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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女真) 말갈(靺鞨)

여진(女真)〈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㑹編) 3권〉 23

by 쥐눈이 2024. 2. 1.

3-1. 선비(鮮卑) (출처 :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선비(鮮卑) : 위서(魏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비(鮮卑) 역시 동호(東胡)의 남겨진 겨레이다. 동호와 갈라져 선비산(鮮卑山)을 의지해 살아서 이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그 말과 습속은 오환(烏丸)과 같다. 그 땅은 동쪽으로 요수(遼水)에 닿아있고 서쪽으로는 서역(西域, 섬서 안강현(安康縣) 북쪽이라 함)을 바라보고 있다. 늘 음력 3(季春)이면 큰 모임이 있어 물가에서 음악을 울리고 딸을 시집보내며 아내에게 장가들고 머리를 깎고 잔치를 벌이어 먹는다.

▶ 鮮卑〈《魏書鮮卑亦東胡之餘也別保鮮卑山因號焉其言語習俗與烏丸同其地東接遼水西當西城常以季春大會作樂水上嫁女娶婦髠頭飲宴

 

그 땅에 들짐승들은 중원 땅(中國)에 그것과 달라서 야생말과 야생 산양(羱羊, ibex)과 단우(端牛)가 있다. 단우(端牛)는 뿔로 활을 만들어 대대로 이 짐승을 각단(角端)이라 한 것이다. 또한 담비(), (), 혼자(鼲子, 잿빛 쥐(灰鼠))들은 가죽과 털이 보들보들하여서 세상은 이것으로 만든 옷을 명품 갖옷으로 여긴다.

각단우(角端牛) : 단우(端牛)이다. 소와 비슷하지만, 뿔이 코 위쪽에 있다.

: 집운(集韻) : “()와 활()의 반이다. 음은 눌(, , )이다. 이아 석수(爾雅·釋獸) : ()은 앞다리가 없다. 석문(釋文) : ()은 본래 로도 쓴다. 그 주()()와 비슷하며 표범() 무늬에 뿔()이 있다. 후한서 선비전(後漢書·鮮𤰞傳) : 또한 담비()와 놜()... 그 주()()은 원숭이() 족속이다. 진서 동이전(晉書·東夷傳)에 부여 나라(夫餘國)에서 훌륭한 말과 담비(), ()이 나온다.” 하였다. 집운(集韻) : 또한 (𤜽)’로도 쓴다. ‘자는 원래 를 쓴다.

集韻女滑切,音肭。《爾雅·釋獸貀無前足。《釋文,本又作豽。《似狗,豹文,有角互詳貀字注。《後漢·鮮𤰞傳又有貂鼲子皮毛柔蝡故天下以爲名裘。《猴屬也。《晉書·東夷傳夫餘國出善馬及貂。《集韻亦作𤜽猴字原從豸作

: 이아 석수(爾雅·釋獸) : ()은 앞에 앞다리가 없다. 그 주()에 말이 다음과 같다. “() 태강(太康) 7(286)에 소릉(召陵) 부이현(扶夷縣)에서 올가미()로 한 들짐승을 잡았는데 개()와 비슷하면서 표범() 무늬에 뿔과 두 앞발이 있었으니 바로 이 종류이다. 더러는 ()은 범()과 비슷하되 검고 두 발이 없다.’ 하였다.” 설문(說文) : ()나라 법에 시놜(豺貀)을 잡을 수 있다면 백전(百錢)을 포상하였다. 당서 회골전(唐書·回鶻傳) : 힐알사(黠戛斯)는 옛날 견곤국(堅昆國)으로 그 들짐승에 야생말과 골괄(骨貀)이 있다. 이물지(異物志) : ()은 조선(朝鮮)에서 나오는데 삵()과 비슷하고 검푸른 빛(蒼黑色)이며 앞 두 발이 없으나 쥐를 잡을 수 있다. 진장기(𨻰藏器)골놜(骨豽) 짐승은 서방(西方) 돌궐나라(突厥國)에서 나온다. 여우()와 비슷하나 크고 꼬리는 길다. 임해지(臨海志) : 꼴은 사슴(鹿) 모양과 비슷하고 대가리는 개()와 비슷하다. 동해(東海) 물 안에서 나온다. 구종석(𡨥宗奭)이 말하기를 지금 등주(登州, 산동성)와 래주(萊州, 산동성)에서 나오는데 꼴이 개()도 아니며 들짐승도 아니며 물고기도 아니다. 앞 다리는 들짐승과 비슷하고 꼬리는 곧 물고기이다. 몸에 짧은 푸르고 흰 털이 있고 털에는 검은 점이 있다. 어떤 이는 방서(方書)에 올눌제(膃肭臍, 곧 해구신(海狗腎))는 바로 놜()의 외신(外腎, 곧 고환(睾丸))이다.” 하였다.

