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권 2
부족(部族) 〈이(二)〉
읍루(挹婁) 〈또는 土+邑樓〉 3
▶ 읍루 서쪽에 있다는 철려(鐡離)에 대한 자료 :
읍루의 위치에 대한 ‘대금국지(大金國志)’ 기사 : 북쪽으로 실위(室韋)에 접해있고 서쪽으로는 발해(渤海), 철려(鐡離)를 경계로 두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를 가에 두고 있다. 삼국지(三國志)가 말한바 읍루(挹婁) 땅인 것이다. 大金國志北接室韋西界渤海鐡離東瀕海三國志所謂挹婁地也
☞ 철리(鐡離)는 황룡부 북쪽에 있다
요사습유(遼史拾遺)에 용주(龍州) 황룡부(黄龍府) 오이고성(烏爾古城) 기사에 나온 글 : 허항종 봉사행정록(許亢宗奉使行程錄, 송나라 허항종이 금나라를 방문한 1125년에 기록된 글)에서 “제 삼십삼 여정은 황룡부(黄龍府)에서 6십 리(里)를 가서 탁색패륵채(托色貝勒寨)에 이르는데 황룡부(府)는 거란(契丹)의 동채(東寨)가 된다. 거란(契丹)이 강성했을 당시에 이국(異國)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니 그렇게 되면 잡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옮겨 흩어져 살게 하였다. 남쪽에 발해(渤海)가 있고 북쪽에 철리(鐡離)와 토혼(吐渾)이 있으며 동남쪽에 고려(高麗)와 말갈(靺鞨)이 있고 동쪽에 여진(女真)과 실위(室韋)가 있으며 북쪽에 오사(烏舍)가 있고 서북쪽에 거란(契丹)과 회흘(回紇), 당항(党項)이 있으며 서남쪽에 해(奚)가 있다. 따라서 이 땅은 여러 나라의 풍속이 섞여 있는지라 무릇 여기저기에서 모인 곳은 여러 나라 사람들은 언어가 통하지 못하는 법이니 그럴 때면 각각 한어(漢語)를 써서 일을 처리하게 한, 그런 뒤에만 일에 가르마가 타질 수 있다. 방여기요(方輿紀要)에 “오이고성(烏爾古城)은 황룡부(黄龍府) 영역에 있다. 여진(女真)이 요(遼)나라에 반기를 들고 황룡부(黄龍府)를 침입하여 오이고성(烏爾古城)으로 달려가 요(遼)의 군대를 깨부셨다. 더러는 ‘달로갈성(達嚕噶城)이다’라고 한다.” 하였다.
遼史拾遺 (四庫全書本)/卷13 龍州黄龍府 烏爾古城〈補〉 許亢宗奉使行程錄曰第三十三程自黄龍府六千里至托色貝勒寨府為契丹東寨當契丹强盛時擒獲異國人則遷徙㪚處於此南有渤海北有鐡離吐渾東南有高麗靺鞨東有女真室韋北有烏舍西北有契丹回紇党項西南有奚故此地雜諸國俗凡聚㑹處諸國人語言不通則各為漢語令通事者然後能辨之 方輿紀要曰烏爾古城在黄龍府境女真叛遼侵黄龍府趣烏爾古城敗遼兵或云達嚕噶城也
☞ 요(遼)나라 금나라 때 황룡부(黄龍府, 지금 길림성 장춘시 농안성) 지도
☞ 철려(鐵驪)는 또한 철리(鐵離)와 철전(鐵甸)이라고도 쓴다. 요사(遼史) 안에서는 때로 오국부(五國部, 요나라 때 동북의 다섯 여진 부락(五國部) 곧 부아리(剖阿里), 분노리(盆奴里), 오리미(奥里米), 월리독(越里篤), 월리길(越里吉) 중에 ‘월리길(越里吉)’을 대신하여 기록하고 있다.
금사(金史) 안에서는 때때로 그 이름을 ‘철륵(鐵勒)’이라고 쓰고 있으니 모두 역사를 편찬한 사람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다. 철려(鐵驪)의 선조들은 당(唐)나라 초기에 ‘흑수말갈(黑水靺鞨) 철리부(鐵利部)’ 백성들로 뒤에 발해(渤海)로 귀의하고 복종하여 발해국(渤海國)이 철리부(鐵利府)를 설치하였었다.
