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권 2
부족(部族) 〈이(二)〉
삼한(三韓) 2
한(漢)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 진번(真畨),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하였으나, 조선(朝鮮)이 막아서 한나라와 통하게 되지 못하였다. 〈사고(師古)가 “진(辰)은 진한(辰韓)이라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통전(通典) : 삼한(三韓)은 후한(後漢) 때 교류를 하였는데 삼한에 하나는 “마한(馬韓)”이라 하였고 둘은 “진한(辰韓)”이라 하였고 셋은 “변한(弁韓)”이라 하였다. 〈진서(晉書)과 양서(梁書) 두 책에는 “변진(弁辰)”이라고 적었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니 오십사 개의 나라가 있다. 그 북쪽에는 낙랑(樂浪)과 남쪽에는 왜(倭)와 닿아있다.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으니 열두 개의 나라가 있다.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닿아있다. 변진(弁辰)은 진한(辰韓)의 남쪽에 있으니 이 역시 열두 나라가 있다. 그 남쪽에도 역시나 왜(倭)와 닿아있다. 이들 모두 칠십여덟 나라이다. 백제(百濟) 〈조목을 달리하여 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는 그 중에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 호(户)이며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이니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있다. 땅을 합치면 사방 사천여 리이다. 동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두고 있는데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니 마한(馬韓)이 가장 크다. 삼한이 공동으로 세워 마한의 씨(種)를 진왕(辰王)으로 삼았고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서 〈위지(魏志)에는 “월지(月支)”라고 적고 있고 통고(通考)에서는 “자지(自支)”라고 적고 있다.〉 온 삼한(三韓) 땅에서 왕 노릇을 하였다. 그 여러 임금의 선조는 모두 마한(馬韓) 씨의 사람들이다. 후한서(後漢書)에서는 마한(馬韓)은 마을(邑落)들이 섞여 살며 성곽(城郭)이 없다. 진한(辰韓)은 늙은 어른들이 스스로 ‘진(秦)나라에서 도망한 사람이니 고통스러운 부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갔더니 마한(馬韓)이 동쪽 경계의 땅을 베어내 자신들에게 내어 주었다.’라고 이야기한다. 더러는 이 진한(辰韓)을 이름하여 진한(秦韓)이라 하는데 성(城)과 울타리(柵), 가옥(屋室)을 두고 있다. 여러 자잘하게 나누어진 마을(邑)에는 각각 거수(渠帥, 우두머리)가 있다. 무역은 철(鐡)을 화폐로 삼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펀펀한 머리로 만들고자 모두들 아기 머리를 돌로 눌러 놓는다. 변진(弁辰)과 한진(韓辰)은 섞여 성곽(城郭)에서 사는데 옷차림이 모두 같고 그 사람들 꼴이 모두 키가 크고 덩치가 있으며(長大) 머리카락이 아름답다. 형벌은 엄준하다. 초기에 조선(朝鮮) 임금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깨졌을 때 곧 그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서 달아나 바닷가 일대로 들어갔는데(入海, ‘入’에는 또한 몰수, 항복하거나 항복시킨다는 뜻이 있다) 마한(馬韓)을 공격하여 이를 깨고서 드디어 한왕(韓王)으로 세워졌다. 준(準)이 뒤에 멸절되자 마한(馬韓) 사람이 옛날처럼 스스로 진왕(辰王)을 세웠다.
위략(魏略) : 조선왕(朝鮮王) 준(凖)이 위만(衛滿)에 깨지자 바닷가 지역으로 달아나 들어갔다.(入海中) 그 아들과 나라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따라서 무릅쓰고서라도 한씨(韓氏)를 성으로 삼았다. 준왕(凖王)이 바다 안(海中)에서 있으면서 조선(朝鮮)과 더불어 왕래하지 못하였다.
