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경에 숙신나라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다 한다. 불함(不咸)은 동호(東胡) 겨레의 말에는 “신무(神巫)”라고 한다.
*불함산은 장백산, 곧 백두산이라 하며 백두산은 도태산(徒太山), 태백산(太白山)으로도 불린다.
1. 산해경잔소(山海經箋疏) 산해경 제17 서하학의행전소(棲霞郝懿行箋疏) :
대황북경(大荒北經)
대황(大荒) 안에 산이 있으니 이름이 불함(不咸)이다. 이 산은 숙신씨(肅慎氏) 나라에 있다.
〈지금 숙신국(肅慎國)은 요동(遼東)과 거리가 3천여 리이니 움집(穴)에서 살며 옷이 없다. 돼지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겨울이면 돼지기름으로 몸을 바르는데 그 두께가 몇 푼(分, 1푼은 대략 0.3센티)이니 이를 이용해서 바람과 추위를 물리친다. 숙신 사람들은 모두 활쏘기에 솜씨가 뛰어나니 활 길이는 네 자(尺, 대략 33.3센티)로 억세고 굳세며 화살은 호(楛)나무로 만드는데 길이가 한 자(尺) 다섯 치(寸, 대략 1치는 3.3센티)이고 청석(青石)으로 돌촉을 만든다. 이 화살과 돌촉은 춘추(春秋) 시대에 물수리(隼)가 진(陳)나라 제후의 조정에 모여들었을 때 얻은 화살이다.
진(晉) 태흥(太興) 3년(320년) 평주 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좌사(佐史) 별가(別駕)를 성대한 잔치에 보냈다. 별가로 사신으로서 와 숙신씨(肅愼氏)의 활과 화살을 바쳤다. 그 화살촉에 마치 동골(銅骨)로 만든 듯한 것이 있어 물으니 별가가 말하기를 “해내국(海內國)과 물건을 실어나르다 보니 이 통에 얻어 이를 쓰고 있다.” 하였다. 지금 이름은 읍루국(抱婁國)이 되는데 좋은 담비와 붉은 옥을 내니 아마도 해외(海外)를 따라 옮겨 다니다가 이곳에 이르지 않았겠는가?
후한서(後漢書)에서 이른바 읍루(挹婁)라 한 것이 이것이다. 나 자행(懿行)이 살피건대 숙신국(肅愼國)은 산해경 해외 서경(海外西經 : 숙신국이 백민 북쪽에 있다...(肅慎之國在白民北...)는 내용)에서도 보이는데 곽(郭, 산해경에 주석을 단 곽박(郭璞), 동진 때 사람, 276년 - 324년)이 설명한 숙신(肅愼)은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에 뿌리를 두고 있고, 다만 동이전에서는 본래 ‘호(楛)나무를 써서 길이가 한 자(尺) 여덟 치(寸)’라고 한 적은 것이 곽(郭)과 다를 뿐 나머지는 같다. 지금의 후한서(後漢書)는 곽(郭)이 읽어 본 것이 아닌데 이 사람의 주(注)에서 후한서를 인용한 것은 오지(吳志) 비빈전(妃嬪傳)에서 말한 사승(謝承)이 편찬한 후한서(後漢書) 백여 권으로 그 책에서 ‘읍루(挹婁)는 바로 옛 숙신씨(古肅慎氏)의 나라이다.’라고 설명한 것이다. 물수리(隼)가 진후(陳侯)의 조정에 모였던 일이 노어(魯語)에 실려 있다.
죽서(竹書)에서 “제순(帝舜) 25년 식신씨(息慎氏)가 와서 활과 화살을 조공하였다.” 하니 바로 숙신(肅慎)이다.
좌전(左傳)에서 숙신(肅慎), 연(燕), 박(毫)은 나의 북쪽 땅이다.” 하였다. 주서(周書) 왕회편(王會篇)에서도 “정북방(正北方)에 직신(稷愼)”이라 하고 “식(稷), 식(息), 숙(肅)은 아울러 소리가 옮겨가도 글자가 통하는 것이다.” 하였다.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에서 읍루(挹婁)는 부여(夫餘)와 거리가 동북 천여 리(里)이고 큰 바다를 가에 두고 있다.” 하였다.
사기 정의(史記正義)에서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하여 “말갈국(靺鞨國)은 옛숙신(古肅慎)이다. 경(京, 괄지지를 쓴 사람이 당나라 사람이니 京은 당나라 수도 장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동북 만 리(里) 아래에 있다. 동쪽과 북쪽에는 각각 큰 바다(大海)에 닿아 있다.〉
山海經箋疏 山海經第十七 棲霞郝懿行箋疏
大荒北經 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慎氏之國〈今肅慎國去遼東三干餘里穴居無衣衣豬皮冬以膏塗體厚數分用卻風寒其人皆工射弓長四尺勁疆箭以楛為之長尺五寸青石為鏑此春秋時隼集陳候之庭所得矢也晉太興三年平州刺史崔毖遣別駕高會使來獻肅愼氏之弓矢箭鏃有似銅骨作者問云轉與海內國通得用此今名之為抱婁國出好貂赤玉豈從海外轉而至此乎後漢書所謂挹婁者是也懿行案肅愼國見海外西經郭說肅愼本魏志東夷傳但傳本作用楛長尺八寸與郭異餘則同也今之後漢書非郭所見而此注引後漢書者吳志妃嬪傳云謝承撰後漢書百餘卷其書說挹婁即古肅慎氏之國也隼集陣侯之庭魯語有其事竹書云帝舜二十五年息慎氏來朝貢弓矢即肅慎也左傳云肅慎燕毫吾北土也周書王會篇亦云正北方稷愼稷息肅竝聲轉字通也魏志東夷傳云挹婁拒夫餘東北千餘里濱大海史記正義引括地志云靺鞨國古肅慎也在京東北萬里已下東及北各抵大海〉
2. 다여객화(茶餘客話) 1권 원규생(阮葵生) 청(清) :
장백산(長白山)은 선창(船廠) 동북쪽 4백여 리에 있다. 강희(康熙) 14년 색호례(塞呼禮, 황제의 호위 무관)와 각라(覺羅)와 오묵(吳默) 등 다섯 사람을 보내어 장백산(長白山)의 형세를 조사하게 하였다.
