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17
고구려본기(本紀) 제5 동천왕(東川王)
이십 년 가을 8월 위(魏)가 유주자사(幽州刺史) 모구검(毋丘儉)을 보내 군사 만 명을 이끌고 현(玄)을 나와서 침입하였다. 왕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모구검을 맞아 싸워 깨뜨리니 적병의 목을 벤 것이 3천여 명이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고 양맥골(梁貊谷, 또는 갈맥구)에서 두 번째로 전투를 벌였는데 다시 승리를 거두니 적병의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3천여 명이었다. 왕이 여러 장수에게 말씀하기를 “위(魏)라는 큰 나라의 군대(大兵)가 도리어 우리 작은 나라의 병사만도 못하구나. 모구검이란 위(魏)의 명장인데 오늘날 천명이 내 손안에 있구나!” 하고 마침내 철기(鐵騎) 5천을 이끌고 나아가 적들을 쳤다. 이때 검(儉)이 방진(方陣)을 써서 죽을 각오로 싸워 우리 고구려군이 크게 무너져 죽은 사람이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1천여 기병으로써 압록원(鴨渌原)으로 달아났다.
겨울 10월 검(儉)이 환도성(丸都城)을 공략하여 함락시키고 이곳을 도륙을 냈다. 드디어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게 하였다. 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고 도중에 군사들은 갈라져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 밀우(密友)만이 홀로 곁에 있었다. 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모구검의 추격병들이 턱밑까지 와 있으니 형세 상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원하노니 죽을 각오로 이들을 막을 터이니 그 사이에 왕께서는 달아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죽기로 싸울 전사를 모아 이들과 함께 적진에 다다라서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이때 왕은 사잇길을 타고 가서 추격을 벗어나며 산과 골짜기를 따라가며 흩어졌던 군사 중에 스스로 조직을 꾸려나가던 사람들을 모았다. 왕이 그들에게 말씀하기를 “만약 그대들 중에 능히 밀우(密友)를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두터이 상을 내리리라!” 하였다. 하부(下部) 유악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아와 대답하기를 “신이 한 번 가보겠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전장터에서 밀우(密友)가 땅에 엎어진 것을 보고 곧 그를 엎고 왔다. 왕이 그를 자기 다리에 눕히었는데 얼마 있다가 소생하였다. 왕이 사잇길로 이리저리 돌아서 남옥저(南沃沮)에 이르렀지만, 위군(魏軍)의 추격이 그치지 않았다. 왕이 계책은 다하였고, 형세는 만만치 않아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때 동부(東部) 소속에 뉴유(紐由)가 말씀을 올리기를 “형세가 매우 위급하고 절박하나 헛되이 죽을 수만은 없습니다. 신에게 별것 아닌 꾀가 있는데,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군(魏軍)을 주면서 위로하는 척하며 틈을 살펴 저 위나라 장수를 찔러 죽이는 것입니다. 만약 신의 계획이 이루어진다면 왕께서는 기세를 치켜들어 적병을 쳐서 분명코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좋다.” 하였다.
뉴유(紐由)가 위군(魏軍)의 진영에 들어가 거짓 항복을 하며 말하기를 “과인의 임금이 대국(大國)에 죄를 짓고 도망쳐 바닷가에 이르렀으니 몸을 둘 땅 한 뙈기도 없습니다. 우리 임금께서 장차 이 진(陣)에서 항복을 청하면 죄를 판결하는 사구(司寇)에 의해 죽음이 결정되기 때문에 먼저 소신(小臣)을 보내어 변변치 않은 음식물을 바치게 하셨으니 대국을 따르는 자의 공양물(羞)로 여기소서!” 하였다.
위장(魏將)이 이 말을 듣고 그 항복의 물건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뉴유(紐由)가 음식 그릇에 칼을 숨겨 두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뽑아 위장(魏將)의 가슴을 찔러 그 장수와 더불어 죽었다. 위군(魏軍)이 마침내 혼란에 빠졌다.
동천왕이 군대를 나누어 세 길을 만들어, 서둘러 공격하자 위군(魏軍)이 우왕좌왕 어지러웠고 진을 갖출 수가 없어 결국 낙랑(樂浪)에서부터 물러났다. 왕이 다시 나라를 회복하자 공(功)을 따져보는데 밀우(密友)와 뉴유(紐由)가 제일이라, 밀우(密友)에게 거골(巨谷), 청목골(靑木谷)을 내리고 악구(屋句)에게 압록(鴨淥), 두납하원(杜訥河原)을 내려서 식읍(食邑, 이곳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먹고 사는)으로 만들어 주었다. 뉴유(紐由)를 추증(追贈)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았고 또한 그 아들 대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이 전쟁에서 위장(魏將)이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돌을 깎아 공을 기록하였고 다시 환도산(丸都山)에 새기고 불내성(不耐城)에다 새기고서야 돌아갔다.