간단한 소개
당조(唐朝) 중후기 때의 발해국(渤海國)에 한 철리부(鐵利(里)府)가 있었고 훗날에 요국(遼國)의 철리주(鐵利州)로 변화 발전을 이루었다. 같은 시기에 발해국(渤海國) 북방에 또 하나의 철려/리국(鐵驪(離)國)이 있었다. 금사(金史)나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鑒) 등 역사책에서 모두 “철려부(鐵驪部)”를 말하고 있으나, 자세히 연구해 보면 요사(遼史) 안에 “철려국(鐵驪國)”이 가장 미더운 것임을 믿게 되리니, 철려(鐵驪)가 나라(國)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어서 조사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역사책(근대 사람이 편집한 역사책을 포함시키지 않더라도)에 실려 있는 내용을 근거하면, 그 안에는 요사(遼史)가 있고, 그리고 거란국지(契丹國志), 고려사(高麗史)들의 책에 있는데 모두 철려(鐵驪)라는 글자 기록에는 전혀 헷갈림이 없이 똑같이 “철려국(鐵驪國)” 또는 “철리국(鐵離國)”이라고 적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결코 “철려부(鐵驪部)”나 “철려주(鐵驪州)”, “철려부(鐵驪府)” 들의 글자는 없다. 요사(遼史)을 펼치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철려국(鐵驪國)”의 여러 가지 역사 사건이다. 요사(遼史) “백관지(百官志)”와 “속국군(屬國軍)”, “속국표(屬國表)”, “기(紀)”, “지(志)” 들에 허다한 편(篇)과 장(章) 안에서 철려(鐵驪)가 요국(遼國)의 부속국(附屬國)이었음을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특히 요사(遼史) 영위지(營衛志)는 부족편(部族篇) 안에서 “부(部)”, “족(族)”, “속국(屬國)” 들에 대한 개념을 모두 십분 명확하게 해석을 하였다. 이 책은 요국(遼國)에 소속된 국내부(國內部), 국외부(國外部), 부속국(附屬國) 들에 대해 여러 차례 정치, 군사, 경제 등의 방면에서 하나하나 열거함이 일반적이지 않게 상세하다. 이런 서적들에 있어서, 우리는 그 책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부(部)”와 “나라(國)”를 서로 헛갈리지 않았을까를 의심할 이유가 없다. 철려국(鐵驪國)은 요사(遼史)가 명명백백하게 “속국(屬國)” 구성 안에 나열하고 있고 또랑또랑하게 “철려국(鐵驪國)”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다. 요(遼)나라 이백여 년의 역사 기록 안에서 철려국(鐵驪國)은 시종 고려(高麗), 일본(日本), 신라(新羅), 당항(黨項), 돌궐(突厥), 오손(烏孫) 등 뭇 많은 국가와 한가지로 종주국(宗主國) 요국(遼國)의 주재 아래에서 각종 국가 사무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같은 역사 기록의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군사 능력
