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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肅愼)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4

by 쥐눈이 2024. 8. 15.

*아래에 보충 자료들은 위키백과(維基百科)에 중국어로 나온 내용을 번역한 것이고 그곳에 사진들을 내려받았다.

칙륵(敕勒)은 또한 철륵(鐵勒), 고거(高車)라고도 칭하고 옛날에는 정령(丁零), 적력(狄曆)이라고도 일컬었다. 원시 돌궐족(突厥族)에서 갈라져 나온 고대 돌궐어족(突厥語族) 민족으로 원시 유목민족에 속한다. 사기(史記)에 적혀 있는 내용을 근거하자면, 정령(丁零)이 바이칼호(貝加爾湖) 동남쪽 부근에서 가장 처음으로 유목 생활을 하였고 위략(魏略)을 근거하자면 기원후 3세기에 예니세이 강(葉尼塞河) 상류에까지 그 터전이 확대되기 시작하여 옛 견곤(古堅昆)과 함께 섞여 살았으니 이 부락을 가리켜 서정령(西丁零)이라 하였다.

4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에 이르러 흉노(匈奴)와 선비(鮮卑)의 뒤를 이어 고거인(高車人) 및 유연인(柔然人)이 대막(大漠), 고비 사막 남과 북, 그리고 서북쪽에 광대한 지구에서 활동하였다. 대막(大漠)은 진()나라 때부터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데 오늘날 몽고국과 중국 내몽고 분계선이 되는 대막(大漠)이 바로 과벽(戈壁)이라고 하는 고비 사막이다.

 

* 칙륵의 자취가 있는 레나, 예니세이강, 바이칼호 등을 한 눈에 보여주는 지도

 

*예니세이(Yenisey) 강 수역도. 예니세이는 원주민 에벤키 말이니 그뜻은 큰 물(한강)’이라 한다.

예니세이강(葉尼塞河)은 옛날에 검하(劍河), 겸하(謙河)라고 일컬었는데 이는 북극해(北冰洋)로 유입되는 가장 큰 하류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긴 강이다. 이 강물은 몽고국(蒙古國)에서 발원하여 시베리아 북쪽 객랍해(喀拉海, 카라 해)로 들어가고 그 유역의 범위는 시베리아 중부의 대부분 지구를 포함한다.

 

*고비사막은 과벽(戈壁)이다. 고비(gobi)란 몽고어로 사막(沙漠), 자갈밭의 황량한 사막(礫石荒漠), 가뭄 지역이라는 뜻이다. 한문 서적에서는 옛날에 대적(大磧 , 큰 모래사장)이라 일컬었고 또한 한해사막(瀚海沙漠), 과벽탄(戈壁灘), 과벽사막(戈壁沙漠)이라고도 하였다. 지금 중국과 몽고국의 변경 대부분이다. 한해(瀚海)는 또한 바이칼호(貝加爾湖를 가리키기도 한다.

 

역사(歷史)

기원(起源)

중국에 고대 기록에 근거하자면 중원(中原)에서는 고대에 칙륵(敕勒)을 일컬어 정령(丁零, 또는 丁令, 丁靈, 釘靈으로 적었다이라고 하였고 뒤에 적력(狄歷)이라고 고쳐 불렀다. 또 칙륵(敕勒)과 고거(高車)라고도 일컬었으니 륵나하(勒拿河, 레나 강)에서 바이칼호(貝加爾湖) 부근까지에서 생활하였다. 묵특선우(冒頓單于) 때에 철륵은 그 신하로서 흉노(匈奴)에 소속되었다.

 

*륵나하(勒拿河, 레나 강) 수역과 주변 지도

 

강성(強盛)

남쪽으로 중원(中原)으로 옮겨 들어간 칙륵(敕勒)은 진()의 조정과 남조(南朝)에 의해 정령(丁零)으로 불리었다. 선비(鮮卑) 사람은 북방에 칙륵(敕勒) 사람들이 높고 큰 수레바퀴의 수레를 사용한 까닭에 고거(高車)”라고 하였는데원시 돌궐어“-tegreg”, 말수레의(馬車的)-”라는 뜻한자 소리로 바꾸어 칙륵(敕勒)”이 되었다. 또한 철륵(鐵勒)”으로도 바꾸어 기록하였다.

