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이 그 아들 언순(彦純)을 보내어 임금께 표(表)를 올리고 축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성인의 덕은 진실로 하늘땅, 즉 건곤(乾坤)에 맞아떨어지고 인(仁)과 의(義)라는 기치를 내건 군대는 이미 저 이적(夷狄)을 평정하였으니 장수와 병사들은 기쁨에 떨며 함성을 질렀습니다.
삼가 생각해보면 동여진(東女眞)은 으슥한 곳에 슬며시 숨어 살았는데 이 번성하고 추한 족속은 먼 옛날 그들의 조상 때부터 우리 조정의 은혜를 입었었습니다. 그런데 이리처럼 탐욕을 부려 점점 그 배반의 마음을 기르고 개처럼 짖으며 문밖에서 시끄럽게 으르렁거리고 변방을 침범하여 우리 사람들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제어의 너그러움에 허물이 없게 되면 이를 일러 ‘건방지게 함부로 한다’라고 하며 분수에 넘치는 뜻을 마음대로 하면 이를 일러 ‘막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 선황(先皇)께서 옛날 비분강개로 그들을 치고자 하였었는데 폐하께서 이제 그 뜻을 이어서 계획하시다 병력을 쓰는 엄중함 때문에 처음에는 꺼리시었으며 시행을 이리저리 재셨고, 여러 사람과 의견을 주고받아야 했기에 끝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셨었습니다.
그럼에도 승부를 가르는 방책은 익숙한 것에 보존되어 있고 상황에 따른 변통을 아는 자는 때를 귀하게 여깁니다. 일의 흐름에 따른 기미를 이용할 수 있음을 성스러운 지혜만이 밝게 아시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사졸들을 쉬게 하시어 그들을 쓸 수 있을 때를 살피셨고 이어 저 적들의 허실을 골똘히 생각하시어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드디어 우두머리 장수들(元戎)에게 어서 진군하여 적을 크게 도륙을 내라 명하시었고 신은 절월(節鉞 : 符節과 鈇鉞, 곧 힘을 실어주는 표식)의 명을 받았습니다.
정벌의 북소리가 들썩거리자 행군을 하니 군사들에게는 기세가 꿈틀거렸고 적들에게는 위협이 더해졌습니다. 강물과 냇물이 골짜기로 흐르듯 손마디 하나의 아교로는 이 흐름을 막을 수 없었고, 잘 정돈된 숫돌 같은 우리 군대가 이 산봉우리 저 산봉우리를 다니니 저 적들은 숫돌 앞의 허무한 달걀처럼 결연히 파괴되었습니다. 사로잡은 포로는 오천 명이 넘고 잡아 참수한 자도 오천에 가깝습니다. 마을마다 크고 작은 노적가리며 땔감이며 사료 더미들이 흩어져 있었고 거리마다 바삐 달아나는 사람들이 이어졌습니다.
이곳은 산천이 험하게 막아서서 이로 인해서 성지(城池)들이 높고 깊을 수가 있고, 들판은 기름져서 논밭과 우물도 이에 따라서 밭을 갈고 우물을 파니, 옛날 사람들이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던 지리상 이점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하늘이 참여하시어 이 땅을 취하였으니 위로는 하늘에 계신 종묘의 영령들께 넘치게 고맙고 아래로는 조정의 오랜 세월 쌓인 수치를 씻어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저 주왕(周王)이 험윤(玁狁 곧 흉노)을 치고 한나라 왕이 흉노를 정벌한 것은 땅을 넓히고 변방을 개척하여 백성들에게 해가 된 것을 없애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지금과 비교하자면 우리는 의당 하잘것없는 데다가 보잘것없는 신하의 미천한 지혜와 미련한 자질로 어찌 크게 본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의 모든 공적은 참으로 폐하의 성스러운 계책과 신묘한 꾀로 왕좌에 앉으셔서 먼 변방의 일을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누가 이런 공적을 이루게 시켰겠습니까? 엎드려 바라나니 사관에게 책을 쓰게 하여서 폐하의 업적을 빛나게 드리워 영원하게 하소서!”
