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윤관의 동북 9성(城)

윤관(尹瓘)의 삶1 〈언이(彦頤), 인첨(鱗瞻), 세유(世儒), 상계(商季)〉

by 쥐눈이 2023. 7. 28.

윤관(尹瓘)은 자가 동현(同玄)이고 파평현(坡平縣) 사람이다. 그의 고조인 신달(莘達)이 태조(太祖) 왕건을 도와 서 삼한 공신(三韓功臣)이 되었고 아버지 집형(執衡)이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이 되었다. 윤관은 문종조(文宗朝 재위 10461083)에 과거에 급제하여 습견(拾遣), 보궐(補闕)을 거쳐 숙종(肅宗 재위 1095~1105) 때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와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로 벼슬자리를 여러 번 옮겼다.

여진(女眞)은 본래 말갈의 남겨진 종족으로 수()와 당() 시대에 구고려(勾高麗 곧 고구려)에 병합되었었는데 뒤에 마을을 이루며 산과 연못에 흩어져 지냈지만 한 번도 통일을 이룬 적이 없었다. 그들 중에 정주(定州)와 삭주(朔州)의 국경 근처에 있던 자들은, 비록 더러는 우리 땅에 들어와서 붙어산다고 하더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신하 노릇을 하다가도 눈 깜짝할 사이 반역을 하였다. 영가(盈哥)와 오아속(烏雅束)이 서로 이어가며 추장을 하는 동안 자못 무리의 마음을 얻어 그 세가 점차 뻗어갔다. 이위(伊位)의 경계에는 산이 연이어 있어 동해안에서부터 높이 솟아 우리의 북쪽 변방에 이른다. 산세가 험하게 깎아지른 듯하고 풀들이 빽빽하여 사람이든지 말이든지 지나가지 못한다. 사이에 사잇길 하나가 있는데 민간에서는 병목(甁項)이라 하니, 하나의 구멍을 드나드는 것과 같을 뿐이라는 말이다. 위에 잘 보여 남의 공을 가로채려는 사람들은 자주 의론을 올려 그 사잇길을 막으면 북방 이민족들의 길을 끊게 된다며 군대를 내어 이곳을 평정하기를 청하였다.

7년 여진이 와서 정주(定州) 관문 밖에서 진을 치고 있으니 그들이 군사로 우리를 도모한다고 의심하여 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꼬여 붙잡고서 광주(廣州)에 가두고서 고문을 하니 과연 우리에게 군사적 도발을 할 계획이었고 마침내 이들을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회변(會邊) 장수 이일숙(李日肅) 등이 주상에게 아뢰기를 여진은 허약하여 두려워할 상대가 못 됩니다. 지금 이들을 잡지 않는다면 훗날에 반드시 환란을 만들 것입니다.” 하였다. 오아속(烏雅束)이 또한 다른 부족의 사내들()과 어른들() [원문에 부내로(夫乃老)’는 부족 이름일 수도 있다.]과 틈이 생겨 군대를 보내서 이들을 공격하고 와서 우리 변경 가까이에서 주둔하였으니, 왕이 임간(林幹)을 보내어 이들의 병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임간이 위에 잘 보이고 공을 차지하려 군대를 이끌고 적진 깊이 들어가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니 죽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여진이 승기를 타고 정주(定州)의 선덕관성(宣德關城)에 난입하여 죽이고 약탈한 것이 셀 수가 없었다. 마침내 윤관은 임관을 대신하여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으로 삼고 부월(鈇鉞 임명장)을 주어 보냈다.

윤관이 여진과 전투를 벌이는데 30여 명을 베었으나 우리 군사 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반수가 넘으니 군대의 사기가 떨치지 못하였다. 마침내 말을 겸손히 하여 화해를 맺고 동맹을 맺고 돌아오니 왕이 분이 나서 천지신명께 아뢰어 하느님의 남모르는 도움을 받아 적의 국경을 소탕하고 이어 그 땅에 절을 짓기를 허락해 주십사 기원하였다. 윤관이 참지정사(叅知政事), 판상서형부사 겸 태자빈객(判尙書刑部事兼太子賓客)으로 자리를 옮겼었는데, 아뢰기를