동한(東漢, 25~ 220) 때 명장 두헌(竇憲, ? ~ 92)이 북방에 각 부족을 연합하여 91년에 흉노를 쳐서 패배시켰다. 선비(鮮卑) 부락이 몽고고원으로 진입하자 몽고고원에 흉노 부락들은 모두 스스로 선비(鮮卑)라고 불렀으며 정령(丁零)도 또한 그중에 하나였다.

4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까지 흉노와 선비의 뒤를 이어 칙륵(敕勒) 사람과 유연(柔然) 사람은 중국 북부 국경 밖 내륙과 아시아주 사막(大漠)의 남북, 중앙아시아에 광활한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중원(中原) 땅에 살던 정령(丁零) 사람들은 적위(翟魏) 정권을 세운 적이 있었고 토랍하(土拉河, 툴라 강(Tuul))에서부터 지금에 남러시아 초원에도 그들이 살았다. 또 다른 설은, 정령(丁零)이 북적(北狄) 사람과 시베리아 토착민의 혼혈로 해서 생겨났고 칙륵(敕勒)은 흉노와 어떤 이리(늑대)”를 토템으로 하는 겨레와 혼혈이 되어 생겨났다고 하는데 한()나라 때 사람은 고거(高車)를 흉노의 외사촌으로 보고 있다.

487년 아복지라(阿伏至羅, 고비 사막 북쪽에 고거(高車)의 부복라부(副伏羅部) 우두머리)가 유연(柔然)의 통치를 벗어나기 위해 10만 이상의 사람을 이끌고서 서쪽으로 옮겨 거사(車師) 지역에서 자기의 정권을 세웠다.

 

남쪽으로 가 중원(中原)으로 옮겼다

4세기 중엽 음산(陰山) 일대에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선비(鮮卑)로 변화되었다. 저명한 칙륵가(敕勒歌)는 북제(北齊) 때 칙륵인(敕勒人)의 선비어(鮮卑語) 목가(牧歌)인데 뒤에 번역되어 한어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칙륵인(敕勒人)은 북위(北魏) 때 많은 사람이 북위(北魏)의 전쟁에 참여하였고 그중에 대부분은 선비인(鮮卑人)과 함께 점차 융화되어 한족(漢族)으로 들어갔다. 고거(高車)6()이 있는데 그중에 원흘(袁紇), 흘골(紇骨), 해비(解批)는 똑같이 회흘(回紇)과 관련이 있다.

칙륵(敕勒) 중에 북방의 일부 사람들은 550년 이후에 신하로서 돌궐칸국(突厥汗國)에 복종하였고 훗날에 회흘(回紇)이 되었으니 현대에 유고족(裕固族), 유오이족(維吾爾族)의 조상이다. 러시아 연방 살합(薩哈,  사하(Sakha, 야쿠티야)공화국 영역 내에 아고특(雅庫特) 사람들도 칙륵(敕勒) 사람의 후예이다.

 

*아고특(雅庫特) 지도

 

토랍하(土拉河, 툴 또는 툴라(Tuul) ) 한 곳에 복고(僕固), 동라(同羅), 원흘(袁紇), 발야고(拔野古), 사근(俟斤)이라고도 불리는 복라(覆羅)가 있었다.

지금 준갈이분지(準噶爾盆地) 남쪽 지역에 글폐부(契弊部, 글필(契苾)), 박락직부(薄落職部), 을질부(乙咥部), 소파부(蘇婆部), 나갈(那曷), 오호(烏護), 야질부(也咥部), 우니호부(于尼護部, 우니환(于尼讙)가 있었다.

준갈이분지(準噶爾盆地) 북쪽 지역에 설연타부(薛延陀部), 질륵아부(咥勒児部), 십반부(十槃部), 달글부(達契部)가 있었다.

합살극(哈薩克, 카자흐스탄) 일대에 가질부(訶咥部), 갈절부曷截部, 가살인(可薩人), 발홀부(撥忽部), 비간부(比幹部, 패절열격인(佩切涅格人), 구해부(具海部), 갈비실부(曷比悉部), 하차소부(何嵯蘇部), 발야말부(拔也末部), 알달부(謁達部, 갈달(渴達))가 있었다.