요사(遼史) 병위지(兵衛志) 하(下) 속국군편(屬國軍篇) 안에 열거에 “토곡혼(吐穀渾), 철려(鐵驪), 말갈(靺鞨)……돌궐(突厥), 당항(黨項)……고려(高麗), 서하(西夏), 여직/여진(女直(真))” 등 59 속국군대(屬國軍隊)가 있다. 요사(遼史) 백관지 이(百官志 二)에 실려 있으니, 장춘로(長春路)에는 “황룡부 철려군 상온사(黃龍府鐵驪軍詳穩司)”가 있다. 이는 요국(遼國)의 국외 부족과 부속국(附屬國) 가운데에 겨우 몇 안 되는, 요(遼)나라 국내에다 설치해 둔 군대상온사(軍隊詳穩司, 감독하며 다스리는 관아(監治官衙))의 부속국(附屬國)에 하나이다. 1040년(요(遼) 중희(重熙) 9년), 여진인(女真人)이 요나라 변경을 침범하자 곧 철려국(鐵驪國)의 군대가 여진인(女真人)을 반격하여 돌아가게 한 일은 (요사(遼史) 권 18, 뒷글에 설명이 있다.) 그 군사력을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이처럼 비교적 강하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관료체제
요국(遼國)이 부속국(附屬國)이나 부족(部族)의 관직과 품급(品級) 등 관료 계통에 대해 모두 명확한 규정을 두고 있으니 요사(遼史) 백관지 2(百官志二) 북면 속군관편(北面屬國官篇) 안에는 “속국의 직명(職名) 총목:아무개 나라 대왕(大王), 아무개 나라 우월(于越, 요나라 때 최고 높은 관직), 아무개 나라 좌상(左相), 아무개 나라 우상(右相), 아무개 나라 척은(惕隱, 황족들의 정교(政敎)를 관장하던 관리), 이 역시 사도(司徒)라고도 한다……”라는 모두 16개의 직명(職名)과 직사(職司, 직무)를 열거한 내용이 있다. 또 “대부(大部)의 직명(職名)은 싹 다 속국(屬國)과 같고 여러 부(諸部)의 직명은 싹 다 부족(部族)과 같다. 여직/ 여진국(女直(真)國) 순화왕부(順化王府, 거란과 연계를 맺은 여진부족)……고려국왕부(高麗國王府), 신라국왕부(新羅國王府), 일본국왕부(日本國王府)……철리국왕부(鐵驪國王府)……” 모두 78개 “제국(諸國)”을 말하였고 그 뒤에 다시 8개 “대부(大部)”와 61개 “제부(諸部)”를 나열해 두었다. 철려국(鐵驪國) 추장 선문(仙門)이 일찍이 요국(遼國)에서 “우감문위대장군(右監門衛大將軍)”을 분명하게 수여 받았다. 요사(遼史) 내용에 따라서 알 수 있듯이 철려국(鐵驪國)과 요국(遼國)의 관계는 매우 좋은 것이어서 철려국(鐵驪國)은 요국을 2백 년 가까이 따랐으니, 이에 반드시 요국(遼國)의 규정을 따라 자기들의 관급(官級) 품위(品位)를 설치해야 했을 것이다.
백성(百姓)
요사(遼史) 권 13, 본기(本紀) 제13 성종(聖宗) 4에 “995년, 올야오소도(兀惹烏昭度)와 발해연파(渤海燕頗)가 철려(鐵驪)를 침입했다……”라고 실려 있고 권 85 열전(列傳) 제15에 “화삭노(和朔奴)가 군대를 이끌고 ‘철려(鐵驪)’에 주둔하였다……”라고 실려 있는 등등 모두 철려국(鐵驪國)이 자기의 명확한 나라 경계(國界)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으로써 주둔 군대(駐軍)가 더러 철려(鐵驪)를 침범했다고 가늠해 보겠는가? 이와는 별개로 금사(金史)에는 “요국(遼國)이 군대를 써서 철륵(鐵勒), 오야(烏惹)의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는 말이 있다. 사료 조사를 근거하자면 이 철륵(鐵勒)이 가리키는 것은 곧 철려(鐵驪)이다. (출처 바이두)
鐵驪
鐵驪,亦作鐵離、鐵甸。《遼史》中有時以其代五國部中的越裏吉,《金史》中有時將其寫作鐵勒,皆爲修史者誤書。其先人爲唐初黑水靺鞨鐵利部民,後歸服渤海,渤海國置鐵利府。
簡介
