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오환(烏丸) (출처 :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위서(魏書)에 “오환이란 동호(東胡)이다. 한(漢) 초기에 흉노 묵특(匈奴冒頓)이 그 나라를 멸하였는데 남은 그 겨레붙이들이 오환산(烏丸山)을 지켰고 이로 인해서 오환(烏丸)을 그들 이름으로 삼았다. 그들 민간 풍속이 말 타고서 활쏘기를 잘하고 물과 풀을 따라서 짐승들을 놓아서 먹이며, 사는 곳이 일정한 데가 없어서 천막(穹廬, 짐승 털로 만든 장막. 예, 몽고의 파오)을 집으로 삼는데 천막이 모두 동쪽으로 향한다.
▶烏丸 《魏書》曰:烏丸者,東胡也。漢初,匈奴冒頓滅其國,餘類保烏丸山,因以爲號焉。俗善騎射,隨水草放牧,居無常處,以穹廬爲宅,皆東向。
▶날마다 주살로 짐승들을 사냥하고 고기를 먹으며 말젖으로 만든 술(酪)을 마시고 짐승 털로 옷을 만든다. 젊은이를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를 낮게 여기며 그 성질은 사납고 거만하여 분노하게 되면 아버지나 형을 죽이지만 끝내 그 어머니는 해치지 않으니 어머니는 한 집안 붙이가 있으나, 자신에게 아버지와 형들은 옮겨와 사는 처지(種)여서 보복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日弋獵禽獸,食肉飲酪,以毛毳爲衣。貴少賤老,其性悍驁,怒則殺父兄,而終不害其母,以母有族類,父兄以己爲種,無復報者故也。
▶용감하고 굳세어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결투를 다스리고 서로 침범하는 일을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을 늘 추천하고 뽑아서 큰 어른(大人)으로 삼는다. 마을마다 작은 우두머리(小帥)가 있지만 대대로 계승되지는 않는다. 8-9백에서 천(數百千) 가구( 落)들이 한 부(部)가 되고 큰 어른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 일이 생기면 나무를 깎아 신호를 만들고 마을마다 전달하면서 다니니 글자는 없지만, 부(部) 사람들은 감히 거스르거나 어기는 일이 없다.
〔가구(落) : ‘落’에는 ‘거처(居處, residence)’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무심코 ‘마을’로만 번역하였었다. ‘거처’와 ‘마을’에 작지만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은 큰 테두리를 친 범위를 말하지만, 거처는 마을을 이루고 있는 가구들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常推募勇健能理决鬥訟相侵犯者爲大人,邑落各有小帥,不世繼也。數百千落自爲一部,大人有所召呼,刻木爲信,邑落傳行,無文字,而部衆莫敢違犯。
▶씨성(氏姓)에 일정함이 없고 큰 어른 중에 굳센 사람의 이름이나 자(字)를 성(姓)으로 삼는다. 큰 어른 아래부터는 각자 스스로 가축을 기르며 생산활동을 꾸려나가고 공짜로 상대를 부려먹지 않는다.
氏姓無常,以大人健者名字爲姓。大人已下,各自畜牧治產,不相徭役。
▶그 결혼에는 모두 먼저 개인적으로 정을 통하고 예를 차림이 없이(略) 여인을 데리고 갔다가 더러는 반년 백일이 된 뒤에야 중매 아낙을 시켜서 말과 소, 양을 보내니 이것으로써 아내를 맞이하는 예를 치른다.
〔본문 ‘(혼인에 따른) 예를 차리지 않고 여자를 데리고 간다 (略將女去)’에서 ‘략(略)’을 ‘강탈, 빼앗을 략(掠)’으로 풀이하는데 곧 지금도 일부 나라에서 더러 행해지고 있는 ‘신부 납치(Bride Kidnapping)’이다. 그러나 ‘먼저 정을 통한 사이’인데 ‘남자가 아내로 삼기 위해 그 여자를 강탈한다’는 해석은 무리가 있는 듯하다.
‘략(略)’에 대해서는 후한서(後漢書)에서 “그 결혼에는 먼저 여자에게 예를 차리지 않고 취하여(略) 정을 통하고서 〈두예(杜預)가 풀이하기를 “좌전(左傳)에서 말하기를 ‘예법으로 취하지 않는 것을 ‘략(略)’이라 한다.’” 하였다.〉 더러는 반년 백일이 된 뒤에야 소와 말, 양들을 보내어 결혼 예물로 삼는다.”라 썼다. 後漢書 卷120 其嫁娶 則先略女通情〈杜預注左傳曰不以道取為略〉 或半嵗百日 然後送牛馬羊畜 以為聘幣〕
▶其嫁娶皆先私通,略將女去,或半歲百日,然後遣媒人送馬牛羊以爲聘娶之禮。
▶사위가 아내를 따라와서 아내의 집사람들을 뵙는데 어른부터 차례를 따져 내려가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 모두 절을 하되 그 부모에게는 따로 절을 올리지 않는다.