처음에 동천왕의 신하 득래(得來)가 왕이 중원 땅을 침입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서 자주 간언하였지만,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得來)가 탄식하며 “당장 이 나라는 망하여 이 땅은 쑥들만 자라나고 있을 것이다.” 하고 음식을 끊고 굶어 죽었었다.
모구검(毋丘儉)이 여러 군대에 명하여 그 무덤을 훼손하지 못하며 그 무덤 주변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들을 찾아 모두 풀어서 보내주었다.
〈괄지지(括地志)에서 “불내성(不耐城)은 바로 국내성(國內城)이니 성(城)은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하였다. 이는 바로 환도산(丸都山)과 국내성(國內城)이 서로 닿아있다는 것이다. 양서(梁書)에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할 때 고구려 왕이 장수를 보내어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니 모구검(毋丘儉)이 와서 침입하였다. ” 하였다. 통감(通鑑)에 “득래(得來)가 임금께 간언을 올렸으니 왕 위국(位宮) 때의 일이다” 하니 잘못된 기록이다. 〉
21년 봄 2월 왕께서 환도성(丸都城)이 난리를 겪었던 까닭에 더는 도읍지로 삼을 수가 없어서 평양성(平壤城)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廟社)을 옮겼다. 평양(平壤)이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께서 터 잡은 곳이다. 어떤 사람은 동천왕이 왕검(王儉)에 도읍하였다고도 한다.
三國史記 卷十七 高句麗本紀 第五 東川王
二十年,秋八月,魏遣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來侵。王將步騎二萬人,逆戰於沸流水上,敗之,斬首三千餘級。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又敗之,斬獲三千餘人。王謂諸將曰:「魏之大兵,反不如我之小兵。毋丘儉者魏之名將,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乃領鐵騎五千,進而擊之。儉為方陣,決死而戰,我軍大潰,死者一萬八千餘人。王以一千餘騎,奔鴨渌原。冬十月,儉攻陷丸都城,屠之。乃遣將軍王頎,追王。王奔南沃沮,至于竹嶺,軍士分散殆盡,唯東部密友獨在側,謂王曰:「今追兵甚迫,勢不可脫。臣請決死而禦之,王可遯矣。」遂募死士,與之赴敵力戰。王間行, 脫而去,依山谷,聚散卒自衛,謂曰:「若有能取密友者,厚賞之。」下部劉屋句前對曰:「臣試往焉。」遂於戰地,見密友伏地,乃負而至。王枕之以股,久而乃蘇。王間行轉輾,至南沃沮,魏軍追不止。王計窮勢屈,不知所為。東部人紐由進曰:「勢甚危迫,不可徒死。臣有愚計,請以飲食往犒魏軍,因伺隙刺殺彼將。若臣計得成,則王可奮擊決勝矣。」王曰:「諾。」紐由入魏軍詐降曰:「寡君獲罪於大國,逃至海濱,措躬無地,將以請降於陣前,歸死司寇,先遣小臣,致不腆之物,為從者羞。」魏將聞之,將受其降。紐由隱刀食器,進前,拔刀刺魏將胸,與之俱死,魏軍遂亂。王分軍為三道,急擊之,魏軍擾亂不能陳,遂自樂浪而退。王復國論功,以密友、紐由為第一,賜密友巨谷、靑木谷,賜屋句鴨淥、杜訥河原以為食邑。追贈紐由為九使者,又以其子多優為大使者。是役也,魏將到肅愼南界,刻石紀功,又到丸都山,銘不耐城而歸。初,其臣得來,見王侵叛中國,數諫,王不從。得來嘆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毋丘儉令諸軍,不壞其墓,不伐其樹,得其妻子,皆放遣之。〈《括地志》云:「不耐城卽國內城也,城累石為之。」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梁書》:「以司馬懿討公孫淵,王遣將,襲西安平,毋丘儉來侵。」《通鑑》:「以得來諫王,為王位宮時事。」誤也。〉
二十一年,春二月,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
2. 태평어람(太平御覽) 781권 신라(新羅) 편
북사(北史) : 신라(新羅)는 그 선조가 진한(辰韓)에 뿌리를 둔 씨(種)이다. 진한(辰韓)은 맨 처음에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뒤에 점차 갈라져 열둘이 되었다.
신라(新羅)에 경우 〈그 선조는 진한(辰韓)에 뿌리를 둔 씨(種)이다. 진한(辰韓)이 처음에는 하나였다. 더러는 위(魏)라고도 일컬어진다.〉 모구검(母丘儉)이 고구려(髙麗)를 토벌하여 깨뜨렸을 때 고구려 사람들이 발저(沷沮, 곧 沃沮)로 달아났고 그 뒤에 다시 고국(故國)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옥저에 남았던 고구려 사람들이 마침내 ‘신(新)’을 만들었다. 역시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이 사로(斯盧)는 화하(華夏)와 고려(髙麗)와 백제(百濟) 사람들을 섞어 두었고 발저(沷沮, 곧 옥저), 불내(不耐), 한예(韓𣿄/濊)의 땅을 싹 다 가졌다. 그 임금은 본디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부터 신라(新羅)로 도망쳐 들어가 마침내 신라에서 왕 노릇을 하였다. 처음에 백제(百濟)의 부용(附庸)이었다가 백제가 고려(髙麗)를 정벌하면서 사람들이 그 전쟁에 따른 징발과 부역을 이기지 못하는 바람에 뒤에 서로서로 이끌고서 신라로 들어갔다. 신라는 드디어 강성해지자 인하여 백제(百濟)를 습격하고 가라국(迦羅國)을 부용(附庸)으로 거느렸다.