爾雅·釋獸無前前足。《晉太康七年召陵扶夷縣檻得一獸似狗豹文有角兩前足卽此種類也或說貀似虎而黑無兩足。《說文漢律能捕豺貀購百錢。《唐書·回鶻傳黠戛斯古堅昆國其獸有野馬骨貀。《異物志貀出朝鮮似狸蒼黑色無前兩足能捕䑕𨻰藏器曰骨豽獸出西方突厥國似狐而大長尾。《臨海志狀如鹿形頭似狗出東海水中𡨥宗奭曰今出登萊州狀非狗非獸非魚前腳似獸尾卽魚身有短靑白毛毛有黑點或曰方書膃肭臍卽貀外腎

견곤국(堅昆國) : 통전(通典)견곤(堅昆)은 위()나라 때에 알려졌다. 강거(康居 신강 북쪽에서 중앙아시아 쪽에 있었다) 서북에 있으며 뛰어난 병사 3만이 있다. 물과 풀을 따라서 가축을 친다. 대부분 담비()이고 훌륭한 말을 가지고 있다.” 하였다.

通典/193 堅昆魏時聞焉在康居西北勝兵三萬人隨水草畜牧多貂有好馬也

힐알사(黠戛斯) : 당나라 때 협()니색하(叶尼塞河, 예니세이강) 상류에 살았던 겨레. 서시베리아 평원과 예니세이강 상류 일대에 살았다 한다.

其獸異於中國者野馬羱羊端牛端牛角爲弓世謂之角端者也又有貂鼲子皮毛柔蠕故天下以爲名裘

 

선비(鮮卑)가 묵특(冒頓)에게 깨지고서 멀리 요동(遼東) 변방 요새 밖으로 달아나고부터 나머지 나라들과 중원(中原) 쟁탈전에 참여하지 못하여 그 이름을 한()나라에 알리지 못한 채 스스로 오환(烏丸)과 서로 맞닿아 있었다. 광무(光武 후한(後漢) 초대 임금. 재위기간 25-57) 때에 이르러 남선우(南單于)와 북선우(北單于)가 다시 서로 치고받으면서 흉노(匈奴)는 시들어졌으나, 선비(鮮卑)는 마침내 흥성하였다.

鮮卑自爲冒頓所破遠竄遼東塞外不與餘國爭衡未有名通於漢而自與烏丸相接至光武時南北單于更相攻伐匈奴損耗而鮮卑遂盛

 

건무(建武 광무(光武)의 연호) 30(기원후 54)에 선비(鮮卑) 어르신 오구분(於仇賁)이 겨레붙이 사람들을 이끌고 한나라 궐에 나아와 조공하였다. 한 조정에서 오구분(於仇賁)을 제수하여 왕()으로 삼았다.

영평(永平 후한(後漢) 2대 임금인 명()의 연호, 58-75) 사이에 제융(祭肜)이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되어 뇌물로 선비(鮮卑)를 꼬여 후한을 배반한 오환(烏丸) 흠지분(欽志賁)들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에 둔황(燉煌)과 주천(酒泉) 동쪽 읍락(邑落) 선비(鮮卑) 어르신들이 모두 요동(遼東)에 나아와 하사한 상을 받았다. (), () 두 주()는 돈을 주었으니 한 해에 2() 7천만(千萬) ()이 보통이었다.