〔‘모두 절을 하다(皆拜)’는 해석에서 ‘皆’는 ‘그 가족 각자 모두에게’를 뜻하는지, 아니면 ‘한꺼번에 모두에게’를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뒷말에 ‘직접, 따로, 별도로’를 뜻하는 ‘自’가 있어 ‘한꺼번에 절을 올린다’로 해석해볼 수 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旦旦拜之,而不拜其父母’(아침에 절을 올리는데 그 부모에게는 절을 올리지 않는다)라 썼다.〕
▶婿隨妻歸,見妻家無尊卑,旦起皆拜,而不自拜其父母。
▶사위는 처갓집에서 2년 동안 일을 해주고서야 처가는 마침내 물자를 풍부히 챙겨주어 딸을 보낸다. 보금자리와 재물은 모두 다 처가에서 나기 때문에 그 풍속은 아내의 계획을 따르며 전투를 하게 될 경우에야만 마침내 스스로 결정한다.
▶爲妻家僕役二年,妻家乃厚遣送女,居處財物,一出妻家。故其俗從婦人計,至戰鬥時,乃自決之。
▶아버지와 아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마주하여 엉덩이를 땅에 댄 채 쭈그리고 앉으며 머리카락을 다 잘라서 가볍고 편리하게 만든다.
▶父子男女,相對蹲踞,悉髡頭以爲輕便。
▶여인이 시집갈 때가 되면 드디어 머리카락을 기르다 두 갈래로 갈라 묶고 머리꾸미개인 구결(句決)을 붙이고 금과 푸른빛을 띤 녹빛 옥으로 꾸미니 우리 중원에 있는 관보요(冠步搖)와 같다.
▶婦人至嫁時乃養發,分爲髻,著句決,飾以金碧,猶中國有冠步搖也。
▶아버지나 형제가 죽으면 아들은 그 계모(後母)를 아내로 삼고 아우는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만약 형수를 아내로 삼을 사람이 없으면 형수의 아들이 가까운 가족 순서대로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에게 아내로 삼게 해주고, 죽으면 그 죽은 옛 남편에게 돌아간다.
▶父兄死,妻後母執嫂;若無執嫂者,則己子以親之次妻伯叔焉,死則歸其故夫。
▶민간에서는 새와 들짐승이 새끼를 배고 낳아 기르는 때를 알아먹고서 네 계절을 잡으니 밭갈이와 씨뿌리기에는 늘 두견새(布穀) 노래 소리가 나면 그 철(候)로 여긴다.
▶俗識鳥獸孕乳,時以四節,耕種常用布穀鳴爲候。
▶땅은 푸른 기장(青穄, 제(穄)는 끈기없는 기장의 한 종류, 또는 메기장)과 동장(東牆, 東蘠)을 기르기에 좋은데 동장은 봉초(蓬草)와 비슷하며 열매는 해바라기씨와 같고 10월이 되면 익는다. 흰술(白酒)을 빚을 수 있지만 누룩을 만들 줄 모른다. 쌀은 늘 우리 중원 것을 우러러본다. 〔봉초씨로 밥을 지으면 멥쌀과 다름이 없다. 天中記巻四十五 : 蓬草子作飯 無異秔米〕
▶地宜青穄、東牆,東牆似蓬草,實如葵子,至十月熟。能作白酒,而不知作麹蘖。米常仰中國。
▶어른은 활과 화살, 안장과 굴레를 만들고 쇠와 철을 불려 병기를 만들 수 있으며 가죽에 바느질하여 무늬를 수 놓으며 털실로 모직 천을 짤 수가 있다.
大人能作弓矢鞍勒,鍛金鐵爲兵器,能刺韋作文繡,織縷氈毼。
▶병이 나면 쑥으로 뜸뜰 줄 알며 더러는 돌을 태워 스스로를 따뜻하게 하거나 땅을 태워 위에 눕고 더러는 병통이 있는 곳을 따라 칼로 맥을 터서 피를 내고 천지 산천 신령들께 기도를 드리기도 하는데 침과 약은 없다.
