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숙신의 특산물 호(楛)로 만든 활과 돌촉 및 기타 산물에 대한 대략적인 자료들 1
1.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박물휘편(博物彙編) 271권 : 호부휘고(楛部彙考) :
서경(書經) 하서 우공(夏書禹貢) : 형주(荊州)는 그 공물이 균로(箘簬, 좋은 대나무로 화살 만드는 데 쓰임)와 호(楛)이다. 〈전(傳) : 호(楛)는 화살 대에 안성맞춤이다. 운몽(雲夢)의 못(澤)에서 난다.〉 〈주(註) 호(楛):마(馬)가 말하기를 “나무이름이니 이것으로써 화살(箭)을 만들 수 있다.” 하였다.〉 〈소(疏) : 숙신씨(肅慎氏)는 호시(楛矢)를 공물로 들였으니 호(楛)가 화살대에 안성맞춤임을 알았다.〉 〔*운몽(雲夢)은 지금 호북성 운몽현이라고 하지만 우임금 시절의 운몽(雲夢)은 지금과 다를 수 있으므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 한록(旱麓) : 저 한산(旱山) 기슭을 바라보니 진(榛)과 고(楛) 나무가 (둘 다 떨기나무(灌木)) 다부룩하다. 〈주주(朱註) : 호(楛)는 가시나무(荊)와 비슷하나 붉다.〉
산해경(山海經) : 서산경(西山經) : 상신산(上申山) 아래 진(榛)과 호(楛)나무가 많다. 〈주(註) 호(楛)나무는 화살대를 만들 수 있다.〉
북산경(北山經) : 반후산(潘侯山) 그 아래에 진(榛)과 호(楛)나무가 많다.
모시육소광요(毛詩陸疏廣要) : 시경 대아(大雅)에 “진(榛)과 호(楛)나무가 다부룩하다.” 하였다. 호(楛)나무는 그 꼴이 가시나무(荊)와 비슷하나 붉다. 줄기(莖)는 시(蓍)풀과 비슷하다. 상당(上黨) 사람이 이 나무를 결어서 두거(斗筥, ‘거’는 둥근 광주리나 그릇을 담는 고리이다)라는 상자 기물(箱器)을 만든다. 또 이 나무를 휘어서 비녀나 머리꽂이(釵)를 만든다. 그러므로 상당(上黨) 사람 시(調)에서 “부인(婦人)에게 ‘붉은 흙(赭)을 사고 싶다지요, 안 그런가요?’ 물어보니 ‘부엌에 본래 황토(黃土)가 있답니다.’ 하네. ‘비녀(釵)를 사고 싶다지요, 안 그런가요?’ 물어보니 ‘산속에 원래 호(楛)나무가 있답니다.’ 하네.” 하였다.
우공(禹貢)에서 “형주(荊州)가 호(楛)나무를 공물로 들였다.” 하니 주(註)에서 “화살대로 안성맞춤인데 운몽(雲夢)의 못(澤)에서 난다.” 하였다.
이아익(爾雅翼)에서 “호(楛)나무는 화살이라는 재질을 감당하니 그 줄기는 형(荊, 가시나무)과 닮았으되 붉고 그 잎사귀는 시(蓍)풀과 같다.” 하였다. 옛날에 호시(楛矢)란 바로 돌을 돌촉(弩/砮)으로 만들었다. 이야기꾼들은 진(榛)나무는 예물(贄)로 써서 문사(文事)를 위할 수 있고 호(楛)는 화살(矢)로 만들어서 무사(武事)를 위할 수 있었다 라고 하니 이는 대체로 그렇지 않았겠는가?
저 진(榛)과 호(楛)나무 모두 이를 무사(武事)에 쓴다. 설문(說文)에 “진(榛)은 나무이다. 어떤 경우에는 ‘추(菆, 겨릅대, 껍질을 벗겨낸 삼대)’라고도 한다.” 하였다. 추(菆)는 대체로 화살로 쓰기에 훌륭한 재료이다. 춘추전(春秋傳)에서 말한바 ‘전장에서 적군에게 기어코 싸움을 걸 때(致師) 전투용 마차의 왼쪽 사수(左射)는 좋은 화살인 추(菆)를 쓴다’ 함이 이것이다. 예컨대 호(楛)는 화살로 사용하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 주(周)나라는 대대로 후직(后稷)과 공유(公劉)가 일으켰던 사업을 닦아 거듭 온갖 복록(福祿)을 구하였으니 모두 문사(文事)이다. 그러나 무력을 갖추지 않을 수 없기에 ‘瑟彼玉瓚(산뜻산뜻한 저 옥찬(玉瓚, 제기로 쓰이는 술잔))’ 아래 문장에는 문치(文治)의 아름다움을 읊었지만, 머릿장(章)에 무력의 갖춤(武備)을 이야기한 것이다.
