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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肅愼)

동북쪽 숙신(肅慎) 지리 자료 2

by 쥐눈이 2024. 6. 6.

*춘추(春秋) 소공전(昭公傳)에 기록된 숙신에 대한 자료들

1. 오례통고(五禮通考) 207:

흠정의소(欽定義疏)에 내수(淶水)는 바로 거마하(拒馬河)이다. 발원은 직예(直𨽻) 이주(易州, 하북성 이현) 광창현(廣昌縣)에서 나와 자형관(紫荆闗)으로 흘러 들어가 이주(易州) 서북 경계를 지나서 방산현(房山縣) 땅에 이르러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동쪽으로 탁주(涿州)로 흘러 고안현(固安縣) 동남쪽을 지나 상건하(桑乾河)로 들어간다. 다른 하나는 남쪽으로 내산현(淶山縣)으로 흘러가 정흥(定興) 신성(新城)을 거쳐 백구하(白溝河)로 들어간다.

이수(易水)는 이주(易州) 남쪽 30리에 있다. 발원은 이주(易州) 관중곡(寛中谷)에서 나와 흘러 정흥현(定興縣) 북하촌(北河村)에 이르러서 거마하(拒馬河)와 만나 백구하(白溝河)로 들어간다.

지리통석(地理通釋)()나라 구주(九州)는 양(), (), (), (), (), (), (), (), ()이다.” 하였다. 정씨(鄭氏) ()(), (), () (), (), ()는 우공(禹貢)에서 나온 주()와 얼추 같다. 청주(青州)는 서주(徐州) 땅이고 유주(幽州)는 청(), ()의 북쪽이다. 주나라에는 서(), (梁州)가 없다.

진지리지(晉地理志)에서 성왕(成王) 때에 우공(禹貢)을 고쳐 지어 서()와 양주(梁州)를 청(), 옹주(雍州)로 들이고 기()의 분야를 유()와 병()으로 나누었다.” 하였다.

왕씨(王氏)구주(九州)의 차례는 우공(禹貢, 상나라 때 치수 사업과 사방 겨레들이 공물을 들인 기록서)에서는 기()로 시작하고 다음은 연()으로 하여서 옹주(雍州)로 마감한다(곧 시계 방향). 직방씨(職方氏,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주례에 한 편명)는 양()에서 시작하여 다음은 형주()이고 병주(并州)로 마감하는 것은, 대체로 우공(禹貢)에서 말한 치수(治水)의 순서이다. 주나라 직방(職方)은 지역의 원근(逺近)에 따른 순서로 말한 것이다. 치수(治水)는 제()의 도읍지로부터 시작하고 나서 물의 성질을 좇아 편리한 데로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갔다. 따라서 연주(兖州)로부터 밟아나가 옹주(雍州)에 이르러 그친 것이다. 지역의 원근으로써 말하자면 주()나라의 영향력이 북쪽에서부터 하여 남쪽으로 멀리 갔기 때문에 주나라 왕실의 교화를 노래한 관저(闗睢)와 작소(鵲巢)의 시, 곧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이라는 이남(二南)으로 나뉘었다. 한광(漢廣) 역시 문왕(文王)의 도가 남국(南國)에까지 입혀졌음을 말하니 덕의 교화가 미친 곳이 멀리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주나라의 영향력이 처음에 양주(揚州)에서 시작되었다면 양주(揚州)는 주나라 동남쪽에 있었고 다음이 형주(荆州)였다면 형주(荆州)는 정남(正南) 쪽에 있었으며 병(并州)에서 마감이 되었다면 병주(并州)는 주나라 정북(正北)에 있었으니 먼저 먼 곳에서 파급되고 뒤에 가까운 지역으로 파급된 것이다.” 하였다.

좌전(左傳)에 왕이 첨환백(詹桓伯)을 사신으로 보내 진()나라에 말을 전하기를 나의 주나라는 하()나라 때 후직(后稷)이 세운 공로로 땅을 받아 위(), (), (), (), () 땅이 나의 서쪽 땅이었다.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이길 무렵 포고(蒲姑, 산동 박흥현(博興縣) 일대)와 상엄(商奄, 산동성 곡부 일대)은 내 동쪽 땅이었고 파(), (), (), ()은 내 남쪽의 땅이었다. 숙신(肅慎)과 연(), ()은 내 북쪽 땅이었다.”라 하였다.

그러나 한서(漢書) 가연지전(賈捐之傳)에서 이 시대 땅의 크기를 덜어내면서 말하기를 무정(武丁)과 성왕(成王)은 각각 은()나라와 주()나라의 큰 어진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땅은 동쪽으로 강(), ()을 넘지 못하였고 서쪽으로는 저강(氐羗) 땅을 넘지 못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만형(蠻荆)을 넘지 못하였고 쪽으로는 삭방(朔方) 땅을 넘지 못하였다.” 하였다.

두예(杜預) : 강국(江國)은 여남(汝南) 안양현(安陽縣)(지금 하남 정양현(正陽縣)에 있고 황국(黄國)은 지금 익양현(弋陽縣)이다) 杜預曰 江國在汝南安陽縣 黄國今弋陽縣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 45권 소() 9: ()는 하동(河東)의 하북현(河北縣)이다. ()는 풍익(馮翊, 섬서 한성(韓城) 일대) 임진현(臨晉縣) 예향(芮鄉)이 이것이다. ()은 경조(京兆) 장안현(長安縣) 서북에 있다. ()는 무공(武功)에 있다. ()는 미양(美陽)에 있다. 지금 이 땅들을 살펴보면 예()는 위()의 서남쪽 백여 리에 있을 뿐이다. ()는 태()의 서북에 있는데 백 리의 거리 차이도 없는 것이다. 春秋左傳正義 卷四十五昭九年盡十二年 : 河東河北縣也,馮翊臨晉縣芮鄉是也畢在京兆長安縣西北駘在武功岐在美陽今案其地,芮在魏之西南百餘里耳岐在駘之西北,無百里也。〕

五禮通考卷二百七 欽定義疏淶水即拒馬河發源直𨽻易州廣昌縣流入紫荆闗過易州西北界至房山縣境分為二支一東流涿州經固安縣東南入桑乾河一南流淶山縣經定興新城入白溝河易水在易州南三十里發源易州寛中谷流至定興縣北河村合拒馬河入白溝河地理通釋周九州揚荆豫青兖雍幽冀并鄭氏注揚荆豫兖雍冀與禹貢略同青州則徐州地也幽州則青冀之北也無徐梁晉地理志云成王時改作禹貢徐梁入于青雍冀野析于幽并王氏云九州之序禹貢始於冀次以兖而終於雍職方氏則始於揚次以荆而終於并者蓋禹貢言治水之序也職方言逺近之序也治水則自帝都而始然後順水性所便自下而上故由兖至雍而止也以逺近言之則周之化自北而南為逺故闗睢鵲巢之詩分為二南漢廣亦言文王之道被于南國德化之所及以逺為至也始於揚則以揚在東南次以荆則以荆在正南終于并州以并在正北先逺而後近也左傳王使詹桓伯辭於晉曰我自夏以后稷魏駘芮岐畢我西土也及武王克商蒲姑商奄吾東土也巴濮楚鄧吾南土也肅慎燕亳吾北土也漢賈捐之曰武丁成王殷周之大仁也然地東不過江黄西不過氐羗南不過蠻荆北不過朔方

 

2. 춘추지리고실(春秋地理考實) 3 :   

소공전(昭公傳)에 나타난 기록 :

숙신(肅慎), (), ()

() : 숙신(肅慎)과 연()과 박()은 우리 북쪽의 땅이다. 두주(杜注) : 숙신(肅慎)은 현토(𤣥莵) 북쪽 삼천여 리에 있다.

