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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肅愼)

동북쪽 숙신(肅慎)의 남쪽 경계에 나오는 불내성과 단단대령 2

by 쥐눈이 2024. 7. 11.

1.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지리집(地理集) 2권 발해고(渤海考) 중에서

옥저(沃沮)의 옛 땅이 발해의 남경(南京)이 되니 남해부(南海府)’라 하였다. (), (), () 세 주()를 거느렸다.

...

내가 살피건대 옥저(沃沮)의 옛 땅은 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에 있었다. 지금의 함흥(咸興)이다. 함흥(咸興)에서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마침내 강릉(江陵)에서 경주(慶州)에 도착하게 되니 그래서 이 길을 신라도(新羅道)라 한 것이다. (), (), () 세 주()는 지금 비록 어느 곳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지금 마천령(磨天嶺) 이남과 철관(鐵關) 이북 쪽에 있는 것이 곧 그 땅이다.

與猶堂全書/地理集第二卷 疆域考其二 渤海考 作者丁若鏞

沃沮故地爲南京曰南海府領沃椒三州

...

鏞案沃沮故地在單單大嶺之東今之咸興也詳見沃沮考自咸興遵海而南遂自江陵達于慶州故謂之新羅道也椒三州今雖未詳今磨天嶺以南鐵關以北卽其地也

 

2. 순암집(順菴集) (안정복) 10 :

....그 가운데에 대방(帶方)도 적확히 어느 곳에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단단대령(單單大嶺) 불내(不耐)는 철령(鐵嶺) 동쪽인 듯 싶다. 그러나 이 역시 적확한 앎이 못 된다.

順菴集 (安鼎福)/卷十

....其中帶方不知的在何地單單大嶺不耐似是鐵嶺以東而亦不的知

 

3. 어정운부습유(御定韻府拾遺) 23 :

불내성(不耐城) : 위지(魏志) 선비 동옥저전(鮮卑東沃沮傳)에 옥저(沃沮)는 도로 낙랑(樂浪)에 소속되었다. ()나라가 이곳의 토지가 넓고 자기들 땅에서 멀다는 이유로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불내성(不耐城)에 치소를 두고서 다스렸으니 따로 단단대령(, ) 동쪽에 7()을 주관하였다. 당시 옥저(沃沮) 역시 함께 그에 따라 현()이 되었다.

御定韻府拾遺卷二十三 不耐城 : 魏志鮮卑東沃沮傳沃沮還屬樂浪漢以土地廣遠在單單大領之東分置東部都尉治不耐城别主領東七縣時沃沮亦皆為縣

 

4.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방여휘편(方輿彙編) 27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소제(昭帝) 시원(始元) 5(기원전 82) 임둔(臨屯)과 진번(真番)을 폐기하고 이것을 낙랑(樂浪)과 현토(元菟)에 합쳤다가 현토(元菟)를 다시 옮겨 구려(句麗) 땅에 두니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에 옥저(沃沮), 예맥(濊貊)이 다 낙랑(樂浪)에 속하게 되었다. 뒤에 이 땅이 넓고 자기들 땅에서 멀어 다시 단단대령 동쪽을 7()으로 나누고 낙랑 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 이곳이 안으로 붙은(內屬, 한나라의 현이 되었다는 말인 듯) 뒤부터 풍속이 점차 야박해지니 법으로 금하는 것 역시 점점 많아져 60여 조항에 이르렀다.

欽定古今圖書集成 方輿彙編 第二十七卷 按後漢書東夷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真番以并樂浪元菟元菟復徙居句麗自單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屬樂浪後以境土廣遠復分領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自內屬已後風俗稍薄法禁亦浸多至有六十餘條。」

 

5. 자치통감(資治通鑒) 18 :

... 또 예전(濊傳)에서 말하기를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였는데 단단대령(單單大嶺)에서 서쪽을 낙랑(樂浪)에 소속시키고 그 령() 동쪽 7()은 도위(都尉)가 주관하게 하니 모든 예()를 백성으로 삼았다. 지금 불내예(不耐濊)가 모두 그 겨레붙이이다.

資治通鑒 (胡三省音注)/018 ...濊傳武帝滅朝鮮置樂浪郡自單單大嶺以西屬樂浪自嶺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爲民今不耐濊皆其種也

 

6.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 421 :

불내성(不耐城) : 함흥부(咸興府) 북쪽에 있다. ()나라 현()으로 漢縣屬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어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치소가 되었었다. 이 뒤에 한나라가 현()을 폐기하였다. () 정시(正始, 삼국 위() 왕 조방(曹芳)의 연호, 240~ 249) 중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모구검(母邱儉)이 고구려를 치고 그 공훈을 환도산(丸都山)에다 파서 놓았고 불내성(不耐城)에다 새겨 두고서 돌아왔다. 이에 대해 진() 진수(陳壽)한무(漢武)가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할 때 단대령(單大嶺)에서 서쪽을 낙랑(樂浪)으로 하였고 그 영()에서 동쪽에 7()은 도위(都尉)가 주관하게 하니 모든 예()를 백성으로 삼았다.” 하였다. 바로 이른바 불내예(不耐獩, 는 통용됨)이다.

