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권 2
부족(部族) 〈이(二)〉
삼한(三韓) 4
☞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 :
왜인(倭人)은 대방(帯方) 동남 큰 바다 안에 있다. 산과 섬에 기대어 국읍(國邑, 나라와 마을, 또는 도읍지라는 뜻도 되지 않을까 한다)을 만든다. 오래된 백여 나라(國)는 한(漢) 나라 때 조회하여 한나라 임금을 알현한 적이 있다. 지금 역관을 시켜 소통하는 것이 서른 나라(國)이니 군(郡, 대방군)을 통해서 왜(倭)이르는데 해안(海岸)을 따라서 물길로 가다 한국(韓國)을 거치고서 잠깐 남쪽으로 갔다, 잠깐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 기슭(北岸)에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도착하니 칠천여 리(里)이다.
비로소 한 바다(一海)를 건너 천여 리에 대해국(對海國/ 對馬國이라 기록한 다른 자료도 있다)에 이른다. 그 대관(大官, 높은 관직을 말하는 듯)은 비구(卑狗)라 하며 부(副)를 비노모리(卑奴母離)라 한다. 살고 있는 외딴섬(絶島)은 사방 사백여 리(里)는 된다. 그 땅에 산은 험하고 깊은 숲이 많다. 다니는 길이 짐승들의 지름길과 같다. 천여 호(戶)가 있는데 좋은 논밭이 없어 해산물을 먹으며 스스로 삶을 유지한다. 배를 타고 남북을 다니며 장마당에서 식량을 산다.
다시 남쪽으로 한 바다(一海)인 천여 리(里)를 건너게 되는데 “한해(瀚海)”라 이름한다. 이곳을 지나면 한 대국(大國)에 이른다. 이곳 역시 관(官)을 비구(卑狗)라 하고 부(副)를 비노모리(卑奴母離)라 부른다. 사방 삼백 리(里)는 된다. 대나무와 삼림(叢林)이 대부분이다. 삼천쯤 되는 집들이 있고 논밭이 꽤 있지만, 논밭을 지어도 오히려 먹거리를 대기에 부족하여 역시나 남북을 다니며 장마당에서 식량을 사들인다.
다시 한 바다(一海)인 천여 리를 건너면 말로국(末盧國)에 이른다. 4천여 호(戶)가 있다. 산과 바다가 가까운 곳에 사는데 초목이 무성하여 다닐 때 앞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어복(魚鰒, ‘鰒’은 전복) 잡기를 좋아하는데 물이 깊거나 얕거나 모두 물속에 들어가 이 해물을 가져온다. 동남쪽 뭍길로 오백 리(里)로 가면 이도국(伊都國)에 이르는데 관(官)을 이지(爾支)라 부르며 부(副)는 설모고(泄謨觚), 병거고(柄渠觚)라 부른다. 이 이도국에는 천여 호(戶)가 있고 대대로 왕을 두는데 모두 여왕국(女王國)에 소속되어 거느려지니 군사(郡使, 대방군의 사신인 듯)가 왔다갔다하며 늘 머무는 곳이다.
동남으로는 노국(奴國)까지 백 리에 이르는데 관(官)은 시마고(兕馬觚)라 부르며 부(副)는 비노모리(卑奴毋離)라 부른다. 이만여 호(戸)가 있다.
동쪽으로 가면 부미국(不彌國)까지 백 리(里)에 이르는데 관(官)은 다모(多模)라 부르며 부(副)는 비노모리(卑奴毋離)라 부른다. 천여 가(家)가 있다.
남쪽으로 투마국(投馬國)에 이르니 물길로 스무날을 간다. 이곳은 관(官)을 미미(彌彌)라 부르고 부(副)를 미미나리(彌彌那利)라 부르는데 오만여 호(戶)는 된다. 남쪽으로 야마일국(邪馬壹國)에 이르는데 여왕(女王)이 도읍한 곳으로 물길로 열흘을 가고 뭍길로 한달을 간다. 관(官)에는 이지마(伊支馬)가 있고 다음은 미마승(彌馬升)이라 부르며 그 다음은 미마획지(彌馬獲支)라 부르고 다음은 노가제(奴佳鞮)라 부르니 칠만여 호(戸)는 된다.
여왕국(女王國)에서 북쪽에 그 호(戶)의 숫자와 거리는 대략 문서에 실을 수는 있겠으나, 그 나머지 곁에 있는 나라들은 멀리 외떨어져서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그 다음은 사마국(斯馬國)이 있고 다음은 이백지국(已百支國)이 있으며 다음은 이야국(伊邪國)이 있고 다음은 도지국(都支國)이 있다. 다음은 미노국(彌奴國)이 있고 다음은 호고도국(好古都國)이 있으며 다음은 불호국(不呼國)이 있다. 다음은 저노국(姐奴國)이 있고 다음은 대소국(對蘓國)이 있으며 다음은 소노국(蘇奴國)이 있고 다음은 호읍국(呼邑國)이 있다. 다음은 화노소노국(華奴蘇奴國)이 있고 다음은 귀국(鬼國)이 있으며 다음은 위오국(為吾國)이 있고 다음은 귀노국(鬼奴國)이 있다. 다음은 야마국(邪馬國)이 있고 다음은 궁신국(躬臣國)이 있으며 다음은 파리국(巴利國)이 있고 다음은 지유국(支惟國)이 있다. 다음은 오노국(烏奴國)이 있고 다음은 노국(奴國)이 있으니 이는 여왕(女王)의 영역 경계가 다 하는 곳이다.
그 남쪽에 구노국(狗奴國)이 있는데 남자가 왕이 된다. 그 관(官)에는 구고지비구(狗古智卑狗)가 있으나, 여왕(女王)에게 예속되지 않는다. 군(郡, 대방(帶方))에서부터 여왕국(女王國)까지 만 이천여 리(里)이다.
남자 애어른 가릴 것 없이 모두 얼굴을 찔러 먹물로 무늬를 새기고(黥面) 몸에 무늬를 아로새긴다. 예부터 쭉 그 사신들이 중원(中國)의 조정에 나아왔으니 ‘모두 스스로 대부(大夫)라 일컫고 하(夏)나라 우임금의 후예, 소강(少康)의 아들’이라고 하자 이들을 회계(㑹稽)에 봉하였다.
머리를 짧게 짜르고 몸에 문신하여서 뱀들의 해를 피한다. 지금 왜(倭)의 물질하는 사람(水人)들은 물속에 잠겨 어합(魚蛤) 캐기를 좋아하는데 몸에 새긴 문신 역시나 큰물고기나 물새(水禽)를 질리게 만들다가, 뒤에 조금씩 꾸밈의 역할이 되었다. 여러 나라의 문신은 각각 달라서 어떤 나라 사람은 왼쪽에, 다른 나라 사람은 오른쪽에 새기며 크게 새기거나 작게 새기고 사회적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 차이를 둔다. 그 거리를 따져보면 응당 회계(㑹稽) 동야(東治)의 동쪽에 있다.