불름(拂菻) 동쪽에 은굴부(恩屈部, 오노구르(onogur)), 아란(阿蘭), 배욕구리부北褥九離部, 파엽기이(巴葉基爾), 지금 바시코르토스탄(Bashkortostan) 공화국), 복올혼(伏嗢昏, 보가이인(保加爾人), 불가(Bulgar) 사람가 있었다.

북해(北海, 바이칼호) 남쪽 지역에 도파부(都播部, 도와인(圖瓦人), 튜바(Tuva) 사람이 있었다.

* 불름(拂菻) :

신당서(新唐書)불름(拂菻)은 옛 대진(古大秦)이다.”라 하였다. 서해(西海)에 있어서 서해국(海西國)’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서인도(西印度)의 여덕아국(如德亞國) 연혁 옛 불름국(古拂菻國)은 대진(大秦)이 아니다. ()나라 때 바다를 사이에 둔 대진(大秦, 고대 로마)에게 여덕아국이 병합되었기 때문에 역시 대진(大秦)이라 하였다. ()나라 사람은 이를 일러 밀석이(密昔爾)’라 하였고 천주교(天主教)에서는 이를 여덕아(如德亞)라 하였으며 회교(回教)에서는 서다이기(西多爾其)’라 하였으니 모두 옛 서인도(古西印度) 변경이다. 지금은 아울러 아단국(阿丹國)에 들어간다. 따라서 사주지(四洲志)의 원본에는 이 내용이 없어 지금 따로 편집해 내어서 천주교(天主教) 원류를 기록한다.

海國圖志/026 新唐書》:拂菻古大秦也居西海上一曰海西國西印度之如德亞國沿革古拂菻國非大秦也唐時爲隔海之大秦所並故亦名大秦元人謂之密昔爾天主教謂之如德亞回教謂之西多爾其皆古西印度邊境今並入阿丹國四洲志原本無之今別輯出以志天主教源流

 

*토랍하(土拉河, 툴 또는 툴라(Tuul) ) 지도

 

*준갈이 분지(붉은 색 부분)

 

* 준갈이분지(準噶爾盆地) 지도 (바로 위 지도는 바이두에서 내려 받은 사진임)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 지도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은 동유럽에 볼가 강과 우랄산맥 사이에 있다. 

 

신화(神話) 기원

위서(魏書)안에 기록되기를, 지난날 흉노 선우(匈奴單于)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생김새가 매우 아름다워 부락 내 사람들이 모두 이 딸들을 보기를 선녀(仙女)로 보았다. 선우(單于)가 말하기를 이 두 딸을 어찌 일반 사람에게 시집보낼 수 있겠는가? 내가 앞으로 하느님께 바치리라!” 하였다. 선우(單于)가 서둘러 북방에 사람이 없는 곳에다 높은 대를 하나 마련하고 두 딸을 데리고서 그 위에 두었다. 4년이 지난 뒤 한 늙은 이리가 대 아래에 와서 밤낮없이 울어 재꼈고, 그리고 굴 하나를 팠다. 어린 딸 아이가 보고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께 바치실 것이다. 지금, 이 이리가 여기에 온 것은 어쩌면 바로 신령한 그 무엇이리니 이는 천사이다.” 하였다. 큰 딸아이가 동생이 떠나려는 것을 막으려 하였으나 그저 어린 딸 아이는 말을 듣고도 따르지 않고 대()를 떠난 뒤에 이리의 아내가 되어 아울러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 뒤에 자손이 불어나 고거(高車)의 선조가 되었다.

