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
*아래 자료는 유기백과 중문판을 번역한 것이고 그 사진들을 가져왔다.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는 또한 타안 삼위(朵顏三衛)라고도 하니 타안위(朵顏衛), 태녕위(泰寧衛), 복여위(福余衛)를 말미암아 조성되었고 대흥안령(大興安嶺) 동쪽 지구와 요서주랑(遼西走廊)의 서북 일대에 위치하였다. 원(元)나라가 망하고 나서 새북(塞北)의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와 달단(韃靼), 와랄(瓦剌) 등은 명(明)나라 초기에 몽고제부(蒙古諸部)의 삼대 부락(三大部落)을 구성하였다. [註 1] 오제섭특(烏濟葉特)이라고도 불렀다. [註 2] 명조(明朝)에서 일컬은 올량합(兀良哈)은 몽고 긍특산(肯特山)에 분포한 올량합 만호(兀良哈萬戶)와 같지 않다.
[註 1] 명조(明朝)는 비록 그 수령을 책봉하여 기미위(羈縻衛)의 관원으로 삼았지만, 삼위(三衛)는 홍무(洪武, 명 태조 주원장의 연호, 1368년 1월 23일 — 1398년) 때부터 때로 항복하고 때로 등을 돌리면서도 몽고칸(蒙古汗)의 정(廷) 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그 실력 측면에서도 몽고(蒙古) 동쪽(東)에 달단(韃靼), 서쪽(西)에 와랄이라는 양대 부(部)와 견주기에 멀었다. 16세기 중기, 찰합이(察哈爾)가 동쪽으로 옮겨간 뒤에 타안 삼위(朵顏三衛)는 좌익삼만호(左翼三萬戶) 안에 융합되어 삼위(三衛)는 겨우 이름만 남게 되었다. 〈몽고대칸(蒙古大汗) : 몽고칸국(蒙古汗國)과 공대몽고(共戴蒙古)에서 사용하였던 ‘군주(君主)’에 대한 호칭이다. 가칸(可汗) 또는 합칸(合罕)이라고도 하니 황제(皇帝)와 비슷하다. 대몽고국(大蒙古國, 곧 원(元)나라)은 1206년-1368년 9월14일까지 존립하였다. 「공대몽고국(共戴蒙古國)」은 대몽고국(大蒙古國) 또는 박극다 칸국(博克多汗國)이라고도 하니 1911년-1915년과 1921년-1924년까지 존립하였던 나라로 수도는 지금에 몽고국 울란바토르였다.〉
[註 2] 몽고황금사강(蒙古黃金史綱)에서 「올자(兀者)」에 대해 기록하기를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와의 관계가 밀접한 「올자(兀者)」는 대흥안령(大興安嶺) 동쪽에 머물며 유목 생활을 하였고(복여위(福余衛) 역시 스스로를 「올자(兀者)」라고 부른다) 6천호(千戶)를 통솔하였기 때문에 통칭 「육천오제섭특(六千烏濟葉特)」이라고 불렀다. 「특(特)」(d)은 몽고어의 복수사철(複數詞綴)이다고 하였다. 엄답칸전(俺答汗傳)에서는 「오제섭특국(烏濟葉特國)」(öǰiyed uls)이라고 적었고 수정염주(水晶念珠)에서는 「오제적특(烏濟㰅特)」이라 잘못 적었다.
▷타안위(朵顏衛) : 타안위는 명조(明朝) 때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의 하나이다. 타안산(朵顏山, 색악이제산(索岳爾濟山),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동북부에 있다)을 인연으로 이름을 얻었다. 명나라 중기 이후에 타안위(朵顏衛)의 세력이 가장 강했고 한어 서적(漢籍) 안에는 늘 태령(泰寧), 복여(福余), 타안(朵顏) 삼위(三衛)를 합쳐서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로 일컬었으니 그 뜻은 「올량합(兀良哈) 등 삼위(三衛)」이다.
홍무(洪武) 22년(1389년) 기미위(羈縻衛)를 설치하였는데 목초지(牧地)는 지금 내몽고 자치구 작이하(綽爾河, 눈강(嫩江)의 지류) 유역에 있었다. 그 수령은 칭기스칸(成吉思汗)의 부장(部將)이었던 자륵멸(者勒蔑)의 후손이다. 명(明)이라는 한 왕조가 마칠 때까지 그들은 명(明) 조정과의 관계가 줄곧 복종과 등돌림을 반복하였고 한때 와랄(瓦剌)의 야선(也先)과 몽고 토묵특(土默特)의 엄답칸(俺答汗)에 귀순하여 항복하였었다. 이들은 선덕(宣德, 1426년-1435년), 정통(正統, 1436년-1449년) 이후에 남쪽으로 옮겨 지금 내몽고 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옹우특기(翁牛特旗) 남쪽과 하북성(河北省) 북부에 장성(長城) 밖에 이르렀다. 수령 화당(花當, 또는 花通)이 부(部)를 이끌고 변방 지역에서 노략질하고 침입하기를 밥 먹듯이 하였지만, 이따금 변방 지역에 장마당에서 명나라 조정과 무역을 하기도 하였다. 16세기 중엽 후에 막남몽고(漠南蒙古) 객라진부(喀喇嗔部, 곧 객라심(喀喇沁)에 의지하기도 하였다.
▷태녕위(泰寧衛) :태녕위는 명조(明朝) 때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의 하나이다. 태녕로(泰寧路)로 인해서 그 이름을 얻었다. 그 선조는 원대(元代)에 「동도제왕(東道諸王)」, 또는 「왕류(往流)」제부(諸部)(곧 옹우특(翁牛特))라고도 알려졌다.