그 풍속은 음란하여 지나치지 않다. 남자들은 모두 북상투(露紒)를 틀어 올리고서 무명천으로 머리에 묶는다. 그 걸친 옷은 가로 너비이니 그저 천을 묶어 연결하고 얼추라도 이은 솔기가 없다. 부인들은 머리를 풀고 귀밑머리를 구부려 뒤로 늘어뜨린다(屈紒). 만든 옷은 홑이불(单被)같은 것을 그 가운데를 뚫어 머리를 꿰어서 입는다. 벼(禾稻), 모시(紵), 마(麻)를 심고 누에와 뽕나무를 길러 실을 자아내고 길쌈을 하여 가는 모시(細紵), 겸면(縑緜)을 낸다. 그 땅에는 소, 말, 범, 표범, 양, 까치(鵲)가 없다. 병기는 창(矛), 방패(楯) 나무활(木弓)을 쓰는데 나무활은 아래가 짧고 위는 길다. 대나무 살대 더러는 철촉(鐡鏃) 더러는 뼈촉(骨鏃)인데 지닌 무기들은 담이(儋耳)나 주애(朱崖)와 같은 것이 없다. 왜(倭)의 땅은 따뜻하여 겨울이건 여름이건 싱싱한 푸성귀를 먹고 모두 맨 발로 다닌다. 가옥을 두어 부모 형제가 다른 곳에서 누워 쉬며 주단(朱丹, 주사)으로 몸을 바르니 중원(中國)에서 분을 쓰는 것과 같다. 음식은 변두(籩豆)에 담고 손으로 집어 먹는다. 송장은 관(棺)에 두는데 곽(槨)은 없고 흙을 돋우어 무덤(冢)을 만든다. 맨 처음 시신을 열흘 남짓 집에 모셔두는데 이때에 고기를 먹지 않고 상주(䘮主)는 흐느껴 곡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장례를 치르고서 온 집안사람은 물안으로 나아가 몸을 깨끗이 씻으니, 이렇게 하여 마치 비단을 희게 누이듯(練, 또는 小祥祭, 곧 練祭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깨끗하게 하다는 뜻이 더 맞는 듯) 몸을 씻는다. 그들이 먼 길을 드나들며 바다를 건너 중원(中國)에 나아갈 때면 늘 한 사람도 머리를 빗게 하지 않고 서캐나 이를 죽이지 않으며 옷가지가 더러워도 빨지 못하게 하고 고기를 먹지 말게 하며 부인과 잠자리를 말게 하여 마치 상을 당한 사람처럼 하니 이를 이름하여 지쇠/최(持衰)라 한다. 만약 가는 길이 길하고 좋으면 함께 가축과 재물을 돌보지만, 만약 아픈 사람이 생기고 포악스러운 나쁜 일을 만나면 바로 이 환자를 죽이려 드니 그가 지쇠/최(持衰)를 조심하지 못하였다고 여긴다.
진주(真珠), 청옥(青玉)이 나는데 그 산에는 단(丹)이 있고 그 나무에는 녹나무(柟), 상수리나무(杼), 예장(豫樟), 유력(楺櫪), 투강(投橿), 오호(烏號), 풍향(楓香)이 있고 그 대나무는 소(篠, 세죽, 소죽), 간(簳, 소죽), 도지(桃支)이다. 생강, 귤(橘), 산초열매(椒), 양하(蘘荷)가 있는데 이런 재료들로 맛을 돋게 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원숭이(獮猿), 검은꿩(黒雉)이 있다.
그 민간에서는 중요한 일을 치를 때거나 먼 길을 떠날 때면 하는 일이 있으니 문득 뼈를 구워서 점을 치고 그 징조로 길흉을 예측한다. 먼저 점을 치게 된 내력을 알리는데 그 점사를 읽어내는 법은 지금에 구법(龜法)과 같아서 불에 구워 터진 뼈 갈래를 보고서 징조를 점친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자리할 때 부자(父子)나 남녀 구별이 없다.
사람들 성품이 술을 좋아하고〈위략(魏畧) : 그 민간에서는 정세(正嵗, 농력 정월(農曆正月))와 사시(四時)를 알지 못하지만, 다만 봄에 농사와 가을걷이에 대한 기억(또는 기록)을 연대 햇수(年紀)로 삼는다.〉 공경하는 대인(大人)을 만나면 다만 손을 뭉치는 것으로(摶手, 밥을 뭉치듯 손을 한데 말아 뭉친 것이 아닐까 한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는 것에 비긴다. 그 사람들은 장수하여 더러는 백 살이며 더러는 팔구십 살이다.
그 풍속에 나라의 대인(大人)은 모두들 네다섯 부인을 두고 하호(下戶) 중에 더러는 두셋 부인을 둔다. 부인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다.
도적질하고 훔치지 않아 쟁송(爭訟)이 드물다. 법을 범한 것이 가벼운 사람은 그 처자들을 빼앗고 무거운 사람들은 그 가문과 친족들을 멸한다.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에 차이와 질서를 두니 상대에게 신하(백성)로서 복종하기에 충분하다.
토지세와 부세(租賦)를 거두고 곡식과 물자를 갈무리해 두는 곳집(邸閤)이 있다. 나라 나라마다 장마당이 서서 각자 있는 물자를 팔고서 없는 물자를 사는데 대왜(大倭)를 시켜서 거래를 감독하게 한다. 여왕국(女王國)에서 북쪽은 특히나 한 대솔(一大率)을 두어 여러 나라에 범죄자를 검거하여 조사(檢察)하니 여러 나라는 이를 두려워하고 꺼린다. 여왕국은 늘 이도국(伊都國)을 다스리니 나라 안에 자사(刺史, 감찰어사) 같은 역할을 둔 것이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경도(京都, 중원 정권의 수도, 위나라 때는 낙양)에 나아갈 때면, 대방군(帯方郡)의 여러 한국(諸韓國)은 군(郡)의 사신(왜국의 사신이 京都에 나아갈 때 동행하는 대방군의 사신)이 왜국(倭國)에 이르기에 미쳐 모두 나루터(津)로 나와 전송 문서와 받은 선물들을 샅샅이 펼쳐 보이고서(搜露) 여왕(女王)에게 나아갈 때는 조금에 착오도 나지 않게 하였다.
⇒ 원문 ‘王遣使詣京都帯方郡諸韓國及郡使倭國皆臨津搜露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不得差錯’은 “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及郡使倭國,皆臨津搜露,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不得差錯。”로 표점을 하고 있는데 내 실력으로는, 도통 번역이 되지 않는다. 하여 “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及郡使倭國,皆臨津, 搜露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不得差錯。”로 번역하였다.
하호(下戶)가 대인(大人)과 길거리에서 서로 만나게 되면 뒷걸음질 치며 돌아(逡廵) 풀숲으로 들어가고 말을 전달하거나 어떤 사안을 설명할 때면 엉덩이는 땅에 붙이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거나 무릎을 꿇고 두 손은 땅에 대어 상대를 공경한다. 대답할 때 소리는 “희(噫)”라 하니 “그렇습니다(然)”, “네(諾)”에 견줄 수 있다. 그 나라 역시 본래 다른 나라들처럼 남자를 왕으로 삼고 칠팔십 년을 임금 자리에 머물렀었는데 왜국(倭國)이 어지러워지며 서로 공격하고 치면서 해를 거듭하다가 결국 어떤 여인을 공동으로 세웠으니 이름이 “비미호(卑彌呼)”이다. 이 여인이 귀도(鬼道)를 섬기는데 대중을 유혹할 만하였다. 나이가 먹고도 배우자(夫壻)는 없고 남동생(男弟)만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돕게 하였다. 왕이 되고서부터 거의 사람들에게 뵈이는 일이 없이 시녀(婢) 천 명이 자신을 시중들게 하였으며 오직 남자 한 사람을 두어 먹거리를 지급하고서 명령을 전달할 때 드나들게 하였다. 궁실(宫室)이나 누관(樓觀)에서 거처하며 성책(城柵)을 엄격히 마련하여 늘 사람들이 무기를 지니고서 지키며 보호하게 하였다.
