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오환(烏丸) (출처 :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그 선조가 흉노에게 깨지고 나서부터 많은 사람이 외롭고 약해져 흉노에게 신하로서 복종하여 늘 해마다 소와 말, 양들을 실려 보냈고, 보내기로 한 기한이 지나도록 그 숫자를 채우지 못하면 번번이 그 아내와 자식들을 사로잡아 갔다. 흉노(匈奴) 일연제 선우(壹衍鞮 單于, ?-기원전 68년, 련제씨(攣鞮氏). 기원전 85년 형제인 호록고(狐鹿姑)를 이어 선우(单于)에 등극) 때에 이르러 오환(烏丸, 烏桓)이 점점 강해져 흉노 선우(單于, 임금)의 무덤들을 파헤치고서 이것으로써 묵특(冒頓, ?-기원전 174년. 련제씨(攣鞮氏))에게 깨진 치욕을 갚으려 하였다.
일연제 선우(壹衍鞮單于)가 크게 노하여 2만 기병을 내어 오환을 쳤다. 대장군 곽광(霍光, ?-기원전 68년, 하동군 평양현(지금 산서성 림분시(臨汾市)) 사람, 서한(西漢) 때 권세가 있었던 신하)이 이를 듣고 도료장군 범명우(度遼將軍范明友)를 보내어 3만 기마병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출정하여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명우의 군대가 이르렀을 때 흉노는 이미 군대를 이끌고 떠났고, 명우(明友)의 군대는 오환(烏丸)이 이제 막 흉노 군대에 피해를 받아 그 약하고 피폐해진 틈을 타 마침내 오환에 진군하여 쳐서 6천여 목에 머리를 베고 삼왕(三王, 원소(元紹)가 봉했던 요동속국 솔중왕(遼東屬國 率衆王), 요서 솔중왕(遼西率衆王), 우북평 솔중왕(右北平率衆王)이 아닌가 한다)의 머리를 가지고 돌아왔다. 뒤에 오환이 자주 변경 요새를 침범할 때면 명우가 정벌하여 이들을 깨뜨렸다.
〔‘도료(度遼)’는 요수(遼水)를 건너는 까닭에 이름이 붙여졌다 함. 동한(東漢) 때에는 북부 변방을 지키고 동북과 서북을 포함한 북방민족들과의 정무적 관계를 처리하는 중요한 위치였다 한다.〕
① 선우(單于) : 부락 연맹의 우두머리, 임금인 선우(單于)는 간략히 한 호칭이고 그 온전한 이름은 탱리고도선우(撑犁孤涂单于)이다. 탱리(撑犁)는 ‘하늘(天)’이고 고도(孤涂)는 ‘아들(子)’이며 선우(单于)는 ‘넓고 큰(廣大) 모습’을 뜻한다고 한다.
② 련제씨(攣鞮氏) : 련제씨은 선우(單于)의 성씨이다. 허련제(虛連題)라고도 쓴다. 흉노 제1대 임금인 두만선우(頭曼單于, ?-기원전 209년, 흉노나라의 창시자. 묵특의 아버지)부터 그 후손 선우가 모두 이 성씨에서 나왔다. 힘 있는 관직인 좌우도기왕(左右屠耆王, 도기의 뜻은 ‘어짊, 현명(賢)’, 선우 아래에 가장 높은 관직), 좌우곡려왕(左右谷蠡王, 도기왕 아래, 군사와 행정담당), 좌우대장(左右大將, 만기(萬騎)의 우두머리(長)), 좌우대도위(左右大都尉), 좌우대당호(左右大堂戶) 등도 모두 그 자제들로 등용이 되어 여러 성씨(姓氏) 중에서 가장 귀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진나라와 한나라 때 흉노가 흥기하면서부터 동한 말기까지 세력이 쟁쟁하였다 한다.
