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찰살극몽고(外札薩克蒙古)
*아래 자료는 유기백과 중문판을 번역하고 그 그림들을 가져온 것이다.
외찰살극몽고(外札薩克蒙古)은 청대(清代) 외번몽고(外藩蒙古) 중에 내몽고(內蒙古) 24부(部)를 제외한 그 밖에 몽고(蒙古) 각 기(旗)를 가리키는 말이다. 합밀(哈密), 토로번(吐魯番, 지금 중국 신장) 등의 땅에 회부왕공(回部王公)도 함께 「외찰살극(外札薩克)」이 된다. 외찰살극몽고(外札薩克蒙古)는 서투몽고(西套蒙古) 두 기(二旗), 막북(漠北) 객이객(喀爾喀, 고비사막 북쪽에서 살던 몽고족으로 대개 지금 몽고국을 이루고 있다) 네 부(部), 그리고 과포다(科布多)와 청해(青海), 신강(新疆), 흑룡강(黑龍江)에 소속된 찰살극(札薩克) 각 기(旗)를 포함하니 이번원(理藩院) 전속청리사(典屬清吏司)와 유원청리사(柔遠清吏司)가 관리하였다.
▷서투몽고(西套蒙古)는 또한 투서이기(套西二旗)라고도 하는데 이는 청대(清代)에 파리곤(巴里坤, 중국 신강 유오이(維吾爾) 자치구) 동쪽, 하란산(賀蘭山, 하란은 돌궐어로 “뛰어난 말(駿馬)”이다. 중국 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와 내몽고자치구 교계에 있다) 서쪽, 하서주랑(河西走廊, 감숙성 중간에 있다) 북쪽, 고비사막(戈壁) 남쪽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고부락을 말한다. 두 기(旗)가 있으니 아랍선액로특기(阿拉善厄魯特旗), 액제납토이호특기(額濟納土爾扈特旗)가 액로특몽고화석특부(厄魯特蒙古和碩特部)와 토이호특부(土爾扈特部)에 뿌리를 두고서 갈라져 나왔다. 각 기(旗)가 스스로 한 부(一部)를 만들고 맹장(盟長)을 두지 않고서 이번원(理藩院)이 영하이사사원(寧夏理事司員) 한 사람을 둔 채 섬감총독(陝甘總督)에 통제를 받았다.
화석특부(和碩特部)는 원래 신강(新疆)에서 살았었는데 뒤에 준갈이부(準噶爾部)에게 으름장을 받아서 동쪽으로 옮겨가 청해(青海)와 서투(西套) 일대에 이르렀다. 청나라 강희(康熙) 25년(1686년)에 고실칸(顧實汗)의 후손 화라리(和囉哩)에게 영하(寧夏) 변두리 밖에서 머물며 가축을 칠 수 있게 하였다. 강희(康熙) 36년(1697년)에 화라리(和囉哩)를 봉하여 찰살극다라패륵(札薩克多羅貝勒)으로 삼고 아랍선액로특기(阿拉善厄魯特旗)를 설치하였다. 그 땅은 대체로 지금 내몽고 아랍선좌기(阿拉善左旗)와 아랍선우기(阿拉善右旗) 일대에 해당한다.
강희(康熙) 42년(1703년), 토이호특부(土爾扈特部) 아옥기(阿玉奇)의 조카 아라포주이(阿喇布珠爾)가 준갈이(準噶爾)에 길을 빌려 티벳(西藏)으로 예불(禮佛)을 보러 갔는데 책망아랍포탄(策妄阿拉布坦, 당시에 준갈이몽고 수령)이 막아 대는 바람에 원래 갔던 길을 따라서 돌아올 방법이 없었다. 강희(康熙) 43년(1704년), 아라포주이(阿喇布珠爾)를 찰살극고산패자(札薩克固山貝子)로 삼았고 가욕관(嘉峪關) 밖 색이등(色爾騰)에서 가축을 치며 유목 생활을 하였다. 옹정(雍正) 9년(1731년), 액제납하(額濟納河)로 옮겨갔다. 건륭(乾隆) 18년(1753년)찰살극(札薩克)을 제수하고 액제납 토이호특기(額濟納土爾扈特旗)를 설치하였다. 그 땅은 대체로 내몽고 액제납기(額濟納旗)와 아랍선우기(阿拉善右旗) 서북 일대에 해당한다.