⇒ 비미호(卑彌呼) : 비미호(俾彌呼)라고도 쓰여있다. 바이두에서는 이 여인의 삶은 대략 159년 ~ 247년이라 말하고 있다.
여왕국(女王國) 동쪽으로 바다 천여 리를 건너면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倭) 겨레이다. 또다시 주유국(侏儒國)이 그 남쪽에 있는데 사람 키가 서너 자(尺)가 된다.
여왕국과 거리가 사천여 리(里)에 또 나국(祼國)이 있고, 흑치국(黒齒國)이 다시 그 동남쪽에 있는데 뱃길로 일 년을 가면 이를 수 있다.
왜(倭)의 땅에 대해 물어보면, 외따로 바다 안에 주도(洲島)에 있다 하고 더러는 따로 떨어졌거나 더러는 이어져 그 땅에 둘레는 오천여 리라고 한다.
경초(景初, 魏 명제의 연호, 237년 3월 ~ 239년) 2년 6월에 왜(倭) 여왕이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들을 보내 대방군(郡)에 나아와 천자(天子, 魏 明帝)에 나아와 뵙고 선물을 올리기를 요구함에 대방군 태수(太守) 유하(劉夏)가 사신을 보내 이들을 데리고 경도(京都, 지금에 낙양)에 나아가게 하였다. 그해 12월 조서(詔書)를 내려 왜(倭) 여왕에게 보답하여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 친위왜왕(親魏倭王) 비미호(卑彌呼)에게 내리는 칙명(制詔) :
대방 태수(帯方太守) 유하(劉夏)가 사신을 파견하여 그대의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와 차사(次使) 도시우리(都市牛利)를 보냈으니 이들은 그대가 보낸 남자 노비(生口) 네 사람과 여자 노비(生口) 여섯 사람, 반포(班布, 염색한 목면천) 두 필(匹) 두 장(丈, 1장은 3.33미터로 길이나 높이를 나타내는 단위임)을 받들고서 왔다. 그대가 있는 곳은 멀고도 멀리 있는데 마침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이는 그대의 충효(忠孝)인지라 내가 깊이 아끼노라! 이제 그대를 친위왜왕(親魏倭王)으로 삼고서 가(假, 비공식의) 금인자수(金印紫綬, 금도장에 자줏빛 술띠를 매달았으니 丞相과 相國에게 주던 도장)를 내려 이 도장을 싸서 봉하여 대방 태수(帯方太守)에게 부쳐서 그대를 비공식(假)으로 제수하게 하리니 그대는 겨레 사람들은 편안하게 다독여, 겨레 사람들이 힘써 효성스럽고 순응하도록 만들라!
그대가 보내온 사신 난승미(難升米)와 우리(牛利)는 바다를 건너 멀리 와, 그 온 길이 수고롭고 고생스러웠다. 이제 난승미(難升米)를 솔선중랑장(率善中郎将)으로 삼고 우리(牛利)를 솔선교위(率善校尉)로 삼아서 은인(銀印)에 푸른 술띠(青綬)를 비공식(假)으로 수여하게 할 것이다. 내가 이들을 만나보고 위로하며 선물을 하사하고서 돌려보내려 한다. 이제 진홍빛 바탕(絳地)에 교룡(交龍) 무늬가 베풀어진 비단(錦) 다섯 필(匹) 〈신송(臣松)은 ‘地’가 응당 ‘綈(거칠거나 두텁게 짠 깁)’가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한(漢) 문제(文帝) 때 방문한 이들이 조의(皂衣)를 입었는데 이 옷을 “익제(弋綈, 검빛에 거칠게 짠 비단)”라 하였음이 이것이다. ‘地’라는 글자가 실체를 갖추지 못하였으니 위조(魏朝)의 실수가 아니라 곧 옮겨 베낀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진홍빛(絳) 바탕에 물결무늬(縐)에 좁쌀(粟) 꼴이 새겨진 모직물 10장, 꼭두서니로 붉게 물들인(蒨絳) 직물 50필, 감청(紺青)색 직물 50필로 그대가 바친 공물에 대한 값으로 보답하노라. 나아가 그대에게 특별히 감(紺)빛 바탕에 구불 무늬(句文)가 진 비단(錦) 3필, 곱게 아롱진 꽃이 베풀어진 모직물 5장, 흰 비단(白絹) 50 필. 금 8량(兩), 다섯 자 칼(刀) 2자루, 동거울(銅鏡) 100매, 진주, 연단(鈆丹, 鉛丹) 각각 50근(斤)을 내리니, 모두 싸서 봉하여 난승미(難升米)와 우리(牛利)에게 부친다. 이들이 돌아가서 목록의 물건이 도착해 받게 되면 남김없이 그대의 나라 사람들에게 펼쳐 보여야 하니, 그리하여 국가(國家)가 그대를 아끼고 있음을 알게 할지어다! 따라서 정중하게 그대에게 좋은 물건을 하사하는 것이다.”
⇒ ‘假’에 대한 풀이 : 중원 역사에 ‘假王’이란 것이 있으니, 임시의, 비공식(非正式)으로 명 받은 왕으로, 이 역시 왕이다. 왕(王)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지위 역시 왕과 같지만, 이 권리와 지위를 계승할 권한은 없다. 이런 형태의 왕이 발생하는 것은 전쟁이나 정치 투쟁 과정에서 세도가나 권세가로 인한 것이지만, 다만 황족 종실이 아니라서 정상적으로 합법적으로 왕의 작위를 획득할 수가 없어 몇 가지 비정상적인 수단을 통해 획득하고, 일반적으로 그 뒤에 합법적인 왕의 작위를 얻을 수 있다. 다만 그 ‘假王’으로 있던 사람이 권력을 잃으면 왕이라는 작위를 보존하기 어렵다.(출처 바이두)
정시(正始) 원년(元年, 240년) 태수(太守) 궁준(弓遵)이 건중교위(建中校尉) 제준(梯儁)들을 보내어 조서(詔書, 황제의 명령서), 인수(印綬, 도장과 끈)를 받들고 왜국(倭國)에 나아가 왜왕(倭王)을 배가(拜假)하였다. 아울러 조(詔, 역시 황제의 명령서)를 싸서 주고 금과 비단(帛), 아롱진 꽃무늬 비단(錦), 모직물(罽), 칼, 거울, 고운 빛깔 무늬로 꾸민 깃발과 옷가지(采物)를 하사하였다. 왜왕(倭王)은 이 사신을 통하여 표(表, 자기 심정을 솔직히 기술해 임금에 올린 글)를 올려서, 조서와 은혜로운 하사 물(物)에 대한 고마움의 답을 하였다.
