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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肅愼)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6

by 쥐눈이 2024. 8. 29.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계속

()나라 때는 복여위(福餘衞)에 속하였다.

() 초기는 원()나라 후손인 오량해(烏梁海)를 외위(外衞)에 두었으니 대령(大寧)에서부터 희봉(喜峰)을 밟아 선부(宣府) 가까이에 땅을 타안위(朵顏衞)’라 하였다. 본디 원()의 타타안원수부(朵顏元帥府)였다. 성조(成祖, 명나라 제3대 임금, 재위 기간 : 1402~ 1424)에 미쳐 대령(大寧)을 포기하고서 이 땅을 타안(朵顏)에 내리게() 되니 그 땅이 더욱 넓어져서 지금 열하특별구(熱河特別區)와 그 북쪽 지경의 땅이 모두 이에 속하였다. 서쪽 경계는 태령위(泰寧衞)요 북쪽 경계는 복여위(福餘衞, 夫餘衛)였다.

정통(正統) 12(1447)에 위랍특(衞拉特)이 강성하여서 군대를 이끌고 삼위(三衞)를 침입하니 삼위 가운데에 타안(朵顏)과 태녕(泰寧)은 모두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간청하였고 오직 복여위(福餘衞) 우두머리 규맹극(奎孟克)이 그 관할 아래에 있던 사람들을 이끌고 눈강(嫩江)으로 달아나 그 땅을 발판으로 나라를 만들었으니 바로 포특합(布特哈)이 복여(福餘)의 땅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다. 복여(福餘)는 금()나라 때의 포여(蒲與)와 이어있으니 바로 부여(扶餘)가 시대와 사람들 사이에서 굴러다니다 바뀐 소리이다.

  明屬福餘衞 明初以元後烏梁海置外衞自大寧歷喜峰近宣府曰朵顏衞本元之朵顏元帥府也迨成祖棄大寧以賜朵顏其地益廣今熱河特別區及其北境之地皆屬之西界泰寧衞北界福餘衞正統十二年衞拉特強盛以兵侵三衞朵顏泰寧皆不支乞降惟福餘衞長奎孟克率所部走嫩江據其地而國則布特哈在福餘境無疑矣福餘係金之蒲與即扶餘之轉音

 

* 외위(外衞) : 명나라가 남경(南京)과 북경(北京)이라는 두 수도를 갖추어 그 위()를 두었고 그 밖에 위소(衛所)를 외위(外衛)라 모두어 말하였다. 외위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행도지휘사사(行都指揮使司), 더러는 유수사(留守司)가 거느리게 하였다. 남경은 지금에 남경시이요 북경은 곧 베이징이다.

 

*위랍특(衛拉特) : 와랄(瓦剌)을 말한다. 몽고고원(蒙古高原) 서부의 부족이다. ()나라 때에는 알역랄척(斡亦剌惕)”, 명나라 때는 서몽고(西蒙古)를 일컬어 와랄(瓦剌, Wǎlà/Wǎlā)”이라고 하였다. 명나라 때 몽고가 도로 동몽고(東蒙古) 등의 세력을 끌어안았다이라 하고 청나라 때는 위랍특(衛拉特) 또는 액포특(厄魯特) 등에 이름이 있었다. 그 실제는 알적랄(斡亦剌), 또는 와랄(瓦剌)“oira衛拉의 한자로 바꾼 말이고 “d/은 몽고어의 복수접사(複數詞綴)이니 알역랄척(斡亦剌惕)/위랍특(衛拉特)은 바로 뭇와랄(眾瓦剌)이다.

역사상 몽고고원의 민족은 두 개의 기본 부분을 밟아서 조성이 되었는데 고대에 두 부분은 초원백성(草原百姓)」(전통적인 유목민족의 몽고족(蒙古族)이 중심이 된다.숲속에 백성(林中百姓)」(蒙古語:ойн иргэн,轉寫hoi-yin irgen알역랄척(斡亦剌惕), 불리아척(不里牙惕) 등 삼림부족(森林部族)을 포함한다이다. 훗날에 이르러 주요하게는 동부몽고(東部蒙古, 곧 중앙몽고(中央蒙古)와 서부몽고(西部蒙古, 이것은 와랄(瓦剌)이 위주가 된다등 양대 몽고어족군(蒙古語族群)으로 나뉜다. 와랄(瓦剌)이라는 뜻은 삼림(森林)의 백성(, 또는 사람)또는 이웃하여 가까운 사람(鄰近者)이다. 현대에는 이들을 막서몽고(漠西蒙古)라고 일컫는데 그 뜻은 큰 사막(大漠, 고비사막 戈壁沙漠) 서쪽에 사는 몽고부족이다.