→다라패륵(多羅貝勒) : 간략한 이름은 패륵(貝勒)이다. 청조(清朝) 종실 안에 제 3등의 작위(爵位)이니 다라군왕(多羅郡王)의 아래요 고산패자(固山貝子)의 위이다. 이 작위는 외번몽고 귀족(外藩蒙古貴族)에게도 수여된다. 패륵(貝勒)이라는 말은 원래 명대(明代)에 여진 귀족(女真貴族)에 대한 호칭이었으니 금(金)나라 때 「발극렬(勃極烈)」이라는 말의 다른 음역이다. 한자로 번역하자면 「王」이다.
→고산패자(固山貝子) : 간단하게 패자(貝子)라고도 한다. 「고산(固山)」은 곧 「기(旗)」이고 「패자(貝子)」는 원래 만주어 「패륵(貝勒)」의 복수형이다. 뭇왕(眾王) 또는 제후(諸侯)라는 뜻이 있다.
*토이호특(土爾扈特) 태길과 그 부인 그림
외찰살극(外札薩克) 각 부(部)는 똑같이 청준(清准) 전쟁 (또는 준갈이역(準噶爾役)이라 하니 청조(清朝) 강희 27년 – 건륭 22년, 즉 1688년에서 1758년까지 벌어졌던 전쟁이다) 때에 청조(清朝)에 집어 삼켜졌다. 청말(清末)에 외찰살극몽고(外札薩克蒙古)에 때로 객이객(喀爾喀) 네 부(四部)만을 가리켜 말하기도 하였다. 뒤에 변화 발전하여 외몽고(外蒙古)라는 개념이 나왔으니 바로 토사도칸부(土謝圖汗部), 새음낙안부(賽音諾顏部), 거신칸부(車臣汗部)와 찰살극도칸부(札薩克圖汗部)이다.
*1661년의 청나라(清朝) 장악구역 그림. 서북에 회색칠을 한 곳의 대부분은 1691년 뒤에 점차 외찰살극(外札薩克)의 주체로 자리매김하였다.
*준갈이 전투 그림. 청(清) 건륭(乾隆)이 준부(準部) 회부(回部)를 평정하고 승리를 얻은 일을 그린 그림이 《격등악랍작영도(格登鄂拉斫營圖)》이다. 건륭 20년(1755년)에 아옥석(阿玉錫)이 청군(清軍)을 이끌고 준갈이칸(準噶爾汗) 달와제(達瓦齊)를 추격하여 격등산(格登山)에 이르는 상황을 묘사하였다.
맹부(盟部)
◉외객이객(外喀爾喀)
외몽고 토사도칸부(外蒙古土謝圖汗部), 거신칸부(車臣汗部)는 고륜판사대신((庫倫辦事大臣)이 관리하였고 새음낙안부(賽音諾顏部), 찰살극도칸부(札薩克圖汗部)는 오리아소대 장군(烏里雅蘇臺將軍)이 관리하였으며 별도의 장군(將軍)이 사부몽고(四部蒙古) 군대를 통솔하여 관리하였다.