홍무(洪武) 22년(1389년)에 태녕위를 설치하였다. 지금 길림성 도아하(洮兒河) 유역에 살고 있었다. 먼저는 대녕도사(大寧都司)에 속하였었다. 그 수령이 칭기스칸의 막내아우 철목가알적근(鐵木哥斡赤斤)의 후손이다. 영락(永樂) 7년(1409년), 태녕위를 고쳐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에 예속시켰다. 명나라의 구슬리고 농락하는(羈縻)는 태도(정책)에 따라 그 부락은 명조(明朝)에 대해 항복하기도 하고 등을 돌리기도 하였지만, 명군(明軍)에게 늘 깨끗이 소탕되었다. 선덕(宣德), 정통(正統) 사이에 남쪽으로 옮겨 동쪽으로는 지금 요녕성(遼寧省) 금주(錦州), 의현(義縣), 북진(北鎮)들의 시현(市縣)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 일대에까지 이르렀다. 태녕위 도독첨사(泰寧衛都督僉事)는 일찍이 명조(明朝)에게 대녕(大寧)의 폐성(廢城)과 갑순(甲盾)에 살기를 간청하였지만, 우겸(于謙, 명나라 대신)에게 거절 당하였다. 16세기 중엽 객이객부(喀爾喀部, 內喀爾喀)의 호라합적(虎喇哈赤)에게 병탄 되었다.
▷복여위(福余衛) : 복여위는 명조(明朝)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의 하나이다. 땅이 옛 부여국(古夫余國)에 있었던 인연으로 이름을 얻었다. 또 「올자(兀者)」(만어(滿語) 「와집(窩集)」과 어원이 같으니 숲속에 사람(林中人)의 별칭이다)
홍무(洪武) 22년(1389년)기미위(羈縻衛)를 설치하였다. 관할한 땅은 초기에 지금 흑룡강성(黑龍江省) 눈강(嫩江) 하류 일대에 있었고 그 수령은 칭기스칸(成吉思汗) 막내아우 철목가알적근(鐵木哥斡赤斤)의 후손이다. 동몽고(東蒙古)와 와랄(瓦剌) 제부(諸部)의 압박을 피하려 선덕(宣德), 정통(正統) 뒤에 남쪽으로 옮겨 지금에 요녕성(遼寧省) 요양(遼陽), 심양(瀋陽), 철령(鐵嶺), 개원(開原) 등의 시현(市縣) 일대에 이르렀다. 1424년, 과이심부(科爾沁部)는 와랄(瓦剌)의 탈환(脫歡)에게 공격받아 깨져 복여위(福余衛)로 달아났다. 복여위(福余衛) 수령들은 알적근 계(斡赤斤系)에서 나왔다가 바뀌어 합살이 계(哈薩爾系, 칭기스칸의 둘째 동생(二弟)인 야속해(也速該)의 둘째 아들 이름)로 넘어갔다. 뒤에 몽고 제부(蒙古諸部)가 명조(明朝)의 요동(遼東) 일대를 침입해 소동을 일으켰을 때 이에 참여하였다. 16세기 중엽 후, 과이심부(科爾沁部)에 병탄 되었다.
*15세기 때 명조(明朝)와 같은 시기에 몽고고원(蒙古高原)에 부락과 달단(韃靼) 지도. 달단은 1388년—1635년까지 존립하였으며 명조(明朝)에서는 이때의 동몽고인(東蒙古人)을 가리켜 달단이라 하였다. 15세기 초, 몽고제부(蒙古諸部)는 점차 동(東)과 서(西), 양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몽고 초원 동부는 원래 북원(北元)의 조정(朝廷)이 통치했던 각 부(部)로 말미암아 조성이 되어 대막(大漠, 고비사막) 남북을 오가며 유목 생활을 하였고 명조(明朝)에서는 이들을 일러 「달단(韃靼)」이라고 하였다. 서부(西部)는 곧 몽고고원(蒙古高原) 서북에서 유목을 하던 와랄(瓦剌)이다.
위 지도 안 부락의 한자 이름 : 악이다사부(鄂爾多斯部, 오르도스(Ordos)부). 오량해(烏梁海). 오량해(烏梁海)의 이름은 전투할 때 구호인 「우리아(uria)」(오랍(烏拉))과 직함인 「칸(khan)」(칸(汗))에서 근원하였다. 객이객부(喀爾喀部). 찰합이부(察哈爾部). 아소특부(阿蘇特部). 아소특부는 아속특(阿速特)이라고도 한다. 역사책에서는 또한 아속(阿速), 아란(阿闌), 아사(阿思), 아숙(阿宿), 아소특(阿蘇特), 아속석(阿速惕) 등으로도 적고 있다. 「특(特)」은 몽고어에서 겹셈(複數)을 나타내는 접사이다. 객라심부(喀喇沁部). 토묵특부(土默特部). 악이다사부(鄂爾多斯部). 영사포부(永謝布部). 옹우특부(翁牛特部)는 지도에 ‘オンリウト部’를 찾을 수가 없었고 ‘옹우특부(翁牛特部), オンリュート, Ongliyud’가 있다.
