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오환(烏丸) (출처 :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한(漢)나라 말엽에 요서 오환(遼西烏丸, 요서에 사는 오환 겨레) 어르신(大人) 구력거(丘力居)가 오천여 가구를 모았고 상곡 오환(上谷烏丸) 어르신 난루(難樓)가 구천여 가구(落)를 모았으니 각각 왕(王)이라 일컬었다. 요동속국 오환(遼東屬國烏丸) 어르신 소복연(蘇僕延)이 천여 가구를 모아 스스로 초왕(峭王)이라고 일컬었고 우북평 오환(右北平烏丸) 어르신 오연(烏延)이 팔백여 가구를 모아 스스로 칸로왕(汗魯王)이라 일컬었으니 모두 책략과 용맹, 굳셈을 갖추었다. 중산 태수(中山太守, 중산은 지금 하북성 당현(唐縣) 일대인 듯) 장순(張純)이 한(漢)을 배반하고서 구력거(丘力居) 무리 안에 들어가 스스로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이라 부르고 삼군오환 원수(三郡烏丸元帥)가 되어 청(青), 서(徐), 유(幽), 기(冀) 이 네 주(州)를 침략하여 관리들과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영제(靈帝 재위기간 : 168-189년) 말기에 류우(劉虞)를 유주(幽州)의 목(牧)으로 삼았고 류우가 흉노(胡)를 모집하여 순(純)의 머리를 베니 북주(北州)가 마침내 안정되었다. 뒤에 구력거(丘力居)가 죽고 아들 루반(樓班)이 나이가 어려 그 조카인 탑둔(蹋頓)이 무예와 꾀가 있어 대신 우두머리 자리에 섰고 삼왕부(三王部)를 거느리니 무리가 모두 그 칙령(教令)을 잘 따랐다. 이즈음에 원소(袁紹)가 공손찬(公孫瓚)과 더불어 거푸 전투를 벌였으나 가름하지 못하였다. 이때 탑둔(蹋頓)이 사신을 보내어 원소에 인사하고 화친(和親)을 구하고서 원소를 도와 찬(瓚)를 쳐 깨뜨렸다. 원소는 임금의 명이라고 꾸미어(矯制) 탑둔(蹋頓)과 〈란(難)〉초왕(峭王)과 칸로왕(汗魯王)에게 관인(官印)을 매단 끈을 주어 모두 선우(單于)로 삼았다. 영웅기(英雄記)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소가 사신을 보내어 바로 오환 삼왕(烏丸三王)을 제수하여 선우(單于)로 삼고 이들 모두에게 앉아 타는 작은 수레(安車), 우산(華蓋), 깃발 장식털(羽旄), 임금만이 쓰는 누런 비단으로 만든 수레 덮개(黃屋), 좌독(左纛)을 하사하였다. 그 판문(版文)에 “황제를 대신하여 파견된 사지절(使持節) 대장군(大將軍)으로 유(幽), 청(青), 병주(並州)를 감독하고 기주(冀州) 목(牧)을 이끄는 완향후(阮鄉侯) 원소(袁紹)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요동 속국 솔중왕(遼東屬國 率衆王) 반하(頒下)와 오환(烏丸) 요서 솔중왕(遼西率衆王) 탑둔(蹋頓)과 우북평 솔중왕(右北平率衆王) 칸로유(汗盧維)에게 조서를 내린다.
‘그대 조상들이 의(義)를 사모하여 선(善)한 사람들로 바뀌어 변방 요새의 문을 두드려 우리나라로 붙어서 북쪽으로 험윤(玁狁)을 막았고 동쪽으로 예맥(濊貊)을 물리치더니 대대로 북쪽 가장자리를 지켜 백성을 위해 보호막이 되었다. 비록 어쩌다 국법을 침범하면 장수들에게 명하여 가서 그 죄를 토벌하게 하였지만, 거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허물을 뉘우치고서 바꾸어 고치니 사방에 다른 민족 중에서 최고이자 슬기로운 사람들이다.
맨 처음 천부장(千夫長, 군사 천 명을 이끄는 군관)과 백부장(百夫長)을 두어서 서로 거느리고 이끌어 능히 그대들 마음을 써서 나라에 공로를 제대로 세우고 조금씩 왕후(王侯)의 작위를 내리는 명(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왕실이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지고부터 공손찬(公孫瓚)이 난을 일으켜 그대들 땅의 우두머리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하늘을 업신여기며 주인에게 오만하게 굴어 이 때문에 온 세상이 함께 방패와 창을 쥐고서 사직(社稷)을 보위하였다.