왕이 내시(內侍) 위위주부(衛尉注簿) 강영준(康英俊)을 보내어서 윤관 등에게 양과 술을 하사하였다. 아울러 병사들에게는 은대야(鐁鑼) 하나와 은병 마흔 개를 하사하였다.
윤관은 다시 임언(林彦)을 시켜 6성(城)을 설치한 일을 기록하게 하니 영주(英州) 관청의 벽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맹자(孟子)가 ‘약한 것은 본디 강한 것에 대적할 수 없고 작은 것은 본디 큰 것에 대적할 수 없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외운 지 오래되었다가 이제야 이 말이 참말임을 알게 되었다.
여진이 우리나라에 대해 힘의 강하고 약함, 수의 많고 적음이 형세 상 뚜렷이 다른데도 우리 변방을 몰래 넘보아 돌아가신 숙종 10년(1105년)에 틈을 타서 난리를 꾸며 우리 백성들을 많이도 죽였고 그중에 옭아매어 노예로 삼은 사람들 역시 많았다. 숙종께서 불끈 군대를 정비하여 대의(大儀)에 기대어서 적들을 치고자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그 공이 완성되지 못한 채 활과 검을 남기시고 영원히 돌아가셨다.
지금 임금께서 왕위를 이으시고 국상(國喪) 3년에 상선(祥禪 곧 祥禫 : 죽은 지 두 해 만에 지내는 제사)을 막 마치자마자 주위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으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며 대대로 공물과 군역의 이행을 닦아오되 우리 조종의 은택을 깊이 받았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등을 돌려 배반하는 무도함을 저지르니 먼저 가신 아버님께서 깊이 분개하셨다. 예전에 “옛사람들이 큰 효도라 일컬은 것은 그저 부모의 뜻을 잘 잇는 것이다”라고 들었다. 짐은 이제 다행히도 국상을 마쳤고 이제야 비로소 나랏일을 살필 수가 있으니 어찌 정의의 깃발을 들어 무도한 것들을 쳐서 선황의 수치를 한 번에 씻어내지 않아서 되겠는가?’
드디어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았다. 정예군사 30만을 이끌고 적의 토벌에 전념하게 하였다.
윤공(尹公)은 꾸린 사업이 대단하였는데도 일찍이 유신씨(庾信氏)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김유신이 6월에 삼군에게 언 강물을 건너게 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정성을 지극히 하여서이다. 그렇다면 나 또한 어떠한 사람이겠는가?’ 하였다. 윤공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바, 영험하고 신기한 자취가 여러 번 들렸었다.
오공(吳公 부원수 오연총)은 당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이 제법 무거웠는데 천성이 삼가고 신중하여 일을 닥뜨려서는 반드시 세 번 생각하였으니 꾀는 훌륭하고 방책은 위대하여 시행한 일이 성과를 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윤공과 송공이 예전에 북방 개척에 뜻이 있었던 터라 임금의 명을 듣고 분개와 울컥함 속에 군대를 동하(東下)에 모아 두었다.
군대가 출정하는 날, 윤관 장군은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아직 군사들과 맹세 의식을 치르지도 않았는데도 눈물이 줄줄 흘러 턱에 엉기니 사람들이 그 명을 따르지 않은 자가 없었다.
적의 땅에 들어설 때가 다다르자 삼군이 의기가 충천하여 함성을 질렀는데 일당백의 기세라 마른 나무를 꺾고 대나무를 쪼개듯 적을 무찔렀으니 그 쉬움을 어찌 비유할 수 있겠는가?
6천여 명을 목을 베었고 그 활과 화살을 실었으며 진영 앞으로 와서 항복한 사람이 5만여 명이었으며 날리는 먼지만을 보고서도 넋이 나가 북쪽 외진 곳으로 바쁘게 달아난 사람은 이루다 셀 수가 없었다.
아! 여진이 우악스럽고 우직하여 그 자신의 역량이 강한지 약한지,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 형편을 헤아리지 못하여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함이 이와 같구나.