배경
14세기 중엽에 몽고고원 동부는 곧 대흥안령(大興安嶺) 동쪽에서 곧장 여진 지구(女真地區)에 이르기 이르고 북쪽으로는 흑룡강 유역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를 바라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이들 지방에 적지 않은 유목 부락의 활동이 있었다. 칭기스칸은 일찍이 대흥안령(大興安嶺) 동쪽 지구를 가지고서 그의 막내동생 철목가알적근(鐵木哥斡赤斤)과 조카 액륵지대(額勒只帶, 또는 안적태(按赤台)로도 적는데 칭기스칸의 셋째 동생 합적온(合赤溫)의 아들)에게 봉지를 나누어 주어 그들의 올로사(兀魯思)를 만들었다. [註 3]。액륵지대(額勒只帶)의 올로사(兀魯思)는 주요하게 올량합(兀良哈)과 내만(乃蠻)의 나머지 부(部)로 말미암아서 조성되었다. 철목가알적근(鐵木哥斡赤斤)의 올로사(兀魯思)는 주요하게 올자(兀者, 또는 삼림부락(森林部落))를 말미암아서 조성되었다. 〈[註 3] 올로사(兀魯思, 울수(uls)):몽고어이니 「인민(人民), 분지(份地, 영주에게 받은 땅), 국가(國家)」를 뜻한다. 〉
*12세기 몽고고원(蒙古高原)의 형세도(내만 (乃蠻) 위치도)
내만(乃蠻) : 고대에 돌궐과 몽고가 서로 혼합된 부락. 11세기에 몽고 고원 서부에서 살기 시작하였고 요(遼)와 금(金) 시대에는 아이태산(阿爾泰山)과 항애산(杭愛山) 사이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돌궐 이름 「사키즈 오구즈(sakiz oghuz)」(팔성 오고사인(八姓烏古斯人),별첩걸내만알(別帖乞乃蠻歹) 성(姓))이 있었고 또 「내마(乃馬), 내만(乃滿), 내만(廼蠻), 나만(奈曼), 나만(奈蠻), 내만(耐滿), 점발은(粘拔恩), 점팔갈(粘八葛), 점팔갈(粘八噶)」 등으로 음ㅇ역(音譯) 되었다. 내만(乃蠻)은 몽고에게 멸망 당한 뒤, 그 옛 땅은 1225년에 칭기스칸이 그 아들 와활태(窩闊台)에게 봉지로 주었다. 원(元) 지대(至大) 2년(1309년), 와활태 칸국(窩闊台汗國)이 찰합태 칸국(察合台汗國)과 원(元)나라에 의해 분할되었다.
멸아걸(蔑兒乞, 영어로는 Merkit,메르키트) : 「蔑兒乞」(merged)은 몽고어 mergen, 즉 「지혜(智慧)나 신기의 사수(神射手)」의 복수이다. 이 말은 또한 마법(魔法), 신탁(神諭), 점복(占卜), 예언(預言) 등의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몽고어는 명사와 형용사에 대한 명확한 형태나 어법(語法)의 분별이 없어서 mergen는 「현인(賢人)」이나 「대사(大師)」를 가리킬 수 있고 또 「지혜의(智慧的)」나 「능숙한(嫻熟的)」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mergen(메르겐)은 사무 처리에 기교가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멸아걸은 “멸아걸척(蔑兒乞惕), 멸리길(滅里吉), 말겁자(韈劫子)”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고 요(遼)나라 때는 “매리급(梅里急), 밀아기(密兒紀)”라고 하였다. 이 부에는 삼대 성씨(姓氏)의 부족이 있으니 올도역척(兀都亦惕), 올와사(兀窪思, 또는 올아사(兀兒思)), 합아척(合阿惕)이 그것이다.
몽고인은 타안위(朵顏衛)를 올량합(兀良哈)이라 하고 태녕위(泰寧衛)를 옹우특(翁牛特)이라 하며 복여위(福余衛)를 오기섭특(烏奇葉特)이라 하였다. 이는 타안(朵顏), 태녕(泰寧)과 복여(福餘) 삼위(三衛)의 수령이 올량합(兀良哈, 곧 오량해(烏梁海)이니 자멸륵(者勒蔑)의 후손), 옹우특(翁牛特)과 오기섭특(烏奇葉特, 몽고화(蒙古化)된 퉁그스어족(通古斯語族) 여러 부(諸部)의 「올자(兀者)」) 세 부(部)에 뿌리를 두고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다. 타안위(朵顏衛)가 가장 세력이 강력하여 명조(明朝) 때에도 가끔 삼위(三衛統)를 타안(朵顏) 삼위(三衛) 또는 타안 등(朵顏等) 삼위라고 일컬었고 타안(朵顏), 태안(泰寧)과 복위(福餘) 삼위(三衛)가 머물렀던 땅을 「올량합(兀良哈)」이라고 통칭하였다. 〈옹우특(翁牛特)은 「왕류(往流)」로도 적는다. 원(元)나라 때에 「동도제왕(東道諸王, 칭기스칸이 동생들에게 동쪽 땅을 분봉하여서 왕이 된)」의 하나였던 철목가알적근(鐵木哥斡赤斤)의 후손, 곧 「왕류(往流)」의 여러 부(諸部)〉
원(元) 순제(順帝) 타환첩목아(妥懽帖木兒)가 주원장(朱元璋)에게 쫓겨 대도(大都, 지금에 북경)에서 몽고고원으로 돌아간 뒤에 이 땅의 몽고 각 부락은 자기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명군(明軍)의 진격을 막고 적극적인 방어를 진행하였다. 당시, 목화려(木華黎, 칭기스칸의 대장군) 후예인 납합출(納哈出) 장군이 20만 몽고 군사를 이끌고서 요하(遼河) 이북의 금산(金山, 지금 길림성 쌍요시(雙遼市) 경내)에 주둔하고 있다가 용안(龍安, 지금 길림성 농안현(農安縣))과 일도하(一圖河, 지금 이통하(伊通河)), 역미하(亦迷河, 지금 음마하(飲馬河)) 일대에 이르러 위에서 언급한 몽고 각 부(部)의 병풍같은 방어막을 만들었다.