5월에 길을 떠나 길림오라(吉林烏喇) 지방에 이르렀다. 6월 13일에 3일 동안 길을 갔는데 학(鶴) 울음소리가 들리었다. 17일에 구름과 안개가 두루 퍼져 산의 방향을 알지 못하는 바람에 학(鶴)의 소리를 찾아서 앞으로 나아갔더니 사슴이 지나간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그 발자국을 찾아서 산 위로 올라가니 바로 장백산(長白山) 아래에 이르렀다. 다시 반 리(里)를 가니 파라수(波羅樹 : 목화 나무)가 줄을 이루고 향나무(香木)가 무더기로 살고 있었으며 노랑꽃(黃花)이 고개에 둘러 있었다. 그 고개 위아래로 구름과 안개가 가리어 막고 있어 온전한 시야를 갖을 수가 없었다. 황제의 성스러운 뜻(聖旨)을 펴 읽고 정성과 깨끗함으로 예(禮)를 치르니 점차 산세(山勢)가 또렷이 드러났다. 한 작은 길을 향하여 올라가니 산이 점점 평탄해지는 것이 보여 옷자락을 잡고서 올랐다. 대략 백 리(里)쯤 모두 눈이 쌓여 얼음(冰)이 되어 있었다. 산 위에 다섯 봉우리를 감아 돌아 흐르던 물이 연못이 되어 하나로 굽이치니 그 힘이 마치 거꾸로 쏟아질 듯하였다. 바로 가운데에 봉우리 하나가 우뚝 서 있어 곁에는 마치 섬으로 이루어진 문 같았다. 맑은 샘물이 그리도 많아서 왼쪽으로 흘러 갈송례오라(噶松禮烏喇)로 들어가고 오른쪽으로 흘러 대납음(大納音), 소납음(小納音)들의 강으로 들어간다. 예(禮)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사슴이 백여 마리가 보였다. 산맥이 굽이치는(山滾) 데로 따라 내려가다가 사슴 일곱 마리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사슴과 얼굴을 마주하고 내민 손길을 따르기에 만질 수가 있었다. 인하여 머리를 잡아당겨 사슴을 안고서 산을 내려왔다. 주위를 둘러봐도 구름과 안개가 막고 가려서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요점을 발췌한 절록(節錄)에 오묵(吳默)의 청(清)나라 글자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살펴보면 장백산(長白山)은 바로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鄰)이다. 〔그 땅(土) 이름이니 가이민(歌爾民)은 ‘길다(長)’라는 뜻이고 상견(商堅)은 ‘희다(白)’을 뜻함〕 산해경(山海經)에는 ‘불함산(不咸山)’이라 적고 있고 당서(唐書)에는 ‘태백산(太白山)’이라 하고 역시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한다. 명일통지(明一統志)에서 가리켜 말하기를 “회령부(會寧府) 남쪽 60리에 있다. 이 산은 높이가 2백여 리이고 이어져 뻗기를 천여 리나 간다. 산 위에 담(潭)이 있으니 ‘달문(闥門)’이라 하는데 둘레가 80리이다. 수원이 깊어 흘러가는 물줄기가 넓어 압록(鴨綠), 혼동(混同), 애호(愛滹) 세 강이 이 산에서 나온다. 압록강(鴨綠江)은 산 남서쪽에서부터 흘러 요동(遼東) 남해로 들어간다. 혼동강(混同江)은 산 북쪽에서 흘러 북해(北海)로 들어간다. 애호강(愛滹江)은 동쪽으로 흐르다 동해로 들어간다. 이 세 강은 기이함을 잉태하고 빼어남을 길러 보옥과 진주를 낳아 세상에서 보물처럼 소중히 여겨진다. 그 산에 바람은 세차고 기운은 차갑다. 기이한 나무와 영험한 약재가 계절에 따라 뻗어 나온다.
茶餘客話/卷01 阮葵生 清 : 長白山,在船廠東北四百餘里。康熙十四年,遣塞呼禮、覺羅、吳默等五人,查長白山形勢。五月起程,至吉林烏喇地方。六月十三日,行三日,聞有鶴聲。十七日,雲霧敷布,不識山向,因尋鶴聲前進,得鹿行蹤跡。尋跡上山,直至長白山下。又行半里,有白波羅樹成行,香木叢生,黃花遍嶺,上下雲霧遮蔽,不能全見。宣讀聖旨,虔潔行禮,漸見山勢分明。向一小路而上,見山漸平坦,攝衣而登。約百里許,俱積雪成冰。山上五峰回繞,水池一曲,勢如倒瀉。正中一峰特立,旁如門嶼。清泉甚多,左流入噶松禮烏喇,右流入大納音小納音等江。禮畢下山,見鹿百餘,從山滾下。內有七鹿對面,應手而得。因叩頭,攜鹿下山。回看雲霧遮蓋,一無所見〈節錄吳默清字譯漢〉。按長白山,即歌爾民商堅阿鄰,《山海經》作不咸山,《唐書》作太白山,亦曰徒太山。《明一統志》稱在會寧府南六十里。是山高二百餘里,綿亙千餘里。山上有潭,曰闥門,周八十里,源深流廣,鴨綠、混同、愛滹三江出焉。鴨綠江自山南西流,入遼東之南海。混同江自山北流入北海。愛滹江東流入東海。三江孕奇育秀,產珠璣珍貝,為世寶重。其山風勁氣寒,奇木靈藥,應時挺出。
3. 흠정대청일통지(欽定大清一統志) 45권 :
산천(山川) 장백산(長白山)
〈길림성(吉林城) 동쪽 조금 남쪽 6백 리에 있으니 바로 과륵민산연아림(果勒敏珊延阿林: 과륵민은 ‘길다(長)’이요 산연은 ‘희다(白)’이요 아림은 ‘산(山)’을 뜻함)이다. 가로로 천여 리가 뻗어가고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이요 서쪽으로는 봉천부(奉天府) 여러 산에 이르니 모두 이 산에서 맥이 피어났다. 산마루에 담(潭)이 있어 압록(鴨綠), 혼동(混同), 도문(圖們) 세 강의 수원이 된다.
옛날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이었고 역시 태백산(太白山)이라 이름하고 백산(白山)이라고도 이름한다. 불함(不咸)이라는 이름이 처음에 산해경(山海經)에서 보인다. 진서(晉書)에 “숙신씨(肅慎氏)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살았다.” 하였다. 북위서(北魏書)에 “물길국(勿吉國)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다.” 하였다. 위(魏)나라에서는 “태백(太白)에 범(虎)과 표범(豹), 곰(羆), 이리(狼)가 있는데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 위에서 똥오줌을 누지 말게 되어 산을 지나가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물(物)을 담아서 집을 나선다.” 하였다.
금사(金史) 세기(世紀)에 “그 북쪽을 말하자면 혼동강(混同江)이 있다. 장백산(長白山)의 혼동강(混同江) 역시나 흑룡강(黒龍江)이라 부르니 이른바 ‘백산 흑수(白山黒水)’가 이것이다.” 하였다.
또 예지(禮志)에 “대정(大定) 12년(1173년)에 징백산(長白山)의 신(神)을 봉하여 흥국령응왕(興國靈應王)으로 삼고 바로 그 산 북쪽 땅에 묘우(廟宇)을 세웠다. 명창(明昌) 4년(1193년) 다시 개천홍성제(開天𢎞聖帝)로 책봉하였다.” 하였다. 송나라 섭융례(葉隆禮)가 지은 요지(遼志)에 “장백산(長白山)은 냉산(冷山) 동남쪽 천여 리(里)에 있다. 그 안에 들짐승이며 날짐승이 모두 희어서 사람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니 그 공간을 더럽혀서 독사의 해를 불러오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였다.
