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권 2
부족(部族) 〈이(二)〉
읍루(挹婁) 〈또는 土+邑樓〉 2
요(遼)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 심주(瀋州) 소덕군(昭徳軍), 쌍주(雙州) 보안군(保安軍), 정리부(定理府)가 모두 옛 읍루국(挹婁國) 땅이다. 〈살펴보면 심주(瀋州) 소덕군(昭徳軍)은 지금 승덕현(承徳縣)이고 쌍주(雙州) 보안군(保安軍)은 지금 철령현(鐡嶺縣)이며 정리부(定理府)는 지금 흥경(興京) 경내에 있다.〉
금(金)
대금국지(大金國志) : 북쪽으로 실위(室韋)에 접해있고 서쪽으로는 발해(渤海), 철리(鐡離)를 경계로 두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를 가에 두고 있다. 삼국지(三國志)가 말한바 읍루(挹婁) 땅인 것이다.
살펴보면 읍루(挹婁)라는 이름은 후한(後漢)에서 비롯된다. 이를 역사 기록물(史傳)에서 살펴보면 곧 옛 숙신씨(肅慎氏)이다. 진서(晉書)에서 ‘이른바 숙신(肅慎)은 일명 읍루(挹婁)’라 함이 이것이다.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물길(勿吉), 말갈(靺鞨)이라는 이름이 따로따로 생긴다. 〈물길(勿吉)과 말갈(靺鞨)은 모두 따로 조목을 갖추어서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 서적에서 드러난 오래전 이름의 경우는 여전히 살필 수가 있으니, 예컨대 요(遼)나라의 심주(瀋州), 쌍주(雙州), 정리부(定理府)와 금(金)나라의 읍루현(挹婁縣) 들은 모두 겨우 한 모퉁이를 가리킬 뿐, 그 땅의 전부가 아니다. 원사(元史)에서 ‘심양로(瀋陽路)’를 가리켜 ‘읍루(挹婁)의 옛땅’이라는 기사는 그럴싸하고 개원로(開元路)에 대해서는 고숙신(古肅慎) 땅이요 수(隋), 당(唐)나라에서는 “말갈(靺鞨)”이라 하였다고 언급하니 갈림길에 들어서서 둘로 된 것이 또한 그럴싸하다. 대체로 위진(魏晉) 이전 시대에는 부족(部族)들이 아직 갈라지지 않았다가 위진(魏晉) 이후에 정리되어 일곱이 되었고, 겨레(族)가 번성할수록 땅은 더욱 넓어지자 오래된 부족(舊部)의 이름으로 포함할 수 있지 아니한 부족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금사지리지(金史地理志)를 기록하기에 이르러서는 “심주(瀋州)는 본디 요(遼)나라의 정리부(定理府)로 읍루(挹婁)의 옛 땅이 된다.” 말하였다. 요지(遼志)를 톺아보면 심주(瀋州) 밖에 따로 정리부(定理府)를 두었으니 역시 읍루(挹婁) 지역에 속한다. 요(遼)의 정리(定理)는 실제로 당(唐)나라 때 발해(渤海)가 세운 곳이었는데 금(金)나라에 이르렀을 때는 진작에 폐지되었다. 또한 금지(金志)에서 일컬은 심주(瀋州) 읍루현(挹婁縣)은 본래 요(遼)의 오래전 흥주(興州) 안상현(常安縣)이다. 요지(遼志)를 들여다보면 동단성(東丹城) 북쪽으로 읍루현(挹婁縣) 범하(范河)까지 2백 70리에 이르게 되는데 그렇다면 요(遼)나라 때 벌써 읍루현(挹婁縣)이 있었다. 