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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肅愼)

동북쪽 숙신(肅愼) 땅 흑룡강 포특합지략(布特哈志略) 8

by 쥐눈이 2024. 9. 12.

*내찰살극몽고(內札薩克蒙古)

*아래 내용은 유기백과 중문판을 번역한 것이다.

내찰살극몽고(內札薩克蒙古)은 더러 내찰살극(內札薩克)이라고도 하는데 뒤에 간단하게 내몽고(內蒙古)라고 하니 비교적 일찍 청조(清朝)에 귀순하여 붙은 남막(漠南, 고비사막 남쪽) 몽고의 각 기() 찰살극(札薩克, 청나라 왕조에서 몽고 왕공, 기타 회족 왕공들에게 수여한 관직)을 가리킨다. 비록 똑같이 외번몽고(外藩蒙古, 찰살극몽고(札薩克蒙古)라고도 함. 세습 찰살극을 기장(旗長)으로 둔 몽고의 각 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내외 찰살극 몽고 또는 내몽고와 외몽고로 나뉜다) 속한다 하더라도 그 지위는 외찰살극(外札薩克)의 위에 있다.

() 중기 건륭(乾隆, 원년은 179629) 이후에 내찰살극(內札薩克)을 나누어 24() 49()로 만들었고 이번원(理藩院) 기적청리사(旗籍清吏司), 왕회청리사(王會清吏司)를 통해서 관리하였다. 내몽고(內蒙古)라는 말은 바로 내찰살극 몽고(內札薩克蒙古)에서 유래하였다. 청대(清代) 후기에 내몽고(內蒙古)는 내찰살극(內札薩克) 49()의 정식 이름을 완성하였다.

 

*1911년 청조(清朝) 행정 구획. 홍색부분이 내찰살극(內札薩克)과 서투몽고(西套蒙古)이다. 서투몽고는 또한 투서이기(套西二旗)라고도 하는데 이는 청대(清代)에 파리곤(巴里坤, 중국 신강 유오이(維吾爾) 자치구) 동쪽, 하란산(賀蘭山, 하란은 돌궐어로 뛰어난 말(駿馬)”이다. 중국 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와 내몽고자치구 교계에 있다) 서쪽, 하서주랑(河西走廊, 감숙성 중간에 있다) 북쪽, 고비사막(戈壁) 남쪽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고부락을 말한다.

 

가경일통지(嘉慶一統志) 외번몽고통부(外藩蒙古統部):「본조(本朝) 청나라가 일어나자 몽고 과이심부(科爾沁部)가 앞서서 먼저 귀순해 붙었고 찰합이(뒤에 청나라에 귀순해 붙은)를 멸망시키자 여러 부()가 서로 이어가며 와서 항복하였다. 이에 그 강토의 경계를 바루었으니 깡그리 약속을 따랐다. 대정벌이 있었을 때 아울러 군대를 이끌고서 전쟁터마다 따랐다. 천하의 판도가 우리 청나라로 정해진 뒤에 그들에게 작록(爵祿)을 내리고 대대로 세습되게 하였다. 해마다 때에 맞추어 조공(朝貢)을 하였으며 이리저리 맡을 일에 앞장서서 오직 부지런히 하였으니 이번원(理藩院)을 마련하여 이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대개 천명의 받고 천하를 다스리는(正朔) 청나라를 받들고 호적과 지도(版圖)에 등재된 25 마을이 51()가 되었고 아울러 모두 팔기(八旗)에 편입시켰다. …… 이것이 내찰살극몽고(內札薩克蒙古)가 되었다.

嘉慶一統志外藩蒙古統部:「本朝龍興蒙古科爾沁部率先歸附及既滅察哈爾諸部相繼來降於是正其疆界悉遵約束有大征伐並帥師以從及定鼎後錫以爵祿俾得世及每歲朝貢以時奔走率職惟謹設理藩院以統之蓋奉正朔隸版圖者部落二十有五為旗五十有一並同內八旗。……是為內札薩克蒙古。」

기적청리사(旗籍清吏司) : 기적사(旗籍司)라고 간략히 부른다. 청조(清朝) 이반원(理藩院) 소속인 6()의 하나이다. 내몽고 소속 49()의 강역(疆界), 작위(封爵), 관직(設官), 회맹(會盟), 군사(軍旅), 역참(驛遞) 등 일과 토묵특(土默特) 유목과 흑룡강에 가축을 치는 곳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여 처리하였다.