와랄은 원래 예니세이 강(葉尼塞河) 상류인 팔하(八河) 지구에서 살았다. 수렵을 위주로 하고 낚시와 가축 기르기를 보조로 하는 생활은 삼림 속 백성(林中百姓)한 부분이다. 몽고사(蒙古史) 서적 중에 와랄(瓦剌)은 보통 위랍특(衛拉特)이라고 일컫지 몽고인(蒙古人)이라고 하지 아니하니 와랄(瓦剌)은 서부 몽고(西部蒙古) 둘레에 사는 돌궐계(突厥系)의 여러 부족에 오랜 기간 영향을 받아 이들 역시 돌궐화(突厥化)된 흔적을 가지고 있어서 와랄(瓦剌)은 동부 와몽고(東部蒙古)의 여러 부족과는 더욱더 동질감이 떨어진다. 16409월 객이객 몽고(喀爾喀蒙古)와 사위랍특(四衛拉特)의 왕 공문(公們)이 제정한 객이객(喀爾喀)위랍특(衛拉特) 법전(法典)에 나오는 조항들은 바로 상대방을 몽고(蒙古)와 위랍특(衛拉特)이라고 부른다. (유기백과)

 

*탈환(脫歡)과 야선(也先) 부자가 이끄는 와랄(瓦剌)이 전체 몽고고원을 통일하였고 한때 몽고 본부(蒙古本部, 달단(韃靼)또한 사위랍특(四衛拉特)의 하나로 포함되기도 하였다. 위의 지도는 1450년 무렵의 야선(也先, 에센(Esen) )이 이끌 때의 와랄 형세 지도이다. (유기문고)

 

* 사위랍특(四衛拉特) : 위랍특(衛拉特), 도이본(都爾本)이라고도 한다. 서몽고어를 쓰는 부락연맹체이다. 이 겨레 집단은 와랄(瓦剌)이 중심이 되며 도랍특(衛拉特)은 와랄(瓦剌)의 복수라고 한다. 처음에 와랄은 원나라 테무진 때에 사이베리아 숲에서 살았었던 민족으로 1207년 테무진에게 귀의하여 몽고제국 건설에 큰 힘을 보태었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에 귀의하였다. 그 세력이 15세기 초반부터 커지더니 내외몽고와 여진까지 정복하였고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동쪽으로는 조선 반도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 15세기 말부터 쇠락의 길을 걷다가 1634년에 패망한다. 사위랍특(四衛拉特)에는 크게 작라사부(綽羅斯部), 도이백특부(都爾伯特部), 화석특부(和碩特部), 토이호특부(土爾扈特部)가 있었고 작은 부락들도 포함하였다.

 

*17세기 초 , 사위랍특(四衛拉特, Dörben Oirat) : 유작라사(Choros, 由綽羅斯), 두이백특(杜爾伯特, Dorbet), 토이호특(土爾扈特 Torghut), 화석특(和碩特, Khoshut) 네 부()의 조직을 그린 지도. (유기문고)

 

*타안원수부(朵顏元帥府) : 가축을 방목한 목장은 지금 내몽고 자치구 흥안맹작이하(興安盟綽爾河) 유역에 있다. 타안산(朵顏山), 색악이제산(索嶽爾濟山)으로 인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그 수령은 원() 태조(太祖) 부장(部將) 자륵멸(者勒蔑)의 후손이다. 색악이제산(索嶽爾濟山)은 대흥안령 지맥으로 내몽고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동북부에 있다

 

*타안산(朵顏山) : 타인온도인(朵因溫都兒)이니 신산(神山), 보격달산(寶格達山)이라고도 한다. 흥안맹 과이심우익전기(興安盟科爾沁右翼前旗) 서북과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동오주목심기(東烏珠穆沁旗) 동북이 만나는 경계에 있다.