在唐朝中後期的渤海國有個鐵利(里)府,到後來演變成遼國的鐵利州。同時期,在渤海國北方還有個鐵驪(離)國。 《金史》 、 《續資治通鑒》 等史書都說“鐵驪部”,但是仔細研究後,就會相信《遼史》中的“鐵驪國”是最可信的,鐵驪是國,無庸質疑,據可查的很多曆史書籍(不包括近人編輯的曆史書)載,其中有《遼史》 ,還有《契丹國志》 、 《高麗史》等書,凡屬鐵驪字樣的記載均毫無含混地寫爲“鐵驪國”或“鐵離國”。從某種意義上說,決無“鐵驪部”或“鐵驪州”、“鐵驪府”等字樣。只要翻開《遼史》,多處可見的是“鐵驪國”的諸多史事。在《遼史》 “百官志”、“屬國軍”、“屬國表”、“紀”、“志”等許多篇章中,都可證明鐵驪是遼國的附屬國。特別是《遼史》營衛志,部族篇中,對“部”、“族”、“屬國”等概念都做了十分明確地解釋。該書對遼國所屬的國內部、國外部、附屬國等都多次從政治、軍事、經濟等方面一一列舉得非常詳細。在這樣的書籍中,我們沒有理由懷疑它會把“部”與“國”相混淆。鐵驪國是被《遼史》明明白白地列在“屬國”序列之中的,清清楚楚地寫著“鐵驪國”字樣。在遼代二百多年的曆史記載中,鐵驪國始終和高麗、日本、新羅、黨項、突厥、烏孫等眾多國家一樣,在宗主國遼國的主宰下,進行著各項國家事務活動。這一曆史記載的事實是不容置疑的。
軍事能力
《遼史》兵衛志下,屬國軍篇中列有:“吐穀渾、鐵驪、靺鞨……突厥、黨項……高麗、西夏、女直(真)。”等59個屬國軍隊。《遼史》百官志二中載,在長春路有“黃龍府鐵驪軍詳穩司”。這是遼國的國外部族和附屬國中,僅有的幾個在遼國內被設置有軍隊詳穩司(監治官衙)的附屬國之一。公元1040年(遼重熙9年)女真人侵犯遼國邊境,就是鐵驪國的軍隊把女真人反擊回去的(《遼史》卷十八,後文有說明。),可見其軍力相對來說還是較強的。
官僚體制
遼國對附屬國、部族的官職和品級等官僚系統都有明確的規定,《遼史》百官志二,北面屬國官篇中列有:“屬國職名總目:某國大王,某國於越,某國左相,某國右相,某國惕隱、亦曰司徒……”共十六個職名和職司,還說:“大部職名並同屬國,諸部職名並同部族。女直(真)國順化王府……高麗國王府、新羅國王府、日本國王府……鐵驪國王府……”共78個“諸國”;之後又列有8個“大部”和61個“諸部”。鐵驪國酋長仙門曾明確地被遼國授予“右監門衛大將軍”。從《遼史》中可知,鐵驪國與遼國的關系是很好的,鐵驪國跟隨遼國近二百年,是必定要按遼國的規定設置自己的官級品位的。
百姓
《遼史》卷十三,本紀第十三,聖宗四載:公元995年,“兀惹烏昭度,渤海燕頗侵鐵驪……”。卷八十五,列傳第十五載:和朔奴率軍“駐於鐵驪……”等等,都說明鐵驪國具有自己明確的國界,否則,用什麼去衡量駐軍或侵犯了鐵驪?另外,《金史》中有:遼國“以兵徙鐵勒、烏惹民……”。根據史料查核,這裏的鐵勒指的就是鐵驪。
☞ 철리(鐵利)
철리(鐵利), 발음은 ‘tiě lì’이다. 부족(部族) 이름이다. 원래는 당(唐)나라 때에 흑수말갈(黑水 靺鞨)의 여러 부족 중 하나였다. 뒤에 발해(渤海)에 복속하였다.
해석(解釋)
부족 이름이다. 당(唐)나라 때 흑수말갈(黑水 靺鞨) 여러 부족의 하나였다. 뒤에 발해(渤海)에 복속하였다.
출처(出處)
신당서(新唐書) 북적전(北狄傳):“철리(鐵利)의 옛땅은 발해국의 철리부(鐵利府)이니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들 여섯 주(州)를 거느렸다.” (출처 바이두)
鐵利,讀音是tiě lì。意思是部族名。原爲 唐 黑水 靺鞨 諸部之一。後服屬 渤海。
出處
《新唐書·北狄傳》:“ 鐵利 故地爲 鐵利府 ,領 廣 、 汾 、 蒲 、 海 、 義 、 歸 六州。”
☞ 철리부(鐵利部)
철리부(鐵利部)는 말갈(靺鞨) 여러 부(諸部)의 하나였다가 뒤에 흑수말갈(黑水靺鞨) 16부(部) 가운데에 한 부(部)가 되었다. 철려(鐵驪), 철리(鐵離)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분포 위치
철리부의 분포(分布)는 지금 흑룡강성(黑龍江省) 의란현(依蘭縣) 부근에 있다. 그러나 그 있던 곳은 여태까지 많은 설(說)이 있다. 일설에는 백력(伯力,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부근이다. 일설에는 러시아 유태자치주(猶太自治州) 영역이다. 일설에는 사할린(庫頁島)과 거리가 멀지 않다. 또한, 지금 흑룡강성(黑龍江省) 요력하(撓力河)에서 동쪽, 러시아 비금하(比金河)와 이만하(伊曼河) 양 하천 유역과 그 동쪽으로 해안 지역까지라고 비정하고 있다. 지금 요녕성 철령현(遼寧鐵嶺縣境)에 있다고 오래도록 지적하고도 있다.