위략(魏略) : 초기에 우거(右渠, 조선왕 위만(衛滿)의 손자)가 아직 깨지지 않았을 때 조선의 재상(相) 역계경(厯谿卿)은 우거(右渠)가 자신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까닭에 동쪽으로 진국(辰國)으로 갔는데 이때 백성들이 자기 살던 곳에서 따라 나간 사람이 이천 호(户)였고 역시 조선(朝鮮), 진번(真畨)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분(王莽)의 시대(왕분의 연호인 지황(地皇) 즉 기원후 20년 ~ 23년)가 되어 염사착(亷斯鑡)이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어 낙랑에 와서 항복하고자 하였다. 이때 자신의 마을을 나와 어떤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쓰는 말이 한인(韓人)의 것이 아니었다. 이를 물어보니 “우리 한인(漢人)은 나를 호래(户來)라고 부른다. 우리 무리 천오백 사람이 산판 일을 하고 있으니 한(韓)에게 잡혀 있은 지 3년이 되었다. 진(辰, 곧 辰韓)의 착(鑡)이 내처 호래(户來)를 데리고 진한을 나가 낙랑군(樂浪郡)에 나아갔다. 낙랑군이 착(鑡)을 큰 배에 타게 하여 진한(辰韓)에 들어가 호래(户來)의 동반 무리를 취하게 하였다. 여전히 호래의 무리 천 명을 얻었지만, 이 중에 오백 사람이 이미 죽었다. 진한(辰韓)은 “우리는 마땅히 속죄의 값을 내야만 할 뿐이다!” 하고는 진한(辰韓)의 만오천 사람과 변한(弁韓)의 포(布) 만오천 필(疋)을 냈다. 착(鑡)이 속죄 값을 거둬들여 낙랑군으로 돌아갔다.
책부원귀(册府元龜) : 한(漢) 건무(建武) 20년(44년), 한국(韓國) 염사(亷斯) 사람 소마시(蘇馬諟)들이 낙랑(樂浪)에 나아와 공물을 올렸다. 제(帝)가 소마시(蘇馬諟)를 봉하여 염사읍군(亷斯邑君)으로 삼고 낙랑군에 예속시켜 사시사철마다 조회하여 알현하게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본기(本紀) : 건무(建武) 20년(44년) 한국인(韓國人)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樂浪)에 나아와 귀순하였다. 〈풀이(注) : 진한(辰韓), 변한(卞韓), 마한(馬韓)을 일러 삼한국(三韓國)이라 하는 것이다.〉
통고(通考) : 영제(靈帝, 재위 기간 168년 2월 17일 ~ 189년 5월 13일) 말기에 한(韓) 예(濊)가 싹 흥성하자 군현(郡縣)을 제재할 수가 없었고, 백성들은 고통과 난리(苦亂)에 시달리며 떠돌다 도망하여 한(韓)으로 들어간 일이 많았다. 헌제(獻帝) 건안(建安, 196년 1월 ~ 220년 3월) 안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屯有), 유염현(有鹽縣) 이남에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둔유(屯有), 유염(有塩) 두 현(縣)은 아울러 한(漢)의 요동(遼東)에 소속된 곳이다.〉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들을 보내어 떠도는 백성들을 거두어 군대를 일으켜 한(韓), 예(濊)를 치게 하니 옛 백성(舊民)들이 조금씩 나왔다. 이 뒤로 한(韓)이 마침내 대방군(帶方郡)에 예속되었다.
삼국(三國)
위지(魏志) : 한(韓)은 대방(帶方) 남쪽에 있고 동서쪽은 바다로 한계가 된다. 남쪽은 왜(倭)와 접해있으니 그 땅은 사방 사천 리(里)는 되는데 세 가지 씨(三種)가 있다. 하나는 마한(馬韓)이라 하고 둘은 진한(辰韓)이라 하며 셋은 변한(弁韓)이라 한다. 진한(辰韓)은 옛날의 진국(古之辰國)이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다. 그 백성들은 유목 생활을 하지 않는 토착민으로 각각 장수(長帥)를 두고 있다. 이 장수를 큰 마을은 신지(臣智)라 이름하는데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아 성곽은 없다. 모두 오십여 나라로 모두어 십만여 호(户)이다. 진왕(辰王)이 월지국(月支國)에 소재지를 두고 다스렸다. 위(魏) 경초(景初, 237년 3월 ~ 239년) 때 명제(明帝, 조예(曹叡))가 대방 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 태수(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몰래 보내 바다를 건너 대방과 낙랑 두 군(郡)을 정(定, 대방과 낙랑의 각 영토를 정하라는 말인 듯)하게 하자 이들은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 읍군(邑君, 지방관)의 관인(印綬)을 더 하사하게 하였다. 신지 밑에 사람은 읍장(邑長, 읍의 우두머리)을 주었다. 부종사(部從事, 魏晉 때 중앙과 지방 감찰관인 사예교위(司隸校尉)의 속관) 오림(吴林)이 낙랑(樂浪)이 본디 한국(韓國)을 거느렸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여덟 나라를 갈라서 낙랑(樂浪)에 주었다. 통역자(吏譯)의 전달에 다른 점이 있자 신지(臣智)가 격노하고 한(韓)이 분개하여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﨑離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太守) 궁준(弓遵)과 낙랑 태수(樂浪太守) 유무흥(劉茂興)의 군대가 이들을 쳤는데 준(遵)이 전사하였으나 두 군(郡)이 결국 한(韓)을 멸하였다.