1387년(명(明) 홍무(洪武) 11년), 명조(明朝)가 풍승(馮勝), 부우덕(傅友德)과 남옥(藍玉) 등에게 20만 대군을 붙여 보내니 경주(慶州, 지금 내몽고 파림우기(巴林右旗) 경내)를 우회하여 납합출(納哈出)의 군대가 주둔한 곳을 포위하였다. 납합출(納哈出)이 압박을 받고 투항하였다. 1388년 끝 무렵, 북원(北元) 황제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가 포어아해(捕魚兒海, 지금 몽고 패이호(貝爾湖), 곧 부이르Buir호)에서 명(明) 남옥(藍玉) 군대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는 중대한 군사상 패배로 북원(北元)이 대흥안령(大興安嶺) 동쪽에 몽고 여러 부락의 방어 병풍막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낳았고 북원(北元)이 멸망한 뒤에 요왕(遼王) 아찰실리(阿札失里) 등이 명조(明朝)의 대군이 국경을 압박하는 상황 아래에서 그저 명나라 조정(明廷)에 귀순하여 붙는 수밖에 없었다.
*원사연의(元史演義)에 실린 원(元) 순제(順帝)의 초상. 원 순제는 북원(北元)에서 붙인 묘호(廟號)는 혜종(惠宗)이라 ‘원 혜종(元惠宗)’이라고도 하고 몽고어로는 오합갈도칸(烏哈噶圖汗)이라 하며 지정제(至正帝), 경신제(庚申帝), 경신군(庚申君)이라고도 칭함. 원조(元朝) 11대 황제이자 몽고제국(蒙古帝國)의 15대 대칸(大汗)이다. 재위 기간 1333년 7월 - 1370년 5월
*북원(北元) 지도, 존립 기간 1368일 9월 14일-1388년 11월1일
*분홍색 부분은 명조(明朝) 초기에 얽어매었던 타안(朵顏) 등 삼위(三衛) 위치.
1389년(명(明) 홍무(洪武) 22년), 명 조정(明廷)이 이 땅에다 ‘얽어매어 제어하는(羈縻)’ 성질의 타안(朵顏), 태안(泰寧)과 복여(福餘) 삼위(三衛)를 설치하였다. 타안위(朵顏衛)는 굴열아하(屈烈兒河, 지금 흥안맹(興安盟) 귀도하(歸洮河)) 상류와 타안산(朵顏山, 지금 내몽고 찰뢰특기(扎賚特旗) 경내에 있는 산)일대에 있었고 태녕위(泰寧衛)는 탑아하(塔兒河, 지금 도아하(洮兒河))유역에 있었으니 바로 원대(元代)에 태녕로(泰寧衛)이다. 복여위(福余衛)는 눈강(嫩江)과 복여하(福余河, 지금 오유이하(烏裕爾河))유역에 있었다. 동시에 명나라 조정(明廷)은 삼위(三衛) 수령들에게 여러 급의 관직을 수여하고 농락과 얽어매는 일을 진행하였으니 아찰실리(阿札失里)를 봉하여 태녕위 지휘(泰寧衛指揮)로 삼았고 탑빈첩목아(塔賓帖木兒)를 지휘동지(指揮同知)로 삼았다. 해살남답계(海撒男答溪)는 복여 지휘동지(福余指揮同知)로 삼고 탈로홀찰아(脫魯忽察兒, 또는 脫兒火察)는 타안위 지휘동지(朵顏衛指揮同知)로 삼았다. 명나라 조정이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각기 그 인솔하고 있는 부(部)를 거느리고서 편안하게 가축을 방목해 치며 사는 것(各領其所部,以安畜牧)」이었다. 그럼에도 몽고본부(蒙古本部, 달단을 가리킴)의 야속질아(也速迭兒, 재위 기간 1388년—1391년, 달단(韃靼) 군주)와 그 부(部)의 신하 안달납합출(安達納哈出, 또는 安答納哈出)이 흥기한 뒤에 삼위(三衛)가 다시 몽고 쪽에 투항하여 명군(明軍)의 추격과 소탕을 겪었다.
*흥안맹(興安盟)과 그 아래에 찰뢰특기(扎賚特旗) 위치 지도. 붉은 색이 흥안맹의 위치이고 찰뢰특기는 그 소속이다.