대체로 군읍(郡邑)을 옮기더라도 그 영토의 너비 둘레에는 일정함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성경통지(盛京通志)에서 보이는 것, 예컨대 승덕(承徳)이라든지 철령(鐵嶺)이라든지 길림(吉林)이라든지 영고탑(寧古塔)이라든지는 봉천부(奉天府) 소재지에서 동북에 끝까지 서로들 읍루(挹婁) 땅이다. 또한 명일통지(明一統志)에 실린 “홍무(洪武) 29년(1396년)에 의로성(懿路城)에 좌(左)와 우(右) 천호(千戸)를 설치하였다. 영락(永樂) 8년(1410년) 다시 중 천호(中千戸)를 의로성(懿路城)에 설치하였다.” 하니 그 폐기된 터는 지금 철령현성(鐵嶺縣城) 남쪽 60리에 있다. 또한 역참(站)이 있으니 의로(懿路)라 이름하고 역시 이로(伊魯)로도 쓴다. 응당 바로 요(遼)와 금(金)나라 때 읍루현(挹婁縣)의 유적이다. 지금 만주어(滿洲語)로는 암혈(巖穴)의 ‘혈(穴)’을 일러 ‘엽로(葉嚕)’라고 한다. 이로(伊魯)와 소리가 서로 가까운데, 당시에 명명(命名)한 뜻을 알만하다. 그러나 소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 시대와 시대 사이를 구르다 보니 전해지는 속에서 잘못되고 여러 대를 거치다 드디어 서로 차이가 생기게 되지만, 유적(遺址)에서 탐구를 하면 찾을 수 있으니 바로 옛날에는 ‘도(陶)’라 불렀던 곳을 ‘도구(陶邱, 지금 산동성 하택시 정도구(定陶區))’라 하고 빈(豳)이 ‘빈정(豳亭, 지금에 섬서 빈현(彬縣))’으로 된 것과 같을 뿐이다.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二
部族〈二〉
挹婁〈一作□樓〉
遼
遼史地理志瀋州昭徳軍雙州保安軍定理府皆故挹婁國地〈按瀋州昭徳軍今承徳縣雙州保安軍今鐡嶺縣定理府在今興京境内〉
金
大金國志北接室韋西界渤海鐡離東瀕海三國志所謂挹婁地也
按挹婁之名始于後漢考之史傳即古肅慎氏晉書所謂肅慎一名挹婁是也至南北朝始别有勿吉靺鞨〈勿吉靺鞨俱另條詳後〉之稱而舊名之見于簡冊者猶有可考如遼之瀋州雙州定理府金之挹婁縣皆僅指一隅非其全部元史稱瀋陽路為挹婁故地似矣而于開元路則云古肅慎地隋唐曰靺鞨又似岐而二之者盖魏晉以前部族未分魏晉以後釐而為七族愈繁而地愈廣容有非舊部之名所能該者矣至金史地理志謂瀋州本遼定理府為挹婁故壤考遼志則瀋州之外别有定理府亦屬挹婁之地遼之定理實唐時渤海所建至金已廢又金志稱瀋州挹婁縣本遼舊興州常安縣考遼志東丹城北至挹婁縣范河二百七十里則遼時已有挹婁縣盖郡邑雖移而幅員有定今見于
盛京通志者若承徳若鐵嶺若吉林若寧古塔自奉天府治極于東北胥挹婁地也又明一統志載洪武二十九年設左右千戸于懿路城永樂八年復設中千戸于懿路城其廢址今在鐵嶺縣城南六十里又有站名懿路亦作伊魯當即遼金挹婁縣之遺今滿洲語謂巖穴之穴為葉嚕與伊魯音相近可知當時命名之義而音轉傳訛厯代遂有互異究之遺址可尋正猶陶之為陶邱豳之為豳亭焉爾
☞ 심주(瀋州) 등 요나라 동경도(東京道) 지도 (출처 바이두)
☞ 금나라 상경로(上京路) 지도 (출처 바이두)
☞ 성경강역고(盛京疆域考)
정리부(定理府) 【 지금 철령현(鐵嶺縣) 서남쪽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흥경성(興京城) 서북쪽이라 쓰여있다.】 : 두 개의 주(州)를 거느린다.