진한(辰韓)은 마한(馬韓) 동쪽에 있다. 스스로 “진(秦)의 부역을 피하여 와서 한국(韓國)으로 갔다.” 하니 지금 이름에 진한(秦韓)이라는 것이 있다. 맨 처음 여섯 나라(六國)가 나뉘어 열두 나라(十二國)가 되었다.
변진(弁辰) 역시 열두 나라이다. 또 여러 작게 나누어진 읍(邑)이 있고 읍마다 각각 거수(渠帥)가 있고 모두어 사, 오만 호(户)이니, 그 열두 나라는 진왕(辰王)에 소속된다. 진왕(辰王)에는 늘 마한(馬韓) 사람을 써서 왕을 만드는데 대대로 이어졌다. 땅에 흙이 걸고 아름답다. 변진(弁辰)과 한(韓)이 뒤섞여 살며 역시나 성곽(城郭)이 없다. 옷차림이나 거처하는 곳은 진한(辰韓)과 같다. 그 독로국(瀆盧國)은 왜(倭)와 더불어 경계를 접하고(接界) 있다. 열두 나라에도 왕(王)이 있다.
진(晉)
진서(晉書) : 마한(馬韓)은 산과 바다 사이에서 살았다. 모두 작은 나라 오십육 곳이 있다. 무제(武帝) 태강(太康, 280년 3월 ~ 289년) 원년(元年, 280년)과 이 년(二年, 281년)에 마한 임금이 자주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드렸다. 칠 년(七年, 286년)과 팔 년(八年, 287년), 십 년(十年, 289년)에 다시 자주 진(晉) 조정에 이르렀다. 태희(太熈) 원년(元年, 290년)에 동이교위(東夷校尉) 하감(何龕)에 나아가 헌물을 올렸다. 함녕(咸寧) 3년(277년)에 다시 왔다. 명년(明年)에 다시금 진(晉, 곧 西晉) 조정에 붙기(内附)를 청하였다. 진한(辰韓)은 늘 마한(馬韓) 사람을 써서 임금(主)을 만들어 대대로 마한 사람이 임금 자리를 서로 승계하더라도 진한(辰韓)은 스스로 임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진한은 흘러 옮겨 다니는 사람(流移之人)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마한(馬韓)에 제압(制)이 되었던 것이다. 태강(太康) 원년(元年, 280년) 진한 왕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공물로 드렸다. 태강 이년(二年) 다시 와서 조회하며 공물을 드렸다. 태강 칠 년에 다시 왔다.
통고(通考) : 삼한(三韓)은 함녕(咸寧) 3년(277년)부터 와서 공물을 올렸다. 다음 해에 다시 진나라 조정에 붙기를 청하였다. 그 임금이 와서 조회하였다. 이 뒤로 들리는 바가 없다. 대체로 백제(百濟), 신라(新羅)에 삼켜진 듯하다. 〈조목을 달리하여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남북조(南北朝)
양서(梁書) : 진한(辰韓)은 애초에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조금씩 나누어져 열두 나라가 되었다. 신라(新羅)가 그 하나이다. 마한(馬韓)은 오십사 나라가 있었고 백제(百濟)가 그 하나이다.
당(唐)
구당서(舊唐書) : 백제국(百濟國)은 마한(馬韓)의 옛 땅(故地)이 된다.
송(宋)
송사(宋史) : 정안국(定安國)은 본디 마한(馬韓)의 씨(種)로 거란(契丹)에게 깨졌었는데 그 장수가 나머지 무리를 규합하여 서비(西鄙)를 지키며 나라를 세워 개원(改元)하고 스스로 정안(定安)이라 일컬었다. 개보(開寳) 3년(970년) 그 왕 열만화(烈萬華)가 여진(女真)을 말미암아서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드렸다.
