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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동북 9성(城)

윤관(尹瓘)의 삶 2

by 쥐눈이 2023. 7. 31.

윤관은 또한 여러 장군을 나누어 보내어 국경선을 그어 정하였으니 동쪽으로 화곶령(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 궁한이령(弓漢伊嶺)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렀다.

한편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를 보내 땅을 살피게 하여 몽라골령 아래에 성랑(城廊) 950칸을 쌓고서 영주(英州)라 이름하고 화곶령(火串嶺) 아래에 992칸의 성랑을 쌓고서 웅주(雄州)라 하였으며 오림금촌(吳林金村)774칸을 쌓고서 복주(福州)라 하고 궁한이촌(弓漢伊村)670칸을 쌓고서 길주(吉州)라 하였다. 나아가 영주성(英州城) 안에 호국인왕(護國仁王)과 진동보제(鎭東普濟) 두 절을 지었다.

다음 해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이 정예군사 8천을 이끌고 가한촌(加漢村)의 병목처럼 작은 길을 나오고 있었는데 우거진 풀 속에 여진이 심어 놓은 매복이 윤관의 군대가 이르는 것을 살펴보고서 급작스럽게 공격하는 바람에 윤관의 군대가 무너지고 겨우 십여 명만 살았다. 적이 윤관 등을 겹겹이 둘러쌌고 연총(延寵)은 흐르는 화살에 맞아 형세가 매우 급박해 준경(俊京)이 용사 십여 명을 이끌고 윤관 등을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우 낭장(郞將) 준신(俊臣)이 이를 만류하며

적진이 견고하여 이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헛된 죽음이 이 시점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하니 준경(俊京)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 늙으신 아버님을 봉양해야 할 것이고, 나는 이 한 몸 나라에 허락하였으니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하였다.

마침내 우렁찬 소리로 적진에 돌격하여 십여 명을 쳐 죽였다. 이때 홍정(弘正)과 관진(冠珍) 등이 산곡(山谷)에서 군사를 이끌고 와 구원을 하니 적이 마침내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고려군이 이들을 추격하여 36명을 목을 베었다.

윤관 등은 해가 저물어서야 영주성(英州城)으로 돌아왔다. 윤관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준경의 손을 잡고서

지금부터 나는 너를 내 아들과 똑같이 여길 것이고 너는 나를 네 아버지와 똑같이 여겨야 할 것이다.” 하였다.

윤관은 임금의 말씀을 받고서 합문기후(閤門祇候)에 제수되었다.

추장 아로환(阿老喚) 43명이 우리 진영 앞에 와서 항복을 청하였고 남녀 1460여 명 또한 좌군(左軍)에 항복하였다.

적의 보병과 기병 2만이 영주성의 남쪽에 와서 주둔하며 함성을 지르며 전투를 도발하자 윤관이 임언(林彦)과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세력상 대적할 수가 없다. 다만 성을 단단히 지키는 일밖에는 없다.”

하였다. 그러자 준경이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날로 증가할 것이고 성안의 식량은 다할 것이며 밖에서 지원군이 이르지 않으리니 장차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마는 공()들께서는 전날의 승리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제가 오늘도 나가서 죽기로 싸우리니, 공들은 성에 올라가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드디어 용감히 죽기를 원하는 전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 적들과 전투를 벌여 19명의 목을 베니 적이 패배하여 기가 꺾인 채 북쪽으로 달아났다. 준경(俊京)이 북 소리와 피리 소리 속에 개선하였다. 윤관 등이 누각에서 내려와 이들을 맞이하고 손을 잡으며 서로서로 절을 하였다.

마침내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이 장군들을 이끌고 중성대도독부(中城大都督府)에 모였다.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王字之)가 공험성(公嶮城)에서부터 군사를 이끌고 도독부로 오다가 갑자기 북방 민족 로()의 추장 사현(史現)의 병사를 만나 전투를 벌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있었고 타고 있던 말도 잃었다. 준경이 즉시 힘센 졸개들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로()를 물리치고서 말에 씌운 갑옷을 취하여 돌아왔다.

