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당에서는 명나라 때 설치한 타안 삼위(朶顏 三衛)에 관련된 여러 부(部)를 소개한다. 여기에서 주로 유기(위키)백과 중문판에 나온 부(部)와 그에 딸린 사진들을 알리는데 역사상 명(明), 청(淸) 시대에 있었던 부(部)의 위치와 지금 지도상에 나타나는 그들의 위치에 어떤 다름이 있는지 아직 가려내지 못하였다.
어비역대통감집람(御批歴代通鑑輯覽) 권101
이미 여러 번 달단(韃靼)에게 약탈을 당하자 끝내 그 땅에다 삼위(三衛)를 설치하였으니 “태녕(泰寧) ” 〈지금 토묵특(土黙特), 아로과이심(阿嚕科爾沁) 등의 부(部)가 태녕위(泰寕衛)의 옛 땅이 된다.〉이요 “타안(朶顔)” 〈지금 객랄심(喀喇沁), 오한(敖漢), 나만(奈曼, 나만은 ‘여덟’을 뜻한다. 내만(乃蠻)이라고도 한다), 옹우특(翁牛特), 파림(巴林) 등의 부(部)와 열하(熱河) 오청(五㕔)이 타안위(朶顔衛)의 옛 땅이 된다〉이요 “복여(福餘)” 〈지금 과이심(科爾沁) 곽이라사(郭爾羅斯), 두이백특(杜爾伯特), 찰뢰특(札賚特) 등의 부(部)가 복여위(福餘衛)의 옛 땅이 된다〉이었다. 부(部)의 우두머리(長)로 하여 각자 그 무리를 거느리고서 서로를 지원하게 하였다. 이 세 위 중에서 타안(朶顔)이 유달리 땅이 험하였고 강성하였다.
御批歴代通鑑輯覽 (四庫全書本)/卷101 已數為韃靼所抄乃即其地置三衛曰泰寧〈今土黙特阿嚕科爾沁等部為泰寕衛故地〉曰朶顔〈今喀喇沁敖漢奈曼翁牛特巴林等部及熱河五㕔為朶顔衛故地〉曰福餘〈今科爾沁郭爾羅斯杜爾伯特札賚特等部為福餘衛故地〉俾部長各領其衆互為聲援獨朶顔地險而强
*복여위 타안위 태녕위(泰寕衛, '大寕衛'로도 적는다) 지도 (바이두)
◉태녕위(泰寕衛)에 속한 부(部) 토묵특부(土黙特部), 아로과이심부(阿嚕科爾沁部)
1. 토묵특부(土黙特部) : 13세기 이후에 형성된 몽고부락이다. 현재 주요하게는 호와호특(呼和浩特, 그 뜻은 ‘푸른 빛의 성(城)’이다. 내몽고자치구 후허하오터 시(市)이다)에서 살고 있고 일부는 요녕(遼寧) 서부에서 살고 있으니 대다수는 정착 생활에 농사를 짓는다. 「토묵특(土默特)」이라는 이름은 「만호제(萬戶制)」에서 근원한다.
역사(歷史) :
독마석부(禿馬惕部)
9~13세기에 토묵특(土默特)의 이름은 바이칼호(貝加爾湖) 일대에서 살았던 독마석(禿馬惕)에 그 기원이 있으니 이들은 “숲속 백성(林中百姓)”의 한 부분이었다. 칭기스칸(成吉思汗)의 수하인 할아적(豁兒赤)에 반대하고 박이홀(博爾忽)을 살해한 탓에, 뒤에 막남(漠南, 고비사막 남쪽) 일대에 배치된다.
