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에 대한 이견들이 많아서 지명에 대한 자료들은 차츰 번역하여 올릴 예정이다.
○고려사(高麗史) : 옛 역사[고려 신하의 기록일 듯하다.]를 살펴보면 9성(九城)의 땅은 오랫동안 여진에 장악되었던 곳이다. 예종 2년 원수(元帥) 윤관(尹瓘)과 부원수 오연총(吳延寵)이 병사 17만을 이끌고 여진을 쳐 쫓아내고 군대를 나누어 땅을 점유하였다. 동쪽으로 화곶령(火串嶺:가리봉(加里峯) 근처 한 봉우리가 따로 떨어져 있으니, 바로 화관령(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 궁한령(弓漢嶺)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러 이 땅을 우리의 강역으로 만들었다.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성(城)과 적을 감시할 다락방을 990칸 쌓고서 영주(英州)라 불렀다. 화곶산(火串山) 아래에도 992칸을 쌓고 웅주(雄州)라고 불렀다. 오림금촌(吳林金村)에는 774칸을 쌓고 복주(福州)라고 불렀다. 궁한촌(弓漢村)에는 670칸을 쌓고 길주(吉州)라고 불렀다. 예종 3년 2월 함주(咸州)와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았다. 그 3월 의주(宜州), 통태(通泰), 평융(平戎) 세 곳에 성을 쌓았다.
이에 여진이 그 근거지를 잃었고 보복을 하리라 맹세하더니 급기야 먼 곳 사는 추장 떼까지 이끌고 와서 여러 해 동안 침입하니 다치고 목숨을 잃은 우리 병사들도 많았다. 그리고서 땅을 개척하여 넓혔는데 9성(九城)이 서로 거리가 멀고도 멀거니와 여진이 빽빽한 초목 속에 자주 매복을 하여 오가는 사람들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아 그 방비를 위해 나라에서는 여러 방법으로 군사를 징발하니 나라 안팎으로 소란스럽고 어지러워졌다.
예종 4년 여진 또한 사신을 보내어 화해를 청하였는데 이에 길주부터 해서 차례로 9성의 전쟁 용구, 군량을 내지로 거두어들이고 마침내 숭령(崇寧), 통태(通泰), 진양(眞陽)의 3진(鎭) 및 영(英)과 복(福) 2주(州)의 성(城)에서 철수하였다. 한편 함(咸), 웅(雄) 2주(州) 및 선화진성(宣化鎭城)에서 철수하여서 이곳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이것으로 톺아보자면 함(咸), 영(英), 웅(雄), 복(福), 길(吉), 의(宜)라는 6주(州)와 공험(公嶮), 통태(通泰), 평융(平戎)이라는 3진(鎭)이 바로 9성(城)으로 손꼽는 곳이었지만 이 기록은 성에서 철수하고 여진에게 돌려준 시기에 의주(宜州)와 공험(公嶮), 평융(平戎) 두 진(鎭)은 없고, 숭령(崇寧), 진양(眞陽) 선화(宣化) 세 진(鎭)이 9성에 더해져 나타나고 있고 민가의 호수를 둔 것이 또한 각각 같지 않으니 사실을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원문 ‘置戶之數,又各不同,是可疑也.’에서 ‘疑’는 흔히 ‘의심’으로만 해석하여 ‘앞의 진술이 의심된다’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는 기존에 알려졌던 9성(城)의 내용은 옛 기록에서 제시된 기록과 비교하여 사실관계를 알아보아야만 할 ‘의문 사항’으로 보아서 그렇게 해석하였다.]
