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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女真) 말갈(靺鞨)

여진(女真)〈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㑹編) 3권〉 18

by 쥐눈이 2023. 12. 29.

*오환(烏丸)과 선비(鮮卑) 민족 (출처 :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중원과 흉노, 오환 및 선비

서경(書經)에는 만이(蠻夷)가 나라()를 어지럽힌다.”라고 실려 있고 시경(詩經)에는 험윤(玁狁)이 제법 번성하고 있다.”라고 하니 나라에 근심을 끼친 지 오래되었다. ()과 한()나라 이후 흉노(匈奴)가 오래도록 변방에 골칫거리가 되었다. 한나라 효무(孝武, 한 무제(漢武帝) 재위: 기원전 141-87)가 비록 밖으로 사방 민족과 전쟁을 하여 동쪽으로 두 월나라와(兩越) 고조선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이사(貳師)의 대완(大宛)을 토벌하여 공작(邛苲), 야랑(夜郎)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모두 먼 국경 밖에 있어 나라 안에서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다.

양월(兩越) : 양월(兩越)이라 하면 보통 남방에 남월(南越)과 동월(東越)을 말하는 것인데 윗글에서는 동쪽에 고조선과 두 월나라가 있다는 말이니 좀 더 알아보아야 할 일이다.

이사(貳師) : 한서(漢書)에는 임금이 장사(壯士)와 거령(車令: 가마나 말을 담당하는 관리) 들을 시켜 천금과 금마(金馬)를 가지고서 완왕(宛王)에게 이사성(貳師城)에 있는 훌륭한 말을 주기를 요청하였다.” 하는데 이사(貳師)는 대완(大宛)에 있는 성()으로 나와 있지만 위 문장에서는 이사(貳師)와 대완(大宛)은 각각 다른 나라 이름인 듯하다. 이사성(貳師城)은 지금 길이길사(吉爾吉斯 키르키스탄) 공화국 서남쪽에 있다고 한다. 漢書 卷061 使壯士車令等持千金及金馬以請宛王貳師城善馬

공작(邛苲) : 지금에 사천(四川) 서창(西昌)과 한원(汉源) 일대.

야랑(夜郎) : 지금에 귀주 서부 동재현(貴州 西部 桐梓縣)

三國志 魏書三十 烏丸鮮卑

蠻夷猾夏」,《玁狁孔熾」,久矣其爲中國患也漢以來匈奴久爲邊害孝武雖外事四夷東平兩越朝鮮西討貳師大宛開邛苲夜郎之道然皆在荒服之外不能爲中國輕重

그 결과 흉노가 제하(諸夏, 중원 땅)에 가장 가까이 있어서 호인(胡人) 기마가 남침을 할 때면 서쪽, 북쪽, 동쪽 세 변방에서 적에 침입을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이라는 장수들을 보내어 북쪽 깊이 들어가 치게 하니 이들이 흉노 임금 선우(單于)를 끝까지 쫓아가 그 푸지고 넉넉한 땅을 빼앗았다. 뒤에 마침내 변방에 군사들을 살게 하면서 요새를 지키게(保塞) 하고서 이를 울타리라 일컬었지만, 세대를 거치면서 (요새를 지키려는 기세가) 느슨하고 약해졌다.

위청(衛靑) : 태어난 해는 알려진 바가 없고 기원전 106년에 돌아갔다. 서한(西漢)에 유명한 장군 하동군 평양현(河東郡平陽縣, 지금 산서성(山西省) 임분시(臨汾市)) 사람이라 한다.

곽거병(霍去病) : 기원전 140-117년에 산 서한(西漢)에 유명한 장군. 하동군 평양현(河東郡平陽縣, 지금 산서성(山西省) 임분시(臨汾市)) 사람이라 한다.