그 4년 왜왕(倭王)이 다시 사신 대부(大夫) 이성기(伊聲耆), 액야구(掖邪狗)들 여덟 사람을 보내 노비(生口), 왜(倭)의 아롱진 꽃무늬 비단(錦), 붉고푸른 비단(絳青縑), 솜옷(緜衣, 이 솜은 누에의 겉에 보슬보슬 엉긴 솜을 거둔 것이라 한다), 비단과 삼베, 무명천(帛布), 단목(丹木), 부(𤝔), 단궁(短弓), 화살(矢)을 바쳤다. 액야구(掖邪狗)들을 하나같이 솔선중랑장(率善中郎将)에 제수하고 도장에 인끈(印綬)을 하사하였다. 그 6년에 조서를 내려 왜(倭)의 난승미(難升米)에게 누런 깃발(黄幢)을 하사하고 이를 군(郡)에 부쳐 비공식 제수(假授)를 하였다.
⇒ 배가(拜假) : 배가(拜假)는 ‘承制拜假’의 뜻을 포함한 것이 아닌가 한다. ‘승제(承制)’란 “황제의 명을 받아 편의대로 일을 다스린다.”라는 말이고 ‘拜假’는 “임시 관직에 제수하다.”라는 말이다. ‘假’는 임시, 대리하다, 실질적이지 않다, ‘의탁’의 의미도 가진 ‘가탁하다’는 등 여러 뜻이 있다. 왜국은 위나라의 실질적인 영향권과는 물리적 거리가 멀어서 일종에 위나라의 자치주 격으로 “임시, 정식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편의대로 자율적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에서 “가(假)”를 쓰지 않았나 싶다.
⇒ 부(𤝔) : 본디 ‘䍸’라고 쓴다. 양과 닮았다(似羊). 산해경(山海經)에는 ‘猼’로 쓰여있다. 기산에 짐승이 있으니 그 꼴이 양과 같으나 꼬리가 아홉이요 귀가 넷이며 눈이 등 뒤에 달렸으니 박이(猼訑)라 이름한다. 이를 몸에 차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基山有獸,狀如羊,九尾四耳,目在背,名曰猼訑,佩之不畏。) 기산은 단원산 동쪽 삼백 리에 있다.(亶爰山東三百里, 단원산은 지금에 중국 광동 일대라고 하는데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
그 8년 태수 왕기(太守王頎)가 관(官)에 당도하였다. 왜(倭) 여왕 비미호(卑彌呼)가 구노국(狗奴國) 남자 왕(男王) 비미궁호(卑彌弓呼)와 평소에 사이가 좋지 못하여 왜대사(倭載斯), 오월(烏越)들을 보내어 군(郡)에 나아가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하였다. 새조연사(塞曹椽史, 변방의 郡에 설치한 관원으로 변방의 사무를 담당)인 장정등(張政䓁)을 파견하고 인하여 조서(詔書)와 누런 깃발(黄幢)을 지니고 가서 난승미(難升米)를 배가(拜假)하고 격문(檄)을 만들어 알렸다.
비미호(卑彌呼)가 죽자 무덤(冢)을 크게 만들었으니 지름이 백여 보(歩)에다 순장한 사람이 노비 백여 사람이었다.
다시금 남왕(男王)이 서자 나라 안은 복종하지 않았고 다시 서로 해치고 죽였다. 이때를 맞아 천여 사람을 죽이고 옛날처럼 비미호(卑彌呼)의 종녀(宗女) 일여(壹與)를 세웠다. 나이 열셋에 왕이 되자 나라 안은 드디어 안정을 찾았다. 정등(政䓁)이 격문(檄)으로 일여(壹與)에게 알리자 일여(壹與)는 왜(倭) 대부(大夫) 솔선중랑장(率善中郎将) 액야구(掖邪狗)들 스무 사람을 시켜 정등(政等)을 보내고 돌아오게 하였는데 이 길에 대(臺)에게 나아가 남녀 노비(生口) 설흔 사람을 바치고 흰진주/구슬(白珠) 오 천(千), 공청대구주(孔青大句珠) 두 매, 남다른 무늬가 섞여 베풀어진 비단 이십 필을 공물로 드렸다.
魏志卷三十 倭人傳 倭人在帯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為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從郡至倭循海岸水行歴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始度一海千餘里至對馬國其大官曰卑狗副曰卑奴毋離所居絶島方可四百餘里土地山險多深林道路如禽鹿徑有千餘戶無良田食海物自活乘船南北市糴又南渡一海千餘里名曰瀚海至一大國官亦曰卑狗副曰卑奴母離方可三百里多竹木叢林有三千許家差有田地耕田猶不足食亦南北市糴又渡一海千餘里至末盧國有四千餘戶濵山海居草木茂盛行不見前人好捕魚鰒水無深淺皆沈沒取之東南陸行五百里到伊都國官曰爾支副曰泄謨觚柄渠觚有千餘戶世有王皆統屬女王國郡使徃来常所駐東南至奴國百里官曰兕馬觚副曰卑奴毋離有二萬餘戸東行至不彌國百里官曰多模副曰卑奴毋離有千餘家南至投馬國水行二十日官曰彌彌副曰彌彌那利可五萬餘戶南至邪馬壹國女王之所都水行十日陸行一月官有伊支馬次曰彌馬升次曰彌馬獲支次曰奴佳鞮可七萬餘戸自女王國以北其戶數道里可畧載其餘旁國逺絶不可得詳次有斯馬國次有已百支國次有伊邪國次有都支國次有彌奴國次有好古都國次有不呼國次有姐奴國次有對蘓國次有蘇奴國次有呼邑國次有華奴蘇奴國次有鬼國次有為吾國次有鬼奴國次有邪馬國次有躬臣國次有巴利國次有支惟國次有烏奴國次有奴國此女王境界所盡其南有狗奴國男子為王其官有狗古智卑狗不屬女王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男子無大小皆黥面文身自古以来其使詣中國皆自稱大夫夏后少康之子封於㑹稽斷髪文身以避蛟