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숙신(肅愼)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5

by 쥐눈이 2024. 8. 22.

*아래에 보충 자료들은 위키백과(維基百科)에 중국어로 나온 내용을 번역한 것이고 그곳에 사진들을 내려받았다.

철륵(鐵勒)

철륵(鐵勒은 또한 칙륵(敕勒), 고거(高車), 정령(丁零), 적력(狄曆)으로도 일컬어진다. 4세기 후반에서 8세기 중반까지 아시아와 유럽(亞歐, 유라시아) 대륙 중부에 분포했던 돌궐 이외에 돌궐어족(突厥語族) 유목민의 총칭이다. 기원후 4세기 초, 선비(鮮卑)가 남쪽 중원(中原) 땅으로 옮긴 뒤에 철륵(鐵勒)4세기 몽고고원(蒙古高原)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기원후 5세기 초기, 철륵은 유연칸국(柔然汗國)에게 쫓겨나 몽고고원 북쪽에 이르렀고 기원후 6세기 중엽에 다시 돌궐칸국(突厥汗國)에 병합되었다가 훗날 7세기에 설연타칸국(薛延陀汗國)8세기 회골칸국(回鶻汗國)을 세우게 된다.

 

부족(部族) 구성

철륵(鐵勒)을 구성하는 부족은 매우 많다. 거의 모든 부족은 흩어져서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다.

 

부족(部族)

독락하(獨洛河, 곧 바이칼 부근에 토랍하(土拉河, Tuul River)로 토랍은 몽고어이고 독락은 돌궐어이다)의 북쪽 지역 부족장은 사근(俟斤)이라 불리고 2만의 군사를 거느렸다.

복골부(僕骨部, 또는 僕固, Boqut)고거(高車) 시대에 호골부(護骨部).

동라부(同羅Toŋra)

위흘부(韋紇部, 또는 회흘(迴紇), 회흘(回紇) )고거(高車) 시대에 원흘부(袁紇部).

발야고부(拔也古部, 또는 발야고(拔野古)

복라부(覆羅部) 고거(高車) 시대에 부복라부(副伏羅部).

준갈이분지(准噶爾盆地) 이남 지역 2만 병사를 거느렸다.

글폐부(契弊部, 또는 글필契苾) 고거(高車) 시대에 해비(解批).

박락직부(薄落職部) 삼성(三姓)의 갈라록(葛邏祿) 중에 모락부(謀落部).

갈라록(葛邏祿, Karluk은 중앙아시아에 살았던 고대 유목 돌궐어 민족(突厥語民族)으로 13세기 때 소리를 본떠서 적은 말이 같지 않은 까닭에 합랄로(哈剌魯), 합아로(合兒魯), 합아로(哈兒魯), 갑랄로(匣剌魯), 아아로(阿兒魯), 합랄노(哈剌奴), 가이로(柯耳魯), 합로(哈魯), 한록로(罕祿魯)” 등 다양한 호칭을 가지고 있다. “합랄로(哈剌魯)”에는 ()”, “설산(雪山)” 혹은 눈사람(雪人)”의 뜻이 있다. 이 부족은 세 가지 성(三姓)으로 나뉘게 되는데 모락부(謀落部)”모랄(謀剌)’로도 쓴다, “치사부(熾俟部)” 파복(婆匐)’으로도 쓴다, 그리고 답실력부(踏實力部)”이다. 훗날, 서쪽으로 옮겨간 회흘(回紇) 15()와 더불어 연맹을 결성하였다. 문헌 중에 삼성(三姓)의 갈라록(葛邏祿)이 일찍이 회흘(回紇)과 함께 후돌궐(後突厥)을 쳐서 멸망시켰었다고 늘 말하는데 그들은 회흘(回紇)과 관계가 밀접하다.

을질부(乙咥部) 갈라록(葛邏祿)의 치사부(熾俟部).

소파부(蘇婆部)

나갈부(那曷部)

오호부(烏護部, 또는 호환烏讙) 오고사인(烏古斯人).

흘골부(紇骨部, 또는 견곤(堅昆)

야질부(也咥部)

우니호부(于尼護部 또는 우니환于尼讙)

 

준갈이분지(准噶爾盆地) 이북 지역 1만여 병사를 거느렸다.

설연타부(薛延陀部)

질륵아부(咥勒児部)

십반부(十槃部)

달글부(達契部)

 

합살극(哈薩克, 카자흐 초원(Kazakh Steppe)) 지역 3만 병사를 거느렸다.

가질부(訶咥部)

갈절부(曷截部, 가살(可薩))

발홀부(撥忽部)

비간부(比幹部, 패절녈격(佩切涅格))

구해부(具海部)

갈비실부(曷比悉部)

하차소부(何嵯蘇部)

발야말부(拔也末部)

알달부(謁達部, 또는 갈달渴達)

 

불름(拂菻, 동로마제국東羅馬帝國?)) 동쪽 2만에 가까운 병사를 거느렸다.

