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숙신(肅愼)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2

by 쥐눈이 2024. 8. 1.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포특합(布特哈)은 원()나라 때는 흑수부(黑水府) 달달로(達達路)에 속하여 동북에 여러 왕의 봉지(封地)가 되었다.

거란(契丹)이 한창이었을 때 나머지 부() 중에 기록될만한 겨레들에는 탑탑이(塔塔爾), 태적오(泰赤烏), 유달달(有達達)이 있다. 여진(女真)이 거란을 이어서 흥성하자 이들은 모두 금나라에 예속되었다. () 태조(太祖) 첩목진(帖木真, 鐵木真, 곧 테무진, 칭기스칸)이 어렸을 적 찰목합(札木合 : 찰답란(札答闌) 부족의 우두머리, ? ~ 1205)와 더불어 알난하(斡難河)에서 얼음을 지치며 놀았으니 바로 악눈하(鄂嫩河)이다. 커서는 탑탑이 부장(塔塔爾部長)이 되어 유목 생활을 하였다. 포어아(捕魚兒)와 활련(闊連) 이 두 해자(海子) 사이에 올아실온(兀兒失溫) 위쪽은 바로 지금에 호륜패이(呼倫貝爾)의 오이순하(烏爾順河)이고 여진(女真)의 달달원로(達達遠路, ()은 군더더기 글자)가 그 동쪽에 있다고 한다.

() 초기에 이르러 동방에 여러 왕에게 땅을 나누어주어 각기 나라를 차지하게 하니 임황(臨潢,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파림좌기(巴林左旗) 임동진(林東鎮) 일대) 동북부터, 태영로(泰寧路), 송화(松花)와 눈강(嫩江) 몇몇 곳이 모두 별리고대(別里古台, 또는 별륵고대(别勒古台), 징키스칸의 배다른 형제, 1167~ 1256년 생존)에게 봉해진 땅으로, 곧 포특합(布特哈)이 그 경내에 있다.

()나라가 몽고(蒙古) 겨레로만 있었을 때, 이곳은 바로 동호(東胡), 흉노(匈奴), 선비(鮮卑), 돌궐(突厥), 회흘(回紇, 위구르 겨레)이 돌아가며 점거한 땅이었고 당()나라 때 몽올실위(蒙兀室韋)가 이 원나라를 만든 몽고족의 기원이 된다.

몽올(蒙兀)의 선조는 일찍이 동호(東胡)에 복종하여 속하였는데 동호(東胡) 겨레가 바로 퉁구스(通古斯)의 전음(轉音)으로, 따라서 인종학자들은 몽올(蒙兀), 실위(室韋)가 함께 동호(東胡) 겨레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나라 때에 이르러 합부륵(合不勒, 칭기스칸의 증조부)께서 부장(部長)이 되어 스스로 대몽고국(大蒙古國)이라 이름하니 몽고(蒙古)는 바로 몽올(蒙兀)의 전음(轉音)이다. 칭기스칸(成吉斯汗) 때에 그의 병력이 참으로 구주(歐州, 유럽)에까지 이르게 되니 태서인(泰西人, 서방국가 사람들)이 이로 인해 몽고(蒙古)를 황종(黃種)의 대표로 삼아 황종(黃種)을 모두 일컬을 때 몽고리아종(蒙古利亞種)”이라 하였다 한다.

元屬黑水府達達路為東北諸王封地

契丹盛時他部可以紀者有塔塔爾泰赤烏有達達女真代興咸隸屬焉元太祖帖木真幼與札木合戲氷斡難河即鄂嫩河長為塔塔爾部長遊牧捕魚兒闊連兩海子間兀兒失溫上即今之呼倫貝爾烏爾順河女真達達遠 衍文路在其東云至於元初封建諸王於東方自臨潢東北泰寧路松花嫩江等處皆別里古台封地則布特哈在其境矣元為蒙古即東胡匈奴鮮卑突厥回紇更迭占據之地唐時有蒙兀室韋為此族之起源蒙兀之先嘗服屬於東胡東胡族即通古斯之轉音故人種學家稱其同出於東胡族至金時合不勒為部長自號大蒙古國即蒙兀之轉音成吉斯汗時兵力真 達歐州泰西人因以蒙古為黃種之代表同稱黃種為蒙古利亞種云

 

*아래에 보충 자료들은 위키백과(維基百科) 중국어로 나온 내용을 번역한 것이고 그곳에 사진들을 내려받았다.

원사비사(元朝秘史) 1: “포어아해자(捕魚兒海子)와 활련해자(闊連海子) 두 해자(海子) 중간에 하천 이름이 올아실온(兀兒失溫)으로 나하(那河)의 변방에 산 탑탑아(塔塔兒 , 원나라 때 몽고 72()의 하나)의 한 종족 사람이다. ” 捕魚兒海子闊連海子, 兩個海子中間的河名兀兒失溫,那河邊住的塔塔兒一種人。〉

남쪽 포어아해자(捕魚兒海子, 지금 패이호(貝爾湖))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활연해자(闊連海子, 지금 호륜호(呼倫湖))로 들어 간다.

 

내몽고자치구 동북부에 호륜패이(呼倫貝爾, 후룬베이얼) 땅에 오이순하(烏爾順河) :

지금 내몽고 신파이호우기(新巴爾虎右旗) 동쪽 신파이호좌기(新巴爾虎左旗) 서쪽에 오이손하(烏爾遜河)이다. 이 강은 흑룡강 상류 액이고납하(額爾古納河) 수계인 호륜호(呼倫湖)의 지류이다. 옛날에 호륜하(呼倫河)라고 하였다. 오이손(烏爾遜)은 몽고어를 음역한 말로 편안히 지내다(安居)’라는 뜻이라 한다. 원나라 때 올아실온하(兀兒失溫河)라 이름한 강은 오이산하(烏爾繖河), 오리순하(烏里順河)로도 쓰는데 역시 지금에 오이손하(烏爾遜河)라고 한다.