太平御覽 卷之七百八十一 新羅 :
北史曰新羅者其先夲辰韓種也辰韓始有六國後稍分爲十二新羅則〈先夲辰韓種也辰韓始一也或稱魏〉將母丘儉討髙麗破之奔沷沮其後復歸故國有留者遂爲新亦曰斯盧其人亲+隹(‘雜’으로 해석된 글자의 원문 글자는 亲+隹로 사전에 없음. ‘雜’로 추정. 예, 明皇亲+隹録)有華夏髙麗百濟之屬兼有沷沮不耐韓𣿄之地其王夲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𥘉附庸百濟百濟征髙麗不堪戎役後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焉
★ 위에 원문 ‘附庸於迦羅國焉’에서 ‘於’는 이 문장에서 “부림(사역)이나 피동의 의미가 있는 조사” 이다. ‘~에 의해’의 말맛이 있다. 따라서 ‘附庸於迦羅國焉’을 해석해 보면 ‘가라국(迦羅國)에 부용(附庸 : 나라가 작아서 큰 나라에 붙어 의지해서 사는 나라)이 되었다.’ 이다. 그러나 앞의 내용인 ‘신라가 백제의 부용이었고 ... 신라가 성대해지자 백제를 습격하고 ..’라는 말에 비추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위키문고에 수서(隋書) 권 81 신라(新羅) 편에 나온 교감원문을 소개한다.
⇒ 통전(通典) 185에 “가라(加羅), 임나(任那) 여러나라를 습격하여 이들을 멸하였다.”라고 쓰여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금관(金官), 고령(古寧) 여러 가야국(加邪國)이 있었는데 똑같이 신라(新羅) 병합되었다.”라는 내용에 근거하자면 아마도 ‘於’ 자 ‘여러 제(諸)’ 자의 잘못된 기록인 듯하다. 通典一八五作「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據三國史記,有金官、古寧諸加邪國,均為新羅所併,疑「於」字是「諸」字之訛。
그러나 위의 글은 하나, 가라(加羅)나 임나(任那)를 가야(加邪, 伽耶)와 연관시켰고 둘, 그렇다면 백제 고구려 신라의 활동 무대를 한반도에 국한 시킨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 두고 자료들을 살펴야 할 것이다.
① 통지(通志) 권 194
마침내 신라가 강성해지자 가라(伽羅)와 임단(任郍) 여러 나라를 습격하여 이들을 멸하였다. 그 서북쪽 경계에 견아(犬牙)는 고구려(髙麗)와 백제(百濟) 사이로 나간다.
通志 (四庫全書本)/卷194
遂致彊盛因襲伽羅任郍諸國滅之其西北界犬牙出髙麗百濟之間
②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 174
마침내 신라가 강성해지자 가라(加羅)와 임단(任䢷), 여러 나라를 습격하여 이들을 멸하였으니 삼한(三韓)의 옛 땅을 아울러 차지한 것이다. 그 서북 경계에 대아(大牙)는 고구려(髙麗)와 백제(百濟) 사이에 있다.
太平寰宇記 (四庫全書本)/卷174
遂致强盛因襲加羅任䢷諸國滅之並三韓之故地也其西北界大牙出髙麗百濟之間
③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권 4
마침내 신라가 강성해지자 가라(伽羅)와 임나(任那) 여러 나라를 습격하여 이들을 멸하였다.諸그 서북쪽 경계는 고구려(髙麗) 사이로 나간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4
遂致强盛因襲伽羅任那諸國滅之其西北界出髙麗之間
3. 삼국지(三國志) 권28 모구검전(毌丘儉傳) 중에서
때에 농민을 데려다가 궁실(宮室)을 가꾸었다. 검(儉)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에 세상이 서둘러 없애야 할 것이 두 가지 적이고, 무엇보다 힘을 써야 할 것이 입고 먹은 것입니다. 가령 이 두 가지 망가트림을 없애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굶주리고 얼어 죽을 것이니 비록 궁실이 높고 아름답다 해도 오히려 보탬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청룡(青龍, 魏 조예(曹叡)의 연호, 233년 – 237년) 안에 제(帝)가 요동(遼東)을 토벌하려 계획하여서 검(儉)이 재능과 꾀가 있기에 유주자사(幽州刺史)로 옮기고 도료장군(度遼將軍), 사지절 (使持節), 호오환도위(護烏丸校尉)를 더해주었다. 유주(幽州)에 여러 군대를 이끌고 양평(襄平)에 이르러 양수(遼隧)에 주둔하였다. 우북평 오환 선우(右北平烏丸單于) 구루돈(寇婁敦), 요서 오환도독(遼西烏丸都督) 솔중왕(率眾王) 호류(護留)들이 옛날에 원상(袁尚)을 따라서 요동(遼東)으로 달아났던 자들 무리 오천여 사람을 이끌고 항복하게 하였다. 구루돈((寇婁敦)이 동생 아라반(阿羅槃)들을 보내어 궐에 나아가 조공하게 하니 위나라 임금이 일행의 우두머리 20여 사람을 후(侯)와 왕(王)으로 삼고 말수레, 비단을 내리되 각각 차이를 두었다. 공손연(公孫淵)이 검(儉)을 맞아서 싸움을 하였는데 이롭지 못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다음 해 제(帝)가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 사마의(司馬懿), 179년 ~ 251년 생존)을 보내 중군(中軍)과 검(儉) 등의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서 연(淵)을 토벌하게 하니 요동(遼東)이 안정되었다. 검(儉)이 그 공으로 안읍후(安邑侯)로 진급되어 봉해졌는데 식읍(食邑)이 3천9백 호(戶)였다.