 

부족(部族)의 구성

고거(高車) 6()

적부(狄部)                                 원흘부(袁紇部) : 곧 훗날에 회골(回鶻)

곡률부(斛律部)                          곡비부(解批部)

호골부(護骨部)                          이기근부(異奇斤部)

 

십이씨족(十二氏族)

읍복리씨(泣伏利氏)                 질로씨(叱盧氏)

을전씨(乙旃氏)                        대련씨(大連氏)

굴가씨(窟賀氏)                        달박간씨(達薄幹氏)

아륜씨(阿崘氏)                         막윤씨(莫允氏)

사분씨(俟分氏)                         부복라씨(副伏羅氏)

걸원씨(乞袁氏)                         우숙패씨(右叔沛氏)

*신당서(舊唐書북적열전(北狄列傳)에 철륵(鐵勒) 15()

설연타(薛延陀), 글필(契苾), 회흘(迴紇), 도파(都播, 도와인(圖瓦人), 골리간(骨利幹), 다람갈(多覽葛), 복골(僕骨), 발야고(拔野古), 동라(同羅), 혼부(渾部), 사결(思結), 곡설(斛薛), 해결(奚結), 아질(阿跌), 백습(白霫).

舊唐書·北狄列傳》(卷一百九十九下列出鐵勒十五部薛延陀契苾迴紇都播圖瓦人)、骨利幹多覽葛僕骨拔野古同羅渾部思結斛薛奚結阿跌白霫

 

풍속 관습

정치, 사회조직

아복지라(阿伏至羅)가 출현하기 전에 고거인(高車人)은 전 부락을 호령하는 수령이 전혀 없었다. 각 부락 씨족(部落氏族)에는 각자의 군장(君長) 있어서 개성이 엉성하고 용맹한 고거인(高車人)은 일단 도적이 나타나면, 피붙이이고 같은 무리인 한, 곧바로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적에 대적하며 서로 의지하고 도와야 한다. 고거인(高車人)은 전투할 때에 싹 진()의 대형을 이룰 줄 모르고 대부분 돌격하여 치고 싸우는지라 전투할 때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언어

북사(北史고거전(高車傳)고거(高車)는 죄다 옛 적적(古赤狄)의 남겨진 씨들이다. 초기에 적력(狄歷)이라 불렀는데 북방에서는 이들을 고거(高車)’, ‘정령(丁零)’이라고 여겼다. 그 쓰는 말은 대략 흉노와 같으나, 때로 작은 차이가 있다. 더러는 그 선조는 흉노의 조카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고거인(高車人)의 언어는 흉노와 크게 서로 같고 그저 작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의식주, 그리고 이동수단

고거인(高車人)은 유목민족이다. 평소에 궁로(穹廬, 곧 파오, 천막) 안에서 머물며 풀과 물을 따라 옮겨 다니니 그들의 소와 양, 가축들의 생산은 유연인(柔然人)과 서로 같다. 복장은 들짐승의 가죽을 써서 바느질하여 만들고 먹는 물질은 대부분 육류이다. 고거인(高車人)은 오곡, 잡곡을 먹지 않고 술을 빚어 만들지 않고 다만 말젖을 발효시킨 것(馬酪)을 마신다. 고거인(高車人)이 제조한 수레, 수레바퀴는 높고 커서 바큇살이 매우 많다. 이로 인해 한() 땅의 사람들에 의해 고거(高車)라고 불리었다. 평소에 양 무릎은 굽혀 발바닥과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쪼그려 앉는 방식으로 앉고 예절을 중시하지 않으며 또한 청결 위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고거인(高車人)은 각자 생산한 가축들에게 도장을 찍어서 지진 흔적을 두니(탑가목(塔木加)), 이 때문에 비록 밖에서 방목하여 길러도 누군가 마음대로 빼앗을 수가 없다.

 

혼인

혼인(婚姻)은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혼서지와 폐백을 함()에 담아 보낼(納聘) 때 고거인(高車人)의 혼인 예절(聘禮)은 소와 말로써 혼인을 영예롭게 한다. 신랑 쪽 사람들은 밖에서 지낼 때 쓰는 들살이용 수레(營車)로써 말들을 에워싸고 있고 각시 쪽 사람들은 스스로 좋은 말을 골라서 우리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 나면 신랑 쪽 말 주인들은 말들을 놀라게끔 을러대야 한다. 이때 만약 말을 탄 사람이 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곧바로 말을 타고 떠날 수 있다.