정주(定州) 【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흥경(興京) 땅이라고 쓰여있다.】
심주(瀋州) 【 지금 승덕현(承德縣) 소재지(治)이다. 요지(遼志) 심주(瀋州)에 보인다. 명일통지(明一統志)에 “한(漢)나라 요동군(遼東郡) 땅이었고 발해(渤海)에서 심주(瀋州)를 설치하였다.” 말한다. 1190년 금나라 때 출판된 요동행부지(遼東行部志)에는 “심주(瀋州)는 당(唐)나라 때 일찍이 고려(高麗, 고구려)의 침입으로 장악되었다가 이적(李勣)이 동쪽 정벌을 하였을 때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성(平壤城)에 설치하였다. ”라는 기사가 있으니 실제로 지금에 심주(瀋州)이다. 당나라 말기에는 대조영(大氏)이 차지하였다.】
쌍주(雙州) 【지금 철령현(鐵嶺縣) 서쪽 육십 리(里)이다.】 : 거느리는 현(縣)은 하나이다. 원 지(志)에는 “보안군(保安軍), 하(下), 절도(節度). 발해(渤海)에서 안정군(安定郡)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 요사(遼史) 본기(本紀)에 “천경(天慶, 요나라 야율연희(耶律延禧)의 연호) 8년(1118년) 정월 보안군절도사(保安軍節度使) 장숭(張崇)이 쌍주(雙州) 2백 호(戶)를 데리고 금(金)나라에 항복하였다.” 하였다.】
심주(瀋州) 【지금 승덕현(承德縣) 소재지】 : 다섯 현(縣)을 거느린다. 원 지(志)에 “소덕군 자사(昭德軍刺史), 중(中). 본디 요(遼)의 정리부(定理府) 땅이니 요(遼) 태종(太宗) 때 時置행정구역으로 군(軍)을 설치하여 “흥료(興遼)”라 불렀다. 뒤에 소덕군(昭德軍)이라 하고 절도(節度)를 두었다. 명창(明昌, 금나라 6대 임금 장종(章宗)의 연호) 4년(1193년)에 자사(刺史)로 고치고 통(通), 귀덕(貴德, 요녕성 철령(鐵嶺) 동남쪽), 징(澄, 요녕성 해성(海城)) 이 세 개 주(州)와 더불어 모두 동경(東京)에 예속시켰다. 【 고씨(顧氏) 방여기요(方輿紀要)에 “송(宋) 정화(政和) 6년(1116년) 여진(女真) 아골타(阿骨打)가 요(遼)에 반기를 든 장수 고영창(高永昌, 발해의 귀족 출신)을 요양(遼陽)에서 공격하고 심주(瀋州)를 손에 넣었다. 영창(永昌)이 무리를 이끌고 활수(活水)에서 금(金)나라 군대에 항거하고 있었는데 금(金)나라 장수가 활수를 건너자 영창(永昌)의 군대는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활수(活水)는 바로 혼하(渾河)이다.”라는 기사가 있다. 또한 금사(金史) 간로전(幹魯傳)에 “간로(幹魯)가 요(遼)의 군대와 심주(瀋州)에서 맞닥뜨렸는데 이들을 깨뜨렸고 심주(瀋州)를 공격하여 이곳을 손에 넣었다.” 하였다. 허항종(許亢宗)의 행정록(行程錄)에 “현주(顯州)에서 1백50리를 가서 양어무(梁魚務)에 이르렀고 다시 1백 3리(里)를 가서 마작채(摩綽寨)에 이르렀으며 다시 80리(里)를 가서 심주(瀋州)에 이르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읍루(挹樓) 【 지금 철령현(鐵嶺縣) 남쪽 60리 】 : 금사(金史)에 나온 원 주(注)에 “요(遼)나라 때 옛 흥주(興州) 흥중군(興中軍) 상한현(常安縣)로 요(遼)에서 일찍이 이곳에 정리부 자사(定理府剌史)를 설치하였으니 본디 읍루(挹樓)의 옛 땅이다. 대정(大定) 29년(1189년) 장종(章宗)이 이름을 바꾸었다. 범하(范河)와 청하(清河)가 있다. 나라 이름(이 지역에 있던 어떤 토호세력이 이룬 또는 어떤 겨레 공동체를 ‘나라(國)’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은 괴필라(魁必喇)이다.”라고 하였다. 【 금사 세종본기(世宗本紀)에 “과리(瓜里)가 심주(瀋州)에 이르러 도망갔는데 때마침 오아찰랍(烏雅扎拉) 들이 이 적병을 깨뜨리니 적병이 도로 상안현(常安縣)에 이르렀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
쌍성(雙城) 【 지금 철령현(鐵嶺縣) 서쪽 60리(里)】 : 원 주(注)에 요(遼) 쌍주(雙州) 보안군(保安軍)이니 황통(皇統) 3년(1143년) 현(縣)으로 낮추고 장종(章宗) 때에 폐지하였다.
