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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동북 9성(城)

윤관의 삶3

by 쥐눈이 2023. 8. 2.

윤관이 그 아들 언순(彦純)을 보내어 임금께 표()를 올리고 축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성인의 덕은 진실로 하늘땅, 즉 건곤(乾坤)에 맞아떨어지고 인()과 의()라는 기치를 내건 군대는 이미 저 이적(夷狄)을 평정하였으니 장수와 병사들은 기쁨에 떨며 함성을 질렀습니다.

삼가 생각해보면 동여진(東女眞)은 으슥한 곳에 슬며시 숨어 살았는데 이 번성하고 추한 족속은 먼 옛날 그들의 조상 때부터 우리 조정의 은혜를 입었었습니다. 그런데 이리처럼 탐욕을 부려 점점 그 배반의 마음을 기르고 개처럼 짖으며 문밖에서 시끄럽게 으르렁거리고 변방을 침범하여 우리 사람들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제어의 너그러움에 허물이 없게 되면 이를 일러 건방지게 함부로 한다라고 하며 분수에 넘치는 뜻을 마음대로 하면 이를 일러 막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 선황(先皇)께서 옛날 비분강개로 그들을 치고자 하였었는데 폐하께서 이제 그 뜻을 이어서 계획하시다 병력을 쓰는 엄중함 때문에 처음에는 꺼리시었으며 시행을 이리저리 재셨고, 여러 사람과 의견을 주고받아야 했기에 끝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셨었습니다.

그럼에도 승부를 가르는 방책은 익숙한 것에 보존되어 있고 상황에 따른 변통을 아는 자는 때를 귀하게 여깁니다. 일의 흐름에 따른 기미를 이용할 수 있음을 성스러운 지혜만이 밝게 아시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사졸들을 쉬게 하시어 그들을 쓸 수 있을 때를 살피셨고 이어 저 적들의 허실을 골똘히 생각하시어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드디어 우두머리 장수들(元戎)에게 어서 진군하여 적을 크게 도륙을 내라 명하시었고 신은 절월(節鉞 : 符節鈇鉞, 곧 힘을 실어주는 표식)의 명을 받았습니다.

정벌의 북소리가 들썩거리자 행군을 하니 군사들에게는 기세가 꿈틀거렸고 적들에게는 위협이 더해졌습니다. 강물과 냇물이 골짜기로 흐르듯 손마디 하나의 아교로는 이 흐름을 막을 수 없었고, 잘 정돈된 숫돌 같은 우리 군대가 이 산봉우리 저 산봉우리를 다니니 저 적들은 숫돌 앞의 허무한 달걀처럼 결연히 파괴되었습니다. 사로잡은 포로는 오천 명이 넘고 잡아 참수한 자도 오천에 가깝습니다. 마을마다 크고 작은 노적가리며 땔감이며 사료 더미들이 흩어져 있었고 거리마다 바삐 달아나는 사람들이 이어졌습니다.

이곳은 산천이 험하게 막아서서 이로 인해서 성지(城池)들이 높고 깊을 수가 있고, 들판은 기름져서 논밭과 우물도 이에 따라서 밭을 갈고 우물을 파니, 옛날 사람들이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던 지리상 이점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하늘이 참여하시어 이 땅을 취하였으니 위로는 하늘에 계신 종묘의 영령들께 넘치게 고맙고 아래로는 조정의 오랜 세월 쌓인 수치를 씻어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저 주왕(周王)이 험윤(玁狁 곧 흉노)을 치고 한나라 왕이 흉노를 정벌한 것은 땅을 넓히고 변방을 개척하여 백성들에게 해가 된 것을 없애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지금과 비교하자면 우리는 의당 하잘것없는 데다가 보잘것없는 신하의 미천한 지혜와 미련한 자질로 어찌 크게 본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의 모든 공적은 참으로 폐하의 성스러운 계책과 신묘한 꾀로 왕좌에 앉으셔서 먼 변방의 일을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누가 이런 공적을 이루게 시켰겠습니까? 엎드려 바라나니 사관에게 책을 쓰게 하여서 폐하의 업적을 빛나게 드리워 영원하게 하소서!”

왕이 내시(內侍) 위위주부(衛尉注簿) 강영준(康英俊)을 보내어서 윤관 등에게 양과 술을 하사하였다. 아울러 병사들에게는 은대야(鐁鑼) 하나와 은병 마흔 개를 하사하였다.

윤관은 다시 임언(林彦)을 시켜 6()을 설치한 일을 기록하게 하니 영주(英州) 관청의 벽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맹자(孟子)약한 것은 본디 강한 것에 대적할 수 없고 작은 것은 본디 큰 것에 대적할 수 없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외운 지 오래되었다가 이제야 이 말이 참말임을 알게 되었다.

여진이 우리나라에 대해 힘의 강하고 약함, 수의 많고 적음이 형세 상 뚜렷이 다른데도 우리 변방을 몰래 넘보아 돌아가신 숙종 10(1105)에 틈을 타서 난리를 꾸며 우리 백성들을 많이도 죽였고 그중에 옭아매어 노예로 삼은 사람들 역시 많았다. 숙종께서 불끈 군대를 정비하여 대의(大儀)에 기대어서 적들을 치고자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그 공이 완성되지 못한 채 활과 검을 남기시고 영원히 돌아가셨다.