황금가족(黃金家族)의 토목특부(土默特部) :
토목특(土默特)에 대한 이야기는 15세기 말엽의 역사책에 보인다. 16세기 초, 달연칸(達延汗)이 동몽고(東蒙古)를 통일하고 토묵특(土默特)을 우익 삼만호(右翼三萬戶)의 하나로 만들었고 그 뒤에 달연칸(達延汗)의 손자 엄답(俺答)과 그 후손을 밟아서 통령(統領)을 이어갔다. 토묵특 만호(土默特萬戶)에 열두 토묵특(十二土默特, 다륜토묵특(多倫土默特)/다라토만(多羅土蠻)등 열 둘의 큰 부락과 작은 부락들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구성)이라 부른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다라토만(多羅土蠻), 만관진(滿官嗔), 위독신(委兀慎), 독심(兀甚), 팔요(叭要), 올로(兀魯), 토/왕길랄(土/王吉剌)」 등 여러 부가 좌(左)와 우익(右翼)으로 나뉘었다. 16세기 중엽, 토묵특(土默特)이 풍주탄(豐州灘)을 점거하고(지금에 호화호특(呼和浩特) 일대) 몽고 우익(蒙古右翼)을 제압하였으며 좌익(左翼)을 배제하여 엄답(俺答)이 「대명금국(大明金國)」을 건국하였고 뒤에 명조(明朝)에게 순의왕(順義王)으로 책봉되었다. 엄답은 몽고에서 황교(黃教, 티벳불교이니 격로파(格魯派)라고도 한다)를 넓혔고 바깥으로 토묵특의 세력을 확장시켜(불교를 통해 티벳과 몽고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 한다) 일부는 청해(青海)로 옮겨가 살기도 하였다. 17세기 초, 토묵특(土默特)이 쇠락해진 뒤에 한 갈래는 동쪽으로 옮겨 요서(遼西)로 가서 청(清)나라 때 토묵특우익기(土默特右翼旗)의 전신이 되기도 하였다. 1628년 풍주탄(豐州灘)의 토묵특부(土默特部)는 몽고 마지막 대칸(大汗)인 임단칸(林丹汗)이 이끄는 찰합이부(察哈爾部)에게 공격당하여 궤멸 되었다. 1632년(명(明) 숭정(崇禎) 5년이자 후금(後金, 청나라의 전신) 천총(天聰) 6년), 황태극(皇太極)에 항복하고 붙으니 청(清)에서는 ‘귀화성 토묵특(歸化城土默特, 지금 내몽고 자치구 토좌(土左)와 토우(土右) 두 기(旗)의 바탕이 된다)’이라고 불렀다. 같은 해, 청해(青海) 지구의 토묵특(土默特)이 외객이객(外喀爾喀)의 작극도태길(綽克圖台吉)에게 잔인하게 깨졌다.
일부 토묵특부(土默特部) 몽고인은 성근달이한(星根達爾漢)이 인솔하고 있었는데 대대로 호륜국(扈倫國) 장성(張城)에서 살던 나랍씨(那拉氏)의 영지를 공격하고 점거하는 바람에 성(姓)을 나랍(那拉)으로 바꾸었고 그 뒤에 부(部)의 무리는 엽혁하(葉赫河, 지금에 길림성 사평시(四平市) 철동구(鐵東區)에 위치, 여허(Yehe 葉赫)강 상류는 역사상 해주여진(海西女眞) 엽혁부가 살았던 곳이다)로 옮겨가 살아서 인하여 「엽혁국(葉赫國)」이라 불렀으며 여진 엽혁부(女真葉赫部, 엽혁은 여진 씨족 부락의 하나이다) 구성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또다른 토묵특부(土默特部) 몽고인 부락은 수령 악목포초호이(鄂木布楚瑚爾)가 이끌었는데 동쪽으로 옮겨가 요서(遼西) 일대에 이르렀고 뒤에 청(清)나라 초기, 후금(後金)에 의지하여 붙어서 토묵특(土默特) 좌익찰살극기(左翼扎薩克旗)와 우익찰살극기(右翼扎薩克旗)에 편성되었다. 지금 조양시(朝陽市)와 부신시(阜新市) 경내이다.
* 토묵특기(土黙特旗), 아로과이심기(阿嚕科爾沁旗) 위치
위 지도는 내몽고자치구 지도 내에서 표시한 토묵특기와 아로이심기이다.
위 지도는 적봉시(赤峰市) 안에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의 위치를 보여준다. 두 지도 모두 바이두에서 내려받았다.
*민국(民國, 중화민국, 1912년—1949년) 시기에 열하(熱河) 지도. 토묵특기가 이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위 지도들과는 지역이 다르다.
*엄답칸(俺答汗)의 초상화이다. 이는 튀메드 몽골(Tümed Mongols)), 즉 토묵특부(土默特部)의 칸(汗)을 지냈다. 토묵특 엄답칸(俺答汗)에게 명나라에서 준 봉호인 순의왕(順義王)이 있다. 엄답칸의 재위기간은 1542년에서 1582년 2월 26일까지이다.
◉타안위(朶顔衛)에 속한 부(部) 객라심(喀喇沁), 오한(敖漢), 나만(奈曼, 나만은 ‘여덟’을 뜻한다. 내만(乃蠻)이라고도 한다), 옹우특(翁牛特), 파림(巴林) 부(部)와 열하(熱河) 오청(五㕔)
1. 객라심부(喀喇沁部, 카리신(Qaracin)) :
또한 합라신(哈喇臣), 합라신(哈喇慎), 합라극친(哈拉克親)으로도 적는다. 이는 13세기 이래로 형성된 몽고 부락이다.