역사 연혁
당(唐) 개원(開元) 연간(713년 ~ 741년), 여러 차례 당(唐)나라를 방문하였다. 대력(大曆) 14년 (일본 광인(光仁)임금 보귀(寶龜) 10년, 779년) 일본에 사신으로 간 철리인(鐵利人)이 발해(渤海)와 함께 일본에 다다랐던 적이 있었는데 사신들 사이에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爭坐)로 다툼이 벌어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발해가 강성하였을 때 합병되어 그 땅에 철리부(鐵利府)를 두었다. 발해국이 망한 뒤 요(遼)나라가 일부 거주민들을 지금에 요녕(遼寧) 심양시 서남, 내몽고 옹우특기(翁牛特旗) 동쪽에 서납목륜하(西拉木倫河, 시라무렌강) 옆, 길림성 농안현(農安縣) 땅들로 옮겨 살게 하였다. 대부분은 조금씩 서쪽으로 옮겨 지금 흑룡강성(黑龍江省) 철력현(鐵力縣) 일대에서 살았으니 역사에서 일컬은 그 철려(鐵驪) 또는 철리(鐵離)가 된다. 요(遼)나라가 망한 뒤 금(金)나라에 귀의해 붙었고 그 백성들은 융합되어 여진(女真)에 편입되어야 했다. (출처 바이두)
鐵利部
鐵利部,靺鞨諸部之一,後爲黑水靺鞨16部中的一部。別 名鐵驪、鐵離
分布位置
分布在今黑龍江省依蘭縣附近。所在曆來有多說:一說在伯力(俄羅斯哈巴羅夫斯克)附近;一說在俄羅斯猶太自治州境;一說距庫頁島不遠;也有比定在今黑龍江省撓力河以東、俄羅斯比金河與伊曼河兩河流域及其以東至海地;舊有指其在今遼寧鐵嶺縣境。
曆史沿革
唐開元年間(713—741),多次朝唐。大曆十四年(日本光仁天皇寶龜十年,779),使日的鐵利人曾與渤海赴日使者發生“爭坐”事件。渤海強盛時被兼並,在其地置鐵利府。渤海國亡後,部分居民被遼分散移居今遼寧沈陽市西南、內蒙古翁牛特旗東的西拉木倫河旁、吉林省農安縣等地;大部則稍向西徙,居今黑龍江省鐵力縣一帶,史稱其爲鐵驪或鐵離。遼亡後歸附金,其民當融合入女真。
☞ 발해 행정 구역 지도로 보는 임구현, 의란현, 비금하, 이만하 등 위치 (출처 바이두)
☞ 서납목륜하(西拉木倫河, 시라무렌강) 지도 (출처 바이두)
☞ 철리(鐵利) 고지(故地)
철리(鐵利) 고지(故地)는 물길(勿吉, 말갈(靺鞨))족 철리부(鐵利部)가 살았던 곳이다. 철리부(鐵利部)는 본디 물길(勿吉) 여러 부(諸部)의 하나였다. 뒤에 흑수말갈(黑水靺鞨) 16부(部) 중에 한 부(部)가 된다. 발해(渤海)가 흥성했을 때 발해에 예속되어 부림을 받았으니 발해는 그 땅에 철리부(鐵利府)를 설치하였다. 역사에서 ‘부(府)’를 그 고지(故地)에 설치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위치한 곳은 ‘승덕현(承德縣, 지금 요녕 심양시) 서북에 있다고 오래도록 잘못 여겨졌다. 지금 일반적으로 지금 흑룡강성 의란현(依蘭縣) 부근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일설에는 구 소련(蘇聯) 하바로프스크(哈巴羅夫斯克) 땅에 있다하고, 더러는 마땅히 흑룡강성(黑龍江省) 요력하(撓力河)에서 동쪽, 구 소련에 비금하(比金河)와 이만하(伊曼河) 유역과 동쪽으로 해안 지역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출처 바이두)
鐵利故地
勿吉族鐵利部所居之地
鐵利故地,勿吉(靺鞨)族鐵利部所居之地。鐵利部原爲勿吉諸部之一,後爲黑水靺鞨16部中的一部。渤海盛時役屬於渤海,渤海於其地置鐵利府,史稱府設其故地。所在,舊誤以爲在承德縣(今遼寧沈陽市)西北,今一般認爲在今黑龍江省依蘭縣附近,一說在前蘇聯哈巴羅夫斯克地,或說當爲今黑龍江省撓力河以東、前蘇聯比金河和伊曼河流域及其以東至海地。
☞ 철리부(鐵利府)
철리부(鐵利府)는 당나라 때 발해국 오경십오부(五京十五府)의 하나이다. 본디 철리(鐵利) 고지(故地)이니 광(廣), 분(汾), 포(蒲), 해(海), 의(義), 귀(歸) 여섯 주(六州)를 거느렸다. 소재지(治所)는 광주(廣州)에 있었고 그 옛터는 대략 지금 흑룡강성(黑龍江省) 임구현(林口縣) 일대이다.