③ 두만(頭曼) : ‘두만(頭曼)’이라는 글자는 몽골어와 튀르크어(突厥語)로 tümen(튀멘), 페르시아어로 toman(토만) 모두 ‘1만(萬)’을 뜻하며 타림분지(지금 신강 영역)에 있었던 언기(焉耆, 동부 토차리어(東吐火羅語)) 말에 ‘tmāṃ’과 구자(龜茲, 서부 토차리어(西吐火羅語)) 말에 ‘t(u)māne’도 그 뜻이 ‘1만(萬)’으로 어원이 같다. 도문강(圖們江, 두만강)과 토묵특(土默特, 내몽고 자치구 중부) 이름도 이 말을 빌린 것이다. 따라서 두만(頭曼)은 원래 사람 이름이 아닌 군대 직함으로 ‘1만 군사를 거느린 장군’을 뜻한다고 한다.
▶自其先爲匈奴所破之後,人衆孤弱,爲匈奴臣服,常歲輸牛馬羊,過時不具,輒虜其妻子。至匈奴壹衍鞮單于時,烏丸轉強,發掘匈奴單于塚,將以報冒頓所破之恥。壹衍鞮單于大怒,發二萬騎以擊烏丸。大將軍霍光聞之,遣度遼將軍范明友將三萬騎出遼東追擊匈奴。比明友兵至,匈奴已引去。烏丸新被匈奴兵,乘其衰弊,遂進擊烏丸,斬首六千餘級,獲三王首還。後數復犯塞,明友輒征破之。
▶왕분(王莽, 재위 기원후 9년 1월 10일-23년 10월 6일) 말기에 오환은 흉노와 더불어 도적이 되었다.
▶至王莽末,並與匈奴爲寇。
▶광무(光武), 곧 류수(劉秀, 생존 기원전 5-57년)가 중원 땅을 안정시킬 때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보내 3천 기병을 이끌고 오원관(五原關, 오원은 지금 내몽고 자치구 오원현)을 따라 변방 요새로 나가 오환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아무 이득이 없이 말 천여 필만 죽어나갔었다.
① 복파장군(伏波將軍) : 복파장군은 임금이 내린 봉호(封號)로 복파는 ‘파도를 항복시키다(降伏波濤)’라는 뜻.
전국시대에는 각 나라에 경(卿), 대부(大夫)들이 군대를 거느렸고 진(秦)나라 때에 이르러 장군(將軍)을 두어 정벌과 전투를 이끌게 하고서 종종 일이 끝나면 해산을 시켰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장군(將軍)’을 기용하기는 하였지만, 상설로 두지는 않았다. 한 무제에 이르러 전쟁이 잦아 장군을 널리 두고서 계급을 나누니 가장 높은 지위는 대장군(大將軍), 표기장군(驃騎將軍),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장군(衛將軍)이었고, 그다음은 전·후·좌·우장군(將軍) 및 수많은 이러저러한 봉호장군(封號將軍)이 있었다. 봉호장군에는, 예컨대 강노장군(強弩將軍), 발호장군(拔胡將軍), 준계장군(浚稽將軍), 이사장군(貳師將軍), 횡해장군(橫海將軍), 누선장군(樓船將軍), 장둔장군(將屯將軍), 호군장군(護軍將軍), 효기장군(驍騎將軍), 재관장군(材官將軍), 도료장군(度遼將軍), 용양장군(龍驤將軍), 복파장군(伏波將軍)들이 있었다고 한다.
② 마원(馬援) : 생존 14-49년, 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 사람으로 동한(東漢)의 개국 공신이다. 무릉현은 지금 섬서성 흥평시(興平市)이다.
▶光武定天下,遣伏波將軍馬援將三千騎,從五原關出塞征之,無利,而殺馬千餘匹。
▶오환(烏丸)이 마침내 강성해지자 흉노가 사는 곳을 둘러싸 들이치니 흉노가 점점 천 리를 옮겨 가 막남(漠南, 지금 과벽사막(戈壁沙漠) 이남과 내몽고 자치구 중부 음산산맥(陰山山脉) 이북 지대) 땅이 텅 비었다.
▶烏丸遂盛,鈔擊匈奴,匈奴轉徙千里,漠南地空。
▶건무(建武, 49년, 동한 광무제 연호) 때 오환의 어르신 학단(郝旦)들 9천여 사람이 무리를 이끌고 궐에 나아오니 한(漢)이 그 우두머리(渠帥)를 봉하여 후왕(侯王)으로 삼은 자가 80여 사람이었다.