15세기 전반에 패래(孛來, 당시 몽고 본부의 부족장으로 객라심부 사람)에 속하였고 15세기 말엽에는 역복랄(亦卜剌)이 거느린 영사포부(永謝布部, 동몽고(東蒙古)부락) 십영(十營)의 하나가 되었다. 1510년, 달연칸(達延汗)이 역복랄(亦卜剌)을 격퇴하고 객랄심(喀喇沁)을 일곱 악탁극(七鄂托克, 악탁극(鄂托克)은 만호(萬戶) 아래에 둔 군사행정(軍事行政) 단위)으로 나누어 6만호(萬戶) 중에 우익영사포만호(右翼永謝布萬戶) 부락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때 객라심(喀喇沁)은 주로 하투(河套) 지구에서 활동하였고 뒤에 달연칸(達延汗)의 손자 곤도력합(昆都力哈)의 인솔을 따라서 그들의 목초지(牧地)를 명조(明朝)의 독석구(獨石口) 변방 밖에 개평(開平, 원상도(元上都) 옛터로, 지금에 내몽고 자치구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정람기 상도진(正藍旗上都鎮)이니 난하(灤河) 강변에 있다)부근을 따라서 동쪽으로 넓혀서 타안위(朵顏衛) 소속의 지구(지금에 적봉시(赤峰市)와 북경시 북부)에까지 이르렀다. 타안위(朵顏衛)도 객라심(喀喇沁)의 이름을 대대로 썼는데 타안(朵顏) 수령은 자륵멸(者勒蔑, 몽고제국 초기의 위대한 장군으로, 올량합씨(兀良哈氏)이다)의 후손이기 때문에 올량합(兀良哈, 타안과 올량합이라는 두 말은 통용되는 듯)을 성(姓)으로 하였다. 1628년, 찰합이 만호(察哈爾萬戶) 임단칸(林丹汗)이 토묵특(土默特) 「조성(趙城)」(소성(召城)이니 지금 내몽고 호화호특(呼和浩特))에서 객라심(喀喇沁) 소속의 영사포만호(永謝布萬戶)를 크게 깨뜨리니 객라심부(喀喇沁部)가 무너져 흩어졌고 이후에 나머지는 각 부(部)에 분배되었다.
청(清) 태종(太宗) 천총(天聰) 초에 타안(朵顏) 수령 소포지(蘇布地) 등이 소속 부족 사람을 이끌고서 황태극(皇太極, 곧 청 태종)에 귀순하여 붙었다. 청나라 조정은 객라심(喀喇沁)을 두 찰살극기(扎薩克旗)로 편성하였다. 강희(康熙) 연간에 한 찰살극기(紮薩克旗) 하나를 더 편성하였다. 이 객라심(喀喇沁) 삼기(三旗)는 바로 객라심좌익기(喀喇沁左翼旗), 객라심우익기(喀喇沁右翼旗), 객라심중기(喀喇沁中旗)이고 탁색도맹(卓索圖盟)에 속한다. 지금 내몽고자치구 적봉시(赤峰市)에 객라심기(喀喇沁旗)가 있고 요녕성(遼寧省) 조양시(朝陽市)에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 몽고족자치현이 있다.
2006년에 내몽고자치구 객라심기(喀喇沁旗)의 총 인구는 33.36만인데 그중에 몽고족 인구는 13.64만 명이다. 몽고족 인구가 형성된 근원에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한 부분은 명조(明朝) 초기에 북방에서 남하한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 몽고인이고 다른 하나는 명조(明朝) 말년에 악이다사(鄂爾多斯, 내몽고자치구 소재)에서 동쪽으로 옮겨온 객라심부(喀喇沁部) 몽고인이다. 올량합부(兀良哈部)와 객라심부(喀喇沁部) 그 형성과 이동과정에서 점차 서로 융합되어 지금에 객라심기(喀喇沁旗)를 이루었다.
2. 오한부(敖漢部) : 오한부(敖漢部)는 희봉구(喜峰口) 바깥에서 경사(京師) 1천 10리에 이른다. 동서 거리는 160리요 남북 거리는 280리이다. 동쪽은 나만(柰曼)이고 서쪽은 객라심(喀喇沁)이며 남쪽은 토묵특(土默特)이고 북쪽은 옹우특(翁牛特)이다.
악한(鄂罕)으로도 적는다. 이 부는 명대(明代) 찰합이(察哈爾) 8부(部, 북원(北元) 이래로 동몽고 만호(東蒙古 萬戶)를 한 부분을 이룬 부락)의 하나였고 청조(清朝)에서는 몽고부락이었다. 오한(敖漢)은 명(明)나라 말기가 돼서야 출현한 부(部) 이름이다.
달연칸(達延汗)의 아들 올로사패라(兀魯思孛羅, 또는 도로박라특(圖魯博羅特)이라고도 하지만 이 부분은 논쟁거리가 남아있다)의 증손자 대청두릉(岱青杜棱)은 인솔한 부(部)를 오한(敖漢)이라 부르니 찰합이만호(察哈爾萬戶)에 속한다. 청(清) 태종(太宗) 천총(天聰) 원년(元年, 1627년), 대청두릉(岱青杜稜)의 아들 색락목두릉(索諾木杜棱)이 아우 색신탁리극도(塞臣卓哩克圖)과 황태극(皇太極)에 귀순하여 붙었는데 황태극(皇太極)이 개원(開原, 지금 요녕 개원(開原))의 점유지(屬地)에서 색락목두릉(索諾木杜棱)를 살게 하였다가 색락목두릉(索諾木杜棱)이 사사로이 성경 위장(盛京圍場)에서 사냥하자 개원(開原)의 국가 점유지(屬地)를 회수당하였고 색릉목두릉(索諾木杜棱)은 도로 원래 유목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청(清) 태종(太宗) 숭덕(崇德) 원년(元年, 1636년), 오한부(敖漢部)는 하나의 찰살극기(紮薩克旗)로 편입되어 소오달맹(昭烏達盟)에 붙여졌다. 지금 내몽고 적봉시(赤峰市)에 오한기(敖漢旗)가 있다.