그 땅은 사방 3백 리로 동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고 서북으로 개마산(盖馬山)에 끼어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닿아 있는데 산천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토지는 기름져 비옥하여 백성들을 살게 할만하다. 그리고 본래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했던 곳이라 그들의 옛 비석과 유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저 구고려(勾高麗)가 앞 시대에서 잃어버렸고 지금 임금께서 뒷 시대에 찾았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새로 6성을 두니 하나는 진동군(鎭東軍)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라 하고 군사와 백성들은 1천 9백 4십 8 정호(丁戶)이며 둘째는 안령군(安嶺軍) 영주방어사(英州防禦使)라 하고 군사와 백성들은 1천 2백 3십 8 정호이며 셋째는 영해군(寧海軍) 웅주방어사(雄州防禦使)라 하고 군사와 백성들이 1천 4백 3십 6 정호이며 넷째는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라 하고 군사와 백성들이 6백 8십 정호이고 다섯째는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라 하며 군사와 백성들이 6백 3십 2 정호이고 여섯째는 공험진방어사(公嶮鎭防禦使)라 하고 군사와 백성들이 5백 3십 2 정호이다.
6성을 만들고 뛰어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 슬기로운 재능이 있어 주어진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자를 뽑아 이곳을 다독이며 다스리게 하였다. 이는 바로 시경(詩經)에서 노래한 ‘우거지네 퍼져나가네. 왕실을 우거지게 하는 사람 때문일세.’이니 백성들은 느긋이 베개를 돋아 베는 모습을 보는 일이 생겼고 걱정에 싸여 동쪽 변방을 돌아보는 일이 없게 되었다.
원수(元帥)께서 나에게 알리기를
‘옛날 당나라 재상 배진공(裴晋公)이 회수(淮水) 서쪽으로 정벌을 나섰을 때 역적을 평정하는 동안 막객(幕客 비유하자면 ‘개인비서’) 한유(韓愈)가 그 일에 대해 비문을 지어 그때의 사연들을 널리 알렸다.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당 헌종(憲宗)의 두드러지고 보통 사람을 넘는 덕을 알게 되어 헌종에 대해 노래하며 칭송하였다. 그대가 이처럼 운 좋게 이 사업에 종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일의 진행을 알고 있으니 어찌 기문(記文)을 지어 전날에 없었던 우리 성스러운 왕조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따라서 나 언(彦)이 붓을 잡고서 이를 기록하였다.”
*적은 아교를 녹여 탁한 물에 넣으면 맑아진다고 하는데 그러나 거대한 황하의 탁함을 적은 아교로는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孔子第七十二代賢孫孔融 《同歲論》 : 阿膠之徑寸,不能止黃河之濁.”