신이 적의 세력을 살펴보았을 때 억세어 예측하기 어려우니 사정상 일반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사(군관)를 길러서 훗날에 기회를 엿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이 패배한 까닭은, 적은 기마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라서 대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처음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세울 논의를 마련하고 그 자격에 문관과 무관을 가리지 않고 한직에 있는 이서(吏胥 말단 벼슬아치)에서부터 장사꾼, 노복들에게까지 이르렀으며 주(), (), (), ()의 모든 말()을 가진 자들은 신기(神騎)로 만들고 말()이 없는 자들은 신보(神步 보병), 도탕(跳蕩 돌격대나 정예부대), 경궁(梗弓 활 담당), 정노(精弩 쇠뇌 담당), 발화(發火 화약 담당) 등의 군사로 만들었다. 나이 20살 이상의 남자는 과거 시험에서 예비 시험을 통과하여 본 시험을 앞둔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신보(神步)에 소속시키고 서반(西班 무관), 여러 진()과 부()의 군인들을 사시사철 훈련을 시켰다. 나아가 승려들을 뽑아 항마군(降魔軍)을 만들었다. 마침내 군사를 단련시키고 군량미를 쌓아두며 다시 군대를 일으킬 계획을 하였다. 윤관이 중서시랑 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로 진급하였다.

예종(재위 1105-1122)이 즉위하고 국상 중이라 미처 군대를 출정시킬 겨를이 없었다. 예종 2년 변경의 장수가 보고하기를 여진의 날쌔고 용감한 사람들이 변경의 성들을 침입하여 이리저리 돌격하고 있습니다. 추장은 꿩 꼬리 깃털을 매단 호리병을 여러 부락마다 다니며 보여주고서 (전투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있으니 그 심중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꿩 꼬리와 호리병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자료를 찾지 못하였고 다만 역사에 나온 예문들을 모아서 해석하여 아래 쪽에 올렸다.)

왕이 이를 듣고 중광전(重光殿) 불감(佛龕)에 갈무리해 둔 숙종(肅宗 재위 1095~1105)께서 조목조목 맹세한 글을 내어서 양부(兩府)의 대신들에게 보였다. 대신이 받들어 읽다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신 성상 숙종의 남기신 뜻이 그 절절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그 뜻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

하였다. 마침내 숙종의 글을 건네주고 그 뜻을 이어 여진을 치기를 청하였다.

왕이 머뭇거리며 결정을 짓지 못하고서 평장사 최홍사(平章事 崔弘嗣)에게 명하여 태묘(太廟)에서 점을 치게 하였는데 어려운 처지에 빠졌어도 강건하고 바른 덕으로 극복해 가는 감()’일이 이루어진다는 기제(旣濟)’로 가는 괘를 만났다. 드디어 군대를 출정시킬 의론을 정하여 윤관을 원수(元帥)로 삼았다. 지추밀원사 오연총(知樞密院事 吳延寵)이 이를 돕게 하였다.

윤관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돌아가신 성상 숙종의 밀지를 받들었었는데 이제 다시 엄명을 받드니 과감히 삼군을 거느리고 적의 소굴을 깨뜨리고서 우리의 강토를 수습하여서 나라의 수치를 씻어내겠습니다!”

하니 연총이 자못 의심스럽게 생각하여 윤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윤관이 격앙되어

공과 내가 아니면 누가 만 번 죽을 땅에 가서 나라의 수치를 씻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연총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위봉루(威鳳摟)로 거둥하여서 부월(鈇鉞 임명장의 의미)를 내려 이들을 보냈다.

윤관과 오연총이 동계(東界)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군대를 주둔시키니 모두 17만이었는데 20만이라 호기롭게 말하였다.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崔弘正)과 황군상(黃君裳)을 나누어 정주(定州)와 장주(長州)로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이는 말로

나라에서 장차 허정(許貞)과 라불(羅弗) 등을 풀어주어 돌려보내려 하니 와서 명을 듣는 것이 좋으리라!’

하고 매복을 두고서 그들을 기다렸다.

추장이 이 말을 믿고 고라(古羅)4백여 사람이 이르르니 술에 취하도록 마실 것을 대접하고 복병을 움직여 이들을 죽였다. 일행들 가운데에 힘세고 약삭빠른 자 56인이 관문에 이르러 의심을 가져 관문을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었다.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金富弼)과 녹사(錄事) 탁준경(拓俊京)을 시켜 길을 나누어 매복을 심었고 또한 홍정(弘正)을 시켜 정예 기병으로 응수하여 거의 다 사로잡거나 죽였다.

