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숙신의 특산물 호(楛)로 만든 활과 돌촉 및 기타 산물에 대한 대략적인 자료들 2
1. 우공추지(禹貢錐指) 7권 :
소식(蘇軾)이 석노기(石砮記)에서 말하기를 “내가 담이(儋耳) 북쪽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강(江) 둘레에서 옛 화살촉을 얻었는데 창의 쇠끝 같고 검의 등이 볼록 나온 것처럼 그 모난 것은 가히 벨 수가 있으니 그 재질은 돌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호시(楛矢)와 돌촉(石砮)”이니 공자(孔子)가 가까운 형(荊)과 양(梁) 땅에서 이를 가져오지 않았고 멀리 숙신(肅慎)에서 가져왔다 하니 그렇다면 형(荊)과 양(梁) 땅이 이를 공물로 바치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다.” 하였다.
왕명일(王明逸)이 말하기를 “여직(女直)은 바로 옛 숙신(肅慎)의 땅이다. 지금도 여전히 호시(楛矢)와 돌촉(石砮)을 낸다. 돌촉(石砮)은 흑룡강(黑龍江) 어귀에서 나니 수화석(水花石)이라 이름하는데 단단하고 날카로움이 철(鐵)을 뚫는다. 자첨(子瞻, 소식)의 소견에 옛 형(荊)과 양(梁) 밖 먼 곳에 본래 마땅히 이것이 있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공자(孔子)가 숙신(肅慎)의 화살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 길이가 한 자(尺) 여덟 치(咫)였기 때문일 따름이다. 형(荊)과 양(梁)이 공물로 들이지 않아서 화살을 숙신(肅慎)에서 징발하였던 것이 아니다. 설령 형(荊)과 양(粱) 곧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중원(中國)이 어찌 이 물건이 전혀 없어서 새매를 쏜 화살이 기어코 숙신의 것이었겠는가? 자첨의 이론이 논리가 마땅하지 않다. 그러나 이를 통해 옛 형(荊)과 양(梁) 땅에 돌촉(石砮)의 모양을 알 수가 있으니 그 이론 역시 좋은 말이다.
○균(箘)과 로(簵)과 호(楛)이다.
[전(傳)에서 말하기를 균(箘)과 로(簵)는 아름다운 대나무이고 호(楛)는 화살대로 안성맞춤이다. 이 세 가지 물건은 모두 운몽택(雲夢澤)에서 난다.” 하였다. 정의(正義) : 정(鄭)이 말하기를 “균(箘)과 로(簵)는 영풍(聆風)이라고도 한다. 균과 로라는 두 가지 이름이 생긴 것은 아마도 크기가 달라서 일 것이다. 숙신씨(肅慎氏)가 호시(楛矢)를 공물로 바쳤으니 호(楛)가 화살대로 알맞다는 것을 알아서이다. ” 하였다. 안씨(顏氏)가 “균(箘), 로(簵)는 대나무 이름이고 호(楛)는 나무 이름이니 모두 화살을 만들 수 있다.” 하였다. 증씨(曾氏)는 “동안우(董安于, ? - 기원전 496년)가 진양(晉陽)을 다스림에 관공서(公府)의 담을 모두 호(蒿)와 점(苫, 곧 호(楛))과 초(楚)를 가져와서 담장으로 썼는데 그 높이가 한 장(丈) 남짓하였다. 조양자(趙襄子)가 점(苫)을 뽑아 시험을 해보니 그 단단함이 균(箘)과 로(簵)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균(箘)과 로죽(簵竹)의 단단함과 억센 성질은 그 재료 역시 화살대에 알맞다.” 하였다.
...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낙월(駱越) 나라의 균(箘)은 남월(南越)에서도 역시 이 대나무가 난다. 균로(箘簵)를 어떤 사람은 두가지 종류라 하고 어떤 사람은 한가지 종류라고 말하는데 누구의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정(鄭)은 크기로 이름을 달리한다고 하였으니 이치상 그럴 듯하지 않나 싶다. 육기(陸璣)의 초목소(草木疏)에서 말하기를 “호(楛)의 꼴은 형(荊)과 비슷하나 붉고 줄기(莖)는 시(蓍)풀과 닮았다. 상당인(上黨人, 상당은 지금 산서성 장치구)이 이를 결어서 큰 광주리(斗筥), 상자 기물을 만들고 또한 구부려서 부인의 비녀로 쓰인다. 그렇지만 호(楛)는 역시 북쪽 땅에서 이를 가지고 있어 다만 화살대로만 알맞을 뿐이 아니니, 따라서 반드시 화살대를 형(荊)나무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하였다. 정의(正義)에서 말하기를 “이 세 물(物)이 모두 운몽(雲夢)의 늪(澤)에서 나온다 하였는데 당시에 검증이 그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나 위(渭)가 살펴보건대 초어(楚語)에서 “왕손어(王孫圉)가 ‘못(藪)이 있다는 것은 운련도주(雲連徒洲)’을 말하니 금(金), 나무(木), 대나무(竹箭)들이 나오는 곳”이라 하니 위소(韋昭)가 “이곳(江南)이 곧 운몽(雲夢)의 늪(藪)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전(孔傳)에서 이를 근거로 분명 당시에 그 위치를 실증한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만들었다. 공안국(孔安國)의 상서전(尙書傳)은 위진(魏晉) 시대 사람의 손에서 나왔으니 이 또한 하나의 증거가 된다. ... 대나무(竹箭)들이란 균(箘), 로(簵)이다. 주례(周禮)에 “늪(藪)은 그 푸짐함으로써 사람들이 찾아서 모여들게 만드니 운몽(雲夢)이라는 (그 이름을 붙이는 곳이) 숫자가 풍부해지게 되었으리라!
옛날 화살대의 재료에 대나무가 있고 나무가 있었다. 대나무에는 두 가지이니 하나는 양(揚, 회하(淮河) 이남 장강 유역과 영남(岭南)지구) 땅의 소(篠, 조릿대)이고 다른 하나는 형(荊, 호북성 남장현 일대의 형산(荊山)과 형산(衡山) 일대) 땅의 균로(箘簵)이다. 나무에도 두 가지이니 하나는 형(荊)의 호(楛)이고 다른 하나는 기(冀, 북경 천진 하남성 북부 하북성 산서성 요녕성 내몽고 지역을 포괄함)의 포(蒲)이다. 좌전(左傳) 선공(宣公) 12년 진주자(晉廚子)가 “중택(董澤)의 포(蒲)”라 하였다. 그 주(注)에 “포(蒲)는 버드나무(楊柳, 갈잎큰키나무)이니 이 나무로써 화살을 만들 수 있다. 하동(河東) 문희현(聞喜縣) 동북쪽에 동지(董池) 뚝이 있다.” 하였다. 그러나 포류(蒲柳) 역시나 화살통을 만들기에 알맞고 우(禹)임금 때 전복(甸服, 중앙 정부에 대해 주로 담당하였던 것이 농업생산물이었고 천자가 직접 다스리던 곳)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조리가 맞지 않는다.
○세 지방(나라)이 나열된 조목의 이름대로 공물을 바쳤다. (三邦厎貢厥名)
여씨(呂氏)가 “모두 참죽나무(杶) 산뽕나무(榦)와 호(楛)나무 열 가지 물건은 조정(朝廷)에서 늘 쓰는 것이 아닌데 굳이 이를 공물로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고 공물을 바치게 하지 않는다면 쓰임이 생겼을 때 쓰지 못하는 일이 있게 되니, 따라서 오직 그 유명한 것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명(名)이란 그 조목들을 늘어놓고서 공물로 바치게 한 것이다. 성인의 섬세한 일 처리가 이와 같았다.”