龍之害今倭水人好沈沒捕魚蛤文身亦以厭大魚水禽後稍以為飾諸國文身各異或左或右或大或小尊卑有差計其道里當在㑹稽東治之東其風俗不滛男子皆露紒以木綿招頭其衣横幅但結束相連略無縫婦人被髪屈紒作衣如单被穿其中央貫頭衣之種禾稻紵麻蠶桑緝績出細紵縑緜其地無牛馬虎豹羊鵲兵用矛楯木弓木弓短下長上竹箭或鐡鏃或骨鏃所有無與儋耳朱崖同倭地溫暖冬夏食生菜皆徒跣有屋室父母兄弟卧息異處以朱丹塗其身體如中國用粉也食飲用籩豆手食其死有棺無槨封土作冢始死停喪十餘日當時不食肉䘮主哭泣他人就歌舞飲酒已𦵏舉家詣水中澡浴以如練沐其行来渡海詣中國恒使一人不梳頭不去蟣蝨衣服垢汚不食肉不近婦人如喪人名之為持衰若行者吉善共顧其生口財物若有疾病遭暴害便欲殺之謂其持衰不謹出真珠青玉其山有丹其木有柟杼豫樟楺櫪投橿烏號楓香其竹篠簳桃支有薑橘椒蘘荷不知以為滋味有獮猿黒雉其俗舉事行来有所云為輙灼骨而卜以占吉凶先告所卜其辭如令龜法視火坼占兆其㑹同坐起父子男女無别人性嗜酒〈魏畧曰其俗不知正嵗四時但記春耕秋収為年紀〉見大人所敬但摶手以當跪拜其人壽考或百年或八九十年其俗國大人皆四五婦下戶或二三婦婦人不滛不妬忌不盗竊少爭訟其犯法輕者沒其妻子重者滅其門戶及親族尊卑各有差序足相臣服收租賦有邸閤國國有市交易有無使大倭監之自女王國以北特置一大率檢察諸國諸國畏憚之常治伊都國於國中有如刺史王遣使詣京都帯方郡諸韓國及郡使倭國皆臨津搜露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不得差錯下戶與大人相逢道路逡廵入草傳辭說事或蹲或跪兩手㨿地為之恭敬對應聲曰噫比如然諾其國本亦以男子為王住七八十年倭國亂相攻伐歴年乃共立一女子為王名曰卑彌呼事鬼道能惑衆年已長大無夫壻有男弟佐治國自為王以来少有見者以婢千人自侍唯有男子一人給飲食傳辭出入居處宫室樓觀城柵嚴設常有人持兵守衛女王國東渡海千餘里復有國皆倭種又有侏儒國在其南人長三四尺去女王四千餘里又有祼國黒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参問倭地絶在海中洲島之上或絶或連周旋可五千餘里景初二年六月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劉夏遣吏将送詣京都其年十二月詔書報倭女王曰制詔親魏倭王卑彌呼帯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次使都市牛利奉汝所獻男生口四人女生口六人班布二匹二丈以到汝所在踰逺乃遣使貢獻是汝之忠孝我甚哀汝今以汝為親魏倭王假金印紫綬装封付帯方太守假授汝其綏撫種人勉為孝順汝来使難升米牛利渉逺道路勤勞今以難升米為率善中郎将牛利為率善校尉假銀印青綬引見勞賜遣還今以絳地交龍錦五匹〈臣松之以為地應為綈漢文帝着皂衣謂之弋綈是也此字不體非魏朝之失則傳寫者誤也〉絳地縐粟𦋺十張蒨絳五十匹紺青五十匹荅汝所獻貢直又特賜汝紺地句文錦三匹細班華𦋺五張白絹五十匹金八兩五尺刀二口銅鏡百枚真珠鈆丹各五十斤皆装封付難升米牛利還到録受悉可以示汝國中人使知國家哀汝故鄭重賜汝好物也正始元年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儁䓁奉詔書印綬詣倭國拜假倭王并齎詔賜金帛錦𦋺刀鏡采物倭王因使上表荅謝詔恩其四年倭王復遣使大夫伊聲耆掖邪狗䓁八人上獻生口倭錦絳青縑緜衣帛布丹木𤝔短弓矢掖邪狗等壹拜率善中郎将印綬其六年詔賜倭難升米黄幢付郡假授其八年太守王頎到官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遣倭載斯烏越等詣郡說相攻擊状遣塞曹椽史張政䓁因齎詔書黄幢拜假難升米為檄告喻之卑彌呼以死大作冢徑百餘歩徇𦵏者奴婢百餘人更立男王國中不服更相誅殺當時殺千餘人復立卑彌呼宗女壹與年十三為王國中遂定政䓁以檄告喻壹與壹與遣倭大夫率善中郎将掖邪狗䓁二十人送政等還因詣臺獻上男女生口三十人貢白珠五千孔青大句珠二枚異文雜錦二十匹
☞ 강희자전(康熙字典) : 남(枏) 〈집운(集韻) : 소리는 남(南)이다. (集韻音南) 설문(説文) : 나무 이름이니 매화(梅)이다. (木名梅也) 사기 화식전 : 강남에서 ‘枏’와 ‘梓’가 난다. 호작의 산(虖勺之山) 나무 중에 ‘재(梓)’와 ‘남(枏)’이 겁나게 많다. (史記貨殖傳江南出枏梓山海經虖勺之山其木多梓枏) 임방의 술이기(述異記) : 황금산(黄金山)에 남목(枏木)이 있는데 한 해(一年)에 동쪽 나무에 꽃이 활짝 피는 대시 서쪽 나무 꽃은 시들다면 다른 한 해는 서쪽에 꽃이 활짝 피고 동쪽 꽃이 시든다. 장화(張華)가 이 나무를 교양목(交譲木)이라 일렀다. (任昉述異記黄金山有枏木一年東榮西枯一年西榮東枯張華謂之交譲木) 또 이아(爾雅) 석목(釋木) : 매남(梅枏). 곽(郭)의 풀이(註) : 행(杏)과 닮았으나 신맛이 난다. (又爾雅釋木梅枏 郭註似杏而酢) 육소광요 : 이아(爾雅)에 나온 매남(梅枏)은 곧 예장과 닮은 것이니 옛날에는 ‘편남예장(楩楠豫章)이라 일컬었다. 경순(景純, 이아에 주를 단 곽박(郭璞)의 字)이 ‘행(杏)와 닮았으나, 열매가 시다’로 풀이한 점은 타당성을 얻지 못한다. (陸疏廣要爾雅之梅枏乃似豫章者古稱楩楠豫章景純不得以似杏實酢解之) 또 광운(廣韻) : 여(汝)와 염(鹽)의 반절씩이다. 집운(集韻)과 회운(韻會) : 여(如)와 점(占)의 반절씩이다. ... 소리는 염(冉)이고 뜻은 아울러 같다. (又廣韻汝鹽切集韻韻會如占切正韻而占切𡘋冉平聲又廣韻而琰切音冉義𡘋同) 더러는 ‘柟’이라고도 쓰며 민간에서는 ‘楠’라 쓰는데 그르다. (或作柟俗作楠非)〉 (출처 강희자전. 아래 낱말 풀이도 같다.)