왕회청리사(王會清吏司) : 숭덕(崇德) 원년(元年, 1636, 황태극(皇太極, 청 태종)이 변방의 여러 민족에 대한 일을 도맡아 할 전문 기구 몽고아문(蒙古衙門)”을 만들었다. 숭덕(崇德) 36, 몽고아문(蒙古衙門)을 고쳐 이번원(理藩院)을 만들었다. 청 태종 때 몽고 부락들이 다 귀순해오니 이번원을 설치하여 외번(外藩)에 대한 일을 도맡아 하게 하였던 것이다.

 

역사(歷史)

대막(大漠, 고비사막(戈壁沙漠)이남에 거주하는 몽고족을 막남몽고(漠南蒙古)라 하였다. 역사상 13세기 중엽()나라 시기에 이르기까지 막남(漠南)은 그대로 한족(漢族)이 모여 사는 곳이었는데[2] 이후에 바야흐로 몽고족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이번원(理藩院) 규칙 안에 막남몽고(漠南蒙古)라는 이름을 줄곧 공문서 속에 사용하였으니 막북몽고(漠北蒙古)」(객이객몽고(喀爾喀蒙古)와 상대적인 이름으로 그 거주지역은 대체로 지금 중국의 내몽고자치구이다.

위에 붉은 글자 부분의 유기문고 중문판 원문은 歷史上直至13世紀中葉金朝時期),漠南仍為漢族聚居地[2]之後方成為蒙古族聚居地。》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제시한 자료가 원사(元史) 표점본⇒ 『《元史卷四·本紀第四·世祖一歲辛亥六月憲宗即位同母弟惟帝最長且賢故憲宗盡屬以漠南漢地軍國庶事遂南駐爪忽都之地。』 이다. 그러나 이 문장에는 아래와 같은 오류가 있다.

표점되지 않은 원사(元史) 원문은 다음과 같다. () 세조 성덕신공문무황제(世祖聖徳神功文武皇帝)의 살아생전 이름()은 호필뢰(呼必賚)이시니 예종 황제(睿宗皇帝)의 넷째 아드님이다. ..... 신해(辛亥) 6월 헌종(憲宗)이 즉위하시고 어머니가 같은 형제 중에 오직 제(, 세조)만이 그 바로 밑에 동생이었고 또한 현명하여서 헌종(憲宗)이 막남(漠南) 한지(漢地)의 군사와 나라(軍國)에 대한 뭇 공무를 죄다 도맡게 하였더니 드디어 남쪽 찰고도(扎固圖) 땅에 머물렀다. (원사(元史) 4)...갑인년(甲寅年, 1254) 여름 5월 경자(庚子)에 육반산(六盤山, 지금 중국 서부 서안(西安), 은천(銀川), 난주(蘭州)이 속한 세 성()에 사이에 있다)에 머물렀다. 6월 염희헌(廉希憲)을 서관도 선무사(西關道宣撫使)로 삼고 요추(姚樞)을 권농사(勸農使)로 삼았다. 가을 8월에 대리(大理, 대리국으로 9371094년과 10961254년까지 있었던 나라이다. 그 위치는 지금에 중국 운남성(雲南省), 귀주성(貴州省), 사천성(四川省) 서남부와 면전(緬甸) 북부 지구, 인도(印度) 동남부, 라오스(寮國), 베트남(越南)들의 북부 지구를 포함하였다. 홀필열(忽必烈), 즉 훗날의 원 세조에게 멸망 당하였다)에서 돌아와 환주(桓州)와 무주(撫州) 사이에서 머물렀다. 무주(撫州)를 없앴다가 다시 세웠다. 겨울 찰고특(扎固圖) 땅에 머물렀다. 을묘년(乙卯年) 봄에 다시 환(), 무주(撫州) 사이에 머물렀고 겨울에 봉성주(奉聖州, 하북성 장가구시 탁록성) 북쪽에 머물렀다. 병진년(丙辰年) 3월에 승려 자총(子聰)에게 명하여 환주(桓州) 동쪽과 난수(灤水) 북쪽에 터를 살피게 하고 개평부(開平府)에 성()으로 만들어 궁실을 지었다. 겨울에 합라파륵갈손(哈喇巴勒噶遜)의 땅에서 머물렀다.