大清一統志 卷421 朝貢各國 朝鮮

不耐城 : 在咸興府北漢縣屬樂浪郡東部都尉治此後漢廢魏正始中幽州刺史母邱儉擊高句驪刊丸都山銘不耐城而還即此晉陳壽曰漢武置樂浪郡自單大嶺以西為樂浪自嶺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獩為氏()即所謂不耐獩也

 

7.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9 :

...단단대령(單單大嶺)은 바로 장백산(長白山)이다. 단단(單單)은 만주어(滿洲語)珊延(산연)’과 더불어 소리가 본디 서로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 장백(長白) 가까이에 동쪽은 바닷가에 이르고 북쪽은 오랍흑룡강(烏拉黒龍江)과 접해있고 서쪽으로는 아라사(俄羅斯)에 이른다. 그 사이사이 터에는 무더기 진 숲과 빽빽한 나무들이 쭉쭉 이어진다. () 모구검(毌丘儉)이 고구려(髙麗)를 칠 때 옥저(沃沮) 1천여 리를 가로질러 숙신(肅慎)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으니, 그렇다면 옥저(沃沮)란 참으로 지금에 와집(窩集)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09

...單單大嶺即長白山單單與滿洲語珊延音固相近也今自長白附近東至海邊北接烏拉黒龍江西至俄羅斯叢林密樹綿亘其間魏毌丘儉討髙麗絶沃沮千餘里到肅慎南界則沃沮者實即今之窩集也

 

8. 흠정성경통지(欽定盛京通志) 28 :  

단단대령(單單大嶺) 삼국 위지(三國魏志)옥저(沃沮)가 도로 낙랑(樂浪)에 소속되었으니 한()나라가 그 땅이 넓고 자기들 땅에서 멀다는 이유로 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하였다. 살펴보면 단단대령(單單大嶺)은 바로 장백산(長白山)이니 단단(單單)과 만주어 산연(珊延)’은 소리가 서로 가까우니 소리가 사람들 입에서 구르다 소리가 바뀐 것이다.

欽定盛京通志 (四庫全書本)/028  

單單大嶺三國魏志沃沮還屬樂浪漢以土地廣逺在單單大嶺之東分置東部都尉按單單大嶺即長白山單單與珊延音相近聲之轉也

 

9. 통지(通志) 194  

() :

()의 북쪽은 고구려, 옥저(沃沮)와 닿아있고 남쪽은 진한(辰韓)과 더불어 이웃하고 있으며 동쪽은 큰 바다에 막혀있고 서쪽으로는 낙랑(樂浪)에 이른다. ()와 옥저(沃沮), 구려(句䴡)는 본래 모두 조선(朝鮮) 땅이다.

() 무제(武帝) 원삭(元朔) 5(기원전 124) ()의 임금 남려(南閭) 들이 조선(朝鮮) 왕 우거(右渠)를 배신하고 28만 구()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나아와 안으로 붙었다(内屬). 무제(武帝)가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두어 해(數年) 있다 결국 없앴다.

원봉(元封) 3(기원전 113) ()이 조선을 멸하고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토(元菟), 진번(真番) 네 군()으로 나누어 두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기원전 82) 임둔(臨屯)과 진번(真番)을 없애고 낙랑(樂浪)과 현토(元菟)에 합쳐버렸다. 현토(元菟)를 다시 옮겨 구려(句䴡)의 땅을 점거하였다. 단단대령(單單大領)에서 동쪽부터 옥저(沃沮), 예맥(濊貃)이 깡그리 낙랑(樂浪)에 붙여졌다. 뒤에 이 땅의 영토가 넓고 자기들 땅에서 멀어서 다시 단단대령 동쪽을 7()으로 나누어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두었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6(기원후 30) 도위관(都尉官)을 줄이고 그 지역의 우두머리(渠帥)들을 죄다 봉하여 현후(縣侯)를 만드니 모두 세시(嵗時)에 조하(朝賀)하였다. 대군장(大君長)은 없다. ()나라 이후로 이 지역 관직에 후(), 읍군(邑君), 삼로(三老)를 두어 일반 사람들을 거느려 주도하게 하였다.

