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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동북 9성(城)

윤관(尹瓘)의 삶 4 (고려사 근거)

by 쥐눈이 2023. 8. 4.

윤관이 바친 것이 포로가 346, 말이 96, 소가 3백여 마리였고 의주(宜州), 통태(通泰)와 평융(平戎) 두 진(),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길주(吉州), 복주(福州),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아 북계(北界) 9()을 만들고서 모든 성에 남쪽 경계의 백성들을 옮겨 와서 채웠다.

왕이 윤관을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에 제수하고 연총(延寵)을 협모동덕치원공신(協謀同德致遠功臣)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제수하고서 내시낭중(內侍郞中) 한교여(韓皦如)를 보내되 조서(詔書)와 고신(告身 임명장), 고귀한 자줏빛 실로 수놓은 안장을 갖춘 왕실 마구간의 말 두 필을 가져가 웅주(雄州)에 이르러 이것들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윤관 등이 개선할 때 왕이 북과 피리 군대를 갖추어 이들을 맞이하게끔 명을 내리고 대방후(帶方侯) 왕보(王俌), 제안후(齊安侯) 왕서(王偦)를 동쪽 교외에 보내어 개선하는 군대를 위로하며 잔치를 벌이게 하였다. 윤관과 오연총이 경령전(景靈殿)으로 나아가 나라 조상 영령들께 받았던 명에 대해 보고를 올리고서 부월(鈇鉞)을 도로 드렸다.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납시고서 이들을 불러들여서 변방의 일에 대해 여쭈어보는데 한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다시 다음 해에 여진이 길주(吉州)를 포위하니 오연총이 적과 전투를 벌여 크게 패배하였다. 왕이 거듭 윤관을 보내어 이를 구원하게 하고 가까운 신하에게 명하여 이들을 금교역(金郊驛)에서 배웅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이 웅주(雄州)를 포위하니 왕이 오연총을 보내어 이 사태를 구제하게 하고 다시 윤관을 보내어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윤관이 31명의 귀 한 짝들을 바쳤다. 조금 있다가 윤관을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에 봉하였는데 영평현의 식읍(食邑 개인이 직접 세금을 받아먹는)25백 호였지만 실제로는 식읍 3백 호로 세금을 받아먹게 하였다. 오연총에게는 양구진국공신(攘寇鎭國功臣)이라는 이름을 더하였다.

윤관과 오연총이 정주(定州)의 강한 군사로 길주(吉州)에 다다랐다. 행렬이 나복기촌(那卜其村)에 이르렀는데 함주사록(咸州司錄) 유원서(兪元胥)가 급한 보고를 올렸다.

여진(女眞)의 공형뇨불(公兄褭弗)과 사현(史顯)이 성문을 두드리고 하는 말이 우리가 어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갔었는데 태사 오아속(太師烏雅束)화해를 청하고자 한다라며 내게 이 말을 병마사(兵馬使)께 전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대들이 이어져 있어 감히 관문을 들어오지 못하니 우리 지역에 사람을 보내주기를 청합니다. 그 자리에서 태사 오아속(太師烏雅束)이 한 말을 자세히 사실대로 전달하고자 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관 등이 이 보고를 듣고 도로 성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병마기사(兵馬記事) 이관중(李管仲)을 적의 지역에 보내 여진 장수 오사(吳舍)에게 화친을 맺음은 병마사(兵馬使)가 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마땅히 공형(公兄) 등을 보내어 우리 조정에 들어가서 아뢰어야 할 것이오.” 하니 오사가 크게 기뻐하였다.

뇨불(褭弗), 사현(史顯) 등이 함주(咸州)에 다시 이르러 알리기를 우리들은 고려 조정에 알현하기를 원하지만 지금 한창 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판이라 의심스럽고 두려워 감히 관문을 들어가 못합니다. 대신 서로 관리를 인질로 잡아두기를 청합니다.” 윤관이 공옥(孔沃), 이관중(李管仲), 이현(異賢) 등을 인질로 하고 뇨불 등이 드디어 9()의 땅을 돌려주기를 바라는 청을 우리 조정에 와서 하였다.

정벌을 도모한 초기, 조정에서 의론할 때 병목을 차지하여 그 길만 막으면 적의 우환은 영원히 끊어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군대가 공격하여 그곳을 차지하고 나서 보니, 수륙의 길이 어디를 가도 통하지 않은 곳이 없어 전에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었다.