元史 (四庫全書本)/004 世祖聖徳神功文武皇帝諱呼必賚睿宗皇帝第四子..... 嵗辛亥六月憲宗即位同母弟惟帝最長且賢故憲宗盡屬以漠南漢地軍國庶事遂南駐扎固圖之地...嵗甲寅夏五月庚子駐六盤山六月以廉希憲為西關道宣撫使姚樞為勸農使秋八月至自大理駐桓撫間復立撫州冬駐扎固圖之地嵗乙卯春復駐桓撫間冬駐奉聖州北嵗丙辰春三月命僧子聰卜地于桓州東灤水北城開平府經營宫室冬駐于哈喇巴勒噶遜之地

어비역대통감집람(御批歷代通鑑輯覽) 97 : 흥화(興和) ()나라 때 무주(撫州) 땅을 융흥로(隆興路)로 하였다가 흥화로(興和路, 지금 장가구시 장북현(張北縣))로 고쳤다. 지금 장가구(張家口) 바깥에 양황 양황기(鑲黄旗) 등에 사는 목창(牧厰) 땅이 이곳이다.

御批歷代通鑑輯覽卷九十七 興和金撫州地改改興和路今張家口外鑲黄等旗牧厰地是

흠정열하지(欽定熱河志) 62 : ()의 상도로(上都路) 개평부(開平府, 지금 북경 위쪽에 내몽고자치구 석림곽륵맹정감기(錫林郭勒盟正藍旗) 일대)는 지금에 환주(桓州)이다. () 상도성(上都城)은 환주(桓州) 동쪽에 있다.

欽定熱河志 (四庫全書本)/062 元之上都路開平府即今之桓州元上都城在桓州之東

원사어해(元史語解) 4 : 합라파륵갈손(哈喇巴勒噶遜) 합라(哈喇)는 검은색(黒色)을 뜻한다. 파륵갈손(巴勒噶遜)은 성()을 뜻한다. 4에서는 합라팔라합손(合剌八剌合孫)이라 적혀있다.〉 

元史語解卷04 哈喇巴勒噶遜 〈哈喇黒色也巴勒噶遜城也卷四作合剌八剌合孫〉 

흠정원사어해(欽定元史語解)찰고도(扎固圖)의 찰고(扎固)은 백이라는 수(百數)이고 도()는 갖다()라는 말이다. 4에는 과홀도(𤓰忽都)로 적혀있다.하였다.

欽定元史語解 卷四 扎固圖 扎固百數也 圖有也 卷四作𤓰忽都

爪忽都(조홀도) 𤓰忽都(과홀도)의 관계에서 바이두에서는 𤓰忽都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하였고 찰홀석(札忽惕)”를 소개하면서 중국 고대 북방 부락 이름이니 또한 조홀도(爪忽都), 찰석(札惕), 찰석(察惕), 찰합(察哈)으로도 음역한다. 찰랄아부(札剌兒部) 갈래의 하나로 원대(元代)에 한자 번역으로는 한아(漢兒)” 또는 한인(漢人)”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札忽惕中国古代北方部落名又译札惕察惕察哈爪忽都札剌儿部分支之一元代汉译为汉儿汉人) 이 내용은 중국소수민족사대사전(中国少数民族史大辞典)을 근거 자료로 제시하였다.