장가가는 날, 주인은 손님을 초대하여 맞이하되 손님들 자리를 배정하는 법이 없이 파오(穹廬) 앞에서 손님 뜻대로 자리를 잡는다. 신랑 쪽 각시 쪽 사람들은 함께 마락(馬酪)과 익힌 고기를 지니고서 조각으로 나누고 잔치는 하루 내내 지속된다. 신랑 쪽 사람들은 으레 각시 쪽 천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동시에 신랑 쪽 사람들에게는 각시 쪽 집안에 말 무리에 나아가 좋은 말을 다 가지고서 돌아가기를 허락한다. 이때 각시 쪽 부모 형제들은 아까운 마음이 있더라고 어떤 말도 하는 법이 없다. 고거인(高車人)의 관습에 과부를 아내로 맞이하기를 꺼리지만, 평소에 그 여인을 잘 대우해 준다.

 

장례

고거인(高車人)은 누군가 하루아침에 죽게 되면, 산 자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서 죽은 자를 데리고서 앉아 있는 모습으로 구덩이에 자리하게 하고 동시에 죽은 사람에게 팔을 뻗어 활을 당기며 칼을 차고 창을 빗겨 끼게 하여 마치 살아생전의 모습을 갖게 하는데, 이 의식을 치를 때, 또한 파낸 흙이 도로 구덩이를 메워 시신에 직접 드러나지 않게 한다.

땅에 지진이나 전염병이 발생한 때에는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시작하고, 사태 뒤끝에 안전하여 무사하게 되면 곧 신께 감사하는 제의를 시작하니 신께 감사하는 굿이 벌어질 때 여러 가축을 많이 죽여 제의를 행하고 들짐승의 뼈를 태워 밤새워 지필 불더미로 쓴다. 달리는 말들이 주위를 맴돌며 달린다. 남녀노소 막론하고 모두 나와 이 모임에 참석한다. 재난 뒤끝에 별일 없는 사람들은 발돋움하며 춤을 추거나 음악 연주를 하지만, 만약 죽은 사람이 있는 집안이 있으면 이들은 슬피 읊조리며 울음을 운다.

 

풍습(習俗)

고거인(高車人)은 우레 치는 소리에 즐거이 기뻐한다. 우레 치는 일을 만날 때마다 바로 허공에 화살을 쏘면서 크게 소리를 지르기 마련이다. 그런 뒤에 붙이들을 데리고 떠난다. 가을철 말이 성장하여 살찌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우레가 쳤던 땅으로 돌아가 검은 숫양(公羊)을 땅에 묻고 불을 지피고 칼을 뽑으면 여자 무당이 비나리를 시작하고 무녀의 비나리, 곧 축수를 받은 자들은 무리로 대오를 지어 말을 타고 원을 그리며 바쁘게 달리되 백 번 원을 그리며 달리고서야 그만둔다. 각 사람은 또한 손에 한 묶음에 버드나무를 지니고 이를 땅 위에 세워두고 아울러 치즈를 탄 물을 뿌리는데 축원을 받은 자들의 부인들은 짐승 가죽으로 죽은 양의 싸서 머리 위에 이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써 그 위를 감는다. 이 모습은 마치 한족(漢族)의 관, 쓰개와 같은 점이 있다.

 

문화

고거인(高車人)은 춤추기를 사랑하고 좋아하여, 갈인(羯人) 출신인 북위(北魏) 때 사람 이주영(爾朱榮)이 일찍이 연회 자리에서 임회왕(臨淮王) 원욱(元彧)에게 칙륵(敕勒) 춤에 도전하기를 주문하였었다. 고거인(高車人)은 또한 목소리를 놓아 높은 소리로 노래하기를 사랑하고 좋아하였으니 선비인(鮮卑人)은 그 노랫소리가 이리의 울음과 닮았다고 보았다. 굿판이 벌어지고 있을 때 고거인(高車人)은 모두 모여 기분 좋게 노래를 읊조리는데 유명한 칙륵가(敕勒歌)는 북제(北齊) 때 고거(高車) 사람의 선비(鮮卑) 말로 된 목가(牧歌)이니 뒤에 한어(漢語)로 번역되었다.

