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숙신(肅愼)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3

by 쥐눈이 2024. 8. 8.

*아래에 보충 자료들은 위키백과(維基百科)에 중국어로 나온 내용을 번역한 것이고 그곳에 사진들을 내려받았다.

정령(丁零)

정령(丁零, 동한(東漢) 때 본뜬 소리는 “teŋ-leŋ” 또 그 상고시대 때 본뜬 소리는 “têŋ-rêŋ”이다또 정령(丁令), 정령(丁靈)이라고도 쓰니 이 고대 국가는 원시 돌궐족(原始突厥族) 중에 한 갈래이다. 원래 바이칼호(貝加爾湖) 남쪽 일대에 살았다. 인근에 국가로는 견곤(堅昆), 호게(呼揭) 등이 있다. 뒤에 이 나라들을 하나같이 흉노가 삼켜버렸으나 흉노가 쇠퇴한 뒤에 다시 따로 독립의 길을 걸었다. ()나라 뒤에 적력(狄歷), 고거(高車), 철륵(鐵勒), 더러는 칙륵(敕勒)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불리었다. 이 정령(丁零)은 돌궐칸국(突厥汗國)과 회골칸국(回鶻汗國)의 선조가 된다.

 

중원(中原)의 삼국(三国) 때 서쪽으로 이동한 일부는 서정령(西丁零)이라 일컬어진다.

 

*기원전 2세기 서한(西漢) 때에 흉노(匈奴)와 정령(丁零)

 

*2세기 동한(東漢) 때에 선비(鮮卑)와 정령(丁零)

 

역사(曆史)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북해(北海)안에 산이 있으니 이름이 유도산(幽都之山)이다. 흑수(黑水)가 여기에서 나온다. 그 산 위에 검은 새(玄鳥), 검은 뱀(玄蛇), 검은 표범(玄豹), 검은 호랑이(玄虎), 떨기 진 꼬리(蓬尾)를 가진 검은 여우가 있다. 은 떨기 총()이다. 설원(說苑)에서는 떨기 진 꼬리의 여우(蓬狐), 무늬 진 표범(文豹)의 가죽이라 하였다.

그리고 대현(大玄)의 산이 있고 현구(玄丘)의 백성이 있다. 언덕() 위에 사는 사람과 그 외에 다른 것들이 다 검다는 말이다.

대유(大幽)의 나라가 있다. 곧 유민(幽民)이다. 동굴에서 살며 걸치는 옷이 없다.

붉은(핏빛) 정강이를 가진 백성이 있다. 무릎 아래가 정홍색(正赤色)이다. “(, 일종의 용())의 머리는 마치 핏빛 같으니 정적(正赤)이다. 螭首如血正赤

정령(釘靈)의 나라가 있다. 그 백성들은 무릎 아래에 털이 나 있고 발이 말발굽(馬蹄)처럼 생겨 아주 잘 달린다. 시함신무(詩含神霧)말 발굽같은 발은 스스로 그 발굽을 재촉하여 달려 하루에 3백 리를 간다.” 하였다.

山海經海內經鳥玄蛇玄豹玄虎黑虎名儵見爾雅〉 《山海經海內經北海之內有山名曰幽都之山黑水出焉其上有玄鸟玄蛇玄豹玄虎玄狐蓬尾。〈蓬叢也阻留反說苑曰蓬狐文豹之皮有大玄之山有玄丘之民。〈言丘上人物盡黑也有大幽之國。〈即幽民也穴居無衣有赤脛之民。〈膝已下正赤色有釘靈之國其民從膝已下有毛馬蹄善走。〈詩含神霧曰馬蹄自鞭其蹄日行三百里

 

*산해경에서 그린 정령국 (釘靈國) 사람

이렇듯 정령(丁零)이 으뜸으로 문헌에 드러나는데, 위략(魏略) 서융전(西戎傳)에서 이야기한 마경국(馬脛國)’의 기사와 닮았다.

정령국(釘靈國)은 정령(丁靈), 정령(丁零), 정령(丁令)으로도 쓰고 또 마경국(馬脛國)이라고도 일컬으니 그 사람들은 말 같은 사람(馬人)이라 무릎 이상은 사람 머리에 사람 몸이요 무릎 아래는 말 정강이에 말발굽이라서 말을 타지 않아도 도리어 굳세게 말처럼 달린다.