而匈奴最逼於諸夏胡騎南侵則三邊受敵是以屢遣衛霍之將深入北伐窮追單于奪其饒衍之地後遂保塞稱籓世以衰弱

건안(동한(東漢) 말기 헌제(獻帝) 연호, 사용 기간 : 1961-2203) 때에 남흉노 선우(單于) 호주천(呼廚泉)이 한나라 조정에 들어갔으나 결국 한나라 내시(內侍)가 된 호주천(呼廚泉)을 조조(曹操)가 억류하고서 호주천의 우현왕(右賢王)을 시켜 그 나라를 달래게 하였지만, 흉노(匈奴)는 그 부절(符節)을 꺾어버리니 한나라의 종전에 외교 정책보다 심하였다.

호주천(呼廚泉) : 동한 말에서 삼국(三國 220-280) 시기에 사람. 남흉노(南匈奴) 강거 선우(羌渠单于)의 아들이다. 동한 말기(207)에 호주천(呼廚泉)이 한나라 조정에 들어가 내시(內侍)가 되고서 우현왕(右賢王)에게 자신이 다스리던 흉노 조정을 다스리게 하였었다. 그러다 216년에 위왕(魏王) 조조(曹操)가 세력이 자라면서 업성(鄴城, 지금 한단시 임장현(邯鄲市臨漳縣))에 도읍하였고 조조의 명성이 북방 흉노에까지 퍼져 흉노 사람들이 조조를 우러러 보아서 호주천(呼廚泉)이 업성(鄴城)에 가서 그를 뵈었는데 조조가 흉노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호주천을 억류하고서 호주천의 우현왕에게 남흉노 부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어 조조가 남흉노를 다섯 부()로 가르고 각 부마다 존귀한 사람을 뽑아 수장으로 삼고서 한족(漢族) 사람을 사마(司馬) 자리에 앉혀 이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좌부(左部)는 태원(太原) 옛 자씨현(兹氏縣, 산서성(山西省) 분양(汾陽) 동남)에서 살게 하고 우부(右部)는 기현(祁縣)에 살게 하고 남부(南部)는 포자현(蒲子縣, 산서성 습현(隰縣))에 살게 하고 북부는 신흥현(新興縣, 산서성 흔현(忻縣))에 살게 하고 중부는 대릉현(大陵縣, 산서성 문수현(文水縣))에 살게 하였다. 이로 인해 남흉노 부락 조직은 이름만 남게 되고 그 권력은 조조 위나라 수중에 들어가 결국 남흉노 국가는 멸망하게 되었다 한다.

우현왕(右賢王) : 현왕(賢王)의 하나이다. 우현왕(右賢王)과 좌현왕(左賢王)이 있으니 대선우(大單于)를 도와 나랏일을 처리하였다. 옛날 흉노 관작 이름이었다가 5세기 중반에 관직이 되었다. 우현왕은 여러 우왕(右王)과 함께 흉노 서부(西部)에서 살며 그 아래에는 여러 신하를 두었다. ‘어질 현()’은 흉노 말로 도기(屠耆)’이다. 우도기왕(右屠耆王)이라고도 한다.

建安中呼廚泉南單于入朝遂留內侍使右賢王撫其國而匈奴折節過於漢舊

 

그러고 나서 오환(烏丸)과 선비(鮮卑)가 점차 다시 강성해졌으니 이 역시 한나라 말기 혼란을 틈탄 것으로 나라 안에 일들이 많아 밖으로 토벌할 겨를이 없었다. 그 때문에 오환(烏丸)과 선비(鮮卑)가 한남(漢南 지금 무한시(武漢市) 서남부(西南部))에 땅을 쥐락펴락하여 성읍(城邑)들을 빼앗거나 약탈하였으며 사람들을 죽이거나, 노략질할 수 있었으니 북쪽 변방은 그대로 그 어려움을 겪었다.