은굴부(恩屈部)

아란부(阿蘭部阿蘭人))

북욕(北褥部파습기이인巴什基爾人)

 

* 1812년 러시아  프랑스 전쟁 승리 100주년 기념, 오륜보(奧倫堡, 러시아 오렌부르크(Orenburg))의 파십기이인(巴什基爾人, 바시키르(Bashkirs) ) 사진

 

구리부(九離部)

복올혼부(伏嗢昏部 (보가이인(保加爾人))

 

북해(北海, 바이칼호(貝加爾湖)의 남쪽 지역

도파부 (都波部, 都播, 투바(Tuba)(도와인(圖瓦人))

 

씨족(氏族)

독락하(獨洛河, 토랍하土拉河) 이북

몽진씨(蒙陳氏)

토여흘씨(吐如紇氏)

사결씨(斯結氏, 사결(思結)

혼씨(渾氏)

곡설씨(斛薛氏)

 

득억해(得嶷海, 리해里海, 곧 카스피해)의 동서 지역 8천여 병사를 거느렸다.

소로갈씨(蘇路羯氏)

삼소인 씨(三素咽氏, 또는 삼소인三索咽)

멸촉씨(篾促蔑促)

살홀씨(薩忽隆忽)

 

구성 철륵(九姓鐵勒)

그 뒤에 철륵부족(鐵勒部族) 중에 힘을 가진 아홉 부락이 우뚝 솟았다. ()나라는 이들을 구성 철륵(九姓鐵勒)”이라 일컬었는데 돌궐(突厥)에서는 토쿠즈 오구즈(Toquz Oghuz / Toquz-Oγuz : 돌궐어로 Toquz아홉’, Oghuz공동체를 뜻함)”로 불렀다. 부족의 아홉 성(九姓)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래에 15 부족이 관계된다.

 

회흘부(迴紇 Uyγur回紇))

복골부(僕骨Boqut)

다람갈부(多覽葛Täläŋüt)

발야고부(拔野古Bayïrqu)

동라부(同羅Toŋra)

사결부(思結Sïqït)

혼부(Qun)

곡설부(斛薛部)

해결부(奚結部)

아질부(阿跌Ädiz)

글필부(契苾部)

사결별부(思結Sïqït別部)

백습부(白霫部)

도파부(都播Tuba)

골리간부(骨利幹Qurïqan)

위의 부족들은 구성 회골(九姓回鶻, 유오이족(維吾爾族)과 구성 호(九姓胡, 소무 구성(昭武九姓) 속특인(粟特人)과는 같지 않다.

소무 구성(昭武九姓)은 또한 구성 호(九姓胡)를 말한다. 남북조(南北朝), (), () 시대 때 서역하(西域河) 중에 속특민족(粟特民族)과 국가 및 그 중원 땅으로 온 후손에 대한 통칭으로 유오이족(維吾爾族)과 회족(回族) 등 중국 서북쪽 민족의 기원 중 하나가 된다. 곧 강(), (), (), (), (), (), (), 화심(火尋, 화레즘( Khwarezm 花剌子模), 그리고 속특 구성호(粟特九姓胡)가 세운 나라인 무지(戊地) 구성(九姓)신당서(新唐書)에서 나온 것으로, 또한 목(), 동안(東安), (), 패한(沛捍), 나색파(那色波), 오나갈(烏那曷), () 등의 성()도 포함한다는 견해가 있다이니, ()나라 때 또한 구성 호(九姓胡)라고 불렀다. 수서(隋書)에 기록되기를 구성(九姓)의 선조는 월씨인(月氏人)이다. 월씨는 원래 기련산(祁連山)에 소무성(昭武城, 지금 감숙(甘肅) 장액시(張掖市) 임택현(臨澤縣))에 살았었는데 흉노에게 깨지고서 총령(蔥嶺, 파미르고원)으로 옮겨 가 자리 잡고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그 왕들은 하나같이 소무(昭武)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소무(昭武) 아홉 나라(九國)는 남북조(南北朝) 때 염달(懨噠, 또는 읍달(挹怛), 읍전(挹闐), 408670년간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에 예속되었다가 수()나라 때는 서돌궐(西突厥)에 예속되었다. ()이 서돌궐을 평정한 뒤에 강거도독부(康居都督府)에 편입되어 안서도호(安西都護)의 관할로 귀속되었다. 강국(康國)은 강거도독부(康居都督府)로 만들고 사()는 겁사주(怯沙州)로 만들고 안()은 안식주(安息州)로 만들고 석()은 대완도독부(大宛都督府)로 만들고 미()는 안식주(安息州)로 만들고 하()는 남밀주(南謐州)로 만들었다.

