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이 바친 것이 포로가 3백 4십 6명, 말이 9십 6필, 소가 3백여 마리였고 의주(宜州), 통태(通泰)와 평융(平戎) 두 진(鎭),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길주(吉州), 복주(福州),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아 북계(北界) 9성(城)을 만들고서 모든 성에 남쪽 경계의 백성들을 옮겨 와서 채웠다.
왕이 윤관을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에 제수하고 연총(延寵)을 협모동덕치원공신(協謀同德致遠功臣)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제수하고서 내시낭중(內侍郞中) 한교여(韓皦如)를 보내되 조서(詔書)와 고신(告身 임명장), 고귀한 자줏빛 실로 수놓은 안장을 갖춘 왕실 마구간의 말 두 필을 가져가 웅주(雄州)에 이르러 이것들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윤관 등이 개선할 때 왕이 북과 피리 군대를 갖추어 이들을 맞이하게끔 명을 내리고 대방후(帶方侯) 왕보(王俌), 제안후(齊安侯) 왕서(王偦)를 동쪽 교외에 보내어 개선하는 군대를 위로하며 잔치를 벌이게 하였다. 윤관과 오연총이 경령전(景靈殿)으로 나아가 나라 조상 영령들께 받았던 명에 대해 보고를 올리고서 부월(鈇鉞)을 도로 드렸다.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납시고서 이들을 불러들여서 변방의 일에 대해 여쭈어보는데 한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다시 다음 해에 여진이 길주(吉州)를 포위하니 오연총이 적과 전투를 벌여 크게 패배하였다. 왕이 거듭 윤관을 보내어 이를 구원하게 하고 가까운 신하에게 명하여 이들을 금교역(金郊驛)에서 배웅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이 웅주(雄州)를 포위하니 왕이 오연총을 보내어 이 사태를 구제하게 하고 다시 윤관을 보내어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윤관이 31명의 귀 한 짝들을 바쳤다. 조금 있다가 윤관을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에 봉하였는데 영평현의 식읍(食邑 개인이 직접 세금을 받아먹는)은 2천 5백 호였지만 실제로는 식읍 3백 호로 세금을 받아먹게 하였다. 오연총에게는 양구진국공신(攘寇鎭國功臣)이라는 이름을 더하였다.
윤관과 오연총이 정주(定州)의 강한 군사로 길주(吉州)에 다다랐다. 행렬이 나복기촌(那卜其村)에 이르렀는데 함주사록(咸州司錄) 유원서(兪元胥)가 급한 보고를 올렸다.
“여진(女眞)의 공형뇨불(公兄褭弗)과 사현(史顯)이 성문을 두드리고 하는 말이 ‘우리가 어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갔었는데 태사 오아속(太師烏雅束)이 “화해를 청하고자 한다”라며 내게 이 말을 병마사(兵馬使)께 전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대들이 이어져 있어 감히 관문을 들어오지 못하니 우리 지역에 사람을 보내주기를 청합니다. 그 자리에서 태사 오아속(太師烏雅束)이 한 말을 자세히 사실대로 전달하고자 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관 등이 이 보고를 듣고 도로 성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병마기사(兵馬記事) 이관중(李管仲)을 적의 지역에 보내 여진 장수 오사(吳舍)에게 “화친을 맺음은 병마사(兵馬使)가 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마땅히 공형(公兄) 등을 보내어 우리 조정에 들어가서 아뢰어야 할 것이오.” 하니 오사가 크게 기뻐하였다.
뇨불(褭弗), 사현(史顯) 등이 함주(咸州)에 다시 이르러 알리기를 “우리들은 고려 조정에 알현하기를 원하지만 지금 한창 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판이라 의심스럽고 두려워 감히 관문을 들어가 못합니다. 대신 서로 관리를 인질로 잡아두기를 청합니다.” 윤관이 공옥(孔沃), 이관중(李管仲), 이현(異賢) 등을 인질로 하고 뇨불 등이 드디어 9성(城)의 땅을 돌려주기를 바라는 청을 우리 조정에 와서 하였다.
정벌을 도모한 초기, 조정에서 의론할 때 병목을 차지하여 그 길만 막으면 적의 우환은 영원히 끊어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군대가 공격하여 그곳을 차지하고 나서 보니, 수륙의 길이 어디를 가도 통하지 않은 곳이 없어 전에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었다.