한편, “찰홀석(札忽惕), 조홀도(爪忽都), 찰석(札惕), 찰석(察惕)”에 대한 옛 한문 원서 자료에서는 찾지 못하였고 다만 원사어해(元史語解)에는 원사(元史) 124권에 찰합(察哈)’이 부락 이름이다.”고 하였다.

원사어해(元史語解) 3 : 찰합이(察哈) 〈부락이름이다. 원사(元史) 124에서는 찰합(察哈)이라 적혀 있으니 부() 이름이다.

元史語解卷三 察哈〉 〈部落名也卷一百二十四作察哈部名

지금 찰고특(扎固圖)이나 그 다른 이름인 𤓰忽都(과홀도)에 대한 자료가 드문데 𤓰忽都(과홀도)之地爪忽都(조홀도)之地라 하여 ()나라 사람이 사는 땅이라 해석하고는 “13세기 중엽()나라 시기에 이르기까지 막남(漠南)은 그대로 한족(漢族)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는 재해석은 큰 문제라고 본다. 중원 땅은 그야말로 여러 다른 민족이 서로 패권을 다투며 살던 곳이지 않은가?

* 원사(元史)에 나오는 찰고특(扎固圖)

 

*원사어해(元史語解)에 나오는 찰고특(扎固圖)

 

 

 

원조(元朝) 말기에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명조(明朝)가 세워지면서 원조(元朝)의 남은 세력이 장성(長城) 북쪽으로 물러갔으니 역사에서는 북원(北元)이라 일컫는다. 몽고는 결국 많은 부락으로 분열되었다. 찰합이부(察哈爾部)는 막남몽고(漠南蒙古) 가운데에 한 갈래로 눈에 띄는 부락이었으니 마지막 몽고대칸(蒙古大汗) 임단칸(林丹汗)이 바로 이 부락 사람이다.

후금(後金)이 흥기 하였을 때 몽고대칸(蒙古大汗)이 있었던 찰합이부(察哈爾部)와 교전하였고 임단칸(林丹汗)의 병사가 깨지고서 도망하였다. 그 아들 액철(額哲)1635년 후금(後金) 황태극(皇太極, 청 태종)에게 투항하였고 아울러 원조(元朝) 마지막 황제 원순제(元順帝)가 지니고 달아났던 전국새(傳國璽)를 바쳤다. 막남몽고(漠南蒙古)는 마침내 후금(後金)의 판도에 들어갔으며 청조(清朝)가 세워지고서 이들은 내찰살극몽고(內札薩克蒙古)로 되었다.

그중에 내찰살극(內扎薩克) 8(八部)는 청() 조정과 관계가 가장 긴밀하였으니 내찰살극(內扎薩克) 8(八部)는 비교적 일찍 후금(後金)에 귀순해 붙은 막남몽고(漠南蒙古) 각 기() 찰살극(札薩克)들의 지배적인 부락을 가리킨다. 내찰살극(內扎薩克) 8(八部)는 똑같이 칭기스칸(成吉思汗)의 바로 아래 동생 졸적합살아(拙赤合撒兒)의 후손이다.

1. 과이심부(科爾沁部) 눈과이심부(嫩科爾沁部, 합살아(合撒兒) 15세손인 박제달라(博第達喇)의 큰아들 제제극(齊齊克)과 둘째 아들 납목새(納穆賽), 막내동생 낙문달라(諾們達喇) 후세이다.

2. 아로과이심부(阿嚕科爾沁部, 합살아(合撒兒) 15세손 곤도륜대청(昆都倫岱青)의 후손이다.

3.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 합살아(合撒兒) 15세손 박제달라(博第達喇)의 넷째 아들 애납갈(愛納噶)의 후손이다.

4. 곽이라사부(郭爾羅斯部, 합살아(合撒兒) 15세손 박제달라(博第達喇) 셋째 아들 오파십(烏巴什)의 후손이다.

5. 찰뢰특부(扎賚特部, 합살아(合撒兒) 15세손 박제달라(博第達喇) 다섯째 아들 아민(阿敏)의 후손이다.

6. 사자부락(四子部落, 합살아(合撒兒) 15세손 낙연태(諾延泰) 후손이다.

