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삼성여지도설(東三省輿地圖說) 작자 : 청(淸) 조정걸(曹廷杰 : 1850-1926년)
▶득승타(得勝陀)는 금(金) 태조(太祖)가 출정에 앞서 군사들과 맹서 의식을 했던 땅이다. 대정(大定) 25년(1185년)에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
得勝陀 金太祖誓師之地也 大定二十五年 立石
▶금사본기(金史本紀)를 살펴보면 금나라의 선조는 숙신(肅慎)의 땅에 살았으니 이 땅에 혼동강(混同江)과 장백산(長白山)이 있다.
〈요(遼)나라가 결국에 발해를 멸할 때, 부여부(扶餘府) 영강주(寧江州 : 지금 길림 송원시 일대)의 여러 땅을 근거하였는데 금나라의 선조들이 지금 길림성 동남쪽 장백산 북쪽에 맞추어 살았으니, 이곳이 옛 숙신(肅慎) 땅이다.〉
考金史本紀 金之先居肅慎地 有混同江長白山 〈 按遼人久滅渤海 據扶餘府寧江州諸地 金之先應居今吉林城東南 長白山以北 為古肅慎地也〉
▶시조(始祖) 함보(函普)가 완안부(完顏部) 포이갈수(布爾噶水)에서 살았고
〈 포이갈수(布爾噶水)는 지금 영고탑(寧古塔)에서 삼성강(三姓江)에 이르는 곳에 상당한다. 옛날에는 호이합하(瑚爾哈河)라 일컬었으니 호(瑚)는 또한 고(庫)나 호(呼), 호(虎)라고도 썼다. 합(哈)은 객(喀)이라고도 썼다. 호(瑚)와 포(布), 그리고 합(哈)과 갈(噶)은 그 소리가 본디 서로 가깝다. 길림여도(吉林輿圖)에 옛 영고탑성(舊寧古塔城) 서쪽으로 포이합성(布爾哈城)이 있다. 아마도 바로 금(金) 시조(始祖) 함보가 살았던 곳으로 생각된다. 살펴보면 포이갈(布爾噶)은 원래 복간(僕斡)이라 쓰니 간(斡)은 음이 간(筦)이니 복간(僕斡)은 홀간(忽汗)과 음이 가깝다.
당서(唐書)에 ‘발해왕(渤海王)이 홀한하(忽汗河)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천도하였다.’ 하니 위씨(魏氏) 원(源)이 말하기를 “호객(虎喀)은 바로 홀한(忽汗)의 음이 바뀐 것이다.”하였고 정걸(廷杰)의 경우는 “지금 무단강(牡丹江)을 일컫는다. 무단(牡丹) 또한 곧 홀한(忽汗)이니 복간(僕斡)의 음이 바뀐 것이다.” 하였다.〉
*홀한하(忽汗河) : 신당서 발해전에 “천보(天寶 : 당 현종 연호 742-756년) 말에 흠무(欽茂 : 대흠무(大欽茂). 발해의 3대 왕)가 상경(上京)으로 천도하였다. 이곳은 바로 옛 나라(부여인지 고구려인지 모르겠다)의 3백 리(里), 홀한하(忽汗河) 동쪽이다.” 하였다. 《新唐書·渤海傳》: “天寶末,欽茂徙上京,直舊國三百里,忽汗河之東。”
*홀한하는 지금 길림성(吉林省)과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역 내의 무단강(牡丹江)이니 수원은 지금 길림성(吉林省) 무단령(牡丹嶺)에서 나와 동북으로 흐르다 경박호(鏡泊湖)를 거쳐 흑룡강성 의란현(依蘭縣)에 이르러 송화강(松花江)에 닿는다. 경박호(鏡泊湖)는 홀한해(忽汗海)로 일컬어지기도 한다고 한다.
始祖居完顏部布爾噶水之涯 〈 布爾噶水 應即今寧古塔 至三姓之江 古稱瑚爾哈河 瑚亦作庫 一作呼 一作虎 哈亦作喀 瑚布哈噶 音固相近 吉林輿圖 舊寧古塔城西有布爾哈城 疑即金始祖所居 按布爾噶 原作僕斡 斡音筦 僕斡與忽汗音近 唐書 渤海王都臨忽汗河 魏氏源以為虎喀 即忽汗之音轉 廷杰 則以為今稱牡丹江 牡丹 亦即忽汗 僕斡之音轉也〉
▶아우 박화리(博和哩)는 찰란(札蘭)에서 살았다.