*손자집주(孫子集註) : 맹씨가 “하(碬)는 돌이다. 군대가 만약 훈련이 지극히 완전하여 통솔(部領)이 분명한 데다가 다시 적의 실정을 살펴 조사하여 그 허실을 자세히 알 수 있고, 그런 뒤에 병력을 가한다면 이는 실로 숫돌을 계란에 던지는 것과 같다.” 하였다. 孫子集注 : 孟氏曰:碬,石也. 兵若訓練至整 部領分明 更能審料敵情 委知虚實 後以兵而加之 實同以碬石投卵也
遣其子彦純奉表稱賀曰:「聖人之德,允合於乾坤,仁義之兵,已平其夷狄[原本「犾」],惟將及卒,旣懽且呼。竊以東女眞,潛伏奧區,寔繁醜類,遠從爾祖曾之世,嘗被我朝家之恩,狼貪浸畜其叛心,犬吠頻狺於戶外,侵軼關塞,寇攘士民。 狃制御之寬而謂之易陵,肆覬覦之志而謂之莫禦。先皇故憤以欲伐,陛下方繼而爲圖,以兵危故,始憚裁施,以謀衆故,終歸滯泥。然而策勝負者,存乎熟,知變通者,貴乎時。事機可乘,聖智獨照,先休吾士卒,以觀其可用,繼慮彼虛實,以指其必擒。乃命元戎,亟行大戮,而臣受節鉞之制,擧征鼓而行。氣動於軍,威加於敵,江河注壑,寸膠不能以防之,碬石轉峯,虛卵決然其破矣。俘虜踰於半萬,斬獲近於五千。委積散於閭閻,奔走交於道路。山川險阻,城池因得以高深,原野膏腴,田井亦從而耕鑿,在昔人求而未得者。今玆天與而旣取之,上足以謝宗廟在天之靈,下足以雪朝廷積年之恥。且彼周王玁狁之伐,漢帝凶奴之征,所以拓土開邊,而得爲民去害,比之今日,宜在下風。此豈微臣淺智駑材,能成巨効?實由陛下聖謀神算,坐定遐陬。苟非其然,孰使之矣?伏乞命書史冊,垂耀無窮。」
王遣內侍、衛尉注簿康英俊,賜瓘等羊酒,幷賜軍人銀鐁鑼一面,銀甁四十事。
瓘又使林彦,記其事,書于英州廳壁曰:「孟子曰:『弱固不可以敵强,小固不可以敵大。』吾諷斯言久矣,而今信之矣。女眞之於國家,强弱衆寡,其勢懸殊,而窺覦邊鄙,於肅宗十年,乘隙構亂,多殺我士民,其繫縲爲奴隷者,亦多矣。肅宗赫然整旅,將欲仗大義以討之,惜乎厥功未集,永遺弓劒。今上嗣位,亮陰三載,甫畢祥禪,謂左右曰:『女眞,本高[勾]勾[高]麗之部落,聚居于盖馬山東,世脩貢職,被我祖宗恩澤深矣。一日背畔無道,先考深憤焉。嘗聞古人之稱大孝者,善繼其志耳。朕今幸終達制,肇覽國事,盍擧義旗,伐無道,一洒先君之恥?』乃命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尹瓘,爲行營大元帥,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吳延寵,爲副元帥,率精兵三十萬,俾專征討。
尹公,事業傑然,嘗慕庾信氏之爲人曰:『庾信,六月,冰河,以渡三軍,此無他,至誠而已。予亦何人哉?』其至誠所感,靈異之跡,屢聞焉。吳公,時之重望,天性愼謹,臨事必三思,其良圖大策,施無不中。兩公嘗有志於此,聞命憤激,擁兵東下。出師之日,躬擐甲胃,未及誓衆,洒淚交頤,莫不用命。曁入賊境,三軍奮呼,一以當百,摧枯破竹,何足喩其易哉。斬首六千餘級,載其弓矢,來降於陣前者,五十千餘口,其望塵喪魄,奔走窮北,不可勝數.嗚呼,女眞之頑愚,不量其强弱衆寡之勢,而自取於滅亡如是。其地方三百里,東至于大海,西北介于盖馬山,南接于長、定二州,山川之秀麗,土地之膏腴,可以居吾民。而本高[勾]勾[高]麗之所有也,其古碑遺跡,尙有存焉,夫高[勾]勾[高]麗失之於前,今上得之於後,豈非天歟?於是,新置六城,一曰鎭東軍咸州大都督府,兵民一千九百四十八丁戶。二曰安嶺軍英州防禦使,兵民一千二百三十八丁戶。三曰寧海軍雄州防禦使,兵民一千四百三十六丁戶。四曰吉州防禦使,兵民六百八十丁戶。五曰福州防禦使,兵民六百三十二丁戶。六曰公嶮鎭防禦使,兵民五百三十二丁戶。選其顯達而有賢材能堪其任者,鎭撫之。詩所謂:『于蕃于宣,以蕃王室者也』有以見晏然高枕,無東顧之憂矣。元帥告予曰:『昔唐相裴晋公,出征淮西,及其平,幕客韓愈,爲之碑,以廣其事故。後之人,知憲宗英偉絶人之德,而歌頌之。子幸從事于此,詳其本末,曷不作記,使吾聖朝無前之偉績,垂于無窮乎?』彦承命,援筆誌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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