이때 삼왕(三王)은 휑하고 메마른 땅에서 기운을 떨치어 간악한 자에 분노하며 나라를 걱정하여 활시위를 당겨 한병(漢兵)과 더불어 겉과 속을 이루어 진실로 충효(忠孝)가 대단하였으니 우리 조정이 기특하게 여기는 바였다. 그러나 잔악한 것들이 범과 코뿔소, 긴 뱀처럼 서로 따르며 길을 막고 있어 왕조의 관직과 작위를 수여하는 명(命)이 막혀 들리는 일이 없었다.
대저 공훈이 있는데도 내리는 상이 없다면 힘써 일하는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 이제 행알자(行謁者) 양림(楊林)을 시켜 선우(單于) 옥새와 수레, 예복을 싸서 보내어 그대들의 노고에 응답한다. 각자 부락들을 편안히 어루만지고 차분하게 만들어 신중함과 삼감을 가르쳐 그들을 흉포하며 사특하게 만들지 말라. 그렇게 하면 대대로 그대들 제사의 신위(祀位)를 거듭하고 길이 다른 모든 민족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앞으로 허물이 있거나 선하지 못하다면 그대들의 봉급은 몰수될 것이고 그대들의 직임은 잃어버리게 되리니 부지런히 애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환 선우(烏桓單于)는 다 부(部)의 무리를 보호하며 좌우 선우(單于)들은 그 지휘를 받으니 나머지는 예전과 같다.’” 하였다.’ 〔앞에 번역문 가운데 “황제를 대신하여 파견된 사지절(使持節) 대장군(大將軍) ... 원소(袁紹)” 부분은 그 원문 문리가 까다로워 자신할 수가 없다. 이 번역자의 실력의 한계이다.〕
①요동속국(遼東屬國) : 서한(西漢) 원제(元帝 재위기간 : 기원전 48-33년) 때에 한나라로 붙어온 오환(烏桓)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지역은 유주(幽州)에 속하였는데 지금에 요녕성(遼寧省) 서쪽이었고 동한(東漢) 안제(安帝) 때에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두 군(郡)으로 나누고 소재지는 창려(昌黎, 지금 요녕(遼寧) 의현(義縣))였다 한다.
②삼군오환(三郡烏丸) : 자치통감 호삼성음주(資治通鑒 胡三省音注)에 “삼군오환(三郡烏桓)은 요서(遼西) 땅에 탑둔(蹋頓), 그리고 요동(遼東) 땅에 소복연(蘇仆延), 우북평(右北平) 땅에 오연(烏延)이다.” 하였다. 191년 즈음에 구력거(丘力居)가 돌아가고 조카 탑둔(蹋頓)이 이 삼군을 거느리며 이 연합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 원소(元紹)를 도와 공손찬(公孫瓚)을 치는 데 공을 세웠고 그 덕에 선우(單于)에 올랐다. 그 뒤에 망명한 원소의 아들 원(袁)과 상(尚)을 받아주어 207년에 유성(柳城, 지금 요녕시 조양(朝陽))에서 조조(曹操)에게 피살된다. 그 남겨진 오환 겨레 20만 명은 중원 땅으로 억지로 이주하여 살게 되고 그 건장한 사나이들을 기병(騎兵)에 편제되어 조조의 정복 전쟁을 따르며 빛나는 공을 세웠다 한다. 《資治通鑒(胡三省音注)/卷064》:“三郡烏桓,遼西蹋頓、遼東蘇仆延、右北平烏延也。”
③ 좌독(左纛) : 자치통감 배인 집해(裴駰集解)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비(李斐)가 ‘독(纛)은 털과 깃을 꾸며 단 깃발(幢)이다. 타는 수레에 가로지른 막대기 왼쪽에 위로 세운다.’ 하고 채옹(蔡邕)이 ‘검은소(犛牛) 꼬리로 이를 만드는데 그 꾸민 크기는 한 말 들이(斗) 기구와 같다. 더러는 곁말(騑) 머리에 두고 더러는 수레 가로대 곁에 둔다.’ 하였다.” 裴駰集解:“ 李斐 曰:‘纛,毛羽幢也,在乘輿車衡左方上注之。’ 蔡邕曰:‘以犛牛尾爲之,如斗,或在騑頭,或在衡上也。’”
④지절(持節) : 가) 지절(持節)은 옛날에 사신이 임금의 명을 받잡고 외지로 나아갈 때 반드시 부절(符節) 지녀 신임의 증표로 삼았다. 일종의 신임장이었다.
나) 지절(持節)은 또한 벼슬 이름이다. 한(漢), 위(魏), 서진(西晉)과 동진(東晉),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지방에 군사행정을 담당하던 벼슬아치이다.