▷흠차고륜판사대신(欽差庫倫辦事大臣) : 이는 청대(清代)에 객이객몽고 토사도칸부(喀爾喀蒙古土謝圖汗部)에 설치했던 주차대신(駐劄大臣)으로 건륭(乾隆) 26년(1761년), 대고륜(大庫倫, 지금 몽고국 수도 울란바토르(烏蘭巴托))에 두었다. 일반적으로 만주인(滿人) 출신을 기용하였고 수임대신(首任大臣)은 낙목혼(諾木琿)이라 하였다. 그 부관직으로 봉판대신(幫辦大臣) 한 사람을 두어 통칭 몽고판사대신(蒙古辦事大臣)이라 불렀으며 몽고왕공(蒙古王公), 태길(台吉)이 맡았다. 선통(宣統) 3년(1911년), 외몽고(外蒙古)가 독립하면서 마지막 판사대신(辦事大臣) 삼다(三多)는 철포존단파(哲布尊丹巴) 정권에게 쫓겨나 북경으로 돌아갔다.
→주차대신(駐劄大臣) : 또는 주찰대신(駐紮大臣, 駐扎大臣)으로도 적는다. 이는 청대(清代) 외몽고(外蒙古), 청해(青海), 서장(西藏), 신강(新疆) 등 번부(藩部) 땅에 주둔한 군정장관(軍政長官)의 직함이다. 만주어로 대신(大臣)을 가리켜 “앙방(昂邦, Amban)”이라 하니 총독(總督) 등의 관직 이름이 만주어 안에 있고 또 이 말을 사용하였다. 구미(歐美) 학자들도 늘 「암반(amban)」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청대(清代)의 주찰대신(駐紮大臣)을 대신 가리킨다.
▷정변좌부장군(定邊左副將軍)이 바로 오리아소대 장군(烏里雅蘇臺將軍)이다. 이는 청대(清代) 외몽고(外蒙古), 당노오량해(唐努烏梁海)와 과포다(科布多) 지방의 최고 군사 장관이었다. 옹정(雍正) 11년(1733년)에 설치하였는데 수임장군(首任將軍)을 책릉(策棱)이라 하였다. 건륭(乾隆) 이후에 이들은 오리아소대성(烏里雅蘇臺城, 지금 몽고국 찰포칸성(扎布汗省) 오리아소대성(烏里雅蘇臺城))에 상주하였기에 오리아소대장군(烏里雅蘇臺將軍)이라 불렀다. 오리아소대 장군(烏里雅蘇台將軍)의 행정구획은 1820년에 새음낙안부(賽音諾顏部), 당노오량해(唐努烏梁海), 토사도칸부(土謝圖汗部), 찰살극도칸부(扎薩克圖汗部), 과포다(科布多), 거신칸부(車臣汗部)였다. 선통(宣統) 3년(1911년)말, 외몽고가 독립하면서 이 관직은 그 끝을 보았다.
*위 지도는 1820년 오리아소대 장군(烏里雅蘇台將軍) 관할 구역 지도로 전체도(붉은색)이다.
*당노오량해(唐努烏梁海), 거신한부(車臣汗部), 토사도칸부(土謝圖汗部), 새음락안부(賽音諾顏部), 찰살극도한부(札薩克圖汗部), 과포다(科布多)가 오리아소대 장군(烏里雅蘇台將軍) 관할에 있었을 때의 위치도(1820년).
*1820년 준갈이부(准部), 신강(新疆)에서의 세력 범위도(붉은색).
토사도칸부(土謝圖汗部) 20기(旗, 칸아림맹(汗阿林盟))
거사칸부(車臣汗部) 23기(二十三旗, 극로륜파이화둔맹(克魯倫巴爾和屯盟))
새음락안부(賽音諾顏部) 19기(十九旗), 액로특부(額魯特部) 두 기(二旗)를 붙였다.(제제이리극맹(齊齊爾里克盟))
찰살극도칸부(札薩克圖汗部) 18기(十八旗), 휘특부(輝特部) 한 기(一旗)를 붙였다.(찰극필랍색흠필도이낙이맹(札克畢拉色欽畢都爾諾爾盟)
◉과포다(科布多)
과포다(科布多)에 소속된 찰살극(札薩克)은 과포다참찬대신(科布多參贊大臣, 곧 과포다 지방에 주찰대신(駐紮大臣))이 관할하고 오리아소대 장군(烏里雅蘇臺將軍)이 통제하였다.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 14기(十四旗)(좌우익새음제아합도맹(左右翼賽音濟雅哈圖盟))
휘특부(輝特部) 두 기(二旗)를 붙였다.