 

한나라 때(漢代)

흉노(匈奴)의 묵특선우(冒頓 单于)께서 즉위하고 주변에 여러 나라를 손아귀에 넣었다. 바이칼호 남쪽에 혼유(渾庾), 굴사(屈射), 정령(丁零), 격곤(鬲昆, 또는 견곤(坚昆)), 신리(薪犁) 등 부족이 흉노에 복종하여 예속되었다. 일부 정령 부락(丁零部落)은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가서 강거(康居) 이북에 눌러앉았는데 그 부락을 서정령(西丁零)이라고 일컬었고 제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던 부락을 북정령(北丁零), 또는 칙륵(敕勒), 철륵(鐵勒)이라 일컬었다.

한나라 본시(本始) 2기원전 72, 전한(前漢)과 오손(烏孫)이 연합하여 흉노를 쳐 깨뜨렸고 그해 겨울에 접어들자 큰 눈을 만나 흉노 백성, 가축들 대부분이 얼어 죽었다. 정령(丁令)이 이때를 이용해 흉노를 치고 반기를 들었다.

신작(神爵) 원년(元年, 기원전 61, 정령(丁令)3년을 연달아 흉노를 침공하여 수천의 사람들을 살상하고 노략질한 뒤에 말과 가축들을 몰아 떠나게 하였다. 흉노가 만여 기병을 보내 이 정령 군인들을 반격하였으나, 헛수고만 하고 돌아갔다.

기원전 49기원전 48, 서흉노의 질지 선우(郅支单于)가 오손(烏孫), 오게(烏揭), 견곤(坚昆), 정령(丁令)을 격파하고 견곤(坚昆)의 땅에다 본영(本营)을 설치하였다.

동한(東漢) 원화(元和) 285, 북흉노(北匈奴) 대인(大人, 곧 지도자) 거리(車利)의 탁병(涿兵)이 한나라로 망명하여 변방으로 들어왔다. 이때 북흉노가 쇠퇴하여 부()의 무리가 차례로 등졌다. 이에 남흉노가 남쪽을 따라 나아와 공격하였고 정령(丁零)은 북쪽을 따라 나아와 공격하였으며 선비(鮮卑)는 동쪽을 따라 나아와 공격하였고 서역(西域)은 서쪽을 따라 나아와 공격하였으니 북흉노는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고 멀리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선비(鮮卑)가 몽고고원(蒙古高原)에 들어와 주인이 되어 이 땅에 맹주가 되었으며 정령(丁零)은 그 밑에 소속된 부락이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90 오환선비전(烏桓鮮卑傳)〉:

동한(東漢) 화제(和帝) 영원(永元, 89~ 105) 중에 대장군 두헌(竇憲)이 우교위(右校尉) 경기(耿夔)를 보내어 흉노를 격파하였는데 북선우(北單于)가 도주하였고 선비(鲜卑)가 이로 인하여 이리저리 다니다 그 땅을 가로챘다. 흉노의 나머지 씨들 중에도 머문 사람들이 여전히 십여 만이 거주하였다. 모두 스스로 선비(鲜卑)라 일컬으니 선비(鮮卑)는 이로 말미암아 점차 번성하였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북정령(北丁令)과 서정령(西丁令)

삼국(三國) 때 사서 위략(魏略)서융전(西戎傳)삼국지 위지 동이전 주(三國志魏書東夷傳注)을 엮은 이 어환(魚豢)이 패가이호(貝加爾湖, 바이칼호) 이남의 정령국(丁令國) 외에 또한 흉노를 따라 서쪽으로 옮겨간 정령(丁令)에 대해 기록하였는데 서방에 강거(康居) 이북에 있는 그 사람들을 서정령(西丁令)이라 일컬었다.

위략(魏略) 서융전(西戎傳) :

호득국(呼得國)은 총령(蔥嶺, 파미르고원) 북쪽, 오손(烏孫) 서북쪽, 강거(康居) 동북쪽에 있으면서 뛰어난 병사가 만여 사람이다. 가축을 따라 유목을 하며 좋은 말을 낸다. 담비가 있다.

견곤국(堅昆國)은 강거(康居) 서북에 있으니 뛰어난 병사가 3만 인이다. 가축을 따라 유목을 하며 역시 담비가 많고 좋은 말이 있다.

정령국(丁令國)은 강거(康居) 북쪽에 있으며 뛰어난 병사가 6만 명이다. 가축을 따라 유목을 하며 이름난 쥐 가죽(鼠皮), 백곤자(白昆子), 청곤자(青昆子) 가죽을 낸다. 昆子는 투르크(Turkic)“karsak”에서 파생된 말로 초원의 여우(steppe fox)”라고 한다.