() : 토지명(土地名)에서 ()은 지금에 계현(薊縣, 천진시 계주구)이다. ()은 작은 나라라 기록들이 빠져 있어서 어느 곳에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였다. 대개 연() 땅과 서로 가까울 것이리니 역시나 중원(中國) 땅 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숙신(肅慎) 만은 멀리에 있는 이()이다. 춘추전설휘찬(春秋傳說彚纂)에서 위소(韋昭)숙신(肅慎)은 부여(扶餘)와 거리가 천 리이다.” 하고 공소(孔疏)에서 현토(𤣥莵)는 요동(遼東) 북쪽에 있으니 금()나라 때 상경(上京) 회령부(㑹寧府)였고 지금은 성경(盛京)에 속해 있다. 이제 살펴보면 연()은 양공(襄公) 28(기원전 545)에 보이는데 박()은 살필 자료가 없다.” 하였다.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 영공(寧公)이 박()과 전투를 벌였는데 박왕(亳王)이 융() 땅으로 달아났다.” 하였다. 황보밀(皇甫謐)서융(西戎)의 나라이다. 대략 지금 섬서(陜西) 북쪽 지경에 있다.”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박()을 가리킬 때 이는 대체로 서주(西周)의 북쪽 땅이다.” 말하니 우선 하나의 이론을 갖추어 놓았다.

春秋地理考實 卷三 : 肅慎燕亳傳肅慎燕亳吾北土也杜注肅慎在𤣥莵北三千餘里疏土地名云燕今薊縣也亳是小國闕不知所在蓋與燕相近亦是中國也唯肅慎為逺夷彚纂韋昭曰肅慎去扶餘千里孔疏𤣥莵在遼東北金為上京㑹寧府今屬盛京今按燕見襄二十八年亳無考史記秦本紀寧公與亳戰亳王奔戎皇甫謐曰西戎之國也(約在今陜西北境)或謂亳指此蓋西周之北土也姑備一説

 

3.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 6: 

찬주형세고(撰周形埶攷) :

좌씨전(左氏傳) : 경왕(景王)이 첨환백(詹桓伯)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꾸짖기를 우리 주()나라는 하()나라 후직(后稷) 때부터 위()와 태()와 예()와 기()와 필()이 우리의 서쪽 땅이었다.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이겼을 때 포고(蒲姑)와 상엄(商奄)은 우리의 동쪽 땅이었고 파()와 복()과 초()와 등()은 우리의 남쪽 땅이며 숙신(肅慎)과 연()과 박()은 우리의 북쪽 땅이었다. 우리의 영역이 사해에 닿아있는데 어찌 가까운 곳을 강토의 경계로 정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두씨(杜氏) : ()나라 때 후직(后稷)이 공을 세워 다섯 나라를 받고서 서쪽 땅(西土)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는 섬주(陜州, 하남성 삼문협시 일대) 예성현(芮城縣)이니 본디 위국(魏國) 땅이었다. () 환공(桓公) 예백만(芮伯萬)이 나가서 위() 땅에서 지냈다.”는 것이 바로 이 땅이다. ... 숙신(肅慎)은 북이(北夷)로 현토(𤣥菟) 북쪽 3천여 리에 있다. 통전(通典)읍루(挹婁)는 옛 숙신(肅慎)의 나라이니 불함산(不咸山) 북쪽, 부여(夫餘) 동북 천여 리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가에 두고 있다. 물길(勿吉)은 고구려 북쪽에 있으니 이 역시 옛 숙신국(肅慎國)의 땅이다. 말갈(靺鞨)은 바로 물길(勿吉)이다. ()은 탁록산(涿鹿山) 남쪽에 있으니 주나라 소공(召公)이 봉토로 받은 곳으로 유주(幽州) 계현(薊縣) 북쪽에 도읍을 하였다. 연백관(燕伯欵)이 비로소 춘추(春秋) 시대에 보인다. ()은 진기(秦紀)에 영공(寧公)이 박()과 더불어 전투를 벌였다 하였는데 황보밀(皇甫謐)서이(西夷)의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이 땅의 박()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通鑑地理通釋卷六  王應麟 : 撰周形埶攷 左氏傳景王使詹桓伯辭於晉曰我自夏以后稷魏駘芮岐畢吾西土也及武王克商蒲姑商奄吾東土也巴濮楚鄧吾南土也肅慎燕亳吾北土也吾何邇封之有杜氏曰夏世以后稷功受五國為西土之長 魏陜州芮城縣本魏國地魯桓公時芮伯萬出居于魏即此地 ...肅慎北夷在𤣥菟北三千餘里通典挹婁即古肅慎之國在不咸山北夫餘東北千餘里濵大海勿吉在髙句麗北亦古肅慎國地靺鞨即勿吉也 燕在涿鹿山南召公所封都幽州薊縣北燕伯欵始見春秋 亳秦紀寧公與亳戰皇甫謐云西夷之國此土之亳未詳

 

4. 춘추지명고략(春秋地名攷畧) 14: 

숙신(肅慎) 소공(昭公) 9년 왕이 담환백(詹桓伯)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말을 전하기를 숙신(肅慎)과 연()과 박()은 우리의 북쪽 땅이다.’”이란 말이 나온다. 두예(杜預) 주에 숙신(肅慎)은 현토(𤣥菟) 북쪽 3천여 리에 있다.” 하였다. 내가 삼가 살펴보니 국어(國語)중니(仲尼)가 진()나라에 있을 때 ...서경(書經) ()성왕(成王) 때에 식신(息慎)이 와서 축하하였을 때 왕이 영백(榮伯)을 시켜 식신(息慎)에 선물을 내리는 명을 하게 하였으니 곧 숙신(肅慎)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위소(韋昭)가 숙신(肅慎)은 부여(扶餘)와 거리가 천 리이다.” 하니 공소(孔疏)에서 현토(𤣥菟)는 요() 동북쪽에 있으니 금나라의 상경(上京) 회령부(㑹寧府) 땅이다. 지금 흥경(興京)에 소속된 곳이다.” 하였다.〉 () 공소(孔疏)에서 ()은 마땅히 연()에 가까이에 있는 작은 나라일 것이다.” 하였다. 황보밀(皇甫謐)서이(西夷)의 나라이다. 대략 지금에 섬서(陜西) 북쪽 언저리일 것이다.” 하였다.