윤관은 스스로 53천 병사로써 정주(定州)의 대화문(大和門)으로 나왔고 중군 병마사(中軍兵馬使) 좌복사(左僕射) 김한충(金漢忠)367백의 병사로써 안륙수(安陸戍)로 나왔으며 좌군 병마사(左軍兵馬使) 좌상시(左常侍) 문관(文冠)339백의 병사로써 정주(定州)의 홍화문(弘化門)으로 나왔다.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 병부상서(兵部尙書) 김덕진(金德珍)438백 군사로써 선덕진(宣德鎭)의 안해(安海)와 거방(拒防) 두 국경 지역 사이에서 나왔다. 선병별감(船兵別監)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양유송(梁惟竦)과 원흥도부서사(元興都部署使) 정숭용(鄭崇用), 진명도부서부사(鎭溟都部署副使) 견응도(甄應圖) 등은 해병 26백으로써 도린포(道鱗浦)로 나왔다. (조선사략(朝鮮史略)에서는 도린포(道鱗浦)’인도포(鱗道浦)’로 되어 있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나와 반나절을 행군하고 있었는데 여진이 군대의 형세가 매우 성대함을 보고서 모두 피하여 달아나 오직 가축들만 들녘에 퍼져있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들이 동음성(冬音城)을 지키고 있었다. 윤관(瓘遣)은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林彦)과 홍정(弘正)의 정예병을 이끌고 동음성을 속히 공격하여 깨뜨려 적을 달아나게 하였다.

좌군(左軍)이 석성(石城) 아래에 도착하였을 때 여진(女眞)이 집결한 것이 보여서 통역자 대언(戴彦)을 보내어 항복하도록 타일렀다. 여진이 답하기를

우리는 한 번의 전투로 승부를 결판내고자 하는데 항복이 무슨 말인가?”

하였다.

마침내 여진이 석성(石城)으로 들어가 저항하며 전투를 하였는데 화살과 돌이 비처럼 쏟아졌다. 우리 군대가 전진하지 못하니 윤관이 준경(俊京)에게 이르기를

해가 기울면 일이 촉박해진다. 그대는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함께 공격해야 한다.”

하니 준경이 말하기를

제가 일찍이 장주(長州)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 잘못하여 죄를 범하였는데 공께서 그대는 장사(壯士)이다.’ 하시고 조정에 용서해주기를 청하셨습니다. 오늘 이날은 준경은 몸을 죽여서라고 은혜에 보답하는 때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석성(石城) 아래에 이르러 갑옷을 두르고 방패를 쥐고서 적 중에 돌격하여 들어가 추장 몇 사람을 쳐 죽였다. 이에 윤관의 지휘 아래 좌군(左軍)이 함께 쳐 거의 죽도록 싸워 적을 크게 깨뜨렸다. 적 중에서 더러는 바윗돌에 자신을 던졌고 노인과 어린애, 남자와 여자들을 섬멸하였다.

준경(俊京)에게 능라(綾羅) 30()을 상으로 내렸다.

한편 홍정(弘正), 부필(富弼), 녹사(錄事) 이준양(李俊陽)을 보내어 이위동(伊位洞)을 치게 하였는데 적이 우리 군을 맞아 싸우는 바람에 오래 걸렸지만, 마침내 이들을 이겼다. 이때 12백 명을 참수하였다. 중군(中軍)은 고사한(高史漢) 35 촌락을 깨뜨려 380명을 참수하고 230명을 포로로 잡았다.

우군(右軍)은 광탄(廣灘) 32 촌락을 깨뜨려 290명을 참수하고 3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좌군(左軍)은 심곤(深昆) 31 촌락을 깨뜨려 950명을 참수하였다. 윤관의 군대가 대내파지(大乃巴只)로 시작하여 37 촌락을 깨뜨리고 2120명을 참수하고 5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녹사(錄事) 유영약(兪瑩若)을 보내 우리 군의 승리를 알렸다.

왕이 기뻐 영약(瑩若)에게 작위 7()을 내리고 좌부승지(左副承旨) 병부랑중(兵部郞中) 심후(沈侯)와 내시(內侍)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한교여(韓皦如)에게 명하여 조서를 내리게 하고서 두 원수(元帥)와 여러 장수에게 북돋는 말씀을 하고 상품을 차등 있게 내렸다.