然烏丸鮮卑稍更強盛亦因漢末之亂中國多事不遑外討故得擅漢南之地寇暴城邑殺略人民北邊仍受其困

원소(袁紹 ? - 202628, 동한(東漢) 말에 군벌, 군웅의 한 사람)가 하북(河北)을 손아귀에 넣었을 때, 삼군(三郡, 요동(遼東), 요서(遼西), 우북평(右北平, 당산시(唐山市) 풍윤(豐潤))에 사는 오환(烏丸()) 겨레들을 어루만져 차지하고 그들의 이름난 임금들을 아껴서 그 정예 기마병들을 거두었다. 그 뒤 원소의 아들 상()과 희()가 또한 답둔(蹋頓 ?-207년 요서군 오환붙이, 지금 요녕성 의현(義縣)이 근거지)에게로 도망쳤다. 오환의 임금 답둔(蹋頓) 또한 날래고 용맹하여 변방에 어르신들 모두는 그를 묵특(冒頓)에 견주었으니 답둔은 그 땅이 험하고 중원에서 먼 것을 믿고서 과감하게 망명자들을 받아들이어서 사방 모든 민족에 영웅이 되었다. 동한(東漢) 말기(207) 권신 조조(曹操, 조위(曹魏)의 태조)가 비밀리에 군대를 내서 북쪽을 치니 그 생각지 못한 출병(出兵)이라 한 번 전투에 이들을 평정하니 북방 민족들이 두려워 항복하였고 북녘땅을 압도하여 떨게 하였다. 드디어 오환의 무리를 이끌고 토벌한 군대에 복종하니 변방에 백성들이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會袁紹兼河北乃撫有三郡烏丸寵其名王而收其精騎其後尚熙又逃於蹋頓蹋頓又驍武邊長老皆比之冒頓恃其阻遠敢受亡命以雄百蠻太祖潛師北伐出其不意一戰而定之夷狄懾服威振朔土遂引烏丸之衆 服從征討而邊民得用安息

뒤에 선비(鮮卑) 큰 어른 가비능(軻比能 ?-235, 동한 말기와 삼국 시기에 선비 겨레 수령)이 다시 여러 북방 민족을 제어하여 흉노의 옛 땅을 다 거두어 쥐고서 운중(雲中, 지금 내몽고 자치구 중부 탁극탁(托克托))과 오원(五原, 내몽고 자치구 서부, 파언뇨이시(巴彦淖尔市) 남부 오원현) 동쪽부터 요수(遼水)까지 모두 선비(鮮卑)의 뜨락으로 만들었다. 요새를 침범하고 변방에 침입하여 유주(幽州, 북경과 천진 등 옛 연()나라 땅)와 병주(并州, 내몽고 하투(河套), 산서 지방 태원(太原) 및 대동(大同), 하북 지방 보정(保定) 일대)가 고통을 겪었다. 이러는 사이에 전예(田豫)가 마성(馬城)에서 포위된 일이 있었고 필궤(畢軌)가 형북(陘北)에서 패배한 일이 있었다.

청룡(青龍 위나라 명제 조예의 연호 233-237) 사이에 제()가 드디어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웅(王雄)의 말을 듣고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 겨레붙이 마을 사람들이 헤어져 흩어졌고 서로 침탈하다가 강하면 멀리 도망가고 약하면 복종을 청하였다. 이 때문에 변방은 조금 안정이 되었고 한남(漢南) 지역도 시끄러운 일들이 드물었다. 비록 때때로 자못 노략질이며 도적질이 있었지만 더는 서로를 부추겨 혼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었다.

後鮮卑大人軻比能復製禦群狄盡收匈奴故地自雲中五原以東抵遼水皆爲鮮卑庭數犯塞寇邊并苦之田豫有馬城之圍畢軌有陘北之敗青龍中帝乃聽王雄遣劍客刺之然後種落離散互相侵伐強者遠遁弱者請服由是邊陲差安漢南少事雖時頗鈔盜不能復相扇動矣

전예(田豫) : 171-252, 조위(曹魏) 때의 장수로 어양옹노(漁陽雍奴), 곧 지금에 천진시(天津市) 무청구(武清區) 사람이다.

