출정할 때 군량의 운송을 감독), 전중시어사(殿中侍禦史, 삼국 때 위나라가 설치. 궁전에 상주하며 감찰. 당나라 때는 궁전에서 지내는 의식 관장), 감국시어사(監國侍禦史, 주군(州郡)을 순찰하고 비리 관리들을 체포하거나 황제의 명을 전달하는 일을 한 듯)의 약칭이었다 한다. 또 금방어사(禁防禦史, ()와 진() 때 설치, 일종에 궁전 내 감찰관), 검교어사(檢校禦史, 동진(東晉) 때 설치, 궁 밖에서 관리들을 감찰)도 있었는데 비록 어사대의 일원이라 하더라도 어사대(御史臺)에서 지내지 않거나 들어가 숙직하지 않는다면 ()’ 자를 붙이지 않았다 한다.

*어사대부(御史大夫) : 어사대부(御史大夫)는 그 주요 업무가 둘인데 하나는 승상(丞相, 황제를 돕고 모든 관원을 관리하는 관원들의 우두머리)의 도우미로서 정치적 사안들을 처리하니 부승상(副丞相)으로도 불렸다. 다른 하나는 감찰기구인 어사대(御史臺)의 우두머리로 조정에 관원들, 특히 승상(丞相)에 대한 감찰 업무이다.

...積年不敢復反其後稍因忿恨殺害長史漸爲邊患侍御史西河郭欽上疏曰

 

융적(戎狄, 서쪽과 북쪽에 민족들)이 무지막지하며 사납고 흉악하여 오랫동안 골칫거리였습니다. ()나라 초기에 사람들이 적어 서북쪽 여러 군()은 모두 서부민족들이 차지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그들이 마음으로 감복하여 따르고 있다 해도 만약 백 년 뒤 세상에 아찔한 바람과 먼지가 일어 어지러워진다면 흉노의 말발굽(胡騎)이 평양(平陽)과 상당(上黨)에서부터 삼일도 못 되어 맹진(孟津, 낙양 북쪽)에 이를 것이고 북지(北地), 서하(西河), 태원(太原), 풍익(馮翊), 안정(安定), 상군(上郡)은 죄다 북부 민족에 뜨락이 될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우리 진(, 西晉)나라가 동오(東吳)를 평정한(() 무제(武帝) 함녕(咸寧) 511월에 전쟁 시작, 이 해는 곧 279) 위세가 떨쳐 져야 하며 지략가와 용맹한 장수들의 책략에 미쳐야 합니다. (곽흠이 상소를 올린 해는 진() 무제 태강(太康) 2, 281)

북지(北地, 지금에 시안(西安) 북쪽인 섬서(陝西) 부평(富平), 요현(耀縣) 일대), 서하(西河), 안정(安定)들의 백성을 덜어내어서 상군(上郡)을 다시 설치하고 (상군은 한 헌제(漢獻帝) 건안(建安) 20, 215년에 상군(上郡)을 폐하였다가 수나라 때 다시 설치) 풍익(馮翊)을 채우며 평양(平陽, 지금 산서(山西) 림분시(临汾市) 일대) 이북에 여러 현()에서 사형수들을 골라 모아 삼하(三河)로 이주시키되 삼위(三魏)에 뛰어난 병사() 4만 집으로 이곳(평양 이북)을 채운다면 변방 민족()들이 나라 안을 어지럽게 하지 못하게 되리니, 그러는 동안 점차 평양(平陽), 홍농(弘農), 위군(魏郡), 경조(京兆), 상당에 섞여 사는 흉노()들을 이주시키고 사방 민족들의 나라 안 출입에 대한 방비를 엄격하게 하면서 선왕(先王)들의 황복(荒服, 곧 변방)에 대한 제도를 분명히 함이 길이길이 뛰어난 꾀입니다.”

〔앞 글은 오랜 고민 끝에 번역한 것이지만 자신하지 못하겠다. 복잡한 당시 상황에 대한 앎이 부족한 때문이니 일단 문맥을 고려하면서 번역하였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원문 표점이 좀 다양한데 특히 於平陽以北諸縣募取死罪徒三河三魏見士四萬家以充之부분이 於平陽以北諸縣募取死罪, 徒三河三魏見士四萬家以充之로 된 글들이 많다. 이 글을 번역해 보면 평양 이북 여러 현()에서 사형수들을 골라 모으고 삼하(三河)와 삼위(三魏)에 뛰어난 병사 4만 집을 이주시켜서 이를 채우다이다. ‘사형수들을 골라 모았다(募取死罪)’는 말 뒤에 사형수들을 처리한 내용이 비니 문장이 좀 어설프다. 더구나 압축된 이 상소문에서 한 구절에 굳이 을 함께 나열한 것도 그렇고, ‘가 가리키는 곳도 명확해지지 않는다. 생각에 이 표점본들은 아마도 낙양 근방에 삼하(三河)와 삼위(三魏)가 거리상 서로 멀지 않은 데서 나온 듯하다. 그러나 옛날에는 청해(靑海, 지금 청해성)에도 삼하(三河)라 불리던 곳이 있었다. 사형수들을 변경지역에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하거나 군사로 이용한 기록들은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중 고조선과 관계된 잔인한 기록 하나를 소개한다.