휘특하전기(輝特下前旗)
휘특하후기(輝特下後旗)
찰합심삼등공기(札哈沁三等公旗)
신토이호특부(新土爾扈特部) 두 기(二旗)(청색특기륵도맹(青塞特奇勒圖盟)이니 광서(光緒, 1871년 8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 말에 고쳐서 아이태(阿爾泰)에 소속시켰다.)
신토이호특좌기(新土爾扈特左旗)
신토이호특우기(新土爾扈特右旗)
신화석특부(新和碩特部) 1기(一旗)(광서(光緒)말에 고쳐 아이태(阿爾泰)에 소속시켰다.)
신화석특기(新和碩特旗)
*1911년, 아이태구역도(阿爾泰區域圖). 승화사(承化寺) 부근(附近)이고 b 구역은 원래 아이태(阿爾泰) 관할 구역이었다. 몽고가 독립한 뒤에 외몽고(外蒙古)에 귀속되었다.
◉서투몽고(西套蒙古)
서투몽고(西套蒙古) 2기(二旗)는 맹(盟)을 설치하지 않고 이번원(理藩院)에 바로 소속시켰으며 아울러 섬감총독(陝甘總督)이 통제하였다.
아랍선액로특기(阿拉善厄魯特旗)
액제납토이호특기(額濟納土爾扈特旗)
◉청해몽고각부(青海蒙古各部)
청해몽고(青海蒙古) 각 부(部)는 서녕판사대신(西寧辦事大臣)에게 모두 소속되었다.
화석특부(和碩特部) 21기(旗)
화석특전두기(和碩特前頭旗)(하남(河南) 5기(旗))
화석특전좌익두기(和碩特前左翼頭旗)(우익맹(右翼盟))
화석특북전기(和碩特北前旗)(좌익맹(左翼盟))
화석특북우익기(和碩特北右翼旗)(우익맹(右翼盟))
화석특북좌익기(和碩特北左翼旗)(좌익맹(左翼盟))
화석특북좌말기(和碩特北左末旗)(좌익맹(左翼盟))
화석특북우말기(和碩特北右末旗)(좌익맹(左翼盟))
화석특동상기(和碩特東上旗)(우익맹(右翼盟))
화석특남좌익차기(和碩特南左翼次旗)(가경(嘉慶) 11년에 폐지)
화석특남좌익중기(和碩特南左翼中旗)(하남(河南) 5기(旗))
화석특남좌익후기(和碩特南左翼後旗)(좌익맹(左翼盟))
화석특남좌익말기(和碩特南左翼末旗)(우익맹(右翼盟))
화석특남우익중기(和碩特南右翼中旗)(하남(河南) 5기(旗))
화석특남우익후기(和碩特南右翼後旗)(좌익맹(左翼盟))
화석특남우익말기(和碩特南右翼末旗)(좌익맹(左翼盟))
화석특서전기(和碩特西前旗)(좌익맹(左翼盟))
화석특서후기(和碩特西後旗)(좌익맹左翼盟))
화석특서좌익후기(和碩特西左翼後旗)(우익맹(右翼盟))
화석특서우익후기(和碩特西右翼後旗)(우익맹(右翼盟))
화석특서우익중기(和碩特西右翼中旗)(좌익맹(左翼盟))
화석특서우익전기(和碩特西右翼前旗)(우익맹(右翼盟))
휘특부(輝特部) 1기(旗)
휘특남기(輝特南旗)(우익맹(右翼盟))
작라사부(綽羅斯部) 2기(二旗) 〈작라사는 위랍특(衛拉特, 곧 서부 와랄(瓦剌)) 몽고족인 준갈이부(準噶爾部),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 위랍특(衛拉特) 돌궐인(突厥人)의 성씨(姓氏)이다.〉
작라사북중기(綽羅斯北中旗)(우익맹(右翼盟))
작라사남우익두기(綽羅斯南右翼頭旗)(우익맹(右翼盟))
토이호특부(土爾扈特部) 4기(四旗)
토이호특서기(土爾扈特西旗)(좌익맹(左翼盟))
토이호특남전기(土爾扈特南前旗)(하남(河南) 5기(五旗))
토이호특남중기(土爾扈特南中旗)(우익맹(右翼盟))
토이호특남후기(土爾扈特南後旗)(좌익맹(左翼盟))
청해객이객부(青海喀爾喀部) 1기(一旗)
객이객남우기(喀爾喀南右旗)(우익맹(右翼盟))
◉신강몽고(新疆蒙古) 각 부(部)
신강몽고(新疆蒙古) 각 부(部)는 이리 장군(伊犁將軍)에게 모두 소속되었다.