철리(鐵利)는 원래 당대(唐代) 말갈(靺鞨) 여러 부(部)의 하나이니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드렸다. 대략 천보(天寶, 742년 ~ 756년) 초에 발해(渤海)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발해국 제2대 임금)가 군대를 보내 철리부락(鐵利部落)을 병탄하였다. 발해(渤海)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 발해 제3대 임금. ? ~ 793년) 때, 당(唐)을 모방하여 오경십오부(五京十五府)를 설치하여 철리말갈(鐵利靺鞨) 부락의 옛땅으로 철리부(鐵利府)를 만들어서 도독(都督)이 통치하게 하였다. 하급 행정 구역인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에 자사(刺史)를 두었다. 그 뒤에 주(州)를 고쳐 군(郡)으로 만들고 도독(都督)을 절도사(節度使)로 만들었다. 철리부(鐵利府) 광주(廣州)를 철리군(鐵利郡)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다시 옛 이름으로 복구하였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4년(926년) 2월, 거란(契丹)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군대를 이끌고 발해국을 쳐 멸망시킨 뒤에 철리부(鐵利府) 역시 거란(契丹)이 가져갔다. 거란(契丹)이 부(府)가 관할하던 여러 주(州)의 민호(民戶)들을 요양(遼陽), 상경(上京) 일대로 옮기고 파괴된 광주(廣州) 백성들을 옮기고 철리주(鐵利州)를 두었다. 귀주(歸州)의 항복한 호구(戶)들을 옮겨 귀주(歸州)에 두었으며 파괴된 의주(義州) 백성을 남루(南樓) 서북쪽으로 옮기고서 그대로 의주(義州)라고 불렀다. 철리 고지(鐵利故地)에다 그대로 철리부(鐵利府)를 설치하고 자사(刺史)가 이곳을 거느리게 하였다.
위치
철리(鐵利) 고지(故地)와 철리부(鐵利府)가 있었던 곳에 관련해서 현재 여러 가지 관점이 있다. 그 하나는 요사(遼史) 지리지(地理志)를 근거로 삼아 철리부(鐵利府)는 요양(遼陽) 부근이라고 보고 있다. 그 둘은 일본 학자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로서 그 터는 흑룡강 의란(依蘭)과 아성(阿城) 사이에 있었다고 보고 있고 일본 학자 소천유인(小川裕人)으로서 그 땅은 의란(依蘭)에 있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 셋으로 김육불(金毓黻)은 그 옛터는 백력(伯力), 지금에 러시아 하바로프스크(哈巴羅夫斯克, Хабаровск, Khabarovsk)에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중국역사지도집(中國曆史地圖集)은 철리부(鐵利府) 소재지(治所)를 의란현(依蘭縣)으로 정하였다.
가탐기(賈耽記)에 “발해국 북방에 덕리진(德理鎮)이 있는데 마땅히 ‘철리(鐵利)’라는 소리가 변한 것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도호부(都護府) 동북에서 옛 개모신성(古蓋牟新城)을 지나 다시 발해(渤海) 장령부(長嶺府)를 지나서 천오백 리(里)면 발해왕성(渤海王城)에 이르는데 이 성(城)은 홀한해(忽汗海)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 서남쪽 삼십 리에 옛숙신성(古肅慎城)이 있고 그 북쪽으로 덕리진(德理鎮)을 지나면 남쪽으로 흑수말갈(黑水靺鞨) 천 리에 이른다. ” 신당서(新唐書) 권43
고고학적 발견에 근거하면 지금 흑룡강성(黑龍江省) 임구현(林口縣) 오사혼하(烏斯渾河)와 무단강(牡丹江)이 모이는 동강자촌(東崗子村)에 요(遼) 금(金)의 고성(古城) 유적 하나가 존재하고 있다. 중국학자 왕우랑(王禹浪)은 있던 성(城)을 고친 것은 아마도 발해 고성(渤海古城)이며 뒤에 요(遼)와 금(金)을 거치며 이어 사용하였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오사혼하(烏斯渾河) 고성(古城)은 둘레 길이가 약 2700미터이다. 오사혼하(烏斯渾河) 고성(古城)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임구현(林口縣) 삼도통(三道通) 고성(古城)은 발해 때 고성(古城)으로 둘레 길이가 2900미터인데 그 성(城)이 철리부(鐵利府) 광주(廣州)의 소재지(治所)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요사(遼史) 권60 식화지(食貨志)에
“신책(神冊 요나라 태조의 첫째 연호, 916년 ~ 922년) 초기에 발해를 평정하고 광주(廣州)를 손에 넣었는데 본디 발해의 철리부(鐵利府)인데 철리주(鐵利州)로 고쳤다. 땅이 역시 철(鐵)이 많다.”라고 실려 있다.