여진(女眞)이 이미 그들의 소굴을 잃어버리고 보복하기로 맹세하더니 마침내 먼 데 추장들까지 이끌고 본거지로 돌아와서 뭇 추장이 해를 이어가며 와 싸움을 걸었다. 꼼수로써 군사와 병기의 사용을 꾀하여 쓰지 않는 방법이 없었으니, ()의 지세가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빼앗기지는 않더라도 성을 지키며 전투에 임할 때 우리 군사들의 상실 역시 많았다. 게다가 개척한 땅이 크고 넓어서 9()들 거리가 서로 멀고도 멀거니와 계곡은 깊고 마을은 황량하여 적들이 여러 차례 매복을 심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을 약탈하였다.

나라에서는 군사를 강제로 모집하느라 사단이 많이 벌어져 중앙과 지방이 시끄러웠으며, 엎친 데 겹친 격으로 굶주림과 질병이 휩쓸어서 결국 백성들 사이에서 원망과 탄식이 일어났다. 여진 역시 잦은 전투 겪는 괴로움을 질리게 생각하였다. 이때 이르러 왕이 뭇 신하를 모아놓고 사안을 의논하더니 결국 9()을 여진에 돌려주고 전투 병기와 용구들, 식량을 내지로 수송하여 성들에서 철수하는 쪽으로 끝을 보았다.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과 김경용(金景庸), 참지정사(叅知政事) 임의(任懿)와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위(李瑋)가 선정전(宣政殿)에 들어가 임금과 마주하여 윤관과 오연총이 패배한 죄를 극심하게 따졌다. 왕이 승선(承宣) 심후(沈侯)를 윤관 등이 돌아오는 길로 보내어 그 부월(鈇鉞 병권을 실어주는 임명장)을 거두니 왕을 만나서 받았던 명에 대해 보고조차 하지 못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그들의 죄를 다스리기를 요청하였는데 간신(諫臣) 김연(金緣), 이재(李載) 등이 대궐 문에 엎드려 고집스레 주장을 펼쳐 윤관 등은 망령되게도 무명의 군사들을 모집하여 군대는 패배하고 나라는 해를 입었으니 그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청컨대 감옥에 보내어 옥관이 치죄하게 하십시오!”라고 핏대를 올렸다.

왕이 심후(沈侯)에 명하여 임금의 말씀을 전하게 하였는데

두 원수가 명을 받들고 전쟁을 수행하였다. 옛날부터 전투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법, 무슨 죄가 된다는 말인가?”

하였지만 연() 등이 다시 주장을 펼치며 그치지 않으니 왕은 하는 수 없이 윤관 등의 관직을 제하고 공신 칭호를 깎아내는 데에 그쳤다.

얼마 있다가 윤관을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병부사(判兵部事) 상주국(上柱國)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제수하였지만, 윤관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표()를 올려 사양하였다. 왕이 불허하며

짐이 듣기로 옛날 한나라 이광리(李廣利)가 대완(大宛 우즈벡과 키르키스탄 쪽의 페르가나 분지)을 쳤을 때 준마 30필도 겨우 획득하였고 한 무제가 만 리 길 정벌을 나섰을 때 그 부하들의 허물은 기록하지 않았다. 서한의 양탕(陳湯)이 흉노 왕 질지(郅支)를 죽일 때 제도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군사를 징발하였지만, 선제(宣帝)가 모든 만이(蠻夷)에게 위엄을 떨쳤다는 이유로 양탕을 제후의 반열에 세웠다.

()께서 여진을 정벌함에 돌아가신 숙종의 유지를 수습하였고 과인의 유업을 아름답게 하였다. 몸소 적의 날카로운 칼날과 살촉을 무릅쓰시면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적의 귀를 베어내고 포로로 잡은 것이 셀 수가 없을 정도인 데다 땅을 백 리나 넓혀 9()을 쌓아서 나라의 묵은 수치를 씻어냈으니 경의 공은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은 사람의 얼굴을 쓰고서 마음에는 투쟁심이 있어 배반과 복종을 밥 먹듯이 하는 터라 그 남은 추잡함을 가지고는 더는 의지할 곳이 없는 까닭에 추장이 항복을 내밀고 강화를 요청한 것이고, 신하들 모두 이를 유리하게 생각한 데다가 짐 역시 차마 더는 전쟁을 이어나가지 못하겠기에 마침내 그 땅을 돌려준 것이다.