소무 구성(昭武九姓) 사람들은 장사에 뛰어나 중원 땅과의 통상을 매우 일찍부터 하였다. 당대(唐代)에 그 나라 안에 있던 외부 상인에 소무 구성(昭武九姓) 사람이 가장 많았고 그 중에도 강국인(康國人), 석국인(石國人)이 주를 이루었다.

 

*8세기 중앙아시아 : 소무구성(昭武九姓), 속특(粟特)

 

역사

철륵(鐵勒)의 선조는 흉노 후예의 별종이다. 종족은 대부분 서해(西海, 곧 함해 鹹海동쪽에 산골짜기에서 살았다. 성씨(姓氏)는 각각 다르나, “철륵(鐵勒)”이라 모두어 이름한다. 군장(君長)이 없이 나누어 흩어져 살며 동돌궐(東突厥)과 서돌궐(西突厥)에 속하였다.

 

*서아시아 함해(鹹海), 또는 함해(咸海)이니 곧 아랄 해(Aral Sea)이다. 이 함해를 옛날 중원 땅에서는 뇌저해(雷翥海)”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함해는 지금 카스피해인 리해(里海)”, 아라비안 해(Arabian Sea)아랍백해(阿拉伯海)”라는 주장도 있다. “aral”은 몽고어 계통과 돌궐어 계통 안에서 (), 또는 늘어선 섬(列島)”을 뜻한다. 염해(鹹海)의 유역은 우즈베키스탄(烏茲別克) 전역과 타지크(塔吉克), 투르크멘(土庫曼), 키르기스스탄(吉爾吉斯), 카자흐(哈薩克), 아프가니스탄(阿富汗), 그리고 이란(伊朗)의 일부 영토를 포함하고 있다.

 

서위(西魏) 대통(大統) 12546, 철륵(鐵勒)이 유연(柔然)을 토벌하였을 때, 토문(土門 : 뒤에 이리가칸(伊利可汗)으로 불림이 돌궐부(突厥部)를 거느리고 이들을 맞받아치니 철륵(鐵勒) 5만여 가구()가 돌궐에 항복하였다.

토문(土門, ?—552궐특근비(闕特勤碑, 퀘친 기념비(The Quetqin Monument) )비가가칸비(毗伽可汗碑 빌가 칸 기념비(The Bilga Khan Stele))에서 포민가칸(布民可汗, Bumïn qaγan이라 일컫는 이름에 맞아떨어지니 이 사람은 아사나씨(阿史那氏) 출신으로 이리가칸(伊利可汗, Ilig Qaγan이라 불린다. 그는 돌궐칸국(突厥汗国)의 창립자이자 최초에 가칸(可汗)이다. 아버지는 아사나 토무(阿史那吐務), 할아버지는 아현설(阿賢設), 증조 할아버지는 아사나(阿史那)이니 이분이 아사나씨(阿史那氏)의 시조이다. 토문이 재위에 있었던 기간은 1년도 안 되었으니552, 돌궐칸국(突厥汗國)을 세우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위에 나온 토문(土門)과 포민(布民, 또는 보민), 이 두 말은 음성(語音) 쪽으로 보자면 맞아떨어지는 길이 없으니 이에 대해 돌궐학자 리바츠키 (里巴茨基 , Rybatzki) 견해로는, 부민(Bumïn)은 이란어 쪽에서 분석하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어근 bum-과 접미사 in이다. -in은 속특어(粟特語, 소그드어)에 자주 등장한다. 그 기능은 별명과 더러는 아버지 이름을 나타내니, bum-은 인도의 옛말 산스크리트어(梵語)bhūmi, 대지(大地), 지면(地面), 토양(土壤), 토지(土地)」,옛 페르시아어(古波斯語)būmī-, 대지(大地)」, 그리고 속특어(粟特語)ßωmh, ßωm-, 대지(大地), 토지(土地), 세계(世界)등 이란어(伊朗語)에 비교할 수 있다. 한편, 중문(中文)의 토()대지(大地), 토양(土壤), 영토(領土)” 등의 뜻이 있고 문()에는 입구(入口), 계파(派系), 가족(家族)” 들의 의미가 있다. 속특 문화가 최초의 칸국에 미친 강렬한 영향을 고려하면, Bumïn이라는 이름의 뜻은 속특인(粟特人)을 말미암아서 중원 땅 안에 전해졌고, 중원 사람들이 다시금 이 말을 토문(土門)”이라는, 소리와 뜻을 다 갖춘 이 이름으로 번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돌궐학자 예전명(芮傳明)은 그의 이론에 합리적인 부분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 나머지 이론에서는 토문(土門)”의 음역(音譯)은 본디 돌궐어(突厥語) “일만(一萬)”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수당(隋唐) 사학자 잠중면(岑仲勉)포민(布民, 또는 보민)”은 산스크리트어(梵語) “bhuman, 광대(廣大), 부유(富有)에서 나왔다는 견해이다. 예전명(芮傳明)“Bumïn”토문(土門)”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믿고 있지만, 다만 아직 중국에 사학자들에 의해 지면에 기록되고 있지는 않다.