春秋地名攷畧卷十四 : 肅慎昭九年王使詹桓伯辭于晉曰肅慎燕亳吾北土也杜註肅慎在𤣥菟北三千餘里 臣謹按國語仲尼在陳有隼集于陳侯之庭而死楛矢貫之石砮其長尺有咫陳惠公使問仲尼仲尼曰隼之來逺矣此肅慎氏之貢矢也昔武王克商肅慎氏貢楛矢石砮其長尺有咫先王欲昭全徳之致逺也銘其楛曰肅慎氏之貢矢以分元女大姬配胡公而封諸陳君若使有司求諸故府其可得也使求得諸金櫝如之書序成王時息慎來賀王使榮伯賜息慎之命即肅慎也韋昭曰肅慎去扶餘千里孔疏𤣥菟在遼東北金為上京㑹寧府地今為興京所屬地〉 見上 孔疏曰亳當是近燕小國皇甫謐曰西夷之國約在今陜西北境

 

5. 춘추지소록(春秋識小録) 6:

()   ()은 송()나라 땅이었다. 춘추에 () 장공(莊公) 12(기원전 682) 송만(宋萬)의 난에 공자(公子) 어열(御說)이 박() 땅으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으로 적어도 통한다. 희공(僖公) 21년 초()가 송공(宋公)을 구속하였는데 제후(諸侯)들이 박()에 모여서 송공을 풀어주게 하였다.〉   

()은 정()나라 땅이었다. 춘추에 양공(襄公) 11(기원전 562) () 땅에서 동맹을 맺었다.”라는 기록이 있다.(*상나라와 관련한 박() 땅은 세 군데로 남박(南亳), 북박(北亳), 서박(西亳)이다)

()은 나라 이름이다. 춘추에 소공(昭公) 9(533) 숙신(肅慎), (), ()은 나의 북쪽 땅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석례에서 ()은 대체로 연() 땅과 서로 가깝다.” 하였다. 사기(史記)를 살펴보면 () 영공(寧公)이 박()과 더불어 전쟁을 벌였는데 박왕(亳王)이 융()으로 달아났다.” 하니 색은(索隱)서융(西戎)의 임금()에 대한 호칭이 박왕(亳王)이니 아마도 이른바 연박(燕亳)의 박() 나라는 북쪽에서 살다가 서쪽으로 옮겨간 것이 사실에 가깝지 않겠는가?

春秋識小録 (四庫全書本)/6   宋地莊十二年宋萬之亂公子御說奔亳通作薄僖二十一年楚執宋公諸侯㑹于薄以釋之〉   鄭地襄十一年同盟于亳   國名昭九年肅慎燕亳吾北土也釋例謂亳盖與燕相近按史記秦寧公與亳戰亳王奔戎索隱曰西戎之君號曰亳王豈即所謂燕亳之亳自北而徙于西者與

 

6. 춘추지리고실(春秋地理考實) 3:

(), (), (), (), ()

() : (), (), (), (), ()은 나의 서쪽 땅이다. 두예 주(杜注) : ()는 시평(始平) 무공현(武功縣, 지금 섬서성 함양시 일대)에 있다. 다스린 곳은 이성(釐城)이다. ()는 부풍(扶風) 미양현(美陽縣) 서북에 있다. 휘찬(彚纂)에서 지금 무공현(武功縣)은 서안부(西安府) 건주(乾州)에 소속되었으니 옛 이성(古釐城)이 현()의 남쪽 8()에 있다. ()나라에서 이곳에 태성역(邰城驛)을 두었다고 하였다. 지금 살펴보면 태()는 바로 후직(后稷)이 처음으로 강역으로 삼은 태()의 땅이다. 건주(乾州)는 지금 섬서(陜西)에 직예(直𨽻)로써 무공(武功)이 여기에 소속되어 있다. 지금 봉상부(鳳翔府)에 기산현(岐山縣)이 있다. (), ()는 춘추 환공(桓公) 3년에 보인다. ()은 희공(僖公) 24(기원전 636)에 보인다.

포고(蒲姑), 상엄(商奄)

() : 포고(蒲姑, 또는 박고(亳姑)), 상엄(商奄)은 나의 동쪽 땅이다. 두예 주(杜注) : 낙안(樂安) 전창현(傳昌縣) 북쪽에 포고성(蒲姑城, 지금 산동성 박흥현 일대)이 있다. 휘찬(彚纂)사기(史記)에는 박고(薄姑)라고 써 있다. 지금 청주부(青州府) 박흥현(博興縣) 동남 15()에 박고 옛성(薄姑故城)이 있다. 살펴보면 상암(商奄)은 정공(定公) 4(기원전 506)에 보인다.

(), (), (), ()

() : (), (), (), ()은 나의 남쪽 땅이다. () : 토지명(土地名)에서 ()는 파군(巴郡) 강주현(江州縣, 사천성 중경 일대)이다. ()는 남군(南郡) 강릉현(江陵縣, 호북성 형주)이다. ()은 의양(義陽) 등현(鄧縣, 하남성 등현)이다. 건녕군(建寧郡, 지금 운남성 일대) 남쪽에 복이(濮夷) 땅이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파(), (), ()은 중하(中夏)의 땅이고 복()은 먼 곳에 사는 이(逺夷)이다. 이제 살펴보면 파()는 환공(桓公) 9(기원전 703)에 보인다. ()은 강(, 장강)과 한(, 한수) 사이에 복이(濮夷)이니 문공(文公) 16(기원전 611)과 소공(昭公) 19(기원전 523)에 보인다. ()는 환공(桓公) 2(기원전 732)에 보이고 등()은 환공(桓公) 7년에 보인다.

숙신(肅慎), (), ()

() : 숙신(肅慎), (), ()은 나의 북쪽 땅이다. 두예 주(杜注) : 숙신(肅慎)은 현토(𤣥莵) 북쪽 3천여 리()에 있다. () : 토지명(土地名)에서 ()은 지금 계현(薊縣)이다. ()은 작은 나라이라 그 기록이 빠져 어디에 있는 곳인지 알지 못한다. 대체로 연() 땅과 서로 가까울 것이고 역시 중원 땅(中國)이리라. 숙신(肅慎)만은 먼 곳에 이(逺夷) 겨레이다. 휘찬(彚纂) : 위소(韋昭)숙신(肅慎)은 부여(扶餘)와 거리가 1천 리이다.” 하였고 공소(孔疏)에서 현토(𤣥莵)는 요동(遼東) 북쪽에 있다.” 하였다. ()나라 때 상경(上京) 회령부(㑹寧府)가 된다. 지금 성경(盛京) 지방에 소속되었다. 이제 살펴보면 연()은 양공(襄公) 28(기원전 545)에 보이고 박()은 상고할만한 자료가 없다.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영공(寧公, 재위 기간 기원전 715-704)이 박()과 전쟁을 벌였는데 박왕(亳王)이 융() 땅으로 달아났다.” 하였다. 황보밀(皇甫謐)서융(西戎)의 나라이다.”하고 어떤 이는 ()은 이를 가리켜 대체로 서주(西周)의 북쪽 땅이다.” 하였다. 우선 하나의 주장들을 갖추어 놓는다. (*기원전 714년 진 영공 때 서신읍(西新邑)에서 평양(平陽)으로 옮겨 살았으니 지금 서안의 서쪽 섬서성(陝西省) 진창구(陳倉區)이다.)