마성에서의 포위(馬城之圍) : 위 명제(魏明帝, 조예(曹睿)로 조비의 아들) 태화(太和) 2(228)에 전예(田豫)가 사신을 선비 나라에 보냈는데 가비능(軻比能)의 사위 욱축건(郁筑鞬)이 그 사신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자 전예(田豫)가 서선비(西鮮卑)인 포두(蒲頭, 서선비 초대 군장)와 가비능에게 아버지를 잃은 설귀니(泄歸泥, 서선비 두 번째 군장으로 포두를 이었다)를 이끌고 욱축건(郁筑鞬)을 쳐서 깨뜨리고 돌아오는 길에 가비능(軻比能)의 공격을 받고서 마성(馬城, 지금 당산(唐山) 련남(灤南) 마진성(馬眞城))에서 포위된다. 그러나 사마(司馬)에게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남문으로 나가게 하여 상대의 이목을 끌게 하고 자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북문으로 나오니 가비능 군대를 놀라 대열이 흩어져 크게 무찌른다.

有陘北之敗 : 필궤(畢軌, ?-249)는 삼국 시기, 조위국(曹魏國)에 큰 신하이다. 형북에서 패배(陘北之敗)에 대해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실린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하동기(河東記)구주(勾注, 산서(山西) 대현(代縣) 서북)는 산 생김새가 덫처럼 에둘러 도사리고 있어 물살이 흘러 주입되기에 이름이 붙여졌다.’ 하였다. 구주(勾注)는 또한 형령(陘嶺)이라고도 하니 안문(鴈門, 현재 산서성 흔주시(忻州市) 대현(代縣))에서 남쪽부터는 형남(陘南)이라 하고 북쪽부터는 형북(陘北)이라고 한다. () 중평(中平, 영제 연호, 18412-1893) 이후에 강()과 호() 민족들이 크게 소동을 일으켜 형북(陘北)의 땅이 모두 미개한 먼 변방(荒外) 땅이었고 위()와 진() 나라 때에는 모두 구주(勾注)를 변방 요새()로 삼았다. 조위(曹魏) 청룡(青龍, 명제(明帝) 조준(曹叡)의 두 번째 연호) 원년(元年, 233)에 선비(鮮卑) 가비능(軻比能)이 보새 선비(保塞鮮卑) 보도근(步度根)을 꾀어 이때에 보도근(步度根)은 태원(太原) 안문새(鴈門塞)를 지키고 있었다.(병주(并州)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더불어 화친(和親)을 맺어 스스로 기병 만기(萬騎)를 끌고 형북(陘北)에서 그의 식솔들과 싣고 온 물자들을 맞이하였다. 형주자사(并州刺史) 필궤(畢軌)가 군대를 내보내 이들 세력을 막아 그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위() 임금(명제(明帝) 조준(曹叡))이 조서를 내려 신중히 하되 변경 요새를 넘어 구주(勾注)를 지나지 말라!” 하였다. 이때 궤()의 군대가 벌써 먼저 진격하였으니 과연 패배하였다. (출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39) 讀史方輿紀要 卷三十九 : 河東記》:「勾注以山形勾轉水勢流注而名。」亦曰陘嶺自鴈門以南謂之陘南以北謂之陘北自漢中平以後羌胡大擾陘北之地皆爲荒外晉時並以勾注爲塞曹魏青龍元年鮮卑軻比能誘保塞鮮卑步度根,〈時步度根保太原鴈門塞。〉與結和親自勒萬騎迎其累重(累謂妻子, 重謂輜重)於陘北并州刺史畢軌請出師拒遏魏主詔曰:「慎勿越塞過勾注也。」時軌軍已先進果敗

보새선비(保塞鮮卑) : 조씨의 위나라(曹魏) 초기에 형령(陘嶺) 이북을 싹 다 포기하고 위나라로 귀순한 선비(鮮卑) 보도근(步度根) 부족을 구주새(句注塞) 남쪽에 살게 하고서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이들을 보새선비(保塞鮮卑)라 부른다 한다.

오환(烏丸)과 선비(鮮卑)는 곧 옛날에 이르던 동호(東胡)이다. 그 풍속과 종전에 있었던 일들은 한기(漢記)를 저술할 때에 적어 실어 놓았다. 따라서 그저 한나라 말기와 위()나라 초기 이래에 것만을 들어서 사이(四夷)의 변화를 제공하였다고 하겠다.

烏丸鮮卑即古所謂東胡也其習俗前事漢記者已錄而載之矣故但舉漢末魏初以來以備四夷之變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