그 지역에 나이가 많고 존경받는 어른들은 스스로 고려(髙䴡)와 씨가 같다(同種)라고 하니 그들의 말과 풍속, 관습이 대개 서로 비슷하고 그곳 사람의 성품이 우직하고 정성스러우며 지나친 향락을 거의 즐기지 않으며 뭔가를 요청하여 구걸하지 않는다. 남녀 모두 곡령(曲領)을 입었고 남자는 너비 두어 마디()되는 은으로 만든 꽃을 달아서 장식으로 삼고 주옥(珠玉)을 보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요하게 여긴다. 산천(山川)은 각 부락마다 나눈 곳이 있어 함부로 상대의 산천을 집적대지 못한다. 동성(同姓)끼리는 결혼하지 않으며 대부분 꺼리고 피하는 바이다. 병에 걸려서 죽으면 바로 시신을 처리한다. 오래된 가옥은 다시 새집으로 고치고 마()를 씨 뿌려 가꾸며 누에를 먹여 길러서 비단과 베를 짠다. 별자리 살피는 데에 매우 밝아 한 해의 풍흉년을 미리 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밤낮으로 음주 가무를 펼친다. 이를 이름하여 무천, 하느님께 올리는 춤(舞天)이라고 한다. 또한 범에게 제사를 지내니 범()을 신()으로 여긴다. 그 읍락에 침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늘 상대를 벌하고 생구(生口 : 노예나 가축을 뜻함)와 소 말로 그 책임을 묻는다. 이를 이름하여 책화, 곧 불러온 화에 대한 책무(責禍)라 한다. 살인자는 죽음으로 댓가를 치르고 작은 도적은 거의 없다. 도보전(歩戰)에 능숙하여 창()을 만드는데 길이가 3(1장은 얼추 3.3미터)이다. 더러는 몇 사람이 함께 이를 지닌다. 낙랑(樂浪)의 단궁(檀弓)이 이 지역에서 나왔다. 또한 무늬진 표범이 많이 나고 과하마(果下馬)가 있다. 높이는 3 ()이다. 이 말을 타면 과수(果樹) 아래를 지날 수 있다.그 바다에서 반어피(班魚皮)가 난다.

() 환제(桓帝) 때 늘 이 가죽을 바쳤다. () 제왕(齊王) 정시(正始) 6(245) 낙랑 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 대방 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이 단단대령 동쪽의 예()가 구려(句麗)에 복속하였다는 빌미로 군대를 일으켜 이들을 쳤다. 불내(不耐)의 예후(濊侯)들이 자기들이 거느리는 읍락을 가지고서 항복하였다. 2년 뒤에 궐에 나아와 조공(朝貢)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앉혔다. 사는 곳은 민간에서 섞여 살았다. 사계절(四時)마다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두 군()에 나아와 조알(朝謁)하였고 군사적인 부림과 거두는 세금은 중화(中華) 사람과 똑같이 하였다.

생구(生口) : 노예나 포로, 가축을 말한다고 한다.

通志 卷一百九十四  

  濊北與髙句䴡力之反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䴡本皆朝鮮之地也漢武帝元朔五年濊君南閭等畔朝鮮王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内屬武帝以其地為蒼海郡數年乃罷元封三年漢滅朝鮮分置樂浪臨屯元菟真番四郡昭帝始元五年罷臨屯真番以并樂浪元菟元菟復徙居句䴡自單單大領已東沃沮濊貃悉属樂浪後以境土廣逺復分領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後漢建武六年省都尉官悉封其渠帥為縣侯皆嵗時朝賀無大君長自漢以来其官有侯邑君三老統主下户其耆舊自謂與髙䴡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其人性愚慤少嗜欲不請匄男女皆衣曲領男子繫銀花廣數寸以為飾不以珠玉為寳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分不得妄相干渉同姓不婚多所忌諱疾病死亡即棄舊宅更作新居知種麻飬蠶作綿布曉𠉀星宿豫知年嵗豐約常用十月祭天晝夜飲酒歌舞名之為舞天又祠虎以為神其邑落有侵犯者輙相罰責生口牛馬名之為責禍殺人者償死少冦盗能歩戰作矛長三丈或數人共持之樂浪檀弓出其地又多文豹有果下馬髙三尺乘之可行果樹下其海出班魚皮漢桓帝時常獻之魏齊王正始六年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属句䴡興師伐之不耐濊侯等舉邑降後二年詣闕朝貢詔更拜不耐濊王居處雜在民間四時詔()樂浪帶方二郡朝謁有軍征賦調如中華人焉

 

10. 동북여지석략(東北輿地釋略) 3

대요수(大遼水) 소요수(少遼水), 마자수(馬訾水)