지금 임금께서 왕위를 이으시고 국상(國喪) 3년에 상선(祥禪 祥禫 : 죽은 지 두 해 만에 지내는 제사)을 막 마치자마자 주위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으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며 대대로 공물과 군역의 이행을 닦아오되 우리 조종의 은택을 깊이 받았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등을 돌려 배반하는 무도함을 저지르니 먼저 가신 아버님께서 깊이 분개하셨다. 예전에 옛사람들이 큰 효도라 일컬은 것은 그저 부모의 뜻을 잘 잇는 것이다라고 들었다. 짐은 이제 다행히도 국상을 마쳤고 이제야 비로소 나랏일을 살필 수가 있으니 어찌 정의의 깃발을 들어 무도한 것들을 쳐서 선황의 수치를 한 번에 씻어내지 않아서 되겠는가?’

드디어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았다. 정예군사 30만을 이끌고 적의 토벌에 전념하게 하였다.

윤공(尹公)은 꾸린 사업이 대단하였는데도 일찍이 유신씨(庾信氏)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김유신이 6월에 삼군에게 언 강물을 건너게 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정성을 지극히 하여서이다. 그렇다면 나 또한 어떠한 사람이겠는가?’ 하였다. 윤공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바, 영험하고 신기한 자취가 여러 번 들렸었다.

오공(吳公 부원수 오연총)은 당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이 제법 무거웠는데 천성이 삼가고 신중하여 일을 닥뜨려서는 반드시 세 번 생각하였으니 꾀는 훌륭하고 방책은 위대하여 시행한 일이 성과를 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윤공과 송공이 예전에 북방 개척에 뜻이 있었던 터라 임금의 명을 듣고 분개와 울컥함 속에 군대를 동하(東下)에 모아 두었다.

군대가 출정하는 날, 윤관 장군은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아직 군사들과 맹세 의식을 치르지도 않았는데도 눈물이 줄줄 흘러 턱에 엉기니 사람들이 그 명을 따르지 않은 자가 없었다.

적의 땅에 들어설 때가 다다르자 삼군이 의기가 충천하여 함성을 질렀는데 일당백의 기세라 마른 나무를 꺾고 대나무를 쪼개듯 적을 무찔렀으니 그 쉬움을 어찌 비유할 수 있겠는가?

6천여 명을 목을 베었고 그 활과 화살을 실었으며 진영 앞으로 와서 항복한 사람이 5만여 명이었으며 날리는 먼지만을 보고서도 넋이 나가 북쪽 외진 곳으로 바쁘게 달아난 사람은 이루다 셀 수가 없었다.

! 여진이 우악스럽고 우직하여 그 자신의 역량이 강한지 약한지,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 형편을 헤아리지 못하여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함이 이와 같구나.

그 땅은 사방 3백 리로 동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고 서북으로 개마산(盖馬山)에 끼어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닿아 있는데 산천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토지는 기름져 비옥하여 백성들을 살게 할만하다. 그리고 본래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했던 곳이라 그들의 옛 비석과 유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저 구고려(勾高麗)가 앞 시대에서 잃어버렸고 지금 임금께서 뒷 시대에 찾았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새로 6성을 두니 하나는 진동군(鎭東軍)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라 하고 군사와 백성들은 1948 정호(丁戶)이며 둘째는 안령군(安嶺軍) 영주방어사(英州防禦使)라 하고 군사와 백성들은 1238 정호이며 셋째는 영해군(寧海軍) 웅주방어사(雄州防禦使)라 하고 군사와 백성들이 1436 정호이며 넷째는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라 하고 군사와 백성들이 68십 정호이고 다섯째는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라 하며 군사와 백성들이 632 정호이고 여섯째는 공험진방어사(公嶮鎭防禦使)라 하고 군사와 백성들이 532 정호이다.

6성을 만들고 뛰어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 슬기로운 재능이 있어 주어진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자를 뽑아 이곳을 다독이며 다스리게 하였다. 이는 바로 시경(詩經)에서 노래한 우거지네 퍼져나가네. 왕실을 우거지게 하는 사람 때문일세.’이니 백성들은 느긋이 베개를 돋아 베는 모습을 보는 일이 생겼고 걱정에 싸여 동쪽 변방을 돌아보는 일이 없게 되었다.

원수(元帥)께서 나에게 알리기를

옛날 당나라 재상 배진공(裴晋公)이 회수(淮水) 서쪽으로 정벌을 나섰을 때 역적을 평정하는 동안 막객(幕客 비유하자면 개인비서’) 한유(韓愈)가 그 일에 대해 비문을 지어 그때의 사연들을 널리 알렸다.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당 헌종(憲宗)의 두드러지고 보통 사람을 넘는 덕을 알게 되어 헌종에 대해 노래하며 칭송하였다. 그대가 이처럼 운 좋게 이 사업에 종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일의 진행을 알고 있으니 어찌 기문(記文)을 지어 전날에 없었던 우리 성스러운 왕조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따라서 나 언()이 붓을 잡고서 이를 기록하였다.”