* 흑룡강 수역 지도

 

회골(回鶻 ) :

또한 회흘(回紇)이라고도 한다. 원래 위조(韋組)와 오게(烏揭, 오고사(烏古斯) 사람)가 만든 연맹을 말미암았고 부족은 19()으로 나뉘며 회흘어(回紇語)를 공통으로 쓴다. 회흘어는 옛 돌궐어(古突厥語)와 서로 통하여 돌궐자모(突厥字母)를 써서 기록하였다.

구당서(舊唐書) 회흘열전(迴紇列傳)에 회흘(回紇)은 본디 약라갈(藥羅葛), 호돌갈(胡咄葛), 홀라물(啒羅勿), 맥가식흘(貊歌息訖), 아물적(阿勿嘀), 갈살(葛薩), 곡올소(斛嗢素), 약물갈(藥勿葛), 해사물(奚邪勿) 9() 부락 연맹이었고 그 가칸(可汗)은 약라갈씨(藥羅葛氏)에서 나왔다. 뒤에 회흘(回紇)이 발실밀(拔悉密), 갈라록(葛邏祿) 두 부락을 깨부수고 11개 부락을 통일하였다.

 

*회골칸국(回鶻汗國 토구즈-오구즈칸국)742848년까지 존립하였다. 위의 지도는 820년 회골칸국(回鶻汗國)이 가장 성대하였을 때에 강역도이다.

 

 

*발해 때의 주변 겨레들

 

* 회골(回鶻)사람 : 8세기 9세기 사이에 그려진 회골의 왕과 대신 벽화

 

당시 돌궐칸국(突厥汗國)은 고돌궐문(古突厥文) 안에서 회흘인(回紇人)을 부르기를 토구즈 오구즈(Toquz-oghuz)”라고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뜻은 바로 “9() 오고사(烏古斯, 또는 9(九姓) 오호(烏護))”이다. “오고사(烏古斯, oghuz)”는 옛 돌궐어(古突厥語) 안에 마을(部落)”, “연맹(聯盟)”, “()”이라는 뜻이 있다. 어떤 사람은 회흘(回紇)의 겨레 이름이 고돌궐어(古突厥語)에 위구르(Uyghur)라고 인식하니 뜻은 단결(團結)”, “동맹과 보조(同盟輔助)”이다. 회흘칸국의 제 2대 가칸(可汗) 마연철 비(磨延啜碑), “열 회흘(十回紇)과 아홉 오고사(烏古斯, 9())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하나의 해석으로는 회흘(回紇) 겨레 이름 글자 기원은 외구르(oigur)”이니 이는 산림 안의 사람(森林中人)과 열 개 유목씨족(十個游牧氏族)”이라는 뜻이다. (가칸(可汗)은 대칸(大汗), 가한(可寒), 합한(合罕), 흑한(黑汗)으로도 통한다)

 

명칭(名稱)

회골(回鶻)은 또한 원흘(袁紇), 오호(烏護), 오흘(烏紇)이라고도 한다. ()나라 때 또한 위흘(韋紇)이라고 일컬었으며 당()나라 전기에 그 소리를 한자로 바꾸어 회흘(回紇)이라 하였고 원()나라 때는 외올아(畏兀兒)라 하였으며 청()나라에서는 휘화이(輝和爾)로 고쳐 일컬었다. 이런 음역의 변화는 한문 자체의 어음(語音) 변화에 따라 만들어진 글자들이지만, 여러 시대에 걸친 돌궐어(突厥語) 문헌에서는 이 겨레의 이름이 똑같아 변화가 없었다. 오늘날의 維吾爾(유오이, 곧 위구르)”는 이 겨레에 대한 가장 최근의 한자 번역음이다. 회흘(回紇) 사람은 당() 덕종(德宗) 정원(貞元) 4(788)에 그 한자를 회흘(回鶻)”로 고쳐주기를 요구하였으니 송골매(鶻鷹) 같은 용맹이 있음을 상징한 것이다. 인하여 당() 중기 이후에 그들을 회골인(回鶻人)이라 고쳐 일컬었다. 당시 토번인(吐蕃人, 티벳사람)은 회골인(回鶻人)과 이전에 돌궐(突厥), 후기 몽고(蒙古) 등 유목민족에 대해 모두어 일컬어서 곽이(霍爾, Hor)”라 하였다.

 

회골인(回鹘人)은 자기 조상을 일컬어 복고 가칸(卜古可汗, 부구(bügü) 또는 부가칸(不可汗))이라 한다.

돌궐어 부구(bügü)”, “부이(büyi)” 등은 주술(符咒)”, “주술의 말(咒語)”, “마법(魔法)”, “법술(法術)”을 뜻한다 한다. 키르키스탄에 부구 겨레(Bugu Tribe)가 있으니 Bugu는 사슴(deer)을 뜻한다. 이들은 어머니인 사슴(Mother Deer)”을 자신들의 첫 조상이라고 여기어 자기 겨레의 이름으로 삼았다.

 

선조(祖先)

회골전설(回鶻傳說)

회골인(回鶻人)은 자기 조상을 복고가칸(卜古可汗, 부구bügü또는 부가칸(不可汗)으로 번역됨이라 부른다. 저명한 페르시아 사학책 지페니(Zhifeni, 志費尼)세계정복자사(世界征服者史)에서 회골 조상 전설을 자세히 기재하였는데 막북(漠北) 알아한하(斡兒寒河) 가에 와로타팔리(窩魯朵八里, 오르두-발릭 Ordu-Baligh, Ordu-Balik라는 이름에 옛 성()이 있고 성안 궁전 폐허 문 입구의 우물 속에 한 한문으로 된 돌비석이 있다고 하였다. 그 비석에 기록이 다음과 같다.