☞ 예장(豫樟) :
《설원(說苑) 건목(建本)》 : 흙이 쌓여 산을 이루면 예장(豫樟)이 그 산에서 난다. (《說苑·建本》: 土積成山,則豫樟生焉。) 《회남자(淮南子) 제속훈(齊俗訓)》 : 편남예장(楩柟豫樟)을 베고서 쪼개어 나누어 관곽(棺槨)을 만들기도 하고 기둥과 대들보(柱梁)를 만들기도 한다. 나누어 쪼개며 나무결을 반대로 하거나 결대로 하여 쓰임새가 만가지 방법이나, 이 만 가지 쓰임은 나무 하나의 질박함 때문이다. (《淮南子·齊俗訓》: 伐楩柟豫樟而剖梨之,或為棺槨,或為柱梁,披斷撥檖,所用萬方,然一木之樸也)
《전국책》 : 형(荊) 땅에 긴 소나무(長松), 문재(文梓), 편남예장(楩楠豫樟)이 있으나, 송(宋) 땅에는 긴 나무(長木)가 없다. 이는 ,此猶비단(錦繡)이 之與短褐也。(《戰國策》: 荊有長松、文梓、楩、楠、豫樟,宋無長木,此猶錦繡之與短褐也。)
《산해경(山海經) 중산경(中山經)》 : 또 동쪽에 4백 리 가면 ‘사산(蛇山)’이라 하는데 그 산 위에 황금이 많고 그 아래는 흰흙(堊)이 많다. 그 나무는 순(栒)나무가 많고 예장(豫樟)이 많으며 그 풀은 가영(嘉榮), 소신(少辛, 족두리풀)이 많다. (又東四百里,曰蛇山,其上多黃金,其下多堊,其木多栒,多豫樟,其草多嘉榮、少辛。)
《수경주(水經注) 공수(贛水)》 : 《예(禮) 두위의(斗威儀)》 :군(君)의 정치와 쟁송(政訟)이 공평하면 예장(豫樟)은 늘 생겨난다. (《禮·斗威儀》曰:君政訟平,豫樟常為生。)
《廣韻·章》: 장(樟, 장목, 녹나무):예장(豫樟)이니 나무 이름이다. (樟:豫樟木名。)
《태평광기(太平廣記) 예장(豫樟)》 : 예장(豫樟)이라는 나무는 생겨난 지 7년이 되어서야만 사람들이 이 나무를 알아차릴 수 있다. (豫樟之為木也,生七年而後可知也。)
☞소(篠) : 죽보(竹譜, 戴凱之) : 서경(書)에서 “소(篠), 탕(簜)이 벌써 널리 퍼졌다.” 하니 정현(鄭𤣥)이 “소전(篠箭), 탕(簜)은 큰 대나무(大竹)이다.” 하였다. ...... 이아 석초(爾雅釋草) 조전(篠箭)에 대한 소(䟽)에서 “소(篠)는 일명 전(箭)이다.” 하였다. (竹譜 (戴凱之) 書云篠簜既敷 鄭𤣥云篠箭簜大竹也 ... 孔氏云篠竹箭 ... 爾雅釋草篠箭䟽云篠一名箭)
☞ 소(篠) : 죽보(竹譜, 李衎) :
소죽(篠竹)은 모두 네 종류이니 하나는 강절(江浙, 장강 하류인 강소와 절강) 사이에서 나온다. 높지 않은 산(山岡)에서 살기를 좋아하며 수십 무(畝)를 이어 뻗어 간다. 높이는 7, 8자(尺)를 넘지 않고 크기는 손가락만큼을 벗어나지 않는다. 가지가 많이 퍼지면서도 짱짱하여 가는 놈은 빗자루(掃箒)를 만들기에 가장 좋다.
대개지(戴凱之)의 죽보(竹譜)에 “추소(篲篠)가 푸릇푸릇 넘실대더니 밭두둑을 거치고 황(篁)죽에 이어졌다. 성질이 누구도 심지 못하게 하여 기어코 바위 언덕배기여야 한다.” 하였다.
광지(廣志)에서 “추소(篲篠)는 쓰는 빗자루에 알맞으니 세죽(細竹)이다. 한 종류는 노군(魯郡) 추현(鄒縣, 산동성 鄒城市) 역양(嶧陽)에서 나는데 그 꼴과 빛이 다른 소(篠)와 다르지 않지만, 질(質)이 유독 질기고 촉촉하여 생관(笙管, 笙 관악기)에 알맞다. 다른 대나무는 여러 방면에서 이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대개지(戴凱之)의 죽보(竹譜)에 “또 동류(族類)가 있어 이에 역양(嶧陽)에서 뻗어나니 매달린 뿌리가 백인(百仭, 8자(尺)이 1仭)이고 우뚝 선 줄기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이 대나무를 가려 만든 소생(簫笙)은 그 소리가 사방에 퍼진다.” 하였다.
하나는 해도(海島)에서 난다. 그 속은 알차고 밖은 튼튼하다. 뽑혀도 굽혀지지 않고 가지가 작고 잎이 성기게 나며 형태가 거친 힘줄(苦䈥)과 같다. 이름은 해소(海篠)라 한다.
대개지(戴凱之)의 죽보(竹譜)에 “역시 해소(海篠)가 있으니 섬에 작으나 높은 산(島岑)에서 난다. 마디가 커 한 자(尺)를 채우며 줄기는 한 심(尋, 8자(尺))을 채우지 못한다. 형태는 구불텅 자라지 않으며 빛깔은 황금과 같다.” 하였다. 풀이(注)에서 “교주(交州, 지금 광동, 광서, 베트남 북부) 바다 석림(海石林) 안에 두루두루 이 대나무가 많이 있다.” 하였다.
하나는 고소(姑蘓, 소주시) 영암산(靈巖山) 안에서 난다. 아주 짧아 높은 놈은 두 자(尺)를 넘지 않는다. 한 가지에 잎이 셋이라 야단스럽고 자잘하여(冗細) 어루만지며 즐길만하다. 토박이들은 ‘진소(趁篠)’라고 부른다.” 하였다.
산해경(山海經) 중차사경(中次四經)에 “이산(釐山)의 맥이 시작되고(首) 다시 서쪽 삼백 리(里)를 ‘두산(牡山)’이라 하니 그 위에는 문석(文石. 무늬진 돌을 말하는 듯)이 많고 그 아래에는 죽전(竹箭)과 죽미(竹䉋)가 많다.” 하였다. 다시 “구산(求山)에 미(䉋)가 많다.” 하니 풀이(注)에 “소(篠)와 같은 부류이다.” 하였다. 다시 “포산(暴山)에 죽(竹), 전(箭), 미(䉋), 균(箘)이 많다.” 하니 풀이(注)에서 “균(箘) 역시 소(篠)와 같은 유이니 화살(箭) 쓰임에 알맞다.” 하였다.