7. 무명안부(茂明安部, 합살아(合撒兒) 16세손 차근(車根)의 후손이다.

8. 오랍특부(烏拉特部, 합살아(合撒兒) 15세손 포이해(布爾海)의 후손이다.

 

(), (), ()

내찰살극몽고(內札薩克蒙古)는 원래 25()로 나뉘어 51()로 편성되었다. 강희(康熙) 때에 귀화성(歸化城) 토묵특(土默特) 좌우익(左右翼) ()는 내속(內屬, 청나라 소속의 땅)으로 개편되어 귀화성부도통(歸化城副都統)을 설치하였다. 건륭(乾隆, 1736212179628) 이후, 내몽고는 모두 24() 49()6(六盟)을 설치하였다. 49() 외에 또한 라마기(喇嘛旗)」(라마(喇嘛)를 찰살극(扎薩克)의 기()로 만든인 석랄도고륜기(錫埒圖庫倫旗)가 있다.

 

탁색도맹(卓索圖盟), 소오달맹(昭烏達盟), 철리목맹(哲里木盟),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을 합하여 동사맹(東四盟), 동몽고(東蒙古)라 부른다. 오란착포맹(烏蘭察布盟), 이극소맹(伊克昭盟)을 합쳐서 서이맹(西二盟)이라 부른다. 6(六盟)에 소속된 기()는 아래와 같다.

철리목맹(哲里木盟, 철리목산에서 부()들이 동맹을 맺은 인연으로 해서 그 이름을 가져왔다.)

과이심부(科爾沁部) 6(六旗)

찰뢰특부(扎賚特部) 1(一旗)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 1(一旗)

곽이라사부(郭爾羅斯部) 2(二旗)

오호달맹(昭烏達盟, 오호달은 백그루 버드나무(百柳, 또는 하고많은 버드나무’)”라는 뜻이다.)

오한부(敖漢部) 1(一旗)

나만부(奈曼部) 1(一旗)

파림부(巴林部) 2(二旗)

찰로특부(扎魯特部) 2(二旗)

아로과이심부(阿魯科爾沁部) 1(一旗)

옹우특부(翁牛特部) 2(二旗)

극십극등부(克什克騰部) 1(一旗)

객이객좌익부(喀爾喀左翼部) 1(一旗)

탁색도맹(卓索圖盟)

객라심부(喀喇沁部) 3(三旗)

토묵특부(土默特部) 2(二旗)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오주목심부(烏珠穆沁部) 2(二旗)

호제특부(浩齊特部) 2(二旗)

소니특부(蘇尼特部) 2(二旗)

아파갈부(阿巴噶部) 2(二旗)

아파합납이부(阿巴哈納爾部) 2(二旗)

오란찰포맹(烏蘭察布盟)

사자부락(四子部落) 1(一旗)

무맹안부(茂明安部) 1(一旗)

오라특부(烏喇特部) 3(三旗)

객이객우익부(喀爾喀右翼部) 1(一旗)

이극소맹(伊克昭盟, 이극소는 또한 왕애소(王愛召)이니 청나라 때 광혜사(廣慧寺)라 하였다. 내몽고 악이다사시(鄂爾多斯市) 달랍특기(達拉特旗) 왕애소진(王愛召鎮) 합십랍격(哈什拉格溝) 어귀에 있으니 이곳에서 맹약을 맺어 인하여 이 이름을 가져왔다.)

악이다사부(鄂爾多斯部) 7(七旗)

 

공물을 들였던 길(貢道)

산해관(山海關)을 밟아서 공물을 들인 부()

과이심(科爾沁), 찰뢰특(扎賚特), 두이백특(杜爾伯特), 곽이라사(郭爾羅斯) 네 부()

희봉구(喜峰口)를 밟아서 공물을 들인 부()

아로과이심(阿魯科爾沁), 찰로특(扎魯特), 객이객좌익(喀爾喀左翼), 객라심(喀喇沁), 토묵특(土默特), 나만(奈曼), 오한(敖漢) 옹우특(翁牛特) 팔 부()