 

돌궐 목간 가칸 (突厥木杆可汗 : 재위 553572, 3대 가칸, 칸 제국 창건자인 토문가칸(土門可汗)의 아들이 즉위한 뒤 여러 외국을 병합하더니 유연(柔然)이 멸망한 뒤에 유라시아 대륙 중앙에 하나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당시에 철륵(鐵勒) 여러 부()는 돌궐에 병합되었다.

 

수조(隋朝) 개황(開皇) 19599, () 문제(文帝)가 태평공(太平公) 사만세(史萬歲), 진왕(晉王) 양광(楊廣, 곧 미래에 수() 양제(煬帝)를 보내어 돌궐(突厥) 섭가 가칸(歩迦可汗, 재위 599601에게 격파된 동돌궐(東突厥) 게민 가칸(啟民可汗, 재위587609)을 받아들이고 철륵부락(鐵勒部落)을 분산시켰다.

 

인수(仁壽) 원년(元年, 601, 계민 가칸(啟民可汗)에 딸렸던 곡설씨(斛薛氏)의 여러 부()가 반기를 드니 문제(文帝)가 양소(楊素)를 임명하여 운주도행군원수(雲州道行軍元帥)로 삼고 계민 가칸(啟民可汗)을 이끌고 북쪽으로 정벌을 나서게 하였다.

 

대업(大業) 원년(元年, 605),서돌궐 니궤처라 가칸泥撅處羅可汗, 재위603년 즈음 612이 철륵(鐵勒) 여러 부를 공격하고서 무거운 세금을 지웠다. 설연타(薛延陀)의 여러 부락이 반기를 든다고 의심하고는 그 우두머리 수백 사람을 잡아 죽였다. 철륵(鐵勒) 여러 부족이 니궤처라 가칸(泥撅處羅可汗)에 반기를 들고 글필부(契苾部) 사리발사근(俟利發俟斤) 글필가릉(契苾歌楞, 또는 契苾哥楞이 스스로 이물진막하 가칸(易勿真莫何可汗) 자리에 서고 탐한산(貪汗山, 지금 신강(新疆) 토로번(吐魯番) 북부 박격다산(柏格多山)에 할거하였다. 설연타부(薛延陀部) 사근(俟斤)의 아들 을실발(乙失缽, 곧 야질(也咥)이 스스로 소 가칸(小可汗)자리에 서고 연말산(燕末山, 지금 신강(新疆) 액민현(額敏縣) 동산(東山)) 북쪽에 할거하였다. 니궤처라 가칸(泥撅處羅可汗)을 격파하고서 이물진막하가칸(易勿真莫何可汗)의 세력이 크게 커졌다. 이물진막하 가칸(易勿真莫何可汗)이 무리의 인심을 얻으니 이웃 나라들이 두려워하여 이오(伊吾), 고창(高昌), 언기(焉耆) 여러 나라가 귀의하여 붙었다.

 

대업(大業) 3607), 철륵(鐵勒)이 수() 조정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서돌궐 사궤 가칸(射匱可汗, 재위612619년 즈음이 강성해져 설연타(薛延陀), 글필(契苾) 두 부()가 가칸(可汗)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신하로서 야궤 가칸(射匱可汗)에 붙었다. 울독군산(鬱督軍山, 오도근산(於都斤山)에 있던 회흘(迴紇) 6()가 신하로서 동돌궐 시필가칸(始畢可汗, 재위609619에 붙었고 금산(金山, 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에 있던 부락 을실발(乙失鉢)이 신하로서 서돌궐(西突厥) 통엽호 가칸(統葉護可汗, 재위619년 즈음 628에 붙었다.

오도근(於都斤)은 돌궐 신화와 등격리(騰格里, 하늘) 신앙 전설 중 하나의 도성(都城)이다. “오도근(於都斤, 고돌궐문(古突厥文)𐱁𐰃𐰖:𐰤𐰜𐱅𐰇, Ötüken yïš"오도근산(於都斤)"; 𐰼𐰘:𐰤𐰜𐱅𐰵, Ötüken jer, "오도근 대지(於都斤大地)")”이라는 말은 돌궐어 중에서 어머니인 위대한 땅 (大地母親, Mother Earth)”을 뜻한다. 고대 한문 사료에서는 이 산을 일컬어 오도근산(於都斤山), 오덕건산(烏徳鞬山), 도위건산(都尉揵山), 도근산(都斤山), 대근산(大斤山), 울독군산(鬱督軍山), 욱독군산(郁督軍山)”이라고 한다. 지금 오도근(於都斤)이 어느 곳이라고 특정지을 수는 없지만, 항애산으로부터 도와(圖瓦), 살언령(薩彥嶺, 사얀 산맥, 시베리아 남부 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구역이다.