정시(正始, 삼국 위(魏) 조방(曹芳)의 연호, 240년 – 249년) 때에 검(儉)이 고구려가 자주 침입하며 배반하였다는 이유로 여러 군대의 보기(步騎) 만 명을 이끌고 현토(玄菟)를 나가 이런저런 길들을 따라서 구려 군대를 토벌하였다. 구려왕(句驪王) 궁(宮)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위로 진군하여 갈구(梁口)에서 크게 전투를 벌였지만 〈‘梁’은 소리가 갈(渴)이다.〉, 궁(宮)이 계속 깨져 달아났다. 검(儉)이 드디어 말을 묶고 수레를 달아매고서 환도(丸都)로 올라가 구려(句驪)가 도읍한 곳을 도륙하여 목을 베고 사로잡은 이들이 천 명을 헤아린다. 구려(句驪)에 득래(得來)라는 이름의 패자(沛者)가 고구려 임금 궁(宮)에게 자주 간언을 올렸지만, 〈나 송지(松之)가 동이전(東夷傳)을 살펴보건대 패자(沛者)는 구려국(句驪國)의 관명(官名)이다.〉 궁(宮)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得來)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나라는 곧 (망하여) 앞으로 쑥들만 자라는 땅이 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음식을 먹지 않고 스스로 굶어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이 사람을 어질게 여기었다. 모구검이 여러 군대에 명을 내려 그이의 묘를 훼손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 무덤 주변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이의 처자들을 찾아서 모두 풀어주었다.
궁(宮)이 홀로 처자들을 데리고 추격을 벗어나 도망가고 검(儉)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6년, 모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니 궁(宮)이 결국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검(儉)이 현토 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궁을 추격하게 하였다. 〈세어(世語)에 “기(頎)의 자(字)는 공석(孔碩)이며 동래(東萊) 사람이다. 진(晉)나라 영가(永嘉, 서진의 회제 사마치(懷帝 司馬熾) 연호, 307년 ~ 313년) 중에 농민 봉기를 일으킨 왕미(王彌)는 기(頎)의 손자이다.” 하였다.〉
왕기가 옥저(沃沮) 1천 리를 넘게 지나서 숙신씨(肅慎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을 깎아 그 공을 기록하고 환도산(丸都山)에 자기들 공을 파서 놓았고 불내성(不耐城)에도 새겨 놓았다. 여러 곳에서 죽이고 항복받은 고구려 병사들이 8천여 명으로 공을 논하여서 상을 주었는데 후(侯)가 된 자가 1백여 명이었다. 산을 뚫어 물을 대니 백성들이 그 이로움에 도움을 받았다.
三國志/卷28 (毌丘儉傳中)
時取農民以治宮室,儉上疏曰:「臣愚以為天下所急除者二賊,所急務者衣食。誠使二賊不滅,士民飢凍,雖崇美宮室,猶無益也。」遷荊州刺史。
青龍中,帝圖討遼東,以儉有幹策,徙為幽州刺史,加度遼將軍,使持節,護烏丸校尉。率幽州諸軍至襄平,屯遼隧。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眾王護留等,昔隨袁尚奔遼東者,率眾五千餘人降。寇婁敦遣弟阿羅槃等詣闕朝貢,封其渠率二十餘人為侯、王,賜輿馬繒採各有差。公孫淵逆與儉戰,不利,引還。明年,帝遣太尉司馬宣王統中軍及儉等眾數万討淵,定遼東。儉以功進封安邑侯,食邑三千九百戶。
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從諸道討之。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進軍沸流水上,大戰梁口,〈梁音渴。〉宮連破走。儉遂束馬縣車,以登丸都,屠句驪所都,斬獲首虜以千數。句驪沛者名得來,數諫宮,〈臣松之按東夷傳:沛者,句驪國之官名。〉宮不從其言。得來歎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舉國賢之。儉令諸軍不壞其墓,不伐其樹,得其妻子,皆放遣之。宮單將妻子逃竄。儉引軍還。六年,复征之,宮遂奔買溝。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世語》曰:頎字孔碩,東萊人,晉永嘉中大賊王彌,頎之孫。〉過沃沮千有餘里,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諸所誅納八千餘口,論功受賞,侯者百餘人。穿山溉灌,民賴其利。
4. 태평어람(太平御覽) 312권
위지(魏志) : 모구검(母丘儉)은 자(字)가 중공(仲恭)이다. 유주자사(幽州刺史)가 되었고 도료장군(渡遼將軍)이 더해졌다. 검(儉)은 고구려(髙句驪)가 여러 번 침입하며 배반하자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현토(𤣥菟)를 나가 몇몇 길을 따라 이들을 토벌하였다. 구려왕(句驪王) 궁(宫)이 보기(步騎)를 이끌고 모구검의 군대를 맞아 비류수(沸流水) 주위에서 크게 싸우다 깨지자 달아났다.