여진의 병사 수만이 웅주(雄州)에 와서 포위하니 홍정(弘正)이 사졸들을 타이르고 북돋아 무리가 모두 싸울 의지를 가졌다. 곧장 사방의 문을 열고 일제히 나가서 투지 있게 공격하여 적을 크게 무찔렀다. 80명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병거(兵車 보통 몇 명의 군사가 병거에 타고서 주변의 보병을 공격하였다함) 50여 대, 중거(中車) 200, 40필을 획득하였고 그 나머지 병장기들은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이때 준경(俊京)은 성안에 있었는데 주()의 수령이

성을 지키고 있는 날이 오래되어 군량미가 장차 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외부에서의 지원도 이르지 않는데, 공께서 성을 나가서 군대를 거두어 돌아와 성안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사졸들은 자신들이 하나도 살아남지 못함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였다.

준경이 사졸의 찢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 줄을 걸고 내려와 정주(定州)로 돌아가 군대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으로 길을 들어섰다. 야등포(也等浦)에서 길주(吉州)에 이르렀는데 적을 만나 이들과 전투를 벌여 크게 무찌르니 성안의 사람들이 감동에 겨워 흐느꼈다.

윤관은 영주(英州)와 복주(福州), 웅주(雄州), 길주(吉州), 함주(咸州) 그리고 공험진(公嶮鎭)을 다시 우리의 성()으로 하고 드디어 공험(公嶮)에 비석을 세워서 경계로 삼았다.

瓘又分遣諸將畵定地界東至火串嶺北至弓漢伊嶺西至蒙羅骨嶺又遣日官崔資顥相地於蒙羅骨嶺下築城廊九百五十閒號英州火串嶺下築九百九十二閒號雄州吳林金村築七百七十四閒號福州弓漢伊村築六百七十閒號吉州又創護國仁王鎭東普濟二寺於英州城中明年延寵率精兵八千出加漢村甁項小路賊設伏叢薄閒候瓘軍至急擊之軍皆潰僅十餘人在賦圍瓘等數重延寵中流矢勢甚危急俊京率勇士十餘人將救之弟郞將俊臣止之曰:「賊陣牢不可破徒死何益?」俊京曰:「爾可歸養老父我以身許國義不可止。」 乃大呼突陣擊殺十餘人弘正冠珍等自山谷引兵來救賊乃解圍而走追斬三十六級瓘等以日晩還入英州城瓘涕泣執俊京手曰:「自今我當視汝猶子汝當視我猶父。」承制授閤門祇候酋長阿老喚等四百三人詣陣前請降男女一千四百六十餘人又降于左軍賊步騎二萬來屯英州城南大呼挑戰瓘與林彦曰:「彼衆我寡勢不可敵但當固守而已。」俊京曰:「若不出戰敵兵日增城中粮盡外援不至將若之何前日之捷諸公不見今日亦出死力以戰請諸公登城觀之。」乃率敢死士出城與戰斬十九級賊敗衄奔北俊京鼓笛凱還瓘等下樓迎之携手交拜延寵乃率諸將會于中城大都督府權知承宣王字之自公嶮城領兵詣都督府卒遇虜酋史現兵與戰失利喪所乘馬俊京卽引勁卒往救敗之取虜介馬以還女眞兵數萬來圍雄州弘正訓勵士卒衆皆思鬪卽開四門齊出奮擊大敗之俘斬八十級獲兵車五十餘兩中車二百兩馬四十匹其餘兵仗不可勝記時俊京在城中州守謂之曰:「城守日久軍饗將盡外援不至公若不出城收兵還救城中士卒恐無噍類。」 俊京服士卒破衣夜縋城而下歸定州整兵道通泰鎭自也等浦至吉州遇賊與戰大敗之城中人感泣瓘又城英咸州及公嶮鎭遂立碑于公嶮以爲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