 

*항애산맥, 사얀산맥, 남베리아 산맥

 

*항애산(杭愛山, 항가이 산맥 The Khangai Mountains )는 옛날에 연연산(燕然山)이 불림

 

텡그리 / 등격리(騰格里, 돌궐어𐰃𐰼𐰭𐱅 ẗŋr̈ytäŋritäŋäri 혹은 täŋiri불가리아어:Тангра Tangra튀르키예어Tanrı몽고어ᠲᠩᠷᠢ Tngri달알이어(達斡爾語)tangar /təŋgər합살극어(哈薩克語, 카자흐어)تاڭىر Тәңір 회골어(回鶻語)/tängri/유오이어(維吾爾語)تەڭرى tengri는 고대 알타이어계(阿爾泰語系)에 일부 유목 민족이 하늘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는 샤머니즘의 텡그리 / 등격리(騰格里) 신앙에서 중심이 되는 신령이다. 어떤 사람은 한어(漢語)()”텡그리 / 등격리(騰格里)”는 같은 원류를 가진 말이라 보고 있다.

등격리(騰格里)”란 말이 흉노(匈奴) 시기에 가장 처음 생겨났으며 상고(上古) 한어(漢語)에서는 탱리(撑犁)”라고 적고 있다. 흉노 군주인 선우(單于)의 온전한 이름은 바로 장리고도선수(撑犁孤塗單于)”이며 그 뜻은 하늘처럼 그렇게 광대하신 상천(上天)의 아들이다.

그 뒤 선비(鮮卑), 유연(柔然), 돌궐(突厥) 그리고 몽고 등에 초원에 사는 민족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텡그리 / 등격리(騰格里) 신앙을 계승하였다. 돌궐과 동족인 칙륵(敕勒)창천(蒼天, Koke Tengri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내었다. 돌궐(突厥), 회흘(回紇) 시기, 중고(中古) 한어(漢語)에서는 등리(登里, 등갈리(登曷哩)라고 적고 있는데 몽고인은 몽가 텡그리 / 등격리 (蒙哥·騰格里 : 돌궐어는 Mangu Tangri이고 몽고어는 Mongke Tangri이다. 한어로는 장생천(長生天 : 영원한 하늘)으로 번역된다이 최고의 신앙이 된다.

이 뒤에 불교, 인도교(印度教) 등에 영향을 받게 되어 등격리(騰格里)에 각종 이름이 입혀지게 되면서 갈라져 허다한 신령이 만들어진다. 17세기 이후에는 심지어 구십구 등격리(九十九騰格里)”이라는 설법(說法)까지 등장하였다.

 

당조(唐朝) 정관(貞觀) 원년(元年, 627에 음산(陰山) 이북에 설연타(薛延陀), 회흘(迴紇), 발야고(拔也古) 여러 부()가 차례로 반기를 들어 욕곡설(欲谷設)이 패주하였다.

욕곡설은 을비돌륙 가칸(乙毗咄陸可汗, ?—653으로 가칸에 즉위하기 전에 이름이다. ()은 아사나씨(阿史那氏)로 또한 을비설(乙毗設)로도 적는다. 서돌궐가칸(西突厥可汗)이었고, 동돌궐(東突厥) 시필가칸(始畢可汗)의 아드님이다. 동돌궐(東突厥) 힐리 가칸(頡利可汗, 재위620630이 소 가칸(小可汗) 돌리가칸(突利可汗)을 보내어 반기를 든 부족들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돌리 가칸(突利可汗)이 패배하여 단촐한 기마를 타고 도망해 돌아오니 힐리 가칸(頡利可汗)이 크게 노하여 돌리가칸(突利可汗)을 십수 일 동안 구금하였다.

 

정관(貞觀) 2628때 서돌궐(西突厥) 통섭호 가칸(統葉護可汗)이 피살되어 서돌궐이 크게 혼란에 빠지자 을실발(乙失鉢)의 손자 이남(夷男, 진주가칸(真珠可汗, ?—645으로 7세기 설연타 가칸(薛延陀可汗)이다)이 설연타(薛延陀) 부락 7만여 가()를 이끌고 동돌궐에 붙었다. 동돌궐(東突厥) 힐리가칸(頡利可汗)의 정치가 시들해지자 이남(夷男)이 소속된 무리를 이끌고 동돌궐에 반기를 들고서 힐리가칸(頡利可汗)을 공격하여 그를 크게 깨뜨렸다. 힐리(頡利) ()의 여러 성()이 대부분 힐리가칸(頡利可汗)에 반기를 들고 이남(夷男)에게 귀순하여 그를 공동의 주()로 추대하니 이남(夷男)이 그 지위에 나아갔다. () 태종이 유격 장군(遊擊將軍) 교사망(喬師望)을 보내어 이남(夷男)을 진주비가 가칸(真珠毘伽可汗)에 제수하고 북()과 깃발 독()을 하사하였다. 이남(夷男)이 크게 기뻐하여 당조(唐朝)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대막(大漠) 이북 울독군산(鬱督軍山, 곧 오도근산(於都斤, Otuken 또는 Otugen) 아래에서 아(, 곧 왕정(王庭))를 세웠다. 동쪽으로는 말갈(靺鞨)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서돌궐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사적(沙磧)에 닿아있고 북쪽으로는 구륜수(俱倫水)에 이르니, 회흘(迴紇), 발야고(拔野古), 아질(阿跌, Ädis, 동라(同羅), 복골(僕骨), () 등 부락(部落)이 모두 그에게 붙었다.