... 임소영(林少穎)이 “삼방(三邦)의 땅은 서경(書經)에 분명한 글월이 없어서 연구할 근거를 찾기에 어렵다.” 하였다. 고공기(考工記)를 살펴보면 ‘재질이 훌륭한 것은 분호(分胡, 안휘(安徽) 부양(阜阳)에 있었던 옛 나라)의 화살대이다.” 하였다. 정주(鄭注)에서 “호자(胡子)의 나라는 남쪽 초(楚) 땅 곁에 있었다. 생각해 보면 세 나라의 옛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나 위(渭)가 살펴보니 호(胡)는 귀성(歸姓)의 나라이다. 한지(漢誌)에 나온 여남(汝南)과 여음현(汝陰縣, 안휘 부양)은 옛 호국(胡國)이다. 두예의 좌전주(左傳注)에서도 같은 의견이다. 지금 봉양부(鳳陽府) 영주(潁州) 서북쪽에 호성(胡城)이라는 없어진 현(縣)이 이것이다. 호국(胡國)은 뒤에 초(楚)나라에 병합되어 그 초기에도 역시 초나라 옆에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우공(禹貢)에 예주(豫州, 하남성 일대)의 영역은 운몽(雲夢)과 거리가 절대 멀어 세 나라(三邦)에 대한 이야기는 마땅히 의문으로 남겨 두어야 하니 임(林)의 주장은 유달리 억지 짜맞추기에 속한다.
전(傳)에 “균(箘), 로(簵), 호(楛) 세 가지 물(物)은 모두 운몽(雲夢)의 못(澤)에서 나온다. 못 가까이에 세 나라가 모두 이 물건을 공물로 바쳤으니 그 이름들을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일컫는다.” 하였다. 장씨(張氏)가 “세 물건의 공물은 바로 더욱 아름다운 것이니 서경 우공(禹貢)편에 나오는 ‘궐명(厥名)’이란 ‘더욱 아름답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글월을 오롯이 세 물건에 댄다면 그릇되다고 여겨진다.” 하였다. 소씨(穌氏)가 “세 나라(三邦)는 큰나라(大國), 그 다음 나라(次國), 작은 나라(小國)이다. 참죽나무(杶), 산뽕나무(榦), 노송나무(栝), 측백나무(柏), 숫돌(礪), 고운숫돌(砥), 돌살촉(砮), 단(丹), 그리고 균(箘), 로(簵), 호(楛) 모두가 무거운 물품들이다. 형주(荊州)는 기(冀, 수도가 있는) 땅과 가장 먼데 이쪽 지역에 강(江)은 도읍지가 있는 하(河)에 도달할 물길이 없어 무거운 물건을 틀림없이 수송하기에 어렵다. 그래서 이 주(州)에 있었던 나라는 크기로써 하지 않고 다만 그 명목에 따른 가짓수를 공물로 바쳤고 그 물건을 기준하여 가볍게 쌀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서 경사(京師)에 이르게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수고를 끼치는 것을 엄중하게 여긴 것이다” 하였다. 임소영(林少穎)이 “이 이론은 옳지 않다. 저 이른바 ‘땅의 성질에 맞게 공물을 하였다’라는 것은 모두 그 옷과 생활용품의 물건이고, 삶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각 나라들로 하여 본 해에 수송해야 할, 부과된 물품에 기준하여서 경사(京師)에 공물을 들이게 하였다. 만약 ‘공물로 바쳐야만 할 물건을 그 명목과 가짓수에 기준하여 가볍게 싸는 것으로 바꾸었다.’라고 한다면 바로 공물 제도를 만든 본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나 위(渭)가 살피건대 임(林)의 주장이 좋이 옳다. 그리고 양주(揚州)는 나무를 공물로 들인 일이 더욱 많았고 양주(梁州, 섬서 사천 일대)는 철(鐵)과 돌살촉(砮) 들을 공물로 들였으니 모두들 무거운 물건이다. 그 길이 형(荊) 땅보다 더욱 머니 무엇 때문에 유독 가볍게 쌀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야만 했겠는가? 여(呂)의 이론이 공씨(孔氏)보다 낫고 역시 소씨(蘇氏)를 압도하니 환하여 따를 만하다.
禹貢錐指/卷07
《石砮記》曰:餘自儋耳北歸,江上得古箭鏃,槊鋒而劍脊,其廉可劌,而其質則石,此即所謂“楛矢石砮”,孔子不近取之荊、梁,而遠取之肅慎,則荊、梁之不貢此久矣。王明逸云:女直即古肅慎之地,今尚產楛矢石砮。石砮出黑龍江口,名水花石,堅利入鐵。子瞻之所見,古荊、梁外徼固宜有之也。渭按:孔子知為肅慎之矢者,亦以其長尺有咫耳,非以荊、梁不貢而徵諸肅慎也。荊、粱即不貢,中國豈絕無此物,而射隼者必肅慎乎,子瞻說未當。然因此可見古荊、梁石砮之狀,亦佳話也。
○惟箘、範、楛,〈《釋文》:箘,求隕反。簵音路。楛音戶。〉
[《傳》曰:箘、簵,美竹,楛中矢榦,三物皆出雲夢之澤。《正義》曰:鄭雲:箘、簵,聆風也。竹有二名,或大小異也。肅慎氏貢楛矢,知楛中矢榦。顏氏曰:箘、簵,竹名;楛,木名也,皆可為矢。曾氏曰:董安於之治晉陽也,公府之垣,皆以獲蒿苫楚廧之,其高丈餘。趙襄子發而試之,其堅則箘、簵之所不能過也。則箘、簵竹之堅勁者,其材亦中矢之笴。]
... 《呂氏春秋》曰:駱越之箘。則南越亦產此竹。箘簵或以為二種,或以為一種,未知孰是。鄭謂大小異名,理或然也。... 陸璣《草木疏》云:楛形似荊而赤,莖似蓍,上黨人織以為牛莒箱器,又屈以為婦人釵。然則楛亦北地所有,但不中矢榦,故必取諸荊耳。
《正義》云:三物皆出雲夢之澤,當時驗之猶然。渭按:《楚語》王孫圉云:有藪曰雲連徒洲,金木竹箭之所生也。韋昭謂即雲夢之藪。故《孔傳》據以為言,非必當時驗之。《傳》出魏、晉間人手,此又一證矣。...竹箭者,箘、簵也。《周禮》曰:藪以富得民。雲夢之數富矣哉。
古矢笴之材,有竹有木。竹二:一為揚之篠,一為荊之箘簵也。木二:一為荊之楛,一為冀之蒲也。.《左傳》:宣十二年,晉廚子曰:董澤之蒲。《注》云:蒲,楊柳,可以為箭。河東聞喜縣東北有董池陂,是蒲柳亦中矢笱,禹時在甸服,故無貫。
○三邦厎貢厥名,
呂氏曰:凡杶及楛十物,非朝廷所常用,必使之貢則勞民,不使之貢則有用而或闕,故惟使貢其名。名者,列其條目而貢之也,聖人處事之精審如此。...林少穎云:三邦之地,《經》無明文,難以考據。按《考工記》:材之美者,有分胡之笴。《鄭注》云:胡子之國在楚旁。意者即三邦之故地歟。渭按:胡,歸姓之國也。《漢誌》汝南汝陰縣故胡國。杜預《左傳注》同。今鳳陽府潁州西北有胡城廢縣是也。胡國後為楚所並,其初亦不可謂在楚旁。《禹貫》為豫州之域,去雲夢絕遠,三邦當闕疑,林說殊屬附會。
《傳》云:箘、簵、楛三物皆出雲夢之澤,近澤三國皆致貢之,其名天下稱善。張氏曰:三物貢其尤美者,厥名,猶言尤美也。以此句專承三物,恐非。穌氏曰:三邦,大國次國小國也。杶、榦、栝、柏,礪、砥、砮、丹,與箘、簵、楛,皆物之重者,荊州去冀最遠,而江無達河之道,難以必致重物。故使此州之國,不以大小,但致貢其名數,而準其物,易以輕齎,致之京師,重勞人也。林少穎云:此說不然。夫所謂“任土作貢”者,皆其服食器用之物而不可闕。故使準其本歲所輸之賦,而貢於京師。若謂當貢之物,準其名數,易以輕齎,正非作貢之本意也。渭按:林說良是。且揚州貢木更多,梁州貢鐵砮等,皆重物也。而路尤遠於荊,何以獨不易輕齎乎!呂說勝孔亦勝蘇,灼然可從。
2. 점(苫) : 춘추좌전정의 32권 : 이아(爾雅)에서 “백개(白蓋)를 일러 점(苫)이라고 한다.” 하였다. ... 주소(疏注)에 “개(蓋)는 점(苫)의 별명이다.” 하였다. ○정의(正義)에서 “석기(釋器)에서 云‘백개(白蓋)를 일러 고(苫)라고 한다.” 하였다. 손염(孫炎)은 “백개(白蓋)는 모점(茅苫)이다.” 하였다. 곽박은 “백모(白茅)는 점(苫)이다. 지금 강동(江東) 땅에서는 개(蓋)라고 부른다.” 하였다.
