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金州 김해)
○금주(金州) : 본래 가락국(駕洛國)
신라 유리왕(儒理王) 18년, 가락국의 장아도칸(長我刀干), 여도칸(汝刀干), 피도칸(彼刀干) 등 아홉 사람이 그 백성들을 이끌고 냇물에서 몸을 씻고 나쁜 기운을 없애는 푸닥거리 끝에 음복을 하고(稧飮) 있는데 멀리 구지봉(龜旨峯)을 바라보노라니 남다른 소리와 기운(聲氣)이 있었다.
그곳으로 가 살펴보니 한 금합(金榼)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 안에 금빛 알이 있어, 둥근 것이 해 바퀴와 같았다. 아홉 사람이 절을 하며 신성하게 여기고 받들어 아도칸(我刀干) 집에 두었다.
다음날 아홉 사람이 다 모여 금합을 열어 보니 어떤 한 동자가 껍질을 가르고 태어났는데 나이가 15세요 용모가 빼어나게 컸다. 무리가 모두 절을 하고 축하하며 예를 다 하였다. 동자는 날로 자라나 커져 열흘 남짓하여 몸길이가 9척이 되었다.
이달 보름날 아홉 사람이 마침내 받들어 이 동자를 주(主)로 삼았으니 곧 수로왕(首露王)이다. 나라를 가락(駕洛)이라 하였고 또한 가야(伽倻)라고도 일컬었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사방의 경계를 보자면, 동쪽으로는 황산강(黃山江)에 이르고 동북쪽으로는 가야산(伽倻山)에 이르며 서남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고 서북쪽으로는 지리산을 경계에 두고 있다. 즉위하고 158년이 되어 돌아가셨다. 9대손 구해(仇亥)에 이르러 나라 창고의 보물(탕(帑) : 창고나 금으로 만든 화폐)을 싸 들고서 신라에 항복하였다.
수로 이후에 거등왕(居登王), 마품왕(麻品王), 거질미왕(居叱彌王), 이시품왕(伊尸品王), 좌지왕(坐知王), 취희왕(吹希王), 질지왕(銍知王), 감지왕(鉗知王)을 거쳐 구해왕(仇亥(衝)王 또는 구충왕)에 이르렀다. 〈해(亥)는 삼국유사와 가락국기에 충(衝)으로 적혀있다.〉
가락국이 나라를 소유한 기간이 모두 491년이고 신라 법흥왕이 항복을 받아들이고 나서 가락국 왕실을 객(客)의 예로 대우하여 그 나라를 식읍(食邑)으로 만들어 주고 금관군(金官郡)이라 불렀다. 문무왕이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다. 경덕왕 때 김해소경(金海小京)을 만들었다.
수로왕의 묘〈주(州) 서쪽에 있다.〉, 초현대(招賢臺) 〈주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해진 말이 가락국 거등왕(居登王)이 이 대에 올라 칠점산(七點山)의 참시(旵始) 선인을 초대하니 참시(旵始)가 배를 타고 왔다 하여서 이 이름을 붙였다 한다.〉과 또 삼분수(三分水)가 있다. 〈부(府) 동쪽 황산강(黃山江)이 물이 달려 흐르기를 50여 리에, 삼포(三浦)로 나누어져 바다로 들어간다. 민간에서는 삼차수(三叉水)라 부른다.