당시 합랍화림(哈拉和林, 카라코룸 karakorum, Qaraqorum, 몽고제국의 수도)에 두 줄기 강물이 있었으니 하나는 독홀라(禿忽刺, Tughla)라 이름하고 다른 하나는 설령가(薛靈哥)라 이름하였다. 이 두 강물은 합목란술(合木闌朮, Qamlanchu땅으로 모여 들었다. 두 강물 사이에 두 그루의 바싹 붙은 나무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중에 한 그루를 그들은 홀속흑(忽速黑)이라고 불렀으니 그 꼴은 소나무(, nāzh와 같고, 나무 잎사귀는 겨울철 잣나무와 비슷하였으며 열매의 겉모습과 맛은 모두 잣(松仁, chilghuza과 같았다. 다른 한 그루를 그들은 탈사(脫思, toz라 불렀다.

두 나무 중간에 큰 언덕이 튀어나오더니 빛줄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 위로 떨어졌다. 언덕이 날로 더욱 커져만 갔다. 눈으로 이런 기적을 보고 외올아(畏兀兒)에 각 겨레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마음 안에 그득하였다. 이들은 경외하여 더더욱 몸을 땅에 낮추어서 언덕에 다가갔다. 이때 그들은, 그렇듯 부드러워 귀를 묘하게 즐겁게 하는 노래소리를 듣게 되었다. 매일 밤 한 줄기 빛이 그 구릉 서른 걸음 둘레를 비추더니 끝내 잉태한 여인이 아이를 낳기라도 하듯 언덕이 갈라지고 문 한 짝이 열렸다. 그 안에 다섯 칸으로 막사처럼 나누어진 내실이 있었고 방 안에는 각각 한 명씩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 입(, 는 부리처럼 뾰족하다는 뜻)에는 젖을 주기 위한 관 하나가 달려있었다. 천막 위에는 은그물(銀網)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부락 우두머리들은 와서 이 기막힌 광경을 보고서 두려워하며 무릎을 꿇고 상대의 발에 머리가 닿도록 절하며 엎드렸다. 마침 바람이 아이들 몸까지 불어오자 이들은 강건하게 변하더니 걷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들은 석실을 달려 나와 유모에 보살핌을 받게 되었고, 동시에 사람들은 갖가지 숭배 의식을 거행하였다.

남자아이들은 젖을 떼고 말을 할 수가 있게 되자마자 곧바로 자신들의 부모에 대해 물었다. 사람들은 이 두 그루의 나무를 가리켜 그들에게 보였다. 그들은 나무 가까이로 달려가 효자가 부모를 대하는 모습처럼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고 이 두 그루 나무를 키워 살리는 땅에 대해서도 공경과 존경을 표시하였다. 이때 이 두 그루 나무가 갑자기 소리를 내더니, 품성이 고귀한 훌륭한 아이들은 늘 이곳에 와서 거닐며 아들로서 그 도리를 다한다. 그대들이 오래도록 살며 그 이름이 길이길이 남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해당 지역에 각 부락은 부산하게 찾아와서 이 다섯 아이를 만나보고 왕자를 대할 때와 똑같이 그들을 존경하였다. 큰 가문들은 떠날 때 아이들에게 각각 이름 하나씩을 지어주었으니 장자(長子)는 손홀아적근(孫忽兒的斤, Sonqur Tegin이라 불렀고 다음은 화독아적근(火禿兒的斤, Qotur Tegin이라 불렀으며 셋째 아들은 탈극륵적근(脫克勒的斤, Tükel Tegin이라 불렀으며 넷째 아들은 알아적근(斡兒的斤, Or Tegin이라 불렀으며 다섯째 아들은 부가적근(不可的斤, Buqu Tegin이라 불렀다. 이러한 기적을 고려하여, 다섯 아들 중에서 한 사람을 반드시 그들의 수령과 군왕으로 선출해야 한다는 데 큰 가문의 사람들이 동의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기로, 이 다섯 아들은 전능한 진정한 주 알라(真主)께서 선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가칸(不可汗)의 품격과 모습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재주와 지혜가 출중하여 다른 네 아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게다가 이 사람은 각 겨레의 언어와 문자에 훤히 밝음을 발견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이 부가칸을 들어 칸()으로 삼았다. 이에 그들은 한 군데 모여서 성대한 잔치를 열어 그를 칸()의 지위에 옹립하였다.”

 

*와로타팔리(窩魯朵八里, 오르두-발릭 Ordu-Baligh, Ordu-Balik위치 : 그 유적은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서 동북쪽으로 27킬로미터 떨어진, 전항애성(前杭愛省)의 세계문화유산 악이혼하 골(鄂尔浑河谷 오르콘 계곡 Orkhon Valley)”에 있다.

 

회흘은 원래 철륵(鐵勒)의 한 부()였으니 복골(僕骨), 동라(同羅), 발야고(拔野古) ()와 한가지이다. 훗날에 회흘(回紇)이 강대해지자 마침내 철륵(鐵勒)에서 유래한 부족들을 모두어 외회흘(外回鶻)이라 일컬었다. 회흘(回紇, 회골(回鶻))은 유고족(裕固族), 유오이족(維吾爾族), 그리고 회족(回族) 등에게 민족 기원의 뿌리의 하나가 되니 회회(回回)는 바로 회골(回鶻)의 전음(轉音)이다.

7세기 초기에 회흘(回紇)은 당나라의 북방에서 정권을 건립하니 중원의 역사에 대해 매우 깊은 영향을 가졌다. 744년 회흘(回紇) 회인가칸(懷仁可汗, 생존 시기 : ? ~ 747, 회흘의 제 1대 가칸)이 당나라와 연합하여 후돌궐(後突厥)을 쳐 깨뜨리고 북방 초원에 철륵(鐵勒) 여러 부()를 통일하였다.