당서(唐書) 동이전(東夷傳)고구려(高麗)는 본디 부여(扶餘)의 별종이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신라에 막혀있고 남쪽으로도 역시 바다를 건너면 백제에 막혀있다. 서북쪽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닿아있고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이다. 그 임금은 평양성(平壤城) 사는데 역시 장안성(長安城)이라 하며 한()나라 때 낙랑군(樂浪郡)이다. 산이 굽어 감긴 대로 이를 따라서 바깥 성곽을 만들었다. 남쪽으로는 패수(浿水)가 가를 두르고 있어 왕이 그 왼쪽에다 궁성을 쌓았다. 또 제2의 수도(別都)로 불리는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 있다. 그 나라에 강물은 대료(大遼 : 대요수)와 소료(少遼 : 소요수)가 있어 대료(大遼)는 말갈(靺鞨) 서남산(西南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안시성(安巿城)을 지나고 소료(少遼)는 요산(遼山) 서쪽에서 나와 역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양수(梁水)라는 물이 색외(塞外)를 나와 서쪽으로 흘러가다가 소요수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 마자수(馬訾水)가 있어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오리() 대가리와 같아서 압록수(鴨淥水)라 이름 붙였다. 이 강물이 국내성(國內城) 서쪽을 지나 염난수(鹽難水)와 더불어 하나가 되고 다시 서남쪽으로 안시(安巿)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평양(平壤)은 압록(鴨淥) 동남에 있어 큰 배(巨艫)로써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그러니 이 강물을 기대어서 해자()로 삼았다.

나 방창(方昶)이 살피건대 이 당서 동이전()에서 풀어낸 고구려국(高麗國)의 경계는 내용이 매우 잘 갖추어져 있다. ()나라 초기를 맞아 한 사군(漢四郡)의 땅은 모두 고구려(高麗)가 소유하였다. 영주(營州)와 접한 땅은 요수(遼水)를 경계로 삼았을 뿐이다. 이른바 마자(馬訾)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니 바로 장백(長白)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이 되는 증거이다. () 나라 때에 개마(蓋馬)는 구려(句麗)에 속하였는데 당()나라 시기에 이르면 말갈(靺鞨)에 속하니 이는 말갈(靺鞨) 역시 땅을 개척하여 남쪽으로 번져 옥저(沃沮)를 아우르고 이 땅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마자수(馬訾水)는 염난수(鹽難水)와 하나가 되어 서남으로 흐르다 한() 안평현(安平縣) 동쪽 지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안평현(安平縣)은 안동현(安東縣) 서북에 있다. 당서(唐書)에서 말하기를 안시(安巿)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시(巿) 자는 결국 ()’ 자의 잘못이다. 안시(安巿)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대요수(大遼), 소요수(少遼)와 여러 물줄기이니 마자수(馬訾水)와는 동서로 거리가 3, 4백 리이며 가운데에 대령(大嶺)으로 막혀있어 마자수가 서쪽으로 안시(安巿)에 도달할 길이 없는 것이다.

대요수(大遼水)에 상원(上源)은 곧 황수(潢水)이니 지금 파림기(巴林旗) 땅에 있고 지금은 서라목륜하(西喇木倫河)라고 이름하고 있다. ()나라 시기에 땅이 거란(契丹)에 속하였다. 이 전()에서 대요(大遼)는 말갈(靺鞨) 서남산(西南山)에서 나온다.” 하였는데 역시 대략적으로 언급하여 그 지리에 대해 아직 그 상세하고 확실하지 못하다.

소요수(少遼水)는 요산(遼山) 서쪽에서 나온다고 함은 바로 지금 영액(英額)에서 발원한 혼하(渾河)이다. 한지(漢志)소요수(小遼水)는 요산(遼山)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바로 요산(遼山)으로 오늘날의 선령(線嶺)이다. 지금에 동요하(東遼河)는 소요수(少遼水)의 북쪽에 있고 수원은 대양하등산(岱揚阿登山, 지금 길림 매하구시 서남쪽에 반색성(胖色城) 일대)의 북쪽에서 나오는데 그 원류를 혁이소하(赫爾蘇河)’라 이름하니 이 강물이 아니다. 이른바 소료(少遼)가 양수(梁水)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양수(梁水)가 바로 지금에 태자하(太子河)이고 요양주(遼陽州) 서쪽에 이르러 혼하(渾河)와 함께 만나는 것이다. 반고(班固)대량수(大梁水)가 서남으로 요양(遼陽)에 이르러 요()에 들어간다.” 함이 곧 이것이다.

서라목륜하(西喇木倫河) :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서랍목륜하(西拉沐倫河)라고도 한다. 역사적으로 요락수(饒樂水), 황수(潢水), 토호진수(吐護真水), 요수(遼水), 대요수(大潦水), 거류하(巨流河)라고도 기록되었다. 서라목륜하는 몽고어로 누런빛 냇물(黃色之河)”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일어난 홍산문화(紅山文化)는 황화 문명보다 앞서 사학자들은 이 강을 할머니의 강(祖母河)”라고 한다. 발원은 적봉시(赤峰市) 극십극등기(克什克腾旗, 커스커텅기) 홍산(紅山) 북쪽 산기슭이라 한다.

