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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 고개

천지개벽( 제주도 천지왕 본풀이) 현용준 지음(서문당)

by 쥐눈이 2023. 3. 13.

태초에 천지는 혼동으로 있었다. 하늘과 땅이 금이 없이 서로 맞붙고, 암흑과  혼합으로 휩싸여 한덩어리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혼돈 천지에 개벽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하늘의 머리가 자방(子方)으로 열리고, 을축년 을축월 을축일 을축시에 땅의 머리가 축방(丑方)으로 열려  하늘과 땅 사이에 금이 생겨났다. 이금이 점점 벌어지면서 땅덩어리에는 산이 솟아오르고 물이 흘러내리곤 해서, 하늘과 땅의 경계는 점점 분명해져갔다.

이때, 하늘에서 청(靑)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흑이슬(또는 물이슬)이 솟아나, 서로 합수(合水)되어 음양이 서로 통함으로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생겨난 것은 별이었다. 동쪽에는 견우성, 서쪽에는 직녀성, 남쪽에는 노인성, 북쪽에는 북두칠성, 그리고 중앙에는 삼태성 등 많은 별들이 벌이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아직 암흑은 계속되고 있었다. 동쪽에선 청구름이, 서쪽에서는 백구름이, 남쪽에선 적구름이, 북쪽에선 흑구름이, 그리고 중앙에선 황구름만이 오락가락하는데, 천황닭(天皇鷄)이 목을 들고, 지황닭(地皇鷄)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人皇鷄)이 꼬리를 쳐 크게 우니, 갑을동방(甲乙東方)에선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때 하늘의 옥황상제 천지왕이 해도 둘, 달도 둘을 내보내 천지는 활짝 개벽이 되었다.

그러나 천지의 혼돈이 아직 완전히 바로잡힌 것은 아니었다. 하늘에는 해도 둘, 달도 둘이 떠 있으므로, 낮에는 만민 백성들이 더워 죽게 마련이고, 밤에는 추워 죽게 마련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때는 모든 초목이나 새.짐승들이 말을 하고, 귀신과 인간의 구별이 없어 사람 불러 귀신이 대답하고, 귀신 불러 사람이 대답하는, 그야말로 혼잡한 판국이었다. 

이러한 혼란한 세상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 천지왕에게는 항상 걱정이었다. 묘책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어느날 천지왕은 길한 꿈을 얻었다. 하늘에 떠 있는 해 둘, 달 둘 중에 해와 달을 하나씩 삼켜 먹는 꿈이었다. 이 꿈이야말로 혼란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을 귀동자를 얻을 꿈임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생각한 천지왕은 곧 지상의 총맹왕 총맹부인과 천정배필을 맺고자 지상으로 내려왔다. 

총맹부인은 매우 가난하였다. 모처럼 천지왕을 맞이하였으나, 저녁 한 끼 대접할 쌀이 없었다. 생각 끝에 총맹부인은 수명장자에게 가서 쌀을 꿔다가 저녁을 짓기로 했다.

수명장자는 한 동네에 사는 부자인데 마음씨가 고약하였다. 총맹부인이 쌀 한 되를 꾸러 가니, 쌀에다 흰 모래를 섞어서 한 되를 채워 주었다.

총맹부인은 그 쌀을 아홉 번 열 번 깨끗이 씨어 저녁밥을 짓고, 천지왕과 첫 밥상을 차려 마주 앉았다. 천지왕은 흐뭇한 마음으로 첫 숟가락을 들었는데 당장 돌을 씹었다.

"총맹부인, 어떤 일로 쳇(첫) 숟가락에 머을(돌)이 멕힙네까?"

"그런 게 아니외다. 진지 ᄊᆞᆯ이 읏어서(없어서) 수명장재 부재(富者)에 간(가서) 대미(大米) ᄒᆞᆫ 되 꾸레(꾸러) 갔더니, 백모살(白沙)을 섞어 주시난(주시니) 아옵 볼(아홉 번) 열 볼을 밀어 진지를 지어도 쳇 숟가락에 머을이 멕힙네다."

"괘씸ᄒᆞ다. 괘씸허여."