화제(和帝 후한 4대 임금) 때에 선비 대도호교위(鮮卑大都護校尉) 소발외(蘇拔廆)가 부() 무리를 이끌고 오환 교위(烏丸校尉) 임상(任常)을 따라 배반한 사람들을 쳤는데 교위(校尉) ()를 제수하여 솔중왕(率衆王)으로 삼았다.

상제(殤帝) 연평(延平 106) 사이에 선비(鮮卑)가 마침내 동쪽에 변경 요새로 들어와 어양태수(漁陽太守) 장현(張顯)을 죽였다.

안제(安帝 재위기간 : 107-125) 때 선비(鮮卑) 어르신 연려양(燕荔陽)이 입조(入朝)하였는데 한()이 선비왕(鮮卑王)이라 새긴 관인과 매우 귀한 사람이 타는 붉은 수레에 곁말이 딸린 수레를 하사하고 오환교위(烏丸校尉)가 다스리는 녕성(寗城, 지금 장가구시(張家口市) 회래현(懷來縣))에 머물 것을 명하였다. 선비와의 장마당(胡市)을 트고, 이로 인하여 남북(南北) 두 부()의 볼모가 살 집(質宮)을 짓게 하고서 아들을 볼모로 보낸 선비 읍락(邑落) 20()를 수용하였다. 이 뒤에 더러는 반란을 일으키고 더러는 항복하였고 더러는 흉노(匈奴)와 오환(烏丸)과 함께 공격하였다. ‘20()’는 후한서(後漢書)등 여러 책에서 120부로 기록되어 있다. 아래 번에서 그 다른 기록을 보충하였다.

안제(安帝) 말기에 변경 가에 보병과 기명 2만여 사람을 들어내어 요충지에 벌여 주둔시켰는데 뒤에 선비(鮮卑) 8, 9천 기병이 대군(代郡)과 마성(馬城)의 요새를 뚫고 들어와 장리(長吏)를 해치니 한()이 도료장군(度遼將軍) 등준(鄧遵)과 중랑장(中郎將) 마속(馬續)을 보내 변방 요새를 나가 이들을 쫓아가 깨뜨렸다.

대도호(大都護) : 다음과 같은 뜻들이 있다. ) 삼국지 선비전(三國志 鮮卑傳)에 나오는 선비대도호교위(鮮卑大都護校尉)’를 보면 선비수령(鮮卑首領)’이라는 관직으로 선비가 이를 설치하였다 한다. 한나라에 장군과 교위(校尉)에 해당하여 군사들을 이끈다. ) 동진(東晉) 때 임시로 설치한 지방 장관. ) 대도호부(大都護府)는 당나라 때 큰 관서 이름으로 대도호와 부대도호(副大都護), 장사(長史)들을 두었다.

교위(校尉) : ()과 한() 때에는 군대를 통솔하는 무관으로 계급상 장군 다음이고 도위(都尉)보다 높았다 한다. 전쟁에 나설 때 임시로 임명하여 교영병(()) 한 사람을 거느렸고 사마(司馬)와 후()들을 두었으며 상설 교위(校尉)도 있었다 한다.

서한(西漢) 때를 살펴보면, 무제(武帝) 때 팔교위(八校尉)를 두었으니 중루교위(中壘校尉)가 북군루문(北軍壘門) 안과 서역(西域)을 관장하였다. 둔기교위(屯騎校尉)가 기사(騎士)들을 관장하였다. 보병교위(步兵校尉) 상림원문(上林苑門) 둔병(屯兵)을 관장하였다. 월기교위(越騎校尉)는 한나라에 붙어온 월나라 사람으로 만든 월기(越騎)를 관장하였다. 장수교위(長水校尉)는 북방과 서역에서 붙어온 흉노(胡人)들로 만든 장수(長水)와 선곡(宣曲) 쪽 호기(胡騎)를 관장하였다. (장수는 관중(關中)에 있는 하천 이름) 호기교위(胡騎校尉)는 지양(池陽, 섬서성 삼원현(三原縣))에 주둔한 흉노(匈奴) 등 호인(胡人)으로 만든 호기(胡騎)를 관장하였다. 사성교위(射聲校尉)는 황제의 명을 기다려 살을 쏘는, 어둠 속에서도 소리만 듣고 명중시킬 수 있는(射聲) 군사들로 만들어진 대소사성사(待詔射聲士)를 관장하였다. 호분교위(虎賁校尉)는 전투용 수레(輕車)를 관장하였다. 별도로 성문교위(城門校尉)가 있어서 서울인 경사(京師) 성문(城門)에 주둔한 병사(屯兵)를 관장하였다.