 

개마산성(蓋馬大山) 단단대령(單單大嶺)

왕매촌(汪梅邨 : 사택(士鐸), 1802~ 1889년 생존)의 한서석지략(漢書釋地略)에서 현토군(元菟郡) 고구려(高句麗)는 곧 지금에 철령(鐵嶺)이다.” 하고 다시 낙랑(樂浪) 및 여러 현()은 고증자료가 없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근거로 말하자면 건무(建武) 때 영동(嶺東 단단대령 동쪽) 7()을 포기하고 낙랑(樂浪), 현토(元菟) 두 군()을 관리하였으니 개마대산(蓋馬大山)을 경계로 하였다. 아마도 지금에 장백산(長白山)이다. 그 서남은 단단대령(單單大嶺)을 경계로 하니 아마도 지금에 동가강(佟家江) 일대로 산 동남쪽은 낙랑(樂浪)이 되고 서북쪽은 현토(元菟)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나 방창(方昶)이 살펴보건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함은 지금에 장백산(長白山)이 맞고,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 함은 동가강(佟家江) 일대의 산이 아니다. 삼국지(三國志)에 고구려(高句麗)는 요동(遼東) 동쪽 1천 리에 있다. 남쪽으로 조선, 예맥(濊貊), 동쪽으로 옥저(沃沮)와 북쪽으로 부여(扶餘)와 더불어 이웃하며 환도(丸都) 아래에 도읍하고 있다. 사방 2천 리는 되며 큰 산과 깊은 골이 많다. 살펴보면 환도(丸都)는 바로 고구려의 신국(新國)이며 그 구국(舊國)은 흥경(興京) 일대에 있고 철령(鐵嶺)이 북쪽에 있으니 곧 그에 속한 땅이다. 그 동남에 지금에 이이합아범산(伊爾哈雅範山), 비득리산(棐得里山)과 접하여 산등성이와 봉우리가 면면이 뻗어 나가서 장백(長白)에서 마감하니 바로 이른바 큰 산과 깊은 골이 많다는 것이다.

철령(鐵嶺) 북쪽 땅은 부여(扶餘)와 닿아있으니 지금에 개원(開原) 이북 과이심(科爾沁)의 여러 기(諸旗) 땅으로 이른바 부여(扶餘)의 땅이 동이(東夷) 겨레 중에서 가장 펀펀하니 시원하게 뻗어있다 함이 이것이다.

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토군 서개마(西蓋馬) 설명에서 마자수(馬訾水)가 서쪽으로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가 서남쪽으로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 하니 마자(馬訾)는 바로 압록강(鴨淥江)이요 염난수(鹽難水)는 바로 동가강(佟家江)이다. 그렇다면 개마대산(蓋馬大山)은 곧 장백산(長白山)임에 확실히 의심이 없다.

삼국지(三國志)에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麗)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으니 큰 바다를 가에 두고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한무(漢武) 원봉(元封) 2(기원전 109) 조선을 치고 그 땅을 나누어 사군(四郡)을 만들었다. 옥저(沃沮)를 현토군(元菟郡)으로 만들었다. 뒤에 이맥(夷貊)에 침입을 당하여 군()을 고구려 서북쪽에다 옮겼다. 지금 이른바 현토고부(元菟故府)이다. 살펴보면 고부(故府)는 옥저성(沃沮城)을 말하는 것이다.

옥저(沃沮)는 도로 낙랑(樂浪)에 소속되었으니 한()나라가 그 땅이 넓고 그들 땅에서 멀다는 이유로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쪽을 나누어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불내성(不耐城)에 치소를 두어 다스리게 하니 따로 단단대령 동쪽에 7()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때 옥저(沃沮) 역시 함께 현()이 되었다.

또 예전(濊傳)에서 단단대산령(單單大山嶺)에서 서쪽을 낙랑(樂浪)에 붙였고 령() 동쪽 7()은 도위(都尉)가 이들을 주관하게 하니 모두 예()가 백성이 되었다. 뒤에 도위(都尉)를 줄이고 그 지역에 우두머리(渠帥)를 봉하여 후()로 삼았다.” 하였다. 사전(史傳)에서 지도(輿圖)로써 고증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서에 나온 글(史文)은 마땅히 삼국지(三國志)를 근거로 하였다. 후한서(後漢書)는 바로 위지(魏志)에 뿌리를 두고 지세(地勢)를 서술하였지만, 위지(魏志)만 못함이 매우 심하다. 위지(魏志)는 진()나라 때 만들어져 그 시대가 지금과 비교적 가깝고 내용의 사실 역시 비교적 철저하다. 전한(前漢)의 현토군(元菟郡)이 본디 장백산(長白山) 동쪽에 있고 낙랑군(樂浪郡)은 장백산(長白山) 남쪽에 있음을 알게 되니 곧 평양(平壤) 땅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현토(元菟)는 지금 해성(海城), 개평(蓋平), 복주(復州)가 되니 언제 치소(治所)를 옮겨 설치되었는지 싹 다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해성(海城), (), () 등 소속된 땅(屬地)을 가리켜서 현토(元菟)라고 할 뿐이니 내용이 듬성듬성하여 분명하지 못하다.