여진(女眞)이 이미 그들의 소굴을 잃어버리고 보복하기로 맹세하더니 마침내 먼 데 추장들까지 이끌고 본거지로 돌아와서 뭇 추장이 해를 이어가며 와 싸움을 걸었다. 꼼수로써 군사와 병기의 사용을 꾀하여 쓰지 않는 방법이 없었으니, 성(城)의 지세가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빼앗기지는 않더라도 성을 지키며 전투에 임할 때 우리 군사들의 상실 역시 많았다. 게다가 개척한 땅이 크고 넓어서 9성(城)들 거리가 서로 멀고도 멀거니와 계곡은 깊고 마을은 황량하여 적들이 여러 차례 매복을 심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을 약탈하였다.
나라에서는 군사를 강제로 모집하느라 사단이 많이 벌어져 중앙과 지방이 시끄러웠으며, 엎친 데 겹친 격으로 굶주림과 질병이 휩쓸어서 결국 백성들 사이에서 원망과 탄식이 일어났다. 여진 역시 잦은 전투 겪는 괴로움을 질리게 생각하였다. 이때 이르러 왕이 뭇 신하를 모아놓고 사안을 의논하더니 결국 9성(城)을 여진에 돌려주고 전투 병기와 용구들, 식량을 내지로 수송하여 성들에서 철수하는 쪽으로 끝을 보았다.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과 김경용(金景庸), 참지정사(叅知政事) 임의(任懿)와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위(李瑋)가 선정전(宣政殿)에 들어가 임금과 마주하여 윤관과 오연총이 패배한 죄를 극심하게 따졌다. 왕이 승선(承宣) 심후(沈侯)를 윤관 등이 돌아오는 길로 보내어 그 부월(鈇鉞 병권을 실어주는 임명장)을 거두니 왕을 만나서 받았던 명에 대해 보고조차 하지 못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그들의 죄를 다스리기를 요청하였는데 간신(諫臣) 김연(金緣), 이재(李載) 등이 대궐 문에 엎드려 고집스레 주장을 펼쳐 “윤관 등은 망령되게도 무명의 군사들을 모집하여 군대는 패배하고 나라는 해를 입었으니 그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청컨대 감옥에 보내어 옥관이 치죄하게 하십시오!”라고 핏대를 올렸다.
왕이 심후(沈侯)에 명하여 임금의 말씀을 전하게 하였는데
“두 원수가 명을 받들고 전쟁을 수행하였다. 옛날부터 전투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법, 무슨 죄가 된다는 말인가?”
하였지만 연(緣) 등이 다시 주장을 펼치며 그치지 않으니 왕은 하는 수 없이 윤관 등의 관직을 제하고 공신 칭호를 깎아내는 데에 그쳤다.
얼마 있다가 윤관을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병부사(判兵部事) 상주국(上柱國)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제수하였지만, 윤관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표(表)를 올려 사양하였다. 왕이 불허하며
“짐이 듣기로 옛날 한나라 이광리(李廣利)가 대완(大宛 우즈벡과 키르키스탄 쪽의 페르가나 분지)을 쳤을 때 준마 30필도 겨우 획득하였고 한 무제가 만 리 길 정벌을 나섰을 때 그 부하들의 허물은 기록하지 않았다. 서한의 양탕(陳湯)이 흉노 왕 질지(郅支)를 죽일 때 제도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군사를 징발하였지만, 선제(宣帝)가 모든 만이(蠻夷)에게 위엄을 떨쳤다는 이유로 양탕을 제후의 반열에 세웠다.
경(卿)께서 여진을 정벌함에 돌아가신 숙종의 유지를 수습하였고 과인의 유업을 아름답게 하였다. 몸소 적의 날카로운 칼날과 살촉을 무릅쓰시면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적의 귀를 베어내고 포로로 잡은 것이 셀 수가 없을 정도인 데다 땅을 백 리나 넓혀 9성(城)을 쌓아서 나라의 묵은 수치를 씻어냈으니 경의 공은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은 사람의 얼굴을 쓰고서 마음에는 투쟁심이 있어 배반과 복종을 밥 먹듯이 하는 터라 그 남은 추잡함을 가지고는 더는 의지할 곳이 없는 까닭에 추장이 항복을 내밀고 강화를 요청한 것이고, 신하들 모두 이를 유리하게 생각한 데다가 짐 역시 차마 더는 전쟁을 이어나가지 못하겠기에 마침내 그 땅을 돌려준 것이다.