3. 나만부(奈曼部) : 이 부는 명대(明代) 찰합이 8부(察哈爾八部)의 하나였고 청조(清朝) 때에 몽고부락이었으니 「나만(奈曼)」은 그 뜻이 「팔(八)」이며 칭기스칸(成吉思汗)이 정벌활동을 할 때에 ‘내만부(乃蠻部)’와 같은 이름이다.
16세기 초, 달연칸(達延汗)이 동몽고(東蒙古)를 통일하고 그 아들 올로사패라(兀魯思孛羅, 또는 도로박라특(圖魯博羅特)이라 하는데 논쟁거리가 남아있다)의 증손자 액삼위정(額森偉征)이 나만부(奈曼部)를 총괄하였으며 찰합이만호(察哈爾萬戶)에 속하였었다. 청(清) 태종(太宗) 천총(天聰) 원년(元年, 1627년), 액삼위정(額森偉征)의 아들 곤초극(袞楚克)이 인솔 부족을 이끌고 황태극(皇太極)에 귀순하여 붙으니 화석제(和碩齊)라는 호를 내렸고 옛 땅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다. 다음 해 청나라 군대가 찰합이(察哈爾)를 정벌할 때 따라가서 공을 세워 달이한(達爾漢)이라는 호를 내렸다. 청조(清朝) 숭덕(崇德) 원년(元年, 1636년), 나만부(奈曼部)를 엮어 하나의 찰살극기(紮薩克旗)를 만들고 소오달맹(昭烏達盟)에 붙였다. 지금 내몽고자치구 통료시(通遼市)에 나만기(奈曼旗)가 있다.
4. 옹우특부(翁牛特部) : 이 부는 또한 왕류(往流), 옹리곽특(翁里郭特)으로도 적는다. 이는 명대(明代)와 청조(清朝) 때의 몽고 부락이었다.
칭기스칸(成吉思汗)의 어린 아우 철목가알적근(鐵木哥斡赤斤)의 후손이 탑아하(塔兒河, 눈강(嫩江) 지류인 도아하(洮兒河)이다) 유역에 자리 잡았으니 옹우특(翁牛特)은 「왕이 거느려 갖은 것(王所領有)」이라는 뜻이며 철목가알적근(鐵木哥斡赤斤)의 후손은 원(元)나라 때 요왕(遼王)을 지냈다. 홍무(洪武) 22년(1389년), 명조(明朝)가 태녕위(泰寧衛)를 설치하고 요왕(遼王) 아찰실리(阿札失里)를 지휘사(指揮使)로 삼았다. 뒤에 남쪽으로 옮겨 금주(錦州), 의주(義州) 변방 밖에 이르렀다. 16세기 중엽 후에 찰합이(察哈爾), 내객이객(內喀爾喀)의 침입에 따른 시끄러움을 받았다. 알적근(斡赤斤) 12세손(世孫) 파언대홍과이(巴彥岱洪果爾)가 낙안(諾顏, 몽고에서 ‘君, 領主’를 말함)이었을 이끌던 부(部)를 비로소 옹우특(翁牛特)이라 불렀다. 청(清) 태종(太宗) 천총(天聰) 6년(1632년), 파언대홍과이(巴彥岱洪果爾)의 증손자 손두릉(遜杜棱)과 동대청(棟岱青)이 후금(後金, 청나라)에 귀순하여 붙으니 청나라는 이들을 두 찰살극(二扎薩克旗)에 엮어 넣고 소호달맹(昭烏達盟)에 붙였다. 지금 내몽고자치구 적봉시(赤峰市)에 옹우특기(翁牛特旗)가 있다.
5. 파림부(巴林部) : 이 부는 명대(明代)와 청조(清朝) 때에 몽고 부락이었다. 그 명칭은 원(元)나라의 파아린 부락(巴阿鄰部落)에서 기원한다.