1399년(명(明) 건문(建文) 원년(元年)), 명나라는 황실 내부에 전쟁이 발생하였으니 역사에서는 「정난지역(靖難之役, 난리를 다스려 안정시킨 일)」이라 부른다. 주체(朱棣, 훗날에 성조(成祖), 곧 영락제)가 「정난지역(靖難之役)」을 발동하기 전에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에 몽고 사람들의 지지를 도움으로 깔고서 진수 태녕위(鎮守大寧衛, 위(衛)의 치소는 지금 적봉시(赤峰市) 영성현(寧城縣))의 영왕(寧王)이던 주권(朱權)을 꺾어 패배시켰다. 뒤에 그는 다시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에게 3천 명의 기병을 빌려 그의 「정난군(靖難軍)」의 정예부대를 만들었다. 1402년, 주체(朱棣)가 즉위한 뒤에 그에게 힘을 보탠 몽고 부락에 대한 보답을 하여 명(明) 성조(成祖)는 영락(永樂) 연간(1403년 - 1424년)에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를 거듭 새롭게 설치하였다. 성조는 또한 삼위(三衛) 수령들을 도독(都督), 지휘(指揮), 천호(千戶)와 백호(百戶) 들의 직(職)에 봉하고 개원(開原), 광녕(廣寧) 두 지역에 국경 무역 장마당(互市)을 개설하도록 결정하여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가 명조(明朝)와의 무역 활동을 진행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대녕도사(大寧都司)가 안으로 옮겨옴에 따라 삼위(三衛) 또한 점차 남쪽으로 내려와 머물며 방목을 하였다. (지금에 승덕현(承德縣), 평천시(平泉市), 거창현(建昌縣) 그리고 노합하(老哈河) 유역)
▷대녕도지휘사사(大寧都指揮使司) : 간단히 대녕도사(大寧都司)라 일컫는다. 명조(明朝)가 지금 하북성(河北省) 북부와 내몽고 자치구 동남부 지구에 설립한 군정(軍政) 기구이다.
홍무(洪武) 20년(1387년)에 대녕도사(大寧都司)를 설치하고 치소를 대녕위(大寧衛, 지금 내몽고 자치구 영성현(寧城縣) 서쪽)에 두었다. 관할 지역은 지금 하북성의 장성(長城) 이북과 내몽고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이남 땅이었다. 이듬해에 북평행도사(北平行都司)로 고쳤다. 영락(永樂) 원년(元年, 1403년)에 대녕도사(大寧都司)를 다시 두고서 보정부(保定府, 지금 하북성 보정시(保定市))로 치소를 바꾸어 두었고 뒤에 거느리던 위소(衛所) 중에 어떤 것은 없애 버리고 어떤 것은 옮겨서 장성(長城) 이남까지 이르렀다가 청조(清朝) 초기에 완전히 폐지하였다.
그러나 명(明) 성조(成祖)의 약속은 완전히 실행되지 않았고 명조(明朝)는 삼위(三衛)의 몽고인이 남쪽으로 옮겨 대녕(大寧) 지구에 이르러 머물려 유목 생활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 각 부(部)는 대녕(大寧) 지구의 주목권(駐牧權)을 획득하기 위하여 당시 자못 강대했던 아속특부(阿速特部) 수령 아로태(阿魯台)와 연합하여 끊임없이 명조(明朝)에 진격해 공격하였다. 1422년 - 1424년 명(明) 성조(成祖)가 연달아 세 번 어가(御駕)를 타고 직접 정벌에 나서 아로태(阿魯台)를 공격하였고 아울러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는 다만 대녕(大寧) 지구를 얻으려 애썼고 이 때문에 결코 명조(明朝)와의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 있다가 이들은 군사들을 지휘하여 남하하였고 난하(灤河) 유역에 들어와서 머물며 방목하였다. 1428년, 이들은 다시 대녕성(大寧城)의 옛터로 진입하였고 아울러 회주(會州, 지금 하북 평천시(平泉市))를 거쳐 관하(寬河, 지금 하북 폭하(瀑河))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는 명(明) 선종(宣宗)이 직접 이끈 3천 기병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그저 전투에서 패배하고 끝을 알렸을 따름이었다.
남쪽으로 옮겨감(南遷)
15세기 30년대 후기에 (명(明) 선종(宣宗) 선덕(宣德) 말년과 영종(英宗) 정통(正統) 초년) 명조(明朝)의 국력이 약해짐에 따라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 부락들은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를 따라서 요하(遼河) 유역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남쪽을 향해 밀고 나아갔다. 15세기 40년대에 서몽고의 와랄(瓦剌) 세력이 점차 장대해져 명조(明朝)에 대해 거대한 위협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에 이미 흥화(興和, 하북성 장북현(張北縣))의 요충지를 점거한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는 더 이상 명조(明朝)의 명을 듣지 않았지만 와랄인(瓦剌人)에게 신하로서 복종하였다. 1449년 7월 1일(명(明) 정통(正統) 14년), 와랄부(瓦剌部) 수령으로 「사십사만(四十四萬) 몽고(蒙古)」의 대권(大權)을 거머쥔 야선 태사(也先太師)가 삼로(三路)의 대군을 이끌어 명조(明朝)에 대한 전쟁을 일으켰다. 이번 전장은 명조(明朝)와 와랄(瓦剌)과의 전쟁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차라기 명조(明朝)와 「몽고부락연맹(蒙古部落聯盟)」의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았다. 와랄(瓦剌)의 남침한 대군은 모두 세 갈래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으니 일로(一路)는 와랄(瓦剌)에게 정복 당한 꼭두각시(傀儡) 몽고 대칸(蒙古大汗) 탈탈불화(脫脫不花)가 이끌어 명조(明朝)의 요동(遼東) 지구로 진격하였고 다른 일로(一路)는 와랄(瓦剌)의 아라지원(阿剌知院)이 이끌고 와랄군(瓦剌軍)과 올량합 삼위군(兀良哈三衛軍) 주축이 되어 명조(明朝)에 군사상 중요 진(鎮)인 선부(宣府, 지금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다. 최정예 일로(一路)는 야선(也先)이 직접 스스로 거느린 중로군(中路軍)으로 명조(明朝)의 군사상 중요 진(鎮)인 대동(大同)을 공격하였다. 전투가 시작되고 장성(長城)을 따라 이어진 봉화(烽火) 불이 뻗어 나가자 구변(九邊)의 중요한 진(重鎮)에서는 주체(朱棣, 영락제, 성조)가 죽은 뒤 이십여 년 동안 누렸던 짧은 안녕이 철저하게 깨졌다. 이 토목보의 전쟁(土木堡之變)은 명조(明朝)와 몽고(蒙古)의 군사역량이 대비된 전환점이 되었다. 또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가 명조(明朝)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게 하였다.