한편 동한(東漢, 후한) 때는 주변 다른 민족들의 군사행정 장관인 위한 오환도위(烏桓都尉)와 호강도위(護羌都尉)가 있었고 수당(隋唐) 때에는 이러저러한 자잘한 직급의 도위(都尉)도 있었다 한다.

도위(都尉) : 전국시대에 처음 설치된 관직.

) 지방 군대를 관장하는 무관이다. () 때에 군수(郡守), 군승(郡丞), 군위(郡尉)를 마련하였는데 군위(郡尉)은 그 군()에 병마(兵馬)를 관리하며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였다. () 경제(景帝) 때 군수(郡守)를 고쳐 태수(太守)라 하고 군위(郡尉)를 도위(都尉)라 하였다. 후한 광무(光武) 때 도위를 없애고 태수가 그 업을 아우르게 하였다. 이와 별도로 변방에 설치한 동부 도위(都尉), 서부 도위(都尉)와 관 도위(關都尉), 속국 도위(屬國都尉)가 있었는데 모두 지방에 속한 무관(武官)이었다.

속국 도위는 한 무제가 만든 것으로 변방에 들어와 사는 여러 민족 땅에 설치한 관직으로 후한 때에는 군수(郡守)와 권한이 같았다. 관 도위(關都尉)는 진() 때부터 있던 기구로 군사들을 이끌고 요새를 지키며 관문을 지나는 사람들을 검속하면서 세금 징수도 관장하였다.

) 어떤 일 때문에 임시로 두기도 하는 관직. 한 무제가 만든 것으로 농경과 둔전(屯田)에 대한 일을 임시로 보던 수속도위(搜粟都尉)와 음악에 관련된 협율도위(協律都尉)가 있다.

) 시종관(侍從官)을 말하기도 한다. 봉거도위(奉車都尉), 부마도위(駙馬都尉)들이다.

) 당송(唐宋) 때는 공훈이 있는 사람들에게 준 명예직이었다고 한다. 경거도위(輕車都尉), 기도위(騎都尉)들이다.

군수(郡守) : 전국시대 때 처음 보이는 관직으로 처음에는 무관이 직임이어서 변방 군()들을 지키는 업이었다가 차츰 군()급 행정기구로 변화되어갔다. () 때 봉건(封建)을 폐지하고 군현(郡縣)을 설치하였는데 군()에 수(), (), () 각각 한 사람씩 두었다. ()는 그 백성들을 다스리고 승()은 수()를 도왔다. () 경제(景帝) 2(기원전 155) 군수를 태수(太守)로 고쳤다. ()을 두었고 변방 군()에는 장사(長史)를 두어 병마(兵馬)를 관리하게 하였다. 위진(魏晉) 때 군태수(郡太守), () 때에는 군()을 부()로 바꾸었지만 역시 군(郡守)라 불렀다 한다.