그들을 변방 요새 안에서 살게 하여 요동속국(遼東屬國, 지금 요녕성 서쪽에 대릉하(大凌河) 중하류 일대), 요서(遼西),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광양(廣陽), 상곡(上穀), 대군(代郡), 안문(雁門), 태원(太原), 북방(朔方) 여러 군계(郡界) 들에 널리 벌여 놓았고 그 겨레붙이들도 불러오도록 하여 옷과 먹거리를 주고 교위(校尉, ‘校’는 군사편제단위, ‘尉’는 군관(軍官)으로 교위는 ‘부대장’을 뜻함)를 두고서 그 오환 사람들을 거느리고 보호하게 하였더니 오환 사람들이 마침내 한나라를 위해 정찰하며 돌발 사태에 대해 경계하고 흉노와 선비(鮮卑)를 공격하였다.
▶建武二十五年,烏丸大人郝旦等九千餘人率衆詣闕,封其渠帥爲侯王者八十餘人,使居塞內,布列遼東屬國、遼西、右北平、漁陽、廣陽、上穀、代郡、雁門、太原、朔方諸郡界,招來種人,給其衣食,置校尉以領護之,遂爲漢偵備,擊匈奴、鮮卑。
▶영평(永平, 한 명제(漢 明帝) 연호, 58-75년) 사이에 어양 오환 어르신(漁陽 烏丸大人) 흠지분(欽志賁)이 붙이들을 이끌고 반란하였고 선비(鮮卑)가 도로 도적질하는 해로움이 되니 요동 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 ? - 73년)이 사람을 써서 지분(志賁)을 죽이고 드디어 그 무리를 깨뜨렸다.
①흠지분(欽志賁, 歆志賁) : 흠지분은 본디 적산(赤山, 지금 칭다오시 동북쪽) 출신인데 어양(漁陽, 지금 북경 동쪽) 변경 요새 밖에서 살았다. 盖歆志賁本赤山種而居漁陽塞外也
▶至永平中,漁陽烏丸大人欽志賁帥種人叛,鮮卑還爲寇害,遼東太守祭肜募殺志賁,遂破其衆。
▶안제(安帝, 류호(劉祜). 동한 제6대 임금, 재위기간 : 106년-125년) 시대에 어양오환(漁陽烏丸), 우북평오환(右北平烏丸, 하북 풍윤(豐潤) 동남 일대), 안문오환(雁門烏丸, 안문은 지금 산서(山西) 북부)에 솔중왕(率衆王) 무하(無何)들이 다시 선비(鮮卑), 흉노(匈奴)와 단결하여 대군(代郡)과 상곡(上穀), 탁군(涿郡), 오원(五原)을 약탈하니 마침내 대사농(大司農, 국가 재정 관리자) 하희(何熙)에게 거기장군(車騎將軍), 좌우우림(左右羽林, 우림은 금군(禁軍)으로 임금과 왕궁, 수도 경비를 담당), 오영군사(五營士)를 주고서 변경지역에 일곱 군(郡)과 여양(黎陽) 군영 병사, 합쳐 2만 사람을 발동하여 그들을 치게 하였다. 그 결과 흉노(匈奴)가 항복하였고 선비(鮮卑) 및 오환(烏丸)이 각각 변방 요새 밖으로 돌아갔다. 이후 오환(烏丸)이 조금씩 다시 가깝게 다가와 붙어 그 어르신(大人) 융말외(戎末廆)를 도위(都尉)에 제수하였다.
순제(順帝)에 이르러 융말외(戎末廆)가 왕후(王侯)인 부하 돌귀(咄歸)와 거연(去延)들을 데리고 오환교위(烏丸校尉) 경화(耿曄)를 따라 변방 요새를 나가서 선비(鮮卑)를 치는 데에 공을 세워, 돌아왔을 때 모두 솔중왕(率衆王)에 제수하고 다섯 필의 비단(束帛)을 선물로 내렸다.