▶有病,知以艾灸,或燒石自熨,燒地臥上,或隨痛病處,以刀決脈出血,及祝天地山川之神,無針藥。
▶전쟁에서의 죽음을 높이 사 주검을 거두어 관에 넣어 두고, 죽음 그 처음에는 울음을 울고 장례를 치를 때면 노래하고 춤을 추며 주검을 배웅한다. 개를 통통하게 길러서 알록달록한 끈을 둘러 끌어오고 망자(亡者)가 탔던 말에 입혔던 물건들과 살았을 때 지녔던 꾸미개들을 아울러 거두어서 모두 태워서 보낸다. 개에게 특별히 부탁(屬累)하는데, 개에게 죽은 사람의 신령을 지켜서 적산(赤山)에 돌아가게끔 한다. 적산은 요동(遼東) 땅 서북쪽 수천 리에 있다. 우리 중원 사람들이 죽은 혼신이 태산(泰山)에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장례 날이 되면 밤에 친척과 벗들을 모아 빙 둘러앉게 하고 개와 말을 끌고서 사람들 앉은 자리마다 지나는데 돌다가 노래거나 울음을 울게 되면 앉은 사람들은 고기를 던져 준다. 상주(喪主)는 두 사람을 시켜 비나리를 읊게 하니 죽은 사람의 넋이 어서 빨리 적산에 이르게 하고, 험난하고 막힌 곳을 지날 때면 비명횡사한 귀신이 망자의 넋을 가려 가두지 말아서 적산(赤山)에 이르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고 나서 개와 말을 죽이고 옷가지들을 태웠다.
▶貴兵死,斂屍有棺,始死則哭,葬則歌舞相送。肥養犬,以采繩嬰牽,並取亡者所乘馬、衣物、生時服飾,皆燒以送之。特屬累犬,使護死者神靈歸乎赤山。赤山在遼東西北數千里,如中國人以死之魂神歸泰山也。至葬日,夜聚親舊員坐,牽犬馬曆位,或歌哭者,擲肉與之。使二人口頌咒文,使死者魂神徑至,歷險阻,勿令橫鬼遮護,達其赤山,然後殺犬馬 衣物燒之。
▶귀신을 공경하며 하늘과 땅, 해달과 별들, 산과 내 그리고 돌아가신 어른들 가운데 어마하게 이름난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되 역시 소와 양을 올려 똑같이 제사를 지내고서 제사를 마치면 이것들을 다 태운다.
▶敬鬼神,祠天地日月星辰山川,及先大人有健名者,亦同祠以牛羊,祠畢皆燒之。
▶먹고 마실 때 반드시 먼저 제를 올린다. (우리 전통 사회에서도 음식을 먹을 때 ‘고시레’를 외며 음식 조금을 던졌었다.)
飲食必先祭。
▶그 간략한 법률에는 어르신의 말씀을 어기면 죽음이고 훔치기를 그치지 않으면 죽음이다. 서로 해치고 죽이는 데에는 마을 우두머리(都落)가 직접 보고하게 하는데, 보고가 그침이 없으면 어르신한테 나아가게 하여 사태를 고르게 하니, 죄가 있는 사람은 그 소와 양을 내서 죽을 목숨을 용서받고서야 사태가 끝난다. 그러나 따로 그 해치거나 죽인 사람의 아버지나 형을 죽이더라도 묻는 죄가 없다. 도망하거나 배반하여 어르신에게 붙잡힌 사람들에 대해서는 여러 마을이 기꺼이 받아들려 하지 않아 모두 쫓아내어 멀고 삭막한 옹광(雍狂) 땅에 가서 살게 한다.
▶其約法,違大人言死,盜不止死。其相殘殺,令都落自相報,相報不止,詣大人平之,有罪者出其牛羊以贖死命,乃止 自殺其父兄無罪。其亡叛爲大人所捕者,諸邑落不肯受,皆逐使至雍狂地。
▶오환이 사는 땅에는 산이 없고 사막과 흐르는 물, 풀과 나무가 있다. 많은 살무사가 정령(丁令) 서남쪽과 오손(烏孫) 동북쪽에 있어서 이 때문에 사람들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地無山,有沙漠、流水、草木,多蝮蛇,在丁令之西南,烏孫之東北,以窮困之。
① 정령(丁令) : 정령(丁靈), 정령(釘靈)이라는 다른 표기가 있고 고거(高車), 적력(狄曆), 철륵(鐵勒), 정령(丁零)이라고도 한다. 중원이 삼국(三國) 때에 그대로 남아 바이칼호 남쪽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겨레를 북정령(北丁零)이라 불렀고 알타이산(阿尔泰山, Altai) 쪽으로 옮겨 가 남쪽으로는 오손(烏孫)과 차사(車師)를 이웃하며 서남쪽으로는 강거(康居)와 이웃하고 있던 겨레를 서정령(西丁零)이라 불렀다 한다. 상서(尚書)에 “북방 끝에, 정령(丁令) 북쪽에서부터 오랜 눈이 쌓여있는 벌판에 이르기까지 제 전욱(帝顓頊)을 돕는 신(神) 현명(玄冥, 물과 비, 겨울, 북방의 신)이 이곳을 살피고 있다.” 하였다. 《尚書》卷三:“北方之極,自丁令北至積雪之野,帝顓頊神玄冥司之。”
② 차사(車師) : 한나라 때 서역에 있던 나라. 그 서울은 교하성(交河城, 지금 신강 토로번(吐魯蕃))이다. 동남쪽으로는 돈황(燉煌)으로 통하고 남쪽으로는 루란(樓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파음곽릉(巴音郭楞) 몽고자치주)과 선선(鄯善, 신강 토로번시)으로 통하며 서쪽으로는 언기(焉耆)로, 서북으로는 오손(烏孫)으로, 동북으로는 흉노로 통하였다 한다.