관계된 관리들이 법을 고집하여 탄핵을 논한 일이 자못 있어서 제꺽 그대의 직을 빼앗았지만, 짐은 끝까지 경(卿)을 탓하지 않았으니 이는 춘추 시대 때 진 목공(秦 穆公)의 장수 맹명(孟明)이 진(晉)과의 전쟁에서 세 번을 패배하였지만, 목공이 끝까지 믿어주어 다시 성공한 일에 가깝다. 지금 짐이 경에게 내린 관직은 도리어 경의 옛날 관직일 뿐인데 무슨 사양할 만 것이겠는가? 그대를 향한 나의 보살핌과 그리움을 느끼신다면 어서 그대의 직임에 나오셔야 한다.”
하였다.
윤관이 재차 표(表)를 올려 사양하였고 왕은 다시금 윤허하지 않았다.
6년 윤관이 서거하니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瓘獻俘三百四十六口,馬九十六匹,牛三百餘頭,城宜州、通泰、平戎二鎭與咸、英、雄、吉、福州、公嶮鎭,爲北界九城,皆徙南界民,以實之。王拜瓘,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延寵,協謀同德致遠功臣、尙書左僕射、叅知政事,遣內侍郞中韓皦如,䝴詔書告身及紫繡鞍具廐馬二匹,至雄州,分賜之。凱還,王命具鼓吹軍衛以迎之,遣帶方侯俌、齊安侯偦,勞宴於東郊。瓘、延寵,詣景靈殿,復命,納鈇鉞,王御文德殿,引見問邊事,入夜乃罷。未幾,女眞又圍雄州,王遣延寵救之,復遣瓘征之。瓘獻馘三十一級,尋封瓘鈴平縣開國伯,食邑二千五百戶,食實封三百戶,加延寵攘寇鎭國功臣號。又明年,女眞圍吉州,延寵與戰大敗。王又遣瓘救之,命近臣餞于金郊驛。瓘、延寵,自定州勒兵赴吉州,行至那卜其村,咸州司錄兪元胥馳報:「女眞公兄褭弗、史顯等,叩城門曰,我輩昨到阿之古村,太師烏雅束欲請和,使我傳告兵馬使。然兵交不敢入關,請遣人于我場,庶以太師所諭,詳實傳告。」瓘等聞之,還入城。翼日,遣兵馬記事李管仲於賊場,謂女眞將吳舍曰:「講和,非兵馬使所得專,宜遣公兄等,入奏天庭。」舍大悅。褭弗、史顯等,復至咸州,告曰:「我等,願入朝,時方交戰,疑懼不敢入關,請以官人交質。」瓘以孔沃、李管仲、異賢等爲質,褭弗等,遂來請還九城地。初朝議以得甁項,塞其徑,狄患永絶,及其攻取,則水陸道路,無往不通,與前所聞絶異。女眞旣失窟穴,誓欲報復,乃引還地,群酋連歲來爭。詭謀兵械,無所不至,以城險固,不猝拔,然當戰守,我兵喪失者亦多。且拓地大廣,九城相去遼遠,谿洞荒深,賊屢設伏,抄掠往來者。國家調兵多端,中外騷擾,加以飢饉疾疫,怨咨遂興,女眞亦厭苦。至是,王集群臣議之,竟以九城還女眞,輸戰具、資糧于內地,撤其城。 平章事崔弘嗣、金景庸、叅知政事任懿、樞密院使李瑋,入對宣政殿,極論瓘、延寵敗軍之罪,王遣承宣沈侯於中路,收其鈇鉞,瓘等不得復命,歸私第。宰相、臺諫,請治其罪,諫臣金緣、李載等,伏閤固爭曰:「瓘等妄[8]興無名之兵,敗軍害國,罪不可赦。請下吏。」王命沈侯宣諭曰:「兩元帥奉命行兵,自古戰有勝敗,豈爲罪哉?」緣等又爭不已,王不得已止免官削功臣號。尋拜瓘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瓘上表辭。不允曰:「朕聞昔李廣利之伐大宛也,僅獲駿馬三十匹,而武帝以萬里征伐,不錄其過。陳湯之誅郅支也,矯制擅興師,而宣帝以威振百蠻,封爲列侯。卿之伐女眞,受先考之遺旨,体寡人之述事。身冒鋒鏑,深入賊壘,斬馘俘虜,不可勝計,而闢百里之地,築九州之城,以雪國家之宿恥,則卿之功,可謂多矣。然夷狄[6]人面戰心,叛伏不常,厥有餘醜,無所依處故,酋長納降請和,群臣皆以爲便,朕亦不忍,遂還其地。有司守法,頗有論劾,遽奪其職,朕終不以卿爲咎,庶幾有孟明之復濟也。今朕之授卿者,抑卿之舊職也,何足以辭?當体眷懷,速就乃職。」瓘再表讓,又不允。
六年卒,謚文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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