이상 세 나라, 견곤(堅昆)의 중앙은 모두 흉노(匈奴) 선우(單于)의 뜰()인 안습수(安習水)에서 7천 리 떨어졌고 남쪽으로 거사(車師) 6(六國)5천 리 떨어졌으며 서남쪽으로 강거(康居)의 경계와 3천 리 떨어졌으며 서쪽으로 강거(康居)왕의 치소(王治)8천 리 떨어졌다. 더러는 이 정령(丁令)이 바로 흉노(匈奴)의 북정령(北丁令)이라고 여기는데 북정령(北丁令)은 오손(烏孫) 서쪽에 있으니 그 별종인 듯하다. 또 흉노(匈奴) 북쪽에 혼유국(渾窳國)이 있고, 굴사국(屈射國)이 있고, 정령국(丁令國)이 있고 격곤국(隔昆國)이 있고, 신리국(新梨國)이 있으니 북해(北海, 바이칼호) 남쪽에 따로 다시 정령(丁令)이 있어 이 오손(烏孫)의 서정령(西丁令)이 아님이 분명한 것이다. 오손(烏孫)의 장로(長老)가 말하기를 북정령(北丁令)에 마경국(馬脛國)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목소리가 달릴 때 나오는 기러기 소리(雁騖)와 비슷하고 무릎부터 위로 몸과 머리가 사람의 그것이요 무릎 아래에는 털이 나고 말의 다리에 말의 발굽을 가지고 있어서 말을 타지 않아도 달리기가 말처럼 빠르고 그 사람됨이 용맹하고 굳세어 전투에 과감하다." 하였다.

 

*3세기 서역에 여러 나라 지도. 정령(丁令,丁零은 파이객습호(巴爾喀什湖, 카자흐스탄 발하슈 호수) 서북쪽에 자리하였다.

 

동진(東晉) 말기 시대

정령족(丁零族) 적씨(翟氏)는 대를 이어 강거(康居)에서 거주하였다가 뒤에 중원 땅 안으로 옮겨 들어갔으니 적빈(翟斌, ?~384)이 신하로서 후조(後趙, 319351)에 속하였다. 전진(前秦, 350~ 394)의 임금 부견(苻堅, )이 화북(華北)을 지배하였을 때 적빈(翟斌)의 정령족(丁零族)은 신하로서 전진(前秦)에 속하여 신안군(新安郡, 지금에 안휘, 절강, 강서 일대), 민지군(澠池郡, 하남)으로 이주하였다. 38312월 전진(前秦)의 위군종사중랑((衛軍從事中郎) 적빈(翟斌)이 하남(河南)에서 군사를 일으켜 전연(前燕)을 부흥시킨 모용수(慕容垂)와 더불어 연합하여 전진(前秦)에 반기를 들었다. 384, 모용수(慕容垂)가 후연(後燕)을 세우고 적빈(翟斌)을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하남왕(河南王)으로 삼았다. 적빈(翟斌)은 뒤에 다시 후연(後燕)에 반기를 들었으니 모용수(慕容垂)에게 참수되었다.

적빈(翟斌)의 형에 아들 적진(翟真)이 도망 나가 전진(前秦)의 장락공(長樂公) 부비(苻丕)와 연합하여 후연(後燕, 384~ 407)에 대항하였다. 3854, 적진(翟真)이 행당(行唐, 하북성 석가장시 일대)에 도착하였을 때 사마선우걸(司馬鮮于乞)에게 살해되었고 선우걸(鮮于乞)이 스스로 조왕(趙王)에 자리에 섰다. 그러나 족인(族人)이 선우걸(鮮于乞)을 죽이고 적진(翟真)의 사촌 아우 적성(翟成)을 주()로 삼았다. 그러나 그 무리가 대부분 후연(後燕)에 항복하자 적진(翟真)의 아들 적료(翟遼)가 여양(黎陽)으로 도망쳐 갔다. 5월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가 상산군(常山郡)에 이르러 적성(翟成)의 행당(行唐)을 포위하였다. 7월 적성(翟成)의 장사(長史, 일종의 막료) 선우득(鮮于得)이 적성(翟成)을 참수하고 모용수(慕容垂)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수(慕容垂)가 행당(行唐)을 점령하였다.