구토이호특부(舊土爾扈特部)(오눌은소주극도맹(烏訥恩素珠克圖盟))〈구토이호특부는 러시아 복이가하(伏爾加河, 볼가강) 유역을 따라서 옮겨가 청나라 강역의 토이호특부락(土爾扈特部落)에 이르렀고 뒤에 청대(清代) 신강(新疆) 땅 안의 몽고맹(蒙古盟)이 되었다.〉
남로구토이호특(南路舊土爾扈特) 4기(四旗)
북로구토이호특(北路舊土爾扈特) 3기(三旗)
동로구토이호특(東路舊土爾扈特) 2기(二旗)
서로구토이호특(西路舊土爾扈特) 1기(一旗)
중로화석특부(中路和碩特部) 3기(三旗)(파도색특기륵도맹(巴圖塞特奇勒圖盟))
◉흑룡강액로특(黑龍江厄魯特)
의극명안기(依克明安旗, 청나라 때에 흑룡강의 몽고 찰살극기(札薩克旗)였다)에 의존하여 흑룡강장군(黑龍江將軍)에 모두 소속되었으니 지금 흑룡강성(黑龍江省) 서부에 제제합이시(齊齊哈爾市)에 있었다.
관직(設官)
외찰살극몽고관리(外札薩克蒙古官吏)의 공통 제도:
맹장(盟長)과 부맹장(副盟長)은 각 맹(盟)에 한 사람씩 두었고 해당 맹(盟)에 소속된 찰살극(札薩克, 집정관)과 한산왕공(閒散王公)이 내부적으로 간단히 선출하였다.
찰살극(札薩克, 또는 扎薩克)은 바로 기장(旗長)이니 각 기(旗)에 한 사람씩 두고 한 기(旗)의 정령(政令)을 관장하니 일반적으로 세습될 수 있었다.
관기장경(管旗章京, 장경은 무관의 하나, 또는 문서 담당 관원을 말함)은 각 기(旗)에 한 사람씩 두었고 부장경(副章京)은 각 기(旗)에 두 사람씩 두었다.
참령(參領)은 각 여섯 좌령(六佐領)에 한 사람의 참령(參領)을 두었다.
좌령(佐領)은 각 소목(蘇木, 기층 행정구획 단위 「좌(佐)」)에 좌령 한 사람을 두었으니(또한 예외도 있었다)향장(鄉長)에 맞먹었다.
효기교(驍騎校, 청조(清朝)의 팔기(八旗), 외번몽고기(外藩蒙古旗)의 군관 이름)는 각 소목(蘇木)에 한 사람씩 두었다.
십장(什長)은 각 열 가구(十戶)마다 한 사람의 십장(什長)을 두었다.