15세기 중기 후에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의 세력 범위가 명(明)의 장성(長城) 변방 밖으로 뻗어 나갔다. 이로부터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가 머물며 방목한 땅(駐牧地)의 분포는 「대녕(大寧) 앞에서부터 희봉구(喜峰口)에 이르고 선부(宣府) 가까이까지를 “타안(朵顏)”이라 하고 금주(錦〈州〉), 의주(義〈州〉)에서부터 광녕(廣寧)을 거쳐 요하(遼河)까지를 “태녕(泰寧)”이라 하였으며 황니와(黃泥窪)로부터 심양(瀋陽)과 철령(鐵嶺)을 넘어 개원(開原)까지를 “복여(福余)”라 하였다. (《明史》卷328 : 自大寧前抵喜峰口,近宣府,曰朵顏;自錦〈州〉、義〈州〉歷廣寧至遼河,曰泰寧;自黃泥窪逾瀋陽、鐵嶺至開原,曰福余)」
여진인(女真人)은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의 동부에서 따로 건주 삼위(建州三衛)를 조성하여 당시 조선인(朝鮮人) 역시 중국 동북의 여진인(女真人)을 통칭 「올량합(兀良哈), 올적합(兀狄哈)」이라 하였으니 이는 모두 삼림부락(森林部落) 「올자(兀者)」(또한 「와집(窩集)」이라고도 함)에 대한 이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선부(宣府) 지도.
결과(結局)
16세기 중기, 몽고 대칸(蒙古大汗) 달뢰손(達賚遜)이 몽고좌익(蒙古左翼) 찰합이(察哈爾)와 객이객(喀爾喀) 두 만호(萬戶)를 거느려 이끌고서 동쪽으로 옮겨 타안위(朵顏衛)가 있는 지구에 이르러 머물며 방목하였으니 당시 몽고 정치 중심의 전이를 상징하였다. 타안(朵顏) 지구로 들어간 뒤, 내객이객(內喀爾喀)과 현지에 부락 사람들이 서로 혼인으로 연을 맺었고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의 여러 부(諸部)와 몽고 칸의 정부(蒙古汗廷)가 긴밀한 관계를 세워나가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똑같은 시기에 좌익토묵특만호(右翼土默特萬戶), 영사포만호(永謝布萬戶) 그리고 악이다사만호(鄂爾多斯萬戶)들도 서로 계속 타안(朵顏) 지구에 들어와 모두 이 땅에서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 결과 「사람들이 그득 차 근심이 되었다(人滿為患)」라는 상황이 나타났고 복여위(福余衛)로 하여 다시 옮겨가게 하였는데 그중에 일부분은 올라강(兀剌江 또는 혼동강(混同江)이라 하는데 장백산(長白山) 제2 송화강에서 발원한다)가로 옮겨갔고 그 나머지는 타안위(朵顏衛)가 거주한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이남에 합라탑라(哈剌塔剌), 소흥주(小興州) 등의 땅으로 옮겨가 거주하였다. 태녕위(泰寧衛)도 동쪽으로 옮겨 소흥주(小興州)와 극리굴로(克里屈勞) 등의 땅에 거주하였다.
*1580년 명나라 지도. 찰합이(察哈爾) 본부가 동쪽으로 옮기기 전의 타안(朵顏), 태녕(泰寧), 복여(福余, 부여(扶餘))등 삼위(三衛). 막북(漠北, 고비사막 북쪽)의 올량합(兀良哈)은 몽고 사서(史書)에서 달연칸(達延汗)이 분봉(分封)한 육만호(六萬戶)의 좌익올량합 만호(左翼兀良哈萬戶, 오량해(烏梁海))이니, 앞에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 또는 타안 삼위)와는 서로 다르다.
와해와 남은 것
타안(朵顏)-올량합부(兀良哈部)가 토묵특(土默特), 객라심(喀喇沁), 찰합이(察哈爾) 부(部)들과 맺은 혼인과 가까이 사귄 결과는 바로 자기 것 하나를, 셋으로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었다. 토묵특(土默特)과의 사귐이 긴밀했던 그 한 부분은 곧 토묵특(土默特)(그리고 몽고정(蒙古貞), 몽고정은 토묵특좌익기(土默特左翼旗)를 말함)에게 돌아갔고 객라심(喀喇沁)과의 사귐이 긴밀했던 그 한 부분은 객라심(喀喇沁)에게 돌아갔으며 찰합이(察哈爾)와의 사귐이 긴밀했던 그 한 부분은 찰합이(察哈爾)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러 그 자신의 역량이 크게 갈라져 풀어졌고 따라서 타안(朵顏)-올량합부(兀良哈部)라는 이 이름은 점차 후대에 이름이 전해지지 못하고 마침표를 찍었다. 후금(後金) 일어났을 때, 내객이객(內喀爾喀)의 다섯 악탁극(鄂托克, 곧 부락을 뜻함) 중에 「아착(我著)」이 바로 그 남은 것이다.