이 하나의 전설은 또한 몇몇 원대(元代) 한문 문헌에 기록되어 졌으니, 예컨대 우집(虞集)고창왕세훈지비(高昌王世勛之碑), 황진(黃溍)요양등처행중서성좌승상역연진공신도비(遼陽等處行中書省左丞相亦輦真公神道碑)원사(元史파이출아이특적근전(巴而朮阿而忒的斤傳)등에 나온 내용은 세계정복자사(世界征服者史)와 내용이 같지 않아 이 한문 자료에서 말하는 전설 안의 다섯 형제는 나무 혹병(樹癭, 나무의 종양에 관계되어 태어났지 언덕 안에서가 아니다. 한문 문헌에 기재된 내용이 비록 상세함과 간략함이 다르고 서로 차이가 있지만, 모두 나무 혹이 사람을 태어나게 했다고 말하고 있어서 세계정복자사(世界征服者史)와는 다른 나무에서 사람이 탄생설의 판본을 이루고 있다. 예컨대 우집(虞集)고창왕세훈지비(高昌王世勛之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물러나 고창왕세가(高昌王世家)를 살펴 따져보니, 대체로 외올이(畏兀而)의 땅은 화림산(和林山)이 있고 두 강물이 그곳에서 나온다. 하나는 독홀라(禿忽刺/)요 다른 하나는 설령가(薛靈哥)이다. 어느 날 저녁, 두 강물 사이에 있는 나무에 하늘의 빛줄기가 내려 나라 사람들이 나아가서 이를 살펴보았다. 나무에 혹이 생기더니 마치 사람이 임신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로부터 빛이 뻗어 드러난 것이, 아홉 달하고도 열흘이 지나자 나무에 있던 혹이 터졌고 어린아이 다섯이 생겨나 이들을 거두어 길렀다. 그중에 가장 어린 것이 복고가칸(卜古可罕)이다. 이 아이가 장성해서는 그 백성들의 토지를 점유하고 그들의 군장이 될 수 있었다. ”

 

황진(黃溍)요양등처행중서성좌승상역연진공신도비(遼陽等處行中書省左丞相亦輦真公神道碑)에서도 다섯 아이 중에 네 아이가 먼저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의 휘()는 역연진(亦輦真)이니 위오이(偉吾而, 곧 외올아(畏兀兒)) 사람이다. 웃대는 그 나라의 군장이었었다.

그 나라 안에 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하나가 되더니 혹()이 생겼고. 그 혹이 갈라져 다섯 아이가 태어났으니 네 아이는 죽고 다섯째 아이 홀로 살아남았다. 이 아이를 신령스럽고 기이하게 여기어 공경히 섬겼고 인하여 딸을 아내로 주며 나라를 양보하였고 대대로 혼례를 맺고서 그 국정(國政)을 손에 쥐기로 약속하였다. 그 나라 주인은 바로 지금 고창왕(高昌王)이 붙어 나온 뿌리이다.”

 

흠찰(欽察, Kipchak) 전설과의 비교

그러나 돌궐어족군 중에 또 다른 한 그루 나무에서 사람이 태어난신화 이야기가 있다. 이 전설에서 기록한 오고사가칸(烏古斯可汗)에서, 흠찰(欽察) 시조의 출생지 역시 두 줄기의 강물 사이에 나무에서 발견된다. 그의 출생의 정황 풍경이 회골(回鶻) 조상의 전설과 서로 비슷하지만, 다만 같지 않은 점도 있으니, 예컨대 복고가칸(卜古可汗) 전설 중에 나무가 다섯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면, 흠찰(欽察) 전설 안에는 그저 한 아들만 있다. 두 번째로, 예컨대 복고가칸(卜古可汗) 전설에서 나무의 혹(樹癭)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다면, 흠찰(欽察) 전설은 나무의 동굴(樹洞)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다. 이야기의 파란만장함이 정반대이다. 이아칸국(伊兒汗國)의 페르시아문(波斯文)사집(史集)안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오고사(烏古思)亦惕巴刺黑(이티-바시헤이 Yiti-Basihei *亦惕巴刺黑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 원문만 실는다 ) 부락과 전쟁을 벌여 그들에게 깨졌을 때, 그는 두 줄기 강물이 만든 섬으로 물러나 그 안에서 머물렀다. 이때 전사한 한 사나이의 임신한 부인이 한 그루 큰 나무의 빈 굴 속으로 기어서 들어가 아들 하나를 낳았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오고사(烏古思)에게 알렸고 그는 그녀를 매우 가련하게 여겨 곧 말하기를 이 부인이 이미 남편을 잃은 바에야, 이 아들아이는 바로 내 아이이다. 하였다. 그는 이 아이는 확실히 오고사의 아들로 대접받았다. 오고사(烏古思)는 그를 흠찰(欽察)이라고 불렀다. 흠찰이라는 말은 합불흑(合不黑)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합불흑(合不黑)은 돌궐어로 속이 빈 나무(空心樹)라는 뜻이다. 모든 흠찰인(欽察人)은 전부 이 어린 아이로부터 나왔다. ”

 

흠찰(欽察) 전설 중에 합불흑(合不黑)은 페르시아 글의 원문에 قبوق 로 되어있는데 그중에 자음 알파벳 ق의 모음이 아울러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 일반적으로 ‘qabuq’로 읽는데 이 말은 또한 오고사가칸전(烏古斯可汗傳)에서도 볼 수 있다.

다른 날오고사 가칸(烏古斯可汗)이 사냥을 나갔는데 앞에 호수 안에 한 그루 나무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의 굴(قبوق) 안에 한 소녀가 홀로 앉아 있었고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어여쁜 아가씨였다.”