곁드린 자료

오아속(烏雅束)영가(盈歌 또는 楊割, 盈歌) 포함

*여진 완안부 사람(女真完顏部人 10611113)으로 완안부는 생여진(生女眞)의 한 부족으로 금나라를 건국한 핵심이었다.

*금나라 역사책에 오아속(烏雅束)은 오아서(烏雅舒)로 되어있다. 오아서는 자()는 무록완(茂禄完)이고 금 세조(世祖)의 장자이다. 金史 : 烏雅舒字茂禄完 世祖長子也

요사(遼史) : 금사세기(金史世紀) 양할(楊割 곧 영가(盈歌))이 요 천조제(遼 天祚帝) 건통(乾統) 3(1103년 곧 고려 숙종 8)에 서거하고 오아속(烏雅束)이 이었다. 오아속이 천경 3(天慶三年 1113)에 서거하고 아골타가 이었다.” 하였다. 遼史 : 金史世紀楊割盈歌卒於乾統三年癸未(遼天祚帝乾統三年(癸未,1103))烏雅束襲烏雅束卒于天慶三年癸巳阿骨打襲

*속자치통감 : 요의 생여직부 절도사(遼 生女直部節度使) 오아서(烏雅舒)가 꿈에서, 이리를 쫓으며 여러 차례 활을 쏘았지만 맞추지를 못하였는데 아고달(阿古達 오아서의 동생)이 앞서 나가더니 활을 쏘아 이를 맞추었다. 이 꿈은 아고달이 오아서를 잇는다는 징조로 보고 있다. 續資治通鑑卷九十一 : 遼生女直部節度使烏雅舒夢逐狼屢發不能中阿古達前射中之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 송 휘종 숭령(徽宗 崇寧) 2(1103) 겨울 10월에 생여진부 절도사(生女眞部節度使) 영격(英格)이 서거하고 형의 아들 오아서(烏雅舒)가 이었다. 당시 고려가 다시 여진과 우호 관계를 통하였지만, 여진은 비록 옛날에 고려에 속하였더라도 서로 소통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었다. 때마침 고려의 의원이 여진에 이르렀다가 돌아가 고려 왕에게 아뢰기를 흑수부(黒水部)에 있는 여진 부족이 날로 강성해져 더욱 날카롭고 사납습니다.” 하니 왕이 마침내 여진에 사신을 보내어 소통하였고 이로부터 여진과의 왕래가 막히지 않았다.

宋史紀事本末 () 馮琦原: 徽宗崇寧二年 冬十月 生女眞部節度使英格死 兄子烏雅舒嗣 時高麗復與女眞通好 女眞雖舊屬高麗 然不相通者且久 㑹高麗醫者至女眞 還言于高麗王曰 女眞居黒水部者部族 日强兵益精悍 其王乃通使于女眞 自是來往不阻

여진 흑수부(女眞 黒水部)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오대(五代 907960) 시기에 처음으로 여진(女眞)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 종족은 6부로 나뉘는데 그중에 흑수부가 있다. 그 흑수부 사람들 가운데에 남쪽에서 살며 요() 나라에 호적을 올리고 사는 사람들을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렀고 북쪽에 살며 요나라의 호적에 매이지 않은 사람들을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렀다. 이렇게 불리고 얼마 있다가 요 임금 흥종의 이름인 종진(宗眞)을 피하느라 여직(女直)’으로 고쳤다. 宋史紀事本末 金滅遼 : 五代時始稱女眞其族分六部有黑水部其民在南者繫籍於遼號熟女眞在北者不籍於遼號生女眞已而避遼主宗眞諱改曰女直

꿩꼬리와 호리병

*태평어람 : 최표 고금주(古今注) : 꿩고리, 곧 치미(雉尾)에 대한 기호는 은()나라 때 시작되었다. 은나라 왕 고종이 시조 탕임금 제사 때 꿩이 날아와 운 상서로움(雊雉)이 있어서 복장에 대부분 꿩 깃을 썼다. ...위진(魏晉) 이래로, 꿩 꼬리를 사용하는 데에 일정한 기준이 만들어졌는데 왕이라면 모두 이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장선(障扇)은 긴 손잡이 부채이다. 한나라 때 호협들이 많았는데 꿩 꼬리를 써서 이 부채를 만들었다.