역사 기록
명(明)나라와 같은 시기에 살던 몽고인은 당시의 몽고칸국(蒙古汗國)을 통칭 「도심(都沁)·도이본(都爾本)」이라고 불렀으니 곧 사십사만(四十四萬) 몽고와 위랍특(衛拉特) 부락이다. 그리고 한때 명조(明朝)에 귀순해 붙었던 올량합 삼위(兀良哈三衛)을 보기를 적으로 보아서 엄답칸전(俺答汗傳) 들의 책 안에서도 이들을 「산양만호(山陽萬戶)」라고 부르고 있다.
앞부분은 명사(明史)에서 일컬은 말이고 괄호 안은 몽고사서(蒙古史書)에서 일컬은 말이다.
달단(韃靼) (「Döchin Mongol」,사십만호 몽고 四十萬戶蒙古)
와랄(瓦剌) (「Dörvön Oirad」,사만호 위랍특 四萬戶衛拉特)
올량합(兀良哈) (「ölge yin ǰirγuγan mingγan öǰiyed」,산양 육천 오제섭특 山陽六千烏濟葉特)
兀良哈三衛
兀良哈三衛又稱朵顏三衛,由朵顏衛、泰寧衛、福余衛組成,位於大興安嶺以東地區和遼西走廊的西北一帶。元朝滅亡後,塞北的兀良哈三衛與韃靼、瓦剌等組成明初蒙古諸部的三大部落[註 1]。也稱為烏濟葉特(蒙古語:ᠦᠵᠢᠶᠡᠳ,鮑培轉寫:öǰiyed)[註 2]。明朝所稱的兀良哈與分布於蒙古肯特山的兀良哈萬戶不同。
背景
14世紀中葉的蒙古高原東部,即大興安嶺以東,直到女真地區,北抵黑龍江流域,南臨西拉木倫河的廣大地域,在這些地方有不少游牧部落活動。成吉思汗曾把大興安嶺以東的部分地區分封給其幼弟鐵木哥斡赤斤和侄兒額勒只帶(或譯按赤台,合赤溫之子),作為他們的兀魯思[註 3]。額勒只帶的兀魯思主要是由兀良哈和乃蠻餘部組成;鐵木哥斡赤斤的兀魯思主要是由兀者(森林部落)組成。
蒙古人稱朵顏衛為兀良哈、泰寧衛為翁牛特、福余衛為烏奇葉特。這是因為朵顏、泰寧和福餘三衛的首領分別源於兀良哈(烏梁海,者勒蔑後裔)、翁牛特(元代「東道諸王」,鐵木哥斡赤斤後裔「往流」諸部)和烏奇葉特(蒙古化的通古斯語諸部「兀者」)三部。因朵顏衛最為強勢,明朝也往往把三衛統稱為朵顏〈等〉三衛,把朵顏、泰寧和福餘三衛的駐地統稱為「兀良哈」。
元順帝妥懽帖木兒被朱元璋從大都趕回到蒙古高原後,這一地區的蒙古各部落,為保衛自己的領地,防止明軍的進攻,進行了積極的防禦。當時,木華黎後裔納哈出將軍統領20萬蒙古軍,駐紮在遼河以北的金山(今吉林省雙遼市境內)到龍安(今吉林省農安縣)、一圖河(今伊通河)、亦迷河(今飲馬河)一帶,成為上述蒙古各部的防禦屏障。
1387年(明洪武二十年),明朝派遣馮勝、傅友德和藍玉等率領20萬大軍繞道慶州(今內蒙古巴林右旗境內)包圍了納哈出軍隊駐地。納哈出被迫投降。1388年末代北元皇帝脫古思帖木兒在捕魚兒海(今蒙古貝爾湖)被明藍玉的軍隊擊敗西走。這些重大的軍事失敗,使得大興安嶺以東的蒙古諸部落失去了防禦屏障,北元滅亡之後,遼王阿札失里等人在明朝大軍壓境之下,只得歸附了明廷。
1389年(明洪武二十二年),明廷在這一地區設置了羈縻性質的朵顏、泰寧和福餘三衛。朵顏衛在屈烈兒河(今內蒙古興安盟歸洮河)上游和朵顏山(今內蒙古扎賚特旗境內)一帶;泰寧衛在塔兒河(今洮兒河)流域,即元代泰寧路;福余衛在嫩江和福余河(今烏裕爾河)流域。同時,明廷授封三衛首領以各級官職,進行籠絡和羈縻。明廷封阿札失里為泰寧衛指揮,塔賓帖木兒為指揮同知;海撒男答溪為福余指揮同知;脫魯忽察兒(脫兒火察)為朵顏衛指揮同知。明廷要求他們「各領其所部,以安畜牧」[2]。然而在蒙古本部的也速迭兒和其部臣安達納哈出興起後,三衛又投向蒙古一方,被明軍追剿。
1399年(明建文元年),明朝發生皇室戰爭,史稱「靖難之役」。朱棣在發動「靖難之役」前,藉助兀良哈三衛蒙古人的支持,挫敗了鎮守大寧衛(衛治在今赤峰市寧城縣)的寧王朱權。後來,他又向兀良哈三衛借用三千名騎兵,作為其「靖難軍」的精銳部隊。1402年朱棣即位後,作為對助他一臂之力的蒙古部落的回報,明成祖在永樂年間重新設置兀良哈三衛,他還封三衛首領以都督、指揮、千戶和百戶等職;決定在開原、廣寧兩地開設互市,供兀良哈三衛與明朝進行貿易活動。而隨著大寧都司的內遷,三衛也逐漸南下游牧(今承德縣、平泉市、建昌縣以及老哈河流域)。