春秋地理考實 (四庫全書本)/3 魏駘芮岐畢傳魏駘芮岐畢吾西土也杜注駘在始平武功縣所治釐城岐在扶風美陽縣西北彚纂今武功縣屬西安府乾州古釐城在縣南八里明置邰城驛于此今按駘即后稷始封于邰之地乾州今直𨽻陜西武功屬之今鳳翔府有岐山縣魏芮見桓三年畢見僖二十四年蒲姑商奄傳蒲姑商奄吾東土也杜注樂安傳昌縣北有蒲姑城彚纂史記作薄姑今青州府博興縣東南十五里有薄姑故城今按商奄見定四年巴濮楚鄧傳巴濮楚鄧吾南土也疏土地名云巴巴郡江州縣也楚南郡江陵縣也鄧義陽鄧縣也建寧郡南有濮夷地然則巴楚鄧中夏之地濮為逺夷耳今按巴見桓九年濮為江漢間之濮夷見文十 六年及昭十九年楚見桓二年鄧見桓七年肅慎燕亳傳肅慎燕亳吾北土也杜注肅慎在𤣥莵北三千餘里疏土地名云燕今薊縣也亳是小國闕不知所在蓋與燕相近亦是中國也唯肅慎為逺夷彚纂韋昭曰肅慎去扶餘千里孔疏𤣥莵在遼東北金為上京㑹寧府今屬盛京今按燕見襄二十八年亳無考史記秦本紀寧公與亳戰亳王奔戎皇甫謐曰西戎之國也或謂亳指此蓋西周之北土也姑備一説

 

7. 춘추분기(春秋分記) 90:

숙신(肅慎) : 북이(北夷)이다. 발해(渤海)의 국도(國都) 30()에 있다.

소공전(昭公傳) 9년 주()나라 왕경왕(景王)이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말씀하기를 숙신(肅慎)과 연()과 박()은 나의 북쪽 땅이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하기를 내가 책을 읽다가 숙신(肅慎)이 와서 축하하였다라는 내용을 읽게 되면 마음에 어떤 감정이 든다. 성왕(成王)이 동쪽으로 회이(淮夷)를 쳤으니 일찍이 숙신씨(肅慎氏)에 대해서 성왕이 능히 숙신이 와서 축하하게 한 데에 이른 것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선왕(先王)은 덕으로써 멀고 먼 땅에 사람들을 품고 그들 중에 반란하는 자가 있게 되면 먼저 글월로써 알리고 그 다음에 위엄으로써 꾸짖지만, 여전히 복종하지 않는 일이 있게 되면 군대를 행군시켜 정벌하여 쳐서 그들을 바로잡았다. 죄가 큰 경우에는 더러는 멸망에 이르게 된다. 대개 덕()으로써 그들의 어진 마음을 일으키고, 위엄으로써 그들의 억세고 거스르는 행동을 꺾었다. 따라서 위엄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복종하고 덕을 그리워한 자들은 중원 땅으로 왔다. () 성왕(成王)이 동쪽으로 회이(淮夷)를 쳤고 마침내 엄국(奄國)을 짓밟고서 그 임금을 포고(蒲姑) 땅으로 옮겼다. 위엄이 역시 분노로 번져졌다. 숙신씨는 성왕의 덕을 그리워하여 왔고 그렇다면 그들이 억지로 이르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숙신(肅慎)은 나라이니 멀리 동북쪽에 있다. 그들에 대한 일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춘추 좌전에 경왕(景王) 말한 숙신(肅慎), (), ()은 나의 북쪽 땅이다.”라는 말이 실려있다. 그렇다면 숙신(肅慎)이 대대로 주()나라 왕실에 복종하였다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 세상에 도()가 있으면 사이(四夷)가 천자를 지킨다. 선왕(先王)이 덕()으로써 멀고 먼 나라들을 품으면 먼데 사람들이 무슨 천자의 권능을 넘보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왕도 정치에 대한 자취가 그치면 융적(戎狄)에 대한 근심이 열리게 된다. 따라서 춘추(春秋)에서 난세(亂世)를 다스리고 세상을 바름으로 돌이키니 안으로는 제(), ()이 기뻐하고 밖으로는 오(), ()가 따라왔다. 그 훈계를 엄격히 한 까닭이다.

春秋分記卷九十

肅慎  北夷也在渤海國都三十里

昭公傳九年周王景王使辭於晉曰肅慎燕亳吾北土也論曰余讀書至肅慎來賀而有感焉成王東伐淮夷曽何與於肅慎氏而能格其來賀乎先王以徳懷要荒其有叛亂者則先以文告次以威讓而猶有不服焉則行征誅以正之罪之大者或至於遷滅蓋徳以起其仁心威以折其彊很故畏威者服懐徳者來周成王東伐淮夷遂踐奄遷其君於蒲姑威亦怒矣肅慎氏懷其德以來則非有所彊而致也肅慎為國逺在東北其事莫得而詳傳載景王之辭曰肅慎燕亳吾北土也則肅慎之世服於周室於是見矣嗚呼天下有道守在四夷先王以徳懷要荒則逺人安有覬覦之心王者之跡熄而戎狄之患啟故春秋撥亂世反之正則内齊晉而外呉楚所以嚴其訓也

 

8. 상서비전(尚書埤傳) 부록(附録) :

상서() () : 성왕(成王)이 동이(東夷)를 치고 나니 숙신(肅慎)이 와서 축하하였다. 성왕이 영백(榮伯)을 시켜 숙신(肅慎)에게 선물을 내리는 명을 짓게 하였다.

공전(孔傳) : 해동(海東)에 여러 이()는 구려(駒麗), 부여(扶餘), 한맥(豻貊) 따위이다.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이기고 다른 나라들과 길이 모두 통하였다. 성왕(成王)이 정치에 나섰는데 배반하자 성왕이 이들을 치니 복종하였다. 따라서 숙신씨(肅慎氏)가 와서 축하하였다. ()은 같은 성()의 제후(諸侯)로 경대부(卿大夫)가 되었다. 성왕이 이를 시켜 조정에 와서 축하한 숙신(肅慎)에게 폐물을 내린다는 명서(命書, 조서)를 짓게 하였다.

() : 한서(漢書)에는 고구려(髙駒驪)’, ‘부여(扶餘)’, ‘()’은 나와 있는데 이 ()’은 기록된 것이 없다. ()은 바로 저 한()이다. 소동파 전(蘇傳)에서 동이(東夷)는 바로 회이(淮夷)이다. ()나라 때에는 동()쪽에 있었다.” 하니 내가 생각하기에 자첨(子瞻, 소동파)이 말한 것이 이것이다.