칙륵가(敕勒歌)

칙륵가(敕勒歌)는 역사상 남아 있는 칙륵(敕勒) 사람들의 생활 환경을 묘사한 한 수의 악부시(樂府詩)이다. 그중에 뒤에 두 구()는 후대 사람에 의해 초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는 데에 할애되었다. 전해진 말이, 노래를 지은 사람은 동위(東魏)의 곡률금(斛律金)이라 한다. 칙륵가(敕勒歌)는 본디 선비어(鮮卑語)로 쓰여졌었는데, 한어(漢語)로 번역되는 바람에 노래의 가사 말 길이가 일정하지 못하다.

칙륵(敕勒) 냇물 음산(陰山) 아래에

하늘은 파오(穹廬)를 닮아 온 들녘을 두루 덮네

하늘은 시리게 푸르고 들녘은 까마득 멀어

바람이 불어오시면 풀잎은 누워 소 양을 바라보네

敕勒川陰山下

天似穹廬籠蓋四野

天蒼蒼野茫茫

風吹草低見牛羊

 

고고학적 발견

소련 고고학자가 예니세이강(葉尼塞河) 상류 지구에서 일련의 청동 문화 유적을 발굴하였으니 이를 가리켜 잡랍소극문화(卡拉蘇克文化, 카라수크 문화(Karasuk culture))라고 한다. 문화 층의 연대는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 사이이며 출토된 청동기를 근거로 보지면 청동(青銅) (), 청동 단검(短劍)등 물품을 포괄하는데 중국의 내몽고, 산서(山西), 섬서(陝西) 일대에 같은 종류의 청동기와 서로 특징이 비슷한 점이 있다. 현지 주민들은 인종학적으로도 몽고 사람의 특징이 섞여 있다.

카라수크 문화(卡拉蘇克文化)를 이은 탑가이 문화(塔加爾文化, 남 시베리아의 철기문화, 타가르 문화(Tagar Culture))는 이미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말을 기르는 일도 중요시하기 시작하였다. 무덤에 출토된 것은 눈에 띠게 장식품이 풍부하였고 나아가 무기를 대부분 지니고 있었다.

소련 학자들은 카라수크 문화(卡拉蘇克文化)와 타가르 문화(塔加爾文化, Tagar Culture)가 중국 사서에서 기록된 정령(丁零)과 대비될 만하다고 보고 있다. 다만 일반 학자들은 모두 카라수크 문화(卡拉蘇克文化)와 타가르 문화(塔加爾文化)를 정령(丁零) 서부에 이웃한 격곤(鬲昆)과 더불어 연계시키고 있다.

 

카라수크 문화(Karasuk culture)

야금술(Metallurgy)

*중국 야금술에 대한 역사상 영향. 신석기 시대 때 소규모에 초기 구리(copper) 산업 이후에 중원 땅은 상() 왕조 때까지 대초원의 야금술 (안드로노보 문화(Andronovo culture)), 세이마-투르비노(Seima-Turbino) 현상, 그리고 카라수크 문화(Karasuk culture)의 영향을 받았다.

 

* 카라수크 문화의 전파 지도

 

1 카라수크 문화. 동물 머리 꼴이 달린 굽은 날 칼(Animal-headed knife with curved blade)

 

2 카라수크 문화. 말 머리꼴이 달린 칼(Horse-headed knife)

3 카라수크 문화. 고리 달린 칼(Knife with ring)

 

 

 

4 카라수크 문화. 동물 머리 꼴이 달린 칼(Animal-headed knife)

 

5 카라수크 문화. 위에 동물 꼴이 달린 단검(Dagger with animal top)

 

6 카라수크 청동 도끼들(Karasuk bronze axes)

 

7 카라수크 대 상(商)나라 뿔 가진 동물 꼴이 달린 칼날 비교(기원전 13세기-11세기 제작)(Karasuk vs Shang horned animal blades 13th-11th century BCE)

 

 

8 카라수크 칼날 대 상(商)나라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칼날들 (Karasuk blades vs Shang dynasty Yinxu blades)

 

 

9 카파수크 문화의 칼날 대 상(商)나라와 주(周)나라의 칼날들 (Karasuk culture blades vs Shang-Zhou blad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