옥황상제 천지왕은 분개하여 수명장자의 됨됨이를 낱낱이 캐어 물었다. 고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난한 사람이 쌀을 꾸러 가면 흰 모래를 섞어 주고, 좁쌀을 꾸러 가면 검은 모래를 섞어 주고, 이것도 작은 말로 꿔 줬다가 돌려 받을 때는 큰 말로 되어 받아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명장자의 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빌려서 김을 맬때, 점심을 먹이게 되면, 맛좋은 간장은 자기네만 먹고 놉(일꾼)들에겐 고린 간장을 먹였다. 이렇게 하여 부자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아들들은 마소의 물을 먹여오라고 하면, 말발굽에 오줌을 싸서 물통에 들어섰던 것처럼 보이게 해 놓고는, 물을 먹여왔다고 하며 물을 굶겼다는 것이다. 

천지왕은 분개를 참을 수가 없었다.

"괘씸ᄒᆞ다. 수명장재, 괘씸ᄒᆞ고낭아(괘씸하구나). 베락장군(霹靂將軍) 내보내라. 베락ᄉᆞ재(霹靂使者) 내보내라. 울레(우뢰)장군 내보내라. 울레ᄉᆞ재 내보내라. 화덕진군(火德眞君) 내보내라."

벽력같이 명을 내리고 수명장자의 으리으리한 집을 일시에 홀랑 불태워 버렸다.

불탄 자리에 사람이 죽어 있으니, 그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굿을 했다. 그래서 화재에 타 죽은 원혼이 신당(神堂) 뒤에 들어서서 얻어먹는 법이 시작되었고, 화재가 났던 곳에는 화덕진군을 내보내는 불찍굿을 했는데, 그로부터 불찍사자(화덕진군의 使者)는 불찍굿에서 얻어먹는 법이 마련되었다.

천지왕은 수명장자의 아들 딸에게도 엄벌을 내렸다. 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고약하게 학대했으니, 꺾어진 숟가락을 하나 엉덩이에 꽂아서 팥벌레 몸으로 환생시켜 버리고, 아들들은 마소의 물을 굶겨 목마르게 했으니, 솔개 몸으로 환생시켜 비 온 뒤에 꼬부라진 주둥아리로 날개의 물을 핥아먹도록 했다.

이런 여러 가지 법을 마련하여 두고, 천지왕은 합궁일(合宮日)을 받아서 총맹부인과 천정배필을 맺었다. 달콤한 며칠이 지나자, 천지왕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아ᄃᆞᆯ 성제 둬시니, 솟아나거들랑 큰아ᄃᆞᆯ랑그넹에 성은 강씨 대별왕으로 일름을 짓곡, 족은아ᄃᆞᆯ랑 성을 풍성 소별왕으로 일름 셍명 지와 두라(아들 형제를 두었으니, 솟아 나거든 큰아들일랑 성은 강씨 대별왕으로 이름을 짓고, 작은아들일랑 성을 풍성 소별왕으로 이름 성명 지어 두라)."

한 마디를 남기고 훌훌이 떠나려는 천지왕을 붙잡아, 무슨 증거물이라도 주고 가라고 총맹부인은 애원했다. 그제야 박씨 두 개를 내주며 '아들이 나를 찾거든 정월 첫 돝날(亥日)에 박씨를 심으면 알 도리가 있으리라' 하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아닌게아니라, 총맹부인은 천지왕의 말대로 태기가 있어 아들 형제를 낳았다.

쌍둘이 형제는 한 살 두 살 잘 자랐다. 서당에 보낼 나이가 되었다. 삼천 선비 서당에서 글공부. 활공부를 하는데, 벗들 사이에 '아비 없는 호래자식'이라고 항상 놀림을 받았다.

형제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 한이었다. 하루는 어머니더러 아버지가 누구내고 졸라댔다. 그제야 어머니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형제는 아버지가 두고 간 박씨를 받아, 정월 첫 톹날에 정성껏 심었다. 박씨는 얼마 안 되어 움이 돋아나 덩굴이 하늘로 죽죽 뻗어 올라갔다. 아버지가 박씨를 주고 간 것은 이 줄기를 타고 하늘로 찾아로라는 것임을 곧 알았다.

형제는 박 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가고 보니, 박 줄기는 아버지가 앉는 용상(龍床) 왼쪽 뿔에 감겨져 있고 아버지는 안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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