쌍주(雙州) 【 지금 철령현(鐵嶺縣) 서쪽 60리(里)】 : 현(縣) 하나를 거느린다. 원 지(志)에 “보안군(保安軍), 하(下), 절도(節度). 발해(渤海)에서 안정군(安定郡)을 설치하였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 요사(遼史) 본기(本紀)에 “천경(天慶) 8년(1118년) 정월에 보안군 절도사(保安軍節度使) 장숭(張崇)이 쌍주(雙州) 이백 호(戶)를 데리고서 금(金)나라에 항복하였다.” 하였다.】
盛京疆域考 : 定理府 【 今鐵嶺縣西南 盛京通志作興京城西北】 領州二
定州 【 盛京通志作興京境】
瀋州 【 今承德縣治見遼志瀋州 明一統志漢遼東郡地渤海置瀋州遼東行部志瀋州在唐時嘗為高麗侵據李勣東征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實今之瀋州也唐季為大氏所有】
瀋州 【 今承德縣治】 縣五原志昭德軍刺史中本遼定理府地遼太宗時置軍曰興遼後為昭德軍置節度明昌四年改為刺史與通貴德澄三州皆隸東京 【 顧氏方輿紀要宋政和六年女真阿骨打攻遼叛將高永昌於遼陽取瀋州永昌帥眾拒金人於活水金帥既濟永昌軍不戰而卻活水即渾河也又金史幹魯傳幹魯與遼軍遇於瀋州敗之攻瀋州取之許亢宗行程錄自顯州一百五十里至梁魚務又一百三里至摩綽寨又八十里至瀋州】
挹樓 【 今鐵嶺縣南六十里】 原注遼舊興州興中軍常安縣遼嘗置定理府剌史於此本挹樓故地大定二十九年章宗更名有范河清河國名魁必喇 【 世宗本紀瓜里至瀋州遯去會烏雅扎拉等敗賊兵還至常安縣】
雙城 【 今鐵嶺縣西六十里】 原注遼雙州保安軍也皇統三年降為縣章宗時廢
雙州 【 今鐵嶺縣西六十里】 統縣一原志保安軍下節度渤海置安定郡 【 本紀天慶八年正月保安軍節度使張崇以雙州二百戶降於金】
☞ 필라(必刺)는 여진어 소리를 딴 글자이다. 역시 “피라(辟刺)”로도 쓴다. “강(江)”, “내(河)”의 뜻이다. 예컨대 “살합련필라(撒合輦必刺)”, “알저필라(斡底必剌)”, “특물피라(忒黑辟剌)” 들 모두 물 이름(河名)이다. 금(金)나라 여진인은 살고있는 강이나 산(산은 여진어로 “아린(阿鄰)”)을 자기 공동체인 맹안(猛安), 모극(謀克) 이름에 붙이는 습속이 있다. 따라서 역사책에서 늘 아무개는 아무개 필라(某必剌) 아니면 아무개 아린(某阿鄰) 사람이라는 기사들을 늘 보인다. (출처 바이두)
必刺 : 必刺,女真語音譯。亦作“辟刺”, “江”、“河”之意。如“撒合輦必刺”、“斡底必剌”、“忒黑辟剌”等,皆爲河名。 金代女真人有以所在江河、山(女真語曰“阿鄰”)命猛安或謀克名的習俗,故史書中常見某人爲某必剌或某阿鄰人。
☞ 원나라 때 개원로(開元路)
① 개원로(開元路)는 원(元)나라에 요양행성(遼陽行省) 아래에 소속된 행정기구로 지금에 중국 동북과 조선반도 동북부 지구를 관할하였다.