달연칸(達延汗)이 육만호(六萬戶)를 세울 때 객이객 만호(喀爾喀萬戶)는 좌익삼만호(左翼三萬戶)의 하나가 되었다. 객이객만호(喀爾喀萬戶)에 달연칸(達延汗) 아들 격례산지태길(格列山只台吉)을 서쪽으로 옮겨가게 하여서 외객이객(外喀爾喀)을 만들고 납력부랄태길(納力不剌台吉)을 남쪽을 옮겨가게 하여서 내객이객(內喀爾喀)을 만들어 나누어 관리하였다. 납력부랄태길(納力不剌台吉) 아들 호라합적(虎喇哈赤)의 다섯 아들인 올파새(兀把賽), 속파해(速把亥), 올반(兀班), 초화(炒花), 답보(答補)가 찰로특(扎魯特), 파림(巴林), 팔요(叭要), 아착(我著), 홍길라(弘吉剌) 다섯 부(五部)를 나누어 관리하게 하고 「초화 오대영(炒花五大營)」이라 불렀다. 속파해(速把亥)가 본부(本部)를 열고서 파림부(巴林部)라 불렀는데 청(清)나라가 일어나면서 내객이객(內喀爾喀)에 심한 타격을 입혀서 다만 찰로특부(扎魯特部)와 파림부(巴林部) 두 부(部)만 남으니 속파해(速把亥) 손자 색특이(色特爾) 등이 그 사람들을 이끌고 황태극(皇太極)에 귀순하여 붙었고 황태극은 이들을 두 찰살극기(二扎薩克旗)에 엮어 넣고 소오달맹(昭烏達盟)에 붙였다. 후금(後金)이 찰살극기(扎薩克旗)를 만든 뒤에 그 목초지(牧地)를 내몽고자치구 적봉시(赤峰市)의 파림 좌우기(巴林左右) 두 기(旗)와 임서현(林西縣) 땅으로 획정되었다. 학자(學者)들은 달알이(達斡爾) 사람과 일부 파림 사람들은 거란인(契丹人)의 직계 후손이라고 보고 있다. 일부 파림(巴林) 여인들의 머리 꾸밈은 거란인과 서로 비슷하다.
*적봉시를 중심으로 한 여러 맹(盟), 기(旗), 부(部). 위 지도는 일제 시대 때 만들어졌으며 NDL(next digital library)에서 내려받았다.
6. 열하(熱河) 오청(五廳)
열하(熱河)의 전 영역에 옛날에 오청(五㕔)을 설치하였었는데 중심을 “열하청(熱河㕔, 지금에 승덕시(承德市))”이라 하고 서남쪽을 “객라하둔청(喀喇河屯㕔, 지금에 난평현(灤平縣), 하북성 동북부와 승덕시 서남부에 있다)”이라 하였으며 서북쪽을 “사기청(四旂㕔, 풍녕(豐寜) 만족자치구, 승덕시 서북, 서남과 북경시가 만나는 곳)”이라 하며 동쪽은 “팔구청(八溝㕔, 지금 평천시(平泉市), 승덕시가 대리 관리하는 곳이라 함)”이라 하며 다시 동쪽을 “탑자구청(塔子溝㕔, 요녕성 건창현(建昌縣) )”이라 하였다. 뒤에 팔구청(八溝㕔) 북쪽 영역을 갈라서 “오란합달청(烏蘭哈逹㕔, 적봉시)”을 만들었고 탑자구청(塔子溝㕔) 동쪽 영역을 갈라서 “삼좌탑청(三座塔㕔, 지금 요녕성 조양현(朝陽縣))”을 만들었다. 이에 칠청(七㕔)이 되었으며 그 관할로 보자면 사기청(四旂㕔)이 좌익 찰합이(左翼察哈爾), 팔구(八溝), 탑자구(塔子溝), 오란합달(烏蘭哈逹), 삼좌탑(三座塔) 여러 청(㕔)을 전적으로 관리하였고 아울러 각각 자기 땅을 가진 내찰살극 몽고(内札薩克蒙古) 여러 부(諸部)를 관리하였다. (흠정열하지 권49)
欽定熱河志卷四十九 熱河全境舊設五㕔中曰熱河㕔西南曰喀喇河屯㕔西北曰四旂㕔東曰八溝㕔又東曰塔子溝㕔後析八溝㕔北境為烏蘭哈逹㕔析塔子溝㕔東境為三座塔㕔是為七㕔其所轄則四旂㕔專轄左翼察哈爾八溝塔子溝烏蘭哈逹三座塔諸㕔兼轄内札薩克蒙古諸部各有分地
▷열하청(熱河廳) : 뒤에 승덕부(承德府)로 승격한다.
▷객라하둔 행궁(喀喇河屯行宮)에 대한 자료에서 객라하둔 행궁은 승덕시(承德市) 쌍난구(雙灤區) 난하진(灤河鎮) 서북, 난하(灤河)와 이손하(伊遜河)가 모여 만나는 곳에 남북 두 기슭이라한다. 「객라하둔(喀喇河屯)」은 몽고어로 「흑성(黑城)」, 「오성(烏城)」이라는 뜻이고 더러는 「구성(舊城)」을 뜻한다.
*명나라 초기에 적봉과 승덕시 지도. 북평행도사가 있던 곳이다.
*청나라 때에 열하 지도. 왼쪽으로부터 풍녕, 난평, 승덕, 평천, 건창, 조양이 있다.