남북(南北) 두 부()... :

)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연평(延平) 원년(106) 선비(鮮卑) 어르신 연려양(燕荔陽)이 한나라 궐()에 나아와 조회하고 축하하니 태후(太后)가 연려양(燕荔陽)에게 왕의 관인과 붉은 마차(赤車)에 곁말 딸린 수레(參駕) 적거(赤車)란 수레 휘장(帷裳), 수레 가로대() 멍에()가 모두 붉은 것이다. 참가(參駕)란 두 마리 말에 멍에를 지우는 것이다.오환교위(烏桓校尉)가 사는 용성(寗城)에 억류하라는 명을 내렸다. 용성(寗城)은 상곡군(上谷郡, 지금 장가구시(張家口市) 회래현(懷來縣)에 속한다.선비와 장마당을 트고, 내처 남북(南北) 두 부()의 볼모가 살 집(質館)을 지었다. ()이 말하기를 ()을 지어서 항복하고 볼모로 잡힌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이다.” 하였다.선비(鮮卑) 마을(邑落) 120()에서 각각 아들들을 보내어 볼모로 들이었다.”

資治通鑑巻四十九 : 安帝永初中 延平元年 鮮卑大人燕荔陽詣闕朝賀 太后賜燕荔陽王印綬赤車參駕赤車者 帷裳衡軛皆赤 𠫵駕者 駕二馬 燕於賢翻 荔力計翻令止烏桓校尉所居寗城下寗城屬上谷郡通胡市 因築南北兩部質館賢曰築館以受降質質音致下同鮮卑邑落百二十部各遣入質

) 방여휘편(方輿彙編)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진지(鎮志)순제(順帝) 양가(陽嘉) 원년(132)에 겨울에 오환(烏桓) 교위(校尉) 경욱(耿煜)이 변방 요새를 나가서 선비(鮮卑)를 쳐서 그들을 무찔렀다. 처음에 선비(鮮卑)가 한()나라에 와서 조회하고 축하하였을 때 등태후(鄧太后)가 오환 교위(烏桓校尉)를 억류하여 용성(甯城)에 보내게 하고서 남북(南北) 두 부()에 볼모들을 머물게 할 집(質館)을 짓도록 하였다. 선비(鮮卑) 마을(邑落) 120()가 각각 자식을 보내어 볼모로 들였으니 이 뒤로 선비 거래들이 더러는 항복하고 더러는 반란하여 변방 사람들이 해마다 그 해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 이 순제(順帝) 때 이르러 오환교위(烏桓校尉) ()이 쳐 선비들을 쳐 무찌른 것이다.’ 하였다.”

方輿彙編 第一百六十二卷 : 鎮志》:「順帝陽嘉元年冬烏桓校尉耿煜出塞擊鮮卑敗之鮮卑來朝賀鄧太后令止烏桓校尉甯城下因築南北兩部質館鮮卑邑落百二十部各遣入質是後或降或叛邊人歲苦其害至是烏桓校尉煜擊 敗之。」

冊府元龜 /0996 : 令止烏桓校尉所居寗城下通胡市 因築南北兩部質館築館以受降質鮮卑邑落百二十部各遣子入質

중랑장(中郎將) : () 때에 무관 계급은 대략 장군(將軍), 중랑장(中郎將), 교위(校尉)로 나뉜다. 장군은 상설 관직이 아니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사들을 이끄는 사람에게 주는 직이라서 평소에 무관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무관은 중랑장이라 한다. 중랑장은 왕실을 호위하는 군대를 관장하며 광록훈(光祿勳) 관할 아래 있다. 삼국(三國) 때에 군공자가 많았고 그에 따라 장군(將軍) 직을 받은 사람이 많아져 중랑장은 중하급의 무관이 되었다 한다.

()(質宮) : 질궁(質宮)은 다른 사람의 아내와 아들을 볼모로 잡아놓는 곳이다... 옛날에 귀하던 천하던지 모두 지내는 곳을 궁()이라 하였다. “質宮,言質人妻子之處……古者貴賤皆謂之宮

호시(胡市) : 이 장터 흉노와의 교역 터를 뜻하지만, 넓게는 다른 민족과의 교역 터를 말한다. 한나라 때 흉노가 원했던 것은 비단, 누에 실로 만든 풀솜, (), (), 벽주(蘗酒), 쌀이며 흉노가 거래한 물품은 소, , 가죽류이었다 한다. 벽주(蘗酒)는 벽(, 황벽)을 써서 발효한 술로 비교적 알코올 도수가 낮으며 옛날 예주(醴酒)’라 불렀던 그것이라 한다.