不過,明成祖的允諾後來並沒有完全兌現,明朝不允許三衛蒙古人南遷到大寧地區駐牧。兀良哈三衛各部,為了獲得大寧地區的駐牧權,聯合了當時頗為強大的阿速特部首領阿魯台,不斷向明朝發起進攻。1422年-1424年明成祖連續三次御駕親征,攻打阿魯台,並重創了兀良哈三衛。但兀良哈三衛為了爭得大寧地區,並沒有因此而放棄與明朝的抗爭。不久,他們揮師南下,進入灤河流域駐牧。1428年,他們又進入大寧城舊地,並經會州(今河北平泉市)抵寬河(今河北瀑河)。在這裡,兀良哈三衛與明宣宗親率的三千騎兵進行了激戰,但以失敗告終。
南遷
15世紀30年代後期(明宣宗宣德末年和英宗正統初年),伴隨著明朝國力的漸微,兀良哈三衛部落從西拉木倫河到遼河流域全面向南推進。到了15世紀的40年代,西蒙古的瓦剌勢力逐漸壯大,對明朝形成了巨大威脅。而此時已占據興和重地的兀良哈三衛,再也不聽命於明朝,而是臣服於瓦剌人。1449年7月1日(明正統十四年),瓦剌部首領、執掌「四十四萬蒙古」大權的也先太師率三路大軍發動了對明朝的戰爭。這場戰場與其說是明朝與瓦剌的戰爭,不如說是明朝與「蒙古部落聯盟」的戰爭。瓦剌的南侵大軍共分三路,一路是由被瓦剌征服的傀儡蒙古大汗脫脫不花率領,進攻明朝遼東地區;一路由瓦剌阿剌知院率領,主要包括部分瓦剌軍以及兀良哈三衛軍,進攻明朝軍事重鎮宣府(今河北省張家口市);最精銳一路是也先親自統領的中路軍,攻擊明朝的軍事重鎮大同。戰端一開,長城沿線烽火綿延,九邊重鎮自朱棣去世後二十多年的短暫安寧被徹底打破。這場土木堡之變是明朝和蒙古的軍事力量對比的轉折點,也使得兀良哈三衛與明朝的關係從根本上發生了改變。
15世紀中期之後,兀良哈三衛的勢力範圍延伸到了明長城邊外。自此,兀良哈三衛駐牧地分布是:「自大寧前抵喜峰口,近宣府,曰朵顏;自錦〈州〉、義〈州〉厲廣寧至遼河,曰泰寧;自黃泥窪逾瀋陽、鐵嶺至開原,曰福余」[3]。
而女真人在兀良哈三衛的東部另行組成建州三衛,當時朝鮮人亦將中國東北的女真人通稱為「兀良哈、兀狄哈」,均源於對森林部落「兀者」(也稱「窩集」)的稱呼。
結局
16世紀中期,蒙古大汗達賚遜率領蒙古左翼察哈爾和喀爾喀兩個萬戶東遷到朵顏衛所在地區駐牧,標誌著當時蒙古政治中心的轉移。進入朵顏地區後,內喀爾喀與當地部落彼此聯姻,也表明了兀良哈三衛諸部與蒙古汗廷建立起來的密切關係。
在同一時期,右翼土默特萬戶、永謝布萬戶以及鄂爾多斯萬戶也相繼進入朵顏地區,並於當地建立了聯姻關係。結果出現「人滿為患」的情況,使得福余衛再次遷移,其中一部分遷移到了兀剌江(又稱混同江,發源於長白山的第二松花江)畔,其餘的遷入到了朵顏衛居住的西拉木倫河以南的哈剌塔剌、小興州等地居住;泰寧衛也東遷至小興州和克里屈勞等地居住。
瓦解及殘餘
朵顏-兀良哈部與土默特、喀喇沁、察哈爾等部的聯姻、交往的結果,就是使其自己走向一分為三。與土默特交往密切的那一部分就歸了土默特(以及蒙古貞);與喀喇沁交往密切的那一部分就歸了喀喇沁;與察哈爾交往密切的那一部分就歸了察哈爾。就這樣到了明末,其力量大大分解,從而朵顏-兀良哈部這一名稱逐漸終止傳世。後金興起時,內喀爾喀五鄂托克中的「我著」即其殘餘。
歷史記錄
明代同時期的蒙古人將當時的蒙古汗國統稱為「都沁·都爾本」,即四十四萬蒙古和衛拉特部落,而將一度歸附明朝的兀良哈三衛視為敵人,在《俺答汗傳》等書中也稱之為「山陽萬戶」。
前面為《明史》稱謂,括號內為蒙古史書稱謂[4]
韃靼(「Döchin Mongol」,四十萬戶蒙古)
瓦剌(「Dörvön Oirad」,四萬戶衛拉特)
兀良哈(「ölge yin ǰirγuγan mingγan öǰiyed」,山陽六千烏濟葉特)
注釋
1 明朝雖然冊封其首領為羈縻衛的官員,但三衛自洪武年間就開始時降時叛,倒向蒙古汗廷一邊,實力上也遠不能與蒙古東西兩大部相比,16世紀中期,自察哈爾東遷後朵顏三衛被融合到左翼三萬戶中,三衛僅存名義[1]
2 《蒙古黃金史綱》作「兀者」,與兀良哈三衛關係密切的「兀者」駐牧於大興安嶺以東(福余衛亦自稱「兀者」),統率6個千戶,故統稱「六千烏濟葉特」,「特」(d)為蒙古語的複數詞綴。《俺答汗傳》作「烏濟葉特國」(öǰiyed uls),《水晶念珠》誤作「烏濟㰅特」。
3 兀魯思(uls):蒙古語「人民、份地、國家」之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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