()나라 공씨(孔氏)는 동이(東夷)을 동해(海東)에 여러 이(諸夷)라고 여겼으니 크게 그릇되었다. 하은주라는 삼대(三代) 시절에 어찌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여 바다를 넘어서까지 멀리 외이(外夷) 정벌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 무제(武帝)의 민()과 월()에 대한 정벌이나 수() 양제(煬帝), () 태종(太宗)이 몸소 고려(髙麗)를 정벌한 것은, 저 성왕이 동이를 정벌했다는 말에서부터 그 사단을 열지 않았다고는 결코 말을 못 할 것이다. 동이(東夷)가 성왕(成王)을 배반하였을 때 역사책에 전해진 것에(史傳) 고찰해볼 수 있는 아무 분명한 글귀도 없다. 동이(東夷)가 복종하고서야 숙신(肅慎)이 주나라 조정까지 왔다는 것은 더욱이 믿기 어려운 일에 속한다.

좌전(左傳)숙신(肅慎), (), ()은 나의 북쪽 땅이다.” 하였고 두예 주(杜預注)숙신(肅慎)는 북이(北夷)이고 현토(𤣥莵) 북쪽 3천여 리()에 산다. 성왕(成王)이 회이(淮夷)를 치고 경사(京師)로 돌아왔을 때 마침 숙신(肅慎)이 와서 축하하였지 본래 두 가지 일이 순서를 따라서 특별히 관련이 있어 말한 것이 아닐 따름이다. 축하()란 중원 땅(中國)에 정치가 안정됨을 축하한 것이다. 시경()에서 사방(四方)에 민족들이 와서 축하한다.”라 읊었으니 어찌 반드시 이() 겨레가 복종을 한 이유로 비로소 주나라 조정에 이르렀겠는가? 숙신(肅慎)이 와서 축하함은 입조(入朝)하여 호시(楛矢)와 돌촉(石砮)을 바친 것과 같은, 이것이다.

尚書埤傳 (四庫全書本)/附録 序成王既伐東夷肅慎來賀王俾榮伯作賄肅慎之命次周官後孔傳海東諸夷駒麗扶餘豻貊之屬武王克商皆通道焉成王即政而叛王伐而服之故肅慎氏來賀榮同姓諸侯為卿大夫王使之為命書以幣賄賜肅慎之來賀  疏云漢書有髙駒驪扶餘韓無此豻豻即彼韓也蘇傳東夷即淮夷也在周為東愚謂子瞻説是也漢孔氏以東夷為海東諸夷大非三代之時豈有勞師越海逺征外夷者哉漢武帝之伐閩越隋煬帝唐太宗之親征髙麗未必不自斯言啓之也東夷叛于成王時史傳無明文可考東夷服而肅慎來尤屬難信左傳肅慎燕亳吾北土也杜預注肅慎北夷在𤣥莵北三千餘里成王伐淮夷歸京師時適肅慎來賀本非相因序特牽連言之耳賀者賀中國治安詩云四方來賀豈必因服夷始至哉肅慎來賀如入貢楛矢石砮是也

 

9.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 1:

()나라 가연지(賈捐之)무정(武丁)과 성왕(成王)은 각각 은()나라와 주()나라의 큰 어진 사람이다. 그러나 거느린 땅은 동쪽으로 강(), ()을 지나지 않았고 서쪽으로는 저(), ()겨레가 사는 땅을 지나지 못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만()과 형() 땅을 지나지 못하였고 북쪽으로는 삭방(朔方)을 지나지 못했다.” 하였다.

정씨(鄭氏) ()()나라 때는 서주(徐州)가 없으니 대개 그 땅은 회이(淮夷)와 서엄(徐奄)이 차지한 곳이다.” 하였다. 이씨(李氏)()나라가 옹()에 도읍하니 넓히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양()과 옹()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의 땅은 좁고 험하여서 청() 땅이 이를 한 데로 하였다.” 하였다.

通鑑地理通釋卷一 漢賈捐之曰武丁成王殷周之大仁也然地東不過江黃西不過氐羌南不過蠻荆北不過朔方鄭氏鍔曰周無徐州葢其地為淮夷徐奄所有李氏曰周都雍不可不廣故合梁雍為一徐地狹隘故青兼之

 

10. 상사(尚史) 97:

() () () () () () () 복고(濮姑) 숙신(肅慎)

() () 공안국 주(孔安國注) : 두 나라는 서촉(西蜀)에 있다.

(), () 공안국 주(孔安國注) : 두 나라는 파촉(巴蜀)에 있다.

() 공안국 주(孔安國注) 서북에 있다.

() 공안국 주(孔安國注) : () ()의 남쪽에 있다. 두예 주(杜預注) : 건녕 군(建寜郡) 남쪽에 복이(濮夷)가 있다.

이들 나라 모두는 사방에 작은 나라들이다.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칠 때 용(), (), (), (), (), (), (), 복인(濮人)들과 목야(牧野)에 이르러 목서(牧誓)를 지었다.상서(尚書)

()은 상용(上庸, 지금 호북성 죽산현 일대)이고 노()는 노융(盧戎, 지금 호북 일대와 섬서 금강(金康) 일대)이니 아울러 따로 나타내었다. ()은 영 성(嬴姓)이다. 강성 주(康成注) : 회이(淮夷)의 북쪽에 있다. 괄지지(括地志) : 연주(兖洲) 곡부현(曲阜縣) 엄지(奄至)는 바로 엄국(奄國) 땅이다.포고(蒲姑) 한지(漢志) : 낭야(琅琊) 고막(姑幕)에 있다. 두예 주(杜預注) : 낙안(樂安) 박창현(博昌縣) 북쪽에 포고성(蒲姑城)이 있다.숙신(肅慎) 두예 주(杜預注) : 현토(𤣥莵) 북쪽 3천 리()에 있다.아울러 이국(夷國)이다. 성왕(成王) 때 회이(淮夷)와 엄()이 반란을 일으키자 성왕(成王)이 동쪽으로 회이를 치고 엄()을 짓밟고서 암박고(奄薄姑)를 지었다.

박고(薄姑)는 곧 포고(蒲姑)이다. 사기를 살펴보면 성왕(成王)이 엄()나라를 잔인하게 짓밟고서 그 임금을 박고(薄姑) 땅으로 옮기게 하였으니 이 박고(薄姑)가 엄()의 임금이 뒤에 옮겨 산 땅이 된다.

성왕(成王)이 동이(東夷, 곧 회이(淮夷))를 치고 나서 숙신(肅慎)이 와서 축하하였다. 성왕이 영백(榮伯)에게 명을 내려 숙신에게 선물을 내리는 명을 짓게 하였다. 서경 서(書序)

좌전(左傳)에 경왕(景王)포고(蒲姑), 상엄(商奄)은 나의 동쪽 땅이고 파(), (), (), ()은 나의 남쪽 땅이며 숙신(肅慎), (), ()은 나의 북쪽 땅이다.”라고 하였다.