명통지(明統志)에 “삼만위(三萬衛) 동북쪽 천여 리 옛 회령부(㑹寧府) 남쪽 60리에 있다. 가로로 천 리를 뻗어 나갔고 높이가 2백 리이다. 산마루에 담(潭)이 있으니 둘레가 80리이다. 못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고 남쪽을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 아아갈하(阿雅噶河)가 된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면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압록강(鴨緑江)이 되고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도문강(圖們江)이 되며 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혼동강(混同江)이 되니 아울러 아아갈하(阿雅噶河)라는 이름은 없다. 옛날과 지금에 부르는 호칭이 다른 것이다. 금(金)나라 때에 묘(廟)를 허물었고 본조(本朝, 곧 청나라)에서 장백산(長白山) 신으로 높이어 강희(康熙) 17년(1678년)에 황제의 뜻을 받들어 대신(大臣) 각라(覺羅), 무목눌(武穆訥)들을 보내어 산에 올라 살펴보게 하였다.
산록 한 곳을 보니, 사방이 빽빽이 수풀에 우거져 꽉 막혔고 그 가운데는 둥글게 평평하여 초목이 자라지 못하였다. 숲을 나와 1리쯤 향나무가 줄지어 벌려 있고 노랑꽃(黄花)이 어지러이 찬란하였다. 산허리까지 구름이 드리우고 안개가 덮여 고개를 들어 힐끗 볼 수도 없었다. 여러 대신이 무릎을 꿇고 황제의 뜻을 펴 알리기를 마치니 구름과 안개가 갑자기 휑 사라지더니 산 모양이 또렷이 드러나 지름길을 찾아 산을 오를 만하였다. 그 길에 반은 돌계단(石砌)이 있어 대(䑓)처럼 평탄하여 사방을 바라보기에 알맞았다. 산마루는 동그스름한 꼴이 되어 눈이 쌓여 그렇게 희었다. 그 위로 올라가자 다섯 봉우리가 둘러 치솟아 마치 내려다보는 듯하였다. 남쪽 한 봉우리 조금 아래로 처져 문과 같았다. 가운데 담(潭)은 그윽하고 깊숙하였다. 기슭과의 거리가 50장(丈)쯤 되었으며 둘레가 40여 리는 되었고 산의 사방 둘레에는 셀 수 없는 샘이 쏟아져 들어가니 바로 압록강 등 세 큰 강이 말미암아 발원하는 곳이다.
강희(康熙) 23년 다시 주방협령(駐防恊領) 륵첩(勒輙)들이 둘레에 산 형세를 살펴보니 동서남북으로 끊임없이 뻗어 대략 명통지(明統志)에서 말한 바와 같았다. 그 산마루에 달리 나무나 풀이 자라지 않았고 흰 꽃이 많았다. 남쪽 산기슭은 구불구불 가없이 이어져 두 줄기로 나뉘었다. 그중 하나 서남쪽을 가리키는 것은, 동쪽 경계는 압록강(鴨緑江)이요 서쪽 경계는 동가가강(佟家嘉江)이다. 산기슭이 다한 곳에서 두 강이 만난다. 나머지 하나는 산의 서쪽을 휘감아 북쪽으로 가서 수백 리를 뻗어가는데 그 뭇 물줄기에 의해 갈라지기 때문에 옛 지리지에서는 하나같이 이를 일러 ‘분수령(分水嶺)’이라 하였다. 지금은 서쪽으로 흥경(興京) 변두리에 이르는데 나무가 무성하고 숲이 깊어 하늘에 장막을 치고 해를 가리는 것이, 토박이들은 ‘납로와집(納嚕窩集)’으로 부른다. 이곳을 따라 서쪽으로 흥경문(興京門)에 들어가면 드디어 개운산(開運山)이다. 납로와집(納嚕窩集)에서 북쪽 한 산등성이는 40여 리가 뻗어 나간 것이 토박이들은 과륵민주돈(果勒敏珠敦, 과륵민은 ‘길다(長)’, 주돈은 령(嶺)이라는 뜻)이라 부른다. 다시 서쪽을 가리키며 영아(英峩)의 변두리 문(邉門)에 들어가니 드디어 천주(天柱)와 융업(隆業) 두 산이다. 휘휘 돌고 이리저리 굽어 범이 걸터앉은 듯하고 용이 또아리를 튼 듯 그 터 사이에 땅의 모양으로 인하여 이름을 세워 산이 되고 영(嶺)이 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모두 이 산에서 가지 친 후예라는 것이다. 산의 영험은 남달라 옛날부터 이름이 일컬어졌고 신묘함과 성스러움이 상서로움을 피워내어 지금껏 성대하니 만세토록 다진 왕업(鴻基)은 이 산과 더불어 그지없게 된다.
살펴보면 장백산(長白山)은 남쪽에 왜두랍자산(歪頭䃳子山)이 있고 이 산의 동쪽을 홍석랍자산(紅石䃳子山)이라 한다. 삼가 실록(實録)을 들여다보면 장백산(長白山)의 동쪽에 포고리산(布庫哩山)이 있고 그 아래에 못이 있으니 ‘포륵호리(布勒瑚理)’라 한다. 사람들 사이 전해 내려온 말이 ‘세 천녀(天女)가 못에서 목욕하고 있었는데 신령한 까치가 붉은 열매(朱果)를 머금더니 막내 여인의 옷에 놓아두었다. 막내가 이 열매를 입안에 머금기만 하였는데 갑자기 뱃속으로 들어가 버리더니 마침내 몸에 태기가 있어 얼마 있다 남자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능히 말을 할 수 있었고 몸 틀이 기이하였다. 아이가 컸을 때 어머니가 붉은 열매를 삼킨 일을 알려주고 내쳐 그에게 성을 내려 주어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하고 이름을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이라 하였다. 작은 배를 주어 오르게 하고 어머니는 드디어 허공을 넘어갔다. 배는 물살을 따라 나루터(河步)에 이르렀다. 이어 강기슭으로 올라가 버드나무를 꺾으며 높은 산에 미치자 깔개를 만들어 단정히 그 위에 앉았다. 그 땅에 세 성(姓)이 우두머리를 다투고 있어 날마다 군대를 만들어 원수처럼 죽이고 있었다. 애신각라가 깔개 위에 앉아 있을 때 어떤 이가 나루터에서 물을 긷고 있다가 그를 보고 이상하게 여기어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을 싸우지 말라! 내가 나루터에서 물을 긷고 있는데 어떤 남자를 보았으니 그 꼴을 살펴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하늘은 헛되이 이 사람을 생겨나게 하지 않았으리라!” 하였다. 무리가 가서 보고 모두들 기이하게 여겼다. 인하여 어디서 왔는지를 물으니 “나는 천녀(天女)가 낳은 사람이다. 하늘이 나를 생겨나게 하여서 너희들의 난리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하였다. 나아가 자기의 성명을 알렸다. 무리가 “이는 하늘이 낳은 성스러운 사람이다. 그를 그냥 걸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드디어 손을 맞잡고 탈 것(舁)을 만들어 집에 맞아들였다. 세 성(姓) 사람들은 의논하여 그를 추대하여 나라의 주(主)로 삼고 딸을 처로 삼아주었으며 패륵(貝勒)으로 받들었다. 그들이 싸웠던 난리는 이렇게 정리가 되었고 마침내 장백산(長白山) 동쪽 악다리성(鄂多理城)에 살면서 나라 이름을 만주(滿洲)라 불렀다. 이것이 나라의 기틀을 연 처음이다.