春秋左傳正義/卷32 《爾雅》曰:“白蓋謂之苫。疏注“蓋,苫之別名”。○正義曰:《釋器》云:“白蓋謂之苫。”孫炎曰:“白蓋,茅苫也。”郭璞曰:“白茅苫也。今江東呼為蓋。”
3. 옥해(玉海) 150권 : 하(夏)나라 때의 균(箘), 로(簵), 호(楛) : 우공(禹貢)에 ‘형주(荆州) 공물은 거청숫돌(礪), 고운숫돌(砥), 돌화살촉(砮), 단(丹)이다. 오직 균(箘), 로(簵), 호(楛)..’라는 말에 주(注)에서 “노(砮)는 돌 이름이니 화살촉을 만들 수 있다. 호(楛)는 나무 이름이니 쇠뇌(弩)를 만들 수 있다.” 하고 소(疏)에서 “노어(魯語)에서 ‘숙신씨(肅慎氏)가 호시(楛矢)와 돌화살촉(石砮)을 공물로 들였다.’ 하였다.” 말한다.
〈숙신국기(肅慎國記)에 “그 땅은 부여국(夫餘國) 북쪽에 있으니 동쪽으로 큰 바다를 가에 두고 있다.” 하였다. 위략(魏畧)에 “읍루(挹婁)는 일명 숙신(肅慎)이다.” 하였다. 기문(記文)에 “호(楛)는 나무이다. 지금 요(遼) 땅 왼쪽에 모양이 형(荆)과 같고 잎사귀는 느릅나무(榆)와 같은 것이 있다. 호시(楛矢)와 돌화살촉(石砮)은 우(禹)임금 이래로, 이를 공물로 들였다.” 하였다. 안사고(顔師古)가 “호(楛)나무는 화살대로 만들 수 있으니 지금 빈(豳) 땅 이북에서 모두 이것을 쓰고 있다.” 하였다.〉
玉海 (四庫全書本)/卷150 夏箘簵楛 禹貢荆州厥貢礪砥砮丹惟箘簵楛注謂砮石名可為矢鏃楛木名可為弩疏魯語曰肅慎氏貢楛矢石砮〈肅慎國記曰其地在夫餘國北東濵大海魏畧曰挹婁一名肅慎記文曰楛木也今遼左有狀如荆葉如榆 楛矢石砮自禹以來貢之 顔師古曰楛木為笴今豳以北皆用之〉
4. 흠정고금고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방여휘편(方輿彙編) 182권 :
오라영고탑부기사(烏喇寧古塔部紀事) :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성왕(成王)이 이미 동쪽을 정벌하자 식신(息慎, 숙신)이 와서 축하하였다. 왕이 영국(榮國, 영국 지금 섬서(陝西) 호현(戶縣)의 군주 영백(榮伯)을 시켜 숙신에게 재물을 하사하게 하고 ‘유식신지명(賄息慎之命)’을 적게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면 식신(息慎)은 바로 숙신(肅慎)이니 옛날 판본에는 ’식(息)‘을 썼다.〉
... 삼국위지(三國魏志) 진 유왕 본기(陳留王本紀)에 “3년 여름 4월에 요동군(遼東郡)에 ‘숙신국(肅慎國)에서 사신을 보내어 통역을 두 번 거쳐(重譯) 공물을 들이었으니 바친 공물은 그 나라의 활 30장(張)으로 길이가 3자(尺) 5치(寸)였고 호시(楛矢)는 길이가 1자(尺) 8치(寸)였으며 돌촉(石砮)은 3백 매, 가죽과 뼈와 철을 섞어 만든 갑옷(鎧)이 20령(領), 담비 가죽(貂皮)이 4백 매였다.” 하였다.
위지(魏志) “읍루(挹婁)는 부여(夫餘) 동북 천여리(東北千餘里)에 있으니 큰 바다를 가에 두고 있다. 남쪽으로는 북옥저(北沃沮)와 닿아 있어 그 북쪽이 다한 곳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한다. 그 토지가 험한 산이 많고 그 사람 꼴이 부여(夫餘)와 닮았다. 언어(言語)는 부여(夫餘)와 구려(句麗)가 같지 않다. 오곡(五榖)과 소, 말, 마(麻)와 베(布)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용맹하고 힘차며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읍락(邑落)에 각각 대인(大人)이 있다. 산과 숲 사이에서 살며 늘 굴(움집)을 짓고 산다(穴居). 큰 집은 깊이가 구제(九梯 : 제는 계단의 뜻이 있다)이니 (계단?)이 많은 것을 좋게 여긴다. 땅에 기후가 차 부여(夫餘)보다 극렬하다. 그 민간은 돼지(豬) 기르기를 잘하고 그 고기를 먹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에 돼지(豬) 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몇 푼(分) 두텁게 발라서 바람과 한기를 막는다. 여름이면 웃통을 벗고서 한 자(尺) 베로 그 앞뒤를 덮어 형체를 가린다. 그 활은 길이가 네 자(尺)이고 그 힘의 세기는 쇠뇌(弩)와 같다. 화살을 호(楛)나무를 쓰는데 길이는 한 자(尺) 여덟 치(寸)이고 청석(青石)으로 살촉(鏃)을 만드니 옛 숙신씨의 나라이다. 좋은 궁사는 사람에게 쏘면 모두 맞추고 인하여 화살에 독을 발라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붉은 옥(赤玉)과 훌륭한 담비(好貂)를 낸다. 이제 이른바 ’읍루의 담비(挹婁貂)’라는 것이 이것이다. 한(漢)나라 이래로 신하의 위치로 부여(夫餘)가 속하여 부여(夫餘)가 그 조부(租賦)의 무거움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니 황초(黃初, 曹魏의 조비 때 연호 220년 – 226년) 사이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夫餘)가 여러 번 이들을 쳤으나 그 사람들의 무리가 비록 적었지만 험한 산에서 있는 바,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여 끝내 복종시킬 수 없었다.
진서 열전(晉書列傳) :숙신씨(肅慎氏)는 일명 읍루(挹婁)라고 하니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살아 부여(夫餘)와 거리가 육십 일을 가는 거리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가에 두고 있고 서쪽으로 구만칸국(寇漫汗國)과 닿아 있으며 북쪽으로 약수(弱水)가 막다른다. 그 땅의 경계는 넓어서 수천 리로 뻗어 있고 깊은 산 험한 골짜기에서 살아 그 길이 험하고 막혀 있어 수레나 말이 지나가지 못한다.
여름이면 간촐하게 지은 집(巢)에서 살고, 겨울이면 굴, 움집(穴)에서 지낸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군장(君長)이 된다. 문묵(文墨)이 없어서 말로써 약조를 맺는다. 말이 있지만 타지 않고 그저 재산으로 여길 따름이다. 소와 양은 없고 대부분 돼지(豬)를 기르고서 그 고기를 먹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털을 짜서 베(布)처럼 만든다.
그 땅에 나무가 있으니 ‘낙상(雒常)’이라 이름한다. 만약 중원(中國)에 성제(聖帝)가 임금 자리를 이으면 그 나무가 거죽을 만들어 옷을 해 입을 수 있게 된다. 우물과 부뚜막이 없고 귀 없는 세 발 달린 뚝배기(瓦鬲)를 만들어서 네댓 되(升) 음식을 담는다. 앉을 때는 키(箕)처럼 걸터앉아 발로 고기(肉)를 끼고서 이를 먹는데 언 고기를 얻게 되면 그 위에 앉아서 언 고기를 따뜻하게 만든다. 그 땅에 소금과 철이 없어 나무를 태워 재(灰)를 만들고 여기에 물을 부어 즙을 받아내서 이를 먹는다. 민간은 모두 머리카락을 땋고 베(布)로써 담(襜, 이은 천?)을 만드는데 한 자 남짓이 되면 몸의 앞뒤를 가린다. 시집 장가를 갈 때 남자는 꼬리털과 깃털을 여자 머리에 꽂아주고 여자가 좋아하면 손을 잡고 집으로 간다. 그리고서 예를 차려 방문을 여자의 집에 방문을 한다. 도둑질하고 훔치면 그 물건이 크든 작든 모두 이자를 죽인다. 그래서 비록 들에서 살아도 상대를 집적대지 않는다.