尚史卷九十七 蜀       濮姑 肅慎

蜀羗孔安國注在西蜀髳㣲孔安國注在巴蜀孔安國注在西北孔安國注在江漢之南杜預注建寜郡南有濮夷皆四方小國也武王伐商及庸蜀羗髳㣲盧彭濮人至牧野作牧誓尚書

庸上庸盧盧戎並别見奄嬴姓康成注在淮夷之北括地志兖洲曲阜縣奄至即奄國之地蒲姑漢志在琅琊姑幕杜預注樂安博昌縣北有蒲姑城肅慎杜預注𤣥莵北三十里並夷國也成王時淮夷及奄叛成王東伐殘奄作奄薄姑 薄姑即蒲姑 按史記成王殘奄遷其君薄姑是薄姑為奄君後遷之地

成王既伐東夷肅慎來賀王賜榮伯作賄肅慎之命書序左傳景王曰蒲姑商奄吾東土也巴濮楚鄧吾南土也肅慎燕亳吾北土也

 

11. 상서지리금석(尚書地理今釋) :

회이(淮夷) : 회이(淮夷)는 회수() 남북 바다에 가까운 곳에 살던 이() 겨레이다. 지금 강남(江南) 회안(淮安)과 양주(揚州, 지금 남경시 동쪽) 두 부()가 바다에 가까운 땅이니 모en 이들이다.

() : () ()으로도 쓴다공전(孔傳) “() 임금이 다스리던 근교 30리에 땅을 목()이라 이름한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 “지금 위주성(衛州城, 지금 하남성 기현과 위휘시 일대)이 바로 은()나라 목야(牧野) 땅이다. () 무왕(武王)이 주()를 치고서 쌓은 것이다.” 하였다. 수경 주(水經注)포수(雹水, 곧 창수(倉水), 지금 하남 기현(淇縣)에 륜하(淪河))가 동남쪽으로 흐르다 목야(坶野)를 거친다. 조가(朝歌, 상나라 주임금의 제 2 도읍지, 지금 하남성 기현) 남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청수(清水)에 이르러 땅이 평탄하고 넓어진다. 언덕에 기대고 못()을 타고 넘어 싹 다 목야(坶野)가 된다.

살펴보면 주() 임금이 도읍한 매(, 하남성 기현) 땅은 조가(朝歌) 북쪽에 있다. ()나라 때 이곳에 위현(衛縣)을 설치하였고 당()나라 무덕(武徳, 당 고조 연호, 618626) 때 위주(衛州)의 소재지(治所)가 되었으니 바로 지금에 기현(淇縣)이다. 목야(牧野)는 마땅히 지금 기현(淇縣) 남쪽에서 비스듬히 이어지다가 급현(汲縣)에 이른다. 따라서 구역지(九域志)에서 급성(汲城) 역시 목야(牧野) 땅이다.” 하였다.

() : 두예(杜預) “지금 상용현(上庸縣, 지금 호북성 죽산현 서남쪽)이다.” 하였다. 상용(上庸) 땅에서 지금 호광(湖廣) 운양부(鄖陽府, 지금 호북성 운현, 보강현 일대) 죽산현(竹山縣)은 촉() 땅이다. 정의(正義)에서 대유(大劉, 류작(劉焯)?)는 촉()을 촉군(蜀郡)이다하였으니 지금 사천(四川) 성도부(成都府)는 강()이다. 정의(正義)에서 촉도(蜀都)를 나누어 셋으로 나누었으니 강()은 촉군 서쪽에 있어서 서촉(西蜀)’이라 한다.” 하였다. 소씨(蘇氏)선령(先零, 청해성 동부 황수(湟水) 중하류 지역으로 강() 겨레가 살던 곳), 포한(枹罕, 지금 감숙성 중부) 따위는 응당 지금 섬서(陜西), 감숙(甘肅) 서남쪽에 있으니 촉한(蜀漢)에 닿은 색외(塞外)이다.” 하였다.

(), () : 정의(正義)에서 공전(孔傳)에서 (), ()는 파촉(巴蜀)에 있는 것으로 파()는 촉()의 동쪽 치우친 곳에 있으니 한()나라 때 파군(巴郡)의 소재지는 강주현(江州縣)이었다. 강주현(江州縣)은 지금 파현(巴縣) 북쪽으로 사천(四川) 중경부(重慶府)에 속한다.

() : 옛 노융국(古盧戎國)은 지금 호광(湖廣) 양양부(襄陽府) 남장현(南漳縣) 동북 중로(中盧)의 옛 성(故城)이니 이는 문공(文公) 16(기원전 615) 좌전(左傳)에 초()가 당()을 칠 때 노() 땅으로 해서 갔다고 하였다. 두예(杜預)() 노읍(廬邑)은 지금 중려현(中廬縣, 지금 호북 양양현 일대)이다.” 하였다. 수경주(水經注)에서 면수(沔水)가 중로현(中廬縣), 동현(東縣)을 지나가니 바로 춘추(春秋) 때에 노융국(盧戎國)이다.” 하였다.

() : 정의(正義)에서 동촉(東蜀)의 서북에 있다.” 하고 소씨(蘇氏)무양현(武陽縣)에 속해 있으니 팽망(彭亡, 사천 팽산구 일대), 무양(武陽)이 있다.” 하였다. 지금 사천(四川) 미주(眉州)이니 주() 북쪽에 없어진 팽산현(廢彭山縣)에 팽망성(彭亡城)이 있으니 이곳이 그 땅이다.

() : 살펴보면 좌전(左傳) 문공(文公) 16년 용인(庸人)과 미인(麋人)이 백복(百濮)을 이끌고 초()를 쳤다고 하였는데 소()에 공안국(孔安國)이 말하기를 ()과 복()은 강한(江漢)의 남쪽에 있으니 이 복()이 서남이(西南夷)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석례(釋例)건녕군(建寧郡) 남쪽에 복이(濮夷)가 있으니 군장(君長)은 없고 각각 읍락(邑落)을 이루어서 스스로 모여 산다. 그러므로 백복(百濮, 은 최대로 큰 숫자를 상징, ‘모든’, ‘많은정도로 해석됨)이라 일컬었다.” 하였다. 건녕(建寧) 옛성(故城)은 지금 호광(湖廣, 호북과 호남을 아우른 이름) 형주부(荆州府) 석수현(石首縣)이니 복() 땅은 쉽게 말해 석수(石首)의 남쪽에 있다.

() : 엄국(奄國)은 지금 산동(山東) 연주부(兖州府) 곡부현(曲阜縣) 경계에 있다. 괄지지(括地志)연주(兖州) 곡부현(曲阜縣) 엄리(奄里)는 바로 엄국(奄國) 북쪽이다.” 하였다.

서융(徐戎) : 살펴보면 공안국 전(孔安國傳)서융(徐戎)은 서주(徐州)의 융()이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서 대서성(大徐城)은 사천(泗川, 泗水, 산동성 제녕시 일대) 서성현(徐城縣) 북쪽 30리에 있으니 옛날의 서국(徐國)이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다시 서국(徐國)을 회이(淮夷)라 하니 옳지 않다.서성현(徐城縣)은 지금 없어진 강남(江南) 봉양부(鳯陽府) 사주(泗州)이다.