[稧飮 : 계(稧)는 ①모심기 ②우리는 계(稧)를 계제사(禊祭祀)로, ‘유월 유두날 나쁜 기운을 없애려 물가에서 지내는 의식’으로 풀이 하고 있다. ③중국 자료에 계(稧)는 계(禊)와 같은 글자로 흐르는 물에 나쁜 기운을 씻어내는 정화의식이다. 강희자전에 따르면 정자통(正字通)에 “계(禊)에 두 가지가 있다. 논어에 ‘기수(沂水)에서 몸을 씻는다’ 하고 왕희지의 ‘난정(蘭亭)에서 계(禊)’를 한 일은 바로 춘계(春禊 삼월삼짇날의 정화의식)이다. 한나라 유정(산동 영양현 사람)의 노도부(劉禎·魯都賦)에 ‘가을철 7월 14일(二七)에 은하수(天漢)가 가리키는 모퉁이, 사람들이 나쁜 기운을 씻어내고 나라의 동량들이 물에서 즐겁게 논다.’라고 읊으니, (음력)7월 14일에 하는 것이 바로 추계(秋禊)이다.” 하였다. 《正字通》禊有二,論語:浴乎沂。王羲之蘭亭脩禊事,此春禊也。劉禎·魯都賦,素秋二七,天漢指隅,人胥祓禳,國子水嬉,用七月十四日,此秋禊也。(素秋는 가을이 오행에서 金과 흰 白에 속하여 흴 素를 쓴 것이라 함. 二七 : 송서 예지(宋書·禮志)에 ‘二七’을 ‘7월 14일(음력)’로 가리켰다. 《宋書·禮志2卷》;“二七”指七月十四日。) ]
[김해 지방의 가정신앙 ‘용왕 먹이기’ : 경상남도 지역은 산의 개울가에서 용왕 먹이기를 하였었는데 김해의 경우 산의 개울가에서 용왕을 먹이는데 정월 초이레, 정월 보름날, 정월 초순에 이 의식을 하였었다. 김해시 한림면 명동리 인현마을은 물이 맑은 곳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 뒤에 옷을 갈아입고 나서 용왕을 먹인다. 용왕을 먹이는 일은 물이 깨끗하게 내려오는 산속으로 가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밤에 많이 하였다고 한다. 이 의식의 주된 목적은 가족의 무탈을 비는 것이다. (출처 : 한국의 가정신앙 경상남도편)]
金州本駕洛國。新羅儒理王十八年,駕洛之長我刀干、汝刀干、彼刀干等九人,率其民稧飮,望見龜旨峯,有非常聲氣。就視之,有金榼,自天而降,中有金色卵,圓如日輪。九人拜而神之,奉置我刀干家。
翼日,九人咸會,開榼而視,有一童子,剖殼而生,年可十五,容貌甚偉。衆皆拜賀盡禮。童子日就岐巍,歷十餘日,身長九尺。是月望,九人遂奉以爲主,卽首露王也。國號駕洛,又稱伽倻,後改爲金官國。四境,東至黃山江,東北至伽倻山,西南際大海,西北界智異山。卽位一百五十八年,薨,至九代孫仇亥,齎國帑寶物,降于新羅。自首露以後,居登王、麻品王、居叱彌王、伊尸品王、坐知王、吹希王、銍知王、鉗知王,至仇亥王。〈亥,《三國遺事》、《駕洛國記》作衝。〉 有國,凡四百九十一年,新羅法興王,旣受降,待以客禮,以其國爲食邑,號金官郡。文武王,置金官小京。景德王,爲金海小京。首露王墓,〈在州西。〉招賢臺。〈在州東。世傳,駕洛國居登王,登此臺,招七點山旵始仙人,旵始乘舟而來,因名焉。〉又有三分水。〈府東黃山江,水奔流五十餘里,分三浦入海,俗呼爲三叉水。
○의안군(義安郡 경상남도 창원) : 본래 신라의 굴자군(屈自郡)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義安郡本新羅屈自郡,景德王,改今名
○함안군(咸安郡 경상남도 함안) : 본래 아시량국(阿尸良國) 〈아라가야(阿那加耶)라고도 하였다.〉
신라 법흥왕 때 이들을 멸하고 군(郡)을 만들었다.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咸安郡本阿尸良國,〈一云阿那加耶。〉新羅法興王,滅之,以爲郡,景德王,改今名。
○칠원현(漆園(原)縣 경남 함안 지역) : 본래 신라의 칠토현(漆吐縣)
경덕왕 때 칠리(漆隄또는 칠제)라는 이름으로 고치고 의안군(義安郡)이 거느리는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漆園縣〈園一作原。〉本新羅漆吐縣,景德王,改名漆隄,爲義安郡領縣,高麗初,更今名。
○웅신현(熊神縣 창원시 진해 지역) : 신라의 웅지현(熊只縣)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熊神縣本新羅熊只縣,景德王,改今名,
○합포현(合浦縣 창원시 마산회원구 지역) : 신라의 골포현(骨浦縣)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환주(還珠)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월영대(月影臺)가 있다. 〈고려 때 완포향(莞浦鄕)을 승격시켜 현(縣)으로 만들었다.〉
合浦縣本新羅骨浦縣,景德王,改今名,別號還珠。有月影臺。〈高麗,陞莞浦鄕,爲縣。〉
○양주(梁州 경상남도 양산) : 신라 문무왕 5년 상주(上州)와 하주(下州) 땅을 베어내 삽량주(歃良州)를 두었다. 경덕왕 양주(良州)로 고치고 이 주를 9주(州)의 하나로 갖추었다. 고려 태조 23년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현종 9년 방어사를 두었다가 뒤에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이 우리나라 관(官 행정구역)이 번잡하여 백성들에게 폐가 된다는 말을 하여서 밀성(密城)에 병합하였다. 그러나 주현(州縣)이 수재()에 품명(稟命)할 때 오가는 일에 힘들어 그 폐단이 더욱 심하여 충렬왕 30년에 옛것을 회복하였다. 고려 성종이 정한 의춘(宜春)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또 순정(順正)이라고도 한다.