타안(朵顏) 사람들은 스스로를 올량합(兀良哈)”이라고 하니 몽고 올량합부(兀良哈部)가 옮겨와 타인온도아(朵因溫都兒, 또는 다연온도아(多延溫都兒))에 이르른 인연으로 해서 타안(朵顏)”으로도 부른다. 타안(朵顏), 다연(多延), 낙음(諾音)은 몽고어로 그 뜻은 부유(富有), 귀족(貴族), 장관(長官)이다.

온도아(溫都兒)”는 몽고어로 높다()”를 뜻하고 또한 이 뜻이 연장되어 ()”, “마루()”의 뜻이 되었다. “온도아(溫都兒)”는 만어(滿語)엔두리(enduri)”라는 소리에 가깝다. 지금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산은 지금 내몽고 흥안맹 찰뢰특기(興安盟紮賚特旗) 땅에 있으니 박격달오랍(博格達烏拉, 높게 솟은(高達) , 신신(神山)이라는 뜻이라 불리고 민간에서는 북대신산(北大神山)”이라 부른다.

옛날에 그 온전한 이름은 액객다연온도아(額客多延溫都兒)”였다고 하는데 직역하면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장관(長官)과 한가지인 신산(神山)”이라는 뜻이다. (바이두)

 

*과이심우익전기(科爾沁右翼前旗)의 서북쪽은 타안산(朵顏山)이라 여겨지는 보격달산(寶格達山)이 있는 곳이다. (유기문고)

 

*색악이제산(索嶽爾濟山)이 있는 내몽고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의 위치. 붉은 색 부분이 석림곽륵맹이고 색악이제산은 그 동북부에 있다. (유기문고)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 :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는 또한 타안 삼위(朵顏三衛)라고도 하니 타안위(朵顏衛), 태녕위(泰寧衛), 복여위(福餘衛)를 말미암아서 이루어졌고 대흥안령(大興安嶺)에서 동쪽 지구와 요서주랑(遼西走廊)의 서북 일대에 있었다. 원조(元朝)가 멸망한 뒤 변방 북쪽에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와 달단(韃靼), 와랄(瓦剌)등이 명() 초기 몽고제부(蒙古諸部)3대 부락이 되었다. 또 올량합 삼위는 대흥안령 동쪽에서 머물며 가축을 치던 몽고부족 오제엽특烏濟葉特과 관련이 깊은데 오제엽특(烏濟葉特)을 몽고황금사강(蒙古黄金史綱)에서는 올자(兀者)”라고 적고 있으니 올자(兀者)”란 만어(滿語)로 삼림(森林)을 뜻한다. 청나라 때는 오계(烏稽), 와집(窩集)으로도 기록하였다. 올량합 삼위의 하나인 복여위(福餘衛) 역시 스스로 올자(兀者)”라 일컬었다고 한다. 명조(明朝)에서 일컬은 올량합(兀良哈)은 몽고(蒙古) 긍특산(肯特山)에 분포한 올량합 만호(兀良哈萬戶)와는 같지 않다. (위키백과)

 

* 전료비고(全遼備考)에 기록된 삼위(三衞) :

삼위(三衞)의 하나는 태녕(泰寧, 또는 大寧)’을 말한다.

그 땅은 서쪽으로 광녕전둔위(廣寧前屯衞) 변동(邊東, 변방 동쪽)에서부터 광녕(廣寧) 백운산(白雲山)에 이른다. () 홍무(洪武) 21(1388)에 위()를 설치하고서 옛 원나라 때에 요왕(遼王) 아례실리(阿禮失里, 테무진의 아우 패인지근 철목가알적근(孛兒只斤 鐵木哥斡赤斤)의 후손임)를 지휘(指揮)로 삼고 탑빈첩목아(塔賓帖木兒)을 지휘동지(指揮同知, 동지는 부()의 장관의 보좌관)로 삼아 한 해에 두 번 말을 바치게 하였다. 두어 해 지나고서 다른 부()를 규합해서 변경을 침범하니 동쪽은 순조로운데 서쪽은 거스르고(陽順陰逆) 있어서 이때까지 편안한 때가 없었다. () 말기에 보이는 객이객(喀爾喀), 속파해(速把亥) 등이 그 후손이다. 】  다른 하나는 복여(福餘)’라 한다.