이에 수 세기 동안 외적의 난을 만나 종족(宗族)이 대부분 피해를 입어 황야로 어린 아들이 도망을 가다가 적이 이를 추적하는 일이 있었는데 마침 신령한 까치가 있어 그 머리에 앉아 머물러서 추격하던 자가 멀리서 까치둥지 튼 곳으로 보고 아마도 고목(枯木)일 것이라고 짐작하고서 도중에 돌아가 마침내 죽음을 면하고서 그 몸을 숨기어 살며 생을 마감하였다.” 하였다.
한편 애신각라의 맥은 다시 조조원황제(肇祖原皇帝)에게 전해졌는데 이 산이 참으로 황청(皇清) 억만년의 상서로움이 피어난 중요한 땅이라고 여기어 옹정(雍正) 11년에 온덕형산(温徳亨山)에다 망제전(望祭殿)을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바쳤다. 건륭(乾隆) 8년에 황제가 지은 어제주필길림경망장백산시(御製駐蹕吉林境望長白山詩)가 있고 19년에 어제망제장백산시(御製望祭長白山詩)가 있다.〉
欽定大清一統志 (四庫全書本)/卷045 山川長白山〈在吉林城東稍南六百里即果勒敏珊延阿林横亘千餘里東自寧古塔西至奉天府諸山皆發胍於此山巔有潭為鴨綠混同圖們三江之源古名不咸山亦名太白山亦名白山不咸之名始見於山海經晉書肅慎氏在不咸山北魏書勿吉國有徒太山魏言太白有虎豹羆狼不害人人不得山上溲汚行徑山者皆以物盛去金史世紀其在北者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黒龍江所謂白山黒水是也又禮志大定十二年封長白山神為興國靈應王即其山北地建廟宇明昌四年復册為開天𢎞聖帝葉隆禮遼志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其内禽獸皆白人不敢入恐穢其間以致蛇虺之害明統志在三萬衛東北千餘里故㑹寧府南六十里横亘千里髙二百里其巔有潭周八十里淵深莫測南流為鴨綠江北流為混同江東流為阿雅噶河今考西南流入海者為鴨緑江東南流入海者為圖們江北流入海者為混同江並無阿雅噶河之名古今稱呼之異也金時廟毁 本朝尊為長白山之神康熙十七年奉㫖遣大臣覺羅武穆訥等登山相視見山麓一所四周宻林叢翳其中圜平草木不生出林里許香樹行列黄花紛郁山半雲垂霧羃不可仰睇諸大臣跪宣㫖畢雲霧倐廓山形瞭然有徑可登其半有石砌䑓坦平宜四望山巔作圜形積雪皚然及陟其上五峯環峙如府南一峯稍下如門中潭窈杳距岸五十丈許周可四十餘里山之四周百泉奔注即三大江所由發源也康熙二十三年復遣駐防恊領勒輙等周圍相山形勢廣袤綿亘畧如明統志所云其巔不生他樹草多白花南麓蜿蜒磅礡分爲兩幹其一西南指者東界鴨緑江西界佟家嘉江麓盡處兩江㑹焉其一遶山之西而北亘數百里以其為衆水所分舊志總謂之為分水嶺今則西至興京邉茂樹深林幕天翳日者土人呼為納嚕窩集從此西入興京門遂為開運山自納嚕窩集而北一岡袤四十餘里者土人呼為果勒敏珠敦復西指入英峩邉門遂為天柱隆業二山廻旋盤曲虎踞龍蟠其間因地立名為山為嶺者不一要皆此山之支裔也山之靈異自昔稱名而神聖發祥於今為盛萬禩鴻基與山無極矣 按長白山南有歪頭䃳子山其山之東曰紅石䃳子山謹考實録長白山之東有布庫哩山其下有池曰布勒瑚理相傳有三天女浴於池神鵲啣朱果置季女衣季女含口中忽已入腹遂有身尋産一男生而能言體貌竒異及長母告以吞朱果之故因錫之姓為愛新覺羅名之曰布庫哩雍順與小舠乗之母遂凌空去舠順流至河步于是登岸折柳及嵩為坐具端坐其上其地有三姓爭為雄長日構兵仇殺有取水河歩者見而異之歸語人曰汝等勿争吾取水河步見一男子察其貌非常人也天不虚生此人衆往觀皆以為異因詰所由来答曰我天女所生天生我以定汝等之亂者且告以姓名衆曰此天生聖人也不可使之徒行乃交手為舁迎至家三姓者議推為國主以女妻之奉為貝勒其亂乃定遂居長白山東鄂多理城國號滿洲是為開基之始越數世遭宼亂宗族多遇害有㓜子遁于荒野賊追之㑹有神鵲止其首追者遥望鵲棲處疑為枯木中道而返乃得免隱其身以終焉又再傳為肇祖原皇帝是此山實為皇清億萬年發祥重地雍正十一年建望祭殿於温徳亨山嵗時致祀乾隆八年有御製駐蹕吉林境望長白山詩十九年有御製望祭長白山詩〉
4. 흠정팔기통지(欽定八旗通志) 54권 :
개국방략(開國方畧)에 “요녕성 심양, 이 극동(極東)의 땅에 장백산(長白山)이 있으니 바로 산해경(山海經)의 불함산(不咸山)이다. 산의 높이는 2백여 리로 끊임없이 뻗어 천여 리를 간다. 산 위에 담(潭)이 있어 ‘천문(闡門)’이라 하니 둘레가 80리이고 근원이 깊어 흐르는 물줄기가 넓어서 압록(鴨綠)과 혼동(混同)과 애호(愛滹) 세 강이 이곳에서 나온다. 압록강(鴨綠江)은 산 남서쪽에서부터 흘러나와 요동(遼東)의 남해로 들어가고 혼동강(混同江)은 북쪽으로 흘러가서 북해(北海)로 들어가며 애호강(愛滹江)은 동쪽으로 흘러 동해(東海)로 들어간다. 산천(山川)이 푸짐(雄厚)하고 빼어난 영험이 여기에 모여 보배와 아름다운 진주, 기이한 나무와 영험한 약이 기후에 맞추어 앞서 나오니 대부분 사람의 자취가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 동쪽에 산이 있으니 ‘포고리산(布庫哩山)’이라 하고 아래에 못이 있으니 ‘포륵호리(布勒瑚里)’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말이 “세 천녀(天女), 큰 따님은 은고륜(恩古倫)이라 하고 그 다음은 ‘정고륜(正古倫)’이라 하며 막내 따님은 ‘석고륜(錫庫倫)’이라 하는데 함께 이 못에서 목욕하는 동안에 어떤 신령한 까치가 붉은 열매(朱果)을 머금더니 막내 따님의 옷에 두었고 이 여인이 한번 이 열매를 머금자 갑자기 뱃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몸에 태기가 있는 느낌을 받아 두 천녀에게 알리기를 “내 몸이 무거워 높이 날아오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두 천녀가 “이는 하늘이 너에게 임신을 태워준 것이니 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와도 늦지 않는다.” 하였다. 막내 여인이 얼마 있다가 남자아이 하나를 낳았다. ...” 하였다.