竹譜 (李衎, 四庫全書本)/卷04 篠竹凡四種一出江浙間喜生山岡之上連延數十畝髙不過七八尺大不踰指枝繁勁細為掃箒最良戴凱之竹譜曰篲篠蒼蒼接町連篁性不卑植必也巖岡廣志曰篲篠中掃箒細竹也一出魯郡鄒縣嶧陽形色與他篠不殊質特堅潤宜為笙管諸方莫及戴凱之竹譜曰又有族類爰挺嶧陽懸根百仭竦幹風生簫笙之選有聲四方一出海島上内實外堅㧞之不曲枝葉稀少狀若苦䈥名為海篠戴凱之竹譜曰亦有海篠生於島岑節大盈尺榦不滿尋狀不曲生色如黄金注云交州海石林中偏饒此竹一出姑蘓靈巖山中極短髙者不過二尺一枝三葉冗細可玩土人呼為趁篠山海經云中次四經釐山之首又西三百里曰牡山其上多文石其下多竹箭竹䉋又云求山多䉋注云篠屬又云暴山多竹箭䉋箘注箘亦篠類中箭
☞강희자전 : 간(簳, 조릿대) 〈소리는 간(幹)이다. 소죽(小竹)이다. 장형(張衡) 남도부(南都賦) : 그 대나무는 소(篠), 간(簳), 고(箛), 추(箠)이다.” 하니 이선(李善)의 풀이(註)에 “간(簳)은 소죽(小竹)이다. 습유기(拾遺記) : 봉래(蓬萊, 봉래산은 산동 바다 안에 있다는데 설이 분분하다)에 푸른옥같은 빛깔(浮筠, 浮筠은 玉의 채색을 뜻함)의 간(簳)은 잎이 푸르고 줄기(莖)는 자색(紫)이며 열매(子)는 크기가 구슬/진주(珠)만 하다. 푸른 난새(青鸞)가 그 대나무 위에 모이면 바람이 이르는데, 잎사귀 가지들이 팔랑거려 소리가 일어나니, 마치 종(鐘)과 옥 경쇠(磬)가 자아낸 듯하다. 또 해편(篇海) : 전간(箭簳)이다. 열자(列子) 은탕편(殷湯篇) : 연(燕)나라의 소뿔(角)로 만든 호(弧), 형(荊) 땅의 / 북방의 쑥(朔蓬)으로 만든 간(簳, 살대). 산해경(山海經) : 휴여의 산(休與之山)에 풀(草)이 있는데 그 꼴이 저(箸)와 같고 붉은 잎사귀에 모여서 산다. 이름이 숙조(夙條)라 하는데 간(簳)이라 할 수 있다. 진림(陳琳) 무고부(武庫賦) : 화살에는 초동(燋銅), 독철(毒鐵), 간촉(簳鏃), 오후(鳴鍭)이다. 또 광동신어(廣東新語) : 의사(薏苡)는 일명 간주(簳珠)이다. 또 유편(類篇) : ‘居’와 ‘案’의 반절씩이니 화살대 끝에 베푼 깃털(箭羽)이다. 광운(廣韻) : ‘笴(화살대 가)’와 같다.〉
⇒ 열자집해(列子集釋) : 백준(伯峻) 살피건대, 「삭(朔)」 글자는 응당 「형(荊)」이니 꼴이 가깝워 착오를 일으킨 듯하다. 고공기(考工記)에 「燕之角,荊之幹,此材之美者也」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이 문장의 뿌리이다. 또 「형(荊)」과 「연(燕)」이 대응하여 들었으니 범범히 삭방(朔方)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列子集釋/卷05 伯峻案:「朔」字當為「荊」,形近而誤。考工記,「燕之角,荊之幹,此材之美者也」,即此文所本。且「荊」與「燕」對舉,似非泛指朔方而言。
簳〈廣韻集韻正韻𡘋古旱切音幹小竹也張衡南都賦其竹則篠簳箛箠李善註簳小竹也拾遺記蓬萊有浮筠之簳葉青莖紫子大如珠有青鸞集其上風至葉條翻起聲如鐘磬 又篇海箭簳列子殷湯篇燕角之弧朔蓬之簳山海經休與之山有草焉狀如箸赤葉而叢生名曰夙條可以為簳陳琳武庫賦矢則燋銅毒鐵簳鏃鳴鍭 又廣東新語薏苡一名簳珠 又類篇居案切箭羽 廣韻同笴〉
☞ 강희자전 : 도(桃): 또 도지(桃枝)이니 대나무 이름이다. 《이아(爾雅) 석초(釋草)》 : 도지(桃枝)는 네 치(四寸)마다 마디가 있다. 갈(䈓):대나무 이름이다. 《박아(博雅)》 : 갈산(䉈䈓) : 산(䉈)은 도지(桃枝)이다. 멸(篾): 《서(書) 고명(顧命)》에서 겹 멸방석(篾席)을 폈다 하니 《전(傳)》에서 멸(篾)은 도지죽(桃枝竹)이다 하고 《소(疏)》에서 멸(篾)은, 잘리거나 꺾인 대나무(折竹)에 푸른빛을 차례지어 엮은 것이다.
桃: 又桃枝,竹名。《爾雅·釋草》桃枝四寸有節。䈓:竹名。《博雅》䈓䉈,桃枝也。篾: 《書·顧命》敷重篾席。《傳》篾,桃枝竹。《疏》篾,折竹之次靑者。
☞죽보(竹譜 戴凱之 晉) :
운당(篔簹, 왕대)은 사통(射筒, 마디가 없어 살통을 만드는 대나무 이름)이요, 임어(箖箊)는 도지(桃枝)이다. 길쭉하고 시원하며 가녀린 잎사귀, 맑은 거죽과 엷은 껍질에 수천 수백이 서로들 어지러우나 크고 가녀림에 차이가 있다.
여러 죽(竹)은 껍질과 잎이 서로 비슷하지만, 운당(篔簹)이 가장 크다. 큰 놈은 찜통(甑)에 알맞고 순(笋, 죽순) 역시 살통(射筒)을 만드는 데에 알맞다. 엷은 살갗에도 가장 길어, 마디는 저전(貯箭, 화살을 모아 두는 통을 말하는 듯)을 만든 데에 알맞으니 이로 인해 이름이 지어졌다.
임어(箖箊)는 잎이 얄팍하고 넓어 월녀(越女)가 검(劔)을 시험할 때 쓰는 죽(竹)이 이것이다. 도지(桃枝)는 그 중에 가장 얇은 놈이다. 아울러 《방지부(方志賦)》에 보이니, 도지(桃枝)는 껍질이 붉어 이를 엮으면 반들거리면서 짱짱하여 방석으로 쓰기에 괜찮다고 하고 《고명편(顧命篇)》에 이른바 「멸석(篾席)」이란 것이다. 《이아(爾雅) 석초(釋草)》에 「네 치(四寸)가 한 마디(一節)이니 도지(桃枝)가 된다.」 하였다. 곽(郭)의 풀이(注)에서 「죽(竹)이 네 치(四寸)가 한 마디이니 도지(桃枝)가 된다.」 하였다.
내가 본 도지죽(桃枝竹)은 마디가 짧은 놈은 한 치(一寸)를 넘지 않고 긴 놈은 더러 한 자(尺)를 넘기도 하니 예장(豫章, 지금 江西省)에 두루 이 대나무가 있어 그 징험은 멀리에 있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이아(爾雅)》에 실린 풀(草) 유에서 따로 차려 도지(桃枝)를 두었는데 거기에 실린 도지는 분명히 이 죽(竹)은 아니리라.
곽(郭)의 풀이(注)에 「죽(竹)」 글자를 더하였으니 이 글자를 취한 것은 오류이다. 《산해경(山海經)》에 「그 나무에 도지(桃枝)와 구단(鉤端)이 있다.」 하였다. 또 《광지(廣志) 층목편(層木篇)》에 「도지(桃枝)는 주제군(朱提郡)에서 나니 조상(曹爽, 曹魏 때의 권신)이 쓰던 것이다.」 하였다. 그 생긴 꼴을 자세히 톺아보면 오히려 나무에 가까운 것이다. 다만 《이아(爾雅)》에서 말한 도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바, 또 무슨 도지(桃枝)인가? 경아(經雅)에서 말한 두 족(二族)은 결코 방석을 만드는 대나무가 아니다. 《광지(廣志)》는 조(藻)를 죽(竹)이라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후학 중에 종종 오인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竹譜 (戴凱之 晉) :
篔簹射筒,箖箊桃枝。長爽纖葉,清肌薄皮。千百相亂,洪細有差。
數竹皮葉相似,篔簹最大,大者中甑,笋亦中射筒,薄肌而最長,節中貯箭,因以為名。箖箊葉薄而廣,越女試劔竹是也。桃枝是其中最細者。並見《方志賦》。桃枝皮赤,編之滑勁,可以為席。《顧命篇》所謂「篾席」者也。《爾雅‧釋草》云︰「四寸一節為桃枝。」郭注云︰「竹四寸一節為桃枝。」余之所見桃枝竹,節短者不兼寸,長者或踰尺,豫章徧有之,其驗不遠也。恐《爾雅》所載草族,自別有桃枝,不必是竹。郭注加「竹」字,取之謬也。《山海經》云︰「其木有桃枝鉤端。」又《廣志‧層木篇》云︰「桃枝出朱提郡,曹爽所用者也。」詳察其形,寧近於木也。但未詳《爾雅》所云復是何桃枝耳。經雅所說二族,決非作席者矣。《廣志》以藻為竹,是誤,後生學者往往有為所誤者爾。
☞ 죽보(竹譜 李衎 元) :
하나같이 모여서 사는 대나무(竹) 뿌리는 모두 이와 같다. 예컨대 고죽(苦竹), 자죽(慈竹), 황죽(簧竹), 도지죽(桃枝竹), 탕죽(簜竹), 자죽(刺竹), 유아죽(由衙竹), 단죽(䉡竹), 약사죽(釣絲竹)의 유가 이것이다.