 

정관(貞觀) 36298, 이남(夷男)이 아우 통특륵(統特勒)을 당조(唐朝)에 보냈다. 태종이 깊고 도타이 위로하고 보배로운 칼과 보배로운 채찍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동돌궐(東突厥)의 권위가 상실되어 여러 부()가 전부 등을 돌렸다.

 

정관(貞觀) 4630), 힐리 가칸(頡利可汗, 동돌궐 최후의 가칸, 재임기간 : 620~630)이 당조(唐朝)에 포로로 잡히고 동돌궐(東突厥)이 멸망하자 이남(夷男)이 부()를 이끌고 동쪽으로 고국(故國)으로 돌아가 도위건산(都尉揵山, 곧 오도근산(於都斤山)북쪽에 독라하(獨邏河)의 남쪽에다 정()을 세웠다. 동쪽으로는 실위(室韋)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금산(金山, 알타이 산맥 阿爾泰山脈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돌궐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한해(瀚海, 바이칼호 貝加爾湖를 마주하니 옛 흉노의 고지(故地)를 점거하고 병사 20만을 거느리고서 아들 두 사람을 세워 남부과 북부로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몽고고원의 소유권이 철륵(鐵勒) 설연타부(薛延陀部)로 넘어갔다. 서돌궐 사엽호가칸(肆葉護可汗, 재위 628632이 막하돌가칸(莫賀咄可汗, 재위628630을 격파하고 서돌궐을 통일하고서 군사들을 크게 모아 철륵(鐵勒)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설연타부(薛延陀部) 이남(夷男)이 사엽호가칸(肆葉護可汗)을 격파하였다.

 

정관(貞觀) 7633정월설연타부(薛延陀部)가 당나라 조정에 사신을 보냈다.

 

정관(貞觀) 12638),이남(夷男)의 두 아들이 소가칸(小可汗)에 임명되니 세력을 넓히려고 생각하였다. 당조(唐朝)에서 동돌궐 이사마(李思摩)를 세워 가칸(可汗)으로 삼았고 부()를 이끌고서 사막 남쪽(漠南) 땅에 살게 하였다. 이남(夷男)은 이에 이사마(李思摩)를 병합하려 하였다.

 

정관(貞觀) 146406, 설연타(薛延陀)가 사신을 당조(唐朝)에 보내 혼례를 요구하였다.

 

정관(貞觀) 1564111이남(夷男)의 아들 대도설(大度設)이 동라(同羅), 복골(僕骨), 회흘(回紇), 말갈(靺鞨), ()의 군사 20만을 이끌고 백도천(白道川)에 주둔하고서 선양령(善陽嶺)을 틀어쥐고 지키고 있는 이사마(李思摩) ()를 공격하였다. 이사마가 사신을 당 조정(唐朝廷)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니 태종이 영국공(英國公) 이세적(李世勣), 포주자사(蒲州刺史) 설만철(薛萬徹)을 보내되 보기(步騎) 수만을 거느리게 하였다. 12월 백도천(白道川)을 지나 청산(青山)에 이르러 대도설(大度設)을 맞닥뜨리고 수개월을 거쳐 이를 추격하였다. 약진수(諾真水, 누오젠 강 Nuozhen River)에 이르러 대도설(大度設)10리에 걸쳐 막사를 치고 군대를 주둔하여 적에 대항하였다. 설연타 부(薛延陀部)가 앞서 사발라(沙鉢羅)와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를 격파하였을 때 보전(步戰)으로 이겼었는데 현재에도 똑같은 방식에 전법으로써 돌궐 병사를 격파하고 있어서 설연타부(薛延陀部)가 승기를 타고 이들을 추격하였다. 이때 이세적(李世勣)이 군사를 이끌고서 맞서니 설연타부(薛延陀部)가 모든 화살을 한꺼번에 쏘아댔고 당군(唐軍)의 말들이 대부분 살에 맞아 죽었다. 이세적(李世勣)이 사병(士兵)들에게 모두 말에서 내리기를 명령하고 손에 긴 창을 잡고 앞으로 돌진하여 직접 육박전을 하게 하니 설연타부(薛延陀部)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부총관(副總管) 설만철(薛萬徹)이 수천 기병을 이끌어 설연타부(薛延陀部)에 말을 끄는 사병(牽馬的士兵)을 사로잡으니 설연타부(薛延陀部)는 말을 잃게 되었다. 설연타부(薛延陀部)가 크게 패배하여 대도설(大度設)이 도주하였다. 이남(夷男)이 동돌궐이사마(李思摩) 정권과 화해를 요청하고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정관(貞觀) 16642, 이남(夷男)이 숙부 사발라니숙사근(沙鉢羅泥熟俟斤)을 당()에 보내 혼인을 청하면서 좋은 말 3천 마리를 바쳤다. 태종이 그가 신흥공주(新興公主)에게 장가들도록 허락하였다. 이사마(李思摩)가 여러 번 군사를 보내어 설연타부(薛延陀部)를 침략하여서 설연타부(薛延陀部)가 돌리실(突利失)을 보내니 이사마(李思摩)를 공격하고 정양(定襄)을 약탈하고 떠났다.