적료(翟遼)가 동진(東晉)의 여양군(黎陽郡)을 점령하여 주변에 여러 군()을 취하였다. 387년 정월 모용수(慕容垂)가 공격하기 시작하니 적료(翟遼)가 항복하였고 모용수(慕容垂)가 그를 서주 목(徐州牧)이라 명명하고 하남공(河南公)에 봉하였다. 적료(翟遼)가 다시 후연(後燕)에 반기를 들고 청하군(清河郡)과 평원군(平原郡)을 빼앗았다. 3882월 스스로 위천왕(魏天王)이라 일컫고 적위(翟魏, 388~ 392년 존립)를 건국하고서 골대(滑台, 지금 하남 골현(滑縣) 동쪽)에 도읍을 세웠다. 그 아들 적쇠(翟釗)가 계승하였고 여러 차례 후연(後燕)의 침공을 격퇴하였으나 392년 후연(後燕)에게 멸망 당하였다. 적쇠(翟釗) 한 사람만은 서연(西燕, 384~ 394년 존립)으로 달아나 모용영(慕容永)에 의해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에 임명되고 동군왕(東郡王)에 봉해졌으나 1년 뒤에 모반하여 피살되었다.

뒤에 북위(北魏)가 화북(華北)을 점령하고( 남북조(南北朝) 시대각 정령족(丁零族), 예컨대 상당정령(上党丁零) 적도(翟都), 유산정령(榆山丁零) 적촉(翟蜀), 서산정령(西山丁零) 적촉(翟蜀)낙지(洛支) 및 정주 정령(定州丁零) 선우대양(鮮于臺陽), 적교(翟喬)의 세력들이 북위(北魏) 정권에 대항하였지만, 차례차례 북위(北魏)에 진압되었다.

북방 초원에 있던 정령족(丁零族)은 고거(高車)라고 일컬어지다가 뒤에 철륵(鐵勒)이라 일컬어졌다.

*적위翟魏, 존립 기간 : 388392)는 중원 땅 16국 시기에 정령(丁零)사람 적료(翟遼)가 지금에 하남(河南)의 황하(黃河) 남쪽 기슭에 건립한 정권이다.

 

*4세기 말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북위(北魏) () ()

몽고고원(蒙古高原)은 뒤에 유연 칸국(柔然汗國)으로 말미암아 통치되었는데 일부 철륵부락(鐵勒部落)이 유연제국(柔然帝國)에 반기를 들었다. 그중에 아사나씨(阿史那氏)를 우두머리로 한 부락연맹은 돌궐칸국(突厥汗國)을 세웠고 일부분은 회흘(回紇)이 되었다.

 

현대연구(現代研究)

중화민국(中華民國) 학자 호추원(胡秋原)은 적()은 바로 이 정령(丁零)의 소리가 바뀐 것으로 인식하고 북적(北狄)은 정령(丁零)에서 기원하니 바로 후대에 이른바 돌궐(突厥)이라고 주장하였다.

 

북적(北狄)은 또한 적(), 북적(北翟), 적융(翟戎)이라고도 한다. 전해진 말에 따르면 북적(北狄)은 원래 황제(黃帝)의 손자인 시균(始均)에서부터 나왔다 하는데 실제로는 상()나라 후기 때에 화하(華夏)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이다. 북적(北狄)은 춘추(春秋) 때에 주나라 조정(周朝)의 제후국(諸侯國)이 사막 이남에서 살았던 북방 사람들에 대해 일컬었던 이름이다. 이 이름, 그리고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과 더불어 모아서 사이(四夷)라고 불렀다. 춘추 시대 때, 맥족(貉族), 백적(白狄), 적적(赤狄), 그리고 장적(長狄) 등의 부락이 모두 북적(北狄)으로 분류되었고 늘 서융(西戎)과 싸잡아서 융적(戎狄)이라 불렀다. 한조(漢朝) 후에, 북적(北狄)이라는 호칭은 선진(先秦) 시기 때의 북적(北狄)과는 관련이 없는 동호(東胡), 흉노(匈奴), 고거(高車), 선비(鮮卑) 등을 대신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

북적(北狄)은 황제(黃帝)의 손자 시균(始均)에게서 기원한다는 기록이 있고 산융(山戎)에서 나왔으며 진국(晉國)과 이웃한 나라에서 살았다고 보는 기록도 있다. 춘추 때, 북적(北狄)은 백적(白狄), 적적(赤狄), 장적(長狄) 등 서로 다른 분파로 갈라졌다. 전국(戰國) 시대 이후에 북적(北狄)이라는 이름은 점차 흉노(匈奴)와 선비(鮮卑) 등 여러 개 민족을 대신 가리키는 말로 바뀌게 되었지만, 다만 흉노(匈奴), 선비(鮮卑), 돌궐(突厥), 몽고(蒙古) 등 초원 민족(草原民族)들은 선진(先秦) 시기에 북적(北狄)의 각부(各部)와 모두 아무런 관련이 없다.