① 무하(無何) : 무하윤(無何允)으로도 쓴다. 동한 시대에 오환 우두머리로 안문(雁門) 출신이다. 후한서에
“가을(109년)에 안문 오환(雁門烏桓) 솔중왕(率眾王) 무하(無何)가 선비(鮮卑) 어르신인 구륜(丘倫, 요서 선비(遼西 鮮卑) 우두머리)들, 남흉노(南匈奴) 골도후(骨都侯)와 더불어 7천 기(騎)를 모아서 오원(五原)을 도적질하여 태수(太守)와 구원(九原) 고거곡(高渠穀)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때 한(漢)나라 군대가 작살나고 군(郡)에 장리(長吏)가 죽임을 당하자 마침내 거기장군(車騎將軍) 하희(何熙)와 도료장군(度遼將軍) 양근(梁慬)을 보내어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무하(無何)가 항복을 간청하였고 선비(鮮卑)가 변방 요새 밖으로 달아나 돌아갔다. 이 뒤에 오환(烏桓)이 다시 조금씩 친하게 따름을 회복하여 그들에 어르신(大人)인 융주외(戎朱廆)을 제수하여 친한도위(親漢都尉)로 삼았다.”
하였다.
《後漢書》卷九十 : 秋,雁門烏桓率眾王無何,與鮮卑大人丘倫等,及南匈奴骨都侯,合七千騎寇五原,與太守戰於九原高渠穀。漢兵大敗,殺郡長吏。乃遣車騎將軍何熙 度遼將軍梁慬等擊,大破之。無何乞降,鮮卑走還塞外。是後烏桓稍復親附,拜其大人戎朱廆爲親漢都尉。”
② 솔중왕(率衆王) : 수중왕(帥眾王)으로도 쓴다. 한나라 임금이 준 작위 이름. 동한(東漢) 초기에 오환과 선비 여러 부족이 한나라 조정을 따랐기에 처음으로 그들 겨레에 어르신들을 봉하여 솔중왕(率衆王), 솔중후(率衆侯), 솔중군(率衆君)으로 불렀다. 솔중왕은 그 직함에 따른 권한이 군현(郡縣)과 비등하였다 한다.
③ 오영(五營) : 북군오영(北軍五營)을 감독하고 관장하는 북군중후(北軍中侯)에 소속되어 본영 기사(本營 騎士) 노릇과 수도 경비, 정벌 임무를 수행하는 둔기(屯騎)를 이끄는 교위(校尉), 한(漢)나라에 붙은 월(越)나라 사람으로 이루어진 월기(越騎)를 이끄는 교위(校尉), 보병(步兵)을 이끄는 교위(校尉), 장안(長安) 서북 교외의 기병(騎兵)을 이끄는 장수교위(長水校尉), 어둠 속에서도 소리를 듣고 활을 잘 쏜다는 사성(射聲)을 이끄는 교위(校尉), 이 다섯 교위(校尉)가 이끄는 부대를 가리킨다 한다.
▶至安帝時,漁陽、右北平、雁門烏丸率衆王無何等復與鮮卑、匈奴合,鈔略代郡、上穀、涿郡、五原,乃以大司農何熙行車騎將軍,左右羽林五營士,發緣邊七郡黎陽營兵合二萬人擊之。匈奴降,鮮卑、烏丸各還塞外。是後,烏丸稍復親附,拜其大人戎末廆爲都尉。至順帝時,戎末廆率將王侯咄歸、去延等從烏丸校尉耿曄出塞擊鮮卑有功,還皆拜爲率衆王,賜束帛。
'여진(女真) 말갈(靺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진(女真)〈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㑹編) 3권〉 23 (1) | 2024.02.01 |
---|---|
여진(女真)〈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㑹編) 3권〉 22 (1) | 2024.01.26 |
여진(女真)〈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㑹編) 3권〉 20 (0) | 2024.01.12 |
여진(女真)〈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㑹編) 3권〉 19 (2) | 2024.01.05 |
여진(女真)〈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㑹編) 3권〉 18 (1) | 2023.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