모구검이 드디어 말을 수레에 묶어두고 환도산(丸都山)으로 올라가 구려(句麗)를 도륙하였으니 베어 죽인 머리와 사로잡은 사람이 수천을 헤아렸다. 현토(玄菟) 태수 왕기(王頎)를 보내 고구려 왕을 추격하게 하니 옥저(沃沮) 천여 리를 지나 숙신(肅慎) 경계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돌에 자기들의 공을 돌을 깎아서 기록하고 환도산(丸都山)에도 파서 놓았고 불내성(不耐城)에도 새겨 놓았다.
太平御覽卷三百十二
魏志曰母丘儉字仲恭有幹䇿為幽州刺史加渡遼將軍儉以髙句驪數侵叛督諸軍出𤣥菟從諸道討之句驪王宫將步騎逆軍沸流水上大戰破走遂束馬懸車登丸都山屠句麗所斬獲首虜以千數遣𤣥菟太守王頎追過沃沮千餘里至肅慎界刻石記功刋丸都之山銘不耐之城
5. 흠정대청일통지(欽定大清一統志) 권 37
왕기(王頎) : 동래(東萊) 사람이다. 현토 태수(元莬太守)였다. 정시(正始 : 삼국 위(魏) 왕 조방(曹芳)의 연호, 240년 ~ 249년) 중에 모구검(母邱儉)이 다시 고구려(髙句麗) 정벌하였을 때 그 임금 궁(宫)이 마침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이때 검(儉)이 기(頎)를 보내 궁(宫)을 추격하게 하니 기가 옥저(沃沮) 천 리가 넘는 거리를 가서 숙신씨(肅慎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을 깎아 그 공을 기록하였고 환도산(丸都山)에도 자기들 공을 파서 남겨 놓았고 불내성(不耐城)에소 새겨 놓았다. 산을 뚫어 물을 대니 백성들이 그 이로움을 받았다.
欽定大清一統志卷三十七 : 王頎〈東萊人元莬太守正始中母邱儉復征髙句麗其王宫遂奔買溝時儉遣頎追宫過沃沮十有餘里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刋丸都山銘不耐城穿山灌溉民賴其利〉
6. 자치통감(資治通鑑) 권 75
유주 자사(幽州刺史) 모구검(毋丘儉)이 고구려(髙句驪)의 임금 위궁(位宫)이 자주 침범하고 배반한다는 이유로 〈구(句)는 본래 그 글자이다. 또 음은 구(駒)이다. 려(驪)는 력(力)과 지(知)의 반절이다. 數(삭)는 소(所)와 각(角)에 반절이다. 아래도 같다.〉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이들을 토벌하니 위궁(位宫)이 패주하였다. 검(儉)이 마침내 환도(丸都)를 도륙하였다.
〈고구려(髙句驪)는 환도(丸都) 아래에 도읍하였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다. 모구검전(毋丘儉傳)에 “수레를 매달아 놓고 말을 묶어두고서 환도(丸都)로 올라갔다.”라 하니 그 산세를 가히 알 만하다. 당지(唐志)에 압록강(鴨渌江) 어귀에서부터 배를 타고 백여 리를 가서 드디어 작은 배로 물길을 거슬러 동북쪽으로 가 3십 리에서 박작구(泊汋口)에 이르면 발해(渤海)의 경내가 되는데 다시 물길을 거슬러 5백 리를 가면 환도현성(九都縣城)에 이른다. 모두 5백 3십 리를 가면 환도성(丸都城)에 이른다. 〉
고구려 사람들의 목을 베고 포로로 사로잡은 것이 천(千) 단위로 헤아렸다. 구려(句驪)의 신하 중에 득래(得來)가 자주 위궁(位宫)께 간언을 올렸지만 위궁(位宫)이 따르지 않자 득래(得來)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곧 이 나라는 망하여 이 땅에는 쑥들로만 가득 자랄 것이다.” 하고는 음식을 끊고 굶어 죽었다. ... 위궁(位宫)이 단신으로 처자들을 데리고 피하여 도망갔다.