*민국(民國, 중화민국, 1912년—1949년) 시기에 열하(熱河, 승덕시(承德市)) 지도. 아로과이심기, 파림기, 옹우기, 나만기, 객이객기, 토묵특기, 객이심기가 그 안에 있다. 위 지도들은 바이두에서 내려받았다.
◉복여위(福餘衛)에 과이심(科爾沁), 곽이라사(郭爾羅斯), 두이백특(杜爾伯特), 찰뢰특부(札賚特部)
1. 과이심부(科爾沁部) : 이 부는 명대(明代) 중후기, 청(清)나라 초기에 몽고의 옛 부(部) 이름이니 아로과이심부(阿魯科爾沁部)와는 다르다. 과이심부는 눈과이심부(嫩科爾沁部)라고도 일컬으니 가장 일찍 후금(後金) 누르하치(努爾哈赤, 후금 제1대 칸이요 청나라 태조)와 맹약을 맺은 몽고 부락이다.
명조(明朝) 중후기에 부락들의 이동을 거쳤고 후금(後金) 천총(天聰) 연간에 찰뢰특(扎賚特), 동두이백특(東杜爾伯特), 곽이라사(郭爾羅斯) 등의 부(部)와 철리목산(哲里木山)에서 맹약을 하여 철리목맹(哲里木盟)을 만들고 지금 내몽고자치구 동부에 통료시(通遼市), 흥안맹(興安盟)을 중심 목초지(牧地)로 획정하였다. 1990년, 내몽고자치구에 200여만 몽고 인구 중에 과이심부(科爾沁部)와 아로과이심부(阿魯科爾沁部)의 인구가 70퍼센트를 차지하였다.
역사(歷史)
과이심부(科爾沁部)는 칭기스칸의 아우 졸적합살아(拙赤合撒兒)와 그 후손에 소속되었던 부(部)에서 유래하였다. 1491년에 과이심부(科爾沁部)가 달연칸(達延汗)이 동몽고(東蒙古)를 통일하는 전쟁에 참여하였다. 합살아(哈撒兒, ‘맹수’를 뜻함) 후왕(後王)의 치하에서 과이심부(科爾沁部)는 만호(萬戶)로 엮어 졌고 「아파갈과이심(阿巴噶科爾沁)」으로 높여졌다.
명조(明朝) 가정(嘉靖) 초에, 과이심부(科爾沁部) 수령 규몽극탑사합라(奎蒙克塔斯哈喇)가 부(部)의 무리를 이끌고서 악눈하(鄂嫩河)와 액이고납하(額爾古納河) 유역을 따라 이동하여 눈강(嫩江) 유역에 이르렀다. 찰뢰특(扎賚特), 두이백특(杜爾伯特), 곽이라사부(郭爾羅斯部)와 석백(錫伯), 괘륵찰(卦勒察), 찰합이찰(薩哈爾察) 등의 부(部)의 부분을 점유하고서 눈과이심부(嫩科爾沁部)를 만들었으니 곧 후대에 통칭하는 과이심부(科爾沁部)이다. 이 부(部)는 명말(明末)에 요동 변방 밖 지구에 강대했던 몽고부락 집단의 하나이다.
찰합이부(察哈爾部)는 토만칸(土蠻汗) 집정 시기에 과이심부(科爾沁部)가 찰합이부(察哈爾部)에 신하로서 복종하였다. 현대 연구자들은 초기에 그들은 토만칸(土蠻汗)과 「겨우 일시적인 군사 연맹이었을 뿐이었고 심지어 토만칸(土蠻汗)이 군사를 이끌고 과이심부(科爾沁部)의 자아득(者兒得) 부중(部眾)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1575년에 이르러 토만칸(土蠻汗)과 과이심(科爾沁)의 여러 추장 사이에 관계가 뚜렷이 부드러워졌다.」고 인식하고 있다. 1583년, 토만칸(土蠻汗)이 과이심부(科爾沁部), 내객이객(內喀爾喀) 속파해(速把亥) 여러 아들의 십여만 기병을 이끌고 「광령(廣寧), 요심(遼瀋), 개원(開原), 철령(鐵嶺)을 공략하자고 한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그들은 이 시기에 이미 신하로서 찰합이부(察哈爾部)에 복종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 1573년-1620년) 초기, 과이심부(科爾沁部)는 개원(開原), 철령(鐵嶺) 서북 변방 밖 지구에다 목초지를 잡고 있었다. 차적긍(扯赤掯)의 아들 옹과대(翁果岱), 자아득(者兒得)의 아들 토문아(土門兒, 청(清)에서는 ‘도미(圖美)’로 번역하였다)이 과이심부(科爾沁部)의 수령이 되었다. 이 기간에 과이심부(科爾沁部)와 명조(明朝)가 국경에서 장마당을 통해 교역하였다. 1588년 옹과대(翁果岱)와 함께 명(明)나라 경내에 들어와 을러대며 노략질한 내객이객(內喀爾喀)의 수령 난토(煖兔), 찰로특부(扎魯特部)의 이아등(以兒鄧)이 그 과이심부(部)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였다가 옹과대(翁果岱), 토문아(土門兒)는 「혼동강(混同江)으로 피해 살았으니」 바로 눈강(嫩江)과 혼동강(混同江)이 모여 만나는 곳 바깥이다.