처음 이름은 고사(故師)였다. 사기(史記)에 “루란(樓蘭)과 고사(姑師 곧, 차사(車師)) 두 나라는 읍에 성곽을 갖추고 있고 염택(鹽澤 곧, 라포박(羅布泊), 로브노르(Lob Nor), 신장 동남쪽에 있음)을 앞에 두고 있다. 염택은 장안(長安)과 거리가 5천 리 정도이다. 흉노 우방(匈奴右方)이 염택 동쪽을 차지하여 농서(隴西, 감숙성 동남쪽)의 장성(長城)에까지 이르며 남쪽으로 강(羌, 청해, 감숙, 사천성 일대에 살던 민족)과 이웃하며 한나라 길(漢道)에 의해 막힌다 .” 하였다. 史記卷123 大宛列傳 : 而樓蘭、姑師〈【正義】二國名。姑師即車師也。〉邑有城郭,臨鹽澤。鹽澤去長安可五千里。匈奴右方居鹽澤以東,至隴西長城,南接羌, 鬲漢道焉。
③ 오손(烏孫) : 그 임금을 곤막(昆莫), 또는 곤미(昆彌)라 한다. 기원전 2세기 초엽에는 오손(烏孫) 사람들은 월씨(月氏) 사람들과 똑같이 지금에 감숙(甘肅) 안에 둔황(敦煌)과 청해(靑海), 치롄(祁連)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다. 기원전 2세기 말경에 묵특(冒頓) 선우(單于)가 월씨를 공격하여 서쪽 이리하(伊犁河, 일리강(Ili River),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옮기게 만들고, 뒤에 다시 오손(烏孫) 곤막(昆莫, 임금)인 렵교미(獵驕靡)와 묵특의 아들 로상선우(老上单于, 련제계죽(挛鞮稽粥)이다. 기원전 174년 묵특이 돌아가고 흉노 3대 선우(임금)로 즉위)가 함께 이리하(伊犁河)를 쳐 월씨들 대부분이 남쪽 대하(大夏, 청장 고원 서북쪽에 파미르 서쪽 땅) 경내로 옮겨갔다. 드디어 렵교미와 그 오손 겨레가 기원전 161년 즈음 이리하(伊犁河)와 이색극호(伊塞克湖, 이식쿨호(Issyk Kul)) 일대로 옮겨 가서 적곡성(赤谷城, 키르키스탄 이식쿨호수 남쪽)에 도읍하며 세력이 커졌다 한다.
사기(史記)에 “오손(烏孫)은 대완(大宛, 중앙아시아 페르가나분지에 있던 나라) 동북 2천 리 되는 땅에 있으니 한 곳에 붙어서 있지 않은 유목 나라(行國)로 가축을 따라서 사는데 흉노와 풍속이 같다.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들이 수만이고 전쟁에 과감하다. 옛날에는 흉노에 복종하였으나 세력이 왕성해지자 억류되었던 오손(烏孫) 붙이들을 데려왔고 흉노 조정(朝廷)에 조회(朝會)를 기꺼이 가지 않으려 하였다.” 하였다. 史記 卷123 : 烏孫在大宛東北可二千里,行國,〈【集解】徐廣曰:「不土著。」〉隨畜,與匈奴同俗。控弦者數萬,敢戰。故服匈奴,及盛,取其羈屬,不肯往朝會焉。
④ 강거(康居) : 사기에 “강거(康居)는 대완(大宛) 서북쪽 2천 리 정도 되는 곳에서 살았으니 유목국가로 월씨(月氏)와 풍속이 크게 같다.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들이 8-9만 명이다. 대완과 이웃한 나라인데 나라가 작다 보니 남쪽으로는 월씨(月氏)에 메여서 섬기고 동쪽으로는 흉노에 메여 섬기었다. 史記 卷123 :康居在大宛西北可二千里,行國,與月氏大同俗。控弦者八九萬人。與大宛鄰國。國小,南羈事月氏,東羈事匈奴。
⑤ 월씨(月氏) : 월씨(月氏), 곧 대월씨(大月氏)는 기원전 2세기에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이었다. 그전에 중국 서북부에 살다가 중앙아시아로 옮겨갔고 진나라 이전 기록에는 옹지(禺知), 옹씨(禺氏), 우씨(牛氏)라고도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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