주어(周語)에 “저 한산(旱山) 기슭의 진(榛)과 호(楛)나무가 불어나기 때문에 군자(君子)는 수월하고 쾌활함으로 복을 구하게 된다. 이를테면 저 산림(山林)이 없어져 다하고 들과 산기슭의 나무들이 흩어져 없어지며 늪(藪)과 큰 연못(澤)이 더할 수 없이 끝나버리고 백성들의 힘이 말라서 없어지며 논밭이 황무지가 되고 자산과 물품이 부족하여 텅 비는 사태를 군자(君子)라면 장차 험난하고 애처로운 지경에 대비하고 나서야만 태평하고 쾌활함에 이르는 것이다.” 하였다.
안감(顏監)에서 “호(楛) 나무는 화살대를 담당할 수 있고 지금 빈(豳, 지금 섬서 빈현(彬縣), 순읍(旬邑) 일대) 땅 북쪽에서는 모두 이를 쓰고 있고 토속(土俗)에서는 그 나무를 호자(楛子)라고 부른다.” 하였다.
공자가 진나라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물수리들이 진(陳)나라 조정에 모여들어 죽은 일이 있었는데 호시(楛矢)가 이 새들을 돌촉(石弩, 石砮, 돌로 만든 화살촉)에 꿰었고 그 화살 길이는 한 자(尺) 여덟 치(咫)이었다. 이 화살에 대해 중니(仲尼, 공자의 자)에게 물어보니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물수리(隼)가 멀리에서도 왔구나! 이는 숙신씨(肅慎氏)의 화살입니다. 옛날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치고 먼 지방의 토산물 공납을 혼인을 맺은 이성(異姓)들에게 나누어 주어 복종함을 잊지 말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호시(楛矢)를 진(陳)나라에 나누어준 것입니다.” 하였다. 한번 이를 옛 창고(故府)에서 찾아보니 과연 이를 찾아냈다.
하서(夏書)에 “형주(荊州)의 공물은 거청(거센) 숫돌(礪)과 고운 숫돌(砥)과 돌화살촉(弩, 砮)과 단(丹)이었고 화살대인 균(箘)과 노(簬)와 호(楛)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호시(楛矢)와 돌화살촉(石弩)이란 중주(中州)의 토산물 공물에 항상 있었던 것이다. 이제 중니(仲尼)가 홀로 먼 지방의 공물이라고 증험을 하였으니, 아마도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삼대(三代) 사이에 토산물의 공물이 같지 않았고 더러는 중원 땅 안에서도 공물로 받은 토산물을 본래 가지고 있었어도 이를 받기를 꺼리지 않았는데, 유독 그 길이가 한 자 여덟 치인 화살이 숙신(肅愼)의 물건이지 않았겠는가?
欽定古今圖書集成 博物彙編 第二百七十一卷 楛部彙考 《書經》 《夏書禹貢》荊州,厥貢惟箘,簬、楛。〈傳〉「楛,中矢榦。」出《雲夢》之澤。〈註〉楛:《馬》云:「木名,可以為箭。」〈疏〉肅慎氏「貢楛矢,知楛中《矢榦》。」《詩經》 《大雅旱麓》瞻彼旱麓,榛楛濟濟。〈朱註〉楛似荊而赤。《山海經》 《西山經》 : 《上申》之山,下多榛楛。〈註〉楛木可以為箭。《北山經》 : 《潘侯之山》,其下多榛楛。《毛詩陸疏廣要》 大雅 : 《榛楛濟濟》 : 楛,其形似荊而赤,莖似蓍。上黨人織以為斗筥箱器,又揉以為釵。故上黨人調問婦人欲買赭否?曰:「竈下自有黃土。」 問「買釵否?」 曰:「山中自有楛。」 《禹貢》云:「荊州貢楛。」 註云:「中矢榦,出雲夢之澤。」 《爾雅·翼》:「楛堪為矢,其莖似荊而赤,其葉如蓍。」 古者楛矢則石為之弩。說者以榛可為贄為文事,楛可為矢為武事,是蓋不然。夫榛楛皆用之武事。《說文》:「榛,木也。一曰菆也。」 菆蓋矢之善者,《春秋傳》所謂「致師者,左射以菆」 是也。若楛則為矢甚明。周世修后稷、公劉之業,而申以百福干祿,皆文事也。然不可無武備,故「瑟彼玉瓚」 以下,述文治之美,而首章言武備也。《周語》曰:夫旱麓之榛楛殖,故君子得以易樂干祿焉。若夫山林匱竭,林麓散亡,藪澤肆竭,民力凋盡,田疇荒蕪,資用乏匱,君子將險哀之備,而後可以及易樂也。《顏監》曰:「楛木堪為箭笴,今豳以北皆用之,土俗呼其木為楛子。」 有隼集于陳庭而死,楛矢貫之石弩,其長尺有咫,問諸仲尼,仲尼曰:「隼來遠矣,此肅慎氏之矢也。昔武王伐商,封異姓以遠方之職貢,使無忘服,故以楛矢封陳。試求諸故府,果得之。」《夏書》「荊州之貢礪、砥、弩(砮)、丹,惟箘簬楛。」 則夫楛矢石弩者,中州職貢之常也。今仲尼獨以遠方之貢為驗,豈三代之際,職貢不同,或者不妨中國自有之,特其長尺有咫者為肅慎之物歟?