한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24(기원전 109)에 세상에 사형수들을 모아서 조선(朝鮮)을 치기로 하고 6월에 양복(楊僕)과 순체(荀彘)를 보내어 모집에 응한 죄인들을 이끌고 조선(朝鮮)을 쳤다.”(출처. 서한회요(西漢㑹要) 57) 西漢㑹要 卷57元封二年四月 募天下死罪 擊朝鮮 六月 遣楊僕荀彘 將應募罪人 擊朝鮮

戎狄強獷曆古爲患魏初人寡西北諸郡皆爲戎居今雖服從若百年之後有風塵之警胡騎自平陽上黨不三日而至孟津北地西河太原馮翊安定上郡盡爲狄庭矣宜及平吳之威謀臣猛將之略出北地西河安定復上郡實馮翊於平陽以北諸縣募取死罪徒三河三魏見士四萬家以充之漸徙平陽弘農魏郡京兆上黨雜胡峻內外出入之防明先王荒服之制萬世之長策也

*三河 : 하남(河南, 낙양 남쪽), 하동(河東, 낙양 북서쪽, 하내(河內, 낙양 북동쪽, 하동 맞은 편) 하남(河南), 하북(河北), 하동(河東)(낙양을 중심으로한 지역들이다.) 황하(黃河), 사지하(賜支河, 황하 수계, 옛날 강() 겨레가 살았던 곳. 지금 청해(青海) 해남(海南) 장족자치주(藏族自治州)), 황하(湟河, 황수, 황하 상류에 지류, 청해성 동쪽에 있다) 세 물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서강전(西羌傳)()에 무익원검(無弋爰劍, 전국시대 초기 강() 민족의 우두머리)이란 사람이 진() 려공(厲公, ?- 기원전 443) 때에 진()나라에 잡혀있어 그들에 노예가 되었다. 진나라는 원검(爰劍)이 어느 북방민족의 갈래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뒤에 도망하여 돌아올 수 있었는데 진()나라 사람들이 추격이 코앞에 다달아 바위 구멍 안에 숨어서 잡힘을 면하였다. () 겨레 사람들이 말하기를 원검(爰劍)이 처음에 구멍 안에 숨었을 때 진() 사람들이 이곳에 불을 질렀는데 범같은 어떤 큰 모양이 생겨나더니 그를 위해 불꽃을 가려주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추격을 벗어나자 다시 의녀(劓女)와 들판에서 만났으니 의()는 코를 베였다는 뜻이다. 마침내 둘은 부부가 되었다. 여인은 자기 모습이 창피하여 머리카락을 써 얼굴을 가렸는데 강() 겨레가 이를 따라 풍습으로 삼았다. 부부는 결국 함께 도망하여 삼하(三河) 사이로 들어갔다.” 하였다. 속한서(續漢書)결국 함께 도망하여 하황(河湟) 사이로 들어갔다.” 하니 여기서 말하는 삼하(三河)는 바로 황하(黃河)와 사지하(賜支河), 황하(湟河)이다.

後漢書·西羌傳》:羌無弋爰劍者秦厲公時爲秦所拘執以爲奴隸不知爰劍何戎之別也後得亡歸而秦人追之急藏於岩穴中得免羌人雲爰劍初藏穴中秦人焚之有景象如虎爲其蔽火得以不死既出又與劓女遇於野截鼻也遂成夫婦女恥其狀被發覆面羌人因以爲俗遂俱亡入三河間。〔《續漢書遂俱亡入河湟間今此言三河即黃河賜支河湟河也。〕

*무익원검(無弋爰劍, 기원전 436-?) : 이 사람은 강() 겨레에게 농사와 목축을 가르쳐 그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훗날 그 자손들이 스스로 마을들을 만들어 나아가며 감청(甘青,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까지 들어갔고 그 일부는 백룡강(白龍江, 장강(長江) 지류인 가릉강(嘉陵江)의 지류. 감숙성 감남(甘南) 장족자치구 록곡현(碌曲縣)과 사천성 야이개현(若爾蓋縣)에서 발원) 유역으로 가서 감청(甘青)과 질부(迭部, 감숙성 감남(甘南) 장족자치주) 지역 안에 강() 민족의 중요한 구성원들이 되었다 한다. () 겨레는 노예를 무익(無弋)’이라 하고 우두머리를 원검(爰劍)’이라 하니 그래서 이 사람을 무익원검(無弋爰劍)이라 하였다 한다.

*삼위(三魏) : 광평(廣平, 하북(河北) 한단(邯鄲) 북쪽 일대), 양평(陽平, 한단(邯鄲) 동쪽 일대), 위군(魏郡, 한단 남쪽 일대)이다. 자치통감에 동진(東晉) 함강(咸康, 성제(成帝) 사마연(司馬衍)의 연호) 7(341)에 류상(劉翔)이 말하기를 모용진군(慕容鎮軍) 부자(父子)가 적은 수로써 무리를 격파하여 강적들을 여러 번 작살 내니 석호(石虎)가 두려워지게 되어서 변방의 백성들을 모조리 옮겨 삼위(三魏)에 흩어져 살게 하였고 나라가 천 리나 쫓겨나 계성(薊城, 지금 북경)을 북쪽 경계로 삼았습니다.’라 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資治通鑒》:東晉咸康七年劉翔言慕容鎮軍父子以寡擊眾屢殄強敵使石虎畏懼悉徙邊陲之民散居三魏,蹙國千里,以薊城為北境

*석호(石虎 295-349) : 상당군(上堂郡) 무향현(武鄕縣, 산서성 유사현(榆社縣)) 사람으로 갈() 겨레이다. 후월(後趙 319-351)의 제3대 제()이다. 후월은 16국 시대에 갈() 겨레 우두머리인 석륵(石勒)이 양국(襄國)의 터를 기반으로 지금에 하북과 산동에 세운 나라이다. 나라는 33년을 유지하였고 모두 일곱 명의 제()를 거쳤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