후한(後漢) 소제(昭帝)가 현토(元菟)를 고구려 서북 땅에다 옮겼으니 지금 철령현(鐵嶺縣) 지경에 있었다. 낙랑(樂浪)과 사이에 개마대산(蓋馬大山)으로 막혔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한 령()이 길게 뻗어 가지를 갈라서 네 군데로 나오는데 지금 압록강(鴨淥江) 동쪽에 산들이 모두 그 가지 친 산기슭이다. 이 가지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곧장 조선의 땅으로 달려간다.

후한서(後漢書) 동옥저전(東沃沮傳)에 동옥저(東沃沮)는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라고 하고 그 주()개마(蓋馬)는 현() 이름이니 그 산은 지금에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곧 왕검(王險)이다.” 하였다. 살펴보면 전()에서 말한 옥저(沃沮)는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라는 것은 그 북쪽에 산등성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에서 말한 개마대산이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라는 것은 그 남쪽으로 나온 가지 친 산기슭을 말한 것이다.

단단대령(單單大嶺)은 개마(蓋馬)의 동남쪽에 있고 그 산맥은 바로 개마(蓋馬)를 말미암아 갈라져 남쪽으로 나와 조선 땅으로 달려간 것이니 이는 줄기 산등성이(榦脊)이다. 다시 남쪽으로삼한(三韓)에 도달하는 것이 모두 이 봉우리이다. 삼국지(三國志)에 단단대령(單單大嶺) 서쪽을 낙랑(樂浪)에 소속시켰고 그 령() 동쪽에 7()을 도위(都尉)가 주관하게 하였다 하니 이 말이 무엇보다 확실하다. 왕씨(汪氏)단단대령(單單大嶺)이 동가강(佟家江) 일대의 산으로 현토와 낙랑군()이 나누어진 경계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그의 오류가 유독 심하다.

東北輿地釋略/3   

大遼水 少遼水 馬訾水

  唐書東夷傳高麗本扶餘別種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隨山屈繚為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水有大遼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歷安巿城少遼出遼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與之合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歷國內城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巿入於海而平壤在鴨淥東南以巨艫濟人因恃以為塹方昶按此傳敘述高麗國境甚悉當唐之初漢四郡地皆為高麗所有與營州接壤以遼水為界而已所謂馬訾出靺鞨白山即長白為蓋馬大山之證漢時蓋馬屬句麗至唐則屬靺鞨是靺鞨亦拓地而南並沃沮而有之矣馬訾水與鹽難水合而西南流至漢安平縣東境入海漢安平縣在今安東縣西北唐書云至安巿入海巿字乃平字之誤至安巿入海者為大遼少遼諸水與馬訾水東西相距三四百里中隔大嶺無由西達安巿也大遼水上源即潢水在今巴林旗今名西喇木倫河唐時地屬契丹此傳云大遼出靺鞨西南山亦約略言之未為詳確少遼出遼山西者即今發源英額之渾河漢志小遼水出遼山即此遼山即今之線嶺也今之東遼河則在少遼之北源出岱揚阿登山之北其源名赫爾蘇河非此水也所謂少遼與梁水合者梁水即今太子河至遼陽州西與渾河會班固云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者即此

 

蓋馬大山 單單大嶺

  汪梅邨 士鐸漢書釋地略元菟郡高句麗即今鐵嶺又云樂浪諸縣無考參以後漢書東夷傳言建武棄嶺東七縣知樂浪元菟二郡以蓋馬大山為界疑即今長白山也其西南以單單大嶺為界疑即今佟家江一帶山東南為樂浪西北為元菟也方昶按謂蓋馬大山即今長白山是也謂單單大嶺為佟家江一帶之山非也三國志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扶餘接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多大山深谷按丸都乃其新國其舊國在興京一帶鐵嶺在北乃其屬地其東南接今伊爾哈雅範山棐得里山岡嶺緜亙以訖於長白即所謂多大山深谷也鐵嶺之北地接扶餘即今開原以北科爾沁諸旗地所謂扶餘於東夷最為平敞是也前漢書地理志西蓋馬馬訾水西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馬訾即鴨淥江鹽難水即佟家江則蓋馬大山即長白山確然無疑三國志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濱大海而居漢武元封二年伐朝鮮分其地為四郡以沃沮為元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高句麗西北今所謂元菟故府也 按故府謂沃沮城也沃沮還屬樂浪漢以土地廣遠在單單大嶺之東分治東部都尉治不耐城別主嶺東七縣時沃沮亦皆為縣又濊傳云自單單大山嶺以西屬樂浪自嶺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為民後省都尉封其渠帥為侯詳稽史傳證以輿圖 史文當以三國志為據後漢書即本於魏志而敘述地勢不如魏志遠甚魏志成於晉世代較近事實亦較覈則知前漢元菟郡本在長白山之東樂浪郡在長白山之南即平壤地也 滿洲源流考謂元菟為今海城蓋平復州並不詳其先後徙治所在但指海城蓋復屬地以為元菟疏漏不明後漢昭帝徙元菟於高句麗西北在今鐵嶺縣境與樂浪中隔蓋馬大山矣蓋馬大山一嶺緜延分枝四出今鴨淥江東之山皆其支麓自北而南直走朝鮮之境後漢書東沃沮傳東沃沮在蓋馬大山之東注蓋馬縣名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也按傳云沃沮在蓋馬大山東者指其北面山脊言之注言山在平壤城西者指其南出之支麓言之單單大嶺在蓋馬之東南其山脈即由蓋馬分出南走朝鮮此為榦脊又南達於三韓者皆此嶺也三國志單單大嶺以西屬樂浪自嶺以東七縣都尉主之最為分曉汪氏疑單單大嶺為佟家江一帶之山為二郡分界其誤殊甚矣