2. 공자집어(孔子集語) 11권 : 박물(博物) 10 : 노어(魯語) 하 : 중니가 진(陳)나라에 있었을 때.... “물수리(隼)가 먼 곳에서 왔구나! 이것은 숙신씨(肅慎氏)의 화살입니다. 옛날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구이(九夷)와 백만(百蠻)과 길을 통하고 그들로 하여 각각 자기 지방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공물을 들이게끔 하여 각자 맡은 업(職業)을 잊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에 숙신씨(肅慎氏)가 호시(楛矢)와 돌로 만든 화살촉(石砮)를 공물로 들였으니 그 길이가 한 자 여덟 치(咫)였습니다. 선왕(先王)이 먼 데까지 이른 아름다운 덕(令德)을 밝혀서 후대 사람들에게 보여 길이 거울로 삼게 하려고 그 오늬(栝)에 새기기를 ‘숙신씨(肅慎氏)의 공물 화살’이라 새기고서 대희(大姬, 주나라 무왕의 장녀, 대(大)자는 존칭)에게 나누어 주고 우호공(虞胡公)과 짝을 지어주고서 이를 진(陳)나라에 군주로 봉하였습니다. 옛날에 동성(同姓)들에게는 진옥(珍玉)을 나누어 주어 그 가까움을 중요시한 것이고 이성(異姓, 혼인을 통해 맺은 관계)들에게는 먼 지방의 토산물 공물을 나누어 주어 이들로 하여 복종을 잊지 말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진(陳)나라에는 숙신(肅慎)의 화살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군(君)께서 만약 담당관원을 시켜 옛창고에서 찾게 하신다면 아마도 이 화살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람을 시켜 찾게 하니 금독(金櫝)에서 찾아냈으니 그 말과 같았다.
孔子集語 卷十一 博物十 : 《魯語》下 仲尼在陳,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楛矢貫之,石砮其長尺有咫。陳惠公使人以隼如仲尼之館問之。仲尼曰:「隼之來也遠矣,此肅慎氏之矢也。昔武王克商,通道於九夷、百蠻,使各以其方賄來貢,使無忘職業。於是肅慎氏貢楛矢、石砮,其長尺有咫。先王欲昭其令德之致遠也,以示後人,使永監焉,故銘其栝曰『肅慎氏之貢矢』,以分大姬,配虞胡公而封諸陳。古者分同姓以珍玉,展親也;分異姓以遠方之職貢,使無忘服也。故分陳以肅慎氏之貢,君若使有司求諸故府,其可得也。」使求,得之金櫝,如之。
3. 이아익(爾雅翼) 9권 : ..... 이 한 자 여덟 치의 숙신(肅愼) 공물은 이미 진(陳) 제후에게 나누어 주었고 물수리가 또 마침 그 조정에 모여서 죽었다면 아마도 진인(陳人)이 남몰래 그 숙신의 화살로 이 새를 쏘았겠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중니(仲尼)가 ‘송골매가 온 곳이 멀리에서이다’라는 말을 하였으니 이는 해외(海外)에서부터 화살을 지고서 진(陳) 조정에 이른 것이다. 선공(先公)이 나누어준 물품을 받고 왕실의 자손들은 이 받은 물품들에 대해 의당 서로 입으로 읊으면서 보배롭게 여긴다. 노(魯)나라의 보옥(寶玉)과 큰 궁(大弓)은 출입할 때 반드시 기록하였고 진(晉) 문공(文公)이 받은 동궁(彤弓)을 범개(范匄)가 제후들에게 자랑하였으니 진(陳)나라가 주(周)나라에서 받은 것으로 그 사직을 눌러 다독인 경우가 오직 이것만 있었겠는가! 지금 물수리가 화살을 맞고 왔는데 군주와 신하가 서로 돌아보고도 결국, 알아차리지 못하여 도리어 손님(중니, 공자)에게 물어보니 오히려 전적(典籍)을 뒤적여 보면서도 자기 조상의 일들을 잊어버리는 꼴이 아니겠는가?