요(遼)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 고주(髙州) 삼한현(三韓縣) 진한(辰韓)은 부여(扶餘)가 되고 변한(弁韓)은 신라(新羅)가 되며 마한(馬韓)은 고려(髙麗)가 된다. 개태(開泰, 1012년 ~ 1021년) 중에 성종(聖宗)이 고려(髙麗)를 쳐서 삼국(三國)의 유민들을 취하여 현(縣)을 설치하였다.
살펴보면 삼한(三韓)을 한데 모아 일컫는 이름은 “진국(辰國)”이다. 삼한은 한(漢)나라 초기부터 벌써 중원 역사책에 보였고 뒤에 신라(新羅), 백제(百濟)에 병합되었지만, 그 칠십팔 나라의 이름은 위지(魏志) 안에 갖추갖추 실려있다. 나라 이름은 대부분은 “비리(卑離)” 두 글자를 달고 있다. 말하자면 감해비리(監奚卑離), 내비리(内卑離), 피/벽비리(辟卑離), 여래비리(如來卑離)이니 만주어로 이 이름들을 뜯어보면 패륵(貝勒)이 바뀐 소리에 해당되니 바로 “칸/한(汗)”이 한(韓)으로 잘못된 것과 같아서 삼한(三汗)의 여러 패륵(貝勒) 거느림이 체재로 흡수되어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마한(馬韓)에 경우에도 모한(慕韓)이라고도 적고 진한(辰韓) 역시 진한(秦韓)이라고도 적으며 변한(弁韓)도 변진(弁辰)이라고도 적으며 또한 변한(卞韓)이라고도 적는다. 상서 전(尚書傳)에 ‘부여(扶餘)’, ‘간(馯)’이라 아울러 지칭하고 이를 풀이한 정의(正義)에서는 “간(馯)은 한(韓)”이라고 말한다. 당시에 다만 해음(諧音, 한자로 다른 나라 말소리를 맞춘 것)을 썼을 뿐이니 죄다 한어(漢語)가 아니다. 범울종(范蔚宗)이 처음으로 “한국(韓國)”, “한인(韓人)”이라 일컬었고 위지(魏志)에서 드디어 “한지(韓地)”, “한왕(韓王)”이라는 대목이 생기어 심한 것은 “한씨(韓氏)”로 와전되었다. 게다가 ‘변한(弁韓)은 삼한(三韓) 안에 있다’라는 기록이 실린 일은 유독 적다. 사기(史記)를 톺아보면 진번(真畨)에 나온 풀이(注)에서 “‘畨’의 소리는 ‘普(보)’와 ‘寒(한)’의 반절 씩이다. 요동(遼東)에 반한현(潘汗縣)이 있다. 더러는 ‘바로 변한(弁韓)이 굴러 달라진 소리’라 하는데 역시 아직은 옳은 말이라고 정할 수 없다. 더러는 삼한(三韓)이 고려(髙麗)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로 송사(宋史) 고려전(髙麗傳)에 ‘송나라 숭령(崇寧, 1102년 ~ 1106년) 뒤에 삼한통보(三韓通寳)를 주조하였다’라고 하는 글귀가 있었던 탓인 듯하다. 또 요사외기(遼史外紀)에 요(遼)나라 때 삼한국공(三韓國公)이라고 고려 봉호(髙麗封號)를 삼았으니 결국 삼한(三韓) 땅이 깡그리 고려(髙麗)에 들어갔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髙麗)의 영역 역시 삼한(三韓)이 거느린 땅에 소속이 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당시 이 내용을 빌려 쓰기만 하였으니, 채 깊은 연구를 거치지 않았을 따름이다. 요(遼)의 삼한현(三韓縣)에 대해서는 바로 고려의 사로잡힌 집(俘户)들을 취하여 설치한 것이니 아울러 삼한의 옛 땅이 아니다.