 

11. 수도제강(水道提綱) 2 :

동가강(佟家江)은 바로 옛 염난수(古鹽難水)이다. 이이합아범산(伊爾哈雅範山) 남쪽에서 발원하는데 세 군데에서 나온 수원이 합쳐져 서남으로 흘러가며 다른 여러 물줄기를 모은다.

장백산(長白山)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수백 리를 끌고 이어가다 自東而西牽連數百里다시 서북에서 비덕리산(費徳里山)이 되며 다시 백여 리에서 이이합아범산(伊爾哈雅範山)이 되니 높이 솟은 준령이 구름을 찌른다. 수원은 (남쪽의) 서쪽 산기슭에서 나온다.

水道提綱 (四庫全書本)/02 佟家江即古鹽難水源出伊爾哈雅範山之南三源合而西南流滙諸水長白山自東而西牽連數百里又西北為費徳里山又百餘里為伊爾哈雅範山髙峻干雲源出西麓

비득리산(棐得里山)은 찾지 못하였고 비득리산(斐得里山)이라는 이름이 있다. 아마도 하나의 산이 아닐까 한다.

수도제강(水道提綱) : 비득리산(斐得里山)은 바로 서쪽 줄기이니 서쪽으로 간 큰 산이다. 동쪽으로 장백산 정상과의 거리가 260리이다.

水道提綱 (四庫全書本)/25 斐得里山即西幹西行之大山東去長白頂二百六十里

 

12. 문헌통고(文獻通考) 325 :

평양성(平壤城) 동북에 노양산(魯陽山)이 있고 노성(魯城)은 그 위에 있으며 평양성 서남 20리에 위산(葦山)이 있고 남쪽으로 패수(浿水)를 바라보고 있다. 그 땅에 대요수(大遼水)의 수원은 말갈국(靺鞨國) 서남산(西南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다 안시(安市)에 이른다. 소요수는(小遼水)의 수원은 요산(遼山)에서 나와 서남으로 흐르다 대량수(大梁水)와 하나가 된다. 대량수(大梁水)는 고구려 서쪽에 있으니 그 물줄기는 변방 밖(塞外)에서 나와 서남으로 흐르다 소요수(小遼水)로 들어간다.

마자수(馬訾水)는 일명 압록수(鴨渌水)라 하는데 수원(水源)은 동북에 말갈(靺鞨) 백산(白山)에서 나온다. 물빛이 오리 대가리(鴨頭)와 비슷하여서 민간에서 이렇게 이름하였다. 마자수는 요동(遼東)과 거리가 5백 리이고 국내성(國内城) 남쪽을 지나다 다시 서쪽에서 한 물줄기와 하나가 되니 바로 염란수(鹽難水)이다. 그리고 두 물줄기와 하나가 되어 흐르다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髙麗) 땅 안에서 이 물이 가장 크다. 물결이 더할 나위 없이 맑고 꽹하며 이 물이 지나는 모든 나루마다 큰 배를 실으니 고구려가 이 강물에 기대어 산다. 천연의 해자 노릇을 하는 물(天塹水)이 된다. 크나큰 넓이 3백 보()가 평양성(平壤城) 서북쪽 480, 요수(遼水) 동남쪽 48십 리에 있다.

() 낙랑(樂浪), 현토군(元莵郡)의 땅은 후한(後漢) 때부터 위()나라에 이르러 공손씨(公孫氏)에게 장악되었다가 공손연()이 멸망하고 서진(西晉) 영가(永嘉, 307~ 311) 이후에 고구려(髙麗)의 손에 다시 들어갔다. 그 불내(不耐), 둔유(屯有), 대방(帶方), 안시(安市), 평곽(平郭, 지금 요녕 개주시 부근), 안평(安平) 거룡(居龍), 문성(文城) 모두 한()의 낙랑, 현토 두 군()의 여러 현()이니 그렇다면 조선(朝鮮)과 예맥(濊貊)과 옥저(沃沮)의 땅이다.