爾雅翼 (四庫全書本)/卷09 夏書 荆州之貢 礪砥砮丹 惟箘簵楛 則夫楛矢石砮者 中州職貢之常也 今仲尼獨以逺方之貢為驗 豈三代之際 職貢不同 或者不妨中國自有之 特其長尺有咫者 為肅愼之物歟 是貢既分於陳 而隼又適集其庭以死 豈陳人竊以射隼耶 然仲尼言隼來之逺 則是自海外負矢而至也 先公之分器 受之王室子孫 宜相與誦而寶之 魯之寶玉大弓出入必書 而晉文之受彤弓 范匄詫之於諸侯 陳之所受於周以鎭撫其社稷者 獨有此耳 今隼以矢來 君臣相顧乃無識 反質之於客 抑與數典忘祖者類矣
4. 국어주(國語注) : 국어(國語) 5권 노어 하(魯語下) : 전(傳)에서 말하기를 “숙신(肅慎)과 연(燕)과 박(亳) 땅은 우리 북쪽의 땅이다.” 하였다.
《國語注》·國語卷第五 魯語下 傳曰:「肅慎、燕、亳,吾北土也。」
5. 팔순만수성전(八旬萬夀盛典) 114권 : 대대례(大戴禮)에서 말하기를 해외(海外)의 숙신(肅慎)과 북발(北發)과 거수(渠捜)와 저(氐)와 강(𦍑) 겨레들이 와서 따랐다.” 하였다.
八旬萬夀盛典 (四庫全書本)/卷114 : 大戴禮曰 海外肅慎北發渠捜氐𦍑来服
6.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박물휘편(博物彙編) 초목전(草木典) 271권 : 호부기사(楛部紀事) : 한비자 십과편(韓非子十過篇):지백(知伯)이 사람을 시켜 조(趙)나라 땅으로 보내어 채(蔡)의 고랑(皋狼, 지금 산서성 방산현(方山縣)) 땅을 요구하였는데 조양자(趙襄子)가 아니 주었다. 지백(知伯)이 이를 빌미로 몰래 한(韓)과 위(魏)의 장군들과 약속하고서 조(趙)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양자(襄子)가 가신(家臣) 장맹담(張孟談)을 불러 알리기를 “지백(知伯)이 과인(寡人)에게 병력을 동원할 것은 분명한데 이제 내가 어찌 처신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였다. 장맹담(張孟談)이 대답하기를 “저 동알자(董閼子)는 간주(簡主, 조간자)의 꾀주머니 신하였습니다. 진양(晉陽)을 다스릴 때 윤탁(尹鐸)이 이 지역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를 하였고, 그에 따라 남겨진 깨어있는 교화가 여전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군주께서 진양(晉陽)에서 살기를 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였다. 군주가 “옳구나!” 하였다.