▷찰살극(扎薩克) : 찰살극(扎薩克)은 또한 찰살(札薩)이라고도 적으니 그 뜻은 「집정(執政)」으로 몽고어의 온전한 명칭은 「찰살극낙안(扎薩克諾顏)」이다. “추장(酋長)”과 “집정관(執政官)”의 뜻이 있다. 이는 청대(清代) 조정(朝廷)에서 몽고왕공(王公)과 장인(藏人), 회부왕공(回部王公)에게 수여했던 관직이다. 봉건 영주와 지방관이라는 이중 기능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찰살극(扎薩克) 제도의 최초 형태는 명(明)나라 말기에 몽고도문칸(蒙古圖們汗, 1539년—1592년, 존칭은 찰살극도칸(扎薩克圖汗)이다. 몽고대칸(蒙古大汗),찰합이부(察哈爾部) 제 3대 통치자였다)이 세운 좌우익(左右翼) 「오집정(五執政)」이었는데 점차 변화 발전하면서 몽고 낙안(蒙古諾顏)이라는 관직 이름이 되었다. 〈낙안(諾顏), 또는 나안(那顏)이니 몽고어로 장관(長官)을 뜻한다.〉
청(清)나라가 몽고를 통치하였을 때 만주 팔기제(滿洲八旗制)를 본떠서 찰살극기(扎薩克旗)를 짰는데 외번(外藩) 각 기(旗)의 세습되는 찰살극(扎薩克)은 바로 「기장(旗長)」이고 영내(領內)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아울러 태길(台吉, 태길은 몽고 귀족이니 청나라에서 정식으로 몽고왕공(蒙古王公)의 작위로 수여한 것임)을 도와 그 부관이 되어 기(旗)의 업무를 도와 처리하였다. 이는 세관(世管)과 공중(公中) 두 종류로 나뉜다. 세관(世管)이란 각 기(旗)에 왕공(王公)의 수장은 대대로 그 직을 세습함을 말한다. 공중(公中)이란 작위나 품급(爵秩)의 높낮이에 얽매이지 않고 적임자를 선출해 내어 칙명으로 수여함을 말한다.
찰살극(札薩克)의 직무는 청나라 조정을 통하여 주어졌고 이번원(理藩院)의 정령(政令)에 복종하였으며 주방장군(駐防將軍), 도통(都統), 주찰대신(駐紮大臣)의 통제를 받았고 봉급이 있었다. 〈주방장군(駐防將軍)은 청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무관이다. 변방에서 주둔하며 군정(軍政) 장관 노릇을 했던 주차대신(駐劄大臣)과 역할이 비슷하다. 초기에 만어(滿語)로 「앙방장경(昂邦章京)」이라 하였다가 장군으로 하였다. 전국에 모두 16명의 주방장군을 두었었다.〉
찰살극(札薩克)을 설치한 몽고부락을 외번몽고(外藩蒙古)라 일컫고, 찰살극(札薩克)이 한 기(旗)의 행정 및 군사장관(軍事長官)이 되니 내속몽고(內屬蒙古, 청나라 때, 세습되는 찰살극을 두지 않고 조정에서 직접 관리를 임명하여 다스렸던 각 기(旗)를 말함)의 총관(總管)에 맞먹었다. 외번몽고(外藩蒙古)의 찰살극(札薩克)은 일반적으로 작위(爵位)가 있고 대부분 세습될 수 있었다. 신강(新疆) 회부(回部)의 합밀(哈密), 토로번(吐魯番)에 대해서도 청나라 조정은 회부(回部)의 수령을 찰살극(札薩克)으로 책봉하여 몽고의 한 기(旗)와 똑같이 여기었다. 각각 합밀찰살극기(哈密扎薩克旗, 합밀회왕기(哈密回王旗))와 토로번찰살극기(吐魯番扎薩克旗)이 그것이다.