지원(至元) 4년(1267년), 개원만호부(開元萬戶府)를 고쳐 요동로(遼東路)로 만들었으니 소재지(治所)는 황룡부(黃龍府, 지금 길림성 농안현(農安縣))에 있었다. 23년(1286년) 개원로(開元路)라고 고쳤다. 대덕(大德) 연간(1297년 ~ 1307년)에 개원로(開元路) 일부 구역을 그어서 수달달로(水達達路)를 만들었다.
명(明)나라가 세워진 뒤, 가장 처음 20년 안에 동북은 북원(北元)의 세력이 틀어쥔 아래에 처해 있었다. 명(明) 초기 때 개원로(開元路) 일대는 원래 원(元) 승상(丞相)인 야속해(也速亥)에 의해 관리되었고 그 통치 질서는 원(元)나라와 똑같았다. 1387년에 이르자 명조(明朝) 20만 군대가 동북지구의 원나라 군대를 쳐서 깨뜨리고 납합출(納哈出, 원나라 말기 대신)을 협박하여 명나라로 붙게 하고 명(明) 태조가 철령위(鐵嶺衛)를 세워 개원로(開元路)를 대체하였다. 고려(高麗)가 개원로(開元路)의 조선반도 북부지구에 대한 영유 주권을 소리높여 주장하였기 때문에 명조(明朝)는 개원로(開元路) 조선반도 북부의 영지를 방기하였고 아울러 철령위(鐵嶺衛)를 고쳐 요동 봉집보(遼東奉集堡, 지금 요녕 심양 동북에 봉집보(奉集堡))로 만들었다. 1393년 철령위(鐵嶺衛) 또한 봉집보(奉集堡)에서 은주(銀州, 지금 요녕성 철령시)에다 옮겼다.
고려(高麗) 말엽과 조선왕조 초기, 이성계가 조선반도의 도문강 유역에 대해 관리를 더 강화하여 이곳에서 살던 여진인(女真人)을 항복시키고 결국에는 도문강과 압록강으로 명나라와 조선 양국의 경계 하천으로 만들었다. (출처 유기 백과 중문판)
開元路 : 開元路為元朝遼陽行省下屬的行政機構,管轄中國東北和朝鮮半島東北部地區。
至元四年(1267年),改開元萬戶府為遼東路,治所在黃龍府(今吉林省農安縣)。二十三年(1286年)改為開元路。大德年間劃開元路部分區域設置水達達路。
明朝建立後的最初二十年內,中國東北處在北元勢力控制之下。明初,開元路一帶為原元丞相也速亥管理,統治秩序一如元朝,直到1387年,明朝二十萬軍隊擊敗東北地區的元軍,迫使納哈出歸附明朝。明太祖建立鐵嶺衛取代開元路。由於高麗聲稱對開元路朝鮮半島北部地區擁有主權,明朝放棄了開元路朝鮮半島北部的領地,並將鐵嶺衛改置於遼東奉集堡(今遼寧瀋陽東南奉集堡)。 1393年,鐵嶺衛又從奉集堡移至銀州(今遼寧省鐵嶺市)。
高麗末年和朝鮮王朝初期,李成桂對朝鮮半島圖們江流域加強了管理,招撫居住在該地區的女真人,最終使圖們江和鴨綠江成為中朝兩國的界河。
② 개원만호부(開元萬戶府)
개원만호부(開元萬戶府)는 몽고칸국(蒙古汗國, 곧 원나라) 행정구역 이름이다. 원(元) 태종(太宗)이 을미(乙未) 해(1235년)에 세웠다. (일설에는 원나라 태종(太宗) 5년인 1233년이라고 한다.)