그 땅은 서쪽으로 광녕(廣寧) 백운산(白雲山)에서부터 일어나 동쪽으로 개원(開原)에 이르러 그친다. () 홍무(洪武) 21(1388)에 위()를 설치하여서 옛 원()나라 혜녕왕(惠寧王) 해살남답해(海撒男答奚)를 지휘동지(指揮同知)로 삼아 한 해에 두 번 말을 바치게 하였다. 정통(正統, 1436~ 1449) 사이에 야선(也先)과 함께 이 지역에 들어와 도적질하였으나, 이익을 얻지 못하자 도리어 야선(也先)에게 약탈을 당하여 그 뒤에 마침내 쇠약해졌다. 】   

다른 하나는 타안(朵顏)’이라고 한다.

그 땅은 개원(開原)에서부터 시작되어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그친다. () 홍무(洪武) 22(1389), ()를 두어 타안 원수(朵顏元帥) 달로홀찰아(脫魯忽察兒)를 지휘동지(指揮同知)로 삼았다. 한 해에 두 번 말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뒤에 드디어 동쪽이 순조로웠는데 반하여 서쪽이 거슬렀으니(陽順陰逆), 매번 달단(鞬靼)을 이끌고 들어와 습격하였다. 계정(啟禎, 天啟崇禎을 함께 부르는 연호. 천계(天啟)는 명 희종의 연호 1621~ 1627년과 숭정(崇禎)은 사종(思宗)의 연호, 1628~ 1644) 때에 이르러 36 가문의 우두머리 합라진부(哈喇慎部), 포안대길(布顏台吉), 소포지(蘇布地, 원나라 개국공신 도륵멸(者勒蔑)14대손) 등이 본조(本朝)에 바깥 울타리(신하의 나라를 비유)가 되었다.

객이객(喀爾喀) : 16세기 중엽 이후 고비사막 북쪽에 살았던 몽고 겨레 부족에 대한 이름이다. 객이객하(喀爾喀河)에 살아서 그 이름을 얻었다 한다. 객이객하는 지금에 합라합하(哈拉哈河) 즉 할흐강(Khalkh River)이다. 명나라 때는 한합(罕哈)이라 하였다.

속파해(速把亥) : 명나라 때 태녕(泰寧) 마을의 우두머리.

야선(也先, 에센 Esen) : 1407~ 1454년까지 살다 갔다. 몽골 서부의 오이라트(oirat, 아로득(阿魯得))의 우두머리이자 북원(北元)의 대칸(재위 기간 : 1453912~ 1454)이었다. 청나라 때 이름은 액삼(額森)이다. 오이라트는 명나라에서는 와랄(瓦剌), 청나라에서는 위랍특(衛拉特)이라 불렀다. 북원(北元)은 명나라 주원장에 밀려 몽골 고원 초원으로 돌아간 원나라의 후속 나라로 1368~ 1635년까지 존속하였다.

합라신부(哈喇慎部) : 객라심부(喀喇沁部, 카라친(Kharchin))이다. 합라신(哈喇臣), 합라극친(哈拉克亲)이라고도 한다. 객라심(喀喇沁)은 그 뜻이 지켜 보호하는 자(守衛者)’이다. 몽고어로는 합일심(哈日沁)”이라 발음한다고 한다. 원나라 때는 합라적(哈剌赤), 명나라 때는 합라진(哈剌嗔), 청나라 때는 객라심(喀喇沁)이라 불리었다. 지금 내몽고 객라심기(喀喇沁旗) 등지에 살고 있다. 그 기원은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의 아모하(阿姆河, 아무 다리아(Amudaryo)) 유역에 살던 오고사(烏古斯 Oghuz사람이라 하고, 또는 13세기 원나라 대신 반도찰(班都察)과 토토합(土土哈) 부자(父子)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오량해(烏梁海) : ()나라 때에 도파(都播), 또는 도파(都波)이다. ()나라 때는 독파(秃巴), 독파사(秃巴思)라고 일컬었고 명()나라 때는 올량합(兀良哈), 오량한(烏梁罕)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주로 서역을 근거로 하여서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지금 바이칼호 서남쪽 있는 당노산(唐努山)에 사는 오량해를 당노 오량해(唐努烏梁海)라 하고 아이태산(阿爾泰山, 알타이산맥)에 사는 사람들을 아이태 오량해(阿爾泰烏梁海)라 하며 아이태락이(阿爾泰諾爾, 신장(新疆) 지구) 둘레에 사는 사람들을 아이태락이오량해(阿爾泰諾爾烏梁海)라 일컫는다. 지금 이 자료에서 말하는 흑룡강쪽 오량해는 청조전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청조전기(清朝前紀) : 올량합(兀良哈)은 산융(山戎)이다. 역대(歷代)로 혼막해(渾莫奚)이고 해거란(奚契丹)이다. (명나라 홍무(洪武) 22, 1389)에 대군(大軍)이 북호(北胡)를 정벌하여 이기니 타안원수(朵顏元帥)들이 사람을 보내와 알현하고서 바깥 울타리(外藩)이 되기를 원하자 명나라 임금이 조서를 내려 그 땅에 삼위(三衞)를 설치하였다. 전영(全寧)에서 희봉(喜蜂, 연산산맥 동쪽 부분인 하북성 승덕시와 당산시 사이에 위치)에 이르는, 선부(宣府, 宣府鎮, 지금 장가구시 선화부) 가까이에 있는 것을 타안(朶顔)”이라 하였다. 금의(錦義)부터 광녕(廣寧)을 밟아 요하(遼河)까지를 태녕(泰寧)”이라 하였다. 황니와(黄泥窪, 요양시 요양현)부터 심양(瀋陽), 철령(鐵嶺)을 넘어 개원(開原)까지를 복여(福餘)”라 하였다. 清朝前紀/第三篇 兀良哈山戎也歷代爲渾莫奚爲奚契丹時大軍征敗北胡朵顏元帥等各差人來朝願爲外藩詔以其地置三衞自全寧抵喜蜂近宣府曰朶顔自錦義歷廣寧至遼河曰泰寧自黄泥窪踰瀋陽鐵嶺至開原曰福餘