〈금사(金史)를 살펴보면 소조(昭祖)가 솔빈(率賓)과 찰란(札蘭) 땅에서 무력이 빛나 이르는 곳마다 이기고 승리하였다. 태종(太宗) 천회(天會) 2년(1124년) 찰란로(札蘭路)의 도패륵(都貝勒) 완안충(完顏忠)을 솔빈수(率賓水)로 옮기게 하였다. 세종(世宗) 대정(大定) 11년(1171년)에 찰란(札蘭)과 솔빈(率賓)이 서로 거리가 천 리(里)나 되고 이미 솔빈(率賓)에 살고 있지만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기에 마침내 친관명안(親管明安)에게 명하여 ‘찰란명안(札蘭明安)’이라 이름하게 하였다. 살펴보면 솔빈수(率賓水)는 곧 지금의 수분하(綏芬河 : 흑룡강성 동남쪽)로 솔빈(率賓)은 원래 휼품(恤品 : 恤은 한자 xù(쉬) 발음)이라 썼고 또한 속빈(速頻)이라고도 썼으니 수분(綏芬)과 함께 음을 따라서 기록한 글자이다. 솔빈국(率賓國)의 옛 주춧돌 터는 곧 수분하(綏芬河)의 쌍성자(雙城子) 땅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미 찰란(札蘭)과 천 리(里)나 떨어졌고 또한 경조본기(景祖本紀)를 근거하자면 찰란(札蘭)은 아륵초객(阿勒楚喀) 동남 쪽에 있으니 이는 찰란(札蘭)이 응당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훈춘(琿春) 경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친관명안(親管明安) : 친관(親管)은 ‘친하여 가깝다(親近)’라는 합찰(合扎)이고 명안(明安)은 맹안(猛安)이다. 곧 합찰맹안(合扎猛安)으로, 이는 금나라 황실과 귀족이 맹안군(猛安軍)을 장악하여 그 초기에는 아골타(阿骨打)와 오걸매(吳乞買), 종간(宗幹), 종한(宗翰) 이 네 사람에게만 예속시켰다가 아골타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에 시위친군(侍衛親軍)을 발전시키고서 맹안군(猛安軍)을 시위친군사(侍衛親軍司)로 예속시켰다고 한다.
弟博和哩居札蘭 〈 考金史 昭祖耀武於率賓札蘭之地 所至克捷 太宗天會二年 命徙札蘭路都貝勒完顏忠於率賓水 世宗大定十一年 以札蘭率賓相去千里 既居率賓 不可忘本 遂命親管明安 名曰札蘭明安 按率賓水 即今綏芬河 率賓原作恤品 又作速頻 與綏芬皆對音字 知率賓國故阯 即綏芬河雙城子地方 是也 既去札蘭千里 又據景祖本紀 札蘭在阿勒楚喀東南 是札蘭應在今寧古塔琿春界內〉
▶시조 함보(函普)의 4대 헌조(獻祖)에 이르러 해고륵(海古勒) 땅으로 옮겨
〈해고륵은 아륵초객(阿勒楚喀)에 가깝다.〉
아륵초객(阿勒楚喀 : 흑룡강성 하얼빈시 일대) 옆에다 거처를 정하였다.