오명선(五明扇 부채)은 순임금이 만든 것이다. 요임금에게 제왕의 자리를 물려받고 정치에 대해 보고 듣기를 활짝 열어서 현인들을 찾아서 자신의 모자란 점들을 보완하였다. 그러므로 오명선(五明扇)을 제작한 것이다. 太平御覽:崔豹古今注雉尾嗜起于殷高宗有雊雉之祥服章多用翟羽...魏晉以來以為常準諸王皆得用之又曰障扇長柄扇也漢世多豪俠為雉尾而制長扇也又曰五明扇舜所作也既授堯禪廣開視聽求賢人以自輔故作五明扇

*태평광기(太平廣記) 통천하(通川河) : 통천(通川)의 경계 안에는 수달이 제법 많은데 각각 주인이 이들을 기르고 있어서 통천하 곁 언덕받이 사이에서 한꺼번에 살고 있다. 수달이 만약 물에서 나와 구멍으로 들어가면 기르는 사람이 꿩 꼬리(雉尾)’를 그곳 앞에 꽂아두는데, 수달은 즉시 감히 나가지 못한다. 그러다 꿩 꼬리를 치우면 바로 나와 물고기를 취해 가져오는데, 반드시 수달을 언덕받이로 올라오게 해야 사람이 이 물고기를 뺏기 편리하다. 太平廣記 通川河: 通川界內多獺各有主養之並在河側岸間獺若入穴插雉尾於獺孔前獺即不敢出去却尾即出取得魚必須上岸人便奪之取得多然後自喫喫飽即鳴板以驅之還插雉尾更不敢出朝野僉載]

*중화집(中和集) : 상인들은 배 안 돛대에 꿩 꼬리를 둔다. 날씨의 음울과 맑음을 예견할 때, 하늘이 맑게 되면 꿩 꼬리가 곧추서고 하늘이 비를 내리게 되면 꼬리가 아래로 늘어진다. 商人置雉尾於舟中之檣 以候隂晴 天當晴則尾直竪 天將雨則尾下垂 (中和集)

*원나라 대도궁전고(元 大都宫殿考) : 방호전(方壺殿) 오른쪽이 여공동(呂公洞)인데 이 위쪽으로 수십 보()에 금로전(金露殿)이 있다. 동쪽을 밟아서 올라가면 옥홍전(玉虹殿)이다. ... 길옆에 몇 장( 1장 대략 3.3미터) 되는 쇠 깃대가 있는데 이 위에 금 호리병이 세 개를 두고서 철끈을 끌어와 이 병을 쇠 깃대에 달아맸다. 이는 금()나라 장종(章宗)이 세운 것으로 그 아래 용담(龍潭)의 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다. 장종(章宗) : 여진 이름은 마달갈(麻達葛). 금나라 6대 황제 재위 1190-1208 元大都宫殿考: 方壺殿右為呂公洞洞上數十步為金露殿由東而上為玉虹殿...道旁有鐵竿數丈上置金胡蘆三引鐵鍊以繫之乃金章宗所立以鎮其下龍潭(欽定日下舊聞考)