欽定八旗通志 (四庫全書本)/卷054 開國方畧遼瀋極東之地有長白山即山海經之不咸山也高二百餘里綿亘千餘里山上有潭曰闡門周八十里源深流廣鴨綠混同愛滹三江出焉鴨綠江自山南西流入遼東之南海混同江北流入北海愛滹江東流入東海山川雄厚靈秀斯鍾寳珠珍石竒木靈藥應候挺生多非人迹所能到其東有山曰布庫哩山下有池曰布勒瑚里相傳有三天女長曰恩古倫次曰正古倫季曰錫庫倫同浴於池有神鵲銜朱果置季女衣試取含之倐已入腹遂覺似有身告二女曰吾身重不能冲舉矣二女曰此天授爾娠俟免身再來未晚也季女尋産一男生而能言體貌偉異及長母告以朱果之事因命之曰汝姓愛新覺羅名布庫哩雍順...
5. 동삼성여지도설(東三省輿地圖說) :
장백산(長白山)은 길림성(吉林城) 동남쪽 6백 리에 있으니 나랏말로는 과륵민산연아림(果勒敏珊延阿林)이라 일컫고 조선(朝鮮)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 부른다. 꼭대기에 담(潭)이 있어 ‘타문포(他們泡)’라 하는데 압록(鴨綠)과 혼동(混同)과 도문(圖們) 세 강의 근원이 된다. 옛날에는 불함산(不咸山)이라 이름하였으니 산해경(山海經)에 “대황(大荒) 안에 산이 있으니 이름은 ‘불함(不咸)’이라 하는데 숙신씨(肅慎氏)의 나라에 있다.” 하였다. 진서(晉書)에 “숙신씨(肅慎氏)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다.” 하니 이것이다. 또한 도태산(徒太山)이라 이름한다. 위서(魏書)에 “물길국(勿吉國)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다.” 하니 이것이다. 또 태백산(太白山)이라 이름한다. 당서(唐書)에 “속수(粟水)는 태백산(太白山)에서 발원한다.” 하니 이것이다.
東三省輿地圖說 長白山在吉林城東南六百里國語稱果勒敏珊延阿林朝鮮呼白頭山頂有潭曰他們泡為鴨綠混同圖們三江之源古名不咸山山海經大荒之中有山名不咸有肅慎氏之國晉書肅慎氏在不咸山北是也又名徒太山魏書勿吉國有徒太山是也又名太白山唐書粟水源於太白山是也
6. 흠정성경통지(欽定盛京通志) 27권 :
장백산(長白山)
〈곧 과륵민산연아림(果勒敏珊延阿林)이니 길림성(吉林城) 동쪽에서 조금 꺾어져 남쪽으로 가로로 뻗어 천여 리를 간다.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 서쪽에서 봉천부(奉天府)의 여러 산에 이르니 모두 이 산에서 맥(脈)이 피어난다. 산마루에 담(潭)은 압록(鴨緑)과 혼동(混同)과 도문(圖們) 세 강의 발원이 된다. 옛날에 불함산(不咸山)이라 이름하였고 역시 태백산(太白山)이라고도 이름하며 백산(白山)이라고도 이름한다. 산해경(山海經) “대황(大荒) 안에 산이 있으니 이름은 ‘불함’이라 하는데 이 산은 숙신씨 나라에 있다.” 하였다. 진서(晉書)에 “숙신씨(肅愼氏)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다.” 하였다. 북위서(北魏書)에 “물길국(勿吉國)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다.” 하였다. 당서(唐書)에 “속말수(粟末水)는 태백산(太白山)에서 발원한다.” 하였다. 금사 세기(金史世紀)에 “ 그 산 북쪽에 혼동강(混同江)이 있는데 장백산(長白山)에 혼동강(混同江)은 역시 흑룡강(黒龍江)이라 부르니 이른바 ‘백산흑수(白山黒水)’가 이것이다.” 하였다.
또 예지(禮志)에 대정(大定) 12년 장백산(長白山) 신(神)을 봉하여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삼고 바로 그 산 북쪽 땅에다 묘우(廟宇)를 세우고 담당자에게 제사를 치르도록 하되 큰 산에 지냈던 옛날 그대로의 예(禮)대로 하게 하였다. 명창(明昌) 4년(1193년) 다시 개천굉성성제(開天宏聖帝)로 책봉하였다가 그 뒤에 묘(廟)를 닫았다.” 하였다. 섭융례(葉隆禮)의 요지(遼志)에서 “장백산은 냉산(冷山) 동남쪽 천여 리에 있으니 그 안에 들짐승과 날짐승 모두가 희어서 사람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니 그 터 사이를 더럽혀서 독사의 해를 불러올까 두려워하였다.” 하였다.
명일통지(明一統志)에 “삼만위(三萬衛) 동북쪽 천여 리에 있으니 옛날 회령부(㑹寕府) 남쪽 60리에 가로로 천 리가 뻗어 나간다. 높이는 2백 리이고 그 산마루에 담(潭)이 있어 둘레가 80리로 그 깊은 깊이는 헤아리지 못한다. 이 물이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緑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 아아갈하(阿雅噶河)가 된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면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압록강(鴨緑江)이고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도문강(圖們江)이며 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혼동강(混同江)이니 아울러 아아갈하(阿雅噶河)라는 이름은 없다. 옛날과 지금에 가리켜 이름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
본조(本朝)에서 천명(天命)을 크게 받아 정사전(正祀典)을 찾아보고서 장백산의 신을 존숭하여 성(城) 서남쪽 9리(里) 온덕형산(温徳亨山)에서 망제(望祭 : 멀리에서 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냄)를 지내고 봄과 가을에 두 번 제를 지낸다. 길림장군 부도통(吉林將軍副都統)이 이를 주관하였는데 성경예부(盛京禮部)에서 관리를 보내 제(祭)에 따른 일을 하게 하였고 국가에 성대한 의식(大典)이 있을 때 대신(大臣)을 보내어 장백산 신께 제(祭)를 지내 알리되 큰 산에 제를 올리는 예와 똑같이 하였다.