돌촉(石砮), 가죽과 동물 뼈로 만든 갑옷, 석 자(尺) 다섯 치(寸) 단궁(檀弓), 길이가 한 자 여덟 치(咫)인 호시(楛矢)가 있다. 그 나라 동북쪽에 산이 있어 돌(石)이 나오는데 그 날카로움이 철(鐵)에도 들어간다. 이 돌을 가져 오려할 때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 그 호시(楛矢)와 돌촉(石砮)을 바쳤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도와 정치를 할 때에 다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들였다. 이후 천여 년이 되어 진한(秦漢)이 강성하였을 때도 공물을 바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문제(文帝, 조비)가 상(相)이 되었을 때와 위(魏) 경원(景元) 말에 와서 호시(楛矢)와 돌촉(石砮), 활(弓)과 갑옷(甲), 담비 가죽(貂皮) 따위를 공물로 들였다. 위제(魏帝)가 조서를 내려 상부(相府)에 돌아가 쉬도록 하고 숙신 임금인 욕계(褥雞)에게 비단(錦)과 모직물(罽), 풀솜 및 견직물(綿帛)을 공물로 바쳤다.
〔산해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西經):“숙신국(肅慎國)는 백민(白民) 북쪽에 있는데 그 나라에 나무가 있어 ‘웅상(雄常)’이라고 한다.” 하였다. 원가 교주(袁珂校注)에서 곽박(郭璞)의 말을 인용하여 “웅(雄)은 더러 ‘낙(雒)’으로 쓰기도 한다.” 하였다. 《山海經·海外西經》:肅慎之國在白民北,有樹名曰雄常。”袁珂校注引郭璞曰:“雄,或作雒。”〕
〔숙신 임금 욕계(褥雞)는 ‘녹해(傉奚)’, ‘녹계(傉雞)’라고도 쓴다.〕
진서 숙신본전(晉書肅慎本傳):성제(成帝) 때 석계룡(石季龍, 갈족(羯族)이 만든 후조(後趙)의 武皇帝))에게 공물을 들이며 소통을 하여 이를 물어보니 답하기를 “매번 소와 말을 방목하며 살펴볼 때 서남(西南)쪽을 향하여 자는 일이 3년이 되었다. 이는 큰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니 그래서 공물을 들고 온 것이다.” 하였다.
위서(魏書) 물길본전(勿吉本傳):물길국(勿吉國)은 고구려(高句麗) 북쪽에 있으니 옛 숙신국(肅慎國)이다. 읍락(邑落)은 각각 따로 우두머리(長)가 있고 서로 하나로 묶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튼튼하고 세차며 언어가 유독 다르다. 늘 두막루(豆莫婁)들 나라를 가볍게 여기어 여러 니라 역시 이에 대해 걱정하였다. 낙양(洛陽)과 거리가 오천 리이고 화룡(和龍)으로부터 북쪽으로 이백여 리에 선옥산(善玉山)이 있고, 산 북쪽으로 13일을 걸어가면 기려산(祁黎山)이 있다. 다시 북쪽으로 7일을 걸어가면(行) 여락괴수(如洛瓌水)가 있으니 물 너비가 1리(里) 남짓하다. 〔여락괴수(如洛瓌水) : 요락수(饒樂水)이고 요수(澆水), 요락수(澆落水), 약락수(弱落水)로도 불린다. 지금 내몽고 서요하 상류의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또는 西拉沐淪河)이다. 서랍목륜하는 몽고어이니 그 뜻은 ‘누런빛의 하천’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요락수(饒樂水), 황수(潢水), 토호진수(吐護真水), 요수(遼水), 대요수(大潦水), 거류하(巨流河)라는 명칭들이 있었다 한다.〕
다시 북쪽으로 15일 걸어서 가면 태로수(太魯水)가 있다. 다시 동북쪽으로 18일을 걸어서 가면 옛 숙신이었던 물길국 그 나라에 이른다. 나라에 큰 강물(大水)이 있으니 3리 남짓 트였다. 이름이 속말수(速末水)이다. 그 땅은 낮아 눅눅하여 성을 쌓고 움집에서 산다. 집 형태가 무덤(塚)과 닮았고 그 위쪽에 입구가 열려있고 사다리(梯)를 써서 드나든다.
그 나라에 소는 없고 말수레가 있고 경작을 할 때면 짝을 만들어 땅을 갈고 수레는 걸어가며 민다. 조(粟)와 보리(麥)와 검은 기장(穄)이 있고 나물에는 아욱(葵)이 있다. 수기(水氣)에 짠맛이 엉겨 소금이 나무에서 생겨나니 역시 염지(鹽池)가 있는 것이다. 돼지(豬)가 많고 양(羊)은 없다. 쌀(米)을 씹어내어서 술을 빚고 술을 마시면 취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부인들은 베(布)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남자는 돼지와 개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는다. 처음 결혼할 밤에 남자는 여자 집에 나아가 여자의 가슴(乳)을 잡았다 놓으면 바로 정하여 그대로 부부가 된다.
민간에서는 머리에 호표(虎豹) 꼬리를 꽂는다. 사냥에서 활을 잘 쏘는데 활은 길이가 3자(尺)이고 화살은 길이가 한 자(尺) 두 치(寸)이며 돌로써 살촉을 만든다. 그 부모들이 봄과 여름에 죽으면 바로 시신을 묻는다. 무덤 위에 지붕을 지어 무덤이 비를 맞거나 눅눅해지지 않게 한다.
늘 칠팔월에 독약을 만들어 화살촉에 바르고 들짐승과 날짐승에게 쏘는데 살에 맞은 놈들은 바로 죽는다. 독약을 끓인 냄새 역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고 위(魏)는 ‘태황(太皇)’이라고 말한다. 범(虎)과 표범(豹), 큰 곰(羆)과 이리(狼)가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들은 산 위에서 오줌을 누거나 똥을 누어 더럽히는 짓을 하지 못하여 산길을 가는 자는 모두 물(物)을 담아서 간다.
연흥(延興, 471년 - 476년) 사이에 사신 을력지(乙力支)를 보내어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를 알현하고 공물을 바쳤다. 태화(太和, 477년 - 499년) 초에 다시 말 오백 필을 공물로 들였다. 을력지(乙力支)가 “처음에 우리나라를 출발하였을 때 배를 타고서 난하(難河)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태려하(太沴河)에 이르렀는데 배가 물에 가라앉는 바람에 남쪽으로 나와서 육지로 걸어가다 낙고수(洛孤水)를 건너 거란(契丹) 서쪽 경계를 따라서 화룡(和龍)에 도달하였다.”라고 자기가 거쳐 온 길을 풀어냈다. 또 자기 나라가 지난번에 고구려(高句麗) 열 개 마을을 깨부수고 몰래 백제(百濟)와 함께 물길(水道)을 따라 힘을 합하여 고구려를 취하기로 모의하고서 을력지(乙力支)를 명을 받든 사신으로서 대국(大國)에 보내어 백제와 모의한 계략이 어떤지를 청하였었는데 조칙(詔敕)을 내리기를 ‘물길과 백제와 고구려 이 세 나라는 함께 대국에 딸린 울타리(藩附) 격이다. 마땅히 함께 어울려 순리대로 지내야지 서로 침입하고 소란을 피우지 말라!’ 하여 을력지(乙力支)는 결국 돌아갔었다. 이때 그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다 본(本, 물에 잠긴) 배를 획득하여 배를 타고 그 나라에 도달하였다고 직접 언급하였다. 9년 다시 후니지(侯尼支)를 사신으로 보내어 알현하고 공물을 들였다. 다음 해에 다시 공물을 들였다.