 

돌궐어 qavuq의 뜻은 사람이나 동물 몸에 달린 주머니 모양의 물체를 뜻하며 boγuγ와 뜻이 같은 말이다. qovuq의 뜻은 비다()나무의 동굴(樹洞)이니 qabuq와 뜻이 같은 말이다. qavuq가 윗니와 아랫입술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마찰음(唇齒音) ‘와 입술을 둥글게 모으고 소리 내는(圓唇) 모음 ‘u’의 영향을 받아서 역시나 자주 qovuq와 섞이어 서로 변화를 주고받았으니, 그래서 전설이 구전되며 읊어지는 과정에서 boγuγ/boquq가 소리나 뜻이 가까운 qovuqqabuq와 섞여 사용되며 바뀌는 경우가 가능해진다. 나무의 혹(樹癭)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다는 이야기와 나무의 동굴(樹洞)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다는 이야기로, 전설이 갈라진 것은 아마도 이런 단어의 혼동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몇몇 학자들은 실제는 한 가지 일일 뿐이며 마땅히 이는 같은 종류의 더욱 오래된 전설에서 공통으로 기원하여, 그 뒤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다른 판본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류(源流)

회흘은 원래 철륵(鐵勒)의 한 부()였으니 복골(僕骨), 동라(同羅), 발야고(拔野古) ()와 한가지이다. 훗날에 회흘(回紇)이 강대해지자 마침내 철륵(鐵勒)에서 유래한 부족들을 모두어 외회흘(外回鶻)이라 일컬었다. 회흘(回紇, 회골(回鶻))은 유고족(裕固族), 유오이족(維吾爾族), 그리고 회족(回族) 등에게 민족 기원의 뿌리의 하나가 되니 회회(回回)는 바로 회골(回鶻)의 전음(轉音)이다.

7세기 초기에 회흘(回紇)은 당나라의 북방에서 정권을 건립하니 중원의 역사에 대해 매우 깊은 영향을 가졌다. 744년 회흘(回紇) 회인가칸(懷仁可汗, 생존 시기 : ? ~ 747, 회흘의 제 1대 가칸)이 당나라와 연합하여 후돌궐(後突厥)을 쳐 깨뜨리고 북방 초원에 철륵(鐵勒) 여러 부()를 통일하였다.

 

막북회골칸국(漠北回鶻汗國)

회골칸국(回鶻汗國)은 지금에 몽고 고원에 살던 회골인을 발판으로 삼아서 세운 국가이다. 몽고고원에서 가졌던 돌궐칸국(突厥汗國)의 패권 지위를 대체하였다. 뒤에 예니세이(葉尼塞)의 키르키즈(吉爾吉斯) 사람들에 멸망 당하였다.

 

감주회골칸국(甘州回鶻汗國)

감주회골(甘州回鶻)은 하서주랑(河西走廊)에 살았던 원인으로 하서회골(河西回鶻)로도 알려졌다. 9세기 회골(回鶻)이 분열한 뒤에 하서(河西)로 옮겨 자리잡은 회골 사람이 세운 나라이다. 황소(黃巢)의 난 뒤에 당조(唐朝)는 이름은 남았으나 알맹이는 망하니 그 귀의군(歸義軍)은 감주(甘州), 숙주(肅州)와 그 동쪽 지구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이때 회골(回鶻)이 감주(甘州)에서 아장(牙帳, 곧 수도 서울을 말함)을 세우고 나라의 군주는 스스로 가칸(可汗)이라 일컬었다. 1036, 서하(西夏) 이원호(李元昊)에게 합병되어 과주(瓜州)와 청해(青海) 북부로 옮겨가 또한 황두회흘(黃頭回紇)이라 불렸다. 그들 중 일명 찰한회골(察罕回鶻)이 있으니 바로 백회골(白回鶻)이다. 송사(宋史회골전(回鶻傳)에 기록된 감주회골(甘州回鶻)감주(甘州)에 가칸왕(可汗王)이 있고 서주(西州)에 극한왕(克韓王)이 있으며 신복주(新復州)에 흑한왕(黑韓王)이 있다고 가리키고 있다. 몽고가 서하(西夏)를 멸망한 뒤에 황두회흘(黃頭回紇)이 몽고에 귀의하여 붙었으니 유고족(裕固族)의 선조가 되었다. 진주 회골(秦州回鶻)과 양주 회골(涼州回鶻), 가란산 회골(賀蘭山回鶻), 숙주 회골(肅州回鶻), 과주 회골(瓜州回鶻), 사주 회골(沙州回鶻)로 갈라졌다.

 

고창회골칸국(高昌回鶻汗國)

9세기 중엽, 회골칸국(回鶻汗國)이 붕괴된 뒤에 일부 회골(回鶻) 사람들이 서쪽으로 옮겨 천산(天山) 동부 지구에 이르렀는데 현지의 다른 민족을 일부 동화시켜 고창 지역을 핵심으로 하는 새 정권을 수립하였다. 송대(宋代)에 이를 일컬어 고창회골(高昌回鶻)이라 하였다. 일본 학자는 흔히들 서주회골(西州回鶻)이라고 일컫는다. 중원에 원대(元代) 문헌에는 여러 가지로 번역한 것이 있으니 외올아(畏兀兒), 외오아(畏吾兒), 위올(偉兀), 위오이(偉吾而), 위오(衛吾), 위올(委兀), 외오(外五), 괴고(瑰古), 오욕(烏鵒), 외오아(畏午兒)”들이 그것이다.

 

*1000년 경에 고창회골칸국(高昌回鶻汗國) 영향권

 

객라한국(喀喇汗國)

객라칸(喀喇汗)은 또한 흑칸(黑汗)이라고도 하니 객라칸국(喀喇汗國, Kara Khan)의 역사 문헌 자료는 비교적 미미하고 .. 카라칸국(喀喇汗國)의 기원은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다. ...

 

후예(後裔)

13세기 즈음, 몽고제국이 흥기하자 서쪽으로 옮긴 회골(回鶻) 후예들이 몽고에 의탁하였는데 몽고가 역사서에서 그 소리를 한자로 바꾼 것에 근거하자면 그들은 외올아(畏兀兒)로 불려졌다.

회골의 후예로는 유고족(裕固族), 유오이족(維吾爾族)이 있다.

 

 

유고족(裕固族) :

유고족(裕固族, 유구르(Yugurs))은 돌궐어 민족의 하나이다. 선조는 회흘인(回鶻人)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중부와 기련산(祁連山) 북쪽에 살며 주요하게는 감숙성(甘肅省) 숙남유고족자치현(肅南裕固族自治縣)과 주천시(酒泉市) 숙주구(肅州區) 황니보유고족향(黃泥堡裕固族鄉)에 집중되어 있다. 대대로 목축을 주업으로 삼았다.