검(儉)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고구려를 쳤다. 위궁(位宫)이 결국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 매구루(買溝婁)는 북옥저(北沃沮)의 땅이다. 남옥저(南沃沮)와 거리가 8백여 리이니 구려(句麗)는 성(城)을 이름하여 구루(溝婁)라고 하였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북옥저(北沃沮)는 일명 매구루(買溝婁)라고 한다.” 하고 다시 “고구려(髙句麗)가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살았을 때 한(漢)나라가 이 땅을 자기들 현(縣)으로 만들고 현토군(𤣥莬郡)에 예속시켜 버리고 의복과 두건, 조복(朝服), 악기들을 내려줄 때면 늘 현토군(郡)으로부터 이를 받았었다. 그러다 뒤에 고구려가 점차 교만해지고 방자해져 더는 현토군에 나아오지 않았고 그저 동쪽 경계에다 작은 성을 짓더니만 하사품들을 이곳을 통해서만 받았다. 그리고는 이 성에 이름을 붙여 책구루(幘溝漊)라 하였다. 구루(溝漊)란 고구려(髙麗)가 이름 붙인 성(城)이다. 건안(建安 : 東漢 말기 헌제의 연호, 196년 1월 ~ 220년 3월) 중에 고구려 임금 이이모(伊夷模)께서 환도산(丸都山) 아래에다 새로운 국도(國都)를 만드셨으니 비류수(沸流水) 서쪽이다. 위(魏) 정시(正始) 중에 모구검(毋丘儉)이 환도(丸都)를 도륙하고 불내성(不耐城)에 그 공을 새기고 돌아왔다.” 하였다. 다시 “동옥저(東沃沮)는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 북옥저(北沃沮)는 일명 매구루(買溝漊)라 하니 남옥저(南沃沮)와 거리가 8백여 리이니 읍루(挹婁)와 닿아있다.” 하였다. 〉
검(儉)이 현토 태수(𤣥莬太守) 왕기(王頎)를 보내어 위궁을 추격하게 하니 왕기가 옥저(沃沮) 1천이 넘는 거리를 지나
〈옥저(沃沮) 땅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현토군(𤣥莬郡)을 열어 설치하고 옥저성(沃沮城)에 치소를 두어 다스렸다. 뒤에 현토(𤣥莬)를 안쪽(중원 쪽?)으로 옮겼고(内徙), 옥저(沃沮)를 다시 낙랑(樂浪)에 예속시켰다. 광무(光武 : 재위 기간 25년 ~ 57년)가 기존에 군현들을 없애면서 줄이고 그 우두머리들은 현후(縣侯)로 삼았다. 그 우두머리들의 나라(國)들이 조금씩 구려(句驪)에게 압박을 당하더니 마침내 신하로서 구려에 붙었다. 〉
숙신씨(肅慎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위(魏) 동이(東夷)에 읍루국(挹婁國)은 바로 옛 숙신씨(古肅慎氏)이다 라고 하였다.〉
돌을 깎아 공을 기록하고서 돌아왔다. 죽이고 항복 받은 고구려 군사가 8천여 명이었다. 〈주살(誅殺)된 시신과 항복한 사람이 전부 8천여 사람이라는 말이다. 〉 공(功)을 따져서 상을 주었으니 후자(侯者 : 후(侯)로 봉해진 사람)가 1백여 명이었다.
資治通鑑卷七十五 宋 司馬光 撰 胡三省 音註
魏紀七 : 幽州刺史毋丘儉以髙句驪王位宫數為侵叛〈句如字又音駒驪力知翻數所角翻下同〉督諸軍討之位宫敗走儉遂屠丸都〈髙句驪都於丸都之下多大山深谷毋丘儉傳謂縣車束馬以上丸都可知矣唐志自鴨渌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泝流東北行〔보충: 新唐書 : 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又泝流五百里至九都縣城〕凡五百三十里而至丸都城〉斬獲首虜以千數句驪之臣得來數諫位宫位宫不從得來歎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儉令諸軍不壊其墓〈壊音怪〉不伐其樹得其妻子皆放遣之位宫單將妻子逃竄儉引軍還未幾復擊之〈幾居豈翻復扶又翻〉位宫遂奔買溝〈後漢書東夷傳買溝婁北沃沮之地去南沃沮八百餘里句麗名城為溝婁杜佑曰北沃沮一名買溝婁又曰髙句麗居紇升骨城漢為縣屬𤣥莬郡賜以衣幘朝服鼓吹常從郡受之後稍驕恣不復詣郡但於東界築小城以受之遂名此城為幘溝漊溝漊者髙麗名城也建安中其王伊夷模更作新國都於丸都山下在沸流水西魏正始中毋丘儉屠丸都銘不耐城而還又曰東沃沮在蓋馬大山之東北沃沮一名買溝漊去南沃沮八百餘里與挹婁接〉儉遣𤣥莬太守王頎追之過沃沮千有餘里〈沃沮之地在蓋馬大山之東漢武帝滅朝鮮開置𤣥莬郡治沃沮城後𤣥莬内徙沃沮更屬樂浪光武廢省就以其渠帥為縣侯其國小迫於句驪遂臣屬焉莬同都翻頎渠希翻沮千余翻〉至肅慎氏南界〈魏東夷挹婁之國即古肅慎氏也〉刻石紀功而還所誅納八千餘口〈言誅殺者及納降者總八千餘口還從宣翻又如字〉論功受賞侯者百餘人
7. 동북여지석략(東北輿地釋略) 권3
○매구(買溝) 〈치구루(置溝漊)〉
위지(魏志) 모구검전(毌邱儉傳)에 “갈구(梁口, 梁音渴)에서 크게 싸웠는데 고구려 임금 궁(宮)이 연달아 깨져 달아났다. 검(儉)이 마침내 말을 묶어 두고 수레를 달아매고서 환도(丸都)에 올라 구려(句麗)가 도읍한 곳을 도륙 내었다. 6년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자 궁(宮)이 결국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하였다.