호시(胡市)는 또한 관시(關市)와 많이 겹치는 점이 있으니 관시는 본래 변경 관문()과 시장()을 합한 말이지만 훗날에 다른 민족들과 거래하는, 변경 교통 요충지에 마련된 장마당이라는 뜻까지 포함하게 된다. 예컨대 남월(南越)은 토산물과 진귀한 보물, 특이한 물건을 가지고서 금은과 농기구, , , 양들을 바꾸어갔다 하는데 관시에 대한 정부 규제는 엄격하여 정해진 품목 수가 있으며 허가증을 가져야만 했다. 금지품목을 거래했을 때는 사형에까지 처해졌다 한다.

建武三十年鮮卑大人於仇賁率種人詣闕朝貢封於仇賁爲王永平中祭肜爲遼東太守誘賂鮮卑使斬叛烏丸欽志賁等首於是鮮卑自燉煌酒泉以東邑落大人皆詣遼東受賞賜徐二州給錢歲二億七千萬以爲常和帝時鮮卑大都護校尉廆帥部衆從烏丸校尉任常擊叛者封校尉廆爲率衆王殤帝延平中鮮卑乃東入塞殺漁陽太守張顯安帝時鮮卑大人燕荔陽入朝漢賜鮮卑王印綬赤車參駕止烏丸校尉所治寗下通胡市築南北兩部質宮受邑落質者二十部是後或反或降或與匈奴烏丸相攻擊安帝末發緣邊步騎二萬餘人屯列衝要後鮮卑八九千騎穿代郡及馬城塞入害長吏漢遣度遼將軍鄧遵中郎將馬續出塞追破之

 

선비(鮮卑) 어르신 오륜(烏倫), 기지건(其至鞬) 7천여 사람이 등준(鄧遵)에게 나아와 항복하니 오륜(烏倫)을 봉하여 왕()으로 삼고 기지건(其至鞬)을 후()로 삼고서 알록달록한 비단을 선물로 내렸다. 등준이 떠나가고 나서 기지건(其至鞬)이 다시 반란하여 마성(馬城)에서 오환교위(烏丸校尉)를 포위하니 도료장군(度遼將軍) 경기(耿夔)와 유주자사(幽州刺史)가 이를 구원하여 풀려나게 하였다. 기지건(其至鞬)이 마침내 강성해져 활시위 당기는 수만 기병이 서너 길을 타고 변방 요새로 들어와 오원(五原)과 영맥(寧貊)로 달려가 흉노(匈奴) 남선우(南單于)를 공격하고 좌오건일축왕(左奧鞬日逐王)을 죽였다.

*도료장군도료장군(度遼將軍)과 오원군(五原郡) 만백(曼柏)의 한나라 때 위치

유자산집(庾子山集) : 한서(漢書)소제(昭帝) 원봉(元鳳) 3(기원전 78) 요동오환(遼東烏桓)이 반란하자 중랑장(中郎將) 범명우(范明友)를 도료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았다.” 하니 응소(應劭)늘 요수(遼水)를 건너() 가서 상대를 쳐야 했기 때문에 도료(度遼)를 관직 이름으로 삼았다. 하였다. 한관의(漢官儀, 동한 말에 그 법령과 제도를 기록한 책)도료장군(度遼將軍)의 주둔지는 오원(五原) 만백현(曼柏縣)이다하였다.

庾子山集 (四庫全書本)/05 漢書曰昭帝元鳳三年遼東烏桓反以中郎將范明友為度遼將軍 應劭曰常度遼水往擊之故以度遼為官號 漢官儀曰度遼將軍屯五原曼柏縣也

()나라 때 오원군(五原郡) 만백(曼柏)은 승주(勝州) 은성현(銀城縣)이니 지금에 섬서(陝西) 신목현(神木縣)이다

) 후한서(後漢書) : 선비 겨레인 기지건(其至鞬)이 직접 만여 기병을 이끌고 동령(東領)으로 들어갔고 정찰병을 두서너 길로 나누고 만백(曼柏)에서 남흉노(南匈奴)를 공격하였다. 만백은 현() 이름이고 오원군(五原郡)에 속한다.욱건일축왕(薁鞬日逐王, 흉노귀족 봉호(封號))이 이 전투에서 죽었고 천여 사람을 죽였다. 책부원귀(冊府元龜)등에는 ()’자가 (𠉀)’로 되어 있는데 이 두 글자는 서로 통용된다.