강희(康熙) 17년 황제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어 대신(大臣) 각라(覺羅)와 무목납(武穆納)들을 보내어 산에 올라 살피게 하였다. 산록(山麓) 한 곳을 보니 사방 둘레에 수풀이 울창하여 빽빽하게 가려져 그 안은 둥그렇게 평평하여 초목이 자라지 못하였다. 숲을 나와 1리쯤에 향나무가 어지럽게 줄지었고 노랑꽃이 여기저기에서 눈부셨다. 산허리까지 구름이 드리우고 안개가 덮고 있어 고개를 들어 힐끗거리지도 못하였다. 여러 대신이 무릎을 꿇고 황제의 뜻을 펴 읽기를 마치니 구름과 안개가 갑자기 퍼져 사라지고 산의 꼴이 그렇듯 또렷해졌다. 지름길이 있어 길을 떠날 수 있었다. 그 길에 반은 돌계단이 있어 대(臺)처럼 평탄하여 사방을 바라보기에 알맞았다. 산마루는 둥근 꼴이고 눈이 쌓여 그렇게 희었다. 그 위를 올라갔을 때 다섯 봉우리가 둘러 치솟아 있어 마치 우리를 내려다보는 듯하였다. 남쪽 한 봉우리는 조금 아래로 처져 있어서 마치 문(門) 같았다. 가운데 담(潭)은 깊고 아득하였고 기슭과의 거리가 50장(丈)쯤이었다. 둘레는 40여 리는 되어 보였다. 산의 사방 둘레에 헤아릴 수 없는 샘물이 용솟음쳐 쏟아져 나오니 바로 세 큰 강이 말미암아 발원하는 곳이다. ....
나랏말에 ‘과륵민(果勒敏)은 ‘길다(長)’라는 뜻이고 ‘산연(珊延)’은 ‘흰색(白色)’이라는 뜻이다. ‘아림(阿林)’은 ‘산(山)’이라는 뜻이다. 몽고어(䝉古語) ‘아아갈(阿雅噶)’은 ‘사기로 만든 그릇(碗)’을 뜻한다. ‘주돈(珠敦)’은 ‘산등성이(山梁)’를 뜻한다.〉
欽定盛京通志卷二十七 長白山〈即果勒敏珊延阿林在吉林城東稍折而南横亘千餘里東自寧古塔西至奉天府諸山皆發脈於此山巔有潭為鴨緑混同圖們三江之源古名不咸山亦名太白山亦名白山山海經大荒之中有山名不咸有肅慎氏之國晉書肅愼氏在不咸山北魏書勿吉國有徒太山唐書粟末水源於太白山金史世紀其在北者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黒龍江所謂白山黒水是也又禮志大定十二年封長白山神為興國靈應王即其山北地建廟宇有司致祭如嶽鎮故事明昌四年復册為開天宏聖帝其後廟廢葉隆禮遼志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其内禽獸皆白人不敢入恐穢其間以致蛇虺之害明一統志在三萬衛東北千餘里故㑹寕府南六十里横亘千里髙二百里其巔有潭周八十里淵深莫測南流為鴨緑江北流為混同江東流為阿雅噶河今考西南流入海者為鴨緑江東南流入海者為圖們江北流入海者為混同江並無阿雅噶河之名古今稱名之異也本朝誕膺天命考正祀典尊為長白山之神在城西南九里温徳亨山望祭春秋兩祭吉林將軍副都統主之盛京禮部遣官隨祭國家大典遣大臣祭告如嶽鎮儀康熙十七年奉㫖遣大臣覺羅武穆納等登山相視見山麓一所四週密林樷翳其中圜平草木不生出林里許香樹錯列黄花紛郁山半雲垂霧羃不可仰睇諸大臣跪宣㫖畢雲霧倐廓山形瞭然有徑可發其半有石砌臺坦平宜四望山顛作圜形積雪皚然及陟其上五峯環峙如府南一峯稍下如門中潭窈杳距岸五十丈許週可四十餘里山之四周百泉奔注即三大江所由發源也... 國語果勒敏長也珊延白色也阿林山也䝉古語阿雅噶碗也珠敦山梁也〉
7. 흠정음운술미(欽定音韻述㣲) 10권 :
함(咸) 〈해(諧)와 참(讒)의 반절이다. 느낀다(感)는 뜻이요 모두(皆)라는 뜻이다. 또 역(易)의 괘(卦) 이름이다. 또 동함(東咸), 서함(西咸) 모두 별 이름이다. 또 대함(大咸), 소함(小咸) 소함(少咸)은 모두 산 이름이다. 산해경(山海經)을 보면 “또 불함산(不咸山)은 바로 의무려(醫巫閭)이다.”라고 하였다. 또 대함(大咸)은 요(堯)임금의 악(樂)이다. 또 원함(阮咸)은 악기이니 비파(琵琶)와 비슷하다. 원함(阮咸)이 만든 것이기에 그의 이름으로써 악기 이름으로 썼다. 또 도함(都咸)은 나무 이름이다. 함은 또한 성(姓)이다.〉
欽定音韻述㣲 (四庫全書本)/卷10 咸〈諧讒切感也皆也又易卦名又東咸西咸俱星名又大咸小咸少咸皆山名見山海經又不咸山即醫巫閭又大咸堯樂又阮咸樂器似琵琶阮咸所作因以為名又都咸樹名又姓〉
8. 동북여지석략(東北輿地釋略) 3권 :
○장백산맥(長白山脈)
장백산맥(長白山脈)은 수원성(綏遠城) 북쪽에 대청산(大青山)에서부터 오니 바로 음산(陰山)이다.
〈동쪽에서 나온 것은 장백산맥이 되고 그 수원성(綏遠城) 동북에서 꺾어져 남쪽으로 나와 대합박(代哈泊) 서쪽을 거쳐 다시 남쪽으로 영원청(寧遠廳) 땅에 이르러 삭평부(朔平府) 땅으로 들어간다. 산서(山西) 모든 성(省)과 직예성(直隸省), 혼하(渾河) 서쪽에 여러 군현(郡縣) 모두 그 산맥이 가지 친 산록이니 이들을 모아 이름하기를 관잠산맥(管涔山脈)이라 한다.
태항산맥(太行山脈) 역시 관잠(管涔)을 말미암아 따로 나와 거용산맥(居庸山脈)과 더불어 가지가 나뉘고 갈래가 갈라졌다. 송(宋)나라 사람이 거용(居庸)을 태항(太行) 북쪽에서 나온 맥(脈)이라고 하였는데 대단히 잘못되었고 인하여 산후(山後, 하북성 태항산 북단)에 여러 주(州) 모두 요(遼) 구역이 되었으니 직접 그 땅을 낱낱이 밟고 눈으로 검증하지 못한 원인이 있다.〉
대청산(大青山) 동쪽에서 나와 다륜락이(多倫諾爾) 동북에 이르러 파림기(巴林旗) 경계로 들어가 흥안령(興安嶺)을 일으키는 것이 이것이다.