찰살극(札薩克)의 봉지(封地) 안에 산천, 하천(河流), 산림, 목지(牧地), 토지와 산업(田產)은 똑같이 그의 소유로 귀결시켰고 나아가 청(清) 정부에 대해 어떠한 부역이나 세금을 부담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그의 관할에 모두 들어갔고 아울러 부세(賦稅)를 교대로 납부하였으며 부역을 담당하였고 게다가 찰살극(札薩克)이 그들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신강(新疆) 합밀(哈密), 토로번(吐魯番)에 두 찰살극기(扎薩克旗)를 설치하였던 초기 기(旗)아래 소속된 사람들은 모두 그의 농노(農奴)가 되어 사람들이 의존 관계가 엄격하였다. 옹정(雍正) 후에 한족(漢族) 중에 이민자들이 자리 잡은 내찰살극몽고(內扎薩克蒙古) 지구에서, 청(清) 정부는 세금이 찰살극(扎薩克)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려고 실제로 몽(蒙)과 한(漢)을 나누어 다스렸다.
*과이심좌익(科爾沁左翼)의 곽이라사후기(郭爾羅斯後旗)를 관할한 찰살극(扎薩克)의 도장.
▷참령(參領) : 더러 갑라(甲喇)라고도 하니 청대(清代) 팔기(八旗)의 조직 이름으로 경기(京旗) 매 기(旗)아래 다섯 참령(五參領)으로 나누고, 매 참령(參領) 아래에 좌령(佐領) 몇 명을 관리하였다. 참령(參領)은 위로 부도통(副都統, 매륵액진(梅勒額真))과 도통(都統, 고산액진(固山額真))이 있었다. 별일이 없는 상황에서는 한 참령(參領)이 다섯 좌령(佐領, 우록장경(牛錄章京))을 통솔하여 관리하였다.
참령(參領)의 장관은 최초에는 「갑라액진(甲喇額真)」이라 불렀었고 뒤에 갑라장경(甲喇章京)이라 고쳐 불렀다. 소속된 지방의 전쟁 대비나 병적(兵籍), 소송(爭訟), 호구(戶口), 전택(田宅) 등을 관장하였다.
청대(清代) 몽고기(蒙古旗) 아래에는 또 그 해당 직무가 있으니 「찰란(扎蘭)」(온전한 이름은 「찰란장경(扎蘭章京)」)이라 불렀다.
→팔기(八旗) : 이는 청조(清朝)가 특유하게 군사(軍事), 생산(生產)과 행정(行政) 관리를 한 몸(一體)에 집약시켰던 사회조직이다. 기(旗)아래 사람들을 일컬어 「기인(旗人)」이나 「팔기자제(八旗子弟)」라 불렀다. 팔기(八旗)의 최초의 형태는 만주인(滿洲人)의 전신인 명대(明代)에 여진(女真) 사람의 사냥 소대(小隊) 「우록(牛錄)」에서 나왔다. 누루하치(努爾哈赤)가 이를 하나의 제도로 잘 고쳐 1615년 정식으로 팔기(八旗)를 창립하였다. 팔기는 양황(鑲黃), 정황(正黃), 정백(正白), 정홍(正紅), 양백(鑲白), 양홍(鑲紅), 정람(正藍), 양람(鑲藍)이라는 여덟 개 기색(旗色)으로 나누었는데 그 뒤에 수십 년의 전쟁과 발전과정을 거치고 또 점차 몽고와 한인(漢人) 등 무리를 흡수하여서 몽고팔기(蒙古八旗)와 한군팔기(漢軍八旗)로 증설하고서 만주(滿洲)를 핵심으로 하고 몽고와 한군(漢軍)을 주체로 하는 다민족 연합의 사회집단을 형성하였다.
팔기(八旗) 자제(子弟)들은 「태어나면 당(檔)에 들어가고 장성하여서는 군사를 담당한다. (生則入檔,壯則當兵)」 따라서 갑옷을 입고서 군대에 종사함을 주요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고 이 밖에 추천을 받아 벼슬길에 나서기도 하니 그들은 교육(教育), 과거시험, 직업, 법률 등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 모두 일정한 특권을 누렸으니 팔기(八旗)의 성원들은 이로써 국가의 각계각층에서 제어력을 가졌었다.
