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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동북 9성(城)

윤관(尹瓘)의 동북 9성(城)

by 쥐눈이 2023. 7. 14.

#지명에 대한 이견들이 많아서 지명에 대한 자료들은 차츰 번역하여 올릴 예정이다.

고려사(高麗史) : 옛 역사[고려 신하의 기록일 듯하다.]를 살펴보면 9(九城)의 땅은 오랫동안 여진에 장악되었던 곳이다. 예종 2년 원수(元帥) 윤관(尹瓘)과 부원수 오연총(吳延寵)이 병사 17만을 이끌고 여진을 쳐 쫓아내고 군대를 나누어 땅을 점유하였다. 동쪽으로 화곶령(火串嶺:가리봉(加里峯) 근처 한 봉우리가 따로 떨어져 있으니, 바로 화관령(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 궁한령(弓漢嶺)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러 이 땅을 우리의 강역으로 만들었다.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성()과 적을 감시할 다락방을 990칸 쌓고서 영주(英州)라 불렀다. 화곶산(火串山) 아래에도 992칸을 쌓고 웅주(雄州)라고 불렀다. 오림금촌(吳林金村)에는 774칸을 쌓고 복주(福州)라고 불렀다. 궁한촌(弓漢村)에는 670칸을 쌓고 길주(吉州)라고 불렀다. 예종 32월 함주(咸州)와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았다. 3월 의주(宜州), 통태(通泰), 평융(平戎) 세 곳에 성을 쌓았다.

이에 여진이 그 근거지를 잃었고 보복을 하리라 맹세하더니 급기야 먼 곳 사는 추장 떼까지 이끌고 와서 여러 해 동안 침입하니 다치고 목숨을 잃은 우리 병사들도 많았다. 그리고서 땅을 개척하여 넓혔는데 9(九城)이 서로 거리가 멀고도 멀거니와 여진이 빽빽한 초목 속에 자주 매복을 하여 오가는 사람들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아 그 방비를 위해 나라에서는 여러 방법으로 군사를 징발하니 나라 안팎으로 소란스럽고 어지러워졌다.

예종 4년 여진 또한 사신을 보내어 화해를 청하였는데 이에 길주부터 해서 차례로 9성의 전쟁 용구, 군량을 내지로 거두어들이고 마침내 숭령(崇寧), 통태(通泰), 진양(眞陽)3() 및 영()과 복() 2()의 성()에서 철수하였다. 한편 함(), () 2() 및 선화진성(宣化鎭城)에서 철수하여서 이곳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이것으로 톺아보자면 함(), (), (), (), (), ()라는 6()와 공험(公嶮), 통태(通泰), 평융(平戎)이라는 3()이 바로 9()으로 손꼽는 곳이었지만 이 기록은 성에서 철수하고 여진에게 돌려준 시기에 의주(宜州)와 공험(公嶮), 평융(平戎) 두 진()은 없고, 숭령(崇寧), 진양(眞陽) 선화(宣化) 세 진()9성에 더해져 나타나고 있고 민가의 호수를 둔 것이 또한 각각 같지 않으니 사실을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원문 置戶之數又各不同是可疑也.’에서 는 흔히 의심으로만 해석하여 앞의 진술이 의심된다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는 기존에 알려졌던 9()의 내용은 옛 기록에서 제시된 기록과 비교하여 사실관계를 알아보아야만 할 의문 사항으로 보아서 그렇게 해석하였다.]

예종(睿宗) 3(1108) 2월 도검할(都鈐轄군인을 관할하고 지역을 방위하며 도적을 체포를 관장) 임언(林彦)의 영주기(英州記)에서 이제 새롭게 6성을 설치하였으니 하나는 진동군(鎭東軍) 함주(咸州) 대도독부(大都督府)라 하는데 군사와 백성들 1948정호(丁戶 부역의 의무를 담당한 중간계급)이고 둘은 안령군(安嶺軍) 영주(英州) 방어사(防禦使)라 하니 군사와 백성들 1238 정호(丁戶)이고, 셋은 영해군(寧海軍) 웅주(雄州) 방어사(防禦使)라 하니 군사와 백성들 1436정호(丁戶)이고, 넷을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이니 병사와 백성들이 680정호(丁戶)이고, 다섯은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라 하니 병사와 백성들이 632정호(丁戶)이고 여섯은 공험진방어사(公嶮鎭防禦使)라고 하니 군사와 백성들이 532정호(丁戶)이다.” 하였다. 한편 민지(閔漬)가 지은 강목(綱目)에서 윤관(尹瓘)9성을 쌓고 남계(南界)의 백성들을 옮겨 이곳을 채웠다. 함주(咸州)를 호칭하여 진동군(鎭東軍)이라 하였으니 13천 호를 두었다. 영주(英州)를 호칭하여 안령군(安嶺軍)이라 하고 웅주(雄州)를 호칭하여 영해군(寧海軍)이라 하였으니 각각 1만 호를 두었다. (), (), () 3()에 각각 7천 호를 두었고 공험(公嶮), 통태(通泰), 평융(平戎) 3()에 각각 5천 호를 두었다.” 하였다.

사리를 따져보면, 의주(宜州)의 땅은 정주(定州)가 방어사로써 여진을 쳐서 쫓아낼 필요가 없어진 이후에 둔 것이다. 마침 이때 이르러서야 의주 땅에 성보(城堡)를 처음 만들었기에 9() 중 하나로 싸잡아 일컬었고, 그 결과 철거한 숫자에 꼽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按舊史九城之地久爲女眞所據睿宗二年命元帥尹瓘副元帥吳延寵率兵十七萬擊逐女眞分兵略地東至火串嶺北至弓漢嶺西至蒙羅骨嶺以爲我疆於蒙羅骨嶺下築城廊九百九十閒號英州火串山下築九百九十二閒號雄州吳林金村築七百七十四閒號福州弓漢村築六百七十閒號吉州三年二月城咸州及公嶮鎭三月築宜州通泰平戎三城於是女眞失其窟穴誓欲報復乃引遠地群酋連歲來侵我兵喪失者亦多且拓地旣廣九城相距遼遠女眞數設伏叢薄抄掠往來國家調兵多端中外騷擾四年女眞亦遣使請和於是始自吉州以次收入九城戰具資粮于內地遂撤崇寧通泰眞陽三鎭及英福二州城又撤咸雄二州及宣化鎭城以還之

以此考之宜六州及公嶮通泰平戎三鎭此九城之數也其撤城還女眞之時則無宜州及公嶮平戎二鎭而崇寧眞陽宣化三鎭乃加現焉置戶之數又各不同是可疑也

睿宗三年二月都鈐轄林彦作英州記云:「今新置六城一曰鎭東軍咸州大都督府兵民一千九百四十八丁戶二曰安嶺軍英州防禦使兵民一千二百三十八丁戶三曰寧海軍雄州防禦使兵民一千四百三十六丁戶四曰吉州防禦使兵民六百八十丁戶五曰福州防禦使兵民六百三十二丁戶六曰公嶮鎭防禦使兵民五百三十二丁戶。」

又閔漬所撰綱目云:「尹瓘築九城徙南界民實之號咸州曰鎭東軍置戶一萬三千號英州曰安嶺軍雄州曰寧海軍各置戶一萬宜三鎭各置戶七千公嶮通泰平戎三鎭各置戶五千。」〉

且宜州之地在定州以防禦使不必擊逐女眞而後置也豈非適至是乃創築城堡故倂稱爲九城而不在撤去之數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