〈 그중에 장가구(張家口)의 찰한탁라해령(察漢托羅海嶺)이 나뉜 갈래를 말미암아 비스듬히 동남쪽으로 가다가 꺾여 남쪽으로 나오는 것은 연경 정맥(燕京正脈)이 되고 그중에 찰한탁라해(察漢托羅海)가 나뉜 갈래를 말미암아 동쪽으로 나와서 꺾여 동남쪽으로 가다가 열하(熱河) 풍령현(豐寧縣) 서북 경계, 곽가둔사(郭家屯司)의 서북쪽에 이르러 다시 꺾여 동남쪽으로 가는 것은 준화주(遵化州)의 동릉정맥(東陵正脈)이 된다. 〉
흥안령(興安嶺) 북쪽에서 나와 비스듬히 동쪽으로 가다 달리박(達里泊)의 동쪽을 거치고
〈 위원(魏源)이 지은 원사신편(元史新編)에 원(元)나라 때 응창로(應昌路, 내몽고 자치구 적봉시) 답이해자(答爾海子)는 황수(潢水, 서요하의 북쪽 발원지, 누런빛 하천이라는 몽고어의 시라무룬하(西拉木伦河), 요락수(饒樂水))의 발원지에서 서북쪽으로 백여 리에 있다. 지금은 ‘달리박(達里泊)’이라 한다.〉
비스듬히 동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북쪽에서 아이갈령도산(阿爾噶靈圖山)을 일으킨다. 다시 북쪽으로 가다 찰한성(察罕城)의 서쪽을 거치며 꺾어져서 동쪽으로 가다 찰한성(察罕城) 북쪽을 지나고 비스듬히 동북쪽으로 가다가 해라합산(海喇哈山)이 되고 다시 동북쪽에서 합록나태산(哈祿那太山)이 되고 비스듬히 서북쪽으로 가다가 꺾어져 동쪽에서 소극소로산(蘇克蘇魯山)이 된다. 다시 동쪽에서 기륵파이한산(奇勒巴爾罕山)이 되고 꺾어져 남쪽에서 납마의마합랍령(拉馬依馬哈拉嶺)이 되고 비스듬히 동남에서 회등령(盔騰嶺)이 된다. 다시 동남쪽에서 궤이유아산(几爾有兒山)이 되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과이심계(科爾沁界)에 들어간다.
〈 그 기륵파이한산(奇勒巴爾罕山) 북쪽을 말미암아 나온 줄기는 바로 북쪽에서 색악이제산(索岳爾濟山)을 일으키고 비스듬히 동북쪽으로 가다가 내흥안령(內興安嶺)의 간맥(榦脈)을 일으킨다. 장백산(長白山)은 내흥안령(內興安嶺)의 나뉜 갈래와 더불어 각각 나가니 바로 기륵파이한산(奇勒巴爾罕山)을 말미암아서 나누어진다.〉
다시 동남쪽으로 대포소도박(大布蘇圖泊)의 동쪽을 거치고 서눌곽특이 역참(西訥郭特爾站, 내몽고자치구 찰로특기(扎鲁特旗) 일대)과 달뢰합극 역참(達賴哈克站) 사이를 지나 비스듬히 동남쪽으로 6, 7백 리를 가다가 평평하여서 평탄한 산등성이와 낮은 흙산이 되고 봉천창도청(奉天昌圖廳) 북쪽 경계, 동쪽으로 요하(遼河)의 북쪽과 길림(吉林) 장춘부(長春府)의 동남쪽을 지나 꺾어져 남쪽으로 유변(柳邊) 이통문(伊通門)으로 들어가 륵극산(勒克山)을 일으킨다.
〈 회등령(盔騰嶺)에서 비스듬히 남쪽으로 가면서 점점 낮아지고 평평해지다가 여기에 이르러 다시 큰 산을 일으킨다. 대개 큰 줄기는 골짜기(峽)를 지나고서 왕왕 평원지구(平洋, 또는 평평하여 물이 있는 땅)가 되어 백 리(里) 동안 그 종적을 찾을 수가 없으니 실제는 두 지구(地區)를 가르는 하천(界水)들과 땅의 높낮이는 그대로 본래 분명하였는데 다만 사람이 대부분 살피지 못할 뿐이다.〉
서남쪽으로 가다 백여 리에서 비스듬히 동남쪽으로 위장(圍場, 만족몽고족자치현)으로 들어간다.
〈 이로부터 동쪽에서 나누어져 한 가지는 길림성(吉林省) 땅을 다스리는 줄기가 된다. 〉
다시 남쪽에 대양아등산(岱揚阿登山)이 되어 반색성(胖色城) 서쪽을 지나서 〈 이 곳을 따라서 서쪽으로 한 가지가 나뉘어 봉천성(奉天省) 땅을 다스리는 줄기가 된다.〉
다시 남쪽으로 과이민주돈령(戈爾敏朱敦嶺)이 되어 꺾어져 동쪽에서 이이합아범산(伊爾哈牙範山)이 된다.
〈 산 남쪽 물줄기가 압록강(鴨淥江)으로 들어가고 산 북쪽 물줄기는 송화강(松花江)으로 들어간다.〉
비스듬히 동북쪽에서 흑림령(黑林嶺)이 된다.
〈 바로 의이합아범산(依爾哈牙範山)가 연이어진 높고 험한 산이다.〉
다시 동쪽으로 가다 꺾어져 남쪽에서 비득리산(斐得里山)이 된다.
다시 동쪽으로 가니 바로 장백산(長白山)이다.
〈 도문강(圖們江)이 그 동쪽 기슭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고 압록강(鴨淥江)은 그 남쪽 기슭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가며 송화강(松花江)은 그 북쪽 기슭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간다. 하나는 영(嶺) 북쪽에 있고, 하나는 영(嶺) 남쪽에 있고 하나는 영(嶺) 동쪽에 있다. 각각 스스로 원류가 되어 서로 통하여 꿰지 않는다. 여러 책에서는 대부분 “한 원류(一源)에서 함께 나왔다.” 하는데 대단한 오류이다.〉
북쪽에서 나온 것은 정맥(正脈)이 되고 동쪽에서 나온 것은 줄기가 되며 남쪽에서 나온 것은 꼬리(尾)가 되어서 조선(朝鮮)의 바다에서 그 끝을 보니 이른바 남은 기운(餘氣)이다.