소재지(治所)의 옛터는 지금 길림성(吉林省) 농안현(農安縣)에 있다. 더러는 러시아(俄羅斯) 오소리강 유역에 우수리스크(烏蘇里斯克, 곧 쌍성자(雙城子)) 맞은편 크라스노야르(克拉斯諾雅爾) 산성이라고 말한다. 일설에는 지금 흑룡강성(黑龍江省) 동녕시(東寧市) 경계라고 하고 지금 요녕(遼寧) 개원시(開原市)라는 말도 있다. 지원(至元) 4년(1267년)에 이 구역을 고쳐 요동로(遼東路)로 만들었고 23년(1286년)에 다시 개원로(開元路)로 고쳤다. 통솔하는 것은 주로 여진인(女真人)이다. (출처 바이두)
開元萬戶府 開元萬戶府,蒙古汗國政區名。元太宗於乙未歲(1235)建(一說建於太宗五年,1233)。
治所故址在今吉林省農安縣,或說在俄羅斯烏蘇裏斯克(即雙城子)相對的克拉斯諾雅爾山城;一說在今黑龍江省東寧市境;有說爲今遼寧開原市。至元四年(1267)改爲遼東路,二十三年(1286)又改爲開元路。所統主要爲女真人。
③ 개원로(開元路) : 원조(元朝)의 행정구역에 하나이니, 개원로(開元路)의 관할 구역은 맨 처음에 범위가 매우 넓어서 남쪽으로 장백산(長白山)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요하(遼河)를 마주하였으며 북쪽으로는 흑룡강(黑龍江)을 넘어 외흥안령(外興安嶺)에 도달하였고 동쪽으로는 동해에 다다라 그 영역의 폭과 둘레가 드넓었다.
개원로(開元路)는 원조(元朝)의 행정구역이다. “개원로(開元路)는 옛 숙신(古肅慎)의 땅이다. 수(隋)와 당(唐)나라에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이라 하였다. 당(唐) 초기에는 거장(渠長, 우두머리) 아고랑(阿固郎)이 처음으로 방문하였고 뒤에 마침내 신하된 나라로써 복종하여 그 땅을 연주(燕州)로 만들고 흑수부(黑水府)를 설치하였다.”(출처 원사지리지(元史地理志)) 개원(開元)이라는 이름은 동하(東夏, 금나라 말기 대장군 포선만노(蒲鮮萬奴)가 1215년에 요동에 세워 1272년까지 존립했던 나라 )에서 기원하는데 동하국(東夏國)의 개원로(開元路)라는 옛 제도를 답습하였다. 원(元)나라가 동하(東夏)를 멸한 뒤에 차례로 만호부(萬戶府), 선무사(宣撫司)를 설치하였는데 가장 초기에 소재지(治所)는 지금 흑룡강성(黑龍江省) 동부 지구에 의란현(依蘭縣) 부근, 아니면 영안현(寧安縣) 일대에 두었고 뒤에 황룡부(黃龍府, 지금에 길림성 농안현성(農安縣城)으로 옮겨졌다. 원(元)나라가 중원(中國)을 통일한 뒤, 1286년(원(元) 지원(至元) 23년)에 개원로(開元路)를 설치하여 황룡부(黃龍府)에서 다스리게 하고 요양행성(遼陽行省)에 예속시켰다. 1342년(원(元) 지정(至正) 2년), 함평부(咸平府)로 옮겨 다스리게 하였다.(지금 요녕성(遼寧省) 개원시(開原市) 노성진(老城鎮))
원일통지(元一統志)에서 일컫기를, 개원로(開元路)는,“남쪽으로 장백(長白)의 산들을 누르고 북쪽으로는 경천(鯨川)의 바다를 침범한다. 삼경 고국(三京故國), 오국고성(五國故城) 역시 동북에 있는 하나의 도회지(都會)이다.” 하였다.
“삼경고국(三京故國)”은 발해의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지금 영안현(寧安縣) 발해진(渤海鎮))와 금대(金代)에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 지금에 하얼빈시 아성구(阿城區) 백성(白城))과 동하(東夏)의 남경(南京, 지금 연길시 성자산(城子山))을 가리킨다.