*적은 아교를 녹여 탁한 물에 넣으면 맑아진다고 하는데 그러나 거대한 황하의 탁함을 적은 아교로는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孔子第七十二代賢孫孔融 同歲論: 阿膠之徑寸不能止黃河之濁.”

*손자집주(孫子集註) : 맹씨가 ()는 돌이다. 군대가 만약 훈련이 지극히 완전하여 통솔(部領)이 분명한 데다가 다시 적의 실정을 살펴 조사하여 그 허실을 자세히 알 수 있고, 그런 뒤에 병력을 가한다면 이는 실로 숫돌을 계란에 던지는 것과 같다.” 하였다. 孫子集注 : 孟氏曰:,石也. 兵若訓練至整 部領分明 更能審料敵情 委知虚實 後以兵而加之 實同以碬石投卵也

 

遣其子彦純奉表稱賀曰:「聖人之德允合於乾坤仁義之兵已平其夷狄[原本]惟將及卒旣懽且呼竊以東女眞潛伏奧區寔繁醜類遠從爾祖曾之世嘗被我朝家之恩狼貪浸畜其叛心犬吠頻狺於戶外侵軼關塞寇攘士民狃制御之寬而謂之易陵肆覬覦之志而謂之莫禦先皇故憤以欲伐陛下方繼而爲圖以兵危故始憚裁施以謀衆故終歸滯泥然而策勝負者存乎熟知變通者貴乎時事機可乘聖智獨照先休吾士卒以觀其可用繼慮彼虛實以指其必擒乃命元戎亟行大戮而臣受節鉞之制擧征鼓而行氣動於軍威加於敵江河注壑寸膠不能以防之碬石轉峯虛卵決然其破矣俘虜踰於半萬斬獲近於五千委積散於閭閻奔走交於道路山川險阻城池因得以高深原野膏腴田井亦從而耕鑿在昔人求而未得者今玆天與而旣取之上足以謝宗廟在天之靈下足以雪朝廷積年之恥且彼周王玁狁之伐漢帝凶奴之征所以拓土開邊而得爲民去害比之今日宜在下風此豈微臣淺智駑材能成巨効實由陛下聖謀神算坐定遐陬苟非其然孰使之矣伏乞命書史冊垂耀無窮。」

王遣內侍衛尉注簿康英俊賜瓘等羊酒幷賜軍人銀鐁鑼一面銀甁四十事

瓘又使林彦記其事書于英州廳壁曰:「孟子曰:『弱固不可以敵强小固不可以敵大。』吾諷斯言久矣而今信之矣女眞之於國家强弱衆寡其勢懸殊而窺覦邊鄙於肅宗十年乘隙構亂多殺我士民其繫縲爲奴隷者亦多矣肅宗赫然整旅將欲仗大義以討之惜乎厥功未集永遺弓劒今上嗣位亮陰三載甫畢祥禪謂左右曰:『女眞本高[][]麗之部落聚居于盖馬山東世脩貢職被我祖宗恩澤深矣一日背畔無道先考深憤焉嘗聞古人之稱大孝者善繼其志耳朕今幸終達制肇覽國事盍擧義旗伐無道一洒先君之恥?』乃命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尹瓘爲行營大元帥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吳延寵爲副元帥率精兵三十萬俾專征討

尹公事業傑然嘗慕庾信氏之爲人曰:『庾信六月冰河以渡三軍此無他至誠而已予亦何人哉?』其至誠所感靈異之跡屢聞焉吳公時之重望天性愼謹臨事必三思其良圖大策施無不中兩公嘗有志於此聞命憤激擁兵東下出師之日躬擐甲胃未及誓衆洒淚交頤莫不用命曁入賊境三軍奮呼一以當百摧枯破竹何足喩其易哉斬首六千餘級載其弓矢來降於陣前者五十千餘口其望塵喪魄奔走窮北不可勝數.嗚呼女眞之頑愚不量其强弱衆寡之勢而自取於滅亡如是其地方三百里東至于大海西北介于盖馬山南接于長定二州山川之秀麗土地之膏腴可以居吾民而本高[][]麗之所有也其古碑遺跡尙有存焉夫高[][]麗失之於前今上得之於後豈非天歟於是新置六城一曰鎭東軍咸州大都督府兵民一千九百四十八丁戶二曰安嶺軍英州防禦使兵民一千二百三十八丁戶三曰寧海軍雄州防禦使兵民一千四百三十六丁戶四曰吉州防禦使兵民六百八十丁戶五曰福州防禦使兵民六百三十二丁戶六曰公嶮鎭防禦使兵民五百三十二丁戶選其顯達而有賢材能堪其任者鎭撫之詩所謂:『于蕃于宣以蕃王室者也有以見晏然高枕無東顧之憂矣元帥告予曰:『昔唐相裴晋公出征淮西及其平幕客韓愈爲之碑以廣其事故後之人知憲宗英偉絶人之德而歌頌之子幸從事于此詳其本末曷不作記使吾聖朝無前之偉績垂于無窮乎?』彦承命援筆誌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