한나라 말기와 위, 촉, 오 삼국(三國) 때에 도독(都督, 이 이름은 180년 즈음에 처음 등장)의 절(節)이 더해지는 방식이 똑같지 않은 까닭에 사지절(使持節), 지절(持節), 가절(假節) 세 가지로 나뉘었지만, 가절(假節)과 지절(持節), 가절(假節)과 사지절(使持節)은 때로 섞어 쓰여서 이 세 가지가 그 권한의 경중이 각각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다 한다. 하지만 진(晉)나라 때에는 사지절(使持節)이 가장 권한이 높아서 중급 이하의 관리를 죽이거나, 벌할 권한이 주어지고 그다음은 지절(持節)로 관직이 없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주어지며 권한이 제일 낮은 가절(假節)은 군령(軍令)을 어긴 자를 죽일 권한이 주어졌다 한다. 당나라 때 절도사(節度使)가 생긴 뒤로 이 관직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⑤ 승제(承制) : 승제(承制)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편의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 漢末,遼西烏丸大人丘力居,衆五千餘落,上谷烏丸大人難樓,衆九千餘落,各稱王,而遼東屬國烏丸大人蘇僕延,衆千餘落,自稱峭王,右北平烏丸大人烏延,衆八百餘落,自稱汗魯王,皆有計策勇健。中山太守張純叛入丘力居衆中,自號彌天安定王,爲三郡烏丸元帥,寇略青、徐、幽、冀四州,殺略吏民。靈帝末,以劉虞爲州牧,募胡斬純首,北州乃定。後丘力居死,子樓班年小,從子蹋頓有武略,代立,總攝三王部,衆皆從其教令。袁紹與公孫瓚連戰不決,蹋頓遣使詣紹求和親,助紹擊瓚,破之。紹矯制賜蹋頓、〈難〉峭王、汗魯王印綬,皆以爲單于。《英雄記》曰:紹遣使即拜烏丸三王爲單于,皆安車、華蓋、羽旄、黃屋、左纛。版文曰:「使持節大將軍督幽、青、並,領冀州牧阮鄉侯紹,承制詔遼東屬國率衆王頒下、烏丸遼西率衆王蹋頓、右北平率衆王汗盧維:乃祖慕義遷善,款塞內附,北捍玁狁,東拒濊貊,世守北陲,爲百姓保障,雖時侵犯王略,命將徂征厥罪,率不旋時,悔愆變改,方之外夷,最又聰惠者也。始有千夫長、百夫長以相統領,用能悉乃心,克有勳力於國家,稍受王侯之命。自我王室多故,公孫瓚作難,殘夷厥土之君,以侮天慢主,是以四海之內,並執干戈以衛社稷。三王奮氣裔土,忿奸憂國,控弦與漢兵爲表裏,誠甚忠孝,朝所嘉焉。然而虎兕長蛇,相隨塞路,王官爵命,否而無聞。夫有勳不賞,俾勤者怠。今遣行謁者楊林,齎單于璽綬車服,以對爾勞。其各綏靜部落,教以謹慎,無使作凶作慝。世復爾祀位,長爲百蠻長。厥有咎有不臧者,泯於爾祿,而喪於乃庸,可不勉乎!烏桓單于都護部衆,左右單于受其節度,他如故事。」
▶뒤에 루반(樓班)이 성장하자 초왕(峭王)이 그 부중(部衆)을 이끌고 루반(樓班)을 받들어 선우(單于)로 섬기고 탑둔(蹋頓)을 왕(王)으로 만들었으나 〔계급상 선우(單于)는 왕(王)의 위이다.〕 탑둔(蹋頓)이 이런저런 계책을 꾀하였다.
광양(廣陽, 북경 부근) 사람 염유(閻柔)는 젊은 시절에 오환(烏丸)과 선비(鮮卑)의 포로가 되어 그 속에서 보냈는데 오환과 선비 겨레들이 염유를 따랐다. 유(柔)는 끝내 선비(鮮卑) 무리가 오환 교위(烏丸校尉) 형거(邢舉)를 죽임에 따라 그 지위를 대신하게 되었다.
원소가 은총으로 다독이는 바람에 북쪽 변방을 안정시켰다. 뒤에 원소의 아들 원상(袁尚)이 조조에게 패하고 탑둔(蹋頓)에게 달아나고 탑둔의 막강한 세력을 믿고 다시 기주(冀州)를 손에 넣으려 꾀하였다.
때마침 태조(太祖, 곧 조조(曹操)에 대한 존칭)가 하북(河北)을 평정하고 염유(閻柔)가 선비(鮮卑)와 오환(烏丸)을 이끌고 와서 붙었고 이로 인해 마침내 유(柔)를 교위(校尉)로 삼았고 태조(太祖)가 여전히 한(漢)의 사절(使節)을 지니고서 옛날처럼 광녕(廣甯)을 다스리고 있었다.