〈근래 사람 합비(合肥) 서희(徐曦)는 동삼성기략(東三省紀略)에서 “내흥안령산맥(內興安嶺山脈)은 남쪽에서 송화강(松花江)을 건너 길림(吉林), 봉천(奉天) 두 성(省) 사이에서 또아리를 틀고 맺혀서 장백산맥이 되고 다시 요동반도(遼東半島)를 밟아서 직예(直隸)의 해협(海峽)을 건너 등주(登州)에 이르러 뭍의 땅을 일으키고 서쪽으로 달려서 태산(太山)을 맺는다.” 하였다. 그 책에서 산맥(山脈)이 강을 건너는 곳에 경우에는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黑龍江)이 만나는 어귀를 가리켜 그 맥(脈)이 송화강(松花江)에서 엎드려 낮아져 남쪽으로 장백산맥(長白山脈)의 완달산(完達山)과 더불어 서로 연결된다고 말하였다. 서씨(徐氏)의 이 말은 별나게도 이치를 놓쳤다. 살펴보면 그가 말한바 완달산맥(完達山脈)은 실제 장백산(長白山) 동쪽에서 나온 가지이고 오소리강(烏蘇里江)과 목단강(牡丹江) 두 물줄기 사이에서 끼어 산다. 그가 장백(長白)에서 온 맥(來脈)이라 가리킨 것을 놓치고 전도되어 ‘등주(登州)를 밟아서 뭍이 일어나 태산(太山)이 된다’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 주장은 대체로 서씨(徐氏)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지만, 서씨만이 이미 ‘강을 건넌다’라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다도 넘는다’라는 그릇된 이론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바다를 건넌다(渡海)는 주장을 따져보자면 참으로 태산(太山)이 온 맥(脈)을 찾으려다 찾지를 못한 탓으로 해서 태산이 바다를 건너왔다고 의심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옛날에 황하(黃河)는 본래 저절로 강기슭에서 갈라져 바다로 들어갔고 태산(太山)의 맥(脈)은 숭산(嵩山)에서부터 왔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역시 이는 평평하던 들이 되고서야 골짜기를 넘는다는 이론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이다. 후대에 도랑물과 개울물이 사방에서 황하(黃河) 남쪽으로 닿았고(황하의 물줄기가 시대를 통해 변화되고 있음을 말한 듯) 도태산(徙太山)의 맥(脈)은 곧 하(河)의 흐름에 의해 막히고 끊어지게 되었다. 계미곡(桂未谷, 계복(桂馥) 1736년-1805년)은 일찍이 토론하여 이 이야기에까지 미쳤지만 안타깝게도 그 원인의 상세함을 죄다 밝히지 못하였다. 내가 지은 태산래맥고(太山來脈考) 안에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밝혀 놓았으니 독자들이 그 책을 읽는다면 산맥(山脈)이 강을 뚫거나 바다를 넘어간다는 논리는 옳지 못하다는 점을 가르마를 타듯 알 수가 있게 된다.〉
東北輿地釋略/卷3 ○長白山脈
長白山脈來自綏遠城北之大青山即陰山也 〈 東出者為長白山脈其自綏遠城東北折而南出經代哈泊西又南至寧遠廳境入朔平府境山西全省及直隸省渾河以西諸郡縣皆其支麓統名之曰管涔山脈太行山脈亦由管涔別出與居庸山脈支分派別宋人以居庸為太行北出之脈甚誤因山後諸州皆為遼有不能親歷目驗之故〉 自大青山東出至多倫諾爾東北入巴林旗界起興安嶺者是也 〈 其由張家口察漢托羅海嶺分支迤東南行折而南出者為燕京正脈其由察漢托羅海分支東出折東南行至熱河豐寧縣西北境郭家屯司之西北又折而東南行者為遵化州東陵正脈〉 自興安嶺北出迤東經達里泊之東 〈 魏源元史新編元應昌路答爾海子在潢水源西北百餘里今曰達里泊〉 迤東北行又北起阿爾噶靈圖山又北經察罕城之西折而東經察罕城之北迤東北行為海喇哈山又東北為哈祿那太山迤西北行折而東為蘇克蘇魯山又東為奇勒巴爾罕山折而南為拉馬依馬哈拉嶺迤東南為盔騰嶺又東南為几爾有兒山至此入科爾沁界 〈 其由奇勒巴爾罕山北出之幹即北起索岳爾濟山迤東北行起內興安嶺之榦脈也長白山與內興安嶺之分支各出即由奇勒巴爾罕山而分〉 又東南經大布蘇圖泊之東經西訥郭特爾站達賴哈克站之間迤東南行六七百里夷為平岡土阜經奉天昌圖廳北境東遼河之北吉林長春府之東南折而南入柳邊伊通門起勒克山 〈 自盔騰嶺迤南漸漸低平至此復起大山蓋大榦度峽往往平洋百里無蹤可尋實則界水高低仍自分明第人多不察耳〉 西南行百餘里迤東南入圍場 〈 從此東分一支為吉林省治之榦〉 又南為岱揚阿登山經胖色城西 〈 從此西分一支為奉天省治之榦〉 又南為戈爾敏朱敦嶺折而東為伊爾哈牙範山 〈 山南水入鴨淥江山北水入松花江〉 迤東北為黑林嶺 〈 即依爾哈牙範山之連嶂〉 又東折而南為斐得里山又東即長白山 〈 圖們江出其東麓東流鴨淥江出其南麓西流松花江出其北麓北流一在嶺北一在嶺南一在嶺東各自為源不相通貫諸書多謂同出一源甚誤〉 北出者為正脈東出者為支南出者為尾盡於朝鮮海所謂餘氣也
〈 近人合肥徐曦東三省紀略謂內興安嶺山脈南渡松花江蟠結於吉林奉天兩省之間為長白山脈更由遼東半島渡直隸海峽至登州起陸西走而結太山其言山脈渡江之處則指松花江與黑龍江之會口其脈伏於松花江底而南與長白山脈之完達山相連徐氏此言殊為失理按其所謂完達山脈實長白山東出之支介居烏蘇里江牡丹江二水之間指為長白來脈失之顛倒至由登州起陸為太山之說蓋不始於徐氏惟徐氏既有渡江之臆說故不疑渡海之誤言考渡海之說實因求太山來脈不得故疑為渡海而來不知古昔黃河本自析津入海太山之脈來自嵩山亦是穿平原而渡峽後世溝洫四通黃河南徙太山之脈乃為河流隔斷桂未谷嘗論及之惜尚未盡得其故詳余所著太山來脈考中明乎此則山脈穿江越海之說可以決知其不然矣〉
①대청산(大青山) : 옛날에 도탑령(倒塌嶺), 합랄올나(哈剌兀那)라고 하며 명나라, 청나라 때 합랑올(哈朗兀), 객랑오(喀朗烏), 막객라(漠喀喇)들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음산산맥(陰山山脈)의 중간 부분으로 협의의 음산(陰山)이라 하고 몽고어로 ‘막객라(漠喀喇)’는 바로 ‘흑산(黑山)’이라 한다.
만국통감(萬國通鑑)에서
* 위 그림은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서 내려받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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