도지죽(桃枝竹)은 일명 포규죽(蒲葵竹)이요 일명 적옥지(赤玉脂)이니 강(江)과 절(浙), 양 회(兩淮)에서 나니 곳곳에 이것이 있다. 모여서 살며 그 꼴은 자죽(慈竹)과 같아 마디 길이가 두 자(二尺) 쯤되며 조금 얄팍하다. 위지(魏志)에 “왜국(倭國)에 도지죽(桃枝竹)이 있다.” 하고 산해경(山海經)에서는 “파총의 산(嶓冢之山) 효수(囂水) 가에 도지(桃枝)가 많다.”라고 이르니 지금 기(蘄) 땅에 사람들이 겉껍질을 깎아 취하여 대자리(簟)를 만드는데 반들거리며 차가워 사랑할 만한 사람(可人)과 같으니 예기(禮)에 이른바 겨울에는 호피(虎皮)요 여름에는 도지(桃枝)라고 한 글이 이것이다.
서경(書) 고명(顧命)에 나온 ‘멸석보순(篾席黼純)’에 대해 공안국(孔安國)이 “멸(篾)은 도지죽(桃枝竹)이다.” 하였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사궤연(司几筵, 관직이름)에 ‘화순(畫純, 구름무늬를 그린 비단으로 가선을 두른 방석), 차석(次席)’이 나오는데 정씨(鄭氏)가 “차석(次席)이란 도지죽(桃枝竹)으로 여러 줄을 지어 만든 무늬가 있다.” 하였다. 이아(爾雅)에서 “도지(桃枝)는 네 치(四寸)마다 마디가 있다.” 하였다. 장득지(張得之)가 “도지죽(桃枝竹)은 잎은 종려(椶櫚)와 같고 마디가 네 치(四寸)이며 거죽은 누러며 반들거려 대자리(簟)를 만들만 하다. 유자후(栁子厚)가 이를 도생(桃笙)이라 일렀다.” 하였다.
당지(唐志)에 합주(合州)에서 토산물로 도지죽 저분(桃枝竹箸)을 공물로 바쳤다 하고 석호(石虎, 季龍, 후조(後趙) 제3대 황제)가 출입할 때마다 수레(輿)에 올라 도지죽선(桃枝竹扇)을 썼다(季龍出時,乘輿用桃枝扇。). 이 죽순(筍)은 모여 자라는데 그 거죽 털에 벌레, 개미들이 모여있어 먹기에는 마땅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도지죽(桃枝竹)은 해남(海南) 번중(番中)에서 나는데 종려(椶櫚)와 같고 그 거죽은 대자리(簟)를 만드는데, 마치 대나무 같다. 또 홍자색(紅紫色)은 도지(桃枝)의 껍질과 같다. 따라서 지금 대자리(簟)를 만드는 그 대나무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였다. 양절(兩浙) 땅에서는 이를 도사죽(桃絲竹)이라 하고 형(衡), 상(湘) 땅에서는 이를 도생죽(桃笙竹)이라 한다. 사투리로 ‘簟’을 ‘생(笙)’이라 한다. 대개지(戴凱之)가 “도지죽(桃枝竹)은 껍질이 반들거리며 누르스름하니 방석을 만들 수 있다.” 하였으니 바로 지금에 ‘기죽(蘄竹)’이다. 광중(廣中, 지금 광동성을 말하는 듯)의 한 종류는 돌 위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는데 잎이 종려(椶櫚)와 같고 겉껍질 색이 황자(黄紫)이다. 큰 놈은 지팡이(杖)를 만들만 하다. 그 뿌리는 남겼다가 뿔을 띤 용들 꼴로 깎아 만든다. 작은놈은 말 채찍을 만들만 하다. 줄이고 굽히는 곳에 가시에 독이 있어 사람 손을 째기라도 하면 치료하기 어렵다. 동파(東坡)가 “잎사귀는 종(椶)과 같고 몸은 대나무(竹)와 같다. 마디 사이가 촘촘하며 속은 꽉 차, 무소와 같은 무늬결(犀理)에 탄탄한 뼈대(痩骨, 수골은 말이 살찌지 않고 짱짱함을 말한다)이니 대체로 타고나면서 이미 지팡이(拄杖)가 된 것이다.” 하였다. 영(嶺) 밖에 사람들은 대부분 이 대나무를 심고도 그것이 도죽(桃竹)임을 알지 못한다. 흘러 사방에 전해졌는데 그 끝에 눈이 있는 것을 본다면, 아마도 동파(東坡)로부터 나온 것이리라. 지금 촉(蜀) 땅 안에 역시 이를 ‘도지죽(桃枝竹)’이라 여기는데 북인(北人)은 이를 일러 ‘자등(紫籐)’이라고 한다. 여기에 아울러 기록하여 잘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竹譜(李衎 元) :
一叢生之竹根皆如此如苦竹慈竹簧竹桃枝竹簜竹刺竹由衙竹䉡竹釣絲竹之類是也
桃枝竹一名蒲葵竹一名赤玉脂出江浙兩淮處處有之叢生形如慈竹節長二尺許差薄魏志云倭國有桃枝竹山海經謂嶓冢之山囂水之上多桃枝今蘄人批取標皮作簟滑净可人禮所謂冬虎皮夏桃枝者是也書顧命篾席黼純孔安國云篾桃枝竹周禮春官司几筵畫純次席鄭氏云次席桃枝竹有次列成文爾雅云桃枝四寸有節張得之云桃枝竹葉如椶櫚節四寸皮黄滑可為簟栁子厚謂之桃笙唐志合州土貢桃枝竹箸石虎造桃枝竹扇筍叢生皮毛聚蟲蟻不可食或云桃枝竹出海南番中如椶櫚其皮作簟如竹又紅紫色如桃枝皮故云今作簟者非也兩浙謂之桃絲竹衡湘謂之桃笙竹方言曰簟謂之笙戴凱之云桃枝竹皮滑而黃可以為席即今之蘄竹也廣中一種好生石上葉如椶櫚膚色黄紫大者可為杖留其根削作螭虬帶角之狀小者可為馬箠損折處刺有毒破人手則難療東坡云葉如椶身如竹宻節而實中犀理痩骨蓋天成拄杖也嶺外人多種此而不知其為桃竹流傳四方視其端有眼者蓋自東坡出也今蜀中亦以此為桃枝竹北人謂之紫籐併記於此以待知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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