後漢書/90 : 其至鞬自將萬餘騎入東領侯分為數道攻南匈奴於曼柏縣名屬五原郡也。〕, 薁鞬日逐王戰死殺千餘人。〔冊府元龜 : 東嶺 𠉀分為數道 攻南匈奴於蔓柏

) 대기사속편(大事記續編) : () 세조(世祖, 이름은 류수(劉秀). 동한(東漢) 곧 후한(後漢)을 세운 자) 광무황제(光武皇帝, 류수의 시호) 건무(建武) 24(48) 봄 정월(正月)에 흉노(匈奴) 욱건일축왕(薁鞬日逐王) ()가 오원새(五原塞)를 두드리고서 북방민족(北虜)들의 공격을 막아주기를 구하였다. 본기(夲紀)를 살펴서 수정하였다.

() 효헌황제(孝獻皇帝) 건안(建安) 24(215) 봄 정월(正月) 갑자(甲子)에 귀인(貴人) 조씨(曹氏)를 세워 황후(皇后)로 삼았다. 운중(雲中), 정양(定襄), 오원(五原), 삭방군(朔方郡)을 줄여서 신흥군(新興郡)을 만들었다.

大事記續編 : 漢世祖光武皇帝建武二十四年春正月匈奴薁鞬日逐王比欵五原塞求扞北虜以夲紀修

漢孝獻皇帝建安二十年春正月甲子立貴人曹氏為皇后以本紀脩省雲中定襄五原朔方郡為新興郡以魏紀脩

) 영락대전(永樂大典) : () 명제(明帝) 영평(永平) 8(65) 3월에 처음으로 도료장군(度遼將軍)을 두고서(상설직을 마련하였다는 말인 듯) 오원(五原) 만백(曼柏)에 주둔하게 하였다. 만백현(曼柏縣)은 본래 승주(勝州) 은성현(銀城縣)에 있었다. 도료장군은 서한 소제(昭帝) 때인 기원전 78년에 기록에 처음 나타난다고 하는데 앞글에서 처음()’두다()’라는 글자를 쓴 이유는 동한 때에 도료장군을 상설로 주둔지에 주둔하게 하여서인 듯하다.

永樂大典/14461 明帝永平八年三月初置度遼將軍屯五原曼柏曼柏縣在本勝州銀城縣

) 섬서통지(陜西通志) : 후한서(後漢書) 남흉노전(南匈奴傳 )에서 통감(通鑑) ()를 살펴보면 만백(曼柏)은 승주(勝州) 은산현(銀山縣) 둘레에 있다.

陜西通志 (四庫全書本)/077 後漢書南匈奴傳 按鑑注曼柏在勝州銀山縣界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내용을 소개한다.

오원성(五原城) : 옛 승주(故勝州)에 있다. 서한(西漢) 때 오원현(五原縣)을 설치하고 오원군(五原郡)에 소속시켰다. 후한(後漢) 이를 따랐다. 영화(永和) 5(140)에 남흉노(南匈奴)의 반란 때문에 삭방군(朔方郡)의 소재지를 오원(五原)으로 옮기고 역시 오원새(五原塞)’라 하였다.