살펴보면 매구(買溝)를 고증할 수 없지만, 치구루(置溝漊)가 북옥저(北沃沮) 땅에 붙어 있는 것에 맞추면, 장백산(長白山) 동북에 있다. 그래서 왕기(王頎)가 고구려 왕을 추격하여 옥저(沃沮) 1천여 리를 지난 것이다.
동옥저전(東沃沮傳)에 “모구검(毌邱儉)이 구려(句麗)를 토벌하니 구려(句麗)의 임금 궁(宮)이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모구검이 마침내 군사를 전진시켜 이 땅을 쳐서 옥저(沃沮)의 읍락이 모두 깨졌다. 궁(宮)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다. 북옥저(北沃沮)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라 하니 남옥저(南沃沮)와 거리가 8백여 리이다.” 하였다.
이 두 전(傳)이 똑같이 한 가지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서로 맞지 않아 다른 이름들을 대고 있다. 매(買)는 치(置)와 글자가 너무도 서로 비슷하게 닮았다. 후한서(後漢書) 동옥저전(東沃沮傳)에 “또 북옥저(北沃沮)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 한다.” 하니 뒤에 역사서들은 이를 뿌리에 두었다. 삼국지(三國志)에 경우 치구루(置溝婁)라고 적고 있는 것이, 옳다. 매(買)라는 글자는 특히 잘못된 글월에 속한다.
한편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전(高句麗傳)을 살펴보자면 한(漢)나라 때 악기와 놀이패(伎人)를 하사하였고 일찍이 현토군(元菟郡)으로부터 조복(朝服)과 옷, 두건을 받았었다. 〈 살펴보면 이는 아직 옮기지 않았을 때의 현토군(郡)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
고구려(高句麗)의 영주(令主)는 그 이름을 (한나라의) 적(籍)에 올린 뒤에 점차 교만해지고 방자해져 더는 현토군(元莵郡)에 나아오지 않았고 동쪽 경계에다 작은 성(城)을 쌓고서 그 안에다 조복(朝服)과 옷, 두건을 두고는 사시사철(歲時) 때에 이 성에 와서 이 물건들을 취하였다. 지금 호(胡)는 여전히 이 성(城)을 이름하여 책구루(幘溝漊)라고 하는데 구루(溝漊)란 고구려(高麗)가 이름한 성(名城)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치구루(置溝漊)란 역시 그들이 살았던 성(城)을 가지고서 이름한 것이다. 모구검전(毌邱儉傳)에서 치(置)를 잘못하여 ‘매(買)’라 하였고 다시 루(漊) 자를 빠뜨렸다. 동옥저전(東沃沮傳)에서는 루(漊) 자의 물 수(水)변을 벗겨내 버렸다.