〈살펴보면 아륵초객(阿勒楚喀)은 곧 안출호(按出虎의 음을 따른 것이니 만약 호아실하(呼阿實河)과 안출호(按出虎)의 음이 오히려 가깝다면 금(金) 태조(太祖)가 말한 안출호수(按出虎水) 물가에서 살았다’는 곳이 곧, 이곳이다.〉
〈아륵초객(阿勒楚喀)의 옆이라면 바로 지금 아륵초객성(阿勒楚喀城 : 지금 흑룡강성 아성시(阿城市)) 서남쪽 8리(里) 고성(古城)의 옛 주춧돌이 있는 터이다. 국어(만주어)로 산연화둔(珊延和屯)이라 부른다. 지금은 보통 백성(白城)이라고 부른다. 통지(通志)에는 옹악락성(翁鄂洛城)이라 썼는데 금(金)의 상경(上京) 회령부(會寧府)이다. 성의 둘레는 20리(里)이고 안에 자성(子城)이 있어 그 둘레는 4리(里)이다. 궁전 유적을 아주 뚜렷이 볼 수 있다. 살펴보면 옹악락(翁鄂洛)은 ‘하만(河灣 : 흐르는 물줄기에서 구비가 있는 구간)’을 뜻한다. 〉
*산연화둔(珊延和屯) : 산연(珊延)은 흰색(白色)을 뜻하고 화둔(和屯)은 성(城)을 뜻한다.
*아륵초객성(阿勒楚喀城)은 동쪽에 아륵초객하(阿勒楚喀河)에 닿아있어서 이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지금의 아습하(阿什河)이다. 성(城)은 신(新), 구(舊) 둘이 있는데 옛 성은 아성시(阿城市) 남쪽에 있는 백성(白城)으로 지금 금나라 상경이었던 회령부(會寧府) 옛터라고 한다.
迨獻祖徙海古勒地 〈 近阿勒楚喀〉 定居於阿勒楚喀 〈 按阿勒楚喀 即按出虎之對音 今呼阿實河與按出虎音猶近 金太祖所謂居按出虎水之上 是也〉 之側 〈 即今阿勒楚喀城西南八里 古城舊阯 國語 呼珊延和屯 今通呼白城 通志作翁鄂洛城 金之上京會寧府也 城周二十里 內有子城 周四里宮殿遺蹟宛然可見 按翁鄂洛譯言河灣也〉
▶시조 함보의 5대손 소조(昭祖)가 무력을 눈부시게 떨치며 청령(青嶺)과 백산(白山)에 이르렀다.
昭祖耀武 至於青嶺白山
▶시조 함보의 6대손 경조(景祖)는 조금씩 여러 부족이 따라붙어 그들을 부리었다. 백산(白山)〈곧 장백산〉부터 섭혁(葉赫) 〈곧 섭혁점(葉赫站 : 지금 길림 이수현(梨樹縣))인 옛 섭혁국(葉赫國)이다.〉, 도문(圖們) 〈곧 도문강(圖們江)이다.〉, 찰란탁복고륜(札蘭托卜古倫)에 살았던 무리와 오국(五國)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경조(景祖)의 명을 들었다.
〈앞의 세 곳은 응당 길림(吉林) 동남쪽, 영고탑(寧古塔) 서남쪽에 있다. 금사(金史)에 ‘동남쪽으로 이륵호(伊勒呼), 해란(海蘭), 찰란탁복고륜(札蘭托卜古倫)에 이른다’ 하니 곧, 이곳이다.〉 〈살펴보면 오국(五國)은 박화리국(博和哩國), 박약국(博諾國), 악라목국(鄂羅穆國), 이륵도국(伊勒圖國), 이륵희국(伊勒希國)이다. 지금 삼성(三姓)을 오국두성(五國頭城)이라 하니, 삼성(三姓) 아래에서부터 오소리강(烏蘇里江)이 송화강(松花江)으로 들어가는 데에까지 이른다. 여전히 고성(古城)의 옛 주춧돌이 많아 오국 중에 사국(四國)은 응당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다.〉
景祖稍屬役諸部 自白山 〈 即長白山〉 葉赫 〈 即今葉赫站古葉赫國也〉 圖們 〈 即圖們江〉 札蘭托卜古倫 〈 三地應在今吉林東南 寧古塔西南 金史 所謂東南至於伊勒呼海蘭札蘭托卜古倫 是也〉 之屬 以至五國之長 〈 按五國 博和哩國博諾國鄂羅穆國伊勒圖國伊勒希國也 今三姓為五國頭城 自三姓下 至烏蘇里江入松花江處 尚多古城舊阯 其四國當不外是〉 皆聽命