가야진(伽倻津)과 황산강(黃山江)이 있다. 〈무안(務安)의 용진(龍津), 광양(光陽)의 섬진(蟾津)과 함께 등 쪽으로 흐르는 세 큰 강물(江水)이라 일컫는다.〉 또 가야진연소(伽倻津衍所)이 있다.
倻津衍所)이 있다.
梁州新羅文武王五年,割上州、下州地,置歃良州,景德王,改爲良州,備九州之一。太祖二十三年,更今名。顯宗九年,置防禦使,後元中書省,以本國官繁民弊爲言,故倂于密城。然州縣稟命守宰,勞於往來,其弊愈甚。至忠烈王三十年,復舊。別號宜春,〈成廟所定。〉又號順正。有伽倻津,黃山江。〈與務安之龍津,光陽之蟾津,稱爲背流三大江水。〉又有伽倻津衍所。
동평현(東平縣)
○동평현(東平縣 부산 동래구) : 신라의 대증현(大甑縣)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東平縣本新羅大甑縣,景德王,改今名.
○기장현(機張縣 부산 기장군 기장읍) : 신라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거성(車城)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機張縣本新羅甲火良谷縣,景德王,改今名,別號車城。
밀성군(密城郡)
○밀성군(密城郡 경상남도 밀양시) : 신라의 추화군(推火郡)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고려 초에 그대로 두었다. 성종 14년 밀주자사(密州刺史)를 만들었다. 현종 9년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이라 일컬었다.
충렬왕 원년, 군(郡) 사람 조천(趙仟)이 군수를 살해하고서 진도를 근거지로 반역한 삼별초에 호응하였다는 이유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하고 계림에 소속시켰다.
이보다 앞서 대성(臺省)이 여러 차례 그 호칭을 강등시키기를 청하였었는데 정권을 쥐락펴락 한 자가 읍(邑) 사람의 뇌물을 받아 매번 막았었다. 이때 이르러 다시 강등 논의가 치열해져서 왕이 이를 따랐다. 뒤에 다시 밀성현(密城縣)이라 일컬었다. 충렬왕 11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가 다시 현으로 강등시켰다. 공양왕 2년 증조 익양후비 박씨(曾祖益陽侯妃朴氏)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밀양부로 승격시켰다. 〈고려는 수산부곡(守山部曲)를 수산현(守山縣)으로 만들었다.〉
密城郡本新羅推火郡,景德王,改今名,高麗初,因之。成宗十四年,爲密州刺史。顯宗九年,稱知密城郡事。忠烈王元年,以郡人趙仟殺郡守,以應珍島叛賊三別抄,降爲歸化部曲,屬之雞林。先是,臺省屢請降號,用事者,受邑人賂,每沮之。至是,復極論,從之。後復稱密城縣。十一年,陞爲郡。又降爲縣。恭讓王二年,以曾祖益陽侯妃朴氏內鄕,陞爲密陽府。〈高麗,以守山部曲,爲守山縣。〉
○창녕군(昌寧郡) : 신라의 비자화군(比自火郡)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 때 화왕군(火王郡)이라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창성(昌城), 하성(夏城)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昌寧郡本新羅比自火郡,〈一云比斯伐。〉 景德王,改爲火王郡。太祖二十三年,更今名。別號昌城、夏城。
○청도군(淸道郡) 〈도주(道州)라고도 한다.〉 : 고려 초에 신라 대성군(大城郡)과 오악(烏岳), 형산(荊山), 소산(蘇山) 세 현(縣)을 합쳐 군(郡)을 만들고 이에 소속시켰다.
淸道郡〈一云道州。〉高麗初,合新羅大城郡、烏岳、荊山、蘇山三縣,爲郡,來屬。
○현풍현(玄豐(風)縣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 본래 신라의 추량화현(推(三)良火縣 또는 삼량화현)
경덕왕 때 현효(玄驍)라는 이름으로 고쳐 화왕군(火王郡)이 거느리는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玄豐縣〈豐,一作風。〉本新羅推良火縣,〈推,一作三。〉景德王,改名玄驍,爲火王郡領縣,高麗初,更今名。
○영산현(靈山縣 경남 창녕군 영산면 부곡면 장마면 등 일대) : 신라의 서화현(西火縣)
경덕왕 때 상약(尙藥)이란 이름으로 고쳐 밀성군(密城郡)이 거느리는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靈山縣本新羅西火縣,景德王,改名尙藥,爲密城郡領縣。高麗,更今名.
○풍각현(豐角縣 경상남도 청도군 풍각면) : 본래 상화촌현(上火村縣)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豐角縣本上火村縣。高麗,改今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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