 

정관(貞觀) 17643윤달이남(夷男)이 형의 아들 돌리설(突利設)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어 좋은 말 5, 소와 낙타 1, 10만 마리를 바치고 혼인을 요청하니 태종이 글필하력(契苾何力)의 건의를 받아들여 혼인 요청을 불허하였다.

 

설연타부(薛延陀部)에 귀순한 동돌궐 아사나곡발(阿史那斛勃)이 세력이 커지자 이남(夷男)을 겁박하고 살해하였다. 아사나곡발(阿史那斛勃)이 도망하여 옛 땅금산(金山, 알타이 산)의 북쪽으로 돌아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스스로 을주거비 가칸(乙注車鼻可汗, 646650)이라 칭하였다. 그 땅이 서쪽으로는 가라록족(歌羅祿族, 갈라록(葛邏祿)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결골부(結骨견곤 堅昆)에 이르니 모두 거비가칸(車鼻可汗)에 붙었다.

 

정관(貞觀) 19645),이남(夷男)이 세상을 떠났다. 이남(夷男)의 어린 아들 사엽호발작(肆葉護拔灼)이 형 돌리실가칸(突利失可汗)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힐리구리설사다미가칸(頡利俱利薛沙多彌可汗)으로 즉위하였다. 발작(拔灼)이 정치를 잘못하여 민중들이 붙지 않았다. 그가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하는 바람에 당조(唐朝)에 있지 않은 틈을 타 하주(夏州)에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당조(唐朝) 장군 집실사력(執失思力)이 이들을 토벌하여 수만 명을 사로잡으니 발작(拔灼)이 단촐한 말을 타고 도주하다가 회흘부(迴紇部)에 살해되었다.

 