〈예종(睿宗) 3년(1108년) 2월 도검할(都鈐轄군인을 관할하고 지역을 방위하며 도적을 체포를 관장) 임언(林彦)의 영주기(英州記)에서 “이제 새롭게 6성을 설치하였으니 하나는 진동군(鎭東軍) 함주(咸州) 대도독부(大都督府)라 하는데 군사와 백성들 1948정호(丁戶 부역의 의무를 담당한 중간계급)이고 둘은 안령군(安嶺軍) 영주(英州) 방어사(防禦使)라 하니 군사와 백성들 1238 정호(丁戶)이고, 셋은 영해군(寧海軍) 웅주(雄州) 방어사(防禦使)라 하니 군사와 백성들 1436정호(丁戶)이고, 넷을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이니 병사와 백성들이 680정호(丁戶)이고, 다섯은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라 하니 병사와 백성들이 632정호(丁戶)이고 여섯은 공험진방어사(公嶮鎭防禦使)라고 하니 군사와 백성들이 532정호(丁戶)이다.” 하였다. 한편 민지(閔漬)가 지은 강목(綱目)에서 “윤관(尹瓘)이 9성을 쌓고 남계(南界)의 백성들을 옮겨 이곳을 채웠다. 함주(咸州)를 호칭하여 진동군(鎭東軍)이라 하였으니 1만 3천 호를 두었다. 영주(英州)를 호칭하여 안령군(安嶺軍)이라 하고 웅주(雄州)를 호칭하여 영해군(寧海軍)이라 하였으니 각각 1만 호를 두었다. 복(福), 길(吉), 의(宜) 3진(鎭)에 각각 7천 호를 두었고 공험(公嶮), 통태(通泰), 평융(平戎) 3진(鎭)에 각각 5천 호를 두었다.” 하였다.〉
사리를 따져보면, 의주(宜州)의 땅은 정주(定州)가 방어사로써 여진을 쳐서 쫓아낼 필요가 없어진 이후에 둔 것이다. 마침 이때 이르러서야 의주 땅에 성보(城堡)를 처음 만들었기에 9성(城) 중 하나로 싸잡아 일컬었고, 그 결과 철거한 숫자에 꼽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按舊史,九城之地,久爲女眞所據。睿宗二年,命元帥尹瓘、副元帥吳延寵,率兵十七萬,擊逐女眞,分兵略地。東至火串嶺,北至弓漢嶺,西至蒙羅骨嶺,以爲我疆。於蒙羅骨嶺下,築城廊九百九十閒,號英州,火串山下,築九百九十二閒,號雄州,吳林金村,築七百七十四閒,號福州,弓漢村,築六百七十閒,號吉州,三年二月,城咸州及公嶮鎭。三月,築宜州、通泰、平戎三城。於是,女眞失其窟穴,誓欲報復,乃引遠地群酋,連歲來侵,我兵喪失者,亦多。且拓地旣廣,九城相距遼遠,女眞數設伏叢薄,抄掠往來,國家調兵多端,中外騷擾。四年,女眞亦遣使請和,於是,始自吉州,以次收入九城戰具、資粮于內地,遂撤崇寧、通泰、眞陽三鎭,及英、福二州城。又撤咸、雄二州,及宣化鎭城,以還之。
以此考之,咸、英、雄、福、吉、宜六州,及公嶮、通泰、平戎三鎭,此九城之數也。其撤城還女眞之時,則無宜州及公嶮、平戎二鎭,而崇寧、眞陽、宣化三鎭,乃加現焉,置戶之數,又各不同,是可疑也。
〈睿宗三年二月,都鈐轄林彦作英州記云:「今新置六城,一曰鎭東軍咸州大都督府,兵民一千九百四十八丁戶,二曰安嶺軍英州防禦使,兵民一千二百三十八丁戶,三曰寧海軍雄州防禦使,兵民一千四百三十六丁戶,四曰吉州防禦使,兵民六百八十丁戶,五曰福州防禦使,兵民六百三十二丁戶,六曰公嶮鎭防禦使,兵民五百三十二丁戶。」
又閔漬所撰綱目云:「尹瓘築九城,徙南界民,實之。號咸州曰鎭東軍,置戶一萬三千,號英州曰安嶺軍,雄州曰寧海軍,各置戶一萬,福、吉、宜三鎭,各置戶七千,公嶮、通泰、平戎三鎭,各置戶五千。」〉
且宜州之地,在定州以防禦使不必擊逐女眞而後置也,豈非適至是乃創築城堡,故倂稱爲九城,而不在撤去之數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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