독석구(獨石口)를 밟아서 공물을 들인 부()

파림(巴林), 극십극등(克什克騰), 호제특(浩齊特), 오주목심(烏珠穆沁) 네 부()와 아파갈좌익기(阿巴噶左翼旗), 아파합납이좌익기(阿巴哈納爾左翼旗)

장가구(張家口)를 밟아서 공물을 들인 부()

소니특(蘇尼特), 사자부락(四子部落), 객이객우익(喀爾喀右翼), 무명안(茂明安) 네 부()와 이파갈우익기(阿巴噶右翼旗), 아파합납이우익기(阿巴哈納爾右翼旗)

살호구(殺虎口)를 밟아서 공물을 들인 부()

귀화성(歸化城) 토묵특(土默特), 오라특(烏喇特), 악이다사(鄂爾多斯) 세 부()

 

*1937년에 제작한 수원(綏遠), 찰합이, 열하성(熱河省) 지도. 만리장성 표시를 따라가면 산해관(山海關), 희봉구(喜峰口), 독석구(獨石口), 만전(萬全) 곧 장가구(張家口), 대동(大同) 옆과 양성(凉城) 밑에 살호구(殺虎口)을 찾을 수 있다. (지도는 바이두에서 내려받았다.)

 

*위 지도의 부분도이다. 산해관과 희봉구, 독석구를 볼 수 있다.

 

관직(設官)

내찰살극(內札薩克)이 설치한 주요 관리

맹장(盟長), 부맹장(副盟長)을 각 맹()에 한 사람씩 두었는데 해당 맹()에 소속된 찰살(札薩克, 곧 집정관을 말함)과 한산왕공(閒散王公)이 내부에서 간단히 선출하였다.

찰살극(札薩克, 또는 扎薩克은 곧 기장(旗長)이니 각 기()에 한 사람씩을 두어 한 기()의 정령(政令)을 담당하여 수행하였다. 일반적으로 세습될 수 있었다.

협리태길(協理台吉)은 각 기()에 두 사람 더러는 네 사람을 두었는데 찰살극(札薩克)이 기()의 업무 처리를 도왔다.

관기장경(管旗章京)은 각 기()에 한 사람을 두었고 부장경(副章京)은 각 기()에 두 사람을 두었다. 章京은 만주어이니 장군(將軍)을 뜻한다. 무관의 하나이다.

참령(參領)을 각 육좌령(六佐領)에 참령(參領) 한 사람을 두었다.

좌령(佐領)은 각 소목(蘇木, 기층 행정구획 단위, ()」)에 좌령(佐領) 한 사람씩 두었으니 예외도 있었다. 그 지위는 향장(鄉長)과 맞먹었다.

효기교(驍騎校)는 각 소목(蘇木)에 한 사람씩 두었다.

십장(什長)은 각 십호(十戶)에 십장(什長) 한 사람씩 두었다.

 

작위(封爵)

내찰살극(內札薩克)의 작위에는 찰살극화석친왕(札薩克和碩親王), 찰살극다라극왕(札薩克多羅郡王), 찰살극다라패륵(札薩克多羅貝勒), 찰살극고산패자(札薩克固山貝子), 찰살극진국공(札薩克鎮國公), 찰살극보국공(札薩克輔國公), 찰살극태길(札薩克台吉, 탑포낭(塔布囊)이 있다.

 

군대(領兵)

내찰살극(內札薩克) 각 기()의 몽고병(蒙古兵)은 본기(本旗) 찰살극(札薩克)과 그 소속 맹장(盟長)이 통솔하니 대체로 내찰살극(內札薩克)은 대부분 종용공신(從龍功臣, 제왕이 나라를 만들 때 따르던 개국공신)으로 유목지(遊牧地)가 다 성경(盛京, 심양)과 직예(直隸)와 산서(山西), 섬서(陝西) 일대이니 뒤에 청나라에 귀순해 붙은 외찰살극(外札薩克)이나 멀리 막북(漠北)에 있던 사람들과는 차이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