高麗史 : 尹瓘字同玄坡平縣人高祖莘達佐太祖爲三韓功臣父執衡檢校少府少監文宗朝登第歷拾遣補闕肅宗時累遷東宮侍講學士御史大夫吏部尙書翰林學士承旨女眞本靺鞨遺種唐閒爲高[原本][原本]麗所幷後聚落散居山澤未有統一其在定州朔州近境者雖或內附乍臣乍叛及盈哥烏雅束相繼爲酋長頗得衆心其勢漸橫伊位界上有連山自東海岸崛起至我北鄙險絶荒翳人馬不得度閒有一徑俗謂甁項言其出入一穴而已邀功者往往獻議塞其徑則狄人路絶請出師平之七年女眞來屯定州關外疑其圖我誘執酋長許貞及羅弗等囚廣州栲問果謀我也遂留不遣會邊將李日肅等奏:「女眞虛弱不足畏失今不取後必爲患。」烏雅束又與別部夫乃老有隙發兵攻之來屯近境王命林幹往備之幹邀功引兵深入擊之敗績死者大半女眞乘勝闌入定州宣德關城殺掠無算乃以瓘代幹爲東北面行營都統授鈇鉞遣之瓘與戰斬三十餘級我軍陷沒死傷者過半軍勢不振遂卑辭講和結盟而還王發憤告天地神明, 願借陰扶掃蕩賊境仍許其地創佛宇遷叅知政事判尙書刑部事兼太子賓客奏曰:「臣觀賊勢倔强難測宜休徒養士以待後日且臣之所以敗者賊騎我步不可敵也。」於是建議始立別武班自文武散官吏胥至于商賈僕隷及州府郡縣凡有馬者爲神騎無馬者爲神步跳蕩梗弓精弩發火等軍年二十以上男子非擧子皆屬神步西班與諸鎭府軍人四時訓錬又選僧徒爲降魔軍遂鍊兵畜穀以圖再擧進中書侍郞同平章事睿宗卽位以喪未遑出師二年邊將報:「女眞强梁侵突邊城其酋長以一胡蘆縣雉尾轉示諸部落以議事其心叵測。」 王聞之出重光殿佛龕所藏肅宗誓䟽以示兩府大臣大臣奉讀流涕曰:「聖考遺旨深切若此其可忘諸?」乃上書請繼先志伐之王猶豫未決命平章事崔弘嗣筮于太[]遇坎之旣濟遂定議出師以瓘爲元帥知樞密院事吳延寵副之瓘奏:「臣嘗奉聖考密旨今又承嚴命敢不統三軍破賊壘拓我疆土以雪國恥。」 延寵頗以爲疑微語瓘瓘慨然曰:「微公與我誰能出萬死之地以雪國家之恥策已決矣又何疑焉?」延寵黙然王幸西京御威鳳摟賜鈇鉞遣之延寵至東界屯兵于長春驛1)凡十七萬號二十萬分遣兵馬判官崔弘正黃君裳入定長二州紿謂女眞酋長曰:「國家將放還許貞羅弗等可來聽命。」設伏以待酋長信之古羅等四百餘人至飮以酒醉伏發殲之其中壯黠者五六十人至關門持疑不肯入使兵馬判官金富弼錄事拓俊京分道設伏又使弘正帥精騎應之擒殺殆盡瓘自以五萬三千人出定州大和門中軍兵馬使左僕射金漢忠以三萬六千七百人出安陸戍左軍兵馬使左常侍文冠以三萬三千九百人出定州弘化門右軍兵馬使兵部尙書金德珍以四萬三千八百人出宣德鎭安海拒防兩戍之閒船兵別監吏部員外郞梁惟竦元興都部署使鄭崇用鎭溟都部署副使甄應圖等以船兵二千六百出道鱗浦瓘過大乃巴只村行半日女眞見軍勢甚盛皆遁走唯畜産布野至文乃泥村賊入保冬音城瓘遣兵馬鈴轄林彦與弘正率精銳急攻破走之左軍到石城下見女眞屯聚遣譯者戴彦諭降女眞答[]:「吾欲一戰以決勝否何謂降歟。」遂入石城拒戰矢石如雨軍不能前瓘謂俊京曰:「日昗事急爾可與將軍李冠珍攻之。」:「僕嘗從事長州過誤犯罪公謂我壯士請于朝宥之今日是俊京殺身報効之秋也。」遂至石城下環甲持楯突入賊中擊殺酋長數人於是瓘麾下與左軍合擊殊死戰大破之賊或自投巖石老幼男女殲焉賞俊京綾羅三十匹又遣弘正富弼錄事李俊陽擊伊位洞賊逆戰久乃克之斬一千二百級中軍破高史漢等三十五村斬三百八十級虜二百三十人右軍破廣灘等三十二村斬二百九十級虜三百人左軍破深昆等三十一村斬九百五十級瓘軍自大乃巴只破三十七村斬二千一百二十級虜五百人遣錄事兪瑩若告捷王喜賜瑩若爵七品命左副承旨兵部郞中沈侯內侍刑部員外郞韓皦如, 賜詔獎諭兩元帥及諸將賜物有差

 

 

'윤관의 동북 9성(城)'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관(尹瓘)의 삶 4 (고려사 근거)  (0) 2023.08.04
윤관의 삶3  (0) 2023.08.02
윤관(尹瓘)의 삶 2  (0) 2023.07.31
윤관(尹瓘)의 동북 9성(城)  (0) 2023.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