文獻通考卷三百二十五 髙句麗

平壤城東北有魯陽山魯城在其上西南二十里有葦山南臨浿水其大遼水源出靺鞨國西南山南流至安市小遼水源出遼山西南流與大梁水合大梁水在國西出塞外西南流注小遼水馬訾水一名鴨渌水水源出東北靺鞨白山水色似鴨頭故俗名之去遼東五百里經國内城南又西與一水合即鹽難水也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髙麗之中此水最大波瀾清澈所經津濟皆貯大船其國恃此以為天塹水闊三百歩在平壤城西北四百八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漢樂浪元莵郡之地自後漢至魏為公孫氏所據至淵滅西晉永嘉以後𣸪()陥入髙麗其不耐屯有帶方安市平郭安平居龍文城皆漢二郡諸縣則朝鮮濊貊沃沮之地

 

13.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38

불이성(不而城, 곧 불내성) 함흥부(咸興府) 북쪽에 있다. ()나라 때 현()인 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어 동부도위(東部都尉)가 이곳을 다스렸었다가 후한(後漢) 때 폐지하였다. () 정시(正始, 삼국 위() 왕 조방(曹芳)의 연호, 240~ 249) 중에 유주자사(幽州刺史) 모구검(母丘儉)이 고구려를 칠 때 환도(丸都)를 도륙을 내고서 그 공을 불내성(不耐城)에 새겼으니 바로 이곳이다. ()와 이()는 서로 통한다. 진수(陳壽)한무(漢武)가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여 단단대령(單單大嶺) 서쪽을 낙랑(樂浪)에 붙였고 그 령() 동쪽 7()을 도위(都尉)가 주관하게 하니 모든 예() 땅이 백성이 되었다. 이른바 불내예(不耐濊)이다.” 하였다.

 

옥저(沃沮)에 둘이 있다. 하나는 동옥저(東沃沮)이니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 역시 남옥저(南沃沮)라고도 한다. 한무(漢武)가 조선을 멸하고 현토군을 열어 설치하였다. 옥저성(沃沮城)에 치소를 두어 다스렸다. 뒤에 현토(玄菟)를 중원 땅 쪽으로 안으로 당겨 옮겨 두고서 옥저(沃沮)를 다시 낙랑(樂浪)에 붙여두었다. 광무(光武) 때 행정구역을 간소화하고 폐지하였는데 그 지역에 우두머리(渠帥)를 가지고서 현후(縣侯)로 삼았다. 그 땅에 우두머리들은 자기가 가진 나라()가 작으니 고구려에 신하로 예속되었고 뒤에 고구려에 합쳐졌다.

한지(漢志)현토군(玄菟郡)에 부조성(夫租城)이 있다.” 하니 대체로 옥저(沃沮)인 듯싶다. () 정시(正始) 8(247) 모구검(母丘儉)이 다시 고구려(高驪)를 쳤을 때 그 왕 위궁(位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고 검()이 현토태수(玄菟太守) 왕기를 보내 추격하게 하였다. 이때 왕기는 옥저 1천여 리를 지나 숙신씨(肅慎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돌을 깎아 자기들 공을 새기고 돌아왔다 함이 이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옥저(北沃沮)이다. 후한(後漢) 동이전(東夷傳)북옥저(北沃沮)는 일명 매구루(買溝婁)라 하니 남옥저(南沃沮)와 거리가 8백여 리로 읍루와 더불어 땅이 닿아있다. 고구려(高麗)가 성()에 이름을 붙여 구루(溝婁)라 한 것이다. () 대업(大業) 8(612) 고구려(高麗)를 칠 때 수나라 명장인 설세웅(薛世雄)을 보내 옥저 길(沃沮道)로 나오게 하였으니 아마도 옛 이름을 가지고서 군대에 명령을 내린 것이리라.

讀史方輿紀要/卷三十八

不而城,〈在咸興府北漢縣屬樂浪郡東部都尉治此後漢廢魏正始中幽州刺史母丘儉擊高句麗屠丸都銘不耐城即此耐而通陳壽曰:「「漢武置樂浪郡自單單大嶺以西屬樂浪自嶺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爲民所謂不耐濊也

 

沃沮有二:「「一曰東沃沮在蓋馬大山之東亦曰南沃沮漢武滅朝鮮開置玄菟郡治沃沮城後玄菟內徙沃沮更屬樂浪光武時廢省就以其渠帥爲縣侯國小臣屬於高句驪後爲所並。《漢志》:「「玄菟郡有夫租城蓋即沃沮矣魏正始八年丘儉復伐高驪其王位宮奔買溝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過沃沮千餘里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而還是也一曰北沃沮。《後漢·東夷傳》:「「北沃沮一名買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與挹婁接高麗名城爲溝婁也隋大業八年伐高麗分遣薛世雄出沃沮道蓋因舊名以命軍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