☞ 요(遼) 중경도(中京道) 안에 고주(高州) 삼한현(三韓縣) (출처 바이두)
☞ 요 고주 삼한현 위치 (출처 바이두)
欽定滿洲源流考 卷2
部族 〈二〉
三韓
漢
漢書朝鮮傳真畨辰國欲上書見天子朝鮮雍閼弗為通〈師古曰辰謂辰韓之國也〉
通典三韓後漢時通焉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晉梁二書作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百濟〈另條詳後〉是其一國焉大者萬餘户小者數千家各在山海間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魏志作月支通考作自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後漢書馬韓邑落雜居無城郭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或名之為秦韓有城柵屋室諸小别邑各有渠帥貿易以鐡為貨兒生欲其頭扁皆押之以石弁辰與韓辰雜居城郭衣服皆同其人形皆長大美髪而刑罰嚴峻初朝鮮王準為衛滿所破乃将其餘衆走入海攻馬韓破之遂立為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為辰王
魏略朝鮮王凖為衛滿所破走入海中其子及留在國者因冒姓韓氏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
魏略初右渠〈朝鮮王衛滿之孫〉未破時朝鮮相厯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随出居者二千户亦與朝鮮真畨不相往來至王莽時亷斯鑡為辰韓右渠帥欲來降出其邑落見一人其語非韓人問之曰我等漢人名户來我等軰千五百人伐材木為韓所得積三年矣辰鑡因將户來出詣樂浪郡郡令鑡乗大船入辰韓取户來伴輩尚得千人其五百人已死辰韓曰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弁韓布萬五千疋鑡収取直還郡
册府元龜漢建武二十年韓國亷斯人蘇馬諟等詣樂浪貢獻帝封蘇馬諟為亷斯邑君使屬樂浪郡四時朝謁
後漢書本紀建武二十年韓國人率衆詣樂浪内附〈注辰韓卞韓馬韓謂之三韓國也〉
通考靈帝末韓濊並盛郡縣不能制百姓苦亂多流亡入韓者獻帝建安中公孫康分屯有有鹽縣〈屯有有塩兩縣並漢遼東所屬〉以南荒地為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収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韓遂屬帶方郡
三國
魏志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其地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各有長帥大者名臣智散在山海間無城郭凡五十餘國總十萬餘户辰王治月支國魏景初中明帝宻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部從事吴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﨑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辰韓在馬韓東自言避秦役來適韓國今有名之為秦韓者始有六國分為十二國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别邑各有渠帥總四五萬户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土地肥美弁辰與韓雜居亦有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
晉
晉書馬韓居山海之間凡有小國五十六所武帝太康元年二年其王頻遣使貢方物七年八年十年又頻至太熈元年詣東夷校尉何龕上獻咸寧三年復來明年又請内附辰韓常用馬韓人作主雖世世相承而不得自立明其流移之人故為馬韓所制也太康元年其王遣使貢方物二年復來朝貢七年又來
通考三韓自咸寧三年來貢明年又請内附其王來朝自後無聞盖為百濟新羅〈另條詳後〉所吞併
南北朝
梁書辰韓始有六國稍分為十二新羅其一也馬韓有五十四國百濟其一也
唐
舊唐書百濟國為馬韓故地
宋
宋史定安國本馬韓之種為契丹所破其帥糾合餘衆保于西鄙建國改元自稱定安開寳三年其王烈萬華因女真遣使入貢
遼
遼史地理志髙州三韓縣辰韓為扶餘弁韓為新羅馬韓為髙麗開泰中聖宗伐髙麗取三國之遺人置縣
按三韓統名辰國自漢初已見後為新羅百濟所併其七十八國之名備載于魏志國名多繫以卑離二字如監奚卑離内卑離辟卑離如來卑離以滿洲語考之當為貝勒之轉音正猶汗之訛為韓而三汗之統諸貝勒于體制洽相符合也至馬韓亦作慕韓辰韓亦作秦韓弁韓亦作弁辰又作卞韓尚書傳扶餘馯並稱正義謂馯即韓也當時祗以諧音並非漢語范蔚宗始稱為韓國韓人魏志遂有韓地韓王之目甚者至訛為韓氏又如弁韓在三韓中記載獨少考史記真畨注謂畨音普寒切遼東有潘汗縣或即弁韓之轉音亦未可定或有以三韓為髙麗者盖因宋史髙麗傳有崇寧後鑄三韓通寳之文又遼史外紀遼時常以三韓國公為髙麗封號遂謂三韓之地盡入髙麗不知髙麗之境亦屬三韓所統當時假借用之未經深考耳至遼之三韓縣乃取髙麗俘户所置並非其故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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