 

유고족(裕固族) 10부락 중에 아랍격가(亞拉格家)는 당사(唐史)에 실린 회골왕족(回鶻王族) “약라갈씨(藥羅葛氏, 또는 야락흘씨(夜落纥氏), 유고어(裕固語)yaglak의 후대 (유고족(裕固族) 중에 양성(楊姓)은 그들로부터 기원한다)이다. 유고족(裕固族)은 스스로 요호이(堯乎爾)”, “서라옥고이(西喇玉固爾)”라고 일컫는데 역사상 황두회골(黃頭回鶻)”, “살리외올아(撒里畏兀兒)” 등으로 불리었다.

혼인은 비교적 자유로워 여자가 시집을 갈 수도 있고 사위를 들일 수도 있다. 결혼이 결정되면 나마(喇嘛) 승려에게 점복을 청하여 좋은 날을 택하여 혼례를 올린다.

유고족(裕固族)은 악이혼하(鄂爾渾河, 오르홍 강(Orkhon River)) 유역에서 기원하였으니 기원전 3세기에 정령(丁零), 4세기에 철륵(鐵勒), 원흘(袁紇, 그 후예는 회흘(回紇)이 된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840년 회흘국(紇亡国)이 망한 뒤 감주(甘州) 회흘(回鶻)의 한 갈래인 황두회흘(黃頭回紇)이 옮겨 지금에 감숙(甘肃) 하서주랑(河西走廊)의 돈황, 감주(甘州, 지금 장액(张掖), 양주(凉州, 지금무위(武威)그리고 기련산(祁連山)과 액제납하(额济纳河) 일대로 가서 살았다. 이들을 역사에서는 하서회흘(河西回鶻)이라 일컫는다.

851년 사주(沙州, 지금 감숙 돈황) 사람 장의조(張議潮)가 토번(吐蕃)이 무너진 틈을 타 하서 토번(河西吐蕃) 수장(守將)을 몰아내고 과(), (), (), (), () 11()의 땅을 차지하고서 당나라에 귀의해 붙으니, 하서 회골(河西回鹘)이 마침내 장의조(張議潮)에게 붙어 기대었다. 뒤에 하서회골(河西回鶻)이 감주(甘州)를 공격하여 점유하였는데 그래서 또한 감주회골(甘州回鶻)이라 불리게 되었다.

10세기에 이르러 난주(蘭州), 하주(河州)를 한층 더 제어하였다.

11세기 중엽, 서하(西夏)가 감주(甘州)를 공격해 깨뜨리고 이때부터 하서 회골(河西回鶻)은 서하(西夏)에 종속된 나라(附庸)가 되어 각 부락(部落)이 지금에 감숙성 자위관(嘉峪關) 밖 방목초지로 옮겨가니 몽고(蒙古)의 대장군 속부대(速不台, 수부타이 Sübe'etei, 살다간 시기 : 11761248, 몽고 제국 개국공신)가 서쪽을 정벌할 때 이들을 정벌하였다.

()나라 때는 그들은 홀필열(忽必烈, 쿠빌라이 칸)이 보낸 종정(宗王)의 통치를 받았고 명()나라 때는 선곡(曲先), 알단(斡端, 오텐), 안정(安定), 한동(罕東) 사위(四衛)가 설치되었다. 명나라 때 그들은 차례로 새덕(賽德)과 아륵탄칸(阿勒坦汗)의 공격을 받아 깨지자 명나라 조정은 마침내 관외(關外, 문맥상 자위관(嘉峪關)인 듯)에 여러 위(諸衛)를 옮겨 관내(關內)로 들여 안정되게 두었다. 유고족(裕固族)은 이때에도 동쪽으로 옮겨 관()에 들어와 숙주(肅州) 부근과 감주(甘州) 남산(南山) 지구에 주저앉더니 뒷날에 서번(西番)에게 농락 당하며 속박되기도 하였다. 종왕(宗王)은 원나라와 이후 몽골 각부의 수령 봉호 중 하나로 친왕(親王)의 작위와 유사하다.

 

역사상 유고족(裕固族)은 각종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라에서는 살리외올이(撒里畏兀爾)”라 불렀고 명나라는 살리유오이(撒里維吾爾)”라 불렀다. ()나라는 석라위고이(錫喇偉古爾)” 또는 서라고아황번(西喇古兒黃番)라고 불렀고 유고종(裕固族) 중에 쓰던 말을 바꾸어 몽고어(蒙古語)로 말한 사람들은 황황번(黃黃番)이고 그대로 회골어(回鶻語)를 말한 사람은 흑황번(黑黃番)이다대두목(大頭目)을 봉하여 7족 황번총관(七族黃番總管)으로 삼았고 거주하는 구역 하나를 나누어 셋으로 만들고 각 부락마다 정, 부두목(正副頭目)을 두었다. 두목(頭目) 아래에 대권두(大圈頭)를 두었고 그 아래에는 보조 한 사람을 두었다.

 

장례

천장(天葬)은 유고족(裕固族)의 장례 풍습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 집에서 하루를 머물게 하고 스님이 불경을 외며 죽은 자를 구원하기를 기다린다. 다음 날에 바로 천장(天葬) 장소로 옮긴다. 천장(天葬)을 할 때 죽은 자의 몸에서 겉옷을 벗겨내고 시신을 큰 돌 위에 놓아 두거나 돌 세 덩어리 위에다 기대어 둔다. 그리고 라마(喇嘛) 승려에게 염불을 청한 뒤에 친족은 그 자리를 떠나니 날짐승과 들짐승이 먹게끔 피하는 것이다. 천장(天葬) 3일 뒤에 친족이 다시 와서 찬찬히 살펴보아 만약 시신에 살이 깨끗이 없어졌으면 죽은 사람이 이미 승천(升天)”을 했다고 인식하고 즉시 무덤을 쌓고 가족들은 항렬대로 차례를 지어 줄을 이룬다. 만약 살이 깨끗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여전히 라마(喇嘛)에게 염불을 다시 청하여 죽은 자가 구원되게 해야 한다. 죽은 사람을 보낸 첫 번째 7(頭七)”에서 칠칠(七七)”까지, 더 나아가 1주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라마(喇嘛) 승려 세 사람 이상을 청하여 불경을 외며 죽은 자가 구원되기를 기도한다. 죽은 사람의 친족은 49일 안에는 남자는 머리를 자르지 않고 여자는 머리를 빗지 않아서 애달픈 슬픔을 보여 준다.