옹과대(翁果岱) 등이 혼동강(混同江)에서 피해 산 뒤에 차츰 해서여진(海西女真) 북부 지구를 제압해 나갔고 인하여 이 여진(女真) 여러 부(部)와 관계가 더욱 긴밀해 졌다. 건주여진(建州女真)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우뚝 일어선 뒤에 옹과대(翁果岱)는 해서여진(海西女真)의 여러 연맹(聯盟)과 고륵산(古勒山,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힘의 균형이 깨지고 건주여진의 누루하치의 무력이 크게 드러난, 여진족의 통일 전쟁에서 전환점이 된 전투)의 전투에 참가하여 싸워 졌다. 1608년, 다시 누르하치(努爾哈赤)에게 깨졌다. 뒤에 누르하치(努爾哈赤)와 우호관계를 통하였다. 옹과대(翁果岱)가 죽은 뒤, 그 아들 욱파성(奧巴成)이 과이심부(科爾沁部)의 수령이 되었다. 천계(天啟) 4년(1624년), 욱파(奧巴)가 찰합이부(察哈爾部)의 임단칸(林丹汗) 실화(失和)와 부(部)를 이끌고 누르하치(努爾哈赤)에 달려가 투항하여 가장 처음으로 청(清) 왕조에 귀순해 붙은 몽고부락이 되었다.
옹과대(翁果岱)의 부족형제(族兄弟) 망고사(莽古斯), 명안(明安), 공과이(孔果爾) 삼형제 한 세대가 일어나고부터 과이심부(科爾沁部)는 끊임없이 청(清) 황실과 이어져 혼인하니 관계가 밀접해 졌다. 누르하치(努爾哈赤), 황태극(皇太極), 순치제(順治帝)의 여러 후비들,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등을 포함해서 모두 이 부(部)에서 나왔다. 청말(清末)에 장령(將領) 승격림심(僧格林沁), 의군(義軍) 수령 알달매림(嘎達梅林) 등이 모두 이 과이심(科爾沁) 몽고인이다. 만주인(滿洲人)은 티벳 불교 또한 과이심(科爾沁) 몽고인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고 그들은 또 거의 대대로 청대(清代)에 만족(滿族) 귀족과 혼인을 맺었다.
숭덕(崇德) 원년(元年, 1638년), 과이심부(科爾沁部)에 소속된 6기(六旗)는 찰뢰특기(扎賚特旗), 두이백특(杜爾伯特), 곽이라사(郭爾羅斯) 전후 양기(前後兩旗), 모두 십기(十旗)와 함께 철리목(哲里木, 철리목산은 지금 흥안맹(興安盟) 과이심우익중기(科爾沁右翼中旗) 지역에 있다)에서 맹약을 맺으니 철리목맹(哲里木盟)이 비로소 세워졌다. 그리고 1630년대에 과이심부(科爾沁部)의 목초지(牧地)가 획정됨에 따라서 철리목맹(哲里木盟) 십기(十旗)의 목초지가 대략 지금에 내몽고자치구 통료시(通遼市), 흑룡강성(黑龍江省) 두이백특(杜爾伯特) 몽고족 자치현과 길림성(吉林省) 전곽이라사(前郭爾羅斯) 몽고족 자치현 등으로 정해졌다.
2. 곽이라사부(郭爾羅斯部) : 이 부는 명대(明代) 때에 몽고 여러 부족의 하나요 청조(清朝) 때에는 몽고 과이심부(蒙古科爾沁部)의 한 부(部)였다. 원(元)나라 때에 화라랄사(火羅剌思, orlos) 부(部)와 이름이 같다.
몽고(蒙古) 시조의 어머니 아란활아(阿闌豁阿)가 바로 이 화라랄사부(火羅剌思部)에서 나왔고 칭기스칸(成吉思汗) 어머니 월륜태후(月倫太后)에게 나누어 준 백성 3천호(戶) 사람들은 모두 곽이라사(郭爾羅斯) 사람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원조(元朝) 멸망 뒤, 몽고사서(蒙古史書)는 늘 막북(漠北, 고비사막 북쪽)에 올량합 만호(兀良哈萬戶)와 막남(漠南)에 산양 만호(山陽萬戶)의 소속부(部) 수령을 곽이라사(郭爾羅斯) 사람으로 분류한다.