정관(貞觀) 20646설연타부(薛延陀部)의 나머지 무리가 56만이 남아있었는데 태종이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 대주도독(代州都督) 설만철(薛萬徹)을 보내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설연타부(薛延陀部)를 토벌하게 하였다. 당군(唐軍)이 크게 승리하고 설연타부(薛延陀部)는 서쪽으로 도망쳤다. 설연타부(薛延陀部)는 이남(夷男)의 형에 아들 돌마지(咄摩支)를 추대하여 이특물실가칸(伊特勿失可汗)으로 세웠다. 부락 7만여 사람을 이끌고 서쪽 옛 땅에 돌아갔다. 설연타부(薛延陀部)가 가칸(可汗)이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사신을 당조(唐朝)에 보내어서 울독군산(鬱督軍山, 곧 오도근산 於都斤山)의 북쪽에서 살고 싶다는 청을 넣었다. 영국공(英國公) 이세적(李世勣)이 구성 철륵(九姓鐵勒) 2만 기()를 이끌고 천산(天山)에 이르렀다. 돌마지(咄摩支)가 관군이 오는 것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 소사업(蕭嗣業, 당나라 장수)에게 투항하였다. 소사업(蕭嗣業)이 돌마지(咄摩支)를 데리고 경사(京師)에 이르니, 조서를 내려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에 제수하고 논과 집을 내려주었다. 돌마지(咄摩支)가 당나라로 들어간 뒤에 철륵(鐵勒) 우두머리가 몰래 돌마지의 부락을 장악한 채 두 부락에 대해 그대로 애매한 태도를 취하였다. 6월 태종이 병부상서(兵部尚書) 고안공(固安公) 최돈례(崔敦禮)를 보냈고 특별히 영국공(英國公) 이세적을 울독군산(鬱督軍山)의 북쪽에 진군시켜 설연타부(薛延陀部)를 격파하였다. 앞뒤로 참수한 사람이 5천여 명이었고 사로잡은 남녀가 3만여 명이었다. 8월 철륵 회골부(鐵勒回紇部), 발야고부(拔野古部), 동라부(同羅部), 복골부(僕骨部), 다람갈부(多濫葛部), 사결부(思結部), 아질부(阿跌部), 글필부(契苾部), 질결부(跌結部), 혼부(渾部), 곡설부(斛薛部) 11()이 각각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정관(貞觀) 21647, 글필(契苾), 회흘(迴紇) 10여 부락이 설연타부(薛延陀部)에 등을 돌리고 당조(唐朝)에 귀순하였다. 태종이 이 부락들을 가지고 13주부(州府)를 설치하였다. 회흘부(迴紇部)한해도독부(瀚海都督府, 지금 몽고국과 예니세이강 상류, 바이칼호 주변 지역)가 되고, 복골부(僕骨部)는 금미도독부(金微都督府, 지금 색릉격하(셀렝가 강) 수역의 하나인 악이혼하(鄂爾渾河, Orkhon River) 중류)가 되고, 다람갈부(多覽葛部, Täläŋüt는 연연도독부(燕然都督府, 지금 몽고의 울란바토르 일대)가 되고, 발야고부(拔野古部)는 유릉도독부(幽陵都督府, 지금 극로륜하(克魯倫河) 중류)가 되고, 동라부(同羅部)는 구림도독부(龜林都督府, 바이칼호로 유입되는 색릉격하(셀렝가 강) 수역의 하나인 토랍하(土拉河 Tuul River) 상류와 긍특산(肯特山) 서쪽 기슭)가 되고, 사결부(思結部)는 여산도독부(盧山都督府, 항애산(杭愛山) 남단)가 되고, 혼부(渾部)는 고란주(皋蘭州, 내몽고 오랍특(烏拉特, Urad) 중기(中旗) )가 되고, 곡설부(斛薛部)는 고궐주(高闕州, 지금 내몽고 항금후기(杭錦後旗) )가 되고, 해결부(奚結部)는 계록주(雞鹿州, 계록새(雞鹿塞) 북쪽에서 항금후기(杭錦後旗)에 이르는 땅)가 되고, 아질부(阿跌部)는 계전주(雞田州, 이곳은 다람갈(多覽葛) 서북이라고 하는데 다람갈 민족이 토랍하에서 일대에서 살았다)가 되고, 글필부(契苾部)는 유계주(榆溪州, 내몽고 오랍특(烏拉特, Urad후기(後旗) )가 되고, 사결별부(思結別部)는 대림주(蹛林州)가 되고, 백습부(白霫部)는 치안주(寘顔州)가 되었다. 각 우두머리가 임명되어 도독(都督), 자사(刺史)가 되었고 연연도호(燕然都護)를 설치하여 이 13주부(州府) 전부를 총괄하게 하였다.

 

*극로륜하(克魯倫河) 유역

 

정관(貞觀) 23649), 태종이 우효위랑장(右驍衛郎將) 고간밀(高侃密)을 보내어 철륵 회흘부(鐵勒迴紇部), 복골부(僕骨部)의 병사를 끌어들여서 거비가칸(車鼻可汗)을 습격하였다. 거비가칸(車鼻可汗) 부하인 추장(酋長) 가라록족(歌邏祿族) 니숙궐사리발(泥孰闕俟利發), 발색포부(拔塞匐部), 처목곤부(處木昆部) 막하돌사근(莫賀咄俟斤)이 거비가칸(車鼻可汗)에 등을 돌리고 차례로 당조(唐朝)에 투항하였다.

 

영휘(永徽) 원년(元年, 650, 설연타(薛延陀) 수령(首領) 중에 먼저 도망가 숨었던 사람이 그 나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는데 당() 고종(高宗)이 다시 계탄주(溪彈州)를 설치하였다.

 

영휘(永徽) 3652, 고종(高宗)이 좌무후대장군(左武候大將軍) 양건방(梁建方),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글필하력(契苾何力)을 보내어 연연도호(燕然都護)가 인솔하는 부대인 회흘(迴紇) 5만 기병(騎兵)을 이끌고서 서돌궐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를 토벌하였으니 참수한 사람이 5천 명이었고 사로잡은 거수(渠帥)60여 사람이었다.

 

측천(則天) 690705후돌궐 칸국(後突厥汗國)이 강성해져서 막북(漠北)에 철륵(鐵勒) 여러 부()가 차례로 병합되었다. 회흘부(迴紇部), 글필부(契苾部), 사결부(思結部), 혼부(渾部)가 감주(甘州). 양주(涼州) 땅으로 옮겨져 살게 되었다.

 

천보(天寶) 3744, 철륵(鐵勒)의 한 부()인 회골(回鶻)이 동돌궐(東突厥)을 멸망시켰고, 그 뒤에 역사책에는 더는 철륵(鐵勒)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