물길 주변에 대막로국(大莫盧國), 복종국(覆鍾國), 막다회국(莫多回國), 고루국(庫婁國), 소화국(素和國), 구불복국(具弗伏國), 필려이국(匹黎尒國),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릉국(郁羽陵國), 고복진국(庫伏真國), 노루국(魯婁國), 우진후국(羽真侯國)이 있었는데 서로서로 각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알현하고 공물을 올렸다.
欽定古今圖書集成 方輿彙編 第一百八十二卷 烏喇寧古塔部紀事 :
《史記·周本紀》:「成王既東伐,息慎來賀。王賜榮伯,作《賄息慎之命》。」〈按息慎即肅慎古本用息〉 《史記·孔子世家》:「有隼集於陳廷而死,楛矢貫之,石砮, 長尺有咫。陳湣公使使問仲尼,仲尼曰:『隼來遠矣,肅 慎之矢也。昔武王克商,肅慎貢楛矢。石砮,長尺有咫。 先王以分大姬配虞胡公,封諸陳,求之故府,果得之』。」 《三國魏志陳留王本紀》:「三年夏四月,遼東郡言肅慎 國遣使重譯入貢,獻其國弓三十張,長三尺五寸;楛」矢,長一尺八寸,石砮三百枚,皮骨鐵雜鎧二十領,貂 皮四百枚。《魏志》:「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濱大海,南與北沃沮接,未知其北所極。其土地多山險,其人形似夫餘,言 語不與夫餘、句麗同。有五榖、牛、馬、麻、布。人多勇力,無大君長,邑落各有大人。處山林之間,常穴居,大家深九梯,以多為好。土氣寒,劇於夫餘。其俗好養豬,食其 肉,衣其皮。冬以豬膏塗身,厚數分,以御風寒。夏則裸」 袒,以尺布隱其前後,以蔽形體。其弓長四尺,力如弩。 矢用楛,長尺八寸,青石為鏃,古之肅慎氏之國也。善射,射人皆入,因矢施毒,人中皆死。出赤玉好貂,今所謂「挹婁貂」是也。自漢以來,臣屬夫餘,夫餘責其租賦 重,以黃初中叛之。夫餘數伐之,其人眾雖少,所在山險,鄰國人畏其弓矢,卒不能服也。《晉書列傳》:「肅慎氏一名挹婁,在不咸山北,去夫餘可六十日行。東濱大海,西接寇漫汗國,北極弱水。其土界廣袤數千里,居深山窮谷,其路險阻,車馬不通。夏 則巢居,冬則穴處。父子世為君長。無文墨,以言語為約。有馬不乘,但以為財產而已。無牛羊,多畜豬,食其 肉,衣其皮,績毛以為布。有樹名雒常。若中國有聖帝代立,則其木生皮可衣。」無井竈,作瓦鬲,受四五升以食。坐則箕踞,以足挾肉而啖之,得凍肉,坐其上令暖。土無鹽鐵,燒木作灰,灌取汁而食之。俗皆編髮,以布作襜,經尺餘以蔽前後。將嫁娶,男以毛羽插女頭,女和則持歸,然後致禮聘之。相盜竊,無多少皆殺之,故雖野處而不相犯。有石砮皮骨之甲。「檀弓三尺五寸, 楛矢長尺有咫。其國東北有山出石,其利入鐵,將取之,必先祈神。周武王時,獻其楛矢、石砮。逮于周公輔 成王,復遣使入貢。爾後千餘年,雖秦漢之盛,莫之致也。及文帝作相,魏景元末來貢楛矢、石砮、弓甲、貂皮之屬。魏帝詔歸于相府,賜其王褥、雞、錦、罽、綿帛。」 《晉書肅慎本傳》:「成帝時,通貢于石季龍。問之,答曰:『每候牛馬向西南眠者三年矣。是知有大國所在,故來』。」《魏書》勿吉本傳:勿吉國在高句麗北,舊肅慎國也。邑落各自有長,不相總一。其人勁悍,言語獨異。常輕,豆 莫婁等國諸國亦患之。去洛五千里,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山北行十三日,至祁黎山。又北行七日至如洛瓌水,水廣里餘。又北行十五日,《太魯》水。又 東北行十八日,到其國。國有大水,闊三里餘,名「速末水。」其地下濕,築城穴居。屋形似塚,開口於上,以梯出入。其國無牛,有車馬,佃則偶耕,車則步推。有粟及麥、穄,菜則有葵。水氣鹹凝,鹽生樹上,亦有鹽池。多豬無 羊。嚼米醞酒,飲能至醉。婦人則布裙,男子豬犬皮裘。 初婚之夕,男就女家執女乳而罷,便以為定,仍為夫婦。俗頭插虎豹尾。善射獵,弓長三尺,箭長尺二寸,以石為鏃。其父母春夏死,立埋之。冢上作屋,不令雨濕。 常七八月造毒藥傅箭鏃,射禽獸,中者便死。煮藥毒氣,亦能殺人。國南有徒太山,《魏》言「太皇。」有虎豹羆狼, 不害人,人不得山上溲汙。行逕山者,皆以物盛去。延 興中,遣使乙力支朝獻。太和初,又貢馬五百匹。乙力支稱初發其國,乘船泝難河西上,至太沴河,沈船於水,南出陸行,渡洛孤水,從契丹西界達和龍。自云其國先破高句麗十落密,共百濟,謀從水道并力取高 句麗。遣乙力支奉使大國,請其可否。詔敕三國同是藩附,宜共和順,「勿相侵擾。」乙《力支》乃還,從其來道,取 得本船,汎達其國。
5. 위서(魏書) 100권 열전(列傳) 제 88 :
실위(失韋) : 실위국(失韋國)은 물길(勿吉) 북쪽에 천리이다. 낙양과 거리가 육천 리(里)이다. 길은 화룡(和龍) 북쪽 천여리를 지나면 거란국(契丹國)으로 들어간다. 다시 북쪽으로 10일을 가면 철수(啜水)에 이르고 다시 북쪽으로 3일을 가면 개수(蓋水)가 있고 다시 북쪽으로 3일을 가면 독료산(犢了山)이 있다. 이 산은 높고 커서 둘레가 3백여 리를 돈다. 다시 북쪽으로 3일을 가면 큰 하천이 있는데 굴리(屈利)라고 이름한다. 다시 북쪽으로 3일을 가면 인수(刃水)에 이른다. 다시 북쪽으로 5일을 가면 이 실위국에 이른다. 그곳에 큰 하천이 있어 북쪽을 따라서 흘러오며 너비가 4리(里) 남짓하니 내수(㮈水)라 이름한다. 국토가 낮아 눅눅하다. 말은 고막혜(庫莫奚), 거란(契丹), 두막루국(豆莫婁國)과 같다. 조(粟), 보리(麥)와 검은 기장(穄)이 꽤나 있다. 다만 돼지(猪)와 물고기를 먹고 소(牛)와 말(馬)을 기르고 민간에서는 또한 양(羊)이 없다. 여름이면 성(城)안에서 살고 겨울에는 물과 풀을 따라서 지내니 역시 담비가죽(貂皮)이 많다. 사나이들은 머리카락을 꼰다. 각궁(角弓)을 쓰고 그 화살촉은 더욱 길다.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묶고 두 손을 어긋나게 잡은 모양(叉手)처럼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다. 그 나라는 도둑질이 적으니 하나를 도둑질하면 세 배로 징벌을 하고 사람을 죽인 사람은 말 3백 필로 책임을 묻는다. 남녀가 다 흰 사슴 가죽의 저고리와 바지를 입는다. 누룩이 있어서 술을 빚는다. 민간에서는 붉은 구슬(赤珠)을 아끼어서 부인들의 장식으로 삼아 이 구슬들을 뚫어 목에 거는데 구슬이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여자가 이것을 얻지 않으면 끝내 결혼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른다. 부모가 죽으면 남녀 무리가 3년 동안 곡(哭)을 한다. 시신은 나무들 위에 놓아둔다. 무정(武定) 2년(544년) 4월 비로소 장언두벌(張焉豆伐, 張烏豆伐)들을 사신으로 보내어 그 토산물을 바쳤고 무정(武定, 543년 - 550년) 끝 무렵까지 공물과 사신이 찾아왔다.