동한(東漢) 말기인 건안(建安) 11년(206년) 태조(太祖) 조조가 스스로 탑둔을 유성(柳城)에서 정벌하는데 군사들을 몰래 지름길(詭道)로 진격하게 하였지만 백여 리도 이르지 않아서 상대 군사들이 깨닫게 되었다. 상(尙)과 탑둔(蹋頓)이 무리를 거느리고 범성(凡城, 조양(朝陽市))에서 태조 조조를 맞아 싸우는데 병사와 기마가 어마어마하였다.
태조(太祖)가 높은 곳에 올라가 상대 진을 바라보니 군대가 아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조금 어지러워 보였다. 태조 조조가 결국 그 무리를 쳐 깨뜨리고 적진에 임하여 탑둔(蹋頓)의 머리를 베었다. 죽은 사람들이 들판을 덮었다.
요동오환 선우인 소부환(速附丸, 곧 초왕 소복연(峭王 蘇仆延) 또는 소복환(蘇僕丸))과 루반(樓班, 유주(幽州) 요서(遼西) 사람, 지금에 요녕 의현(義縣)), 오연(烏延, 우북평(右北平) 사람, 지금 하북 봉윤(豐潤))들이 요동(遼東)에 할거한 군벌(軍閥) 공손강(公孫康)에게로 달아나니 이 요동(遼東) 군벌이 죄다 참수하여 그 머리들을 조조에게 전해 주었다(207년). 그 남은 패잔병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유주(幽州)와 병주(并州)에 유(柔)가 통솔하던 오환(烏丸) 만여 가구에 대해서는 그 붙이들을 다 옮겨 중원(中國)에 살게 하고 그 후왕(侯王)과 어르신(大人), 붙이사람들을 이끌어 종속시켜 (조조의) 정벌 전쟁에 참여시켰다. 이 전쟁을 통해 삼군 오환(三郡烏丸)은 천하에 이름난 기마병이 되었다.
위략(魏略)에서 ‘경초(景初 삼국 위(魏) 명제 조예(明帝曹睿)의 세 번째 연호) 원년(237년) 가을에 유주자사(幽州刺史) 모구검(毌丘儉)을 보내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요동(遼東)을 토벌하게 하였다. 우북평 오환선우(右北平烏丸單于) 적루돈(寇婁敦)과 요서오환 도독(遼西烏丸都督) 솔중왕(率衆王) 호류섭(護留葉)이 옛날 원소의 아들 원상(袁尚)을 따라 요서(遼西)로 달아났었는데 모구검의 군대가 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리 오천여 사람을 이끌고서 항복하였다. 구루돈(寇婁敦)이 아우 아라장(阿羅獎 또는 아라반(阿羅槃)) 들을 보내어 위나라 궐(闕)에 나아가 조공(朝貢)하니 그 우두머리(渠帥) 30여 사람들을 제수하여 왕(王)으로 삼고,수레와 말, 비단을 각자 차이 지게 선물하였다.’ 하였다.”
▶後樓班大,峭王率其部衆奉樓班爲單于,蹋頓爲王。然蹋頓多畫計策。廣陽閻柔,少沒烏丸、鮮卑中,爲其種所歸信。柔乃因鮮卑衆,殺烏丸校尉邢舉代之,紹因寵慰以安北邊。後袁尚敗奔蹋頓,憑其勢,復圖冀州。會太祖平河北,柔帥鮮卑、烏丸歸附,遂因以柔爲校尉,猶持漢使節,治廣甯如舊。建安十一年,太祖自征蹋頓於柳城,潛軍詭道,未至百餘里,虜乃覺。尚與蹋頓將衆逆戰於凡城,兵馬甚盛。太祖登高望虜陳,(柳)軍未進,觀其小動,乃擊破其衆,臨陳斬蹋頓首,死者被野。速附丸、樓班、烏延等走遼東,遼東悉斬,傳送其首。其餘遺迸皆降。及幽州、并州柔所統烏丸萬餘落,悉徙其族居中國,帥從其侯王大人種衆與征伐。由是三郡烏丸爲天下名騎。《魏略》曰:景初元年秋,遣幽州刺史毌丘儉率衆軍討遼東。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葉,昔隨袁尚奔遼西,聞儉軍至,率衆五千餘人降。寇婁敦遣弟(阿羅獎)阿羅槃等詣闕朝貢,封其渠帥三十餘爲王,賜輿馬繒采各有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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