드디어 연릉생(延陵生)을 불러 군사와 거기(車騎)들을 이끌고 먼저 진양(晉陽)에 이르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군주가 뒤를 따라갔다. 머문 지 닷새가 되자 성곽(城郭)이 벌써 고쳐졌고 침략과 공격에 대한 수비가 이미 갖추어졌다. 군주가 장맹담(張孟談)을 불러 물어보기를 “내 성곽이 벌써 고쳐졌고 수비가 이미 갖추어졌으며 돈과 곡식이 꽤 넉넉하고 뛰어난 군사(甲兵)들은 차고 넘침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가 갖춘 화살이 없어 걸리는데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장백담(張孟談)이 “신(臣)이 듣기에 동자(董子)가 진양(晉陽, 지금 산서성 태원시 진원구)을 다스릴 때 공궁(公宮)의 담이 모두 맑은대쑥(荻蒿, 蕭)과 호(楛)나무와 싸리나무채(楚)로써 울을 쳤습니다. 어떤 호(楛)나무는 높이가 한 장(丈)에 이르는데 군주가 이 나무를 뽑아 사용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뽑아 한 번 써보았더니 그 단단함이 비록 억센 균로(箘簬) 화살이라도 이를 뛰어넘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欽定古今圖書集成/博物彙編/草木典/第271卷 : 楛部紀事 : 《韓非子十過篇》:知伯令人之趙,請蔡皋狼之地。趙襄子弗與。知伯因陰約韓、魏將以伐趙。襄子,召張孟談 而告之曰:「知伯措兵於寡人必矣,今我安居而可?」張孟談曰:「夫董閼子,簡主之才臣也。其治晉陽,而尹鐸 循之,其餘教猶存。君其定居晉陽而已矣。」君曰:「諾。」乃 召延陵生,令將軍車騎先至晉陽。君因從之。居五日 而城郭已治,守備已具,君召《張孟談》而問之曰:「吾城 郭已治,守備已具,錢粟已足,甲兵有餘,吾奈無箭何?」 張孟談曰:「臣聞董子之治晉陽也,公宮之垣,皆以荻 蒿楛楚,牆之有楛,高至於丈,君發而用之。」於是發而 試之,其堅則雖箘簬之勁,弗能過也。
7. 장백산부(長白山賦) (오조건(吳兆騫) 청(清)) : 피나무(椵樹) 그늘에서 인삼이 산다. 돌벽(石崖) 바깥 솔숲에 해가 하염없는데 그 사이사이 호시(楛矢)가 둘러 사니 바로 숙신씨(粛慎氏) 화살이다.
長白山賦 :人參生於椵樹之陰。石崖外松林極日,其間環生楛矢,即粛慎氏矢也。
8. 상서전해(尚書全解) 8권 : 노(砮)란 화살촉 쓰임에 딱 맞다. 숙신씨(肅慎氏)가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공물로 들였는데 노(砮)란 대개 돌 가운데에 화살촉으로 쓸 수 있는 돌을 말하는 것이다. 단(丹)은 당(唐)나라 공영달이 단사(丹砂)라 하였고 왕자옹(王子雍)은 단(丹)을 빛깔을 내는 것으로 쓸 수가 있다 하니 이 두 가지 이야기가 다 통한다.
균(箘)과 노(簵)와 호(楛)이다. (惟箘簵楛) : 정씨(鄭氏)가 “균로(箘簵)는 영풍(䉁風, 죽기(竹器))이다. 균(箘)과 노(簵)는 대나무 이름이다. 호(楛)는 나무 이름이다. 안사고(顔師古)가 “모두 화살을 만들 수 있다. 증씨(曽氏)의 설명 역시 그러하다.” 하였다. 증씨(曽氏)가 “동안우(董安于)가 진양(晉陽)을 다스릴 때, 공부(公府, 관공서)의 담이 죄다 적호(荻蒿)와 점(苫, 楛)과 초(楚)로써 울을 쳤다. 그 높이가 한 장(丈) 남짓하였다. 조양자(趙襄子)가 이를 뽑아 한 번 써 봤는데 그 단단함은 균(箘)과 노(簵)가 넘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였다. 이로써 말하자면 균(箘)과 로(簵)라는 대나무의 견고함과 억셈은 바로 화살대에 알맞은 재질이다. 호시(楛矢)는 숙신씨(肅慎氏)가 늘 공물로 들이었으니 호(楛)의 가는 가지들 역시 화살대에 알맞다. 대체로 균(箘)과 노(簵)와 호(楛)는 모두 화살대로 쓰기에 좋은 재료들이다. 이 말은 안사고(顔師古)의 그것과 같고 공영달은 다만 호(楛)를 화살대에 알맞다고 말하고 있어서 그의 이론이 미진하다.