失韋 : 失韋國,在勿吉北千里,去洛六千里。路出和龍北千餘里,入契丹國,又北行十日至啜水,又北行三日有蓋水,又北行三日有犢了山,其山高大,周回三百餘里,又北行三日有大水名屈利,又北行三日至刃水,又北行五日到其國。有大水從北而來,廣四里餘,名㮈水。國土下濕。語與庫莫奚、契丹、豆莫婁國同。頗有粟麥及穄,唯食猪魚,養牛馬,俗又無羊。夏則城居,冬逐水草。亦多貂皮。丈夫索髮。用角弓,其箭尤長。女婦束髮,作叉手髻。其國少竊盜,盜一徵三,殺人者責馬三百匹。男女悉衣白鹿皮襦袴。有麴釀酒。俗愛赤珠,為婦人飾,穿挂於頸,以多為貴,女不得此,乃至不嫁。父母死,男女眾哭三年,屍則置於林樹之上。武定二年四月,始遣使張焉豆伐等獻其方物,迄武定末,貢使相尋。
두막루(豆莫婁) : 두막루국(豆莫婁國)은 물길국(勿吉國) 북쪽 천 리에 있어 낙양과 거리가 육천 리이니 옛 북부여(北扶餘)이다. 실위(失韋)의 동쪽에 있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사방 이천 리이다. 그 사람은 한 곳에 살며 궁실(宮室)과 창고(倉庫)가 있다. 산악(山陵)과 널찍한 못이 많아 동이(東夷)의 영역에서는 가장 평탄하고 탁 트였다. 땅은 오곡을 키우는데 알맞지만, 오과(五果)는 자라지 못한다. 그 사람들은 키가 크고 몸집이 크며 성품이 강하고 용맹하며 조심스럽고 점잖아 다른 민족에 대해 도적질하고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그 군장(君長)은 모두 여섯 가축(畜)으로 관직에 이름을 붙였고 읍락에 우두머리(豪帥)가 있다. 음식(飲食) 역시 조두(俎豆)라는 그릇을 쓴다. 마(麻)와 베(布)옷이 있다. 옷을 제작은 고려(高麗)와 비슷하되 품이 크니 그 나라가 사람들이 크고 금은으로써 장식을 한다.
형벌을 쓰는 것이 엄격하고 급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그 집안 사람들을 싹 거두어 노비로 삼는다. 음란함을 비속하게 여기고 투기하는 부인을 더욱 미워하는데 투기하는 자는 죽이고서 그 나라 남산 위에 시신을 매달아 놓아 썩기에 이른다. 여자 집안이 시신을 수습하고자 하면 소와 말을 보내야만 시신을 준다. 어떤 사람은 이곳이 본디 예맥(穢貊)의 땅이었다고 말한다.
豆莫婁 : 豆莫婁國,在勿吉國北千里,去洛六千里,舊北扶餘也。在失韋之東,東至於海,方二千里。其人土著,有宮室倉庫。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為平敞。地宜五穀,不生五果。其人長大,性強勇,謹厚,不寇抄。其君長皆以六畜名官,邑落有豪帥。飲食亦用俎豆。有麻布衣,制類高麗而幅大,其國大人,以金銀飾之。用刑嚴急,殺人者死,沒其家人為奴婢。俗淫 尤惡妬婦,妬者殺之,尸其國南山上至腐。女家欲得,輸牛馬乃與之。或言本穢貊之地也。
지두우(地豆于, 또는 --칸(干)) : 지두우국(地豆于國)은 실위(失韋) 서쪽 천여 리(里)에 있다. 소와 양이 많고 이름난 말을 내고 가죽으로 옷을 짓으며 오곡이 없고 다만 고기와 유제품(酪)을 먹는다. 연흥(延興) 2년(472년) 8월에 사신을 보내 알현하고 공물을 바쳤는데 태화(太和) 6년까지 공물과 사신이 끊어지지 않았다. 14년(490년)에 자주 와서 변방 요새를 침범하여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과 양평왕(陽平王) 이(頤)에게 조서를 내려 이들을 쳐서 쫓아내게 하였다. 이 뒤부터 때때로 경사(京師)에 황제를 알현하러 왔다. 무정(武定) 끝 무렵까지 공물과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
地豆于 : 地豆于國,在失韋西千餘里。多牛羊,出名馬,皮為衣服,無五穀,惟食肉酪。延興二年八月,遣使朝貢,至于太和六年,貢使不絕。十四年,頻來犯塞,高祖詔征西大將軍、陽平王頤擊走之。自後時朝京師,迄武定末,貢使不絕。
고막해(庫莫奚) : 고막해국(庫莫奚國)의 선조는 동부(東部) 우문(宇文)의 별종이다. 초기에 모용원진(慕容元真)에 깨지는 바람에 떠돌게 된 유민들이 송막(松漠) 땅 사이에 몰래 숨어 들어가 살았다. 그 백성들이 깨끗하지 못하고 활쏘며 사냥을 잘하며 남의 땅에 들어가 훔치고 노략질을 잘한다. 등국(登國) 3년(388년)에 북위(北魏) 태조(太祖)가 몸소 나가서 토벌하여 약(弱洛水) 남쪽에서 이들을 크게 깨뜨리고 네 개 부락과 말 소 양 돼지 십여만 마리를 획득하였다. 제(帝)가 말하기를 “이 군적(羣狄)의 여러 갈래들은 덕의(德義)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서로를 침략하고 도적질하여 왕법(王略)을 침범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가서 이들을 정벌한다. 나아가 쥐처럼 알겨먹고 개처럼 훔치니 어찌 근심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 중원 땅(中州)이 크게 어지러워 내가 먼저 이들을 평정하고 나서야 그 위엄스러운 덕을 편다면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기록에 “태원(太原) 땅에서 무종(無終)과 군적(羣狄)을 부수었다.”는 기록이 있다. (敗無終及羣狄于太原) 무종(無終)은 춘추시대에 태원 동쪽에서 살다가 뒤에 하북성(河北省) 옥전현(玉田縣)에 무종산(無終山)으로 옮겨 가서 그 겨레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군적에 대한 기록 찾지 못하였다. 태원은 지금 산서성 태원시이다.〕
얼마 있다 거가(車駕)가 남쪽으로 운중(雲中)으로 돌아오며 연(燕)과 조(趙)를 품어 복종시켰다. 십수 년 사이 여러 갈래의 겨레들이 고막해(庫莫奚)와 더불어 역시 모두 불어나고 흥성하였다. 요해(遼海)를 열고 화룡(和龍)에 수자리를 설치하였을 때에 미쳐 여러 이(夷)가 떨며 두려워하여 각각 토산물을 바쳤다. 고종(高宗)과 현조(顯祖) 시대에 고막해(庫莫奚)가 해마다 이름난 말과 무늬 진 가죽을 바쳤다. 고조(高祖) 초에 사신을 보내어 황제를 뵙고 공물을 들였다. 태화(太和) 4년(480년) 문득 변방 안으로 들어와 지두우(地豆于)의 약탈이 두렵다고 하소연하니 조서를 내려 준절히 이를 꾸짖었다. 22년 고막해가 안주(安州)로 들어와서 도적질을 하니 영(營), 연(燕), 유(幽) 세 주(州)의 병사 수천 사람이 이들을 쳐 쫓아냈다. 뒤에 다시 살갑게 붙어 매양 변방에 들어와 사람들과 교역할 길을 찾았다. 