 

복식(服饰)

명절과 즐거운 일이 있는 날에 전통 옷을 입는데 그 옷차림에는 예복과 일상복이 있다. 과거에 유고족(裕固族)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땋는 풍습이 있었고 아울러 명주실로 두른 머리끄덩이의 땋은 머리를 틀어 올려 머리 위에 두었다. 유고족(裕固族) 부녀자들의 머리 장식은 매우 특색이 있다. 여인들은 머리에 나팔 모양에, 꼭대기에 붉은 술이 달려 늘어진 모자나 수염풀로 짠 모자를 쓴다. 이야기에 따르면 이 모자는 그들의 역사에 있었던 적에게 살해당한 영웅적인 한 여인의 희생을 기리는 것이고 모자 꼭대기에 붉은 술들은 여인의 머리에 흐르던 또렷한 피를 상징한다고 한다.

결혼한 여인들은 긴 모양의 머리 장식품(头面)을 하는데 먼저 머리카락을 빗어 왼쪽, 오른쪽, 가운데(뒤쪽)로 세 갈래로 나누어 땋고서 은붙이, 산호, 마노, 빛깔 나는 구슬, 조개껍질 등 꾸미개를 끼운 세 가닥에 머리 장식품을 가지고서 가슴 좌우와 등 뒤로 늘어진 세 갈래 땋은 머리에다 달아맨다. 머리 장식품 각각 가닥마다 또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금붙이 고리로 이어 놓아 상단은 귀걸이와 높이가 똑같고 하단은 사람 키에 따라 그 높낮이를 조절하게 되어있다.

 

*1944년에 촬영한 한 유고족( 裕固族 )  가족 사진

 

유오이족(維吾爾族) :

유오이족(維吾爾族)은 지금 중국 신강(신장) 지역에 사는 겨레로 오랜 시간에 걸친 이주와 민족 간에 융합으로 형성된 겨레이다. 그 이름은 고대 회골(古代回鶻)에서 유래한다. 옛날에 유인(維人), 아니면 외올아(畏兀兒)로 일컬어졌다. 이들은 유라시아 내륙에 사는 돌궐어를 쓰는 겨레이다. 돌궐어족(突厥語族)에 속하는 유오이어(維吾爾語)와 페르시아, 아랍 자모(字母)에 기초한 유오이(維吾爾) 옛 문자(老文字)가 주로 쓰인다.

유오이(維吾爾)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타림분지(塔里木盆地), 타클라마칸 사막(塔克拉瑪干沙漠) 안에 일련의 오아시스에 살았다. 이 오아시스는 역사상으로 독립 국가를 만들어 존재하였거나, 아니면 허다한 문명(文明)의 굴레에 옥죄어서 중원(中原)에 왕조들, 몽고인, 서장인(西藏人)과 각종 돌궐인이 세운 정치 체제에 포함되었었다.

 

*타클라마칸 사막(塔克拉瑪干沙漠) 지도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에 그려진 청()나라 때 유오이(維吾爾) 사람() 건륭(乾隆) 34, 1769

 

 

*신강지역 오십(烏什), 고고(庫車), 아극소(阿克蘇) 성(城) 등에 유오이 겨레 그림

 

*감숙지역 안서청(安西廳) 합밀(哈密) 지역 유오이 겨레 그림

 

*신강 청해지역 이리탑륵기(伊犂塔勒奇), 찰한오소(察罕烏蘇) 지역 유오이 겨레 그림

 

 

복고부(僕固部) :

복고부(僕固部)는 복골부(僕骨部)로도 쓴다. 고대 부락국가(部落國家)로 원시 돌궐족(原始突厥族)에서 나왔다. 원래 서돌궐(西突厥)과 설연타(薛延陀)에 붙어 소속되었다가 뒤에 당나라에 귀의했다. 이는 9성 철륵(九姓鐵勒)의 하나이다. 그 수령의 직함은 사근(俟斤, 또는 사리발(俟利發)이다.

 

 

원시돌궐족(原始突厥族) :

원시돌궐족(原始突厥族)은 원시돌궐어(原始突厥語)를 사용하는 무리이다. 이는 돌궐어 민족의 공동 선조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기원은 아시아 동북방으로 몽고고원(蒙古高原)에서 활동하였으니 지금 시베리아 일대이다.

 

 

설연타(薛延陀) :

설연타(薛延陀)는 철륵부락(鐵勒部落) 연합을 말미암아서 형성된 고대 부락국가(古代部落國家)이다. 그 뼈대가 되는 부락은 ()”연타(延陀)”가 조직되어 이루어졌다. 이는 동부(東部) 고거(高車)의 한 부락이다. 일찍이 487(() 영명(永明) 5)에 아복지라(阿伏至羅)를 따라 준갈이 분지(準噶爾盆地, 지금 신장 북부)에 이르러 고거국(高車國)을 세웠다. 그 겨레는 옛날에 흉노(匈奴)가 통괄하던 부락에서 기원한다.

 

* 설연타(薛延陀)라는 고대 부락 국가는 628723까지 존립하였다. 위의 지도는 그들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던 630년에 강역도이다.

 

 

사리발(俟利發) :

사리발(俟利發)은 사력발(俟力發), 사리벌(俟利伐), 사닉벌(俟匿伐), 힐리발(頡利發), 희리발(希利發)이라고도 쓴다. 이는 유연칸국(柔然汗國), 돌궐칸국(突厥汗國), 가살칸국(可薩汗國)이 철륵부(鐵勒部) ()에게 수여한 이름이다. 그들은 내부를 스스로 다스리되 다만 세금을 내고 세금을 징수해야 한다. 이 이름이 최초로 나온 곳은 유연(柔然) 겨레에서이다.