“오국고성(五國故城)”은 요대(遼代)에 오국부 고성(五國部故城)을 가리키니 곧 부아리(剖阿里, 백력(伯力), 지금에 러시아 하바로프스크(哈巴羅夫斯克))와 분노리(盆奴里, 지금에 탕원현(湯原縣) 경내에 쌍하촌(雙河村) 남고성(南古城))와 오리미(奧里米, 지금에 수빈현(綏濱縣) 경내 송화강(松花江) 북쪽 기슭에 오래하(敖來河) 가에 있는 고성(古城)),와 월리독(越里篤, 지금 화천현(樺川縣) 동북 만리하촌(萬里河村))과 월리길(越里吉, 지금 의란현성(依蘭縣城) 북쪽과 송화강(松花江) 남쪽 기슭)이다.
“경천의 바다(鯨川之海)”는 바로 지금에 러시아 오호츠크해(鄂霍次克海)이다. 대덕(大德) 연간(1297—1307년)에 수달달로(水達達路)를 나누어 설치한 뒤 송화강(松花江) 하류와 흑룡강 하류 지구를 그어서 수달달로(水達達路)로 모았다. 개원로(開元路)가 관할하는 구역이 축소되어 겨우 송화강(松花江) 중상류 이남 일대의 지방만 겨우 남았다. 1295년(원(元) 원정(元貞) 원년(元年)), 개원로(開元路)의 관할 구역 안에 조주(肇州) 둔전만호부(屯田萬戶府)를 설치하였다. (지금에 조동시(肇東市) 사참진(四站鎮) 팔리성(八里城)) (출처 바이두)
元朝的政區之一,開元路轄區,最初範圍很廣,南抵長白山,西臨遼河,北逾黑龍江達外興安嶺,東到日本海,幅員遼闊。
開元路 元朝的政區。“開元路,古肅慎之地,隋唐曰黑水靺鞨。唐初渠長阿固郎始來朝,後乃臣服,以其地爲燕州,置黑水府。”(《元史·地理志》)開元之名源於東夏,系沿襲東夏國的開元路舊制。元滅東夏後,先後設置萬戶府、宣撫司,最初的治所在今黑龍江省東部地區依蘭縣附近或寧安縣一帶,後移至黃龍府(今吉林省農安縣城)。元統一中國後,1286年(元至元二十三年)設置開元路,治於黃龍府,隸屬遼陽行省。1342年(元至正二年),移治於咸平府(今遼寧省開原市老城鎮)。
《元一統志》稱:開元路,“南鎮長白之山,北浸鯨川之海,三京故國,五國故城,亦東北一都會也”。“三京故國”是指渤海的上京龍泉府(今寧安縣渤海鎮)、金代的上京會寧府(今哈爾濱市阿城區白城)和東夏的南京(今延吉市城子山);“五國故城”是指遼代五國部故城,即剖阿里(伯力,今俄羅斯哈巴羅夫斯克)、盆奴里(今湯原縣境內雙河村南古城)、奧里米(今綏濱縣境內松花江北岸敖來河畔古城)、越里篤(今樺川縣東北萬里河村)、越里吉(今依蘭縣城北松花江南岸);“鯨川之海”,即今俄羅斯鄂霍次克海。大德年間(1297—1307年),分設水達達路後,松花江下遊和黑龍江下遊地區劃歸水達達路。開元路轄區縮小,僅剩松花江中、上遊以南一帶地方。1295年(元元貞元年),開元路轄區內設置肇州屯田萬戶府(今肇東市四站鎮八裏城)。
☞ 봉천부 지도로 보는 심양(瀋陽)과 개원(開元/開原), 철령(鐵嶺)의 이웃함. (출처 바이두)
☞ 동하국(東夏國) 지도에 나타난 개원(開元) : 동하국은 금나라 말기인 1215년에 요동에 세워져 1272년까지 지속되었던 나라이다. 대진(大眞), 동진(東眞)이라고도 한다. (출처 바이두)
'우리말 만주원류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13 (0) | 2025.03.06 |
---|---|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12 (0) | 2025.02.20 |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10 (0) | 2025.02.06 |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9 (0) | 2025.01.23 |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8 (1) | 2025.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