▶이때 요의 변방 백성 중에 금나라로 도망쳐 귀의한 사람들이 있었다. 철리(鐵驪)와 오사(烏舍)의 백성들도 도망 와서 귀의하였다. 앞뒤로 경조(景祖)에게 붙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철리(鐵驪)의 리(驪)는 리(利)라고도 하니 철리국(鐵利國)은 응당 지금 철령현(鐵嶺縣) 영역 안에 있다. 원일통지(元一統志)에 “포하(蒲河)는 심양로(瀋陽路)에 있고 그 근원은 철리국(鐵利國) 포곡(蒲谷)에서 나온다.” 하니 바로 이곳이다. 거란(契丹)이 한창 흥성하였을 때 철리 나라 사람들을 사로잡아 황룡부(黃龍府) 동북쪽에 살게 하였었는데 요사(遼史)에 “상주(祥州)는 서성군(瑞聖軍)으로 절도(節度)를 두었다. 흥종(興宗)이 철리호(鐵驪戶)를 설치하고 군사업무를 황룡부도부서사(黃龍府都部署司)에 예속시켰다.” 하니 이것을 가리킨다.〉
是時 遼之邊民有逃而歸者 鐵驪 〈 驪一作利 鐵利國應在今鐵嶺縣境 元一統志 蒲河在瀋陽路 源出鐵利國蒲谷 是也 契丹盛時 浮其國人 處於黃龍府東北 遼史 祥州 瑞聖軍 節度 興宗以鐵驪戶置兵事 隸黃龍府都部署司 指此〉
▶오사(烏舍)와
〈 허항종 봉사행정록(許亢宗奉使行程錄)에 “옛날 오사채(烏舍寨)가 황룡부(黃龍府)의 동쪽 2백 10리(里)에 있었는데 거란(契丹)이 한창 흥성하였을 때 오사(烏舍)의 백성들을 탁색패륵채(托色貝勒寨)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하니 요사(遼史)에서 말한바 “오사(烏舍)의 사람들을 빈주(賓州)로 이주시켰다.”는 것이다. 행정록(行程錄)에서 언급한 “오사채(烏舍寨)가 혼동강(混同江)을 베개로 베고 있다”는 내용을 살피고서 지리에서 찾아본다면, 응당 지금 이통하(伊通河)가 송화강(松花江)으로 들어가는 곳, 홍석아(紅石砑)의 고루(高樓) 위쪽 지방에 있고 탁색패륵채(托色貝勒寨)는 응당 지금 농안성(農安城) 동쪽 60리(里) 만금탑(萬金塔) 지방에 있다.〉
烏舍 〈 許亢宗奉使行程錄 古烏舍寨在黃龍府東二百一十里 契丹盛時 徙其民人於托色貝勒寨北 遼史所謂遷烏舍於賓州也 按行程錄 謂烏舍寨枕混同江 以地理考之 應在今伊通河入松花江處 紅石砑高樓上地方 托色貝勒寨應在今農安城東六十里 萬金塔地方〉 之民亦逃而來歸 前後願附者眾
▶악민수 부찰부(鄂敏水富察部) 〈살펴보면 봉천(奉天), 영청(永清 : 지금 북경과 천진 일대)의 변방문(邊門) 동쪽으로 액이민하(額爾敏河)가 바로 악민수(鄂敏水)인데 그 땅이 부찰(富察)의 들녘이다.〉, 도문수 온특혁부(圖們水 溫特赫部) 〈도문강(圖們江)에 가깝다〉, 특극신특포수 완안부(特克伸特布水 完顏部), 사음수 완안부(舍音水 完顏部)들이 모두 줄줄이 와서 경조(景祖)에게 붙었다.
〈특극신특포수 완안부(特克伸特布水 完顏部), 사음수 완안부(舍音水 完顏部) 이 두 부족은 응당 길림(吉林) 영고탑(甯古塔) 영역 내에 있다. 아마도 사음수(舍音水)는 곧 여도(輿圖)에 나와 있는 영고탑(寧古塔) 맞은편 기슭에 상음수(商音水)이다.〉
鄂敏水富察部 〈 按奉天永清邊門東 額爾敏河 即鄂敏水 其地為富察之野〉 圖們水溫特赫部 〈 近圖們江〉 特克伸特布水完顏部舍音水完顏部 〈 二部應在今吉林甯古塔境內 疑舍音水即輿圖寧古塔對岸之商音水也〉 皆相繼來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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