 

 

사근(俟斤) :

사근(俟斤)은 이리근(夷離堇 Irkin/Erkin/Erkan)이니 또한 이리건(夷離巾)으로도 쓴다. ()나라 조정의 관직이름이고 금()나라 조정에서는 이리근(移裏堇)”으로 썼다. 이 이름은 돌궐(突厥)의 관직 이름에서 왔으니 관호(官號) “사근(俟斤)”은 돌궐(突厥) - 회골어(回鶻語)로 뜻은 지혜(智慧)”이다. 거란어(契丹語) 안에서 거란족(契丹族) 각부통군마대관(各部統軍馬大官)”이라는 명칭이 되었다가 뒤에 대왕(大王)”으로 뜻이 고쳐진다.

요사(遼史) 국어해(國語解)를 보면 이리근(夷離堇)은 통군마대관(統軍馬大官)이다.”라고 말하니 거란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리근(夷離堇)이 이미 존재하여 매우 큰 권력을 가졌다. 북위(北魏)에서도 사근(俟勤, 곧 사근(俟斤))이라는 관직 이름이 있었다. 남제서(南齊書) 위로전魏虜傳)에서는 그 직책이 상서(尚書, 고급관리)에 맘먹는다.” 하였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가칸(契丹可汗)을 담당하기 전에 우월(於越, 일종에 총리) 겸 이리근(夷離堇)을 담당하였다.

 

 

동라부(同羅部) :

동라부(同羅部)는 고대 부락국가(古代部落國家)이다. 고돌궐(古突厥)의 하나이다. 원래 서돌궐(西突厥)과 회골(回鶻) 제국(帝國)에 붙어 예속되었다가 뒤에 당나라에 붙어 9(九姓) 철륵(鐵勒)의 하나가 된다. 그 기원은 철륵(鐵勒)에서 와서 돌궐어(突厥語)를 사용하며 몽고 북방에서 활동하였는데 뒤에 내몽고 지구(內蒙古地區)로 옮겼고 천천히 산서(山西)와 하북(河北) 일대로 옮겨 갔다. ()나라 말기에 사타부(沙陀部)의 한 뼈대가 되었다.

 

 

발야(拔也) :

발야(拔也)는 역사상 회흘인(回鶻人)의 성씨이다.이 성씨는 기원이 흉노(匈奴)에서 나왔다.또한 발야고(拔野古), 발야고(拔野固), 더러는 발예고(拔曳固)라고도 한다. 발야고부(拔野古部)는 초기에 서돌궐(西突厥)에 속하였고 뒤에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다만 여러 번 당나라에 반항하였고 오대(五代) 때 후당(後唐)의 이씨전(李氏傳)에 나온 이야기 역시 기원이 발야고부(拔野古部)에서 이다.

 

 

후돌궐칸국(後突厥汗國) :

후돌궐칸국(後突厥汗國, 존속 기간 682~ 745은 다시 돌궐(突厥) 2칸국(汗國)이라 일컬으니 이는 동돌궐(東突厥)이 멸망한 반세기 뒤에 돌궐(突厥) 아사나(阿史那) 가문이 몽고고원(蒙古高原)에서 다시 새롭게 세운 정권으로, 동돌궐(東突厥)을 재건한 나라로 보고 있다. 8세기에 이르러 당()나라 연합군에 멸망 당한다.

 

 

아사나(阿史那) :

아사나(阿史那, 튀르키예어(土耳其語)Asena, 또는 Aşina, 이는 돌궐(突厥) 신화 중에 돌궐인의 시조가 된다. 그는 한 남자가 한 어미 이리와 사랑을 하여 낳은 10명의 아들 중 하나이다. 그는 감돌 궐씨족(藍突厥氏族)의 시조이다. 그러나 터어키 사람들은 그가 어미 이리여야 한다고 믿는다.

가장 이른 시기로 북사(北史)에서 돌궐 시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흉노별부(匈奴別部)가 파멸 당하고 한 남자만 남았을 때 늑대가 이를 구해주었고, 암컷 늑대가 임신 후 고창(지금 신강(新疆) 토로번(吐魯番)) 북산에서 아들 열 명을 낳았는데, 그중 한 명이 아스나였다. 러시아 역사가 라델로프(w.w. radloff)는 일찍이 돌궐(突厥) 선조(先人) ()이 박격달산(博格達山)에 있었다고 말하였다.

 

 

박격달산(博格達山) :

박격달산(博格達山), 박격다산(博格多山, 몽고어 복드 울(Bogd Uul)이라고도 한다. 이는 천산 산맥(天山山脈) 동쪽 부분에 북쪽 가지이다. 산 전체는 신강(新疆) 위구르족 자치현 안에 있다. 준갈이분지(准噶爾盆地)와 토로번분지(吐魯番盆地) 사이에 분계 산맥이다.

박격달산(博格達山)은 히말라야의 조산(造山) 운동으로 형성된 산이니 동서(東西)로 향해 산맥이 있고 평균 해발 약 4000미터이다. 주봉(主峰) 박격달봉(博格達峰)은 신강 창길주(昌吉州) 부강시(阜康市) 경내에 있는데 해발 5445미터로 위에 천지(天池)가 있다. 이곳은 이른바 아사나(阿史那) 선인(先人)의 동굴이다. 사람들은 박격달봉(博格達峰)신산(神山)’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곳은 고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박격달(博格達)은 몽고어로는 신산(神山)”, “성산(聖山)”, “영산(靈山)”이라는 뜻이 있다. 또는, 뭇 산의 신(眾山之神)을 뜻한다고도 한다.

 

*박격달산 일대에 산들(바이두에서 내려받음)

 

*박격달산 위치 (바이두에서 내려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