東北輿地釋略/卷3
○買溝 〈置溝漊〉
魏志毌邱儉傳大戰梁口宮連破走儉遂束馬懸車以登丸都屠句麗所都六年復征之宮遂奔買溝按買溝無可考當是置溝漊屬北沃沮在長白山之東北故王頎追之過沃沮千餘里也東沃沮傳云毌邱儉討句麗句麗王宮奔沃沮遂進師擊之沃沮邑落皆破之宮奔北沃沮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兩傳同紀一事不應有二名買與置極相似後漢書東沃沮傳云又有北沃沮一名置溝婁後書本之三國志則作置溝婁者是也買字特屬誤文又按三國志高句麗傳漢時賜鼓吹伎人嘗從元菟郡受朝服衣幘 〈 按此指未徙之郡言之 〉 高句麗令主其名籍後稍驕恣不復詣郡於東界築小城置朝服衣幘其中歲時來取之今胡猶名此城為幘溝漊溝漊者高麗名城也然則置溝漊者亦是就其所居城名之毌邱儉傳誤置為買又脫漊字東沃沮傳脫去漊字水旁
8. 속후한서(續後漢書) 권70 중(中)
6년 모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자 궁(宫)이 마침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검(儉)이 현토 태수(𤣥莵太守) 왕기를 보내어 이를 추격하게 하였다. 〈원주(原注) 세어(世語)에서 기(頎)의 자(字)가 공석(孔碩)이요 동래(東萊) 사람이다고 하였다.〉
왕기가 오환(烏桓), 골도(骨都)를 넘어 옥저(沃沮) 1천여 리를 지나 숙신씨(肅慎氏)의 뜨락을 밟았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마주하는데 그곳에 다른 얼굴(異面)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해가 나오는 곳에 가까웠다. 주위 여러 나라를 두루 살펴보고 그 풍속과 관습(法俗)을 채록하고 돌을 깎아 공을 기록하였으며 환도산(丸都山)에 새기고 불내성(不耐城)에 새기었다. 여러 곳에서 죽이고 항복 받은 사람들이 8천여 명이었다. 아울러 예맥(濊貊)을 토벌하여 모두 깨뜨리니 한나해(韓那奚) 등 수십 나라가 각각 자기 종족 붙이의 읍락(種落)들을 이끌고 검(儉)에게 나아와 항복하였다. 검(儉)이 군대를 정비하고서 돌아가 공을 따져보아 상을 주었다. 후(侯)로 봉해진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산을 뚫어 물을 대주니 백성이 그 이익을 받았다.
續後漢書卷七十中
六年復征之宫遂奔買溝儉遣𤣥莵太守王頎追之〈原注世語頎字孔碩東萊人〉踰烏桓骨都過沃沮千餘里踐肅慎氏之庭東臨大海有異面之人近日之所出周觀諸國采其法俗刻石紀功刋丸都之山銘不耐之城諸所誅納八千餘口并討濊貊皆破之韓那奚等數十國各率種落詣儉降儉振旅還論功受賞侯者百餘人穿山溉灌民頼其利
9.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 권 6
곽박(郭璞)이 “옛 이야기(舊説)에서 말하기를 ‘그 사람들은 손이 아래로 늘어져 땅에 닿는다. 위(魏) 황초(黄初, 조비의 연호, 220 ~ 226년) 중에 현토 태수(𤣥莵太守) 왕기(王頎)가 고구려를 토벌하였는데 고구려 임금 궁(宮)이 궁지에 몰리자 이를 추격하였다. 왕기가 옥저국(沃沮國)을 지났는데 그 동쪽 경계가 큰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해가 나오는 곳에 가까웠다. 그 동네 어른에게 묻기를 “바다 동쪽에 사는 사람이 더 있겠지요?” 하니 “한 번은 바다 안에서 베로 만든 일상복(褶)을 주운 적이 있는데 그 옷에 몸통은 우리네 사람들에게 맞았지만 옷에 두 소매는 길이가 3 자(尺)였다.” 답하였다.’ 하니 바로 이것이 산해경에 나오는 장비인(長臂人)의 옷이다.” 하였다.
山海經廣注 (四庫全書本)/卷06
郭曰舊説云其人手下垂至地魏黄初中𤣥莵太守王頎討高句麗王宮窮追之過沃沮國其東界臨大海近日之所出問其耆老海東復有人否曰常在海中得一布褶身如中人衣兩袖長三尺即此長臂人衣也
10. 한원(翰苑)
○고려(高麗) :
왕기(王頎)가 고구려 왕을 쫓아 북쪽으로 갔고 그 공훈을 불내성(不耐城)에 새겼다.
고려기(高麗記)에 “불내성(不耐城)은 지금 국내성(國內城)이라 이름하니 나라 동북쪽 6백 7십 리에 있다. 본래 한(漢)나라 불이현(不而縣)이었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불이현(不而縣)은 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었고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리는 곳이라 하였다. 후한(後漢) 때 이 현을 줄였다.” 하였다.
위지(魏志)에 정시(正始 : 삼국 위(魏) 왕 조방(曹芳)의 연호, 240년 ~ 249년) 중에 모구검(母丘儉)이 고구려(高麗)를 정벌하였는데 결국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두고서 환도(丸都)에 올라 구려(句驪)가 도읍한 곳을 도륙을 내어 머리를 베고 사로잡은 사람들이 천(千) 단위로써 헤아렸다.
6년 모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자 고구려 임금 궁(宮)께서 마침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검(儉)이 현토 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였다. 왕기가 옥저(沃沮) 1천 리가 넘는 거리를 지나 숙신씨(肅慎氏)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돌을 깎아 공을 기록하고 환도산(丸都山)에도 그 공을 파서 놓았고 불내성(不耐城)에도 새겨 두었다.
翰苑 (唐)張楚金 撰 (唐)雍公叡 注
○高麗
王頎逐北銘勳不耐之城 高麗記曰不耐城今名國內城在國東北六百七十里本漢不而縣也漢書地理志不而縣屬樂浪郡東部都尉治處後漢省魏志曰正始中母丘儉征高麗遂束馬懸車以登丸都屠句驪所都斬獲首虜以千數六年復征之王宮遂奔買溝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過沃沮千有餘里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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