세종(世宗)이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고막해(庫莫奚)가 지난 태화(太和) 21년(497년) 이전에 안(安)과 영(營) 두 주(州)의 변방 백성들과 섞여 지내며 교역을 하며 왔다 갔다 하여서 다 의심이 없었다. 그러나 22년 반역에 이른 뒤 마침내 너희들을 멀리 내쫓았다. 이제 비록 살갑게 우리를 따른다 해도 오히려 변방 밖에 있으면서 매번 변방에 들어와 사람들과 교역하기를 청하고 있다. 만약 그 요구를 누르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끝내 작심하는 마음은 어그러질 것이요 요구를 들어주고 신경쓰지 않는다면 혹시라도 만에 하나의 섬뜩한 일이 생길 것이다. 선례대로 했던 그 교역을 그대로 용납하지 않고 일에 제한과 표준을 알맞게 하여 교역 장마당의 날짜에 주(州)에서 상좌(上佐)를 보내 이를 감시하게 하라!” 하였다. 이러고부터 나서 해마다 늘 알현하고 공물을 들여 무정(武定) 끝 무렵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약락수(弱洛水) : 요락수(饒樂水), 요수(澆水), 요락수(澆落水), 황수(潢水), 토호진주(吐護真水)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 이 강은 지금 내몽고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이다. 이곳을 거란의 발상지라고도 하는데 북위(北魏) 때 탁발규(拓跋珪)가 고막해를 쳤던 곳이다. 또 다른 이론은 약락수(弱洛水)는 독락하(獨洛河)로 지금 몽고국 울란바토르 남쪽에 ‘토랍하(土拉河)’라도 한다. 독락하(獨樂河)는 독락수(獨樂水), 독라하(獨邏河), 독락하(毒樂河)라고도 쓴다. 수서(隋書) 철륵전(鐵勒傳) : 독락하(獨洛河)는 북쪽에 복골(仆骨), 동라(同羅), 위흘(韋紇), 발야고(拔也古), 복라(覆羅)가 있는데 모두 그 우두머리를 사근(俟斤)이라고 일컫는다. (사근(俟斤, Irkin), 대사근(大俟斤, Ulugh Irkin)) 《隋書·鐵勒傳》: “獨洛河北有仆骨、同羅、韋紇、拔也古、覆羅並號俟斤。” 북사(北史) 유연전(柔然傳):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가 유연(柔然)을 정벌할 때 약락수(弱洛水)를 건넜다. 《北史·柔然傳》:北魏道武帝征柔然,渡弱洛水。〕
庫莫奚 : 庫莫奚國之先,東部宇文之別種也。初為慕容元真所破,遺落者竄匿松漠之間。其民不潔淨,而善射獵,好為寇鈔。登國三年,太祖親自出討,至弱洛水南,大破之,獲其四部落,馬牛羊豕十餘萬。帝曰:「此羣狄諸種不識德義,互相侵盜,有犯王略,故往征之。且鼠竊狗盜,何足為患。今中州大亂,吾先平之,然後張其威懷,則無所不服矣。」既而車駕南還雲中,懷服燕趙。十數年間,諸種與庫莫奚亦皆滋盛。及開遼海,置戍和龍,諸夷震懼,各獻方物。高宗、顯祖世,庫莫奚歲致名馬文皮。高祖初,遣使朝貢。太和四年,輒入塞內,辭以畏地豆于鈔掠,詔書切責之。二十二年,入寇安州,營燕幽三州兵數千人擊走之。後復款附,每求入塞,與民交易。世宗詔曰:「庫莫奚去太和二十一年以前,與安營二州邊民參居,交易往來,並無疑貳。至二十二年叛逆以來,遂爾遠竄。今雖款附,猶在塞表,每請入塞與民交易。若抑而不許,乖其歸向之心;聽而不虞,或有萬一之警。不容依先任其交易,事宜限節,交市之日,州遣上佐監之。」自是已後,歲常朝獻,至於武定末不絕。
거란(契丹) : 거란국(契丹國)은 고막해(庫莫奚) 동쪽에 있었는데 같은 겨레의 다른 갈래들이 모두 송막(松漠) 땅 사이로 쫓겨났다.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의 등국(登國, 386년 - 396년) 때에 황제의 군대 국군(國軍)이 이들을 크게 깼고 마침내 도망쳐 흩어지더니 고막해(庫莫奚)와 더불어 나뉘어 갈라졌다. 수십 년이 지나고 점차 그 겨레 사람들이 불어나 무성해져 마을을 만들었으니 화룡(和龍) 북쪽에 수백 리였고 대부분 알겨먹고 도적질을 하였다. 진군(真君) 이래로 황제를 알현하고 공물을 바치기를 요구하여 이름난 말을 공물로 바쳤다. 현조(顯祖) 때에 막불(莫弗, 마을 우두머리)인 흘하신(紇何辰)을 사신으로 보내 공물을 바쳤고 여러 나라가 늘어선 자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자기 나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 나라의 아름다움을 말하니, 마음으로 모두 기뻐하고 흠모하였다. 이에 동북쪽 군적(羣狄) 이 소문을 듣고 사모하여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다. 실만단부(悉萬丹部), 하대하부(何大何部), 복불욱부(伏弗郁部), 우릉부(羽陵部), 일련부(日連部), 필혈부(匹絜部), 려부(黎部), 토육우(칸)부(吐六于(干)部)들이 각각 그 이름난 말과 무늬진 가죽을 나라의 창고에 공물로 들이니 드디어 관계가 정상적으로 되었다. 모두 화룡(和龍)과 밀운(密雲) 사이에서 장마당 교역을 할 수 있었고 공물 드림이 끊이지 않았다. 태화(太和) 3년 고구려(高句麗)가 몰래 유유(蠕蠕, 柔然)와 모의하여 지두우(地豆于) 땅을 취하여 이를 나누기로 하였다. 거란(契丹)이 그 침범을 두려워하여 거란 막불(莫弗) 하물우(賀勿于)가 자기 부락에 수레 3천 승(乘)과 무리 만여 구(口)를 이끌고 여러 가축을 몰고 삶터를 옮겨 중원 땅 쪽으로 들어와 붙어살기를 구하여 백랑수(白狼水) 동쪽에서 머물렀다. 이 해(歲)부터 늘 조공을 하였다. 훗날 나라의 굶주림을 하소연하니 고조(高祖)가 그 사정을 가엾이 여기어 그들이 관문에 들어와 장마당에서 쌀을 살 수 있게 들어주었다. 세종(世宗)과 숙종(肅宗) 시절에 미쳐 항상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공물로 들였다. 희평(熙平, 北魏 孝明帝 연호, 516년 - 518년) 중에 거란(契丹)이 사신 조진(祖真)들 서른 사람이 돌아갔는데, 그들이 돌아갈 때, 영태후(靈太后)가 그 풍습대로 혼례식을 치루었을 때 거란 사신들이 푸른 모직(青氊)으로써 최고의 예복을 갖추어 입고 왔던 일이 있어서 사람을 시켜 푸른 모직 두 필을 주고서 그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에 보상을 하였고 나머지는 옛 법대로 하였다. (‘영태후~다.’까지는 해석이 미흡함이 있는 듯하지만, 일단 이렇게 해석해 놓겠다) 조공은 남북조의 제(齊)나라가 (위)나라를 이어받았을 때까지 늘 끊이지 않았다.