 

춘추(春秋) 문헌 중에 적()은 또한 적()을 가리킨다. () 양왕(襄王) , 정백(鄭伯)이 왕명을 듣지 않았던 까닭에 일찍이 적인(狄人)에게 정국(鄭國)을 공격할 것을 요구하였다. 적인(狄人)이 정국(鄭國)을 공격하여 깨뜨린 뒤에 주() 양왕(襄王)이 외성(隗姓) 적인에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다가 외() 여인을 훗날 되돌아가게 하였다. 이 행동이 적인(狄人)의 불만에 불을 지폈고 왕자(王子) ()가 적인(狄人)과 연합하여 주왕(周王)을 공격하였다.

 

내몽고 출신 학자 소일파달랍합(蘇日巴達拉哈)는 몽고족(蒙古族)의 기원은 고대 고거(高車)에서부터 나오니 중국 역사에서 일컫는 북적(北狄)”은 몽고족(蒙古族)의 선조라고 주장하였다.

학자 황문필(黃文弼)은 춘추(春秋) 시대에 일컬은 ()”은 임호(林胡)나 누번(樓煩), 의거(義渠)처럼 모두 중원(中原) 땅으로 옮겨 가 자리 잡은 흉노(匈奴) 사람이라고 보았다.

학자 마장수(馬長壽)는 흉노(匈奴)와 정령(丁零)은 춘추(春秋) 시대에 이야기된 북적(北狄)”이니 똑같이 아이태어(阿爾泰語, 알타이어) 계의 몽고 종족인 초원부락(草原部落) 사람이라 보았다. 이 주장은 임검명(林劍鳴) 등 학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전백찬(翦伯贊)중국사강요(中國史綱要)안에서 북적(北狄)” 안에 적적(赤狄)”은 몽고족 선조의 하나라고 보았다.

 

학자 임운(林澐)은 선진 시대(先秦時代)에 나온 적인(狄人)은 화하(華夏)와 더불어 같은 한 족군(族群)에서 갈라져 변화해 나온 겨레이고, 전국(戰國) 시대에 출현한 북아시아 몽고인종(蒙古人種)의 특징을 띤 흉노와는 종족이 다르다고 지적하였다.

조성운(趙越雲)과 번지민(樊志民)도 선진(先秦) 시대에 적인(狄人)은 화하(華夏) 족군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이라고 지적하였다.

 

현대 북아시아 몽고인종러시아 인류학계에서는 습관적으로 몽고인종(蒙古人種)시베리아(西伯利亞) 유형이라고 일컫는다은 낮은 머리뼈(低顱), 짧은 머리뼈(短顱), 높은 얼굴(高面), 넓은 얼굴(闊面)이 서로 결합 된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 사람들인데 현대 몽고족이 그 대표이다. 다만 기원후 1세기에 외바이칼(外貝加爾)과 몽고(蒙古)에서 생활한 흉노인(匈奴人)은 낮은 두개골(低顱)이 있어서 이 한 개 특징으로 보자면 현대 북아시아 몽고인종과 일치하지만, 다만 중간 길이의 머리뼈와 낮은 길이의 머리뼈가 결합한 것이다. 현대 북아시아 몽고인종의 형성은 내몽고 적봉(赤峰) 하가점(夏家店) 하층 문화(下層文化) 시대보다 늦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대 인종학자들이 보는 관점에 따르자면, 신석기 시대부터 춘추(春戰) 시대에 이르는 사이에 북방(北方)에 장성(長城) 지대에서 생활한, 모두 높은 머리뼈(高顱)를 가진 거주민은, 모두 낮은 머리뼈로써 특징을 가진 한대(漢代)에 흉노와 선비(鮮卑)와는 뚜렷이 다른 종족 계열에 속한다. 북아시아 몽고인종의 특징이 비교적 두드러지게 나타난 유골은 전국(戰國) 시대에서야 북방(北方) 장성(長城) 지대에 나타났는데 문헌(文獻) 안에 ()”의 출현 연대와 대체로 일치한다.

 

*외바이칼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