칭기스칸(成吉思汗) 동생 중에 맏이인 졸적합살아(拙赤合撒兒)의 16세손(世孫) 오파십(烏巴什, 증조부 도미니아합제(圖美尼雅哈齊), 조부 규몽극탑사합라(奎蒙克塔斯哈喇)이고, 박제달라(博第達喇)의 셋째 아들)이 거느리는 부(部)를 곽이라사(郭爾羅斯)라고 일컫는다. 청(清) 태조 천명(天命) 11년(1626년), 오파십(烏巴什)의 손자 포목파(布木巴)가 과이심부(科爾沁部) 수령 욱/오파(奧巴, 박제달라(博第達喇)의 큰아들인 제제극(齊齊克)의 손자)를 따라 함께 누르하치(努爾哈赤)에 귀순하여 붙었다. 순치(順治) 연간에 곽이라사(郭爾羅斯)를 엮어 두 찰살극기(扎薩克旗, 전기(前旗)와 후기(後旗))를 만들고 과이심좌익(科爾沁左翼)에 붙이고서 철리목맹(哲里木盟)에 예속시켰다. 지금 길림성에 전곽이라사 몽고족자치현(前郭爾羅斯蒙古族自治縣)이 있다.
3.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 : 도이백특(都爾伯特),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로도 적는다. 이 부는 명대(明代), 청조(清朝) 때에 몽고부락이었다. 「두이백특(杜爾伯特)」은 「넷(四)」이라는 뜻이다. 원조(元朝)의 타아변부(朵兒邊部)와 이름이 같다. 중고(中古) 때에 「다이변(多爾邊)」, 「타로반(朵魯班)」 등의 한자로 적었다. 액로특몽고(厄魯特蒙古, 몽고고원 서부의 와랄)의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와 이름은 같지만 부(部)는 다르다.
칭기스칸(成吉思汗)의 동생 중에 맏이인 졸적합살아(拙赤合撒兒)의 16세손인 애납갈(愛納噶, 증조부는 도미니아합제(圖美尼雅哈齊)이고 조부는 규몽극탑사합라(奎蒙克塔斯哈喇)이니 박제달라(博第達喇)의 넷째 아들이다)가 인솔하는 부(部)를 불러서 두이백특(杜爾伯特)이라 호칭하였다. 청(清) 태조(太祖) 천명(天命) 11년(1626년), 애납갈(愛納噶) 아들 아도제(阿都齊)가 과이심부(科爾沁部) 수령 욱/오파(奧巴)를 따라 함께 누르하치(努爾哈赤)에게 귀순하여 붙었다. 순치(順治) 연간에 두이백특(杜爾伯特)을 엮어서 하나의 찰살극기(紮薩克旗)로 만들고 과이심우익(科爾沁右翼)에 붙이고서 철리목맹(哲里木盟)에 예속시켰다. 지금 흑룡강성에 두이백특 몽고족자치현(杜爾伯特蒙古族自治縣)이 있다. 준갈이 분지 쪽에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 (작라사씨(綽羅斯氏))와는 구별된다.
4. 찰뢰특부(札賚特部) : 또한 찰뢰특(札賴特)으로도 적는다. 이 부는 명대(明代), 청조(清朝) 때에 몽고 부락이었다. 만주지명고(滿洲地名考)에 근거하자면 「찰뢰(扎賚)」는 움푹한 땅(窪地)이라는 뜻이니 찰랄역아부(札剌亦兒部)와 같은 이름이다.
칭기스칸(成吉思汗) 동생 중에 맏이인 졸적합살아(拙赤合撒兒)의 16세손(世孫)인 아민(阿敏, 증조부는 도미니아합제(圖美尼雅哈齊)이고 조부는 규몽극탑사합라(奎蒙克塔斯哈喇)이니 박제달라(博第達喇)의 다섯째 아들이다)이 인솔하는 부(部)를 부를 때 찰뢰특(扎賚特)이라 호칭하였다.
청(清) 태조(太祖) 천명(天命) 11년(1626년), 아민(阿敏)의 아들 몽곤(蒙袞)이 과이심부(科爾沁部) 수령 욱/오파(奧巴, 박제달라(博第達喇) 큰아들 제제극(齊齊克)의 손자)를 따라 누르하치(努爾哈赤)에 귀순하여 붙었다. 찰뢰특(扎賚特)을 엮어 하나의 찰살극기(紮薩克旗)를 만들고 과이심우익(科爾沁右翼)에 붙이고서 철리목맹(哲里木盟)에 예속시켰다.
지금 내몽고자치구 흥안맹(興安盟)에 찰뢰특기(扎賚特旗)가 있다.
* 위 두 지도는 과이심과 찰뢰특부에 대한 지도이다. 포특합기에 대한 지도도 나와 있다. 중화석류분성도(中華析類分省図)에 나온 지도이다. 이 지도책은 1931년에 출판되었다. 구글로 들어 가면 ‘Wikimedia Commons’에서 이 책을 찾을 수 있다.
**눈강(嫩江)과 송화강(松花江) 주변에 펼쳐진 복여위(福餘衛) 여러 기(旗)의 위치가 나타나 있다. 위 지도들은 일제 시대 때 만들어졌으며 NDL(next digital library)에서 내려받았다. 위 지도들은 일제 시대 때 만들어졌으며 NDL(next digital library)에서 내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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