 

全遼備考  (林佶 撰 三衞者   一曰泰寧 其地西自廣寧前屯衞邊東至廣寧白雲山明洪武二十一年置衞以故元遼王阿禮失里為指揮塔賓帖木兒為指揮同知歲再貢馬數年之後即糾他部犯邊陽順陰逆迄無寧時明末喀爾喀速把亥等即其後也】   一曰福餘 其地西自廣寧白雲山起東至開原止明洪武二十一年置衞以故元惠寧王海撒男答奚為指揮同知歲再貢馬正統間同也先入寇不得利反為也先所掠後遂衰】   一曰朵顏 其地自開原起至山海關止明洪武二十二年置衞以朵顏元帥脫魯忽察兒為指揮同知歲再貢馬後乃陽順陰逆每導鞬靼入犯至啟禎間三十六家之長哈喇慎部布顏台吉蘇布地等遂為本朝外藩

 

*올량합삼위(兀良哈三衛)1580년 때를 표시한 지도이다. 찰합이 본부(察哈爾本部)가 동쪽으로 옮기기 전에 타안(朵顏), 태녕(泰寧), 복여(福余, 부여(扶餘)등 삼위(三衛)인데 막북(漠北, 고비사막)의 올량합(兀良哈)은 바로 몽고 역사 서적 중에 나오는 달연칸(達延汗)이 분봉(分封)한 긍특산(肯特山), 알란하(斡難河, 악눈하(鄂嫩河)) 지역에 있던 6만 호()의 좌익 올량합 만호(左翼兀良哈萬戶, 오량해(烏梁海)이니 이 둘은 서로 다르다.

찰합이부(察哈爾部)는 몽고제국 때부터 청나라 초 때까지의 몽고부락이다. ()나라 강희(康熙) 141675에 찰합이부(察哈爾部) 수령 포이니(布爾尼)가 삼번(三藩)의 난을 틈타 3천의 사람을 이끌고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2개월 뒤에 청나라 정부에 진압을 당하자 찰합이(察哈爾) 몽고인(蒙古人)이 중국 동북지금의 동북과 내몽고 동부를 따라 옮겨 다륜락이(多倫諾爾, 내몽고 소재 ) 일대로 옮겨져 다시는 세습(世襲)되는 찰살극(扎薩克, 집정관(執政官)을 뜻한다)을 마련하지 못하고 팔기 찰합이(八旗察哈爾)로 만들어져 청조(清朝)의 이번원(理藩院)과 만주인(滿洲人) 찰합이도통관리(察哈爾都統管理) (몽인(蒙人)이 몽()을 다스린다는 권리를 상실하였다에 귀속되었다. (유기문고)

찰합이부(察哈爾部)가 동천(東遷)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올량합삼위(兀良哈三衛) 지도 (바이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