상서(尙書) 우공(禹貢) : 세 나라에서 유명한 물품을 바쳤으니, 청모(菁茅)에 싸서 궤에 넣었다.(三邦底貢厥名 包匭菁茅)
한(漢)나라 공안국(기원전 156년 – 기원전 74년)이 “세 가지 물건은 모두 운몽(雲夢)의 못(澤)에서 난다. 운몽택(雲夢澤) 가까이에 있는 세 나라가 늘 이것을 공물로 보냈다. 그 이름이 천하(天下)에서 균(箘)과 노(簵)와 호(楛)를 칭송하니 세 나라에서 나오는 것이 더욱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세 나라의 땅은 서경(書經)에 뚜렷한 글이 없어 근거를 고증하기에 어렵다. 고공기(考工記)를 살펴보면 재질이 훌륭한 것은 분호(妢胡, 안휘성 부양시)의 화살대가 있다고 한다. 정씨(鄭氏) 주(注)에 “호자(胡子)의 나라가 초(楚) 땅 옆에 있다.” 하였다. 아마도 바로 세 나라의 옛 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소씨(蘇氏)는 말하기를 “춘(杶), 간(榦), 괄(栝), 백(柏), 거청 숫돌(礪), 고운 숫돌(砥), 돌촉(砮), 단(丹), 균(箘), 노(簵), 호(楛) 모두들 중요한 물품이다. 형주(荆州)는 기(冀) 땅과 거리가 가장 멀고 강(江, 형주 땅의 장강)이 하(河, 기주 땅의 황하)에 이를만한 길이 없어 중요한 물품을 기필코 보내기에는 어렵다. 그래서 이 나라의 공물은 크기로써 하지 않고 그저 이름이 올려진 물품 가짓수를 공납하고 그 물품에 준하여, 가볍게 쌀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 경사(京師)에 보내었다.”라 하니 이 주장은 그렇지 않다. 저 이른바 땅의 특산물을 따라 낼 공물을 부담(복정(卜定))을 지운다는 것은 싸그리 몸치레와 먹거리와 무기와 농사용 기구를 위해 공물의 물품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본 해에 수송할 부세를 기준으로 하여 경사(京師, 수도)에 공물을 들이게 하였다. 만약 맡겨진 공물이 그 가짓수의 이름에 준하여서 가벼운 재물로 바꾸어 경사로 보냈다고 말한다면 곧 공물을 부담 지은 본뜻이 아닌 것이다. 소씨(蘇氏)는 이런 주장으로 ‘유명한 물품을 공물로 들였다(底貢厥名)’라는 서경(書經)의 내용을 설명하였지만, 이를 선배 유학자에 비한다면 뒤떨어진다 하겠다. 정씨(鄭氏)는 ‘궐명(厥名)’을 아래 문장인 ‘포궤청모(包匭菁茅)’에 붙여 해석하였는데 더욱 의미가 없게 된다.
양주(揚州)의 공물인 금 은 동 세 가지 품목과 아름다운 옥인 요곤(瑶琨)과 작은 대나무인 소(篠)와 큰 대나무인 탕(簜), 그리고 상아(齒)와 코뿔소 가죽(革)과 귀한 새 깃(羽)과 소꼬리털(毛)과 나무이다.
형주(荆州)의 공물을 살펴보면 새 깃(羽)과 소꼬리털(毛)과 상아(齒)와 코뿔소 가죽(革)와 금 은 동과 춘(杶), 간(榦), 괄(栝), 백(柏)과 거청(거센) 숫돌(礪), 가는 숫돌(砥)과 돌촉(砮), 단(丹)과 균(箘), 노(簵), 호(楛)나무이다.
직방씨(職方氏)에서는 양주(揚州)는 그 이로운 것이 쇠(金)와 주석(錫)과 죽전(竹箭)이고 형주(荆州)는 그 이로운 것이 단(丹)과 은(銀)과 상아(齒)와 코뿔소 가죽(革)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두 주(州)가 그 땅에서 내는 산물이다. 대체적으로 중원(中原)에서 재료로 쓰는 바, 이것으로써 병기(兵器)의 쓰임으로 삼는 것이다. 진(晉) 문공(文公)이 물으니 초자(楚子)가 말하기를 “남녀 노예(子女)와 옥과 비단은 군주가 이것을 가지고 있고 새 깃과 소꼬리털과 상아와 코뿔소 가죽은 군주의 땅에서 나옵니다. 〔楊伯峻 注:“子女蓋指男女奴隸。〕 진국(晉國)에 얽혀(波及) 있는 모든 것은 군주의 나머지 것입니다.” 하였다.