〔백랑수(白狼水) : 백랑하(白狼河)라고도 한다. 한나라 때 백랑현(지금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 몽고족자치현)에서 발원하는 요녕성의 대릉하(大凌河)라 한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백랑수(白狼水) 〈옛 백랑현(白狼縣) 동남에 있다. 수경주(水經注)에 “백랑수(白狼水)가 백랑현(白狼縣) 동남에서 나와 북쪽으로 백랑산(白狼山)을 거치고 다시 동북쪽으로 창려(昌黎)의 옛 성(故城) 서쪽을 지나고 다시 북쪽으로 황룡성(黃龍城) 동쪽을 지나다 다시 동북쪽으로 나가 동쪽으로 흘러 두 물줄기가 된다. 오른쪽 물은 곤 유수(渝水)이니 변방에서부터 남쪽으로 가 바다로 들어간다. 다른 한 줄기는 동북으로 흘러 변방을 나가서 백랑수(白狼水)가 되고 다시 동남으로 흐르다 옛 요동군(遼東郡) 방현(房縣) 경계로 가서 요수(遼水)에 유입된다.” 하였다. 초학기(初學記)에 “낭하(狼河)가 황룡성(黃龍城) 동북에 붙어 아래도 내려가니 바로 백랑수(白狼水)이다.” 하였다. 讀史方輿紀要 卷十八 北直九 萬全行都司開平、大寧二衛及諸裔 : 白狼水,〈在故白狼縣東南。《水經注》:「白狼水出白狼縣東南,北徑白狼山,又東北徑昌黎故城西,又北徑黃龍城東,又東北出,東流爲二水。右水即渝水也,自塞南入海。其一水東北出塞,爲白狼水。又東南流,至故遼東郡房縣界,注於遼水。《初學記》:「狼河附黃龍城東北,下即白狼水。〕
契丹 : 契丹國,在庫莫奚東,異種同類,俱竄於松漠之間。登國中,國軍大破之,遂逃迸,與庫莫奚分背。經數十年,稍滋蔓,有部落,於和龍之北數百里,多為寇盜。真君以來,求朝獻,歲貢名馬。顯祖時,使莫弗紇何辰奉獻,得班饗於諸國之末。歸而相謂,言國家之美,心皆忻慕,於是東北羣狄聞之,莫不思服。悉萬丹部、何大何部、伏弗郁部、羽陵部、[6]日連部、匹絜部、黎部、吐六于部等,各以其名馬文皮入獻天府,遂求為常。皆得交市於和龍、密雲之間,貢獻不絕。太和三年,高句麗竊與蠕蠕謀,欲取地豆于以分之。契丹懼其侵軼,其莫弗賀勿于率其部落車三千乘、眾萬餘口,驅徙雜畜,求入內附,止於白狼水東。自此歲常朝貢。後告饑,高祖矜之,聽其入關市糴。及世宗、肅宗時,恒遣使貢方物。熙平中,契丹使人祖真等三十人還,靈太后以其俗嫁娶之際,以青氊為上服,人給青氊兩匹,賞其誠款之心,餘依舊式。朝貢至齊受禪常不絕。
오락후(烏洛侯) : 오락후국(烏洛侯國)은 지두우(地豆于)의 북쪽에 있고 대도(代都)와 거리가 4천5백여 리이다. 그 땅은 낮고 눅눅하며 안개가 끼는 날이 많고 추워 사람들은 겨울이면 땅을 파고서 집을 만들고, 여름이면 들과 언덕을 따라서 가축을 방목하여 기른다. 돼지가 많고 곡(穀)과 보리(麥)가 있다.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마을의 우두머리인 막불(莫弗)이 모두 대대로 이를 담당한다. 그 민간에는 머리를 땋고(繩髮) 가죽옷을 입으며 구슬(珠)로써 장식을 한다. 사람들은 용맹을 숭상하며 간음과 훔치는 일을 하지 않기에 들판에 노적가리를 마구 부려 놓아도 알겨먹거나 도둑질함이 없다. 사냥하며 활 쏘는 일을 잘한다. 음악에는 공후(箜篌)가 있으니 나무 홈통에 가죽으로 겉을 씌우고 아홉 줄의 현(弦)은 베푼다. 그 나라 서북쪽에 완수(完水)가 있어 동북으로 흐르다 난수(難水)와 만나는데 그 땅의 작은 냇물들이 모두 난수(難水)로 유입되어 동쪽으로 흐르다 바다로 들어간다. 한편 서북쪽으로 20일을 걸어가다 보면 우사니대수(于巳尼大水, 또는 사니피(巳尼陂), 바이칼호수)가 있으니 이른바 북해(北海)이다. 세조(世祖) 진군(真君) 4년(443년)에 와서 황제를 알현하였는데 그 나라 서북쪽에 우리 국가의 돌아가신 제왕의 옛터가 있어 석실(石室)이 있다. 이 석실은 남북으로 90보(步)요 동서로 40보(步)이며 높이는 70자(尺)로 석실에 신령함이 있어 사람들 대부분이 비나리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세조(世祖)가 중서시랑(中書侍郎) 이창(李敞)을 보내니 이창이 그곳에서 선조를 뵙고 아뢰는 제사(告祭)를 지내고서 석실 벽에 축문을 새기고 돌아왔다.
烏洛侯 : 烏洛侯國,在地豆于之北,去代都四千五百餘里。其土下濕,多霧氣而寒,民冬則穿地為室,夏則隨原阜畜牧。多豕,有穀麥。無大君長,部落莫弗皆世為之。其俗繩髮,皮服,以珠為飾。民尚勇,不為姦竊,故慢藏野積而無寇盜。好獵射。樂有箜篌,木槽革面而施九弦。其國西北有完水,東北流合于難水,其地小水皆注於難,東入于海。又西北二十日行有于巳尼大水,所謂北海也。世祖真君四年來朝,稱其國西北有國家先帝舊墟,石室南北九十步,東西四十步,高七十尺,室有神靈,民多祈請。世祖遣中書侍郎李敞告祭焉,刊祝文於室之壁而還。
6. 양웅(揚雄)이 지은 방언(方言)에 “연(燕)나라와 조선(朝鮮) 사이에 도(豬)를 일러 하(豭)라고 하고 관동(關東)은 이를 치(彘)라고 하는데 더러는 시(豕)라고도 한다. 남쪽 초(楚) 땅은 희(豨)라고 하며 오양(吳揚)은 도(豬)라고 하니 그 알맹이는 똑같은 종류이다.” 하였다.
揚雄《方言》曰:『燕、朝鮮之間謂豬為豭,關東謂之彘,或曰豕;南楚曰豨,吳揚曰豬,其實一種也』。〔*가(豭)는 시(豕)이다. 입 부리가 길로 배가 크며 네 발에 꼬리가 있다 한다.〕
7. 흠정수시통고(欽定授時通考) 9권 : 또한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부여(夫餘)는 동이(東夷)의 영역 중에서 가장 평평하고 탁 트여(平敞) 땅이 오곡(五榖)을 기르는 데에 마땅하다. 읍루(挹婁)는 옛 숙신나라이니 오곡(五榖)과 마(麻) 베(布)가 있고 땅의 기운이 매우 차서 늘 굴(穴)에서 산다. 동옥저(東沃沮)는 흙이 걸고 아름다우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五榖)을 기르기에 마땅하고 밭농사에 훌륭하다. 마한인(馬韓人)은 농사 짓기와 누에치기에 대해 잘 안다. 진한(辰韓)은 토지가 걸고 아름다워 오곡을 짓기에 알맞다.
欽定授時通考 (四庫全書本)/卷09 又東夷列傳夫餘於東夷之域最為平敞土宜五榖把婁古肅慎之國有五榖麻布土氣極寒常為穴居東沃沮土肥美背山向海宜五榖善田種馬韓人知田蠶辰韓土地肥美宜五榖
8. 한원(翰苑) : 고려기(高驪記)에 “이제 고려국(高驪國)은 조선(朝鮮)과 예맥(穢貊), 옥저(沃沮)의 땅을 아울러 차지한 것이다.” 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 “고구려(高句驪)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이를 따라서 삶터로 삼았다. 구려(句驪)는 일명 ‘맥이(貊耳)’라고도 한다. 별종(別種)이 있어 작은 냇물에 기대서 삶터를 만들고 인하여 이름을 ‘소수맥(小水貊)’이라고 한다. 좋은 활을 만들어 내니 이른바 ‘맥궁(貊弓)’이 이것이다. 동옥저(東沃沮)는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있어서 오곡(五穀)을 내기에 알맞고 논밭을 갈고 씨를 부리는 일에 뛰어나다. 예(穢)는 단궁(檀弓)을 내고 또한 무늬진 표범(文豹)이 많고 과하마(果下馬)가 있다. 또 아주 작은 말이 있는데 산을 오를 때 발굽이 험한 곳을 다녀도 지치지 않고 곡식(栗米)을 입에 머금게(飲口) 하면 다시 하루하루를 거칠 수가 있다.
翰苑 : 高驪記曰今高驪國兼有朝鮮穢貊沃沮之地也後漢書曰高句驪多大山深谷人隨而為居句驪一名貊耳有別種依小水為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東沃沮土地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穢出檀弓又多文豹有果下馬又有馬甚小登山履險不疲以栗米飲口便得經日經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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