흑룡강성(黑龍江省)은 철광이 풍부한데, 임구현(林口縣)에 료지구(鬧枝溝), 대반도(大盤道), 홍석(紅石), 천보산(天寶山) 네 곳은 철광구(鐵礦區)이다.
철리(鐵利)와 철려(鐵驪)
요사(遼史) 안에 여러 차례 “철려부락(鐵驪部落)”, “철려국(鐵驪國)”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상 중원(中國) 역사책에 실린 철려(鐵驪)와 철리부(鐵利府)는 두 군데 지방이다. 철려국(鐵驪國)은 발해 말기 때 벌써 존재하였으니 아울러 거란(契丹)이 발해를 멸했던 그해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 철려국(鐵驪國)과 오국부(五國部)는 언제나 함께 요대(遼代) 역사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오국성(五國城)은 지금 의란현(依蘭縣) 일대에 있었다. (출처 바이두)
鐵利府
鐵利府,唐代渤海國五京十五府之一。本鐵利故地,領廣、汾、蒲、海、義、歸六州。治所在廣州,故址約今黑龍江省林口縣一帶。
鐵利原爲唐代靺鞨諸部之一,唐玄宗開元年間,多次遣使入貢。大約於天寶初年,渤海武王大武藝遣兵吞並鐵利部落。渤海文王大欽茂時期,仿唐置五京十五府,以鐵利靺鞨部落故地爲鐵利府,以都督統之。下轄廣州、汾州、蒲州、海州、義州、歸州,置刺史。其後,改州爲郡,都督爲節度使。以鐵利府廣州爲鐵利郡,後又複舊名。
後唐同光四年(926年)二月,契丹耶律阿保機率軍攻滅渤海國之後,鐵利府亦爲契丹所取。契丹遷府轄諸州民戶於遼陽、上京一帶,以所破廣州民遷置鐵利州,以歸州降戶遷置於歸州,以所破義州民遷於南樓西北,仍稱義州。仍置鐵利府於鐵利故地,以刺史領之。
地望
關於鐵利故地與鐵利府所在,目前有多種觀點:其一,以《遼史·地理志》爲依據,認爲鐵利府在遼陽附近;其二,以日本學者津田左右吉認爲其址在黑龍江依蘭與阿城之間,日本學者小川裕人認爲其地在依蘭;其三,金毓黻認爲舊址在伯力,今俄羅斯哈巴羅夫斯克(俄語:Хабаровск;英語:Khabarovsk)。《中國曆史地圖集》則將鐵利府治所定於依蘭縣。
《賈耽記》記載渤海國北方有德理鎮,應即鐵利音轉。
“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又經渤海長嶺府,千五百裏至渤海王城,城臨忽汗海,其西南三十裏有古肅慎城,其北經德理鎮,至南黑水靺鞨千裏。”--《新唐書》卷四十三
根據考古發現,在今黑龍江省林口縣烏斯渾河與牡丹江交彙之處東崗子村存在一座遼金古城遺址,中國學者王禹浪推測改城可能是渤海古城,後經遼金沿用。烏斯渾河古城周長約2700米。在烏斯渾河古城不遠之處林口縣三道通古城則爲渤海時期古城,周長2900米,其城極有可能是鐵利府廣州治所。
《遼史》卷六十《食貨志》載:
“神冊初,平渤海,得廣州,本渤海鐵利府,改曰鐵利州,地亦多鐵。”
黑龍江省鐵礦豐富,林口縣鬧枝溝、大盤道、紅石、天寶山四處鐵礦區。
鐵利與鐵驪
《遼史》中多次出現“鐵驪部落”、“鐵驪國”,事實上中國史書所載的鐵驪與鐵利府是兩處地方。鐵驪國在渤海末期已經存在,並於契丹滅渤海的當年遣使朝貢。鐵驪國與五國部經常在一起被遼代史書提及。五國城在今依蘭縣一帶。
☞ 철리말갈(鐵利靺鞨)
철리말갈(鐵利靺鞨)은 곧 철리부(鐵利部)이니 이는 당조(唐朝) 때에 흑수말갈(黑水靺鞨) 16부족의 하나이다.