대체로 중원(中原) 땅에서 나온 바의 것은 죄다 이 두 주(州)의 고우면서도 뛰어난 품질만 못하다. 그래서 반드시 이 두 주(州)의 물품들을 재료로 하여 쓰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보자면 형(荆)과 양(揚)의 땅은 이곳을 의지해서 부강했던 사람들이 그 땅이 이런 특산물을 소유한 것에 힘입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세력들을 맞아서 남북(南北)의 시대로 나뉘게 되었다. 형(荆)과 양(揚) 땅을 거점으로 삼은 사람들은 진실로 국경을 높이는 대비를 엄중히 하여 그 산물들이 밖으로 나가는 곳을 단단히 지키어 그 파도가 중원(中原)에 미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형(荆)과 양(揚)의 땅에서 나오는 물(物)이 형(荊)과 양(揚)의 쓰임이 되었으니 그 병기의 견고하고 예리함이 어찌 중원이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포궤청모(包匭菁茅)’에 대해 공씨(孔氏)가 ‘포(包)를 한 구(一句)’라고 하여 “싼다(包)는 것은 귤보다 크고 맛이 신 유자(橘柚)이다.”라 하였다. 〔顔氏曰 柚似橘而大 其味酸〕
尚書全解 (四庫全書本)/卷08
砥以細密為名礪以麤糲為稱砮者中矢鏃之用肅慎氏貢楛矢石砮砮蓋石之可以為矢鏃者也丹唐孔氏以謂丹砂王子雍以謂丹可以為采此二說皆通
惟箘簵楛 鄭氏曰箘簵䉁風也箘簵竹名楛木名顔師古曰皆可以為矢曽氏之說亦然曽氏云董安于之治晉陽也公府之垣皆以荻蒿苫楚廧之其高丈餘趙襄子發而試之其堅則箘簵之所不能過也以此言之則箘簵竹之堅勁者其材中矢之笴楛矢肅慎氏常貢焉則楛之杪亦中矢之笴蓋箘簵楛皆笴之良材也此說與顔師古同而孔氏但以楛為中矢榦其說未盡
三邦底貢厥名包匭菁茅 漢孔氏曰 三物 皆出雲夢之澤 近澤三國 常致貢之 其名天下稱善箘簵楛 出於三邦者尤為有名故也 三邦之地 經無明文 難以考據 案考工記 材之美者 有妢胡之笴 鄭氏注云 胡子之國在楚旁意者即三邦之故地與 蘇氏曰杶榦栝柏礪砥砮丹與箘簵楛皆物之重者荆州去冀最逺而江無達河之道難以必致重物故此邦之貢不以小大但致貢其名數而準其物易輕賫致之京師此說不然夫所謂任土作貢者皆其服食器用之物而不可闕者故使準其本歲所輸之賦而貢於京師若謂當貢之物準其名數易以輕賫致之京師正非作貢之本意也蘇氏以此為底貢厥名之說比先儒為迂鄭氏以厥名下屬包匭菁茅尤為無義據揚州之貢金三品瑶琨篠簜齒革羽毛惟木荆州之貢羽毛齒革金三品杶榦栝柏礪砥砮丹箘簵楛而職方氏揚州其利金錫竹箭荆州其利丹銀齒革則是此二州所出之物産大抵中原所資以為兵器之用者晉文公謂楚子曰子女玉帛則君有之羽毛齒革則君地生焉其波及晉國者皆君之餘也蓋中原之所出者皆不得如此二州之精良故必資此二州者為用以是觀之荆揚之壤所恃以富强者賴其有此而已故當天下之勢分為南北之時據荆揚之壤者苟能嚴為封境之備固守其物産之所出不使其波及於中原則以荆揚所出之物為荊揚之用其兵革之堅利豈中原之所能及哉
9. 순제왕묘신획석노기(順濟王廟新獲石砮記) 소식(蘇軾) :
건원정국(建中靖國) 원년(元年, 1101년) 사월 갑오(甲午) 식(軾)이 담이(儋耳, 지금 해남 담현. 산해경에 나오는 담이는 북방민족) 북쪽으로부터 돌아오다가 오성산(吳城山) 순제용왕사(順濟龍王祠) 아래에 대놓았다. 사당에 참배를 올리고 돌아와 강 둘레에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옛 화살촉(箭鏃)을 주웠는데 긴 창(槊)끝처럼 뾰족하고 검이 날과 등 사이가 조금 불룩한 모양을 하여 그 모서리는 사물을 쪼개기에 넉넉하니 그 재질은 바로 돌이다.