尚書地理今釋

淮夷 淮夷淮南北近海之夷民今江南淮安揚州二府近海之地皆是

   一作坶孔𫝊云紂近郊三十里地名牧括地志云今衛州城即殷牧野之地周武王伐紂築也水經注云雹水東南歴坶野自朝歌以南南暨清水土地平衍據臯跨澤悉坶野矣 按紂都妹土在朝歌北隋置衛縣於此唐武徳時為衛州治即今之淇縣也牧野當在今淇縣南迤邐以至汲縣故九域志謂汲城亦牧野之地也

   杜預云今上庸縣上庸今湖廣鄖陽府竹山縣是蜀 正義云大劉以蜀是蜀郡今四川成都府是羗 正義云蜀都分為三羗其在西故云西蜀蘇氏云先零枹罕之屬當在今陜西甘肅以西南接蜀漢塞外也

  髳㣲 正義云孔𫝊髳㣲在巴蜀者巴在蜀之東偏漢之巴郡所治江州縣也江州縣今巴縣北屬四川重慶府

   古盧戎國今湖廣襄陽府南漳縣東北中盧故城是文十六年左𫝊楚伐唐自廬以往杜預云楚廬邑今中廬縣水經注云沔水過中廬縣東縣即春秋盧戎之國也

   正義云在東蜀之西北蘇氏曰屬武陽縣有彭亡武陽今四川眉州州北廢彭山縣有彭亡城是其地也

   按左𫝊文十六年庸人麋人率百濮伐楚疏孔安國云庸濮在江漢之南是濮為西南夷也釋例曰建寧郡南有濮夷無君長各以邑落自聚故稱百濮建寧故城在今湖廣荆州府石首縣其地要在石首之南也

 奄國在今山東兖州府曲阜縣境括地志云兖州曲阜縣奄里即奄國之北也

  君奭

  徐戎 按孔安國𫝊徐戎徐州之戎括地志云大徐城在泗川徐城縣北三十里古之徐國也括地志又以徐國即淮夷非是徐城縣今廢為江南鳯陽府泗州

 

12.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1:

숙신(肅慎) 두예(杜預)가 말하기를 숙신(肅慎)은 현토군(玄菟郡) 북쪽 3천여 리에 있다.” 하였다.() () 박이(亳夷)는 섬서(陜西) 북쪽 경계에 있다. 진기(秦紀)양공(寧公)이 박()과 전쟁을 벌였다.” 하니 황보밀(皇甫謐)서이(西夷)의 나라이다.” 하였다.

讀史方輿紀要/卷一

肅慎、〈杜預曰:「肅慎在玄菟郡北三千餘里」。〉,〈亳夷在陜西北境,《秦紀》:「寧公與亳戰」,皇甫謐曰:「西夷之國」。〉

 

13. 노사(路史) 28:

() : 소공(召公)이 처음으로 제후로서 이 땅에 봉해졌다. 춘추(春秋) 때의 연(), ()은 그 멀리 치우쳐 있어서 여러 사람이 중앙 권력 다툼에 치이기보다 외진 땅에서 편안히 지내며(寢丘) 이 땅에서 제후로 머물려는(留侯) 뜻을 가졌다.

() 땅이 산융(山戎)에 가까이 있어 전국 6국 시대 때 점차 어양(漁陽), 상곡(上谷), 우북평(右北平), 요동서군(遼東西郡) 땅을 설치하였다. ()나라 때 이 땅을 멸하고서 상곡군(上谷郡)으로 만들었다.

()나라 때 연국(燕國)을 세웠고 기원전 80, 소제(昭帝)가 연국(燕國)을 광양국(廣陽國) 광양군(廣陽郡)으로 하였다. () 고조(高祖) 무덕(武徳) 원년(元年, 618)에 연주(燕州)라 하였다. 지금 유주(幽州)가 계(, 연 땅, 지금 북경 일대) 땅을 다스리고 있다. 국사(國史)에서는 지금 범양현(范陽縣, 지금 북경 이남과 보정 이북 일대)이다.” 하였다.〉   

북연(北燕) : 북연은 연()을 나눈 것이니 연()의 땅이 넓어지게 되었다. 북연(北燕)의 지방관()은 남연(南燕)과 마찬가지로 길성(姞姓)이라 말하는 것이다.제비 때문에 이름을 붙였다. 내가 처음 이렇게 말하였다. 살펴보면 장채(張采)가 요()에 사신 간 기록에서 북중경(北中京) 우산관(牛山館, 하북 승덕현 일대) 북쪽으로 가면 뭇 제비가 날며 도는데 그 크기가 비둘기(鳩鴿)만 하다.그 연주(燕州)는 바로 수()나라에 요서군(遼西郡)이니 이곳에서 여러 부족이 수나라 조정에 귀의해 왔을 때(内附)에 일을 처리하였다. 자세한 것은 수()의 북번풍속기(北蕃風俗記)에 나와 있다.

() : ()도 연() 땅을 나눈 곳이다. 본래 당()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을 대곡(大谷)에 합치었다. ()나라 때 양읍(陽邑)은 지금 정주(定州)의 당현(唐縣)이다. 반지(班志)에서 ()은 연()의 제2의 읍(别邑)이다하였다. () 소공(昭公) 12(기원전 531) 때 제()의 고언(髙偃)이 북연백(北燕伯)을 양(, 또는 당(), 지금 하북성 순평현(順平縣)) 땅으로 들였다.()나라 사람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민공(閔公) 2(기원전 660)

路史巻二十八

   召公初封 春秋之燕亳以其僻逺有寢丘留侯之意地逼山戎六國時寖大置漁陽上谷右北平 遼東西郡地 秦滅之為上谷郡漢立燕國 昭帝為廣陽國廣陽郡武徳元年為燕州 今幽治薊國史云今范陽縣

北燕  燕之分燕地廣矣北燕伯云亦姞姓者以燕而名予初謂爾按張采使遼錄云北中京牛山館北去羣燕飛翔大如鳩鴿其燕州乃隋遼西郡以處諸部内附事詳隋北蕃風俗記

   燕之分本曰唐併之大谷漢之陽邑今定之唐縣班志云燕之别邑昭十二髙偃納北燕伯齊人遷之閔二年

 

14, 우공추지(禹貢錐指) 19:

서경(書經) 요전(堯典)희숙(羲叔)에게 거듭 명하여 남교(南交)에 터를 잡고 살게 하였다.” 하니 전()에서 여름과 봄이 교차할 때이니 이는 남방(南方)을 다스리는 관직이다.” 하였다. ()에서 이 관직은 이미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른 변화를 잡아내는 일을 담당하고서 역시 한 방면의 일도 주관하였다. 서경()에서 말한 남교(南交)’는 남방(南方)과 동방(東方)이 교차하는 것을 말한다. ()에서 여름과 봄이 교차함을 말하니 그 계절과 방향 모두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봄이 다한 날은 여름의 길목(立夏)의 첫 시기와 서로 만나는 것이다. 동방(東方)의 남쪽과 남방(南方)의 동쪽은 그 위치가 서로 만나는 곳이다.” 하였다. 사기(史記)에 대한 주석에서 색은(索隠)이 말을 한 공()의 주()가 옳지 않다. 그렇다고 한다면 겨울과 가을이 교차하는 것은 어찌하여 아래에 그 문장이 없는가? 게다가 동쪽 우이(嵎夷), 서쪽은 매곡(昧谷), 북쪽은 유도(幽都) 세 방위가 모두 땅을 말하였는데 여름만은 땅을 말하지 않고 급기야 봄과 더불어 교차한다고 말하니 이는 다른 계절의 예를 따르지 않음이 심한 것이다.