당나라 때 철리말갈(鐵利靺鞨)은 발해국(渤海國)과 흑수부(黑水部) 사이에 위치하였으니 지금에 흑룡강성(黑龍江省) 호란하(呼蘭河, 호란은 만주어이니 「굴뚝(煙囪)」을 뜻함) 유역, 의란현(依蘭縣, 의란은 만주어이니 「삼성(三姓)」이라는 뜻이다. 하얼빈시 동북부, 옛 합강성(合江省) 안에 있음)에서 서남쪽 마대둔(馬大屯), 쌍압산(雙鴨山) 일대에서 살았다. 일설에 하바로프스키(伯力) 부근이라 하고 일설에는 유태자치주(猶太自治州) 땅이라 하며 일설에는 사할린섬(庫頁島)과 멀지 않다고 한다. 또 지금에 흑룡강성(黑龍江省) 요력하(撓力河)에서 동쪽, 비금하(比金河)와 이만하(伊曼河) 두 하천의 유역 및 동쪽으로 바닷가 지역에 이르기까지도 비정(比定)함이 있고 오래도록 요사(遼史)에 근거하여 청조(清朝)의 승덕현(承德縣, 지금 요녕성 심양시) 부근에 있다고 가리키고 있다.
철리부(鐵利部)와 당조(唐朝)의 연계는 한껏 밀접하여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에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한 적이 있다. 개원(開元) 4년(716년), 당조(唐朝)는 그 부(部)의 수령(首領)을 중랑장(中郎將)에 제수하였고 개원(開元) 6년(718년), 그 대수령(大首領)을 수중랑장(守中郎將)에 제수하였다가 뒤에 다시 중랑장(中郎將)에 제수하였고 개원(開元) 12년(724년)에 장군(將軍)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그 하수령(下首領) 역시 절충(折衝), 과의(果毅) 등에 관직에 제수되었다. 개원(開元) 14년(726년),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에 예속시켰다. 발해(渤海) 문왕(文王)인 대흠무(大欽茂) 때 곧 발해(渤海)의 정복을 받고서 이 땅에 철리부(鐵利府)를 설치하였다. 철리부(鐵利府)는 발해 행정구역 십오부(十五府)의 하나가 되었으니 광(廣), 반(汾), 포(蒲), 해(海), 의(義), 귀(歸) 여섯 주(六州)를 거느렸고 광주(廣州)에 소재지를 두고서 다스렸다. 요조(遼朝)에서는 이 부(部)를 가리켜 「철려(鐵驪)」라 하였는데 점차 남쪽으로 옮겨 가 여진(女真)의 서쪽에서 살다가 뒤에 여진에게 융합되었다. 금조(金朝) 때 「여진(女真)」이라고 통틀어 일컬어졌다. (출처 유기백과 중문판)
☞ 송화강 호란하 지도 (출처 바이두)
☞ 요력하(撓力河) 지도. 낙뢰하(諾雷河), 낙라하(諾羅河)라고도 역사책에서 기록하고 있다. 만주어로 그 뜻은 「하천의 물길이 이리저리 흘러 한결같지 않다(河床流蕩不定)」 이다. (출처 유기백과 중문판)
鐵利靺鞨
鐵利靺鞨,即鐵利部,是唐朝時期黑水靺鞨十六部之一。
唐朝時鐵利靺鞨位於渤海國與黑水部之間,居住在今黑龍江省呼蘭河流域,依蘭縣以西南馬大屯、雙鴨山一帶。一說在伯力附近,一說在猶太自治州境,一說距庫頁島不遠,也有比定在今黑龍江省撓力河以東、比金河與伊曼河兩河流域及其以東至海地,舊有依《遼史》指在清朝承德縣(今遼寧省瀋陽市)附近。
鐵利部與唐朝聯繫十分密切,唐玄宗開元年間,曾多次遣使朝貢。開元四年(716年)唐朝授該部首領為中郎將,開元六年(718年)授其大首領為守中郎將,後復授中郎將,開元十二年(724年)升授將軍。其下首領亦被授為折衝、果毅等官。開元十四年(726年)屬黑水都督府。渤海文王大欽茂時,即被渤海征服,以其地置鐵利府。鐵利府為渤海十五府之一,領廣、汾、蒲、海、義、歸六州,治廣州。遼朝稱該部為「鐵驪」,稍南遷,位於女真之西。後為女真融合。金朝時統稱為「女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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