▷좌령(佐領) : 더러 우록(牛彔), 우록(牛錄)이라고 한다. 그 뜻은 「큰 화살(大箭)」이다. 청조(清朝) 팔기(八旗)의 기본 단위였다. 명(明) 만력(萬曆) 29년(1601년), 누루하치(努爾哈赤)가 3백 인을 정하여 한 우록(一牛彔)으로 만들었다.
좌령(佐領)의 장관은 최초에는 우록액진(牛彔額眞, niru ejen)이라 불렀다. 여진어(女眞語) 「액진(額真)」은 그 뜻이 「주인(主人)」이니 「우록액진(牛彔額真)」은 곧 「전주(箭主)」이다. 조장(組長)이라는 뜻이다. 후금(後金) 천총(天聰) 8년(1634년)에 우록장경(牛彔章京)이라 고쳐 불렀다. 순치(順治, 1644년-1661년) 때에 한자 번역 말을 정하고 역시 좌령(佐領)이라 불렀다.
→도통(都統)은 무관의 하나이다. 십육국(十六國) 전진(前秦)에서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청대(清代) 이후에 상설로 두었다. 무관 직업 중에서 질품(秩品)은 주방장군(駐防將軍) 바로 다음이었다.
군대(領兵)
외몽고(外蒙古)의 군대는 오리아소대 장군(烏里雅蘇臺將軍)이 통솔하니 사부(四部) 각각 부장군(副將軍) 한 사람을 두었다. 두이백특(杜爾伯特), 신토이호특(新土爾扈特), 신화석특(新和碩特)의 군대는 과포다 참찬대신(科布多參贊大臣, 청나라 때 과포다 지역의 주찰대신을 말한다)이 통솔하였다. 청해 몽고(青海蒙古) 각 부(部)의 군대는 서녕판사대신(西寧辦事大臣)이 통솔하였다. 신강(新疆) 각 부(部)의 군대는 오로목제 도통(烏魯木齊都統)과 이리 장군(伊犁將軍)이 통솔하였다.
작위(封爵)
외찰살극 봉작(外札薩克封爵)은 내찰살극(內札薩克)과 크게 같아서 찰살극친왕(札薩克親王), 찰살극군왕(札薩克郡王), 찰살극패륵(札薩克貝勒), 찰살극패자(札薩克貝子), 찰살극진국공(札薩克鎮國公), 찰살극보국공(札薩克輔國公), 찰살극태길(札薩克台吉)이 있었다. 탑포낭(塔布囊)은 없었다. 토사도칸부(土謝圖汗部), 거신칸부(車臣汗部), 찰살극도칸부(札薩克圖汗部),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들은 구토이호특부(舊土爾扈特部)와 함께 칸(汗)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었고 왕(王)이라는 작위의 지위에 있었다.
▷탑포낭(塔布囊) : 또한 「타불랑(他不浪), 당불랑(倘不浪)」이라고도 한다. 원래 명대(明代) 때 동부 몽고인이 칭기스칸의 후손 여자가 결혼한 사람에 대해서 붙였던 이름으로 부마(駙馬)와 뜻이 같다. 청대(清代)에 몽고 객라심부(蒙古喀喇沁部) 작위의 하나로 되었고 그 지위는 대체로 태길(台吉)과 같았다. 네 등급(等)으로 나뉜다. 탑포낭(塔布囊)의 지위는 보국공(輔國公)의 다음이다. 몽고왕공(蒙古王公) 작위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모두 「태길(台吉)」인데 다만 객라심부(喀喇沁部) 세 기(三旗)와 토묵특좌익기(土默特左翼旗)의 선조는 일찍이 청조(清朝)의 선조와 혼인 관계를 맺어서 이로 인해 이 왕공을 일컬어서 탑포랑(塔布囊)이라 하였다. 탑포랑은 몽고어 「탑포(塔布)」에서 나왔으니 「다섯 개(五個)」라는 뜻이다. 한어(漢語) 「왕(王)」이 바뀐 음의 발음인 「낭(囊)」과의 조합이니 그 뜻은 「오위왕(五位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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