진지(晉志)북지군(北地郡) 북쪽에서 9백 리를 가면 오원새(五原塞)를 만난다.” 하였다. 지지(地志)오원(五原)은 용류원(龍遊原), 걸지간원(乞地干原), 청령원(青嶺原), 가람정원(岢嵐正原), 횡조원(橫槽原)이니 현()의 영역을 두루 감아서 한()나라가 이를 가지고서 현()에 이름을 붙였다. ()이 현()을 폐하였다. 후위(後魏 또는 北魏, 선비 겨레 탁발규가 세운 북조의 한 나라 (386~534))도 오원현(五原縣)을 설치하고 삭방군(朔方郡)에 소속시켰다. () 임금 사(, 탁발사(拓跋嗣) 재위 기간 : 409-423) 때인 태상(泰常) 5(420)에 오원(五原)에 갔다. () 임금 후(, 9대 임금 원후(元詡), 탁발후(拓拔詡)) 때인 정광(正光) 5(524) 원욱(元彧)이 파륙한 발릉(破六韓拔陵, 성은 파륙한, 옥야진(沃野鎭) 사람)과 오원(五原)에서 전투를 벌여 군()이 발릉을 무찔렀다. 다음 해에 원심(元深)이 발릉(拔陵)을 공격하여다 오원(五原)에서 포위되었고 원심이 틈을 타서 삭주(朔州)로 돌아왔다.” 하였다. ... 위수(魏收)가 편찬한 지(, 위서(魏書) 안에 20권을 가리킨다 함)삭주(朔州) 부화군(附化郡)에 오원현(五原縣)이 있다.” 하니 두우(杜佑)()나라 때 오원현성(五原縣城)은 유림현(榆林縣) 서쪽에 있었다.” 하였다. ..대안성(太安城)은 옛 승주(故勝州) 동북에 있다. 위수(魏收)의 지()() 태무제 탁발도(太武帝拓跋燾) 때인 연화(延和) 2(433)에 한()나라 때의 오원(五原) 경계에 태안군(太安郡)을 설치하고 삭주(朔州)에 소속시켰다.” 함이 바로 이것이다.

讀史方輿紀要/卷六十一 : 五原城,〈在故勝州西漢置五原縣屬五原郡後漢因之永和五年以南匈奴叛亂徙朔方郡治五原亦曰五原塞。《晉志》:「自北地郡北行九百里得五原塞。《地志》:「五原:「龍遊原乞地干原青嶺原岢嵐正原橫槽原也環繞縣境漢因以名縣晉縣廢後魏亦置五原縣屬朔方郡魏主嗣泰常五年如五原魏主詡正光五年元彧與破六韓拔陵戰於五原軍敗明年元深擊拔陵被圍於五原深乘間還朔州... 魏收》:「朔州附化郡有五原縣杜佑曰:「漢五原縣城在榆林縣西... 太安城在故勝州東北魏收》:「魏延和二年置太安郡於漢五原界屬朔州即此。〉

) 만백성(曼柏城) : 옛 승주(故勝州) 서쪽에 있다. ()의 현()에는 오원군(五原郡)에 속하였다. 후한(後漢) 때 이를 그대로 따랐다. 영평(永平) 18(75)에 도료장군(度遼將軍)을 두어 이곳에 둔영(屯營)을 세우게 하니 이것으로써 남북흉노(南北匈奴)와 서로 소통한 것이다. 영원(永元) 6(94), 남선우(南單于) 안국(安國)이 그 우곡려왕(右谷蠡王) 사자(師子)를 징벌하려 하였는데 사자(師子)가 달아나 만백성(曼柏城)으로 들어갔다. 한편 연광(延光) 2(123) 선비(鮮卑)가 만백(曼柏)에서 남흉노(南匈奴)를 쳤다 함이 곧 이것이다. (, 동한) 말기에 이곳의 행정구역을 없앴다.

曼柏城,〈在故勝州西漢縣屬五原郡後漢因之永平十八年置度遼將軍屯營於此以防南北匈奴交通也永元六年南單于安國欲誅其右谷蠡王師子師子遁入曼柏城又延光二年鮮卑攻南匈奴於曼柏即此漢末廢。〉

鮮卑大人烏倫其至鞬等七千餘人詣遵降封烏倫爲王其至鞬爲侯賜采帛遵去後其至鞬復反圍烏丸校尉於馬城度遼將軍耿夔及幽州刺史救解之其至鞬遂盛控弦數萬騎數道入塞趣五原寧貊攻匈奴南單于殺左奧鞬日逐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