말하기를 “기이하구나, 공자가 말한 이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라는 숙신씨 물건이여! 무슨 까닭으로 이곳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며 이 화살을 사람들에게 건네며 보다가 그만 손에서 놓쳐 강물 안에 빠뜨렸다. 결국, 신께 기도하되, 이 화살을 다시 얻기를 원하며 그렇게만 된다면 마땅히 사당 안에 안치해 놓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놀래키고 눈을 휘둥그레하게 할 기이한 볼거리로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사람을 시켜 물속에 들어가 이를 찾게 하였는데 한 번에 더듬어서 찾았다.
삼가 우공(禹貢)을 살펴보면 “형주(荊州)는 거청 숫돌(礪)과 고운 숫돌(砥), 돌촉(砮)과 단(丹), 그리고 균(箘)과 노(簬)와 호(楛)를 공물로 들였고 양주(梁州)는 아름다운 옥 구(璆)와 철(鐵)과 은(銀)과 강철(鏤)과 돌촉(砮)과 경석(磬)을 공물로 들였으니 그렇다면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는 본래 우(禹)임금 이래로 이를 공물로 들였었다. 그러나 춘추(春秋) 때 진(陳)나라 조정에 송골매가 모였는데 호시(楛矢)가 이들 몸을 꿰고 있었다. 그 석노(石砮)는 길이가 한 자 여덟 치이고 당시 사람들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여 공자(孔子)에게 물었었다. 공자는 이 화살은 가까이 형(荊)과 양(梁) 땅에서는 구할 수 없고 멀리 숙신(肅慎)에서 이를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형(荊)과 양(梁) 땅은 이를 공물로 들이지 않은 지 오래도 되었다. 안사고(顏師古)가 “호(楛)나무는 화살대의 쓰임을 감당해 낸다. 지금 빈(豳) 땅에서 북쪽은 모두 이 나무를 쓴다.” 하였다. 이로써 살펴보자면 호(楛)나무를 써서 화살을 만드는데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러하고 돌을 써서 돌촉(砮)을 만들었다. 그러니 춘추(春秋) 이래로, 이 화살을 알아먹지 못하게 되었으니 가히 남다른 물건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옛날에 장인 태(兌)의 낫창(戈)과 장인 화(和)의 활(弓)과 장인 수(垂)의 대나무 화살(竹矢)을 천자나 제후가 정사를 보는 노침(路寢)에 진열하였다. 공자가 무기고(武庫)에 갈무리해 두었던 것을 몸소 알리어 모두 옛 보물로 드러났으니 이 화살 홀로만이 보물이 아니겠는가? 순제왕(順濟王)의 신령한 위력은 남쪽으로 동정(洞庭)에까지 풀어졌고 북쪽으로는 회(淮)와 사(泗) 땅에까지 입혀져서 마침내 특별히 이런 숙신의 보물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나 식(軾)이 감히 사사로이 이 보물을 가져서는 안 되니 이 화살을 사당 안에 남겨 두어 옛것을 좋아하고 학식이 넓고 점잖은 군자들과 함께 이를 공유하여서 순제왕(順濟王)의 신성하고도 영특한 강직함을 공경하지 않아서는 안 됨이 이와 같음을 환히 보일 것이다.
順濟王廟新獲石砮記 蘇軾
建中靖國元年四月甲午,軾自儋耳北歸,艤舟吳城山順濟龍王祠下。 既進竭而還,逍遙江上,得古箭鏃,槊鋒而劍脊,其廉可劌,而其質則石也。曰:異哉,此孔子所謂楛矢、石砮,肅慎氏之物也。何為而至此哉!傳觀左右,失手墜於江中。乃禱於神,願復得之,當藏之廟中,為往來者駭心動目詭異之觀。既禱,則使沒人求之,一探而獲。
謹按《禹貢》:荊州貢礪、砥、砮、丹及箘、簬、楛,梁州貢璆、鐵、銀、鏤、砮、磬。則楛矢、石砮,自禹以來貢之矣。然至春秋時,隼集於陳廷,楛矢貫之,石砮長尺有咫,時人莫能知,而問於孔子。孔子不近取之荊梁,而遠取之肅慎,則荊梁之不貢此久矣。顏師古曰:「楛木堪為笴,今豳以北皆用之。」 以此考之,用楛為矢,至唐猶然。 而用石為砮,則自春秋以來莫識矣。 可不謂異物乎!兌之戈,和之弓,垂之竹矢,陳於路寢。孔子履藏於武庫。皆以古見寶。此矢獨非寶乎!順濟王之威靈,南放于洞庭,北被于淮泗,乃特為出此寶。軾不敢私有,而留之廟中,與好古博雅君子共之,以昭示王之神聖英烈不可不敬者如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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