이제 남방(南方) 땅은 교지(交阯)라는 이름이 있다. 더러 고문(古文) 상서(尙書)에서는 대략 한 글자만 들어 땅을 이름하였는데 남교(南交)라는 것이 바로 교지(交阯)라는 것에는 의심이 없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남교(南交)는 진실로 땅을 가지고서 말한 것임이 마땅하다. 그러나 상고(上古) 시대에 땅 이름을 고찰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글자 하나가 우연히 같다고 드디어 교지(交阯)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수경(水經) 섭유수(葉榆水, 지금 운남 이하(洱河))에 대한 주()에서 상서대전(尚書大傳)에서 () 남쪽으로 교주(交阯)를 다독여서 눌렀다. 우공(禹貢) 때에는 형주(荆州) 남쪽 변경(南垂)으로 유황(幽荒)의 밖이니 따라서 월()이다.” 하였다. 주례(周禮)남쪽 팔만(八蠻)은 이마에 문신을 하고(雕題) 두 발이 서로를 향해 있고(交阯) 쌀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였다. 그러나 춘추(春秋) ()에서는 이 겨레가 보이지 않으니 중원 땅(華夏)과 교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교주(交州)는 실로 형주(荆州)의 남쪽 변경이고 양주(揚州)와 더불어 아무 관련을 맺은 일이 없었다. 그리고 유황(幽荒)의 밖에 있어서 아울러 형주(荊州)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태강지지(太康地志)에서 교주(交州)는 본디 양주(揚州)에 속하여 우()의 남쪽 끝이 된다.” 하였으니 이 말은 진실로 허망한 담론으로 믿을 수가 없다.

사기(史記)에서 사해(四海)가 모두 제순(帝舜)의 공덕을 받들었다는 말을 남쪽으로 교지(交阯) 북쪽으로 발(北發)과 식신(息慎, 곧 숙신(肅慎))을 다독여 눌렀다.”고 하니 사람들은 드디어 이 글월을 근거로 두어서 교주(交州)를 우()의 남쪽 끝이라는 증거로 하고 있다. 이는 유독 명성과 위엄 어린 교화(聲教)가 미쳐나간 곳을 말하였음을 알지 못였을 따름이다. 어쩌면 후대가 여러 겨레가 중원 땅 안으로 와서 따른 사건을 든 것이라서 다독였다()’라고 한 것이다. 색은(索隠)제순(帝舜)의 덕스러운 다독임이 사방에 이() 겨레 사람들에게 미쳤기에 그들을 다독이다()라는 말을 먼저 하였다.” 하니 이 주장이 옳다.

예맥(濊貊), 조선(朝鮮)은 북쪽으로 숙신(肅慎)과 땅이 닿아있어 숙신(肅慎)은 곧장 영주(營州)의 색외(塞外)에 있다고 한다면 옳지만, 또한 숙신이 영주(營州)의 영역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논란하는 사람들은 좌전(左傳) 소공(昭公) 9(기원전 533) 왕이 첨환백(詹桓伯)을 시켜서 진()나라에 말을 전달하기를 (), (), (), ()은 나의 남쪽 땅이고 숙신(肅慎), (), ()은 나의 북쪽 땅이다.’ 하였다. 이런 말은 역시 못 믿을 것이 아닌가?” 하니 내가 이는 한때 응대한 말로 그냥저냥 사방의 땅을 든 것에 지나지 않다. 구주(九州)의 강역을 사실로 바른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만약 이 말에 기어코 걸린다면 파(), (), (), ()은 남쪽인데도 형산(衡山)과 거리가 여전히 멀고 먼 지역인 데다가 (지금 강서와 광동 사이에) (, 大庾嶺)에 미치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영남(嶺南)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기(史記)에 북쪽으로 발(), 숙신(肅慎)을 다독였다는 기록을 헤아려 보면 그와 같지만, 남쪽으로 교지(交阯)를 다독였다는 말은 어디에 있는가! 노어(魯語)무왕(武王)이 상()나라를 이기고 마침내 구이(九夷), 팔만(八蠻)과 교류를 통하였고 숙신씨(肅慎氏)가 와서 호시(楛矢)와 돌화살촉(石砮)을 공물로 들였다. 성왕(成王) 때에 숙신(肅慎)에게 선물을 내리라는 명이 있었다.” 하였다. 아마도 주나라에 와 붙은 겨레들의 예를 들었기에 첨환백(詹桓伯)을 시켜 이 예를 들어서 제후국으로써 책임을 방기한 진()나라를 꾸짖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 역시 미처 알 수가 없다. 옛날과 지금이 일의 변화가 같지 않은데 어찌 주()의 강역이 우()의 경계라고 할 수 있겠는가?

禹貢錐指卷十九 堯典申命羲叔宅南交傳云夏與春交此治南方之官也疏云此官既主四時亦主方面經言南交謂南方與東方交傳言夏與春交見其時方皆掌之春盡之日與立夏之初時相交也東方之南南方之東位相交也史記索隠曰孔註未是然則冬與秋交何故下無其文且東嵎夷西昧谷北幽都三方皆言地而夏獨不言地乃云與春交斯不例之甚也今南方地有名交阯者或古文略舉一字名地南交則是交阯不疑也按南交固當以地言然上古之地名不可考者多矣一字偶同其可遂斷以為交阯邪水經葉榆水注云尚書大傳曰堯南撫交阯於禹貢荆州之南垂幽荒之外故越也周禮南八蠻雕題交阯有不粒食者焉春秋不見於傳不通於華夏然則交州實荆州之南垂與揚州無涉且在幽荒之外并不可謂荆域太康地志云交州本屬揚州為虞之南極真妄談不足信史記言四海咸戴帝舜之功曰南撫交阯北發息慎即肅慎遂有據此文以證交州為虞之南極者不知此特言聲教之所訖耳抑或如後世舉種内屬之類故謂之撫索隠曰帝舜之徳撫及四方夷人故先以撫之此說是也濊貊朝鮮北與肅慎接壤謂肅慎直營州之塞外則可亦不得謂在營域難者曰左傳昭九年王使詹桓伯辭於晉曰巴濮楚鄧吾南土也肅慎燕亳吾北土也斯言亦不足信乎余曰此不過一時應對泛舉四方之土非正言九州之疆界如必泥此辭則巴濮楚鄧南距衡山尚逺境且不至於嶺況嶺南乎參之史記北發肅慎則然矣安在其為南撫交阯也魯語武王克商遂通道九夷八蠻肅慎氏来貢楛矢石砮及成王時有賄肅慎之命或舉種内屬故詹桓伯舉以折晉亦未可知古今事變不同豈可以周疆為虞界哉

*주나라에 대한 적절한 지도를 찾지 못하여 우공(禹貢)에 관련된 그림을 덧붙인다.

육경도고(六經圖考)에서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위 그림들은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서 내려받은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