관계된 관리들이 법을 고집하여 탄핵을 논한 일이 자못 있어서 제꺽 그대의 직을 빼앗았지만, 짐은 끝까지 경()을 탓하지 않았으니 이는 춘추 시대 때 진 목공(秦 穆公)의 장수 맹명(孟明)이 진()과의 전쟁에서 세 번을 패배하였지만, 목공이 끝까지 믿어주어 다시 성공한 일에 가깝다. 지금 짐이 경에게 내린 관직은 도리어 경의 옛날 관직일 뿐인데 무슨 사양할 만 것이겠는가? 그대를 향한 나의 보살핌과 그리움을 느끼신다면 어서 그대의 직임에 나오셔야 한다.”

하였다.

윤관이 재차 표()를 올려 사양하였고 왕은 다시금 윤허하지 않았다.

6년 윤관이 서거하니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瓘獻俘三百四十六口馬九十六匹牛三百餘頭城宜州通泰平戎二鎭與咸福州公嶮鎭爲北界九城皆徙南界民以實之王拜瓘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延寵協謀同德致遠功臣尙書左僕射叅知政事遣內侍郞中韓皦如䝴詔書告身及紫繡鞍具廐馬二匹至雄州分賜之凱還王命具鼓吹軍衛以迎之遣帶方侯俌齊安侯偦勞宴於東郊延寵詣景靈殿復命納鈇鉞王御文德殿引見問邊事入夜乃罷未幾女眞又圍雄州王遣延寵救之復遣瓘征之瓘獻馘三十一級尋封瓘鈴平縣開國伯食邑二千五百戶食實封三百戶加延寵攘寇鎭國功臣號又明年女眞圍吉州延寵與戰大敗王又遣瓘救之命近臣餞于金郊驛延寵自定州勒兵赴吉州行至那卜其村咸州司錄兪元胥馳報:「女眞公兄褭弗史顯等叩城門曰我輩昨到阿之古村太師烏雅束欲請和使我傳告兵馬使然兵交不敢入關請遣人于我場庶以太師所諭詳實傳告。」瓘等聞之還入城翼日遣兵馬記事李管仲於賊場謂女眞將吳舍曰:「講和非兵馬使所得專宜遣公兄等入奏天庭。」舍大悅褭弗史顯等復至咸州告曰:「我等願入朝時方交戰疑懼不敢入關請以官人交質。」瓘以孔沃李管仲異賢等爲質褭弗等遂來請還九城地初朝議以得甁項塞其徑狄患永絶及其攻取則水陸道路無往不通與前所聞絶異女眞旣失窟穴誓欲報復乃引還地群酋連歲來爭詭謀兵械無所不至以城險固不猝拔然當戰守我兵喪失者亦多且拓地大廣九城相去遼遠谿洞荒深賊屢設伏抄掠往來者國家調兵多端中外騷擾加以飢饉疾疫怨咨遂興女眞亦厭苦至是王集群臣議之竟以九城還女眞輸戰具資糧于內地撤其城平章事崔弘嗣金景庸叅知政事任懿樞密院使李瑋入對宣政殿極論瓘延寵敗軍之罪王遣承宣沈侯於中路收其鈇鉞瓘等不得復命歸私第宰相臺諫請治其罪諫臣金緣李載等伏閤固爭曰:「瓘等妄[8]興無名之兵敗軍害國罪不可赦請下吏。」王命沈侯宣諭曰:「兩元帥奉命行兵自古戰有勝敗豈爲罪哉?」緣等又爭不已王不得已止免官削功臣號尋拜瓘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瓘上表辭不允曰:「朕聞昔李廣利之伐大宛也僅獲駿馬三十匹而武帝以萬里征伐不錄其過陳湯之誅郅支也矯制擅興師而宣帝以威振百蠻封爲列侯卿之伐女眞受先考之遺旨体寡人之述事身冒鋒鏑深入賊壘斬馘俘虜不可勝計而闢百里之地築九州之城以雪國家之宿恥則卿之功可謂多矣然夷狄[6]人面戰心叛伏不常厥有餘醜無所依處故酋長納降請和群臣皆以爲便朕亦不忍遂還其地有司守法頗有論劾遽奪其職朕終不以卿爲咎庶幾有孟明之復濟也今朕之授卿者抑卿之舊職也何足以辭當体眷懷速就乃職。」瓘再表讓又不允

六年卒謚文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